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을 기다려 <귀향>이 완성되기까지
“집에 가자”는 말이 이토록 슬프게 들리는 때가 또 있을까. 조정래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귀향>은 위안부로 납치돼 고단한 삶을 살아내고 할머니가 된 영옥이 신녀 은경의 몸을 빌려 비참하게 숨을 거둔 친구들의 혼백을 고향으로 불러오는 과정을 그린다. 무엇이 감히 할머니들의 지옥 같은 생을 어루만질 수 있겠냐마는 적어도 “타지에서 구천을 헤매지는 마시라는 마음”으로 조정래 감독은 <귀향>을 만들었다. 하지만 조정래 감독에게도 <귀향>은 천형 같은 작품이었다. 14년의 시간을 오롯이 기록할 순 없으나 지난한 제작 과정의 일부를 여기 옮긴다. 조정래 감독과 은경 역 배우 최리의 인터뷰도 함께 실었다. 안타깝게도 지난 2월15일 또 한분의 할머니가 별세했다. 고인의 명복을 빎과 동시에 이제 생존자는 45명이 되었다는 슬픈 사실을 함께 되새겼으면 한다.
조정래 감독이 “구원과 치유의 영화”에 도달하기까지 꼭 14년이 걸렸다. 다만 영화의 끝이기는 하나 구원과 치유의 끝을 본 것은 아니다. 어느 때든 영화는 마쳐야 했지만 현실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독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이 계시는 ‘나눔의 집’ 봉사활동을 통해 만나게 된 강일출 할머니의 실화를 바탕으로 <귀향>의 시나리오를 썼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2002년에 보았던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이었다. 일본군의 감시하에 한쪽 불구덩이에서 타죽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겁에 질려 숨어 있는 자신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날 이후 조정래 감독의 머릿속엔 언제나 <귀향>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교차시키며 나아간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1943년 경남 거창의 조그만 마을에서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소녀 정민(강하나)은 급작스레 집으로 쳐들어온 일본군에 의해 중국 길림성 위안소로 이송된다. 그곳엔 이미 정민 또래의 소녀들이 우르르 끌려와 있다. 소녀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무지막지한 군홧발 아래서 성노예로 부림당한다. 간혹 다나카(이승현)처럼 소녀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평범한 군인도 있지만 대부분의 군인들은 소녀들을 광폭하게 휘두르는 괴물들이다. 정민은 영희(서미지)를 친언니처럼 따르고 가깝게 지낸다. 정 붙일 데 하나 없는 끔찍한 삶 속에서 소녀들은 존재 자체로 서로의 위안이 된다. 마침내 일본군이 패전하자 길림성 위안소도 폐쇄된다. 일본군 조장 기노시타(정무성)는 소녀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마구 총을 쏴 죽여버린다. 그리고 1991년 현재, 성폭행을 당해 반쯤 미친 소녀 은경(최리)은 만신 송희(황화순)의 신딸로 지내고 있다. 은경은 송희의 지인 영옥(손숙)을 만난 뒤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불현듯 혼절했다 깨어나기를 수차례, 은경은 기절할 때마다 괴이한 감옥에 갇힌 소녀들과 그들을 짓밟는 잔혹한 군인을 본다. 은경의 꿈 얘기를 들은 영옥은 이상할 정도로 두려워하고, 은경은 영옥이 오래전 위안소에 갇혔던 소녀 중 하나임을 알게 된다. 평온을 가장한 채 살아왔지만 단 한순간도 그때의 수라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영옥은 은경에게 씻김굿을 부탁하고 은경은 큰 굿판을 벌여 타지에서 잠든 소녀들의 넋을 불러모은다.
