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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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론문] 미적 감각의 형상화에서 본 장홍을의 예술적 추구 댓글:  조회:4883  추천:55  2009-11-16
-《장홍을 화집》의 산수화를 중심으로       생을 마감하기 1년전 장홍을화백은 불치의 병에 시달리면서 170여쪽의 대형화집을 펼쳐내는데 성공하였다. 이 금싸락 같은 작품집에 의해서 우리는 저명한 조선족화가의 진지한 창작대오와 탁월한 미적 감수성, 그리고 그 미적감각을 형상화함에 있어서의 독창적인 표현수법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할수 있게 되였다.     화백의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평생 중국화를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사람들이 접수할수 있도록 하려고》(장홍을:《장홍을 화집》)애써 온 화백의 예술적 추구를 피부로 느낄수 있다.     미술은 시각적 조형언어이다. 미술작품이란 화가가 속한 시대나 사회를 살아가면서 느끼고 생각한것들을 표현하는 화가의 발언이라는 시각에서 우리는 화가 자신만의 조형어법을 통해 형상화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할것이라 생각한다. 《중국화를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접수할수 있도록》한 장홍을화백의 시각적 조형언어의 특징은 무엇일가? 필자는 《장홍을 화집》에 수록된 산수화 작품을 중심으로 화백의 예술적 추구에 대해 귀납해보고저 한다.     자연의 기(気)와 정신의 기(気)의 혼연일치----그의 작품에서는 호흡하는 자연의 기운이 느껴진다.         자연에 대한 화가의 감수성과 태도 여하에 따라 화가의 그림은 자연과 동떨어진 아름다움만 간직한 평면의 작품으로 될수 있고 또는 살아숨쉬며 충격적인 시각적 이미지를 내뿜는 조형세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미술작품의 형식은 그 자체로 정당화되는것이 아니라 화가의 정신적인 면을 바탕으로 하여야 하며 이같은 정신적인 것은 작품을 리해하고자하는 관객에게 공감을 줄수 있어야 한다.     독일의 철학가 셸링은, 자연은 그저 모방의 대상일 뿐이라는 당대의 예술론을 비판하면서 예술의 고유성은 모방이 아닌 창조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예술작품은 형태를 넘어서있고 그것은 본질이요 보편자이며 내재하는 자연정신을 보는것이자 그 표현인것이다》     장홍을화백이 우리들 앞에 펼쳐보인 선천의 모습은 우리가 일찍 가까이에서 접하여 익숙했으면서도 등한히 지나쳤던 정경들이다. 이같은 모습을 담은 작품들에는 자연에 대한 그 어떤 과장적인 수식이나 아름다움에만 집착한 다채로운 구도의 설정, 현란한 색상의 사용이 절제되여 있다.     백두산 고원의 미연한 언덕들, 잔설(残雪)로 메워진 백두계곡들, 관목이 우거진 사이로 뻗어나간 외로운 산길,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두만강 어느 구간의 풍경, 심산벽곡의 시내물우에 조용히 놓여있는 외나무다리.      장홍을화백의 작품들은 우리 앞에 정지된 절승경개의 아름다움의 모방이 아니라 우리들이 걷고 숨을 쉬고 어울리는 생명의 공간으로 펼쳐져 있는것이다. 그가 묘사한 자연의 모습들은 혹은 박력있게 혹은 차분히 우리에게 다가온다. 작품의 구도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의 어느 일각을 잡히는대로 클로즈업해낸것같은 그의 산수화들은 우리의 시선을 압도하며 숨막히게 다가오는가하면 길게 뻗은 유연하고 리듬있는 터치로 하여 가슴 후련하게 숨이 터쳐나오기도 한다.     대자연에 순응하고 복종하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에 따라 가지 않고 자연으로부터 느껴지는 감정이나 기운에 충실하고저하는 화백의 지적 노력은 장엄하고 다채롭고 아름다운 산천을 그린다기보다 산행을 통해 호흡하는 자연의 기운을, 또 여기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이나 힘을 담고저 애쓴 흔적을 그의 매폭의 작품에서 쉽게 찾아볼수 있다.     두만강 해동(解凍)을 원천으로 탈바꿈시킨《해빙(解冰)》작품을 보면 봄기운을 먹은 성에장이 맥없이 꺼져내려앉는 소리가 귀맛 좋게 들리는것 같고 겨울을 밀어내며 풍기는 비릿한 강물냄새에 코가 벌름거려지는것 같다.     백두산 남쪽비탈에서 스케치하여 작품화시킨 늦가을의 정취가 다분한 《입산(入山)》작품을 보노라니 그 아름드리락락장송에 잠시 기대여 앉아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다리쉼을 하고 싶다. 그리고 소 몰고 입산하는 그 농부와 한담을 나누며 저 산언덕너머로 뻗어나간 오솔길을 따라 산속으로 함께 들어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장홍을화백의 산수화는 《대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회화적인 그 자신의 리상에 따라 재해석되고 있다.》(신항섭:《장홍을화집》서언) 그는 그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어법으로 자연을 묘사하고 있다. 그가 구사하는 조형수법은 동양의 전통적인 산수화기법과 서양의 사실주의 기법을 혼합한 형태 즉, 그 자신의 비유한대로 《햄버거》와 《된장찌개》의 맛이 두루 섞여진 복합물로서 전통적인 수묵산수화의 몰골기법(没骨技法)및 우륵기법(釣勤技法)과는 어느 정도의 구별을 보이고있다. 작품전반에서는 오히려 서구회화표현방식이 더 두드러진 느낌이다. 《하지만 수묵담채라는 전래의 재료가 가지고있는 특성은 고유의 회화양식으로서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서구의 자연주의 양식처럼 자연을  아주 구체적으로 미화하는 가운데 그세부가 여실히 들여다보이는듯한 투명성을 실현하고 있다.》     장홍을화백은 동양화는 기(気)를 론하되 빛을 론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하면서 매 한폭의 산수화 작품을 자연의광기(光気), 습기(湿気), 공기(空気), 색기(色気)와 정신의 신기(神気), 력기(力気)와의 혼연일치속에서 완성하려는 시도를 게을르지 않았다.     우리가 늘 접촉하면서도 생소하게 느껴졌던 자연의 힘과 기운을 장홍을의 작품으로 새롭게 접할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형(形)과 신(神)의 겸비함----그는 자연의 내적인 힘을 형상화하기 위한 조형언어표출의 돌파구를 찾고저 고심하였다.     모든 미(美)의 외적 측면 또는 토대는 형태의 (美)이다. 그러나 본질 없는 형태란 존재할수 없으므로 설령 형태만 있다하더라도, 볼수 있거나 지각할수 있는 경우에만 특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화가가 묘사한 그 어떤 사물의 외적 형태미는 기실 화가 자신의 지적인 리해의 결과라고 할수 있다. 화가의 미적 감수성과 지적 리해력에 의해 대자연이 가지고 있는 깊고 깊은 정서가 감지감득되고 리성적인 조형언어의 표출이 가능한것이다.     장홍을의 경우 물론 그는 사실주의 미학에 충실하면서 대자연속에서 스케치해낸 소재를 기본바탕으로 형태미에 대해 묘사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표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남다른 미적 감수성은 자연속에서 생활체험을 하며 창작소재를 장악할때 이미 남이 포착하지 못한 대자연의 장엄한 내적 이미지, 형태미의 내면에 잠적해있는 깊은 뿌리를 한꺼번에 취사선택할수 있게 하였다.     그의 그림은 거대하다. 대부분 작품들은 평면공간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화가의 필묵이 골고루 침투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도 솟아날길 없는 거대한 산 속에 갇힌것 같은 환각을 주기도 한다.《백두고원》, 《산길》, 《무언지대》등 백두산 제재의 산수화작품들은 아예 우리들로 하여금 자연앞에서 완전히 압도되는듯한 느낌으로 하여 시야를 어디에다 맞출지 갈팡질팡하게 한다. 살펴보면 결코 단순히 작품구도면에서의 시도에서 이루어진것만은 아님을 느낄수 있다. 그것은 화백이 자기 창작에서 자연의 내적인 신(神)을 찾아내 구체화하는 조형언어표출의 돌파구를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40)     무릇 모든 그림은 일반인들이 스쳐버리고 지나쳐버리는 것들에 대해 새로운 주목을 낳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흔히 접하는 자연이나 일상사 속의 하나로 지나쳐버리는 것들이 화가의 눈과 붓 아래서 새로운 생명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백두산, 금강산, 한나산, 설악산 등 명산들을 화폭으로 옮긴 것을 적잖게 보아왔다. 이런 명산실경의 형태미에 대해 우리는 익숙할수 있다. 그런데도 장홍을이 제시한 명산들의 이미지는 우리의 일상적인 시각으로는 도저히 함축적으로 요약, 취사, 선택,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때문인가? 《실제로 그의 작업에서 사실적인 묘사력은 인체의 신경세포처럼 아주 섬세한 감각을 지닌다. 오히려 사진보다도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이미지의 선명성이라는 면에서 보더라도 사진보다 앞선다. 남북의 명산을 답사하면서 카메라의 시각이 아닌, 그 자신의 신체적인 감각 및 미적 감수성을 총동원하여 대자연이 가지고있는 그 정서를 감지감득한 결과이다.》(신항섭:《장홍을화짐.서문》)     때문에 장홍을의 산수화에서는 평소 자연의 명산실경보다는 자연에 대한 느낌과 자연에서 올라오는 기(気)를 형상화하기 위한 순발력 있는 붓의 터치들이 눈에 띄이고 있다. 자연과의 즉각적인 교감과 순간적인 스케치에 의존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명산의 구석구석에서 배어 나는 내적기운과 사색적 느낌들을 형태미로 담아내고 있다. 자연을 형(形)과 신(神)이 결집된 하나의 사색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자연이 우리의 눈을 위해서만 존재하기보다는 우리의 말과 생각의 실토인 듯이 나타내고 있는것이다.     장홍을화백은 매 한폭의 산수화에서 형(形)의 근사함에 신(神)의 근사함을 내포시키고 형과 신의 겸비함을 재현시키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자연의 신비로운 메아리를 받아들이고 있다.         대자연에 대한 미적 감수성과 인간 삶의 리얼리티에 대한 철학적사고의 결합----그의 조형언어에는 자연과 인간관계의 순수성과 숭고함이 내재되여 있다.     자연은 화가들 앞에 놓여진 영원한 숙제라고 할수 있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빌헬름 보링거는, 인간은 자연을 인간과 대립된것으로 생각할수도 있고 인간자신이 자연의 일부인것으로 생각할수도 있다고 강조하면서 전자의 경우에는 자연을 극복과 정복의 대상으로 삼아 변화하는 자연을 고정된 모습으로 나타내고자 하고 인간나름의 방식으로 소유하고자 하며 후자의 경우에는 자연과의 친화감(親和感)과 공감을 바탕으로 그것에 순응하고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저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장홍을의 작품들은 자연에 대한 화가 나름의 해석보다는 자연과의 공감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산수화에서는 인간의 력사 따위는 별다른 의미가 없어보인다.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기확인을 거듭할 따름이다. 그의 산수화에서는 인간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대자연의 위대성이 느껴진다.》 (신항섭:《장홍을화집》서문)     장홍을 산수화작품의 일부에서는 인간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대자연의 위대성과 장중함을 안받침해주는 존재로 부각된다.     화백은 위에서 아래를 굽어살펴보는 부감법(俯瞰法)으로 자연전체를 넓게 조망하고 광대하고 장엄한 자연의 모습을 담고 있다. 화폭에 담겨지지 않을듯 거대한 산중턱에 보일락 말락하게 난 산길을 따라 소를 끌고가는 농부의 미세한 움직임, 해동하는 두만강의 거창한 물결을 타고 저멀리 강언덕길을 따라 아득하게 보이는 소달구지와 농부, 강가에 가로놓인 나무다리를 건너 깊은 산속으로 막 사라지는 모녀의 희미한 뒤모습들…     이런 인간등장의 작품들은 우리로 하여금 평온함과 조화롬이라는 자연으로부터의 교훈을 느끼게 하고 있다. 화백은 이것을 자연의 거대한 포용력 또는 자연 앞에서 왜소해 질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 바로 이같은 자연과 인간관계에 대한 상징적 의미의 함축으로 해석하려 한다.     장홍을 화백은 자기의 그림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허물수 없는 대자연의 숭고함을 내재시키고있으며 《자연에 순응하는 순연한 삶의 양태가 얼마나 아름다운것인지 일꺠워줄 정도이다.》(신항섭:《장홍을화집》서문)     장홍을은 화가이기에 앞서 민족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는 지성이다. 본인이 자술한것처럼 《졸업후 고향에 대한 애착이 하도 깊어 큰 도시에서 취직할수 있는 기회를 전부 사절하고》 고향행을 결심하게 되였으며 조선족 그리고 조선족을 위한 그림그리기에 열중해왔다.     중국조선족의 삶은 어떻게 보면 대자연에 순응하고 복종하며 자연과의 조화와 융합을 이루는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을 승화시킨삶이라고도 볼수 있다.     장홍을의 작품에는 우리 조선족의 삶의 리얼리티가 담겨있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지나쳐 버린 익숙한 것들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보여줌으로써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중국조선족의 백년이주사는 피와 땀으로 얼룩진 개척의 력사라고도 할수 있다. 장홍을의 작품에서는 길을 그린 그림들이 《목젖을 메우는 듯한 슬픔같은 어떤 감동을》불러일으키며 특이하게 안겨온다. 그가 그린 길들은 모두가 첩첩심산속의 외로운 오솔길아니면 황야에 어렴풋이 난 달구지길이며 폭설속에 어렴풋이 보이는 령길이다. 그 길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선족의 력사상의 그 험난함과 어려움을 상징하는 듯하다. 곧게 뻗은 길이기보다는 구불구불하고 굴곡이 지어져 많은 사연이 담긴 길처럼 묘사되어 있고 그 길의 주인공들이 소박한 형색의 농부가 아니면 소달구지 등이란 것이 더욱더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장홍을 화백의 거폭의 산수화에 왜소하게 자주 등장한 조선족농부와 황소, 그리고 물동이를 이고 가는 녀인, 산향길을 따라 굴러가는 소달구지, 두만강 격류속에 알릴듯말듯보이는 떼목… 이러한 장면은 꿋꿋하게 자기의 전통적 생활양식과 문화를 영위해나가는 중국조선족의 강인한 생명력을 장중한 대자연의 위용과 일체화시킴으로서 자연과 인간관계의 순수성과 숭고성을 유연하게 전개시키고 있는것이다.     요약하여 말하면 장홍을화백은 자연에 대한 뛰어난 미적 감수성의 형상화 실천을 통해 《중국화를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사람들이 접수할수 있게 노력》하는것을 평생의 예술적 추구로 삼고 정열적으로 창작하여 우리 조선족화단은 물론 중국미술사에 중요한 한획을 그었다고 할수 있다.  
