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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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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백산》2017.6 루계216 댓글:  조회:1684  추천:0  2019-07-19
장백산 루계216  2017제6호   기획조명-작가와작품 세상처럼 느껴지는 것(단편소설)  조원 아픔과 치유(작품평)  우상렬 고향의 개울물은 오늘도 소리내여 흐른다(작가평)  김경화   노벨의 향연 떠도는 환상과 그 아래 깊은 골짜기(만필)  김혁 기획련재 한락연평전(장편인물평전 련재6)  김혁   조광명소설코너 소설 거미-이 남자가 소설을 만드는 방법(중편소설)  조광명   계렬수필 눈섭이 없는 녀자(수필)  허무궁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수필)  허무궁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수필)  허무궁 감지하는 가을(수필)  허무궁 관념세계의 실존,그 안의 수많은 존재들(수필평)  김홍월   시인 시전 인생은 홀로서기가 아니라도 좋다(시 외6수)  강혜라 시로 씌여진 한영남의 인생감오(시평)  최삼룡   창작마당 그 여름의 끝(단편소설)  김경화 ‘딸님이’와 ‘딸내미’(수필)  장문철 나의 황금시대(수필)  장범철 추억의 이름은 사랑(수필)  리려 세월1(시 외1수)  김철호   대학생코너 한류풍파(단편소설)  김소연 바다의 관용(수필)  김해옥 마음의 면역력-자존감(수필)  박예령 비행소녀(수필)  오춘지 사람의 숲에서 사람이 그립다(수필)  리은혜 잃어버린 색을 찾습니다(수필)  주미화 스무살의 향기(수필)  윤설화 치열하게 부드럽게(시)  우향정 기억을 걷는 시간(시)  석설령   중국소수민족문학 마지막 사나이(단편소설)  알라트 아쓰무 지음                         천년목 옮김   장편소설련재 산귀신(장편소설 련재18)  림원춘 해볕이 춥다(장편소설 련재7)  구용기
3    강혜라: 인생은 홀로서기가 아니라도 좋다(시, 외6수) 댓글:  조회:785  추천:0  2019-07-19
인생은 홀로서기가 아니라도 좋다 강혜라   인생은 굳이 홀로서기가 아니라도 된다 세상사람 모두 홀로만 선다면 너무 가슴 시려 어떻게 살아가랴 내가 홀로 서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내남을 속이는 시시한 변명 따윈 하지 말자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나와 그 사람이 다같이 설 수 있다면 서서 저 멀리 험한 인생길 헤쳐갈 수 있다면 보다 따슨 기운이 감돌 터이다 인생은 굳이 홀로서기만 고집하지 않아도 좋다     별자리   별이 차거운 허공에서 투욱 터진다   터진 별이 밀어낸 자리가 거뭇하게 남는다   별이 뜨거운 가슴에서 투욱 터진다   터진 별이 머물던 자리가 따스하게 남는다   새벽이였다     세월   나중엔 알겠지 되돌아가려고 아우성치는 물을 본 적 있던가 지팽이 바꿔쥐고 지친 땀 훔치노라면 유채꽃 흐드러진 들판 나타나겠지 밤하늘이 푸르게 빛나는 건 별 마음 닮아서겠지 드러눕지는 않으리 물 실려 흐르리      봄꽃   누가 흘리고 간 봄입김이 여기 후둑후둑 떨어져 민들레로 피였을가   하늘이 넌지시 푸르러지면 픽픽 향기 터지는 정향꽃 자꾸 그리워   민들레 하나로 봄을 그려보라지 정향꽃 개나리 버들개지까지 저리 봄봄거리는데   영 봄이기를 바란다고 있어줄가마는 달래 한알 파내도 봄인 게지 서두르지 말자 익어서 감주처럼 여름 목메이는 향이 되도록     인생 배워서 사냐   아무리 옳은 말이고 아무리 좋은 말이고 아무리 진리 같아도 인생 배워서 사냐 웃기지 말아 그렇게 말하는 너도 너덜너덜한 삶을 살고 있더라 책 한줄 읽고 세상 사는 도리 다 깨친 것처럼 이렇게 살아야 한다느니 저렇게 살면 안된다느니 웃기지 말아 책 보고 배워서 사는 인생이더냐 누가 그러는데 그건 안된다고 하오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하오 웃기지 말아 다 살아본 사람도 죽기 전에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거늘 정말 웃기지 말아 인생 배워서 사냐 배워서 사는 게 인생이냐고     청동거울   청동거울의 깊이 다 지나고 나면 어느덧 만져지는 푸른 무늬 그 무게와 그 너비와 그 아픔과   청동거울의 무늬 다 만지고 나면 마침내 느껴지는 이 초라함 이 부끄러움과 이 쑥스러움과 이 안스러움과   다 지나지 말자 다 만지지 말자   바람에 풀잎 흔들리듯이 결 고운 물결 되여 물주름 만들며 흐느끼듯 가자 그리하여 마침내 청동거울 다 지나면 그렇게 잊으리     하늘 걸린 외길   가다가 타는 목 랭수 한모금으로 적시며 멀리 지평선 바라보다   거울 속 박제된 햇꿈을 만지며   어느새 세월 언저리 부서진 서러움 주어모으다 아픔이야 남겠지   세상은 말해주지 않아도 락타의 외줄기 길은 하늘에 걸려있다 출처:2017 제6호
관념세계의 실존, 그 안의 수많은 존재들 김홍월   허무궁의 네편의 수필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마치 대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바람이 밀려오는 것과 같은 환청이 들린다. 수많은 인파, 수많은 존재들의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압도하듯 우리 앞에 놓인다. 그 환각은 너무나 뚜렷해서 그 대지와 수많은 존재들이 실존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환각의 세계는 너무나 거대한 미지여서 인간의 자대로는 쉽게 단정하고 평가할 수 없는 무위(无为)자연의 실존과 같다. 다시 말해 허무궁은 네편의 수필을 통해 수많은 존재들이 있는 어떠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세계는 실제 존재하는 것만 같아서 실존적이며 잘 정돈된 세계가 아닌 혼란스럽고 복잡한 무위의 자연처럼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인 것만 같아서 실존적이다. 허무궁이 전하는 환각, 그 세계는 바로 관념의 세계이다. 네편의 수필 속에서 끊임없이 이뤄지는 화자의 공상들은 수많은 관념들로 이루어져있다. 이러한 수많은 관념들을 화자는 마치 눈에 보이는 사람, 사물처럼 대한다. 이러한 관념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어떠한 사건들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현실 세계 이외의 관념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계가 탄생된다고 볼 수도 있다. 허무궁은 관념세계가 실존한다는 인상을 강화하기 위해 두가지 교묘한 방법을 쓴다. 그 첫째는 관념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타자들의 부각이다. 그는 화자 이외의 수많은 타자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념의 세계에도 삶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하여 관념세계가 실존한다는 인상을 강화한 것이다. 두번째로는 관념세계의 무위성의 부각이다. 그는 관념세계를 잘 정돈된 세계가 아닌 여전히 미스테리하고 고민스럽게 남아있는 무위의 자연으로 보여줌으로써 실존한다는 인상을 강화한 것이다. 관념세계의 실존성과 그 안의 수많은 존재들의 등장을 공통적 기반으로 하여 네편의 수필 속에서 화자는 각기 다른 색채의 고민을 한다. 각기 다른 색채의 고민이기는 하지만 네편의 작품은 〈눈섭이 없는 녀자〉,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 〈감지하는 가을〉을 순서로 련결되며 하나의 일종의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눈섭이 없는 녀자〉,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없는 눈섭이 놓여있다. 