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 김택
300t 프레스 3호기에
손목 잘려 중국으로 돌아간
리아저씨 일하던 그 자리에
오늘은 내가 서있다
비린내 묻은 바닥 닦아놓고
원주인을 그려보며
범 아가리 같은 기계 앞 그 자리에
오늘엔 내가 서있다
네 손가락에 기름때 가득 묻고
식지만 하얗게 그대로인 장갑
그런 면장갑 끼고 그 자리에
오늘은 내가 서있다
쿵쿵 뛰는 마음을 달래며
언젠가 또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 서있을 자리에
오늘엔 내가 서있다.
바나나
□ 신현희
젊었을 땐
떫은 맛으로 사납더니
철이 들어
속부터 익는구나
혀 끝에 감도는 맛
하늘을 찌르는 조각달이구나.
민들레꽃
□ 신현산
엄마는
어느 따뜻한 봄날
새끼들을 다 떠나보내고
빈
꽃대궁 속에서
바람으로 울었다
쓰디쓴 눈물이
잎에서 또 잎으로
다시 뿌리까지 흘렀으니
우리 식솔들은
올봄에도 그 이야기를
곱씹고 있다.
수선화 나의 수선화
□ 홍연숙
수선화와 처음 만나는 날
그 참된 뿌리를 위해
내 족욕통을 내여주었다
플라스틱이나 도자기에
그 진실한 뿌리를 담그는 건
욕이 될 것 같아서였다
오로지 편백으로 된 내 족욕통이
그 것만이 근사해보였다
그리하여 지금
수선화,
너의 숨결이
내 발가락들을 간질이고
내 혈관을 따라
가슴의 계단을 따라
올라오며
올라오며
마침내
찌르르 찌르르
어느 벌레의 울음소리로
화하고 있는 줄을
나는 온몸이 귀가 되여
듣고 있거늘
그 사연을 네가 아느냐.
꽃샘추위
□ 변창렬
별이 꽃으로 쏟아지다가 얼어서
바람으로 떨고 있는 봄이다
꽃잎 하나는
별이 되고 싶어
꽃살을 간추리고 울 때
별들도 꽃의 빛을 만들고저
눈만 깜박이고 있거니
꽃이 어떻게 별을 알겠나
찬바람은 마지막 채찍을
들었다놨다 윽박지르며
흘기는 눈초리가 무섭다
꽃들의 색갈을 조각하고 싶은
꽃샘추위는
별과 꽃의 거리를 재다가
봄이란 걸 잊었나봐
꽃이 별로 닮아가는
오늘 밤에는
봄이 살얼음 깨고말거다.
강 물
□ 김다정
당신을 떠올리면
어느덧 촉촉해지는 꽃망울
당신을 위해
꽃은 피고 또 지고
새는 울고 또 날고
야속한 당신은
그리움만 남겨놓고
무심한 강물 되셨네요
흐르는 음악이 되여
당신 뒤를 한사코 쫓는데
들리시나요
가여운 바이올린
조용히 어깨 들먹이는 소리
당신을 떠올리면
안개처럼 먹먹해지는 이 마음.
생 존
□ 박수산
갑자기 척추 부위가 근질거렸다
민망하지만 오른손을 꺾어 더듬었다
내 것이 아닌 무언가가 손끝에 걸린다
수술 때 주사자리에 붙여놓은 반창고였다
혈관에 꽂았던 바늘 자리 막고 있어
반창고 중심에는 혈연이 벌겋다
보이지 않아서일가
며칠째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
버젓이 내 것으로 붙어있다니
단 한번이라도 손해 볼가봐
악착만으로 치켜세운 어제날
지나가는 바람에도 날을 세웠다
말라버린 혈연을 바라보노라니
어쩌면 관용에 발을 묻고
남의 것도 받아들여야
빠져나가는 내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깨달음의 순간이다.
겨 울
□ 김재연
하늘하늘
꽃송이 내려와
옷섶 사이로
바지가랑이 사이로
겨울이 들어와
똬리를 튼다
시퍼런 한기가
발톱 세워
령혼이 움츠려지고
한번 여밀 때마다
한발 다가오는
불청객
내 인생
추웠던 시절.
상춘객
□ 성해동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그 속도만큼이나
멀어지는 그 거리만큼이나
이 내 그리움이
산책할 수 있는 딱 그만큼에
당신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가다 앉아 한가득
추억을 캐서
보퉁이에 싸서
당신께 다가가면
소소리 바람에 밀리는 봄해살을
허둥지둥 뒤쫓다 벗겨졌나
당신의 고무신이 지천이다
당신의
그 연분홍 미련만 아니라면
나도 이른 봄 꽃샘 추위에
여의도까지 오지 않았으리라
당신이라는 벚꽃길을 걷노라니
계절이 아니라 내게 있었군요
꽃이지는 것과 떨어지는 그 차이
봄 봄 봄은
정녕
마음에서 먼저 시작하나요.
달
□ 신명금
새까만 빈자리
금 그어 놓고
눌러담은 세월
삶의 여백 속에
굳어버린 아픔을
손톱눈에 달아
불태운다
밝은 빛 끌어다가
그 속 채우려면
아직 얼마나
얼마나 가야나
질긴 밤 짓씹어
새김질하는
못난 초승달.
목 련
□ 허순금
겨우내 노릿한 비단 속살
푸른 담요에 겹겹이 싸여
단잠 자는줄 알았더니
명상 속에 겹겹이 벗어버리고
해볕에 색바래지고
바람에 할퀴여
낡아버린 한두 장의 담요사이
가부좌를 풀면서
흰 붓끝으로 열린다
맑고 청명한 봄 하늘에
연(缘)으로 왔음을
련(莲)으로 피여 알린다
속세의 바람결에
맑았던 얼굴 찌든 눈물 자국으로
후둑후둑 슬픔으로 졌어도
은은한 솔내음향기 맑기만 하다
인생은 뜬구름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뒤안길로 사라지나니
가슴에 솔잎 향기 품고 살다 가라 한다.
가을 녀인
□ 리용길
여름이 저물어가는
언덕 우에서
이름 모를 녀인이
가을을 줏는다
산들바람에 고개 떨구고
속살이 꽉 찬 탱글탱글
여문 가을을 줏는다
세월을 줏는다
살랑살랑 지나가는 세월은
인생이란 그릇에 넘쳐난다
이 나이에 세월을
주어서 행복하단다
타향에서 세월이란
쉼없이 흘러가는 추억이다.
연변일보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