9    미녀초상론 댓글:  조회:4368  추천:73  2009-03-17
   ... 차가 령을 넘어서 마을어귀에 들어서자 길 량켠에 촘촘히 늘어선 생선집들에서 희한한 차림의 접대부 아가씨들이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며 쏟아져나와 손님 《략탈》작전이 펼쳐진다. 차가 조금이래도 주춤하는가 싶으면 순식간에 차는 그녀들의 《포위망》에 빠져 진퇴량난의 꼬락서니가 된다...     승용차편으로 장춘에 갈 때마다 겪는 경령(慶嶺)생선먹자거리의 진풍경이다.     이같은 풍경을 연길시안의 먹자유흥거리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수 있다. 그런데 접대부아가씨들의 유혹작전에 료정, 노래방, 다방마다 대문짝만하게 내건 《미녀광고》까지 합세하여 손님유치를 목적한 마케팅커뮤니케이션 효과가 경령먹자거리의 뺨을 칠 정도로 유성유색(有声有色)하게 연출된다.     영업주들의 판촉전략에 따른 소비이데올로기 조장속심에 대해 감놓아라 배놓아라고는 않겠지만 문제는 《미녀초상》이다.     손님접대차 요지음 두곳의 먹자거리에 다녀 온적이 있다.한곳은 《중화미식거리》로 일컫는 개고기거리요 다른 한곳은 연변일보사 서쪽골목 먹자거리이다. 총 200메터 남짓한 두곳의 먹자유흥업소 영업구간에서 필자는 도합 30여개의 손님유치를 위한 《미녀초상광고》를 손쉽게 보아낼수 있었다. 이런 《미녀초상》들은 대부분 술집, 개고기전문점, 료정, 다방 등 영업간판에 보란 듯이 좌정하여 24시간 웃는 모습으로 주객들을 맞고 있다. 놀라운 것은 《미녀》들 대부분이 한국의 유명 탤런트들이요, 웃는 얼굴만 빼놓고는 컴퓨터 조작을 통하여 스타들의 의상, 자태가 영업주뜻대로 외곡되여 버젓하게 손님을 유혹하는 작부로 탈바꿈한 것이다. 도대체 상업모델이 아니 그 유명 탤렌트들이 언제 《국제주의 정신》을 발휘하여 중국 개장집의 접대부로, 노래방의 아가씨로, 료정의 작부로 하해(下海)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몇년전 연변의 한 촬영가가 촬영제작한 우리 고장 녀연예인 초상화 한조(4폭)가 촬영가의 허락없이 남방 어느 회사에 의해 달력으로 제작인쇄된 사건이 불거져나왔다. 촬영가는 자기 작품에 대한 그 회사의 침권행위를 당당히 법에 고소하였다. 조사결과 녀 연예인이 촬영가를 몰리고 그 회사와의 단독협의로 빚어낸 민사안건임이 들어났다. 아무튼 초상권, 저작권 침해로 타성인을 연변법정에 내세우며 무척이나 우리 고장의 맑은 법질서를 가르친 사건이라 할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처럼 초상권 침해가 용납될수 없다고 자부해 온 《천국》에서 한국의 명스타들이 무더기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당사자의 허락이 없이 부당하게 초상을 사용하거나 영업리익을 목적으로 당사자 초상을 제멋대로 자작하여 공중장소에 내거는 것은 엄중한 초상권 침해행위로 법적책임을  지게 된다.     자신의 명예를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한국 탤런트들이 연변의 개장집, 료정, 노래방의 접대부로 변신하여 주객(酒客)들에게 웃음을 팔아도 된다고 허락했을리는 없을 것이다. 한국 스타가 아니라 연변녀성의 경우에도 술집,노래방 같은 업소간판에 등장하여 웃음을 파는 것은 보기가 민망하다.     연변미녀들을 술집, 노래방 영업간판에 등장시키는 발상에 대해 녀성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유럽이나 문화가 발달한 선진국의 도시 료정 같은곳의 간판은 너무나 검소하게 꾸며져 있다. 물론 녀성이 간판에서 웃는 모습도 볼수 없다. 사실 우리 고장도 최근에 품위있고 세련된 영업소일수록 간판문화에서 그 진수를 엿볼수 있다.     여자는 한낱 노리개에 불과하다는 퇴페한 남존녀비 전통의식이 오늘의 이 상황을 불러왔을테지만 옛날부터 술집이나 료정의 작부를 《술과 함께 웃음을 파는》 천한 계집으로 홀대해온 우리의 세태에서 아무리 세상이 많이 변하고 관념이 갱신됐다하더라도 술집, 노래방, 다방과 같은 영업간판에 한복치마저고리를 깨끗이 차려입고 머리에 곱게 가리마를 낸 미녀들을 완벽하게 부각시키는 것은 연변에서나 볼수 있는 풍경이 아닌가 싶다.     술집에 《미녀광고》가 붙었다고 술이 더 잘 팔리는지? 오히려 천박한 영업속심을 내 비치는 비웃음의 대상 밖에 될것이 없다.     몇몇 미녀스타의 초상권문제가 아니라 전체녀성의 귄익침해, 형상훼손 차원에서 《미녀초상》이 몰고오는 파장을 대해야 옳지 않을가?
8    학벌 만들어주기론 댓글:  조회:3228  추천:56  2009-03-17
    옛날부터 과거(科挙)제도는 립신출세의 유일한 관문이였다. 그러나 시험이 엄하고 응시하는 선비가 많은데다 인원제한이 있었기에 급제하기가 어려웠다.     조선 제 19대왕 숙종(粛宗)이 등극하여 16년동안 도합 여덟 번의 과거를 시행했는데 그때마다 충청도에서 올라온 리권식이라는 선비가 한번도 빠짐없이 응시하군 하였다. 그런데 관운이 없음인지 리권식은 번번히 락방의 고배를 마시고 관문밖으로 밀려나야 했다.     락방을 거듭하는 리권식이가 안스러워 숙종은 서른자 높이의 장대 끝에 글씨 한 자를 매달아 놓고 무슨 자냐고 묻게 하는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시험을 낸다. 물론 남몰래 리권식에게만은 그 글자가 《갈매기 구(鴎)》자라고 미리 귀띔해 주었다.     리권식이로 말하면 장원급제는 이미 떼놓은 당상이였다. 그런데 과거보는 날 제 순위가 되어 막상 궁궐안에 들어서 장대 끝에 아스라게 매달려 있는 손바닥만한 종이를 쳐다보는 순간 《구, 구, 구》자만 입안에서 맴돌뿐 그 이상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리권식의 기억을 일깨워주려고 숙종이 일부러 갈매기가 새겨져있는 룡상뒤의 병풍을 똑똑똑 계속 두둘겨댔더니 리권식이 한다는 대답이 한심하게도 《똑똑이 구》자가 아닌가!     대궐문을 나서는 순간에야 리권식은 그 《갈매기 구》자가 머리에 떠올랐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뼈저린 후회를 하며 리권식은 마지막 차례를 기다리는 한 선비에게 호의를 베풀어 이실직고함으로써 결국 장원급제가 그 선비의 몫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운이 좋은 그 선비는 이 영광을 자신이 차지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시관(試官)앞에서 《갈매기 구(鴎)》자를 세간에서 백성들은 《똑똑이 구》자라고도 한다고 능청스럽게 꾸며댔다. 그리하여 락방운명을 맞았던 리권식은 다시 살아나 그 선비와 동시에 장원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결국 숙종이 만들어 준 기상천외한 장원기회를 놓쳤는가 싶었는데 다른 선비가 나서서 리권식에게 장원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다.     남의 힘으로 자기 학벌을 만들고 출세길을 보장받는 사례는 옛날에나 현대에나 얼마든지 있는 것 같다.     《졸업증 만들어 줌 (辦文憑) 0431-xxxxxxxxxxx》!     《증서 만들어 줌 (辦証) 010-xxxxxxxxxxx》!     요즘 온역처럼 시안의 곳곳에서 란무하는 고약한 분무락서, 도시환경을 악의적으로 더럽힌다는 위생차원을 넘어 신성한 학력, 학위, 학벌의 공신도(公信度)를 땅에 떨어뜨리고 나라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짓밟는 이 추태를 두고 보는 사람마다 치를 떨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졸업증장사군》들만을 질책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학벌만들어주기 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현대판 《시장정보》를 면바로 파악한 그네들이 《학벌만들어 주기》라는 미끼로 《권리의 시장화》를 낚는 진실한 조작극을 연출하고 있는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 미끼에 걸리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현대 지식경제사회를 리더하는 지도간부라면 그의 직분에 상응한 지식구조와 학문수준을 갖춰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나라에서는 현(처)급 간부는 반드시 본과이상의 학벌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조건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다음이다. 자기 직분에 맞물리는 지식수준을 갖추기 위함이 아니고 자기 직위에 맞물리는 학력, 학위, 학벌을 만들고 나아가서 이것을 승진의 사닥다리로 삼으려는데서 이상한 《학벌경쟁》이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학벌을 만들어 준다는 이 황당한 《서비스》는 학벌을 사겠다는 파렴치한 《주문》과 어울려 사회의 《악성종양》을 유발하고 있음을 우리는 외면할수 없게 되었다.     원 강서성 부성장이였던 《탐관》 호장청은 비서가 대신 시험을 봐주고 졸업론문을 써주어 학위를 취득한 《수재(秀才)》요, 원 xx성건설청 어느 한 부청장은 저자거리 《학위 장사군》한테서 학위를 사서 자기를 포장했으나 5분좌우의 연설원고를 무려 13곳이나 틀리게 읽어 세간의 웃음거리가 된 인물이다.     얼마전 신화통신에서 우리나라 한 연구생학원 부원장의 고백을 가슴 찡하게 읽었다.     《올 초생기간에 우리 학원의 대상(項目)을 비준해준 한 부문의 령도간부가 20만원을 낼테니 자기를 도와 진짜 박사학위 증서를 구해줄수 없느냐고 문의하기에 내가 거절했더니 대뜸 사상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질책하는게 아니겠습니까?》     학벌 만들기보다 학문 쌓기를 권장하고 만들어진 학벌보다 배워낸 학문에 머리 숙이는 그러한 사회 풍조의 대두가 절실히 요청된다.  