없는 모습으로 놓여있다. 다시 말하면 없는 게 놓여있다. 다시 말하면 없는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모순일 수 있다. 없다와 있다는 동시에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왜 없는 존재가 있다고 하는 것일가? 눈섭이 없는 녀자에게 눈섭은 없다. 그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있는 것은 무엇인가? 눈섭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있는 것, 존재하는 것은 화자의 ‘없다’라는 관념이다. 없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없다’라는 관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화자는 관념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함을 전하려 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대상은 ‘없다’라는 관념 이외에도 많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모든 관념들이다.   트윗이 매일 매스컴을 못살게 군다. 혹시 이 땅에 무서운 전쟁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없던 전쟁도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공포심, 그 두려움은 없는 것을 있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가상의 전쟁이 벌어진다. 사람들의 마음속 전쟁이 관념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관념으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요소들은 때에 따라 부정적인 모습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화자는 군중을 이리저리 휩쓰는 다양한 정보 매체와 그것에 휩쓸려다니는 군중을 비꼰다. 그러나 정작 〈눈섭이 없는 녀자〉에서 중요한 것은 화자가 관념이 물질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점에 있다.   눈섭이란 꼭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일반 물질로서는 인간의 눈 우에 붙어있는 것이 상례다. 그 모양에 따라서 인물이 평가되기까지 하는 것을 봐선 미크론물질(청화대학 생명과학 학자 시일공)의 세계에서는 한 물질을 평가하는 기준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화자는 일반적 물질과 미크론 세계의 물질을 나누고 있다. 심미적 령역, 즉 관념적 령역은 당연히 일반적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미크론 세계의 물질에 해당할 것이다. 화자는 관념을 물리적 실제라고 주장할 만큼 관념세계의 실존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 타자들에 대응하는 개인 〈눈섭이 없는 녀자〉에서 그려진 군중은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에서도 나타난다. 다만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에서는 그 군중에 대응하는 화자 개인이 함께 부각된다.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의 화자는 민주가 가로막혔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민주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한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집중은 고독이다. 민주를 집중시켜야 하는 행위는 홀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을 하고 독단적으로 받아안아야 할 고독이다.   여기에서의 집중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중 다양한 의견을 모아 하나의 방향을 도출해내는 것으로서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다양한 의견이 있는 민주를 집중시키는 것은 다수의 타자들의 의견에 개인이 대응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대응이 쉽지 않다. 다양한 의견중 하나의 방향만을 도출해내는 것은 화합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소외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완전히 충족되는 것은 리상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만인에 대한 개인의 투쟁’으로서 그 집중이 이뤄질 수 밖에 없다. ‘만인에 대한 개인의 투쟁’은 곧 개인에게 고독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다수의 타자의 의견에 대한 개인의 대응이 곧 투쟁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집중의 무게를 두고 화자는 끝내 이렇게 말한다.   고독할 때 생각한다. 고독할 때 랭정해진다. 고독할 때 성장한다. 고독을 터득하면 훌륭한 경영자로 될 수 있다. 거짓말 같지만.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 분렬된 미시적 개인 타인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어떤 면에서 우리는 소외를 느낀다. 화자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친구들마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불안을 느낀다.   ‘나’는 부모님이 불러주시던 어린 나의 이름과 함께 사라지고 여기에 버젓하게 남아있는 ‘나’는 나와는 다른, 나의 흉내를 내는 ‘내’가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내 이름이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대체될 때부터가 아니였던지 모르겠다.   이러한 자아의 정체성에 화자는 자신의 본명에 대한 고집을 꺾음으로써 해결한다. 화자는 자기 자신을 고정시켜둘 필요가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즉 자기에 대한 자기의 편견을 벗어던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 클락에 와서는 또 영어로 폴이라고 불리워 난 이젠 아예 자기가 대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내고 있다. 얼렁뚱땅 얻어가진 영어 이름인데 일사천리로 성장하는 나의 인생의 궤도에 따라 이 폴이라는 이름도 하얀 셔츠에 잉크가 스며들듯이 쫙 펴지기 시작한다. 나의 인생이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피여가는 것이다. 나의 새로운 하루하루가 시작이 되여가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렇게 영원히 매일 하루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다른 내가 존재를 약속하고 있는 하루도 있다.   화자는 계속해서 새롭게 태여날 수 있는 다수의 타자인 ‘나’와 투쟁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대신 화자는 덤덤히 다수의 타자와 같은 다수의 ‘나’를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분렬된 나들은 분렬된 나중에 하나인 나의 립장에서 보면 다수의 타자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내’가 밀려나는 것에 부정적 반응도 하지 않는 것처럼 공평하게 또 다른 ‘나’를 환영하지도 않는다. 