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을 날아온 사람아, 사람아
심명주
1.
2월의 룡정 동산, 깊은 겨울에서 깨여난 날씨가 거둬가지 못한 싸늘한 바람으로 성성하니 산길을 맴돈다. 이른아침이라 얼음이 미끌거리는 위태위태한 산등성이를 톺아 동산마루 큰길에 들어섰다. 낯선 듯 익은 산의 기운들이 확 안겨온다. 립춘이 지난 뒤에 추운 날씨가 이토록 바장이는 것은 해빛의 세례가 아직 완연하지 못한 까닭이요 더구나 바람을 안고 갈 길을 담금질하는 사람 맘이 은근한 초조함과 벌써부터 맞혀오는 그리움으로 얽혀있는 까닭이다.
동산의 산마루에 올라 익혀둔 큰길을 따라 한참을 달리니 ‘윤동주묘소’라고 쓴 패쪽이 타향에서 만난 지인처럼 반갑게 안내해준다. 얼마 전에 내린 흰 눈들이 아직 도톰한 이불인양 갖가지 옛말이 다듬이된 줄느런한 묘소들을 메워주는 사이사이를 가로질러 정갈한 정원을 방불케 하는 윤동주의 봉분 앞에 다다랐다.
소담하게 쌓인 묘 앞켠 량쪽에는 키높이로 자란 소나무 두그루가 변함없는 푸름을 선사하고 다시 그 뒤 량옆으로 장성한 박달나무 두그루 역시 어전의 문무호위인 듯 혹은 시인의 성품인 듯 어질게 그러나 드팀없이 서있다.
눈이 내리고 또 바람 불기를 몇십성상이던가. 잠간 광명을 선사한 해돋이는 어느 사이 모습을 감추고 낮은 하늘에는 묵직한 구름층이 덮여있다. 그들의 보우로싸하던 바람날씨에서는 봄을 예고하는 훈훈함이 묻어난다.
룡정·윤동주연구회(룡윤회)의 주최로 진행될 ‘백명의 시민, 백년의 시인을 노래하다’라는 테마의 윤동주 추모행사에 동참하고저 조금 뒤 이곳으로 200여명의 시민들이 모일 것이니.
2.
윤동주, 일제 암흑시기 만주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여나 오늘날 추앙의 성좌로 하늘에 새김된 시인, 여기서 잠간 윤동주의 가문과 시인의 생애를 간략해 본다.
-1886년 관향은 파평으로 증조부 윤재옥에 의해 함경도 종성에서 간도의 지동으로 이주했다.
-1900년 조부 윤하현이 명동촌으로 이주했으며 이보다 한해 전(1899년)에 외삼촌 규암 김약연이 이주했다.
-1910년 윤동주 일가와 김약연이 기독교에 입문했다.
-1917년 12월 30일 파평 윤씨 윤영석(부)과 김룡(모) 사이에서 가문의 맏아들로 윤동주가 태여났다. 아명은 해환, 당시 부친은 명동소학 교원이였다.
-1925년 명동소학 졸업했다.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 동시 잡지 발간했다.
-1932년 고종 송몽규, 동기 문익환과 함께 룡정 은진중학교에 입학, 가족이 룡정으로 이사했다.
-1935년 9월 평양 숭실중학교에 편입했다.
-1936년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이 페교되여 룡정 광명중학으로 편입되였다.
-1938년 연희전문대 입학. 시 로 시형태를 변경했다.
-1942년 도꾜 릿꾜대학 입학, 같은 해 도지샤대학 영문학과 입학했다.
-1943년 7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였다.
-1945년 2월 16일 새벽 3시 36분 일본감옥에서 생체실험품으로 옥사했다.
짧은 생을 마감하고 이 세상을 떠난 시인,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의 글이 지치지 않는 생명을 발산하고 있는 원인은 다만 명경지수의 진솔한 고백인 그의 시 때문만이 아니다. 조상으로부터 이어온 대높은 굳은 지조의 가문에서 윤동주는 잉태되면서 이미 몸에 민족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고귀하고 섬세한 기품을 서리높이 품은 령혼이였다.
그가 살아온 시대는 동트기 전의 새벽 같이 어둠이 가장 창궐하던 시대였다. 현대사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자신의 글들을 낯 뜨거운 변절로 얼룩지게 만들었던 하많은 문인들 속에서, 윤동주만은 자신의 시를 뛰여넘어 시종일관 순절이라는 지조 높은 후광을 떳떳이 발산한 사람이다.