7    독일인의 생태문화관과 국민성에서 느낀다 댓글:  조회:4298  추천:52  2009-03-17
    인류의 문화사를 인간들의 생태환경 파괴과정으로 볼수 있을것 같다. 따라서 삶의 터전을 마구 짓뭉개여 준엄한 생존위기를 초래한 인간자신들에 대한 력사적인 성찰을 거쳐 서서히 각성해가며 인간과 생태환경의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올해에 있었던 독일견학은 필자의 이같은 감수를 더 깊게 해주었다.      독일은 15~16세기 유럽 렬강들이 개입된 무려 30여년의 제후(諸侯)혼전에 의해 360여개의 크고 작은 부속국(邦国)과 수천개의 나이트국(騎士国)으로 분해되였던 나라이다. 이같은 사분오렬의 혼란국면은 독일에서 200여년을 지속한다. 그후 또 두차례에 거친 세계대전의 발원지, 랭전의 희생품이라는 뼈아픈 상처를 남기면서 독일은 국토와 경제, 인구와 생태 전반이 재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심한 피해지역으로 되여버린다.      삶의 터전을 재건하는 과정에 생태환경과 생태문화건설을 유기적으로 접목시켜 리상화한 인류의 생존환경과 인문환경을 구축하는 대안은 어디에 있을가? 이면에서 독일인들이 내놓은 답안은 괄목할만하다.     강렬한 보호 및 재현의식--독일사회의 박물관문화는 여기에서 생성된다--력사의 련속성을 유지하고 민족형상과 기질을 부각시키는 독일인의 개명한 처사를 보면서 우리는 력사에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집과 도로, 그리고 여러 가지 도시시설들로 이루어진 인공환경은 인류생태환경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된다. 독일인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독일의 위대한 사상가이며 문학가인 괴테는 어느 한 시에서《낡은 것을 충실히 지켜나가고 새로운 것을 기꺼이 받아드리노라》라고 쓰고 있다. 괴테의 이 의미심장한 토로는 력사를 존중하고 문화를 숭상하며 전통을 이어나가는 독일인들의 기질과 생태문화관을 잘 구현하고 있다.      독일의 어느 도시에 들어서든 제일 먼저 가슴에 와닿는 것은 평온함과 고풍스러움, 은은함과 함축성 바로 그것이였다. 마치도 거대한 력사박물관에 들어선듯한 느낌이랄까. 도시의 전체적 구성으로부터  매 건축물의 독특한 풍격에 이르기까지 각개 력사시기 옛 성곽의 정취가 다분히 배여있다.      하나하나의 오랜 교회당과 각양각색의 박물관들, 눈부시게 화려한 바로크(바로크)식 풍격의 광장과 신고전주의 풍격의 극장들,웅장하고 아름다운 궁전과 이름난 현대파의 건축예술작품들은 창상지변을 무수히 겪었으면서도 끄떡없이 자기만의 풍격을 과시하고 있다. 이런 건물들은 독일 고전과 현대, 랑만과 엄숙함의 혼연 일치 분위기를 강렬하게 안겨주어 천년에 가까운 독일의 풍운변화와 여러 력사시기 유구하고 찬란한 독일문화, 생활습관을 넉넉히 감수하게 한다.      독일의 도시들은 대체로 창조, 훼손, 재건 이 세가지 단계를 거쳤다. 따라서 재건된 도시들이 풍기는 고상한 운치에서 독일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고유의 문화보호 및 전통재현의식을 읽을수 있다.      독일의 수많은 도시들가운데서 창조, 훼손, 재건의 단계적특점을 가장 여실히 살린 거울로 베를린을 꼽을수 있다. 전쟁의 피해를 가장 혹심하게 입은 베를린은 1914년 프러시아 국왕이 도발한 1차세계대전과 1939년 히틀러가 책동한 2차세계대전으로 도시절반이 거의 전쟁포화에 날아가버리고 상당한 지역은 페허로 변해버린다. 1945년 5월 동맹군의 공격으로 베를린은 6.2만동의 건물이 파괴되고 150만채의 주택이 잿더미로 변한다. 하지만 40여년의 원상복구와 재건을 거쳐 세인들앞에는 완전히 박물관화한 도시 베를린이 펼쳐진다....      1891년부터 1895년사이에 건설되여 줄곧 베를린의 옛 상징으로 불리웠던 로마네스크식 독일 헬름황제기념성당은 2차세계대전의 포화에 탑 웃부분이 뭉텅 날아가버리고 벽체만 남았지만 부끄럼없이 우뚝 솟아있다. 포화에 날아간 성당의 탑 웃부분은 그 어떤 보수나 개축을 거치지 않아 전쟁포화의 상처를 그대로 남겨놓고 있다.      시프레강변에 자리잡은 베를린대성당은 18세기중엽에 세워지고 19세기말에 재건되였는데 2차대전때 엄중한 파괴를 당한다. 전후(戦后) 4000톤의 건축기자재를 투입시켜 정성껏 시공하여 끝내 어제날 대성당의 이채를 그대로 재현시키고 있다.      독일 《운명의 문》으로 널리 알려진 브란덴부르크문은 독일이 프랑스와의 1871년 전쟁을 기념하여 수건한 것이다. 1945년 2차대전의 포화에 완전히 날아가버린 것을 1958년에 재건하여 원상복구시켰다. 이번에 필자가 독일에 갔을 때 면바로 브란덴부르크문보수공사가 한창이였다.      보리수거리남쪽에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궁전식건축--국가오페라극장이 자리잡고 있다. 1741년부터 1743년사이에 설계하여 건설한것인데 전쟁의 포화에 의해 페허로 되었다가 1953년에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여 베를린시민들의 중요한 문화중심지로 부상되였다.      보리수거리에는 또 1695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1년만에 완성된 굉장히 수려한 황실병기창고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1945년의 전쟁포화에 풍비박산이 나 건물의 기둥만 남았던 것을 전후 16년의 시간을 들여 옛모습 그대로의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회복시켜 오늘날 력사박물관으로 둔갑되였다.     경제가 그렇게 발달되고 생활이 그처럼 부유한 독일에서 우리가 팔구백년전 옛도시의 전통적인 운치를 음미할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답은 오직 하나인 것 같다 .즉 문화를 숭상하고 유산을 아끼며 력사를 존중하고 전통을 이어나가려는 독일인의 그 유구하고도 특유한 기질, 그리고 그 기질이 낳은 고도로 발달된 박물관문화 바로 그것일 것이다.      알아보니 독일전체에는 주립,시립 박물관,협회와 지방 박물관,사립 박물관이 무려 3000여개소나 있다고 한다. 그밖에 교회, 대성당, 관저, 성루, 궁전, 로천박물관과 진렬관들이 도처에 쫙 깔려있다.      이번에 독일의 베를린, 함부르그, 포츠담, 뮌헨, 프랑크프르트 등 도시를 돌아보니 기계동음이 요란한 고층건물 시공현장은 눈에 띄이지 않았지만 낡은 층집이나 교회당을 재건하거나 복원시키고 새롭게 단장하는 시공장면은 도처에서 목격할수 있었다. 현대도시를 전통적인 고성(古城)구도속에 융합시키고 있는 분위기가 확 안겨오는 그런 풍경이였다.      독일의 도시마다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숭배와 보호의식에 집착하여 인력, 물력을 아끼지 않고 각종 고신기술수단을 동원하면서 유산과 고적을 원상복구시키는 모습을 쉽게 볼수 있었다. 이같은 유산과 고적들은 독일의 어제날 풍채를 되살려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켜주고 전통력사를 이어주는 생동한 교과서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인류의 오늘은 지난 력사우에 세워진 것이다. 문화유산을 파괴하면서까지 눈앞의 리익에만 매달릴 때 부숴져버리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경관이나 한 개의 문물만이 아니라 한 민족의 력사를 동강내고 한 민족의 형상과 기질을 얼어붙게 하는 비극의 시작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들의 력사와 전통을 재현시키고 자신들의 유산과 고적을 보전하려는 독일인의 집념이 독일에서 력사련속성의 회복, 현대인과 유구한 문명과의 융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따라서 후세들이 지난날을 토대로 전통적인 생태문화환경을 완벽하게 대물림할수 있게 하였다.      독일의 방방곡곡마다가 력사박물관 같다고 할 때 연변 전체를 천연혁명력사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피와 땀으로 걸군 연변땅 곳곳에서 우리는 후대들을 깨우치는 렬사기념비와 혁명유적지들을 어렵잖게 찾아볼수 있다. 연변의 매 하나의 산, 매 한줄기의 강들이 모두 강개하여 비장한 노래를 부르는 것 같고 혁명지사들의 선혈과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다.      두만강을 마주하면 절망에 빠진 조선반도 빈고농들이 19세기중엽부터 중국으로 이주하여 삶의 터전을 개척하면서 중국조선족으로 형성되여 가던 력사의 발자취를 떠올리게 된다.      봉오동을 마주하면 1920년 6월 연변조선족 반일무장부대가 연변경내에서 처음으로 일본정규군을 대패시킨 《봉오동전투》를 떠올리게 된다.      청산리를 마주하면 1920년 10월 반일무장부대가 인민대중의 지원에 기대여 렬세한 병력으로 900여명의 일본정규군을 일망타진하여 세상을 놀래웠던  《청산리전투》를 떠올리게 된다.      해란강을 마주하면 1931년부터 1932년사이 일본침략자들이 연길현해란강구역에서 90여차에 달하는 을 감행하여 공산당원과 항일대중 1700여명을 학살한 《해란강대참안》을 떠올리게 된다.      룡정을 마주하면 20세기초엽 명동, 대성, 동흥, 은진, 정동 등 중학교들에서 폭풍처럼 거세게 일어났던 반일학생운동과 성세호대한 룡정 반일집회의 비장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장백산을 마주하면 림해설원을 주름잡으며 나무뿌리를 삼키면서 일제와 간거한 게릴라전을 벌려온 항일련군의 감격적이고 눈물겨운 영웅장거들을 떠올리게 된다.      항일무장투쟁의 긴긴 세월속에서 연변은 3125명 용사들의 장렬한 희생을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는 군급장령 4명, 사단급장령 6명, 퇀급간부 23명이 들어있는데 그들 모두가 가슴 저리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안고 있다. 연변인민들이 반일, 항일투쟁에서 흘린 피는 헛되지 않았고 그 업적은 력사에 영원히 아로새겨질 것이다. 몇십년간 중외에 이름난 연변의 굵직굵직한 력사사건들은 심오한 내용을 담은 전통교재로 둔갑되여 연변의 몇세대인들의 성장과 함께 하여왔으며 연변 여러 민족인민들의 자랑스런 정신적 재부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하여 혁명전기색채를 띤 연변의 유적과 고적, 전적지들이 마땅한 건설과 개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위적인 파괴까지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연변의 소중한 혁명력사유적, 사료, 문물들이 원시적으로 널려있는 자연상태에서 위풍당당한 혁명박물관문화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가슴 아프다. 더우기 시장경제와 대외개방 환경에 힘입어 각지의 유람경관지의 건설템포는 빨라지는데 혁명력사유적과 전적지의 건설이나 개발은 답보상태에 머물러 연변의 혁명박물관문화가 전체적으로 《마을마다 렬사비》 또는 문자기재의 삭막한 수준에 방치돼있는 것이다.시간의 흐름에 따라 로혁명근거지의 풍모도 점차 퇴색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몇 년래 대외개방이 심화됨에 따라 연변박물관문화건설도 날따라 해외인사들이 주목하는 열점화제로 되고 있다. 반파쑈전선이 어느 한 나라, 한 지역에만 한정되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해당나라와 단체 및 우호인사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받아들이여 그젯날 반파쑈투쟁의 본래모습을 객관적으로 재현시켜 인류공동의 정신문화재부로 만들 수 있지 않을가?   연변의 경제와 사회 각항 사업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전략을 세움에 있어서 혁명력사박물관문화의 개발과 건설은 선대를 이어 받아 앞날을 개척, 창조하는 천추만대의 위대한 공정으로서 그 의의는 당대에만 제한되지 않을것이며 그 가치는 또한 돈으로 따질수 없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자손들한테는 가장 책임적이고 깨여있는 거동으로 받아들여질것이고 가장 값지고 빛나는 생태문화유산으로 우리 력사에 남을 것이다.     자연의 순리에 좇아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원림화된 국토, 독일생태환경의 최적화는 이렇게 이루어진다--우리의 생태관은 도대체 어떠한가?     자연은 인간을 떠나서 얼마든지 존재할수 있으나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 생존할수 없다.      자연으로 회귀하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 대자연속에서 생기는 변화무쌍하고 예측불가능한 여러 가지 현상을 애써 파악하고 개진하고 온정시킨다. 수토와 환경을 보호하여 인간과 자연의 평형조화적관계를 지켜나간다.      이것이 독일인들의 생태관을 이루는 기본자세이다.      차에 앉아 독일의 도시를 지날때마다 도로 량켠에 하늘높이 치솟은 소나무와 가문비나무들이 반겨주고 가는곳마다 사람들의 정성스런 손길이 닿은 상수리나무숲과 소나무 숲, 그리고 크고작은 공원들이 마음 즐겁게 한다. 골짜기나 분지에 들어서면 푸른 주단을 펴놓은 것 같은 목장과 가쯘하게 다듬은 잔디밭이 눈을 시원하게 한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있는 초원과 잔디밭들은 꼭 여러폭의 대형풍경유화를 배렬해놓은 것 같아 우리를 그저 황홀하게만 한다.      도시안에 삼림이 우거져있고 삼림이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큰길 중심에 원림이 가꿔져있으며 시민들의 거주지와 화원, 잔디는 마음 편하게 조화되여 있다. 독일의 곳곳에서 쉽게 볼수 있는 이같은 경관들은 대자연과 하나로 융합되고 조화되려는 독일인들의 그 끈질긴 추구를 잘 구현하고 있다.      베를린은 도시전역에서 3분의 1의 면적이 강, 호수와 삼림, 초지로 되여있다. 시안의 수로 총길이는 165키로메터에 이른다. 인구당 50평방메터의 록지와 인구당 26만평방메터의 삼림공간을 확보하고있는 셈이다. 우리가 강습을 받을 때 투숙했던 《베를린경제교류 및 양성센터(원 동독공산당 중앙당학교)》는 베를린 도심의 삼림속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가 센터정원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도 울창한 원시림속에 빨려 드는듯한 그런 느낌이였다. 미인송, 떡갈나무, 전나무숲은 어찌나 무성한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였고 그윽하고 고요한 수림속 오솔길에서는 다람쥐들이 먹이를 찾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원시림속에 밀페되여있는 맑고 푸른 미켈호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이처럼 완벽한 상태로 보전돼있는 명실상부한 원시림이 베를린시안에만도 네곳이나 있다고 한다.      