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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시즌 이어 추석 대목에도 관객 외면…"식상한 소재"
올해 한국 영화 상위 50편 중 14편만 손익분기점 넘어
영화 나쁜 녀석들:더 무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이도연 기자 = "볼 만한 한국 영화가 없다."
요즘 극장가에서 자주 들려오는 말이다. 개봉 편수가 적다는 것이 아니라 관람료가 아깝지 않은, 재밌고 잘 만든 '웰메이드' 영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여름 시즌에 이어 추석 연휴 개봉한 영화 대부분 신통치 못한 성적을 거뒀다. 여름에는 100억원대 한국 영화 4편이 개봉해 '엑시트' '봉오동 전투' 2편만 손익분기점을 넘었고, 추석 연휴에는 한국 영화 3편이 개봉해 '나쁜 녀석들: 더 무비'만 268만명을 동원해 체면치레했다. 흥행을 의식한 비슷한 기획 영화들이 쏟아지다 보니 관객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한 탓이다.
지난해에도 추석과 겨울 시즌에 선보인 한국 영화들이 줄줄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한국 영화 위기론'이 불거졌으나, 한국 영화 100주년인 올해도 다시 같은 현상이 반복되는 것이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 영화에 경고등이 켜진 것은 사실"이라며 "갈수록 하향 평준화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 '타짜:원 아이드 잭'[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한국 영화 흥행 50위권 중 손익분기점 넘긴 영화는 14편뿐
올해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1천만명을 동원한 한국 영화가 이례적으로 상반기에 2편('극한직업', '기생충')이나 나왔다. 덕분에 상반기 한국 영화 관객은 5천688만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 영화 점유율도 2013년 이후 6년 만에 과반인 52.0%를 기록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한국 영화가 강세인 여름 장사를 망치면서 '도루묵'이 됐다.
7월과 8월 한국 영화 관객 수는 각각 11년 만과 7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영화계 관계자는 "극장은 어떤 영화가 개봉되느냐에 따라 수익이 결정되는 '천수답'(天水畓: 빗물에만 의지해 경작하는 논) 구조"라며 "상반기 장사를 잘했지만 7~8월 장사를 망쳐 결국 조삼모사가 됐다"고 말했다.
'엑시트'[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올해 개봉한 한국 영화 면면을 들여다보면 더 심각하다. 제작비도 못 건진 작품이 수두룩하다.
17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올해 극장에 걸린 한국 영화 중 흥행 50위권 내 작품(일반 극영화 기준) 가운데 현재까지 손익분기점을 넘은 작품은 14편에 불과하다. '극한직업'(1천626만명), '기생충'(1천8만명), '엑시트'(939만명), '봉오동 전투'(478만명), '돈'(339만명), '악인전'(336만명), '말모이'(281만명), '나쁜 녀석들: 더 무비'(268만명), '증인'(253만명), '내 안의 그놈'(190만명), '사바하'(240만명), '변신'(180만명), '걸캅스'(163만명), '나의 특별한 형제'(148만명)다. 100억원대 제작비가 들어간 '나랏말싸미' '사자' '우상' '자전차왕 엄복동' 등은 흥행에 쓴맛을 봤다. 소위 500만명 이상 '중박' 영화도 1편도 없었다.
'극한직업'[CJ엔터테인먼트 제공]
◇ 식상한 소재·흥행 코드에 '기시감'…관객 외면
한국 영화들이 고른 선택을 받지 못한 이유는 차별점이 없어서다. 김성희 영화평론가는 "이전에 성공한 흥행 코드를 나열하는 식으로 만들다 보니 관객 입장에선 차별화를 느낄 수 없어 피로감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추석 영화도 마찬가지다. '나쁜 녀석들'은 마동석 이미지에 기댄 전형적인 액션 코미디물이다. '나쁜 놈이 더 나쁜 놈을 처단한다'는 설정도 새롭지 않다. '타짜 3'는 1편의 후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다. '힘을 내요, 미스터리'는 선웃음, 후감동이라는 전형적인 공식을 따랐지만 '두마리 토끼'를 잡지는 못했다.
