지난 세기 80년대초, 그때까지 나는 단 한번도 누구를 상대로 한어로 대화라는 것을 해본 적도, 해볼 수도 없었다. 이런 내가 열시간도 넘게 기차를 타고 연변을 쑥 벗어나 머나먼 사평시를 향해 대학교로 가는 길에 올랐다. 그때의 그 막막하고 불안했던 심정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 나는 줄곧 조선족들만 사는 시골에서 나서 자랐고 고중까지 한어를 배우기는 했어도 책으로만 읽고 썼을뿐 제대로 대화라는 것은 해보지 못했었다. 상점이나 시장에 가 물건을 살 때면 간혹 한족사람들을 만나는데 내가 사고픈 물건을 가리키면서 “쩌거...” , “너거 ...”하며 어수룩하게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들이 알아서 “알았다. 이게 좋다.”하면서 조선말로 상대해주군 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내가 연변에서 고중을 졸업하고 대학교에 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한족들과의 접촉이 시작된 것이였다. 시초 피하고 싶고 불안하던 마음이 나중에는 그들과 서로 의지하면서 다정한 친구 사이가 되여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엮기도 했다.
처음 대학문에 들어서 보니 우리 반급은 정원 40명 중에 조선족은 4명, 그나마 녀학생은 단 2명이였다. 말 그대로 수영도 배우지 못하고 물에 내던져진 격이였다. 살기 위해서는 허우적거려야 했다. 우선 먹는 문제가 시급했다. 학교 식당에 가서도 메뉴판에 씌여 있는 대로 료리 이름을 하나 찍어 속으로 여러번 되뇌여본 후 내 차례가 오면 성조와 발음에 모진 신경을 쓰면서 이름을 말했다.
수업이 시작되니 애로는 아예 상상밖이였다. 교원들은 강의안 하나 들고 들어와서는 한시간 동안 끊임없이 강의를 하고 학생들은 마치도 기요원들마냥 그냥 교원의 강의를 따라 적는 것이였다. 아직 귀가 열리지 않아 알아듣는 일만 해도 기막히게 어려운 판에 필기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러다간 내가 이 대학을 다 읽어낼 수 있기나 할가? 회의가 들고 조급증이 치밀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짝궁 친구 신세하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괜찮다고 차츰 적응해보라고. 자기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대략 이런 뜻으로 말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고맙다는 말만 하고 한탄이나 하듯 한숨을 쉬니 이번에는 쪽지에 글로 써서 자기 의사를 보내왔다.
그때부터 나와 그 친구의 쪽지를 통한 대화가 시작되였다. 신세하와 익숙해지면서 나는 그 앞에서 차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 말투나 발음이 당시로선 그렇게 어색하고 이상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늘 평온한 표정으로 내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들어주면서 바로 지금처럼 이렇게 말하면 된다고 격려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와 신세하는 식당에 가나 도서관에 가나 그림자처럼 붙어서 다녔다.
도서관에 가서 나란히 앉으면 친구는 낮에 필기한 강의내용들을 그대로 나에게 넘겨주었다. 난 그것들을 받아 한글자도 빠뜨릴세라 필기장에 옮기였다. 이렇게 한 학기를 보내고 겨울방학이 끝나 다시 개학이 되여 그 친구와 숙사에서 만났는데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친구를 붙잡고 벌써 왔냐, 방학에 뭐 했냐, 난 길에서 어쩌구저쩌구 하는 얘기를 하는데 나를 멀거니 쳐다보던 신세하가 “아이야마야, 네가 왜 갑자기 이렇게 말을 잘하느냐?” 하면서 자기가 오히려 퐁퐁 뛰는 것이였다. 이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허물없는 사이가 되였고 나의 한어 수준도 점점 제고되여갔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연변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자친구가 있는 길림에 배치받았다. 나의 단짝 친구 신세하는 남자친구와 함께 송원시에 분배받았다. 우리는 처음에 모두가 직장에 발을 붙이고 가정을 이루고 애들을 낳아 키우느라 별로 모임도 가지지 못했다. 어쩌다가 외지에서 동창들이 오면 부랴부랴 음식점에서 만나 그간 지나온 얘기들을 잠깐씩 주고받다가 헤여지기가 일쑤였다. 후에 애들도 크고 서로가 직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면서 우리의 만남도 잦아지기 시작했다.
한 시내에 있는 동창들과 함께 식사도 하고 수다도 떨며 나의 한어 발음도 바르게 고쳐주군 해서 나는 주위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한어말을 잘한다는 인정을 받군 해서 어깨가 으쓱해질 때도 있었다. 연변에 가서 택시에 오르면 기사들이 나를 한족으로 착각하는 일도 있었다. 동창생이라서 그런지 우리는 모일 때마다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아무런 무람도 없이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서로간의 정을 돈독히 했다.
몇해전 우리는 대학교 졸업 30주년 동창모임을 길림시에서 가졌다. 저녁 오락만회에서 제비뽑기로 조장을 뽑기로 하였는데 행운스럽게 내가 당첨됐다. 내가 아주 류창하게 한어로 의사를 표달했더니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심지어 이튿날 아침 식사 때 조선족 녀동창생 미순이는 나보고 발언고를 미리 준비했는가고 물었고 다른 한족 녀동창생들도 네가 발언을 제일 멋지게 했다고 엄지를 내밀었다. 한어말을 못해 쩔쩔매고 옹송그렸던 내가 반급의 여러 동창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오늘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력사과목을 통용언어인 한어로 수업할 것을 요구했을 때 내가 배짱좋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동창들이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할 때 나는 이런 감격스런 마음을 이런 기회에 꼭 한번 제대로 전하고 싶었다. 나는 단짝 친구 신세하며, 길림시의 동창생들이며, 그리고 알게 모르게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반급 친구들에 대한 감사를 일일이 문자로 작성하고 머리속에 기억해두었다가 동창생들에게 전했다. 신세하는 그날 내손을 붙잡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 한어말을 두마디도 못해서 쪽지로 대화를 하던 네가 하면서 말이다. 길림시에서 정이 들 때로 들어버린 주위도 황대공이도, 소혜영이도 그리고 후에 길림시에 와서 사업한 진계매도 아낌없이 칭찬을 해주었다. 그러는 그들에게 나는 이 모든 것이 다 그대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길림시에서 산지도 이젠 30년이 훨씬 넘는다. 김장철이면 인젠 김치보다 쏸차이(酸菜)를 더 담구기도 한다. 닭알을 도마도와 함께 볶는 료리는 내가 좋아하는 메뉴중 하나로 되였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마음이 따뜻한 동창생들이 있어서 뒤심이 든든하고 행복하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잘난 사람보다 따뜻한 사람이 좋고, 멋진 사람보다 다정한 사람이 좋고, 훌륭한 사람보다 편안한 사람이 좋고, 겉모습이 화려한 사람보다 마음이 고운 사람이 좋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을 열면 행복이 들어온다. 길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말라고 항상 내곁의 좋은 친구들한테 감사하고 나누면 배로 커지는 행복을 누리면서 남은 인생을 살려고 한다.
/김숙자(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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