나무는 자연계에서 가장 위대한 생태치유능력을 갖고 있다. 이 도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독일인들은 생태환경을 최적화하고저 상당히 애쓰고 있다. 독일의 가는곳마다에서 독일인들이 나무와 잔디를 내용물로 얼마나 원림화문장을 열심히 짓고 있는가를 목격할수 있다.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푸른 잔디가 주단처럼 펼쳐져있는 시내의 어느곳에서도 헐벗은 땅은 도무지 찾아볼수 없었다. 도시전체의 삼림방풍망이 얼마나 잘 조성되여 있는지 도시안에서 모래바람이나 흙먼지를 구경할수 없었다. 하루종일 거리를 돌아다녀도 적삼깃은 깨끗한 그래로였고 구두는 먼지 한점없이 광을 낸다. 잔디와 화단, 나무숲으로 이루어진 도시안의 생태화공원들은 대자연의 매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하냥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도시의 많은 살림집들은 밑으로부터 옥상, 베란다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넝쿨식물과 화초들로 잘 포장되여 인간과 자연이 함께 숨쉬는 조화로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독일인들이 생활권변연지대의 개조에서 쏟아붓는 노력은 주로 나무숲과 림지의 조성에서 나타난다. 대도시와 농촌의 교차선은 자연경관, 무성한 나무숲과 알심들여 가꾼 잔디들로 이루어져 산뜻하면서도 다채로운 미적향수를 느끼게 할뿐만아니라 토양류실을 막아 옥토를 보완하며 잡초씨앗이 바람을 타고 도처로 범람할 위해를 최대한 제압하고 있다.   도시화를 추진함에 있어서 독일인들은 천방백계로 대형기업소를 시내에서 교외로 옮겨내가고 있다. 공업단지가 앉았던 자리는 록화구역으로 탈바꿈시켜 시안의 록화공간을 넓히고 있다. 철거하기 힘든 시안의 공업단지는 모두 아름드리 백양나무와 사철푸른 관목수풀로 겹겹이 통제받고 있다.     생물의 자아보호기제와 자아번식의 자연기능이 일단 파괴된다면 생태계통이 엄중하게 균형을 잃게 된다. 독일에서는 어느 한 나무우에 새둥지가 틀어져있을 경우 그 나무 주변 200메터 구간의 나무를 찍지 못하게 되여있다. 독일인들이 생태리념에 얼마나 집착하는가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베를린의 어느 삼림지역을 고찰할 때 일이다.아름드리 나무들이 키다툼을 하는 삼림속에 가끔 벌레의 피해로 다 죽어가거나 번개를 맞아 뿌리채 뽑혀 나뒹구는 나무들이 눈에 띄였다. 그런데 이런 문제의 나무들을 삼림관리부문에서는 대수롭잖게 그냥 방치해두고 있었다 .삼림관리일군의  리유는 이랬다.      《삼림보호의 목적은 삼림이 자연과 잘 어울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림은 자연계의 생태법칙에 따라 성장, 도태, 재생을 되풀이 하거든요.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삼림의 생태환경을 간섭해서는 안되지요.》      도시건설, 국토리용, 생태환경보호 등 면에서 독일은 엄격한 법률감독체계를 갖추고 있다. 국가법을 제외하고도 지방환경보호법들이 참으로 구전하다. 독일의 각 주(州)마다 모두 환경수치(数据)통계법, 시민환경보호법 등 법규들이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는바 정부는 이같은 립법의 힘으로 독일공업이 엄중한 오염단계와 언녕 고별하게 하였으며 한편 국가의 삼림화, 원림화템포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독일은 법에 따라 생태환경을 다스림에 있어서 에누리없지만 국토소유와 전망계획을 일체화하는 면에서 지방정부에 령활한 정책을 주어 독일의 도시건설, 국토리용, 생태환경면에서의 정체성과 합리성, 조화성이 잘 어울리게 하는 넉넉함도 보이고 있다. 결과적으로 국토면적이 더 효과적이고 출중하게 리용되여 상당히 제한된 공간이지만 시민들이 굉장히 쾌적한 삶을 누릴수 있게 꾸며져 있다. 인공으로 꾸민 환경이 자연환경과 잘 조화되도록 애쓰는 독일인들이 그렇게 인상적일수 없다.      자연으로 회귀하고 자연의 본래모습을 되찾기 위한 독일인들의 노력은 이에 걸맞게 대자연의 《보답》을 톡톡히 받아내고 있다. 이번 백년만에 맞은 특대홍수가 독일을 강타하였지만 그 손실은 별로였다. 우리 나라의 장강이나 황하 류역의 지구에서 이 같은 홍수피해를 입을 때 그 후과는 상상할수 없을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이 있다. 독일의 이같은 상황은 자연의 재생순환을 추진하고저 지불한 독일인들의 그 끈질긴 노력을 대가로 하고 있다.     독일인들이 자연에 대한 끔직한 사랑으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루어내고 대자연의 혜택을 입고 있을 때 우리 나라는 자연을 훼멸시키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맹목적인 개발, 략탈식 자원리용, 거기에다 전통적이고 미괴한 생산방식, 조화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안목이 없는 등의 인위적인 요소까지 합세되여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서부지구에서 더더욱 뚜렷한바 다른 지구의 생태환경에까지 직접적인 피해를 주고 있으며 우리 나라의 대부분 지역이 대자연의 무정한 보복과 징벌권에 들어가있는 현실이다.      우리 나라는 땅이 넓다. 하지만 삼림피복률은 겨우 12.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세계수준의 절반에 거의 미칠가 하는 정도로서 세계에서 우리 나라의 삼림피복률서렬은 102번째에 머무르는 실정이다.      삼림면적은 1.22억 헥타르밖에 안돼 인구당 0.13헥타르 수준이고 목재저장량은 95억립방메터로서 인구당 10립방메터에도 못미쳐 세계수준과는 한참 떨어져있다.      우리 나라의 사막화, 황야화면적은 어느덧 153만평방키로메터로 육박해 국토면적의 15.9퍼센트를 잠식하고 있다.      오랫동안 방목하면서 수탈만 하고 가꾸는데 신경을 쓰지 않거나 맹목적인 개척이 그 원인으로 되여 우리나라 초원의 퇴화현상은 발전추세를 보이고 있다. 퇴화정도가 엄중한 초원면적이 13억무나 된다고 한다. 쓸만한 초원면적에서 3분의 1이상이 퇴화되여 있으며 년 평균 건초생산량은 30.5퍼센트로 하락하는 셈이다.      생물의 다양성이 감소되는 추세도 매우 엄중하다. 50년 사이에 우리 나라에서는 200여종의 고등식물이 자취를 감추었고 4600여종의 고등식물과 야생식물이 멸절 일보직전까지 왔다.      불합리한 영농방식과 락후한 소비습관에 의해 우리나라 생태환경의 악화가 가시화되고 있다.      생태환경은 서로 어울리고 방사하는 영향을 미치는 대형시스템이라 할수 있다. 어제날 귀동냥해서나 듣고 이국땅에서나 체험할수 있었던 《황사》현상이 몇 년전부터 연변땅에 서서히 정착하였다. 황사의 주요한 발원지로 꼽히는 내몽골 오르죤지구가 건국 50년사이 인위적으로 빚어낸 사막화 면적은 2천년간 사막화면적의 총화에 해당된다는 결과가 나왔다--사막화 토지면적이 4.3만평방키로메터, 그중 강도 높은 사막화면적은 2.77만평방키로메터나 된다. 그리고 사막화의 영향으로 퇴화된 초원면적이 4.3만평방키로메터, 수토류실면적은 4.7만평방키로메터나 되어 《세계에서 수토류실이 가장 엄중한》, 《지구의 암》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나라의 화북, 동북, 서북지역은 물론 조선반도의 생태환경이 모두 그 영향권안에 들어있다.      해당자료에 따르면 오르죤지구 생태환경의 악화는 전체적으로 보아 계속 확산되고 있는 조짐이다. 지금 사막황페화면적은 해마다 1000여만무의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데 이런 상태로 나간다면 20년도 못가 내몽골초원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초원이 퇴화되고 생태환경이 피해를 입으면서 자연재해의 빈번한 발생이 가시화되고 있다. 기상자료가 제시한데 따르면 특대황사가 20세기 60년대에 모두 여덟 번 발생했는데 70년대에 와서는 열세번, 80년대에는 열네번, 90년대에는 삼십여번꼴이다.최근 몇 년사이 우리 나라가 황사의 영향으로 입은 손실은 540억원이나 된다고 한다. 내몽골초원의 생태퇴화는 자연적요소와 인위적요소가 복합되여 발생한것인데 그중에서 인위적요소가 몰고온 생태퇴화률이 70.1퍼센트를 차지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맹목적인 개간, 지나친 채벌, 초부하 방목 그리고 물곬을 마음대로 잘라버리거나 공업이 초래한 유독가스, 공장페수, 고형페기물 등 요소들이 그 주되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동북의 장백산 밑에 자리잡고 있는 연변은 서부사막화의 위협에 로출되여 있을뿐만 아니라 자체의 인위적요소까지 합세되여 생태평형문제가 크게 불거져 나오고 있다. 일찍 20세기 80년대에 한 생태전문가는 장백산 삼림자원이 해마다 3.5만헥타르, 500만립방메터 속도로 없어지고 있다고 대성질호한적이 있다.      《장백산삼림피복률은 1949년의 82퍼센트로부터 지금의 62.4퍼센트로 줄어들고 있다. 삼림채벌자원이 대체로 고갈상태에 들어섰고 식물피복도 엄중한 파괴를 입고 있다. 하천, 대기오염이 날따라 악화되면서 장백산지구의 생태는 평형상태와 서서히 멀어져가고 있으며 생물체인(鏈)이 평형을 엄중하게 잃어가고 있다. 어떤 지역은 사막화의 피해로 많은 희귀동식물자원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이같은 국면이 계속 이어진다면 전반 생태계통의 붕괴가 기필코 초래될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료해에 따르면 우리 주는 토지리용면에서 수토류실이 상당히 엄중하다. 전 주 수토류실면적은 이미 46만헥타르로 확대되고 있어 총부지면적의 11퍼센트를 차지하는바 수토류실이 엄중한 지구로 꼽히고 있다. 전 주의 모든 지역이 정도부동하게 수토류실문제를 안고 있다. 산구와 구릉지대의 일부지역은 식물피복의 훼손으로 토양표층의 류실이 엄중하다. 하곡(河谷), 산비탈 경작지의 정리가 따라가지 못해 계곡의 침습이 날로 악화되고 있다. 하곡평원은 초지의 훼손과 맹목적인 개간 때문에 수토류실을 불러와 토양의 사막화와 퇴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으며 경작지를 물에 휩쓸어가게 하는 사태를 빚어내고 있다. 전 주 14만헥타르의 산비탈경작지에서 해마다 580만톤의 토양이 류실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 마땅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연변의 《팔산일수반초반푼전(八山--水半草半分田)》자연생태구조는 붕괴될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밖에도 우리 주의 도시환경문제, 생태환경문제 또한 위험수위에 와있다. 연변의 여러 주요도시들이 하곡분지에 위치해있어 역온(逆温)기온만 만나면 연기가 빠져나가기 힘들어 상당히 엄중한 공기오염에 로출되여있다. 도시의 기동차량이 급격히 불어나고 건축업의 발전과 개체공상업, 음식오락터, 야간시장의 급속한 증가로 도시의 소음오염이 날따라 문제시되고 있다. 도시주민들의 생활방식변화와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른 생활쓰레기량과 복잡화수준 또한 걷잡을수 없이 확대되는가 하면 고형페기물의 환경오염위해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도시구역의 록화미화정도는 아직 초보단계에 와있고 도시기초시설건설이 엄청나게 모자라며 도시 음료수원의 보호가 시급하며 도시홍수, 가물피해방지수준이 강화돼야 하는 시점에 와있다.       환경과 발전문제는 지속적발전을 이룩함에 있어서 핵심문제이다. 연변의 목전 경제와 사회발전수준 그리고 새 경제시대 지구촌경제형태의 변화를 감안할 때 연변특유의 록색자원과 다양화한 생태한경의 보호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할 때이다. 생태산업 또는 록색산업복합체의 결성을 최우선 련결고리로 삼아 생태환경보호에 초점을 맞춘 효익성경제를 발전시키는것만이 옳은 선택이다.하다면 생태환경보호에 초점을 맞춘 효익성경제의 창출은 연변자연자원과 생태환경에 대한 필요한 재건과 보호가 따라갔을때만이 가능하다. 때문에 연변의 발전을 운운함에 있어서 경제생산량지표의 확장에만 국한하거나 사회발전 및 인민생활수준의 향상에만 집착해서는 안된다. 연변인들의 삶의 터전인 생태환경의 그 어떤 변화도 연변발전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처사에서의 엄밀함, 질서와 규률관념--독일인의 생활준칙에서 핵으로 자리잡고 있다--이는 민족성격의 창조와 강성국가의 정착으로 이어진다--민족적정신문화를 구축함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점을 주목해야 할가?      베를린생태환경강습반 수료식 날 강습센터주임 크노펙교수가 《독일은 엄밀한 처사와 짜인 규률의 징표라고 할수 있습니다.》라고 하던 그 격앙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독일인들은 이렇게 자랑스레 말하고 있다. 이방인들이 본 독일 또한 확실히 그렇다.     독일은 성철(圣哲)들이 구름처럼 많이 포진되여 있고 각종 사조가 번성한 나라로 유명하다.세계적인 위인을 수없이 배출한 독일하면 우리는 인차 칸트, 헤겔, 맑스, 엥겔스와 같은 대 철학가들; 하이네, 쉴러, 괴테와 같은 대 문호들; 마하, 베토벤, 슈만과 같은 대 음악가들; 아인슈타인, 플라크와 같은 대 과학자들을 떠올릴수 있다.     독일민족의 긍지를 자아내는 이 걸출한 인물들은 누구나 모두가 독일인의 《엄밀한》성격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독일의 철학이 없었다면 과학적사회주의가 나올수 없었다.》고 지적한 엥겔스의 론단은 철학왕국이라는 독일의 호칭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엄밀함》을 출발점으로 한 철학가, 과학가들은 잠시 젖혀두고라고 괴테, 쉴러와 같은 대 문학가들의 예술사상을 분석해보면 자아와 세계, 감정과 리성의 조화일치가 하나의 엄격한 형식으로 굳어져 독일의 문학 특히 시가창작을 근 반세기나 영위해왔다.     독일인의 강렬한 문화숭배와 전통계승의 보호 및 재연의식, 자연의 순리에 따라 인간과 자연의 평형조화를 추구하는 그 리념이 독일인의 생태문화관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주축의 핵이 독일인의 엄밀한 성격에서 비롯된것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볼바에 독일인의 《엄밀함》은 다음 세가지 면으로 귀납할수 있을 것 같다.     