강유정 평론가는 "한국 영화가 흥행이 잘된 것 위주로 반복하다 보니 새로움의 동력이 떨어진 것 같다"면서 "관객 입장에서는 실험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한국 영화 단골 소재와 장르는 조폭·검사·경찰·정치인·언론·재벌 2~3세가 등장하는 범죄 액션물이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실화나 애국심을 자극하는 이야기, 부성애 등도 최근 몇 년간 흥행 코드로 꼽혔다.
영화 '기생충'[CJ엔터테인먼트 제공]
수년째 비슷한 소재와 장르가 반복되다 보니 조금이라도 새롭게 느껴지는 영화에 관객들은 지갑을 열고 있다. '극한직업'이 대표적이다. 당초 영화계에선 '중박' 정도로 점쳐졌으나 경찰·조폭에 '국민 간식' 치킨을 결합해 '신선하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대박 영화가 됐다. '기생충' 은 세계 1등 상(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자체가 다른 영화와 차별화하면서 1천만 관객 동원의 동력이 됐다.
영화 '기생충'[CJ엔터테인먼트 제공]
◇ 투자배급사가 직접 기획까지…"안정적인 흥행 추구"
비슷한 한국 영화가 양산되는 것은 투자·제작·배급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영화를 기획·개발하는 기획자(프로듀서) 파워가 강했다. 이들이 다양하고 참신한 시나리오들을 발굴했지만, 지금은 투자·배급사가 직접 기획과 제작까지 한다.
김성희 평론가는 "과거에는 능력 있는 기획자들이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 덕분에 스토리나 완성도가 높은 웰메이드 영화가 많이 나왔고, 한국 영화가 황금기를 누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기업 계열 투자배급사들이 영화를 기획·개발하는 단계서부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다 보니 흥행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감독과 배우, 소재, 장르, 흥행 코드로 영화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뻔한 영화가 양산되는 이유다.
전찬일 평론가는 "좋은 기획은 좋은 제작자로부터 나온다"면서 "투자배급 쪽이 잘 나가는 감독들과 직접 거래를 하기 시작하면서 제작자층이 옅어지게 되고, 그 파급 효과가 드러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윤성은 평론가는 "신선한 소재, 창의적인 스타일의 개발보다는 스타 감독, 배우에 의지한 투자가 요인" 이라며 "유명한 감독이나 배우가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진부한 캐릭터, 스토리, 플롯 없는 시각적 쾌감만으로는 관객들의 호응을 얻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극장 주 관객층의 변화도 한 요인으로 꼽힌다. 주 관객층이 20대에서 경제력 있는 중장년층으로 옮겨오면서 실험적인 작품보다는 '안정적인' 영화를 많이 만들게 됐다는 것이다. 반면, 젊은 층이 선호하는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 등은 실험적인 콘텐츠로 관객층을 넓혔다.
강유정 평론가는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 같은 플랫폼에서 퀄리티 높은 콘텐츠를 공급하고 있고, 요즘 TV 드라마의 퀄러티도 만만치 않다"면서 "정작 영화는 블록버스터에만 쏠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영화 '벌새'[엣나인필름 제공]
◇ "좋은 영화는 관객이 알아봐"…'벌새' '우리집' 흥행은 청신호
그렇다고 한국영화계 전체가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최근 '벌새' '우리집' 흥행에서도 보듯 작지만,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들은 관객이 알아본다. '벌새'는 7만3천명을, '우리집'은 4만8천명을 각각 불러모았다. 독립영화가 총 관객 5만명을 넘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벌새'의 경우 멀티플렉스가 아닌 단관을 중심으로 약 130개 스크린에서 상영되고 있지만, 좌석 판매율은 30%가 넘는다.
이 영화 배급사 엣나인필름 정상진 대표는 "1994년을 기억하는 관객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면서 "(상영관이 많이 없음에도) 관객들이 마치 좋은 공연을 감상하는 것처럼 극장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벌새'는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을 배경으로 중학교 2학년 은희의 일상과 성장을 그린 영화다.
정지욱 평론가는 "좋은 영화는 관객들도 알아본다"면서 "작지만 좋은 영화들이 꾸준히 나오는 것은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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