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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천상병 시인이 1991년 서울 인사동 한 주점에서 막걸리를 들이키고 있다. 막걸리 한 사발로 끼니를 대신하고 했던 그에겐 밥이 따로 없었다. [중앙포토]
막걸리는 술이지 밥은 아니다. 하나 천상병(1930~93) 시인에게는 막걸리가 밥이었다. 그는 밥 대신 막걸리를 마시는 일이 많았다. 크게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다. 술을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로 언제고 살짝 취기가 든 듯한 모습이었다.
충치도 심해 뭐든 삼키듯 먹어
부인의 인사동 귀천이 안식처
근처 남원집 국밥은 그에겐 특식
1000원, 2000원 정액제 구걸 유명
그 돈으로 책도 사고 술도 마셔
그의 시처럼 하루 막걸리 한 병
종일 마셔 크게 취하지는 않아
수락산 밑에 살던 천상병은 버스를 타고 서울을 왕래했다. 하루종일 서울의 어딘가를 배회하였는데 말년에는 부인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하는 인사동의 귀천이 쉼터가 됐다. 귀천을 경영하기 전인 80년대 초반, 목 여사는 대학로 학림다방 가까이에 있었던 찻집 까치방의 일을 도와 주고 있었다. 천상병은 자신의 시집 ‘주막에서’를 판매용으로 까치방 카운터에다 비치해 놓았다. 어느 해 겨울 저녁 낡은 외투 차림의 천상병이 찻집으로 들이닥쳐 자신의 시집을 세기 시작했다. 갑자기 부인에게 고함을 쳤다. 어제 두 권이던 시집이 어째 오늘 도로 세 권이 되었냐고. 팔리기는커녕 누군가가 사간 시집을 도로 물렸던 것이다. 마침 찻집을 찾았던 천상병의 마산고 후배인 H가 시인을 알아보고 소동도 잠재울 겸 그를 끌고 근처의 막걸리집으로 모셨다. 당시의 대학로에는 허술한 막걸리집이 많았다. 주모는 천상병을 보자마자 문전박대했다. 돈을 거의 내지 않은 탓이었다. 누항의 주모에게는 초라한 행색만 눈에 들어왔을 뿐, 행색 뒤에 숨은 큰 시인의 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을 터. 친구가 사준 맥주 20년 지나도 고마움 표시
생전의 천상병 시인. 그는 막걸리를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했다. [중앙포토]
천상병은 자신의 시집이 도로 세 권으로 된 분함을 막걸리 몇 잔으로 풀었다. 그리고 어린애처럼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천상병은 미술평론가인 이일(1932~97)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함께 활동하던 동년배 시인이었다. 천상병은 서울대 상대, 이일은 서울대 불문학과 학생이었다. 이일이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던 60년대의 어느 날 저녁, 명동에서 우연히 만난 천상병에게 맥주 한 병을 대접했다. 막걸리로 일관하던 젊은 날의 천상병에게 맥주는 황송한 귀물이었던 것. 그 고마움을 천상병은 20년 동안이나 기억하고 있다가 그날 밤 꺼내어놓았다. “H야, 내일 학교에 가거든 이 말을 이일에게 꼭 전해 주라, 그때 이일이가 사준 맥주가 너무 맛있었고 고마웠다고.” 감사함을 아는 다정다감한 천상병이었다. 그런데 그걸로 끝날 천상병이 아니었다. 술집에서 큰길로 나오자 H의 여자친구를 슬쩍 따돌린 다음 H에게 만원을 요구했다. 심상이라는 잡지사에서 받기로 한 원고료로 친구들에게 술을 한잔 사기로 했는데, 원고료는 못 받았고 친구들은 혜화동에서 그의 등장을 마냥 기다리고 있으니 마음이 탄다고 했다. “H, 이건 어디까지나 빌리는 거야. 내일 우리 마누라에게 가면 만원을 분명히 돌려줄 거야” 하며 웃었다. 돈을 받은 천상병은 어둠 속으로 신나게 사라졌다. 굳이 부인을 찾아가 돈을 받아 낼 일이 아니라는 건 H도 이미 알 만한 나이였다. 천상병의 구걸은 유명하다. 천원 아니면 이천원 정액제였다. 그것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요구한다. 천상병에게는 현금지급기나 마찬가지인 김인 국수가 어느 날 천원을 못 주겠다고 했다. 자신은 대한민국 바둑의 최고봉인 국수인 만큼 오늘부터 천원이 아니고 이천원으로 올리면 주겠다고 했다. 천상병이 김인을 한참 노려보다가 왈 “어이, 김인이. 까불지 마라. 넌 아직 천원짜리밖에 안돼 !” 둘은 호쾌하게 웃었다. 천상병은 자신이 구차하게 돈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형편을 봐줘서 받아 주는 것이고 그만큼 호의를 베푸는 것이라고 편하게 생각했다. 어떤 술자리에서는 천원짜리를 몇 장 꺼내어 놓고 세기 시작한다. “만원이 되어야 무슨 전집을 사는데 딱 이천원이 모자라네” 하며 센 돈을 또 센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빨리 이천원을 채워 주어야 한다. 천상병의 구걸 퍼포먼스는 언제나 유쾌했다. 모두가 재미있어 했다. 여러 사람들에게 수금한 돈으로 천상병은 책도 사고 막걸리도 마셨다. 인사동에는 막걸리를 마실 데가 많았다. 천상병은 가게 앞에서 마실 때도 있었고 탑골공원 뒤 국밥집, 낙원상가 지하, 남원집을 찾기도 했다. 취기 살짝 오르면 기염 토하며 호언장담