복종과 규률: 독일사람들은 규률을 지키고 법규대로 하는 것을 최고의 륜리원칙으로 삼고 있는바 이는 일정한 력사적연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독일의 발전력사를 조명해보면 력사적으로 겪어온 개혁과 혁명이 모두가 우로부터 아래에로 내려오면서 진행돼왔음을 느낄수 있다. 비스마르크카 《철혈정책》으로 독일을 통일하고 독재자가 두차례에 거쳐 세계대전을 발동하면서 일인독재가 일종의 《순종정신》과 《신하의식》을 부추기게 되고 통치자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따르는 습관이 국민들속에서 보편화된다. 복종과 규률이라는 독일인들의 이 국민성은 그들로 하여금 승리의 기쁨과 더불어 참담한 재난의 소용돌이속에서 고통을 치르게 한다. 복종과 규률은 독일인들을 1차세계대전의 원흉으로 되게 하였고 뒤이어 2차세계대전의 폭풍에 휘말리게 한다. 따라서 2차세계대전후 복종과 규률이라는 이 국민성이 독일인들로 하여금 전부의 열정과 힘을 사업에 바칠수 있에 하였으며 짧디짧은 40년사이 독일이 미국, 일본 버금으로 가는 제3경제대국으로 일약 부상할수 있게 하였다. 전후 독일인들의 민주의식이 강화됨에 따라 순종으로 길들여진 《신하의식》에서는 벗어났으나 오랜 력사를 답습해온 일부 심리는 여전히 독일인들의 성격과 의식속에 잠재해있다. 기업소에서 하급은 상급에 절대 복종해야 하고 모든 것은 규제에 따라 처사한다. 종업원은 복종을 천직으로 여기고 지도자는 명령에 복종하고 규칙에 따르는 것을 종업원우렬을 가르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     독일인들은 국가의 명예를 더없이 소중히 여기며 외국인들앞에서 자기 나라에 불손한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독일축구단은 독일의 민족정신을 완벽하게 구현한 구단이라 할수 있다. 대원들의 충실한 움직임, 튼튼한 조직력과 고도의 집중력으로 다져진 독일축구단은 오랫동안 세계일류구단의 서렬을 드팀없이 지켜나가고 있다.     질서와 계획: 독일민족은 질서를 중히 여기는 민족이다. 이번 독일기행에서 여러 류형, 여러 계층의 독일인들과 어울리면서 이 면의 인상이 아주 깊었다. 독일인들에게 있어서 질서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여 놓을뿐만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던 전부 규정에 좇아 계획한 대로 일목료연하게 풀어나간다.     깔끔하고 반듯하게 가꿔진 농경지와 잔디밭, 장중하고 숙연한 분위기를 풍기는 삼림공원, 저마다의 도고함을 자랑하는 고금건축들, 우아한 정취를 풍기는 그윽한 거리와 골목들...독일의 가는곳마다에서 쉽게 볼수 있는 이 같은 매력적인 경관은 독일인들의 질서의식이 생태환경건설에서의 구현이라 할수 있다.      독일은 교통법규가 엄격하게 짜여진 나라다. 길마다 여러 가지 형태의 리정표들이 뚜렷하게 세워져있고 질서유지를 위한 표시판과 금지령패들이 곳곳에 걸려있으며 일의 대소와 관계없이 모든 것이 명문화되여있다.       독일인들은 법규집행에서 그 원칙성이 강하기로 정평나있다. 털끌만치의 인정도 통하지 않으며 하나면 하나지 두말하지 않는다.독일인들은 무슨 일이든 수첩에 메모해두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습관동작은 메모수첩을 꺼내드는 것이고 습관용어는 《잠간만!수첩을 보면서 말씀드리지요.》이다.      독일인들은 일을 처사함에 있어서 먼저 계획을 짠다. 절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따라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가정살림을 함에 있어서도 독일인들은 사전에 세운 계획을 엄격하게 따른다. 어느날에는 어떤 료리를 주요메뉴로 하며 얼마만한 량으로 올리는가를 일단 사전에 계획에 넣었다면 절대 고치지 않으며 군법도 무색할 정도로 에누리 없다. 가정주부는 국수를 남비에 넣어 끓이기 전에 천평으로 국수의 무게를 확실하게 달아본다. 계란을 삶을 물도 사전에 용기로 되는 것을 잊지 않으며 쇼핑을 나갈 때도 먼저 물품구입명세서를 자세하게 작성한다. 부부가 함께 해외려행을 궁리했을 때 이들의 려행계획은 적어도 일년전에 이미 세워졌을것이고 일년후에 행동으로 옮겨진 려행 스케줄은 언녕 빈틈없이 꾸며졌다고 봐야 한다.      한마디로 《정량(定量)》관습은 독일인들의 사유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다고 할수 있다. 어찌보면 전혀 융통성이 없고 불가사의하지만 바로 이러한 성격이 독일인들의 성공률을 담보해주고 있는 것이다.     진지함과 실사구시: 독일인들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성실하다. 그 어떤 건성건성한 태도나 대충해버리려는 생각은 절대 용납될수 없다. 매 한가지 일에 대해 론리적분석을 가하며 늘 사건을 복잡하게 만드는 습관이 깊게 배여있다.      독일인들의 이같은 성격을 보여주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극형을 선고받은 사형수 세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프랑스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독일인이며 또 다른 한 사람은 영국인이다. 림종을 앞두고 감옥장은 세 사형수에게 어떤 요구가 있는가고 물었다. 프랑스인은 고급포도주 한병을 마시고 싶다고 실토한다. 독일인은 한 시간동안 근사한 학술보고를 하고 싶다고 선언한다. 영국인은 독일인의 무료한 학술보고가 시작되기전에 먼저 자기를 죽여달라고 간청한다. 프랑스인의 로맨틱함이나 영국인의 불같은 급한 성격도 인상적이지만 독일인의 진지한 학구적태도가 돋보이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독일인의 트릿하면서도 무겁고 엄숙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성격과 더불어 그들의 근엄하고도 진지하며 리성을 추구하는 태도를 잘 구현하고 있다.      매사에서 진지하고 자세한 독일인들은 책무감 또한 상당히 강하다. 일단 일터에서 두루뭉실하며 직무를 태만하였다면 두말없이 사표를 내야 한다. 독일인들은 공과 사가 분명하다. 일을 처사함에 있어서 기계적이고 가차없으며 사적인 감정에 매이지 않는다.      독일인들은 실사구시의식이 짙게 배여있다. 항상 현실적이며 허풍치기를 제일 질색한다. 독일인들의 살림집은 검소하면서도 반듯하고 고상하다. 출입문, 자물쇠, 스위치, 옷걸이, 유리, 전등갓 같은 일상생활용품들은 실용성을 감안하여 만들어졌기에 보기에는 어딘가 둔중해보이지만 튼튼하고 믿음성있다. 건물 한 채, 가구 한 개, 설비 한세트를 만들어도 질을 최우선으로 하지 겉만 번지르르한 것은 전혀 질색이다.      독일인들의 진지하고 실사구시적인 정신은 말단 직원들의 몸에서 뿐만아니라 고위급관원 또는 대재벌들한테서도 례외가 아니다. 학교와 가정에서의 엄격한 독일식교육이 그들로 하여금 산만스런 작풍과는 담을 쌓도록 한 것이다. 《벤츠》, 《뽀마》 자동차, 《지멘스》회사를 독일인의 진지하고도 실사구시적인 성격의 징표라고 할수 있다.      독일인의 확실하고 원칙적인 성격과 태도는 국제사회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독일 전임총리 미트랑은 자신의 임직기간에 파시쓰독일이 세계적범위에서 저지른 재난을 침통히 반성하면서 무릎을 꿇고 전 세계인민들에게 사죄하였다.  늘 우물우물하면서 제 잘못을 교활하게 덮어감추려하는 일본지도자들의 태도와는 얼마나 판이한가! 독일의 현임총리 또한 미국의 박자에 맞춰 촐랑대지 않는다. 부쉬의 반테러기준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이라크에 대한 무장간섭을 단호히 반대하는 태도를 확실시함으로써 영국정부의 너무나 일방적인 립장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 민족의 성격이 그 나라, 그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다. 게르만민족의 성격과 국민성이 독일로 하여금 두차례나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속에 함몰되는 비극을 낳게 하였고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독일을 다시 전쟁의 페허속에서 신속히 일떠서게 하였다. 하다면 중화민족의 성격 또한 마크. 폴로가 감개를 터뜨린 그 동방대국, 천하무적의 나폴레옹이 《잠자는 사자》에 비유한 바로 그 중국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였다고 할수 있다.      어느 학자는 중국인의 성격을 《로련하고 너그러운》점으로 귀납하면서 중국인의 이 성격은 진보와 정복이 아니라 그 어떤 힘과 끈기를 바탕으로 하는 문명사회의 품질을 구현하고 있으므로 그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한 문명을 누릴수 있다고 지적한다. 《로련하고 너그러운》 이 국민성의 가장 뚜렷한 특점은 《인내성》이다. 몇천년의 중화문명이 정복을 목적한 외래침략의 충격을 그처럼 수없이 받으면서도 괴멸되지 않을수 있은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참고 견디는 《인내성》이라는 국민성격, 그리고 이 성격에서 파생된 침착함과 끈질김을 집을수 있다.      인내성은 중화민족의 숭고한 품성이고 처세지혜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유구한 력사와 넓은 국토, 풍부한 자원과 복잡한 민족, 많은 인구를 갖고 있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중국인의 성품은 그 내적함의가 특별히 복잡하게 엉켜있음을 알수 있다.      국민성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인내성이라는 이 특점은 일련의 부정적인 반응을 초래할수 있다. 이를테면 죄악에 대한 병태적인 용서,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는 은거도피행위, 늘 계책을 꾸며 현실과 멀리하려는 간교성, 약간한 일에도 만족해하며 창조성이나 진취심과 담을 쌓는 안락주의, 게으름과 태만으로 점철된 관례답습, 모든 일에서 앞뒤를 너무 재고 태도가 확실치 못하며 남들의 뜻에 무조건 따르는 맹목성같은 점들이다.     력사적으로 서양사람들은 중국을 《잠자는 사자》에 비유했는데 여기에는 중국인들의 그 지루한 《인내성》에 대한 조소가 담겨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 중국이라는 이 《잠자는 사자》는 언녕 깨여났지만 력사의 거대한 관성은 중국인들의 마음 한 구석이 그냥 가위눌림에서 해탈할수 없게 한다. 생활절주가 빨라지자 중국인들의 《인내성》에서 파생된 워낙 그렇게 눈에 띄이지 않았던 《병집》이 선명하게 두드러지게 되었다. 인젠 우리는 이 《병집》을 등한시할수 없게 되었고 더구나 우리 자신에 대해 맹목적으로 락관할수 없게 되였다.      당대 중국은 지금 전통사회로부터 현대사회에로의 과도, 자기 스스로 만족해하던 늦은 절주로부터 필사적으로 경쟁하는 빠른 절주의 급격한 변화를 요청하는 시점에 들어섰다. 독일의 생태문화를 배우면서 우리 나라의 생태 환경상황을 반성해볼 때 넓은 국토, 많은 인구, 느린 발전 등의 객관요소를 잠시 떠나 독일과 우리나라의 차이점을 독일인의 《처사에서의 엄밀함》성격과 중국인의 《인내성》성격의 대비에서 찾을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생태환경분야에서 나타난 중국의 거의 모든 문제점들이 《인내성》이라는 국민성에 의해 인위적으로 빚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삼림의 훼멸, 국토의 사막화, 수토의 류실, 홍수의 범람, 도시의 오염과 같은 큰 재난으로부터 아무 곳에나 가래침을 뱉고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아무 곳에나 걸터앉고 누워 잔다든가 아무곳에나 쓰레기를 버리고 용변을 본다거나 붉은 등을 무시하고 도로를 마구 횡당하는 등 거치르고 어지럽고 란잡한 생활습관들이 모두 그 원인으로 되고 있다.       환경파괴의 위험은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서 온다. 우리 나라에서 빈궁하고 락후하며 교육을 받지 못한 인구가 생태환경파괴의 원흉임을 명심해야 한다.      중화민족대가정의 성원으로서 조선족은 한족들의 《참을성 있는》품성과 간고분투하는 인내력이 약할뿐만아니라 독일인들의 《처사에서의 엄밀한》성격도 갖추지 못하였다. 조선족의 《조급하고 경솔하며 조폭한》성격은 연변생태환경건설의 많은 고리에서 일련의 불협화음을 야기시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행위는 의식의 반영이다. 국민소질하면 자연과 사회를 개조함에 있어서 갖추고 있는 몸과 마음, 지력과 사상도덕의 전체적수준을 의미한다. 량호한 생태문화환경, 공중생활질서와 사회풍모는 량호한 국민소질의 반영이라고 볼수 있다.      민족성격과 민족정신은 결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민족성격과 민족정신은 가일층 세련되여야 한다. 위대한 민족일수록 그 국민성 또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야 한다.     16차당대회는 초요사회의 전면적인 건설분투목표를 다음과 같이 일축하고 있다--      가지속발전능력이 부단히 커지고 생태환경이 개선되며 자원리용의 효률이 뚜렷이 높아지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루도록 촉진하며 온 사회가 생산이 발전되고 생활이 부유하며 생태환경이 량호한 문명발전의 길로 나아가도록 추동하는 것.      당대인의 수요와 후대인의 생존조건을 동시에 헤아릴줄 아는 능력을 우리는 가지속발전능력이라 일컫는다. 때문에 중화민족의 당대 국민성에는 당대 가지속발전관이 포함되여야 한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지금에 와서 문화전통과 현대 국가의 새로운 융합을 어떻게 풀어나가는가를 두고 각 민족, 각 나라 지간의 우렬과 차이가 갈라진다. 때문에 민족정신의 고양과 육성을 문화건설의 지상과제로 삼아 국민성에 새로운 활력소를 계속 주입하면서 참신한 민족정신문화풍토를 건설해야 함이 요청된다.      오랜 세월의 풍운과 기나긴 광음의 턴넬을 헤여나오면서 중화민족의 선인들이 창조해낸 리상과 신념은 우리에게 자못 값진 유산으로 된다. 우리는 또한 선인들로부터 민족의 넋을 부단히 재건해야 하는 력사적소명도 함께 받아 안았다. 이는 결코 미룰수 없는 지상과제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와 중국의 선진문화를 지향하는 높이에 서서 중화민족정신문화의 새로운 장성을 쌓아나가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인간중심의 자연-경제-사회 복합계통의 상호조화를 잘 이끌어내여 당대인들의 수요를 만족시킴과 아울러 차세대인들의 생존과 발전을 념두에 두는 과학적생태발전관과 함께 발달한 경제, 문명한 사회, 최적화한 구조, 우수한 자원, 량호한 생태환경을 가진 현대화 국가를 우리 후대들한테 넘겨주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소명이다.  