그의 평범한 듯 맑고 지극스러운 성정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숨 멎도록 뭉클하고 따뜻한 무언의 기운이 팔다리, 어깨까지 포근히 얹혀져 심방을 적시여온다. 인성이 마멸되고 시비가 전도된 불우한 시대에 태여났으나 그것에 한치 타협함이 없이 자아성찰과 부끄러움의 미학으로 오롯이 인간의 순수함을 지향하고 민족을 지키고 진리에 대한 열정의 추구를 지조로 삼아온 시인이다.
지난 세기 그가 선득거리는 칼 같은 순절로 암흑시대를 가로질렀다면 오늘날 그의 순절은 라태하고 꿈을 잃어가는 우리에게 부드러운 채찍으로 되여 자근자근 다져주는 아름다운 편달이다. 이 또한 윤동주가 세상을 뜨고 다시 40년 뒤 1985년에 우리들 앞에 시성으로 부활된 리유이리라.
그런 윤동주가 2017년인 올해 청청한 백세의 로인으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2월 16일 이날은 또 그가 옥사한지 72돐이 되는 날이다.
생생한 육필체가 기다리는 윤동주의 생가를 이웃하고 삶을 갈무리해간다는 것은 우리가 받은 천운이요, 그의 묘소가 자리잡아 빛이 나는 동산으로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서 숨을 쉬고 있음은 우리에게 부여된 감격과 자랑이다. 그러니 우리가 반드시 시인을 추앙하지 않을 리유가 무엇일가.
이런 뜻깊은 한해를 맞아 룡윤회에서는 백명의 시민과 더불어 그의 옥사일인 2월 16일, 그이의 묘소를 경배하는 행사를 펼치기로 기획을 세웠다.
3.
행사기획과 더불어 룡윤회의 행보가 부지런히 움직여졌다.
우선, 룡윤회 임원들의 지원으로 손수 묘소 앞 두그루의 소나무를 장식할 5백여송이의 흰꽃을 한송이 한송이 수제로 만들기로 했다.
꽃이 만들어지자 꽃송이를 나무에 매여다는 작업이 난제로 떠올랐다. 그러자 한번 비틀면 쉽게 매달 수 있는 장식용 쇠줄로 꽃을 달자는 의견이 자연스럽게 제기되였고 그러다가 쇠줄의 특정상 자연파괴와 소나무의 생태보존에 불리하므로 나중에 풍화작용으로 자연에 녹아버릴 노끈이나 실끈으로 수제꽃을 만들자는 의견으로 번복이 되였다. 이미 만들어진 쇠줄끈의 꽃들은 죄다 다시 노끈이거나 실끈으로 바뀌는 번거로움을 겪었지만 어느 한사람 불평이 없었다.
성원에 힘입어 함께 동참할 시민이 백명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따라서 묘소에서의 질서유지 문제가 시급했다. 이에 룡윤회 몇십명 임원이 하나같이 동원되여 솔선수범으로 행동을 보여주며 시민대오를 이끌기로 약속을 모았다.
특히 행사 당일 윤동주 묘소 외 주위의 다른 묘소들에 대한 침례를 의식하여 마음대로 다른 무덤들을 밟지 말거나 청결을 보장해줄 것 등 당부 메시지를 미리 십수차 시민들께 올렸고 또한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어두운 계렬의 복장을 통일로 착복하며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해줄 것도 곁들여 주문하는 등 세세한 전제 작업들이 이어졌다.
진정성이 바탕이 된 행사 동원으로 참여 시민이 한명한명 늘어나 끝내는 백오십명을 넘치였고 행사 전날이 되여 결국 이백여명으로 치달았다…
2월 16일 오전 9시 반, 묘소 봉분 량옆의 푸른 소나무에는 룡윤회 회원들이 아침 새벽 먼저 와서 직접 손으로 한송이 한송이 정성들여 만들어 달아놓은 몇백송이 희디흰 종이꽃들이 목련마냥 소담히 피여있었다. 시인 묘소의 제단에는 성의가 한가득한 제물이 차려져있었고 흰 생화로 광주리 가득 메운 꽃바구니도 묘소 곁에 다복이 놓여있었다.