생전의 천상병 시인. 그는 막걸리를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했다. [중앙포토]
귀천은 인사동 큰길의 천일사 부동산 옆 안쪽에 있었다. 골목 비슷한 길인데 들어가자마자 왼편으로 귀천이 있고 그걸로 길은 막힌다. 80년대의 인사동에는 관광객이 별로 없었다. 대신 화가와 문인들이 인사동의 주인이었다. 화가들과 문인들에게 귀천은 사랑방이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귀천에서 소식을 주고받았다. 천상병이 그렇듯 귀천에 오는 단골 중에는 디오게네스풍이 많았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공예문화를 번역한 거리의 철학자 민병산이 딱 그런 풍모였다. 중광, 이외수 등도 귀천을 찾았다. 80년대 말이 되자 사람들이 먹고 살 만해지면서 비주류 문화인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천상병도 방송을 탔다. 팬들이 급증했다. 팬들이 사인을 받으러 천상병 시인이 쉬고 있는 귀천을 찾아왔다. 대여섯 사람이 앉으면 꽉 찰 정도로 귀천은 좁았다. 귀천의 좁은 공간이 감당치 못할 지경이 되면 천상병 일행은 남원집으로 갔다. 남원집은 인사동 큰길로 나와 한 칸 아래 골목 끄트머리에 있었다. 귀천에서 가까웠다. 천상병은 남원집의 국밥을 좋아했다. 그는 동백림 사건 때의 고문 후유증과 충치로 치아가 부실했다. 뭐든 삼키듯 먹었다. 막걸리가 끼니인 천상병에게 국밥은 특식이었다. 남원집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갔다. 남원집의 소미선 사장은 천상병을 존경했고 천상병도 남원집에 가면 마음이 편했다. 천상병 혼자서 와도 누군가가 동석이 되어 주어 결국 여러 사람이 상을 함께 하는 형국이 되었다. 계산을 하는 둥 마는 둥해도 좋았다. 몸이 아프고 나서는 일주일에 한 번을 겨우 왔다. 국밥은 국물만 건성 먹고 남원집 할머니가 담근 동동주에 열심이었다. 어디에서고 천상병은 취기가 살짝 오르면 기염을 토했다. 천상병의 말은 알아듣기가 힘들다. 경상도 사투리에다 치아가 부실하여 발음이 샌다. 입가에는 버캐인지 막걸리 찌꺼기인지가 잔뜩 끼어 있다. 그는 속삭임을 몰랐다. 큰소리의 고함뿐이었다. 의미의 전후가 서로 잘 연결되지 않는 화법을 구사했다. 감으로 두드려 잡으며 이어가는 기막힌 대화였다. 그는 호언장담과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백만원이나 모았으니 그 돈으로 부인과 여행을 가야겠다거나, 화가를 보면 당신의 그림을 화랑에 소개하여 다 팔아주겠다는 등.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 자리가 즐거울 뿐이었다. 마산중 담임 김춘수 주선으로 문예지 추천 천상병은 소확행의 실천자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싸구려 선글라스를 하나 걸치고 나타나면 인사동이 시끄럽다. 아는 사람들을 붙잡고 선글라스 예찬론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선글라스를 끼면 세상이 전혀 달라 보인다는 것. 너무나 멋진 세상이 나타난다는 것. 더불어 선글라스를 낀 자신이 엄청 미남이 되었으니 봐 달라고 애교를 피웠다. 선글라스 같은 소품 하나에도 천상병은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경남 창원 진북 출신의 천상병은 소년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해방이 되자 마산중학교(마산중고교)로 편입했다. 당시 마산중학교에는 김춘수, 김남조 등 시인이 많았다. 천상병이 마산중 재학시 그와 동향인 창원 진전 출신의 권환이 잠시 이 학교의 독일어 임시강사를 맡았다. 교토제대 독문과를 나온 권환은 카프를 이끈 거물급 문인이었다. 풍부한 감성의 천재소년 천상병은 이런 환경 속에서 조숙한 시인이 되었다. 마산중 5학년 때인 1949년 담임인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됐다. 1952년 정식으로 등단했다. 천상병은 서울대 상대를 다닌 엘리트였지만 출세코스를 포기하고 거리의 시인이 되었다. 늦은 나이에 배려심이 깊은 부인을 만나 수락산 밑에서 안정을 얻었다. FM 클래식 음악방송과 브람스 교향곡 4번과 막걸리만 있으면 더 이상 부러울 것도 없는 자족의 삶을 살다 갔다. ‘나는 술을 좋아하되 /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 막걸리는 /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 한 홉짜리 적은 잔으로 / 생각날 때만 마시니 /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중략) //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 밥이나 마찬가지다 / 밥일 뿐만 아니라 / 즐거움을 더해주는 /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천상병의 시 ’막걸리‘)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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