6    부자 댓글:  조회:3384  추천:42  2009-02-25
    어렸을 때 아버님으로부터 들은 많은 이야기들중에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은 한가지 이야기가 있다. --장천익선생의 호주머니에는 늘 사탕이 가득하였단다. 하기에 선생이 가는곳마다 언제나 아이들 세상이였지.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벌써 동네개구쟁이들이 거실에서 소란을 피우며 기다리고 있다가 선생에게 매달리군 했는데 그때마다 선생은 아이들에게 사탕과 과자를 나누어주며 아이들과 웃고 떠들어대면서 한나절을 보내군 하셨다. 장천익 선생은 참 굉장한 부자였지-     아버님한테서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내 인상에 박힌 골자는 《선생의 호주머니에는 늘 사탕이 가득했다》는 것 뿐 이였다. 그런데 성인이 되면서 《굉장한 부자》라는 아버님 뒤말의 뜻이 서서히 클로즈업되여 자리를 잡게 되였다.     장천익선생은 그 《성가신》 동네개구쟁이들때문에 《굉장한 부자》가 된것이고 또한 《굉장한 부자》라는 이 넉넉함 때문에 《따린과 쇼린》과 같은 명작을 슬슬 뽑아 낼수 있었던 것이다. 장천익선생에게 있어서 동네개구쟁이들은 선생의 재산 총목록이라할수 있었다.     이같은 《부자》가 우리 주변에도 한사람 있다. 한석윤선생을 대할때마다 가끔 떠오르는 생각이다. 그한테는 이같은《부자》특권을 증명이라도 하듯 누구한테도 없는 《무가지보(轟송裂괜)》의 희한한 사진까지 가세되여 있다.     뀉뀉해덩이, 달덩이같은 밝은 웃음을 담은 수백명 아이들속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선생, 마치 손을 흔들며 떠들어대는 그 귀염둥이들이 전부 당신의 재산이기라도 한것처럼 더없이 흡족한 표정이여서 보는 이들이 시샘이 날 정도다.     누구나 다 아이들 《부자》가 될수는 없다. 아이들처럼 활짝 웃으면서 아이들속에 서있다고 하여 아이들 《부자》라고 할수는 없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한다. 어린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고민을 갖고있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방식으로 대인관계를 형성해 나가는지 등 어린이를 꿰뚫어 볼수 있고 어린이들 같은 순결한 정감세계로 리성이 잠자는 어린시절을 용이주도하게 리더할줄 아는 사람만이 어린이라는 이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수 있고 아이들 《부자》자격을 가질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좋아 아이들과 함께 웃고울고 아이들이 귀여워 아이들과 함께 뒹굴고 노래부르며 살아온 20여년, 그 시시각각은 정말 너무너무 행복한 순간들이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한석윤선생의 얼굴에는 진짜 어린애같은 달콤한 미소가 감돈다.     그는 평생을《어린이》라는 이《어른의 아버지》에《효도》하면서 열심히 살아왔다. 일찍 탄탄 벼슬길이 주어졌음에도 마다하고 그는 오로지 어린이를 위한 문학창작, 어린이를 위한 신문간행, 어린이를 위한 장학사업 외곬만 고집하면서 아이들만 바라보며 순수하고 진솔한 삶을 살아왔다.     그의 추구는 단 하나--아이들,《부자》자격을 인정받기 위한 평생의 노력에 만족해하는것이였다. 그는 그 어떤 장엄한 목적이기보다 자기가 좋아서 이 일을 한것이였다. 그의 밝은 웃음이 이 점을 대변하고 있다. 그의 웃음에는 백만장자의 안하무인격의 유들유들함이나 이리저리 눈치재고 발라맞추는 시정배들의 간사함이나 허세를 부리고 폼잡기에 신경쓰는 일부 인테리의 오만함같은 것이 아닌《아이들 부자》라는 그 자랑스러움과 깨끗함에 도취돼있는《시골아저씨》의 그런 신선함이 묻어있다.     아이들이 리해해주고 알아주고 좋아하는 그런 웃음으로 사는 사람, 늘 아이들처럼 종종걸음으로 질주하는 사람, 술 한모금에 아이들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물드는 사람, 늘 반급주제발표회에 나가듯 말쑥하고 단정한 의포단장의 사람, 그의 이 모든 타입은 아이들의 케스에 꼭 맞는《꼬마표》이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어울릴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케스에 꼭맞고,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어울릴수 있어서였을가? 한석윤선생의 아이들과 관련된 모든 사업은 그냥 성공으로 이어져왔다.     그가 소년신문사장으로 있을 때 근 6만에 헤아리는 아이들이 그의 신문을 발벗고 주문여 주었다.     그가 아이들을 위해 나선 《동냥》길에는 늘 귀인들이 나타나 그에게 힘을 실어주군 하였다.     그가 쓴 동시에서는《우리의 민족적 애환이 곳곳에서 느껴지며 그속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해맑은 노래소리가 들려오는듯하여 반갑기만 하다》(박강수. 전한국배재대학교총장)고 세인들은 말한다.     물은 저 깊은 산속 샘에서 나와 계곡을 지나 강물이 되어 흐르다가 망망한 바다로 간다. 인긴의 인생에 비길 때 ,유년시절은 샘에 비길수 있다. 그 어떤 오염도 없는 샘과 같은 아이들의 마음을 보호해주는 역할이 어른들한테 있다. 이제 계곡이나 하천을 지나가면서 오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샘터에서 맞은 왁찐이 항생제역할을 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성인들의 몫일 것이다.     이제 오임의 위험에 로출한 아이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무엇이 본의 아니게 아이들의 건강한 생태환경을 좀먹게 하는지에 대해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람, 《아이들 부자》여서 아이들에게 그냥 마음이 쓰이는 사람--     《어느 학교옆을 지나다 담장에 그려놓은 어마어마한 큰 입 하나를 보았습니다. 어느 아이가 그려놓은것일가? 나는 그 입이 하고 소리지르는듯한 착각에 빠져들었습니다. 정말 그 입앞에서 걸음을 뗄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한테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갈마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평범하게 지나칠수 있는 아이들 담장락서에도 한석윤선생은 아이들 지기답게 마음이 저리고 생각이 착잡할뿐이다. 아이들의《효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중국소수민족문학상, 《진달래문학상》,작가협회문학상, 한국방정환문학상, 계몽아동문학상, 중국출판계최고상《엽성도》상을 비롯하여 군내외의 굵직굵직한 30여개의 상패는 우리의 아이들이 한석윤선생한테 안긴《아이들 부자자격증》이라 할수 있다.     우리한테는 이런《부자》들이 많지 않다.우리 아이들의 생태환경이 점점 좀먹어가는 렬악한 상황에서 향후 더 많은 한석윤, 김석윤, 최석윤, 리석윤, 박석윤과 같은 《부자》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5    어머님의 배포 댓글:  조회:3368  추천:43  2009-02-20
    내가 열살때였다. 어머님은 늘 찹쌀떡이랑 열콩밥이랑 한짐 가득 해들고 모아산으로 가군 하셨다. 거기는 《우파분자》 아버님께서 많은 《우파》들과 더불어 강제로동 같은 것을 하고 계시는 집중영 비슷한 곳이 있었는데 모두들 《부식품기지》라고 하였다.     그런데 거기에 갈 때마다 높은 간부인듯한 사람이 늘 어머님께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쳐대 나는 정말 무서웠다. 하건만 어머님은 그 사람이야 뭐라 지껄이던 그저 담담히 웃으시며 갖고간 음식을 아버님께 대접하시는 데만 마음을 쓰셨다.     어머님의 그 담담한 웃음을 보는 때면 어쩐지 무서움이 가뭇없이 사라지군 하였다. 어느날 나도 가만히 어머님처럼 웃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우락부락한 간부가 전혀 겁나지 않는게 아닌가.     아마 그때부터였을가 나는 그 어떤 곤경에 처할때면 배포유하게 슬그머니 한번 웃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좁은 세상이 넓게 보이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어머님의 마음은 자식의 공부방이라 했던가. 50년대 후반에  《우파》 감투가 아버님께 내려져서 80년대 초반 명예회복을 맞기까지 우리집 수난사의 주역이셨던 어머님은 《우파분자의 마누라》라는 딱지를 달고 장장 30년의 고독, 희한, 비통, 인고를 담담한 웃음으로 흔연히 묵살하며 남편과 자식사랑으로 넉넉한 마음에 기대여 인간비극을 디딤돌처럼 밟고 대범하고 여유있게 살아오셨다. (사진18)     한 여름 찜통더위속의 강변모래자갈치기, 심산밀림에 들어가 약초캐기, 매탄장 석탄리어커 끌기 등 소갈데 말갈데를 가리시지 않으면서 남편과 자식을 위한 처절한 혈전을 벌려온 오랜 세월 나는 어머님한테서 낯을 찡그리며 한숨 짓는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     어머님은 수십년간 그 담담한 웃음으로 인고의 눈물을 삭이면서 나에게 가난에 기죽지 않고 역경을 헤쳐나아가는 용기, 부모에 대한 효심과 인간에 대한 애심을 키우고 인내와 끈질김으로 인생에 도전하는 삶의 자세와 방법을 가르켜 주셨다.     지금도 모아산비탈의 송림속에 외로히 나있는 그 흙길을 떠올리기만 하면 어머님께서 그 특유의 담담한 웃음을 짓고 수걱수걱 걸어오시는 것 같다.
4    아버님의 《유산》 댓글:  조회:3415  추천:42  2009-02-19
    나에게 소장되여있는 수천권의 장서중에서 《기호 1번》은 50년대 초반 모쓰크바 외문서적출판사에서 간행한 쏘련의 천재적 소년화가에 관한 전기체 중편소설집이다.     인제는 책표지가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퇴색하고 보풀이 날대로 난데다가 곰팡이 냄새까지 푹 배이여 그야말로 흉물스러울 정도로 엉망인 책이지만 서렬1위로서의 권위성은 여전하다. 책은 책 이상이고 생명이다고 한 어느 석학의 명언이 나의 이 책의 경우에 꼭 맞는것 같다. 근 40년의 풍상고초의 흔적이 차분히 슴배여있는 이 책을 대할 때마다 나는 늘 더없이 애틋한 정감의 소용돌이속에 잠기군 한다...     60 년대 초반 아버님이 해외망명을 떠나면서 남겨놓은 수천권의 값진 책들은 《분서갱유》의 《문화혁명》세월에, 그것도 《 잡귀신》댁으로 점지돼있는 우리집 처지에서 큰 화근을 자초할 도화선으로 밖에 될 수 없는것이였다. 반동분자 색출에 혈안이 되어 광분하는 《반란파》들의 수색작전에 우리는 언제 무슨 우환거리가 될지 모를 아버님의 장서들을 소각하기로 하였다.     문화혁명이 점차 고조되고있던 1966년 초의 어느날, 우리집 부엌에서는 비감한 분위기가 감도는 분서작업이 단행되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당신의 생명처럼 애지중지하시던 책들이, 당신께서 해외로 떠나시면서 잘 간수하라고 그렇게도 신신당부하셨던 책들이 불과 2년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쫙 벌려진 호랑이 아구리같은 아궁이속으로 들어가 재가 돼버리는 것을 침통하게 지켜보는 엄마와 우리 자식들의 마음은 함께 재가 되는것 같았다.     활활 타번지는 아궁이속으로 끊임없이 던져지는 책들을 무심히 지켜보던 내 눈에 순간 비취색의 화려한 디자인으로 포장된 20절지 정장본 한권이 맞혀들어왔다. 붓과 연필을 문양도안으로 한 책표지가 내 눈을 자극한 탓이였을가? 아궁이 불빛에 금박입힌 표제가 유난히 번쩍거리는 희한한 책이 불속에 갓 던져짐과 동시에 나는 황겁히 그 책을 덥석 집어냈다. 참으로 위기일발의 순간이였다. 두꺼운 책 부피에 소년화가의 그림 삽화들이 페이지 사이에 가담가담 배치되여있는 굉장히 정교한 이 책이 바로 향후  《촉도난》의 내 인생의 파트너로 자리매김을 하며 내 문화적 삶을 부각시켜준 《이른 해돋이》가 된다.     아버님의 모든 장서는 어떤 류형의 책이든 책의 안표지마다에 꼭 당신의 존함 세글자와 함께 책을 구입한 일자가 뚜렷이 박혀있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유일하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이 책만은 아버님의 싸인이 없다. 왜서였을가? 순간 한줌의 재로 될번했던 이 책이 아버님께서 나를 위해 구입하여 보관하신 책이라는 확신과 함께 짜릿한 그 무엇이 전신을 훑어 지나갔다.     어릴 때 나의 소망은 화가가 되는것이였다. 대여섯살 때부터 나의 손에는 늘 크레용, 연필, 분필 같은 화구가 쥐여져 집안의 구석구석, 동네 울타리들에는 나의 《작품》들로 얼룩덜룩하여 부모님이나 동네어른들의 핀잔도 많이 들었다. 내가 잃어졌다고 집에서 소동이 벌어져 시내곳곳을 찾아 헤맬 때 나는 버젓히 쓰딸린 극장 (후에 인민영화관으로 고침)이나 서광장 (지금의 복무대루) 길목에서 겹겹히 둘러선 구경군들속에 진을 치고 앉아 지나가는 자동차나 행인들을 스켓취하느라 날이 저무는줄 모를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소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반급의 벽보를 꾸미는것은 나의 몫이였고 학교미술써클활동은 나의 과외활동의 1번이였다.     그러나 아버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굉장히 엄하셨던 아버님께서 나에게 거신 기대는 작가나 음악가로 대성하는것이지 결코 화가는 아닌것 같았다. 내 의향 같은것은 들어보시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읽으라고 선택해주시는 책도 문학과 관계되는 책들이였고 내가 그렇게 질색해도 우격다짐으로 예술학교에 끌고가 피아노레슨을 받도록 강요하시던 분이셨다.     그런데 《분서》현장에서 뒤늦게 이 책과 만나는 순간 나는 아버님께서 나의 소망을 위해 은근히 마음을 써오셨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후 이 책에 심취되면서 나는 아버님의 무언의 깊은 뜻을 받아 드릴수 있었다.     《풍부한 문학소양을 갖추었을때만이 미술가의 세계에 입문할수 있다.》아버님께서는 책의 주인공 꼴랴 드리뜨리예브를 통해 나에게 이같은 조언을 완벽하게 주고계셨다. 문학과 미술을 대립이 아닌 깊은 련계속에서 파악하도록 충고하고 계셨다. 따라서 아버님께서 왜 나에게 문학서적들을 많이 탐독하도록 하셨는지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아버님께 더없이 감사하면서 《이른해돋이》를 읽고 또 읽었다.     한권의 책은 한 사람의 미래를 바꿔놓을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른해돋이》는 나의 계몽 교과서였다. 이 교과서를 통해 아니, 이 교과서안의 꼴랴주인공의 일기에서 나는 치스쨔꼬브, 레삔, 쎄로브를 비롯한 로씨야의 저명한 화가들과 만날수 있었고 그들로부터 금싸락같은 조언을 받게 된다. 나의 독서필기장에는 그들의 명언이 차례로 기록되고 나의 머리속에는 그들의 훈시가 각인된다. 나는 이 교과서에서 소년천재 꼴랴의 여섯 살 때의 첫발견을 함께 감수하며 미술에서의 원근법과 투시법을 터득한다.     꼴랴 드리뜨리예브는 나의 계몽 스승이였다. 이 스승을 통해 나는 독서방법, 생활습관, 관찰방식, 창작태도를 조정하고 모방하면서 자신의 문화적 삶의 보조를 주인공과 통일시키기 위해 모지름을 쓴다. 주인공의 천재적 자질이 풍부한 독서와 예리한 관찰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나도 꼴랴처럼 자기 주위의 생활을 아주 탐스럽게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살펴보면서 자신의 사색과 행동을 좋은 책으로써 검열하는 습관도 양성해간다. 꼴랴가 문학작품에서 자연과 인간에 대한 묘사를 자세히 읽으며 그것을 공간예술에 담아보고저 쏟아붓는 피타는 노력과 결실은 나를 그처럼 감동시킨다.     뿌슈낀, 크릴로브, 고골리, 뚜르게네브와 같은 문학대가들의 작중 인물과 경물묘사를 회화언어로 핍진하게 형상화하려는 꼴랴의 시도와 실천은 나를 깊히 매료시키며 나의 독서 시각을 새롭게 바로잡아준다. 꼴랴가 뚜르게네브의 작품에서 묘사한 이른해돋이 장면을 화가적 시각으로 현장 재확인을 하는 진지한 모습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나를 감격시킨다...     ---꼴랴는 아침이슬에 젖어 이를 똑똑 쫏으며 제일 높은 봇나무 웃가지에 앉아서 동녘을 주의 깊게 보았다... 겨드랑이 밑에서 뚜르게네브선집 한권과 노트를 끄집어냈다... 뚜르게네브가 아침을 어떻게 묘사했는가를 읽는다. 참 신통하다! 지금이 바로 뚜르게네브가 묘사한 그때이다...《아침이면 보통 잠잠하듯이 사위의 모든 것이 조용하였다. 무엇이나 다 려명의 깊은 잠에 들어 꼼짝하지 않았다...》 나무 웃가지우에서 잘 보이는 오까강 너머에서는 마지막 별 빛이 사라진지 오랬다. 검잇검잇한 지평선은 갑자기 밝아진 하늘에서 떨어지어 그 언저리가 붉으스레해 지며 연분홍빛 금빛광선이 등천을 물들이며 아주 잠잠한 강수의 차디찬 거울에 반영되였다. 《싸늘한 기운이 나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내가 눈을 떳을 때는 아침이 시작되였던 것이였다... 잎들에는 이슬이 맺히고 어디선지 간혹 숨가진 미물들의 소리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지 암소가 소리친듯 하다... 그리고 또 무엇인지 뚝-하는 소리도 들린다...》---     《이른해돋이》란 이 교과서, 꼴랴드미뜨리예브란 이 스승이 곁에 있어 나는 외롭지 않았다. 1966년 내가 열다섯살 때 《이른해돋이》를 사귀여 어언 4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하면서 꼴랴드미뜨리예브는 내가 어디에 가든 붙어다니며 나를 독려하고 힘과 용기를 준 믿음직한 파트너였다. 간고했던 지난 《하향지식청년》시절에나, 저수지공사판에서 인생수업에 열중하던 때에나, 그 후 랑만과 허탈, 흥분과 실망의 인정세태를 두루 감수하며 여러 분야를 전전해오던 나날에도 《이른해돋이》란 이 교과서, 꼴랴란 이 스승에 대한 내 자신의 믿음과 사랑은 변치않았다. 그 믿음과 사랑의 중심에는 늘 아버님이 서계셨다.     《이른해돋이》는 내가 인생의 험준한 바다를 항해하는데 희망과 좌표가 되게끔 아버님께서 나몰래 마련해 준 안내자요 라침판이요 망원경이였다. 《이른해돋이》를 읽으면서 나는 자랐고 《이른해돋이》를 실천하면서 나는 아버님의 뜻을 무르익혔다. 《이른해돋이》가 내 인생을 부각시켰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해돋이》와 인연을 맺어 40년가까운 세월에 나는 유화작품 몇폭을 출세시키면서 미술창작을 해봤고 책 장정 설계, 삽화창작에 골을 썩이며 출판사 미술편집도 해보았고 에세이를 긁적거리면서 문학편집도 해보았다. 당기관에서, 잡지사, 방송국이나 신문출판 등 언론분야로 떠돌기도 하고 대학연단에도 서보면서 《여러우물을 파고》《한마리 토끼도 못잡고 만》《무재》신세지만 《이른해돋이》의 주인공의 부추킴으로 언제나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시험해보는 감동속에서 살고 싶었다. 리어령박사의 독백처럼 《내가 원하는 것은 완성이 아니다. 눈 뜨는 것, 첫 걸음을 내딛는 것, 처음 보는 것, 겨냥하는 것...》 그 와중에서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아버님께서도 나의 이 같은 인생선택과 태도에 반기를 드시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지금까지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몸가짐으로 살아왔다.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 《이른해돋이》의 화려한 디자인, 정교한 포장, 고급스런 종이는 퇴색하고 보풀이 심하게 났으며 페이지마다 군데군데 색연필과 만년필로 그어놓은 줄들로 울긋불긋하고 손때가 더덕더덕 앉아 미용이 형편없이 되었다. 나또한 열다섯살 소년으로 이 책에 《입문》하여 어느덧 지천명의 언덕에 올랐다. 하지만 《이른해돋이》와 나 사이의 관계에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아마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까지도 여전할 것이다.     아버님의 수천권 장서에서 유일하게 목숨을 건진 《이른 해돋이》, 나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유산》일 수밖에 없는 무가지보이다.     오늘도 나는 《이른해돋이》를 어루쓸며 책에서 풍기는 수십년 세월의 그 익숙한 내음에 도취되면서 아버님께 감사하고 있다.  