그저 덤덤히 다수의 ‘나’에게 반응하고 있을 뿐이다.   〈감지하는 가을〉, 개인적 관념세계의 사건 세상 대부분의 이야기에는 관념적 측면이 개입한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다 보면 그것에는 의미나 감성이 생기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 속에 세계를 관념적으로 승화시키며 변형한다. 세계를 적절한 비유들로 설명하고 리해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기본적 습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감지하는 가을〉에서는 현실을 관념을 통해 리해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 자체를 현실에 앞서게 만드는 인상을 준다.   오는 것인지 우리가 그리로 가는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하여튼 모두가 가을을 ‘온다’고 하면서 나름대로 감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화자는 시작부터 의심을 품는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계절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려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한 계절은 ‘올’ 수 밖에 없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화자는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의심은 결국 화자가 가을을 ‘우연히 만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된다.   가을을 갖다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가을이 있는 곳에 내가 찾아온 것이다. 바꿔말하면 내가 찾아간 곳에 가을이 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방식에 있다. 화자는 현실의 시간을 잊음으로써 현실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위치한 현실의 공간에는 가을이 없다. 그러나 화자는 여전히 현실의 계절체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4계절 세분화된 계절을 망각하지 않는 이상 그는 가을이 없는 남국의 계절체계에 완전히 들어가지 못한다. 그의 관념중 일부는 현실의 계절을 빠져나와 가을이 있는 관념의 계절을 재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의 계절을 넘어선 계절은 일반적인 시간개념에서처럼 천천히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념이 언제 어디서든 상관없이 불쑥 재생될 수 있듯이 관념 속의 계절은 우연히 마주치듯, 누군가 가져다놓은 듯이 공간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즉 화자는 관념 속의 계절을 통해 현실의 계절의 법칙인 ‘온다’를 깨뜨리고 ‘만났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만남은 ‘무한히 즐거운 자극’이 되였다.   관념세계의 스펙트럼-군중에서 개인까지, 투쟁에서 수혜까지 각기 다른 주제와 각기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네편의 수필은 저마다 다른 층 우에서 관념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눈섭이 없는 녀자〉에서는 없는 것의 존재함을 보여준다. 또한 〈눈섭이 없는 녀자〉에서는 ‘관념’들을 물리적 실제로 만들어낸다.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에서는 군중과 개인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직접적으로 관념세계를 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은  〈눈섭이 없는 녀자〉와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에서 다뤄지고 있는 다수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두 작품에 등장하는 다수의 존재들의 성질을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에서는 군중의 다수의 의견들 속에서 고독해지는 화자를 그리고 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여기에서의 의견이라는 것은 관념에 해당하기도 한다. 따라서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에서도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관념세계 속의 군중·타자들과 나·개인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에서는 ‘나’의 분렬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분렬된 수많은 미시적 군중이자 타자임을 보여준다. 이렇듯 〈눈섭이 없는 녀자〉,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는 각각 관념세계에 존재하는 ‘타자들의 집단(군중)-타자들과 개인-미시적인 타자와 미시적 개인’을 그리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점진적으로 그 관념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들이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나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점차 더 작은 존재, 더 작은 개인에 초점을 맞춰가고 있는 것이다. 즉 관념세계의 거시적인 사회를 그린 후에 그 안의 미시적인 구체적 존재를 그리는 것이다. 허무궁은 군중에서 개인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제시함으로써 관념세계의 실존적 성격을 부여한다. 한편 〈눈섭이 없는 녀자〉,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는 순차적으로 군중·타자들의 공포스러운 거대한 힘을 묘사하는 데에서 시작해 군중·타자 앞에서 용기를 내는 개인을 묘사하는 것으로 초점을 이동시킨다. 즉 관념세계의 존재들의 부정성을 강조하다가 점차 긍정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부정성과 긍정성은 전체적인 초점에만 그칠 뿐 화자는 관념세계 자체에 대한 부정성이나 긍정성을 확정적으로 부여하지 않는다. 화자는 자연계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전달하듯 담담하게 관념세계에 관한 일들을 전달한다. 관념세계는 실제 현실의 세계와 같이 무위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은 관념세계에 대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 대응은 투쟁이 될 수도 있고 단순한 반응에 불과할 수도 있고 수혜일 수도 있다. 〈고독으로 리해하는 민주와 집중〉, 〈나에게는 매일 하루가 챙겨진다〉, 〈감지하는 가을〉에 나타난 화자는 점차 세계에 대한 대응을 ‘투쟁-반응-수혜’로 바꿔간다. 이는 인간의 세계에 대한 ‘부정-긍정’의 스펙트럼을 꼼꼼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관념세계에 실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감지하는 가을〉에서는 관념세계에 대한 긍정성이 최고점에 이른다. 