조정래 감독도 은경과 다르지 않았다. “시체 구덩이에서 나비로 부활한 소녀들이 하늘을 날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장관이었다. 얼마나 고향으로 오고 싶었을까. 영화를 통해 그 넋을 이곳으로 모셔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이슈를 영화화하는 동안 감독은 “남성으로서의 죄의식”을 느꼈다고 했다. “끔찍한 작태에 학을 떼고 난생처음으로 남자로 태어난 걸 후회했다. 나만 그런가 싶었는데 나눔의 집에 봉사활동을 하러 오는 많은 남자분들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더라.” 실화와 픽션이 뒤섞인 시나리오에서 감독이 가장 살리고 싶었던 건 할머니들의 행동 패턴이었다고 한다. 십대 초반에 위안소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은 전혀 자라지도, 나아지지도 못한 채 그대로 14살 소녀로 머물러 있었다. 생채기와 주름만이 늘었을 뿐 마음은 충격으로 굳어버린 그때 그 시간에 어린 채로 남아버린 것이다. “할머니들은 질투와 샘이 많으시다. 고질적인 화병을 앓고 계시고 걸핏하면 화를 내신다.” 마음에 독이 가득하니 그럴 만도 하다. 노년의 영옥은 약간의 불씨만 댕겨도 쉽게 터져버린다. 감독은 “소녀(여성)들을 치유하는 건 소녀(여성)만이 가능하다”고 믿었다고 한다. 신녀 은경을 투입해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넘어선) 남성의 폭력에 짓밟힌 여성들끼리의 연대를 그린 이유다.
물론 영화의 투자 유치부터가 쉽지 않았다. 어디서도 <귀향>에 투자하려 하지 않았고, 간신히 중국으로부터 투자를 받을 뻔했지만 주인공을 중국인으로 바꿔달라는 요구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세트를 지으려 미리 중국 현지에 땅을 보아두었으나 그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감독이 아주 어릴 때부터 반복적으로 꿔왔다는 “지독한 악몽”은 그대로 현실이 되어 그의 목을 졸랐다. 투자가 힘들어지고, 겨우 모은 소액의 제작비로 촬영을 시작했지만 일주일도 안 돼 돈이 다 떨어지자 “객이었던 사람들이 주인으로 변해” 감독을 괴롭혔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기 위해 감독은 인터넷에 <귀향>의 정보를 올렸고, 국내와 세계 각지에서 7만5270명이 후원금을 보내주었다. 2015년 4월, <귀향>은 간신히 크랭크인할 수 있었다.
촬영은 촬영대로 고역이었다. 오랜 나눔의 집 봉사활동으로 할머니들에게 깊이 동화되었던 탓인지 감독은 과거를 현재에 재현하는 과정 자체가 “고문 같았다”고 했다. “모니터도 보기 싫었다. 이 모든 지옥 같은 과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선정적인 장면은 찍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영화 자체가 너무나 폭력적이었다. 소녀들이 위안소를 탈출하다 얻어맞거나 끔찍한 일을 당하는 장면을 찍는 날에는 너무나 괴로워서 무엇에라도 씌이고 싶었다. 구원과 치유의 영화를 찍으려 했는데 그 끝이 너무나 멀었다.” 그럼에도 감독은 엎어지지만 말라는 심정으로 괴로운 속내와는 정반대로 행동하며 적극적으로 돈과 사람을 끌어모았다. “아무 데서나 무릎을 꿇고 도와달라 청했다.”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킨 건 결국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점점 지나칠 정도로 관여를 하기 시작했다. 시신(모형) 한구 마련할 돈밖에 없는데 어디선가 수십구의 시신(모형)을 구해오질 않나, 배우로 캐스팅한 재일동포들은 한국인 배우들의 일본어 교습을 맡고 몸소 현장 스탭까지 되어주었다.” 촬영은 거창과 포천에서 진행했다. “카메라를 360도 회전시켜도 전봇대가 안 찍히는 유일한 공간”이었던 거창은 소녀들이 가슴에 품은 조국으로 그려졌다. 포천의 폐쇄된 부대 자리엔 나눔의 집 지하 공간과 피해자 증언집을 참고해 위안소 세트를 지었다. 고향이 거창인 최리는 재일동포 강하나에게 거창 사투리를 가르쳤고, 배우들은 연습실이 따로 없어 “비어 있는 극단 연습실을 메뚜기처럼 오가며” 연습에 매진했다.