3    채영춘 프로필 댓글:  조회:2426  추천:35  2009-02-19
채영춘 략력: 출생: 1951년 연길 학력: 1984년 연변대학 중문학부 1985년부터 2004년사이 연변주위판공실 처장,연변주위 《지부생활》잡지사 총편집,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국장, 연변조선족자치주신문출판국 국장 력임. 현재 연변주위 선전부 부부장, 연변대학 겸직교수, 연변작가협회리사, 연변미술가협회 부주석. 작품:  에세이집 《래일도 연은 하늘에서 날것이다.》(2001년)등 저서, 《에서의 반문법》,《미적감각의 형상화에서 본 장홍을의 예술추구》등 다수 론문 발표.   해란강문학상(2001년),화신문학상(2004년)등 수상.  
2    황소영탄곡 댓글:  조회:3602  추천:38  2009-02-08
이 땅 가장 원초적이고 토속적이고 순수한 내음이 머무르는 곳, 그 어떤 치례나 분장도 필요없이 그 자체의 순결함과 청초함으로 끝내주는 곳이 시골이다. 그래서 도시는 얼굴을 갖고 시골은 령혼을 갖는다고 했던가? 그런데 시골의 그 령혼을 떠올릴 때마다 산천, 전답, 농가, 농부와 더불어 단연 뗄래야 뗄수 없는 친숙한 벗이 있으니 그게 바로 소가 아닌가 한다. 삭막과 살벌함이 진동하던 지난 세기 60년대 하순의 연길도회지를 하직하고 새 삶의 터전을 평강벌의 화룡현 룡문공사 연풍 7대(지금의 화룡시 투도진 연풍촌)로 옮겼던 40년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며는 자연히 기억에 맞춰오면서 언녕 저세상으로 사라진 그 생령들을 지나간 내 삶의 궤적과 더불어 되살려본다. 괘씸한 소 1969년 11월의 어느날, 전날 내린 눈으로 소복단장을 한 마을은 한폭의 아름다운 화폭으로 변신하였다. 하지만 집체호는 비상이 걸렸다. 농가마다에 흩어져 민박하다가 새로 지은 집체호숙소에 입주한지 불과 일주일이 되지 않아 아직 겨울 날 화목을 전혀 장만하지 못한 상황에서 눈내린 뒤의 설경에 도취될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것이다. 하향지식청년이란 월계관을 쓰고 이 시골에 정착한지가 1년하고 한달, 모든게 촌민들의 배려손길이 닿아야 가동이 가능한 집체호의 삶이다. 그런데 이날만은 촌민들의 도움이 없이 지난해 촌민들과 입산하여 땔나무를 했던 그 소꼬리만한 경험을 살려 집체호 겨울을 날 화목을 우리절로 해오고싶은것이 우리의 마음이였다. 우리를 그냥 철딱서니 없는 《시내아이》들로 아니꼽게 펌하해 부르며 사사건건 잔소리만 하는 동네 일부 어른들한테 그 무엇가를 보여주고싶었던것이다. 그리하여 생산대장이 농군 한분을 붙여주려 했으나 끝내 생고집을 부리며 그까짓것 우리끼리 얼마든지 할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우리가 정착한 촌은 수전농사를 주로 하는 벌방지대라 화목감을 해오려면 마을에서 수십리 더 떨어진 산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화목 한수레를 해오기 위해 집체호 전원 16명중 13명이 동원된 건영을 보고 내가 촌민들은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혀를 끌끌찼다. 농촌에 내려온지 1년 남짓, 아직까지 강냉이쌀을 기본으로 하는 정량배급제에 의해 살다보니 입쌀고장에 왔어도 입쌀밥을 배불리 먹을수 없었던 세월이였다. 하지만 이날만은 백사 불구하고 13명 인력이 한번 근사하게 먹을 이밥을 큰 양푼에 푸짐히 해담고 거기에다 아끼던 콩기름도 팍팍 넣어 볶아낸 구수한 배추호국수볶음채까지 곁들인 점심도시락을 한짐해실고 일행은 호호탕탕하게 입산했다. 이처럼 인력이 잘 동원된데는 물론 오랜만에 산에서 이밥을 목이 메게 먹을수 있다는 그 유혹이 어지간히 작용했던것 같다. 두시간 남짓이 걸어 가둑나무가 무성한 심산속에 도착하니 벌써 슬슬 배가 고파왔다. 아니 큰 양푼에 듬뿍 담은 그 이밥이 눈에 자꾸 마쳐온것이다. 다들 그런 눈치다. 우선은 소를 멍에에서 풀어내여 수레채에 잘 동여매놓고 싣고 온 벼짚을 두병쪼각과 함께 소가 마음대로 먹으라고 푸짐히 놓아주었다. 나는 13명 인력을 세개 조로 나누고 곧 땔나무작업에 투입시켰다. 한시간도 채 안돼 도처에서 《배가 고프다》, 《밥을 먹고 계속하는게 어떠냐》 고들 떠들며 난리다. 물론 내색은 내지 않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제 볼이 메게 이밥을 퍼넣고 구수한 볶음채를 씹을 광경을 떠올리며 맥없는줄 모르겠다. 그렇게 두시간가량 지났다. 사처에 흩어져 일하던 일행은 땔나무단을 메고 끌고 하면서 거의 동시에 수레앞에 와 모였다. 이?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수레우에 잘 싸놓았던 점심밥보자기는 다 풀어져있고 큰 양푼안의 이밥과 반찬은 이미 깨끗이 거덜나 있었다. 수레옆에는 온 상판에 밥알을 다닥다닥 단 소가 우리를 빤히 쳐다보며 서있는게 아닌가! 뜻밖의 광경에 우리는 입을 딱 벌린채 할말을 잊고 제자리에 멍청하니 굳어져버렸다. 이게 웬 날벼락이람? 소가 밥을 들춰먹다니?! 어떻게 보자기로 꽁꽁 싸놓은걸 입으로 풀수 있단 말인가? 중학교때 로신의 작품에서 《소는 풀을 먹고 우유를 바친다》는 글을 읽으면서 풀만 먹고 인간에게 우유를 제공하는 소의 고매한 품성에 얼마나 감동했던가? 소는 밥을 못 먹는다고 생각했던것이 화근을 자초한것 같았다. 침묵도 잠시, 그처럼 잔뜩 기대했던 이밥과 반찬을 깡그리 소한테 먹히우자 일행의 울분은 폭발하고야말았다. 누가 먼저라 할것없이 모두는 일제히 소한테 달려들어 마구 차고 때리며 분풀이를 해댔다. 소고삐가 수레채에 꽁꽁매여져있어 소는 선자리에서 고스란히 당할수밖에 없었다. 가끔 처량한 울음소리를 토하기도 하고 애원하는듯한 눈빛으로 우리를 힐끔거리기도 하며 소는 매우 불안해하며 머리를 수그린채 우리의 매를 그대로 받고있었다. 한바탕 소에게 분풀이를 하고난 우리는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제자리에 털썩털썩 주저앉고말았다. 인젠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무인지경인 이 눈덮인 산속에서 배를 곯고있는 불쌍한 애들에게 누군가 따뜻한 밥을 지어올리는 만무하였다. 그나마 땅바닥에 소가 먹던 두병쪼각들이 널려있어 그것으로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랠수 있는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했다. 그러니 소와 우리는 점심밥을 바꿔먹은격이 돼버렸다. 결국 지치고 허기진 몸을 지탱하며 우리는 나무단을 수레에 실었다. 나무단을 실은 소수레를 몰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내려오면서 우리는 계속 소를 괴롭혔다. 소수레가 들썩이면서 나무단이 떨어지면 소에게 호통을 치며 매질을 했고 소가 발을 곱디뎌 비틀거리기라도 하면 또 욕지거리를 하며 매질했다. 나중에는 우리도 지쳐버려 소에 대해 관용을 베풀수밖에 없었다. 후줄군하게 소수레뒤에 따라선 이 패잔병 같은 대오를 보고 가끔 까마귀가 날아지나가며 비웃듯 까욱거린다. 아마 그 소로 말하면 세상에 태여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는 짚만 먹지 이밥은 먹을줄 모른다》고 여기는 도회지 숙맥들 《덕분》에 뜨끈한 밥 한양푼을 구수한 반찬에 곁들여 뚝딱 맛있게 포식했을것이다. 물론 그 대가도 톡톡히 치리기는 했지만. 《시내아이》들을 얕잡아보는 마을사람들에게 한번 본때를 보여주려던 우리의 작전은 결국 괘씸한 소때문에 실패로 돌아간것은 물론 점심밥을 소에게 빼앗긴 이 사건은 그후 두고두고 촌민들의 웃음거리가 되여 한동안 우리가 머리를 들수 없게 만들었다. 불쌍한 소 1970년 7월의 어느날, 가만히 앉아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려 움직이기조차 귀찮은 삼복철이건만 나는 집체호의 B와 함께 20리 떨어진 두도(头道)로 행차해야만 했다. 그것도 벼가마니를 박아실은 소수레를 몰고가는 고역이였다. 집체호의 쌀사정이 나빠 오늘안으로 벼를 찧지 않으면 래일부터는 또 농가의 《배려》를 호소할수밖에 없는 상황에 치닿았기때문이였다. 힘깨나 쓸만한 부림소들은 모두 십리평 원경지로 부업을 떠나다보니 차례진 소는 그닥 탐탁치 않았다. 집체호 인력이 대거 동원되여 땀동이나 꽤 흘려 벼 10가마니를 수레에 다 싣고나니 해가 중천에 와있다. 우리가 사는 연풍촌에서 투도로 가는 길은 두갈래이다. 하나는 룡문에서 투도로 통하는 자동차도로이고 다른 하나는 연풍에서 투도까지의 전답사이에 꼬불꼬불 뻗은 수레길이다. 물론 자동차도로가 훨씬 편리하겠지만 많이 에돌아가야 하는 점을 감안하여 결국 수레길을 선택하게 되였다. 날씨는 숨이 콱 막히도록 무덥지만 수레길은 어제 저녁녘에 쏘아진 소나기로 여간 말째지 않았다.깊이 패워있는 수레바퀴홈에 잔뜩 고인 진흙탕물이 바퀴가 굴러떨어질 때마다 흙물을 한반씩 튕기는바람에 얼마 안가 우리 두 사람의 몰골은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아예 수레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소에게 자유를 주기로 하였다. 워낙 시원찮은 소에게 고온날씨는 상당한 부담이였다. 거기에다 벼가마니를 실을 때 너무 앞쪽으로 처지게 싣는바람에 소는 그냥 수레멍에 심하게 눌리운 상태에서 대단히 힘든 행보를 하고있었다. 입에서는 느침이 한발이나 흘러내려 드리웠고 발은 내디딜 때마다 심하게 떨렸다. 담박이라도 길바닥에 드러누울 그런 자세였다. 그러나 우리 또한 찌는듯 무더운 한낮의 불볕에 어정쩡하게 겨우 걸음을 옮겨놓다보니 소를 배려할 그런 형편이 못되였다. 바로 이때다. 우리가 방심한 사이 소는 그 무거운 벼가마니를 실은 수레를 끌고 길옆의 물웅뎅이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갈증을 이기지 못한 소의 돌발적인 행보였다. 우리가 급히 달려왔으나 때는 늦었다. 아차 할사이도 없이 소와 수레는 그대로 길옆 웅뎅이속에 빠지고말았다. 웅뎅이속에 발목까지 빠져 뒤척이는 소를 보면서 우리는 그저 망연자실해서 소주위를 맴돌아칠뿐이였다. 눈에서는 노란 불똥이 튀였다. 이때 길가던 촌로 한분이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아예 우리를 뒤로 확 밀쳐버리더니 우선 소목을 압박하는 멍에를 쳐들면서 심하게 패들어간 목저패를 안깐힘을 써 풀어내였다. 목끈이 풀리자바람으로 소는 물웅뎅이에서 뛰쳐나왔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여서 우리는 그저 엉거주춤하고있는데 촌로의 호통이 추상같이 떨어진다. 《넘, 이렇게 짐을 실으니 소가 어떻게 견뎌낸다든... 쯧쯧!!》 《어휴, 몰골을 보아하니 네놈들은 집체호녀석들이렸다?!》 뭣들 하느냐? 이 벼가마니를 빨리 부리우고 수레를 끌어내지 않구!》 이 시각 촌로의 호통은 조금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살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처럼 개운하기까지 하다. 촌로가 시키는대로 벼 10가마니를 전부 길바닥에 부리우고 수레를 웅뎅이에서 끌어내오고나니 숨이 저절로 나온다. 고마운 로인의 도움으로 벼가마니를 다시 싣고 길을 떠나는 우리의 모양새는 누가 봐도 포복절도할만한 감이였다.  우리 둘은 서로의 몰골을 마주보며 한바탕 웃어제꼈다. 투도 쌀정미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여서 모두 식사하러 가고 없었다.  차라리 잘됐다싶었다.  