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엔=전상중 국제펜클럽 회원, 예비역 해군 제독] 9월12일에 이어 두 번째 지진이 일어난 바로 이튿날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국제PEN 경주대회 겸 제2회 세계한글작가대회가 막을 올렸다. 3박4일간 계속된 올해 대회에는 모스크바예술상·톨스토이문학상 등을 수상한 현대 러시아의 대표적인 소설가인 고려인 3세 아나톨리 김을 비롯해 중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모옌, 198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인 예자오옌 등이 참석했다.
한국에선 신달자·유안진·유자효·이근배·김홍신 등이 함께 했다. 18개국에서 84명이 연사로 나설 만큼 제법 큰 국제행사였다. ‘한글과 한국문학’을 함께 토론하는 국내외 유일한 한글문학대회인 이번 대회 주제는 ‘한글문학, 세계로 가다’였다. 대회기간 참석자들은 문학인의 소명을 재확인하고, 민족어의 풍요와 세련을 위해 공동 노력하자고 입을 모았다.
국제펜클럽 정회원으로 수필가인 전상중(68) 예비역 해군제독이 아나톨리 김(77) 작가를 만나 특별대담을 나눴다. <매거진N>은 두 사람의 대담을 독자들께 소개한다. 특별대담은 아나톨리 김이 21일 오전 세션에서 ‘언어와 문학-인류의 과거와 미래의 열쇠’란 주제로 특별강연을 마친 직후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됐다.
아나톨리 김은 전상중 수필가가 자신을 해군제독 출신이라고 소개하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자신의 문학관과 세계관 그리고 민족의식 등을 때론 나지막히 때론 우렁차게 펼쳤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다. 통역은 모스크바대 출신으로 한국외대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있는 김수희 교수가 맡았다.<편집자>
전상중: 지진의 진원지 경주에 와보니 삶의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고 고장난 인생을 수리하는 게 문학인데, 여기 오는 것에 우물쭈물한 것이 부끄러웠다.
아나톨리 김:지진 위험에 노출된 경주시민들이 용기와 희망을 갖길 바란다. 문학과 언어를 놓고 토론할 수 있는 이런 자리가 마련돼 기쁘다.
전상중:언어와 문학을 통해 고통을 이겨내며 희망찬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나톨리 김:문학의 현실은 다들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스스로의 관점을 이야기하지만, 작품이 화제의 중심에 오르면 설전은 멈추고 만다. 그것이 문학의 힘이고 이를 통해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전상중:이념과 윤리·도덕이 실종된 지금, 문학 그리고 문학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아나톨리 김:19세기 독일을 구한 피히테를 보라. 그는 초등교육을 중심으로 온국민에게 정신운동을 펼치며 나라를 구했다. 바로 피히테와 같은 역할을 우리 문인들이 해야하는 것 아닌가 싶다.
전상중:해외동포로서, 그리고 러시아 이주 3세로서 선생님의 한국과 한국어 사랑은 남다르다고들 한다.
아나톨리 김:나의 뿌리는 한국이며 한국어다. 언어에 영혼을 담아 민족과 국민을 치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문인들의 중요한 역할이고 사명이다.
전상중:선생께서 활동하시는 러시아는 국민들이 억압받거나 고통을 당하지은 않은지 궁금하다.
아나톨리 김:오히려 지금은 일반 민중이 정부를 이끌어가는 경향도 있다.
전상중:아까 말씀하신 문학의 역할 또는 사명에 대해 묻고 싶다.
아나톨리 김:현재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사회뿐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있을 상처마저 치유하는 것 역시 문학의 역할이다. 정신 혹은 혼을 부둥켜안고 함께 가는 것 그것이 문학의 중요한 몫이다. 지금 시대환경 속에서 창작을 좋아하는 사람은 외롭지만 의연히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만큼 우리 문인들의 사명이 중차대하기 때문이다.
앞서 아나톨리 김은 이날 특별강연에서 “우리 인생을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쉼 없는 일방통행이라고 여긴다면 문학에서 과거의 일들을 되살려 저술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형 동사가 지배하고 있는 지나간 삶에 대한 향수의 잔인한 권력에서 해방되려면 지금보다 더 완벽하고 더 넓어져야 한다”며 “그것도 우주적으로 완벽하고 넓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아나톨리 김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실존적 범위 내에서 우리의 ‘삶 이전의 삶’과 ‘현재의 삶’을 결합시켜 ‘삶 이후의 삶’에 지속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전상중 수필가는 이날 <붉은 수수밭>으로 잘 알려진 중국의 모옌 작가(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만났다. 전 수필가는 모옌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사람들은 내 작품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내가 받은 노벨상에만 주목합니다. 내면에 대해선 모른 체 하며 외형에만 온통 신경을 쓰니 창작할 의욕이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때론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구요. 그래도 낙담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래도 용기를 낼 수밖에요. 언어에 영혼을 심는 일, 우리 문인들의 숙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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