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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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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로년의 선택 댓글:  조회:1356  추천:2  2017-08-10
처가집숙모가 양로원에 간지 벌써 7년째다. 명절 때 마다 찾아가 보면 항상 머리를 깨끗하게 빗어넘기고 돋보기 걸고 신문을 본다. 여든을 넘긴 로인들 치고 보기 드문 모습이다. 아들은 한국에서 일한다. 로인이 독거생활 중 심장질환으로 곤혹을 치른 다음부터 양로원 생활을 선택했다. 처음 아들이 반대하면서 한국에서 하던 일을 걷어치우고 로인을 모시러 왔지만 로인을 모시는 일이 어디 하루 이틀 뿐인가, 살림살이가 유족한 편이면 몰라도 쪼들리는 축이라 한동안 모시다가 끝내 양로원을 선택하게 되였다. 친척들은 문안하고 돌아와 의론이 분분했다. 양로원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부정적인 생각이 있는가 하면 긍정적으로 찬성하는 마인드도 있다. 현재 양로원은 활동시설, 의료봉사, 거주환경, 식단배합 등 여러면으로 옛날과 비할바 없이 훌륭하다. 엇비슷한 년령배들과 담소를 나누고 때로는 서로를 걱정하며 위안해주고 때로는 손자손녀자랑에 해지는 줄 모르는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양로원이란 결코 무릉도원 같이 평화롭고 자유스러운 복지공간이 아니다. 특히 인지능력의 저하로 따른 치매, 또는 지체장애로 도움이 필수인 로인에게 제공할 맞춤형 서비스 대신 홀대와 박해를 당하는 일이 가끔 발생하여 가족과 양로원사이에 불신과 원망의 목소리가 귀청을 아프게 때릴 때가 있다. 문제는 양로원에서 제공하는 시스템관리에 체질적으로 거부감이 생기는 건 물론 굳어진 생활습관때문에 당분간 적응하기 힘들어 아예 보따리 챙겨들고 뛰쳐나온다 든가 아니면 수심끝에 우울증에 시달리는 로인이 많다는 점이다. 그런 연고로 어떤 자녀들은 로인을 잘 모시지도 못하면서 양로원의 선택을 극구 반대해 나선다. 옛날 코딱지만한 구들에서 3대 지어 4대가 함께 살아야 했던 불편한 진실이 사회 열점문제로 크게 불거진 것이다. 자녀가 꼭 제집에서 부모를 모셔서 효자가 되는 것도 아닌데 양로원에 보냈다 하여 시큰둥해하거나 흉을 보는 일이 주변에서 가끔 생긴다. 육신을 괴롭히는 질병보다 로인들 태반은 지꿎게 갈마드는 고독과 무료함이 두려워 양로원생활을 선택한다. 자식들한테 부담이 되는걸 싫어 평생 손때 묻어 정든 집을 떠날 때 로인의 심정을 읽을 줄 아는 현명성이 필요하다. 보통 자식의 뒤바라지하면서 로후대책마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온 로인과 경상적인 의사소통을 갖고 로인의 지향을 존중하고 소원이 이뤄지도록 적극 도와드리는 자녀들의 처사가 효중 효일 것이다. 열가지 맛나는 료리보다 가슴에 와닿는 따뜻한 말 한마디, 백가지 치료제보다 응어리 풀어주는 스킨십이 로인한테 그처럼 소중하고 그리운 것이다. 로인의 바램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무시한채로 제 주장만 앞세우려는 미욱함은 로인의 생각을 위축시키는 결과밖에 없다. 고령화시대 더는 가족의 일로만 국한 되여있지 않는 로인생활의 선택을 사회측면에서 옳바르게 풀어가는 일거일동이 로인을 존중하고 공경하며 민족의 미풍량속을 이어가는 좋은 행보가 아닐가 귀뜸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길림신문 2017-8-9
29    령의 단상 댓글:  조회:1410  추천:0  2017-07-28
령(零)하면 사람들은 흔히 시작도 끝도 없는 가상의 세계로만 인식한다. 일찍 인도 수학가들이 산용수자를 만들어낼 때 령은 하나의 독특한 존재로서 인간이 느끼지 못하는 수자의 의미를 가진다고 풀이했다. 건축가들은 령을 커다란 보이드 공간으로 생각하고 심리학자들은 령을 인간의 좌우를 소통하는 관계로 인정했다. 단마르크 심리학자 루빈이 그려낸  은 무에서 유를 부각해낸 생동한 화폭이다. 꽃병을 보는 순간 두 얼굴을 느낄 수 없고 두 얼굴에 초점을 맞추면 꽃병이 사라진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데 확실히 존재하는 실체이다. 인생은 령으로부터 시작하여 령으로 끝난다. 이 세상에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는것, 잃은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공수래 공수거다. 