화자가 우연히 행복을 얻었기 때문이다. 〈감지하는 가을〉에서는 앞서 언급한 관념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의 구체성이 최고점에 이른다. 〈감지하는 가을〉에서는 관념세계의 화자·개인에게만 주어진 상황과 또 그 개인의 상황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룸으로써 개인을 좀더 구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허무궁은 군중에서부터 미시적인 개인까지, 관념세계에 대한 투쟁에서부터 수혜까지 꼼꼼히 그리고 있다. 이러한 넓은 스펙트럼에 이를 만큼 관념세계는 실존하는 것으로 그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허무궁은 관념세계를 실존하는 것처럼 그릴가? 허무궁은 관념세계를 실존으로 그림으로써 세계에 대한 리해의 폭을 크게 확장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허무한 공상에 그쳐 쓸모 없을 것만 같은 생각들은 관념세계를 실존하는 세계로 뒤바꾸는 그의 묘수를 통해 흥미롭고 의미 있는 것으로 뒤바뀐다. 출처:2017 제6호
1    김혁: 떠도는 환상과 그 아래 깊은 골짜기(만필) 댓글:  조회:858  추천:0  2019-07-19
떠도는 환상과 그 아래 깊은 골짜기 -2017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학세계 김혁   10월의 점술가(占术家)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조선족 문단에서는 또 한번 내가 맨 첫 사람(?)으로 랑보를 전한 것 같다. 스웨덴 한림원이 10월 5일 저녁 7시경,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이시구로를 선정한 소식이 터져 5분도 안되는 사이 위챗 모멘트에 따끈한 속보를 발표했고 이어 수상자의 십여폭의 사진을 올리며 바다 건너의 소식을 오지의 문객들에게로 속전(俗传)했다. 이튿날에도 관련 인물을 조명하는 글들을 모아 모멘트와 문학 블로그에 륙속 올렸다. 근 10년래 해마다 가을이 오면 나는 ‘랑군의 알성급제 빌고 기다리는 춘향’의 심정이 된다. 그리고는 수상자들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글들을 평론, 칼럼, 만필 등 형식으로 시효성 있게 여러 간행물에 소개해왔다. 어떤 이들에게는 해마다 되풀이하는 나의 ‘짓거리’가 한갖 ‘호사가(好事家)’의 맹랑함으로 보일 터지만 문학의 위상이 사정없이 찬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오늘날에도 문학초학도와도 같은 초심을 간직한 나의 이러한 행위들이 아직도 고전을 멈추지 않고 있는 동인들과 꿈을 키우고 있는 문학도들에게 응분의 메시지와 기운을 안겨주리라고 나는 아집으로 믿고 있는 터다.   올해도 노벨문학상에 대한 무수한 ‘점괘’들이 빗나갔다.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젊은(력대의 노벨수상자로 비추어보면 60대 초반의 수상자는 파란 청춘이라 해야겠다) 작가가 선정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다른 후보들에 비해 젊은 데다 대중적 인지도 높은 편이 아니여서 상대적으로 수상 가능성이 낮게 점쳐졌다. 사실 돌이켜보면 흥감스러운 ‘문학 점술가’들에게서 근년래 노벨문학상 예측이 한번도 제대로 점쳐진 적이 없다. 사실 나는 은근히 내가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번에는 수상할 수 있지 않을가 하고 심중으로 점쳐보았었다. 하지만 하루키는 그야말로 ‘노벨상의 불운한  아이콘’이였다. (올해 금방 나온 그의 신작 를 남먼저 읽고 “역시 무라카미” 하고 감흥을 머금었었는데…) 또 한번의 하루키의 좌절에 그의 전부의 작품을 읽었고 오랜 마니아를 자처했던 나는 저도 모르게 짧은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어제도 그제도 하루키를 두고 흘렸던 꼭같은 탄식이였다. 다행히 하루키는 이시구로와 절친한 사이로 “동시대에 이시구로라는 작가와 함께 할 수 있어 큰 기쁨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하루키는 2010년 영국에서 출간된 연구서 《가즈오 이시구로―현대 비평의 시간》 서문을 맡은 적 있는데 “지금까지 이시구로의 작품을 읽어오면서 실망하거나 고개를 갸웃거린 적이 한번도 없다”고 서문에 썼다. 나와 같은 하루키의 골수팬들은 이 같은 사실로 하루키의 또 한번의 노벨문학상 좌절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후보군에 이름을 올린 무라카미 하루키가 10년이 넘는 노벨문학상 단골후보였던 것처럼 연거퍼 ‘고배’를 마신 또 한 사람이 있다. 한국의 원로시인 고은할아버지이다. 문학상 발표를 불과 이틀 앞두고 문학상을 점치는 사이트(영국에 진짜로 그런 사이트들이 있다고 한다)들에서 10위에서 4위로 갑자기 순위가 뛰여올라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왕년처럼 또 기자들이 온 하루 시인 할배의 집앞에서 우르르 카메라를 들고 포진하고 기다렸다. 역시 꼭같은 진부한 풍경을 연출하며 돌아서고 말았다. 하지만 감질나게 기다렸던 베일을 벗고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수상자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나는 또한 환성을 질렀다. 뜻밖에 수상자는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작가였다. (솔직히 재작년에는 수상자로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세이비치라의 이름이 호명되자 생경함에 우두망찰 굳어져버리기도 했었다.) 이시구로는 사실 영화로 퍽 오래 전에 접했다. 영국의 원로배우 안소니 홉킨스의 주연으로 된 영화 《남아있는 나날(长日留痕)》로 이시구로의 작품을 접했다. 문단에서도 꽤 알려진 극성스러운 영화광인 나였기에 거의 20여년 전인 95년경에 이미 이 영화를 접했다. 물론 그 때는 이 영화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원작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안소니 홉킨스라는 배우에 매료되여 보았고 그 때 벌써 이 작품 DVD를 소장해두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 소식이 알려지자 그 날 저녁으로 이 영화를 빼곡한 CD장 더미에서 기어이 찾아내여 영화 케이스의 겉장을 찍어서는 위챗 모멘트에 올렸다. 안소니 홉킨스는 《침묵하는 양》이라는 영화로 오스카 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널리 알려진 배우이다. 영화의 그 원작소설 을 우리 말로는 1990년대 초반 할빈의 《송화강》지에서 련재한 데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수상소식을 접하고 《남아있는 나날》을 다시 보았다. 영화는 당시 할리우드 대작인 《쉰들러의 명단》에 비견할 만큼 오스카상 수상 호성이 높은 영화였다. 안소니 홉킨스는 《남아있는 나날》에서의 열연으로 1994년 런던영화비평가협회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다시 보니 그야말로 이시구로의 원작의 진수를 그대로 소화해낸 완성도 높은 영화였다. 십여년 전에는 어떤 중년 집사의 사랑을 그린 로맨틱 영화 정도로 알고 보았으니 내가 이시구로의 인물들이 겪어낸 복잡한 회한을 제대로 알고 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시구로의 수상 소식을 접하고 다시 꺼내본 영화는 나에게 전혀 다른 감수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몇해 전 상해에서 소집한 로신문학원 강습반에서 늦깎이 공부를 할 때 복단대학의 캠퍼스내 서점에서 이시구로의 소설 《우리가 고아였을 때》와 《남아있는 나날》을 사들여 소장했었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의 중역본은 그 제목이 《상해고아(上海孤儿)》이다. 