“영화의 처음과 끝은 반드시 진도 씻김굿이어야 했다.” 긴 제사를 치러내듯 영화를 마무리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지시에 따라 최리는 정성스러운 몸짓으로 소녀들의 넋을 부르는 연기를 펼쳤다. 은경에게서 정민을 본 영옥은 애끊는 소리로 “내 몸은 돌아왔어도 내 마음은 차마 못 돌아왔다”는 속을 내비친다. 은경의 삶을 좀먹는 고통스런 기억과 물에 빠지듯 영옥의 삶을 잠식해가는 우울과 두려움도 그 순간만큼은 은경이 흔드는 무명천에 씻겨 내려간다. 모두가 엄숙하게 굿판을 지켜보는 사이 일본군 귀신들도 군중 곁에 와 서 있다. 현장에서 역할에 몰입한 손숙이 무척 싫어했다는 그 모습에 대해 감독은 “일본군 귀신들이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이 군국주의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강력하고 무도한 남성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했다. 오싹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괴물들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게 서서 ‘보이는 자’를 비웃고 있는 광경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이슈가 작금의 한국 사회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은유한다. 피해자들끼리 서로를 다독이며 삶과의 타협을 이어간들 가해자로부터의 진정 어린 사죄가 없이는 온전한 안녕이 이뤄지기란 요원한 것이다.
은경 역 배우 최리 인터뷰
최리는 <귀향>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소녀들의 넋을 실어나르는 신녀 은경을 연기했다. 배우 지망생도, 전공자도 아니었던 그는 일종의 “길거리 캐스팅”으로 <귀향>에 출연하게 되었다. 수년 전 조정래 감독은 <두레소리> 촬영차 최리가 재학 중인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최리를 보자마자 은경을 맡아달라고 청했다. 그녀의 “신비한 눈”에 홀렸다고, 감독은 말했다. 최리는 감독에게 붙잡혀 한 시간이나 <귀향>의 얘기를 들었고 역할이 너무 크다고 여겨 정중히 거절했다. 괴이쩍게도 그날 이후 최리는 줄기차게 <귀향>의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한다. “몇달 뒤엔 내가 직접 감독님께 연락드려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감독님과 함께 나눔의 집을 찾아 강일출 할머니가 살아오신 얘기부터 들었다.” 최리는 자신이 영화에 폐가 되면 안 된다 생각하여 휴학을 한 뒤 한적한 암사동으로 거처까지 옮겼다. “무서웠다. 스무명의 소녀들을 고향으로 데려와야 하는데 내가 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은경의 트라우마를 제대로 연기하기 위해 최리는 두문불출한 채로 피해자 증언집을 들여다보거나 전쟁 후유증을 다루는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투자에 난항을 겪으며 촬영 일정이 자꾸 지체되었고, 최리는 장장 4년이란 시간을 <귀향>을 준비하며 보냈다. 후원자 모집 공연을 하기도 하고, 정민을 연기한 재일동포 강하나에게 거창 사투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귀향>에 참여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긴 시간을 영화와 함께했다. 영화에선 소녀들의 넋을 위로하는 진도 씻김굿이 중요한 장치로 등장한다. 감독은 최리에게 따로 준비하거나 연구할 필요 없이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굿 장면을 표현해달라고 말했다. 한국무용 중에서도 살풀이를 전공한 최리는 그럼에도 씻김굿의 무게에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고 했다. “2주 동안 몸이 너무 아파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냥 무서웠다. 굿 장면 촬영을 마치고 난 뒤엔 너무 홀가분해 행복하기까지 했다.” 영화 개봉도 하기 전인데 최리는 벌써 <귀향>을 일곱번이나 보았다. 그저 “기적 같다는 말밖엔” 나오지 않는다며 혹독한 데뷔전을 치러낸 소감을 전했다.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고 한동안은 무용에 매진할 계획이라고 말을 갈무리했다.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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