범상치 아니한 시인의 과거를 뜻하는 듯 옅은 흙색을 바탕으로 프린트된 대형 프랑카트가 맨 먼저 묘소에 세워졌다. 그 오른쪽 크낙한 한면을 감성적이나 강인한 시인의 흑백 모습이 바탕색과 강렬한 조화를 이루어 눈길을 끌고 프랑카트 왼쪽은 짙은 락엽색의 손바닥인양 ‘윤동주’라는 검은 테의 하얀 이름 석자를 오연히 떠받치고 있다. 하늘과 땅을 오롯한 병풍처럼 두개의 대형 프랑카트는 묘소 뒤 그리고 묘소 맞은편 나무에 각각 세워져 서로 호응하듯 어우르듯 곧 도착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을 기다려 일사불란히 달려온, 유표한 명찰을 앞섶에 드리운 룡윤회 회원들은 새벽 일찍부터 나와 저마다 자기 위치에서 묵묵히 대기중이였다. 지원자로 자처한 중학생과 대학생들이 함께 수백송이 흰 꽃을 달고 두 팔 걷고 묘소 주위를 깨끗이 거두었다.
9시 50분 좌우, 드디여 서향받이 묘소의 비탈 뒤로 재를 넘어 길게 뻗은 큰길에 대형 뻐스 3대가 나란히 도착했다.
초봄 속에 무연히 스러진 길 곁의 허랑한 옥수수밭을 배경으로 정거한 차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질서정연하고 숙연한 분위기의 검은색 물결이 묘소 쪽을 향해 천천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석대의 차량 속에서 세줄기로 나뉘여 흘러내리던 물결들은 자드락에 누운 묘소를 겨냥한 사이곬에 들어서면서 이윽고 한갈래의 길고 장중한 모듬강줄기로 변하여 묘소를 향해 흑룡인 양 검게, 유연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마다 가슴에 푸른 잎을 띄운 작고 아담한 흰 조화를 정중히 달고 천편일률로 고인명복을 기원하는 무거운 분위기의 복장을 착복한 사람들. 그 시민들 속에는 머리발이 하얀 팔십여세 지존의 어르신이 계시는가 하면 이제 눈발을 헤치고 곧 봄눈을 녹이며 땅속에서 돋아오를 햇풀 같이 싱싱한 칠팔세 받이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장중하고 엄숙하며 조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녀로소 세대가 폭넓게 포용되여 운집된 사람들 속으로 맑고 발랄하고 깨끗한 눈망울의 고인 윤동주의 어린 모습이 보였다가 백년을 날아 잠시 지상을 소풍하러 내려온 하늘의 별-희끗한 머리발의 백세 윤동주의 환영이 엇갈려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4.
기승 부리던 산바람이 잠풍으로 가라앉았고 몇백명 시민들의 움직임마저 짓누른 고요가 묘소 주위를 틈없이 꽉 메웠다. 드론의 비행소리가 나지막이 창공을 가르며 예언자인 듯 시간의 흐름을 가리켜주고 이미 사람들은 시인의 령혼에 빙의된 듯 절절한 추모에 젖어들었다.
제전에 따라올리는 한잔한잔의 술들은 그리움의 이슬이요, 저승강에 흩날리는 파도가 아닌가.
1917년에 태여나 1945년에 떠나기까지 순간인양 짧았던 시인의 생몰력사이다. 어두운 시대와 타협하여 범인凡人으로 함몰되기를 거부하고 하늘, 바람과 별에 의탁하며 끝없는 성찰과 참회로 거듭나기를 이어온 백년의 우주 소울-윤동주, 그 앞에 따르는 제전술은 그이의 령혼과 만나는 징검다리임에랴.
어두운 낮구름과 하늘과 땅 사이를 에도는 바람의 흔들림 속에서 남녀로소 시민들의 시 읊기 향연이 펼쳐졌다. , , , … 세파를 가르는 굵직하고 묵직한 음성이 울리는가 하면 카랑카랑 맑은 어린이 음색까지, 묘소 앞에서 읊는 시인의 시 한수 한수 그대로가 다시 여운으로 회귀되여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기를 받아이음이려는가, 마지막으로 이백여명의 시민은 동성으로 시인의 를 읊었고 그 소리가 조용히 울려 하늘가에 닿았거니.
기획과 준비로 장장 한달 여 시간을 품을 들인 룡정·윤동주연구회의 이 행사는 시작처럼 조용히 결속되였다. 분명한 것은 이번 룡윤회 행사로 그동안 알려진 우리 민족의 시성-윤동주가 더욱 깊숙이 더욱 자랑스럽게 시민 속으로 스며들었다는 점이리라. 그리고 백년 맞이 윤동주의 붐은 오늘부터 더욱 널리 휘날릴 것이리라.
불우한 시대를 거쳐 하늘을 가로지른 혜성인 양 세상에 굵직하게 이름을 박은 별의 시인은 백세를 맞아 오늘 저 창공 어딘가에 서서 회심의 미소를 보내고 있을가.
백년을 거쳐 이곳에 다시 날아온 사람아, 사람아, 시인이여!
출처:2017 제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