소설이 1930년대의 상해를 소재로 했기 때문.) 그 외도 한국의 지인에게 부탁하여 《위로받지 못한 자》 등을 소장하여 그의 8부 되는 작품중 5부를 이미 소장하고 읽었었다.    이시구로의 수상과 함께 이런 통계가 나왔다. 영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는 2007년 도리스 레싱 이후로는 10년 만이다. 일본계로는 1968년 저 유명한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1994년에는 오에 겐자부로에 이어 이시구로가 세번째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또 이런 통계도 있다. 이시구로의 수상으로 력대 동양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1913년 인도 시인 타고르, 1968년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 1994년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2000년 프랑스 국적의 중국인 고행건(高行健), 2012년 중국의 막언 등 총 6명이 됐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지역이나 성별, 쟝르적 측면에서 ‘문학 점술가’들 그리고 연구가들에게 복잡한 난제를 안겨주었다. 그가 일본계 영국인이였기 때문이다. 동년에 영국으로 이주했다고 하니 어릴 때부터 떠돌이의 운명이 락인되여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럼 부유하는 그의 년보를 세독(细读)하기로 하자.   부유하는 년보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 11월 8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여났다. 여섯살 나던 해 아버지가 영국 국립해양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두 녀동생과 함께 가족을 따라 영국으로 이주했다. 가족이 정착한 런던 부근의 자그만 현성은 추리소설 대가 ‘애거사 크리스티 미스터리의 배경이 될 법한 호젓한 곳’이였다. 그래서인지 소년 이시구로는 추리소설에 빠져들었고 다른 책들에는 무관심했다. 음악에 호감을 보여 다섯살부터 피아노를 쳤고 열다섯에는 기타를 시작했다. 영국 켄트대학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했으며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해 100곡 이상을 작곡했지만 여기저기에서 거절만 당했다. 소설을 발표하기 전 작사, 작곡, 자창의 싱어송라이터를 꿈꾸어온 경력이 있기에 그의 작품에서는 팝가수의 노래가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요 모티프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 또한 부드럽고 정교하게 흘러가다가 말미에는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잔잔한 클래식 같은 힘을 발휘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영국인 안해는 남편의 미래를 실패한 록스타 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중 사회복지사 사업을 하면서 어쩌다 지원한 문예창작 석사과정에 덜컥 합격했고 결국 1981년 세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 이듬해인 198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탄 피폭의 아픔을 그린 소설 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이로써 전업작가의 생활을 시작했고 영국 시민권도 취득했다. 1986년 를 발표하면서 유수의 문학상들을 수상했고 부커상 후보에도 올랐다. 불과 3년 만에 세계 3대 문학상중 하나인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1989년 로 수상한 것이다. 그로써 세계에 문명(文名)을 알렸고 세계적인 작가의 반렬에 올랐다. 이 소설은 영국의 톱배우 안소니 홉킨스와 에마 톰슨의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일본말 못하는 서른다섯 일본계 영국인에게 부커상을 안겨준 작품 은 그 전성기의 서막이였다. 1995년에 을 발표했다. 2000년에 펴낸 《우리가 고아였을 때》가 또 부커상 후보로 선정되였다. 2005년에 《날 떠나지 마》를 출간했고 몇해 후 작품이 동명 영화로 제작되였다. 대영제국 훈장, 프랑스 문예훈장, 전미 비평가협회상 등 묵직한 상들을 련이어 받았고 2008년에는 ‘1945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 명단에 그 이름을 올렸다. 데뷔 이후로 꾸준히 장편창작에 매진하다가 2009년에 첫 단편소설집 《녹턴: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가지 이야기》를 출간했다. 2015년 신작 장편 《파묻힌 거인》을 출간했다. 조선민족 문학과도 인연이 닿을듯,  2017년 제7회 박경리문학상 최종 후보 5명에 이름을 올렸으나 수상은 그와 같은 영국 작가인 앤토니아 수전 바이엇에게 돌아갔다. 펴내는 작품마다 편편이 묵직한 상들을 연거번거 수상했지만 한국에서만 유독 그에게 린색했던 셈이다.   유려한 문체와 다양한 쟝르: 대표작 순람 노벨상위원회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에는 위대한 정서적인 힘이 있다”면서 “강력한 정서적 힘을 지닌 작품 속에서 인간을 세계와 이어주는 환상의 심연을 드러냈다”라고 선정리유를 밝혔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35년간의 집필 기간 동안 여덟부 정도의 작품을 남긴 과작(寡作)의 작가이다. 하지만 편편마다 유수의 묵직한 문학상을 수상하며 그의 창작성향과 매력을 충분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중 적지 않게 소장하고 읽어봤으므로 나의 열독 리력에 의해 또 유관 평문들을 다듬어 모아 그중 대표작으로 일컫는 몇부를 소개하기로 한다.         《창백한 언덕의 풍경》(한국 민음사, 2012년 출간.) 1982년에 발표된 이시구로의 첫 장편이다. 태평양 전쟁과 원자폭탄 투하 이후 일본의 황량한 풍경을 투명하고 절제된 감성으로 그려보이고 있다. 중년의 녀인 에츠코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여나 영국에 살고 있다. 일본인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첫째 딸은 자살하고 남편과는 사별했다. 영국인 두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 니키와 함께 에츠코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 둘 회상해나간다. 회상 속에 동양과 서양이 어우러지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이고 련결된다. 작품은 한 과부의 시선을 빌어 나가사키의 파괴와 재건을 이야기한다. 원폭 이후의 일본을 보여주지만 막상 작품은 원폭의 참상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일본 재래의 ‘원폭문학’과는 다르다. 작품은 과장된 정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담담한 서술로 “피여오르는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하나 없이, 폭격의 굉음, 처절한 비명 하나 없이” 인간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보이고 있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이시구로의 어머니가 현장에 있었다. 