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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장연진의 싱글맘 인생 레시피(16)
엔도 도시히코 교수는 양육자의 존재가 아이들에겐 중요하지만 엄마가 아니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며 "어린이는 의외로 늠름해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며 자란다"고 말했다. [사진 pixabay]
부모와 자식 관계를 연구하는 엔도 도시히코 도쿄대학 교수가 양육자의 존재는 어린이의 심신 발달에 중요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엄마가 아니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며 한 말이 있다. “어린이는 의외로 늠름해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자란다.”
신문 기사로 그 대목을 읽는데 둘째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 떠오르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더불어 아이들은 생각보다 현실적이고 개방적일뿐더러 스스로 존엄성을 지키려 한다는 사실도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엄마, 아빠와 이혼한 거 맞아?" 그날 아침 둘째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혼했어?”가 아니라 “이혼한 거 맞아?”라고 묻는 말에 바로 전날 추석에 제 사촌으로부터 무슨 소릴 들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올 것이 왔구나! 아빠가 사업차 부산에 장기 출장 가 있다는 내 하얀 거짓말이 5년 만에 들통 나는 순간이었다. ‘거짓말이 외삼촌보다 낫다’고 했던가. 이혼할 때 첫째는 중2라 그나마 이해를 구하기가 쉬웠지만, 겨우 6살밖에 안 된 둘째에겐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둘째가 먼저 울먹거려서일까. 언젠가 아이가 사실을 눈치채고 묻는 날이 올 거라는 생각에 그 상황을 가정하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대본 연습을 했는데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천장을 쳐다보며 몇 번 눈을 깜빡인 뒤, 그동안 엄마가 거짓말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했다.
그러고는 네가 너무 어려서 충격을 받을까 봐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고, 그래서 네가 좀 더 크고 오빠와 우리 셋 아빠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먼저 보여준 뒤 나중에 말하려 했다고, 거짓말을 한 이유를 솔직히 들려주었다. 그러자 둘째가 저도 모르게 슬픔이 올라왔을 뿐이라는 듯 곧장 눈물을 훔치더니 대뜸 이렇게 묻는 게 아닌가.
이혼 사실을 늦게 알게된 둘째가 제일 먼저 한 질문은 "아빠가 생활비 보내줘?" 였다. 11살짜리 아이가 가장 먼저 먹고사는 문제를 물어볼 줄이야. [연합뉴스]
“아빠가 생활비(양육비) 보내줘?” 부모의 이혼 사실을 몇 년이나 뒤늦게 알아서 그렇다 하더라도, 11살짜리 아이가 가장 먼저 먹고사는 문제를 물어볼 줄이야. 그동안 내가 드라마를 보고 짜깁기한 대본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완전히 깨는 순간이었다. 아빠랑 왜 헤어졌어? 아빠랑 다시 합치면 안 돼? 등 아이는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 따위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럼, 아빠가 누군데!” 나는 별걱정을 다한다는 듯 능청을 떨었다. 각본상 한 번도 연습한 적이 없는 데도 아이와 눈까지 맞추며. 무조건 내 딸을 안심시키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역할이라는 판단에 ‘애드립’이 술술 나왔다. 솔직히 가슴 저 아래에서 쌓인 응어리가 꿈틀댔지만 내 아이에게 정서적 안정만 줄 수 있다면 그깟 억울함 따위 뭐 그리 대수겠는가. 혹시라도 둘째가 궁금하거나 걱정하는 일이 더 있을세라 내친김에 뭐든 다 물어보라고 했다.
“엄마, 재혼할 거야?” 그러자 둘째가 반짝 표정을 바꾸면서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았다. 경계심이라곤 ‘1’도 없는 그 말간 눈망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는 또 혼선이 빚어졌다. 그래서 슬쩍 아이의 눈치를 살피며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진 그럴 생각이 없다고 일단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랬더니 둘째가 뜻밖에도 왜 자기를 신경 쓰느냐며 언제든지 재혼하라고 막 등을 떠미는 게 아닌가! 대신 조건을 달았는데 개를 키울 수 있게 큰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을 가진 ‘부자’ 남자와 결혼하란다. 평소 드라마에서 넓은 잔디밭이 있는 별장식 주택을 보면 우리도 저런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종알거리더니만.
둘째는 왜 자기를 신경 쓰느냐며 언제든지 재혼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대신 개를 키울 수 있게 큰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을 가진 '부자'와 결혼하란다. [사진 pixabay]
차라리 엄마 보고 재혼하지 말라고 하세요, 속으로 중얼거리며 싱긋 웃었지만, 내 딸이 엄마의 재혼을 뜯어말리기는커녕 자신의 소원을 이룰 기회로 삼을 정도로 개방적이고 실리적일 줄이야.
그런데 그날 둘째가 먹인 진짜 충격은 따로 있다. “이건 부탁인데 아빠, 오빠, 다른 친척들한테 지금처럼 내가 엄마와 아빠 이혼한 사실 모르는 거로 해줘.” 의아해서 그 이유를 조심스레 물었더니, 아이가 갑자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눈에 힘을 주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위로받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듣는데 둘째가 금세 눈물을 닦은 뒤 애어른처럼 생활비부터 챙긴 이유를 번득 알 것 같았다. 둘째는 엄마와 아빠의 이혼 사실을 진작 눈치채고 혼자 씩씩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모른 척했는데, 사촌으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이상 스스로 더 시치미를 뗄 수 없어서 내게 확인했을 뿐.
내 딸이 자존심이 센 편이라는 걸 익히 알았지만, 엄마인 내게 자존감을 세울 줄이야! 그날 나는 존엄성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자기 존엄성을 지키려 애쓰는 어린 딸에게 신선한 충격을 넘어 동질감마저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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