우리는 근처의 강가에 나가 시원히 목욕을 하고 갖고온 도시락을 풀어 점심식사를 하면서 잠시나마 오전에 겪었던 봉변을 여유있게 돌이켜볼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후 부랴부랴 정미소에 달려가 벼를 다 찧어 마대에 담아 수레에 싣고나니 오후 3시가 지났다. 우리는 올 때의 경험을 살려 멀더라도 투도--룡문 자동차도로를 선택하여 돌아가기로 하였다. 투도에서 진화(进化 룡문 가기전의 마을)까지는 그런대로 자동차도로여서 편안하게 갔다.  그런데 진화마을에서 연풍마을로 꺾어들어가는 소수레길이 자꾸 맘이 걸린다.  그 구간은 워낙 길이 잘 정리되지 않은데다가 늘 도랑물의 침습으로 군데군데 습지가 형성되여있어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있었다.  여기를 에돌만한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라 우리는 그냥 그 문제의 구간을 향해 직진했다. 하는 생각과 더불어 연풍마을까지 멀지 않았다는 일종의 위안감도 동반시켜 나는 애써 긴장감을 없애고저 했다. 문제의 습지구역까지 와보니 오늘 하루동안의 땡볕으로 땅이 많이 말라있는듯했다.  적어도 수레길표면은 별 위험징후 같은것은 보이지 않았다.  길옆에는 길손들이 놓은 징검돌을 골라 밟으며 소수레를 몰고 나갔다.  사실 마른것처럼 보이는 소수레길밑에는 많은 웅뎅이들이 도사리고있었다. 이것을 알리 없는 우리는 주저없이 수레를 몰고나갔다.  사건은 터지고야말았다.  수레바퀴 한쪽이 수렁이속에 거의 다 빠져들어가 수레는 꼼짝달싹할수 없게 되였다.  소도 수레채에 눌리여 버둥거리며 죽는다고 난리다.  투도로 떠날 때 겪었던 상황이 또다시 재연된것이다.  우리는 썩은 내가 진동하는 웅뎅이에 빠져있는 소수레옆에서 우왕좌왕하며 어쩔바를 몰랐다.  지나가는 길손도 보이지 않아 그 어떤 도움도 바랄수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이 국면을 헤쳐나갈 길이 없음을 알자 나는 B를 마을로 구조요청을 가게 하였다.  그동안 나는 근처에서 나무장대기를 구해다가 수레바퀴밑에 꼽아넣어 그런대로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수레를 고정시켰다.  소도 잠시 바쁜대로 그 상태에서 숨을 몰아쉰다. 약 30분 가량 지나 집체호 동무들과 촌민들이 삽과 괭이을 챙겨들고 사고현장으로 달려왔다.  우선 소멍에에서 목저패를 풀어내고 소를 살려내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소고삐가 소목에 너무 깊게 조여져들어가 그것을 풀어낸다는것은 어림도 없었다.  손칼을 가지고 팽팽하게 패여들어간 목저패를 겨우 베여버리고 소를 구출해내였지만 역시 소목에 상처를 내고말았다. 수레에서 쌀매대를 부리우고 수레를 진펄에서 끌어냈다.  오전에 했던 동작을 또 반복한것이다. 두번의 죽을 고비를 맞았던 소는  아예 멀지감치 달아나버리더니 경계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흘겨보면서 근처에 오려 하지 않는다. 두차례의 경난을 겪고나니 나도 심신이 형편없이 지쳤다.  하지만 소에 대한 송구함,  소에 대한 믿음,  소에 대한 련민의 정 같은 감정들이 서로 엇갈리면서 자꾸 소한테 눈이 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탐탁치 못한 체구를 가진 시원찮은 놈이지만 그래도 우리 숙맥들을 믿고 따라나서 함께 환난을 겪으면서 뗄수 없는 인연으로 더없이 가까와졌다는 생각으로 나는 내 얼굴을 소머리에 비벼댔다.  내 뜻을 알기라도 하듯 소는 두 귀를 쫑깃거리고 큰 눈을 슴벅거린다. 아마 그 소로 말하면 세상에 태여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와 B와 같은 형편없는 도회지 숙맥들 《덕분》에 하루동안 두번이나 죽을 고비를 맞았을것이다. 하루동안 똑같은 징크스를 두번이나 반복하게 된 연유,  그리고 두번의 소수레 구조작업이 모두 남들에 의해 진행됐음을 되새기는 순간 우리를 홱 밀치면서 웅뎅이속에 뛰여들어 민첩하게 소를 구출해내고 소에 대한 우리의 경솔함을 무자비하게 질책하던 그 촌로의 강개한 기품이 클로즈업되여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촌로와 나의 근본적인 구별은 소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된것이였다. 만약 내가 촌로처럼 소에 대한 진지한 감정을 갖고있었다면 두차례의 징크스는 결코 나한테서 생기지 않았을것이고 또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나와 B의 노력으로 소수레구조작업은 완전히 가능할수 있지 않았을가? 40년 세월이 흘렀으나 《괘씸한 소》,  《불쌍한 소》  그리고 이 글에 미처 오르지 못한 《억울한 소》,  《무던한 소》를 망라한 각양각색 소들과 뒤엉킨 희로애락의 다큐멘터리들은 그냥 내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그 소들이 그립다. 시골에서 소와 더불어 흘러보낸 수년 세월을 거쳐 나는 소에 대한 나의 감정,  소에 대한 나의 믿음과 신뢰, 소에 대한 나의 격정이 진지하게 승화하였다고 자부한다. 세월은 흐르고 시대는 변하여 부림소로서의 소의 기능이 변화를 가져와도 지금까지 우리 민족과 더불어 이 강토를 개간하고 건설하는 력사행정에서 가장 충직한 파트너로 우리켵을 지켜주고 모든 고통과 아픔,  슬픔을 감내하며 말없이 보여준 소의 미덕은 영구불멸의 위대한 상징물로 자리매김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연변일보 2009-2-5 13:56:27)
1    “중국인은 저쪽켠으로!” 댓글:  조회:4734  추천:171  2008-05-11
미국 LA의 어느 호텔 구내 식당문에 대문짝만하게 걸려있는 중문표시판에서 우리 일행은 멈춰섰다. 결국 매니저의 안내로 우리 몇몇 중국인들은 서양인 식당과 떨어져 있는 “저쪽켠”에 림시 마련된 공간에서 묘한 감정을 느끼며 불유쾌한 아침식사를 치렀다. 나오면서 보니 중국인과 서양인들의 식사메뉴는 같았다. 그리고 그 안내판의 해석대로라면 “일본인”이나 “한국인”등 아세시아계의 외국인은 “저쪽켠”으로 갈 필요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이건 중국인에 대한 배려차원이 아닌 그 어떤 차별화로밖에 볼수 없다. 지난해 6월 필자가 미국에서 겪었던 장면이다. 그날 필자는 하루종일 울적한 기분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중국의 반봉건, 반식민지 시기 제국주의 렬강이 상해조계지에 “중국인과 개는 들어오지 못한다”는 간판을 버젓이 걸어놓고 중국인을 로골적으로 릉멸한 그 치욕의 력사가 다시 되풀이되는듯한 느낌이랄가! 왜 “중국인은 저쪽켠으로”인가? 20세기 초엽에는 부패무능한 청나라정부가 그 원인이였다. 하다면 오늘날 우리 나라가 강성대국으로 발돋음움하는 시점에서 중국인이 서방나라의 호텔 식당에서 차별화를 받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4년전 독일 어느 호텔의 구내 부페식당에서 목격한 중국관광객들의 추태가 떠오르며 필자는 올것이 끝내 왔구나 하는 느낌과 함께 중국인에 대한 차별화 리유를 알것 같았다. 그날 아늑하고 조용하던 아침식사장이 홀제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중국 남방지역에서 온 단체 관광객 십여명이 왁작 떠들며 들이닥친다. 한참 식사중이던 서양인들은 놀란 표정으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한다. 중국관광객들은 보겠으면 보란듯이 음식을 배렬해놓은 선반앞으로 모여들더니 앞다퉈 갖가지 료리를 자기 쟁반에 넘쳐나게 퍼담는다. 결국 담아온 료리는 절반도 못 먹고 팽개치고 나간다. 그대신 삶은 계란과 과실들은 무더기로 가져다 주저없이 제 가방에 넣는다. 그뿐인가. 음식을 먹으면서 쉴새없이 지껄여대고 식당안이 떠나가라 웃어댄다. 주변의 외국인들 보는 앞에서 이쑤시는 묘기를 보여주둣듯 입을 짝 벌리고 이쑤시개로 거창하게 쑤셔대고는 쑤셔낸 찌꺼기를 되알지게 뱉아어내는 추태, “홰액!” 하고 가래를 돋궈서는 식탁밑에 팽하고 뱉아어대는 꼬락서니…. 나는 낯이 뜨거워 도무지 앉아있을수 없었다. 힐끔 서양인들을 훔쳐보았더니 그들은 찡그린 표정이 아니고 재미있는 구경거릴르리를 대하듯 미소 띤 얼굴로 자못 진지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어떤 표정이든 결과적으로는 식당안에서 중국인의 추태를 기분좋게 받아들일리 없음은 불보듯 뻔하다. 이같은 현장은 우연한것이 아니다. 왜“중국인은 저쪽켠으로”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공중장소에서의 방약무인(旁若无人)이 서양인의 징계조치를 불렀다. 누굴 탓할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비건강전한 공중도덕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날의 국력이 강해지고 국민생활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조선족을 망라한 중국인의 체질과 외모가 강건하고 미끈하더라도 령혼이 건전하지 못하면 오늘의 글로벌화시대에서 배척받을수 있다. 저명한 작가 백양은 “중국은 군중적이지 사회적이 아니다”란 의미심장한 말을 한적이 있다. 우리의 국민성에서 사회적 자각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국제사회에 합류하는 과정에 그냥 “저쪽켠”으로 밀리우는 비극을 낳을수 있다. 연변은 동북아 금삼각지역으로서 글로벌화의 물결이 점점 거세게 도래하고있다. 하지만 조선족을 망라한 연변인의 공중도덕은 이같은 시대발전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상황이다. 연변의 곳곳에서 우리는 방약무인(旁若无人)의 “맹진”행진을 거침없이 단행하고 있는 존재들을 손쉽게 목격하게 된다. 공중장소에서 그 무슨 목청 비기기라도 하듯 떠들썩하게 휴대폰을 걸어대는 “맹인”남녀들, 붉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오가는 차량에 도리여 눈을 부라리며 당당하게 도로를 횡단하는 “맹인”들,  자신의 부주의로 대방을 밀쳐놓고도 사과는 커녕 주먹을 휘두르는 “맹인”들… 공중도덕범주에 속하는 이같은 추태가 한 지역사회 나아가서 나라 전반의 형상을 비뚤어지게 한다. 우리 국민의 사회적 자각이 구멍이 생긴다면 오늘은 세계인의 식당에서 “저쪽켠으로” 밀릴것이고 래일은 또 다른 세계인의 공중장소에서 “저쪽켠으로” 밀리우면서 중국이라는 이 5천년 문명력사를 자랑하는 강성대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억울함을 당해야 할것이다. “사회주의 핵심가치체계를 국민교육과 정신문명건설의 전 과정에 녹아들게 함으로써 인민의 자각적인 추구대상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17차 당대회의 절절한 호소가 현실화될 때 우리의 사회공중도덕은 새로운 부흥을 맞게 될것이다. 이는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인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장기적인 숙제이다. 중국인이 당당히 국제 주류사회 공중도덕중심에 서게 될 그날을 기대해본다. (연변일보 2008-2-29 6: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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