당시 10대 후반의 나이였던 어머니는 폭탄파편에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이런 가계사가 녹아있는 작품이다. 첫 작품으로 이시구로는 “ ‘영국 문학의 새로운 사자’의 출현을 알린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부유하는 세상의 예술가》(한국 민음사, 2015년 출간.) 작품은 1945년 패전 이후 재건을 겪고 있는 일본의 어느 도시를 무대로 펼쳐진다. 은퇴한 화가 마스지 오노는 스승의 순수 예술적 정신을 배신하고 전쟁과 천황을 찬양하는 그림을 제작하여 명예와 부를 누린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갖고 있다. 둘째딸 노리코가 어느 명망 있는 집안과 혼담이 오가고 친지들은 맞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오노의 과거사에 대해 미리 조치를 취해놓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우려한다. 오노는 자신으로 인해 둘째딸의 혼사길이 막힐 것을 념려하여 과거의 인물들을 한명씩 찾아가기 시작하고 그렇게 오노의 과거 행적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오노는 과거 일본의 그릇된 외교정책을 옹호했다는 점으로 신세대로부터 비난받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손자로 대표되는 근대 세계의 리상과 마주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처한다. ‘부유하는 세상’이라는 단어에 담긴 중의적인 의미가 이 소설에서 지닌 뜻은 특별하다. 한 화가의 내면에 몰아치는 현실 참여에 대한 욕구와 신념, 반대로 세상과 동떨어져 예술가의 기존 예술계의 관행 사이에서 인간 오노는 고뇌하고 비난받는다. 강력한 심리적 디테일이 보여주는 작품은 엄청난 심리적 압박상황에 놓인 화자를 내세워 인간의 헛된 신념과 그 기억을 거슬러올라가며 전후 사회의 갈등과 모순을 한 화가의 삶에 대입해 해부하듯 그려낸다.   《남아있는 나날(长日留痕)》(译林出版社, 2011년 출간.) 유서 깊은 귀족 저택의 장원을 자신의 세상 전부로 여기고 집사로서 평생을 보낸 남자의  6일간의 려행을 그렸다. 집사 스티븐스는 주인의 저택이 판매되자 저택의 옛 동료였던 켄턴을 찾아 6일간의 려정에 나선다. 그의 회고 속에 30년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금씩 밝혀진다. 그가 평생 헌신해온 영국 최고 저택의 주인이 나치 지지자였음을 알면서 스티븐스는 허망한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개인적인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맹목적인 믿음으로 모셨던 이미 죽은 주인이 고용주로서는 훌륭한 사람이였다고 생각하는 스티븐스는 이 괴리 때문에 괴로워한다. 집사로서 직업의식이 투철한 그는 일외의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다. 그래서 아버지의 죽음을 옆에서 지키지 못한 것, 자신에게 다가왔던 켄턴에게도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채우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 떠나가는 것조차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던 자신을 다시 떠올리며 회한을 머금게 된다. 스스로 개인적인 삶을 철저히 무시하며 살아왔지만 스티븐스는 과연 자신이 제대로 살아온 것인지 회의를 가진다. 그는 인생의 황혼기에 와서야 소박하지만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다. 작품은 스티븐스의 가족과 련인 그리고 30여년간 모셔온 옛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근대와 현대가 뒤섞이면서 가치관의 대혼란이 나타난 1930년대 영국의 격동기를 들여다본다. 특히 인생의 황혼 녘에 깨달아버린 잃어버린 사랑의 허망함과 애잔함에 관해 내밀하게 써내려갔다. 이 소설은 큰 찬사 속에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사람들은 이시구로가 도착하기 훨씬 전 영국에서 사라진 문화를 그가 어떻게 이렇게 훌륭하게 그려냈는지 감탄해마지 않아했다. 개인의 인생과 격변하던 시대에 대한 력사적 조망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 세심하고도 폭 넓은 통찰력으로 인간의 품위에 대해 말한 작품은 이 때까지 발표됐던 이시구로 소설들 중 가장 성공하였다는 평을 받는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无可慰藉)》(상해역문(译文)출판사, 2013년 출간.) 초현실적인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현대인의 쓸쓸한 자화상과 심리를 그려낸 작품이다. 《남아있는 나날》로 맨부커상 소설부문을 수상한 후, 이시구로의 다음 소설은 놀랍고도 대담한 일탈을 보여줬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은 과감하게 그의 이전 작품들의 형식과 주제를 무너뜨렸다. 몽환적인 배경에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는 초기 작 세편과는 달리 실험적인 시도가 돋보인다.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피아니스트 라이더는 연주려행차 중부 유럽의 어느 소도시를 방문한다. 이름도 없는 이 가공의 도시에서 시간과 공간은 크게 뒤틀려있다.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황당무계하여 꿈인지 현실인지 종잡을 수 없다.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한 남자의 인생 전체가 가상의 도시에서 한 시간대에 펼쳐진다. 작품은 젊은 날 놓쳐버린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지난날에 대한 회한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초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上海孤儿)》(역림출판사, 2011년 출간.) 작품은 이시구로의 개인적 체험이 가장 많이 담긴 사적인 소설로 꼽힌다. 1930년대의 상해를 배경으로 중국에서 태여나 자랐던 영국 소년의 어린 시절 추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아편을 수입해 중국인들에게 파는 상해 주재 영국기업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상해 최고의 미인으로 알려질 만큼 아름답고 우아한 어머니와 어린 소년 크리스토퍼는 상해의 외국인 조계지를 고향으로 여기며 자란다.  그러나 크리스토퍼의 어머니는 중국인을 아편중독에 빠뜨리는 데 일조하는 남편 회사의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아편수입 반대활동에도 참여한다. 그러다 크리스토퍼가 열살이 되던 무렵, 부모님이 차례로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된 크리스토퍼는 영국의 이모에게 보내지고 거기서 상류층 청년으로 자란다. 몇해 후, 영국 최고의 사립탐정이 된 크리스토퍼는 어렸을 적 상해에서 실종된 부모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상해를 찾는다. 세밀한 조사와 어린 시절의 흐릿한 기억을 되살리며 과거로 거슬러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사를 계속해나갈수록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이 감추고 있던 추악한 비밀에 대해 깨닫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 이시구로는 고전적인 추리소설들을 패러디한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동년의 극적 사건을 통해 정체성과 기억이라는 주제를 보여준 소설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 질투, 배신, 충격적인 비밀을 깨닫게 되는 반전이 어린 아이의 시선에서 어른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순수함과 그 리면에 감추어진 비밀을 서서히 밝혀가는 긴박감이 더해져 독자들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다. 다시 부커상 후보에 오르며 화제가 된 이 소설 속에서 고국은 영국이되 중국에서 태여나 정체성을 고민하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작자 이시구로의 개인적 체험이 진하게 녹아들어있다.   《나를 보내지 마》(한국민음사, 2009년 출간.) 1990년대 후반 영국, 캐시는 외부와의 접촉이 금지된 기숙학교를 졸업한 후 간호사로 10여년간 일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복제인간이다. 심장병이나 암에 걸린 인간에게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 배양된 복제아이들은 외부와 차단된 기숙사에서 자란다. 아이들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르고 미래에 대해 저마다 신나는 꿈을 꾸면서 성장한다. 그러나 이 아이들에게 미래는 없다. 그저 장기기증을 하다가 죽는 길 하나 뿐이다. 복제인간들의 사랑과 성, 슬픈 운명이 캐시의 담담한 독백으로 전개되는 슬프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인간의 욕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복제인간의 삶을 통해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서 과학환상소설, 성장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삶과 죽음, 인간의 존엄성을 진지하게 성찰한 작품은 2005년 부커상 소설 부문을 비롯해 다른 명망 있는 문학상들의 최종 후보작에 그리고 ‘타임이 선정한 2005년 최고의 소설’ 및 ‘100대 영문 소설’로 선정되였다. 12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였고 2010년에 영화로도 각색되였다.   들쭉날쭉이 없이 편편마다 수작을 펴낸 가즈오 이시구로, 무엇을 고르건 장편소설 7권, 단편집 1권이란 한 작가를 알아가기에는 적절한 분량이요, 독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다.   ‘낯설고 깊은 상실’ 속 본령의 감성 스웨덴 한림원이 이시구로를 노벨상 수상자로 선택한 것은 지난 2년간의 수상자를 감안하면 ‘전통문학’으로의 복귀로 읽힌다. 앞서 2015년 논픽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난해에는 록가수 밥 딜런이 이례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한림원은 크고 작은 론난에 시달렸었다. 매체들은 알렉시예비치와 딜런에게 노벨상을 안기며 2년간 파격을 택했던 스웨덴 한림원이 올해 “다시 전통으로 되돌아가 가장 문학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이는 순 문학을 꾸준히 창작해온 꾸준함에 대한 존경과 경의로도 읽힌다. 이시구로는 가장 문학의 본령에 충실한 작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은 인간의 존재 자체에 주목하고 인간의 삶의 방식을 다룬다는 공통점을 두면서 1인칭 화자의 시선을 통해 내면의 풍경을 섬세하게 그린다. 그의 작품 속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기억, 회상, 상실, 그것에 대한 극복의지 등이 모두 녹아있다. 흔히 영국을 배경으로 세밀한 감정을 포착하고 인간의 고독한 정서를 내밀하게 그려냈다. 그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절제와 장악력은 독자의 마음속에 잔이랑을 일으키다가 결국은 큰 파고(波高)를 일으키며 삶에 관한 궁극적인 인식에 도달하게 만든다. 이런 점들로 인해 이시구로는 ‘현대 영미문학의 표본’으로 통하기도 한다. 이시구로는 영화와 TV 씨나리오를 쓰기도 했고 심지어 재즈가수 음반의 작사가로도 이름을 올리며 전방위적 글쓰기를 진행해왔다. 노래말이 그의 1인칭 시점의 화자 서술방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그는 말한 바 있다. 그의 소설은 거의 모두가 1인칭 시점인데 화자의 담담한 회상은 조용히 일상의 균렬들을 서서히 드러내며 긴장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남아있는 나날》의 대성공은 일본 이야기와 영국 이야기를 자유롭게 구사하던 이시구로에게 뭐든 시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를 주었다. 그리하여 력사소설에서 추리소설, 과학환상소설, 판타지까지 다양한 쟝르를 섭렵했다. 이시구로는 지금까지 쟝르물로 구분될 수 있는 작품을 세권 정도 썼다.   하나는 영국과 상해를 배경으로 한 추리물로 볼 수 있는 《우리가 고아였을 때》, 다른 하나는 과학환상소설로 볼 수 있는 《나를 보내지 마》, 마지막은 고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로 볼 수 있는 《파묻힌 거인》이다. 이 소설들은 론난을 일으켰다. 론난을 주도한 이들은 이른바 순수문학주의를 주창하는 이들이였다. “왜 이토록 훌륭한 재능을 그토록 하찮은 쟝르에 랑비하는가?”  쟝르소설을 경원시(敬远视)하던 사람들은 이시구로의 신작을 두고 혼란에 빠졌고 그 론난은 《나를 보내지 마》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하지만 론난에도 불구하고 《나를 보내지 마》는 《타임》 창간이래 발표된 가장 위대한 영어 소설 100편 중 하나로 선정됐고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이시구로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이시구로는 쟝르소설의 형식을 빌어 사람들을 탐구하고 있지만 그 과정은 전문 쟝르 작가가 가는 길과는 많이 다른 곳으로 독자들을 이끈다. 쟝르상의 모든 구분을 무화시켜버리면서 다만 문학의 본령에서만이 경험할 수 있는 령혼을 뒤흔드는 순간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노벨상을 받은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쟝르소설을 쓴 사람들은 많다. 이시구로가 태여난 일본만 봐도 그에 앞서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 역시 과학환상소설을 펴냈었다. 이시구로가 이민해 살고 있는 영국에서는 10년 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도리스 레싱의 대표작중 상당수가 과학환상소설과 판타지의 령역의 작품들이다. 또 우리가 익숙한 《에밀리에게 바치는 한송이 장미》의 윌리엄 포크너, 중국 소재의 《대지》의 펄 벅, 20세기 최고의 극작가 버나드 쇼, 《분노한 포도》의 존 스타인벡 등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이 모두 추리소설을 창작한 바 있다. 여전히 쟝르물로서의 특수성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제 추리물이나 과학환상소설 쟝르는 누구나 꺼내 쓸 수 있는 이야기의 도구가 되였다. 중국에서도 지난해 류자흔(刘慈欣)의 과학환상소설 《삼체(三体)》가 중국인 최초로 ‘과학환상소설계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휴고상을 수상하면서 중국 문단에서 과학환상소설 창작열이 뒤미처 일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도 읽었다고 해서 더욱 화제가 된 《삼체(三体)》는 중국 국내에서만도 300만부라는 판매량을 기록했고 영화로도 제작되였다. 쟝르문학과 순수문학을 구분하는 론쟁에 대한 의미도 낡은 사유로 치부되고 그 경계가 허물어져버린 오늘날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는 아직도 쟝르물들을 하위문학으로 취급하며 지어 간행물에 싣기조차 주저하는데 이는 웃기는, 락오된 발상이라 말할 수 밖에 없다. 필자는 10여년 전 이제는 간행물 이름이 개명이 돼버린 《문학과 예술》지에 쟝르물들이 우리 문단에도 나와야 한다며 문학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평론을 실어 질호한 적 있다. 또한 조선족문단 처음인 판타지 소설 《불의 제전》으로 2005년 ‘연변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지금껏 이러한 쟝르물들이 우리 문단에는 아직도 거의 한편도 없이 감감 전무한 실정이다. 오늘날 같은 정보와 문자의 과잉 시대에는 문학과 독자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시점에서 쟝르물들이 우리가 흔히 접해온 근대 문학 양태의 외양과 다르다고 해서 쉽게 배척하는 것은 날로 변화하고 있는 문학을 동조하지 못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이라고 감히 말해본다.   이시구로는 종당에는 “우리 시대의 상실을 유려하게 그려내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 상실의 정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여나 1960년 영국으로 가족이 이민을 떠나면서 유년 시절부터 시작된 이방인 처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신의 고향인 일본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영국에서 유소년기를 보냈던 탓일가? 그는 작가란 “트라우마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뭔가 평형을 잃은, 어렸을 때 절대 낫지 않는 일종의 상처를 받은” 존재들이라면서 “몇주씩 방에 갇혀서 힘들게 소설을 쓰는 것은 말하자면 그 상처를 만지작거리는 것”이라고 언급한 적도 있다. 여러 지역을 부유하며 꿈꾸어온 갖가지 환상으로 결국에는 온 누리 인간의 삶이라는 ‘심연’을 같은 정서의 눈길로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섯살에 영국에 이민 왔기 때문에 영어 구사에 막힘이 없지만 그럼에도 이시구로는 “영어는 일본어 만큼 편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필명으로 쓴다면 사람들은 그 작품이 일본에서 태여난 사람이 쓴 소설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영국인 또는 일본인 중 어느 쪽의 특성이 강하냐 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이시구로는 “일본어를 쓰는 가정에서 자랐으며 부모가 일본적 가치를 가르치는 데 책임감을 가졌지만 사람은 3분의 2는 무엇이고 나머지는 무엇이라는 식으로 명쾌하게 나눠지지 않는다”면서 “점점 더 세계는 문화적 인종적 배경이 섞인 재미있는 균일 혼합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구로는 영국이 ‘백인들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선입견도 없고 자신이 ‘낯선 서양땅의 동양인 남성’이라는 정체성에도 그닥 집착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렇게 동양인이면서도 결코 동양인 티를 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력사와 사회 속에서 개인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를 아름다운 문체로 나직하고 운률 있게 펴낸 그의 작품 속에는 사실 특유의 동양적 분위기가 조용히 숨겨져있다. ‘1945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에 들 만큼 현대 영미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를 독보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러한 명성보다는 동양과 서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시구로만의 ‘낯설고 깊은 상실’이라는 평가를 받게 한 신분과 배경이다. 그렇게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며 반복되는 정체성에 대한 확인을 비현실적인 소설세계에서 구축하다가 작품의 최후의 순간 이시구로는 자신의 현실에 도달하곤 한다. 하여 비평가들은 이시구로의 문학에 대해 “인간의 결함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것이 서양문학의 비극적 핵심인데 이를 동양적인 감성과 잘 결합했다”고 정평을 내렸다.   일본 출신의 영국 소설가가 영어로 쓴 일본, 영국 그리고 중국 배경의 이야기를 조선말 혹은 중문으로 읽는다는 것은 흥미롭다. 앞서 언급했다 싶이 필자는 그의 다섯부의 작품중 3부는 중문으로, 2부는 조선문으로 읽었다. 그리고는 다시 중문으로 읽었던 그의 작품들을 한국어 판으로 구입했다. 이제 서로 다른 어종이 주는 감수와 차이를 대조하면서 읽어갈 참이다. 우리 조선족 작가들의 작품에도 이처럼 이민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 중국의 소수민족 작가로 분류되여 무어지고 발전해온 우리 조선족문단은 거대한 중국의 주류문단과 접목하고 동질성을 가진 한국문단, 나아가 요원한 세계문단에로 나아가려고 오래동안 꿈꾸어왔고 그 고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바다 건너에서 일본계 영국인이 세계문단 굴지의 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우리도 지정학적인 인식과 자세를 갖추고 오지의 편협한 사유에서 벗어나 변방에서 더 넓고 큰 중심으로 다가가야만 이에 우리 문학의 비전이 있지 않을가 하는 명료한 사색을 다시금 되뇌고 머금어본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 이시구로는 영국국영방송 BBC를 통해 “노벨문학상 수상은 대단한 작가들의 발자취를 밟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부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매우 감동적이다”, “불확실한 순간에 있는 우리에게 노벨상이 긍정적인 힘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문학적 랑보와 경험들이 불확실한 과정과 침체기에 있는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도 환상을 버리지 않고 ‘심연’에서 솟아오를 수 있는 힘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참고문헌: 《지금 여기를 다르게 보여주는 나직한 목소리》 (민음 북클럼) 김남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한국민음사 2015년 출간) 邱华栋 (凤凰文化 2017年10月15日) 梅丽 (上海外国语大学法学院 副教授) (豆瓣读书2014年5月20日) (环球时报2017年10月9日) 田切让(2016北京大学 硕士研究生) 출처:2017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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