그래서 알렉산더르는 자신이 죽으면 관 밖에 두손을 내놓아달라는 의미심장한 명언을 남겨 세인을 깜짝 놀래웠을가. 어찌 보면 령과 인연을 맺은 인간은 얼굴이나 형체 한번 똑똑히 못 본 채로 그저 끈끈한 정이란 테두리 속에 묻혀 여직 때론 미워하고 욕하고 때론 끌어안고 울고 웃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인생계단을 오르기 직전의 휴식터라 일컫는 령의 자리는 잠깐 신들메를 조이고 스트레칭을 통해 몸을 가볍게, 유연하게 풀어가는 준비과정이라면 합당하겠다. 살다보면 인생길이 순탄치 않다. 예측불가능 또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을 이중삼중으로 격고 나면 인간은 허탈감에 빠져 망연자실해진다. 제로상태에서 자맥질할 때 위기는 희망을 동반하고 희망은 성공을 잉태한다. 가령 산중턱에서 폭우를 만났다 하자, 바위를 톺아오르며 계속 오르자고 하니 신심이 없고 또 위험이 도사리는 것 같아 애오라지 산 아래로 줄달음칠 때가 많다. 위기탈출에 급급한 나머지 우발적 산사태나 골짜기 홍수방지를 생각해볼 리 만무하다. 생을 지키려면 비바람을 맞받아 정상을 향해 올라야 한다. ‘절승경개는 험한 봉에 있느니’, 령의 호소와 같은 담대한 비전을 키우는 좌우명이다. 령의 존재는 단순히 태양의 주위를 돌며 춘하추동을 알리다가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행성의 궤적이 아니다. 가진 것이 없을 뿐 마이너스와 질적 차이가 있는 령의 본성이 공정하고 사심이 없어 항상 플라스와 마이너스 복판에 서서 좌우의 무게를 리드한다. 사이좋게 순리를 따르는 이웃과 다가서기를 원하지만 욕심이 부푼 플러스가 자기 쪽으로 한사코 끄당기려 애쓰면 배짱을 과시하는 령자리는 자신과 곱하려는 모든 수치를 다짜고짜 유야무야로 만들어버린다. 령을 거울처럼 마주보며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 듯 인간이 있을 때는 없을 때를 생각해서 아껴먹고 아껴쓰는 습관을 양성하고 없을 때는 꿈을 잃지 말고 매일매일 과제를 처음 읽는 소설처럼 대한다면 생활은 마냥 동그란 령처럼 그토록 매력적이고 아름답고 원만할 수가 없을 것이다. 빈손으로 성공하면 자수성가의 월계관이 씌워지고 실패하면 백수건달이란 질타를 피면키 어려운 현실에서 불철주야로 전전긍긍하는 령의 노력은 그라운드를 누비며 날리는 스타의 땀방울 같이 찐한 감동을 련발시킨다. 래일의 희망을 한낱 그림의 떡으로만 생각하고 주저앉아 신세타령에 물젖은 나약한 자와 떳떳이 결별의 마침표를 찍은 오늩날 령의 실태는 소유의 크기를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싸늘한 눈초리로 능멸해버리고 오로지 축적보다 베품을 앞세우는 적선의 행보를 따라 마음의 비움을 탐색하는 유의 극치임이 틀림없다.  길림신문 2017-7-27
28    '멋지다'의 이미지 댓글:  조회:1310  추천:0  2017-07-07
일상 남자의 매력을 나타낼 때 ‘멋지다’라는 표현을 쓴다. 오관이 단정하고 키기 훤칠한데다 성격까지 시원시원하고 듬직한 스타일이면 좀 좋아 찬사를 아끼랴. 옛날 위나라 미자하가 용모 삐여나 임금의 총애를 받던 중 언젠가 그가 먹은 복숭아 절반을 임금이 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출중한 남아가 빚어낸 믿기 어려운 에피소드일 뿐이다. 보통 사회교제에서 첫 인상이 주는 느낌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친구사이 같은 공부를 했어도 얼짱 몸짱인 측이 취직에 유리하고 진급에 도움이 클 뿐더러 경쟁시 항상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여 자칫하면 주변의 질투의 과녘이 되기 십상이다. ‘멋지다’는 인간의 성숙미에서 흘러나올 때 가장 매력적이다. 필자는 퇴직전에 사업상 관계로 리혼부부들을 많이 상대한 적이 있다. 함께 살던 부부가 돌아누우면 마치 원쑤를 상대한 것처럼 서로 만나기를 거부하고 재산분할시 서류에 싸인하러 왔어도 소 닭보듯 멀리 피해버린다.   그런 와중에 어느 리혼한 부부가 집거래하러 왔었다. 처음부터 두사람은 서먹서먹한 기분과는 달리 만나서 줄곧 안부를 물으며 건강을 챙기라고 신신당부하는 말투나 행동이 진짜 리혼한 부부가 맞을까 하는 의혹이 들 정도여서 수속을 마치고 멀리 사라지는 뒤모습을 보다 저도 몰래 “참, 멋지다 ! ”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용모보다 마음가짐이 어여뻐 흠모와 찬사를 쏟아낸 경우라겠다. 요즘 세상은 사람을 바라보는 심미관이 미묘한 변화가 생겨 옛날 잘난 사람 잘난대로 못난 사람 못난대로 살던 기틀이 깨여져 출중한 외모와 못난 용모가 서로 엇박자를 칠 경우가 많다.   아무리 일월이 환하고 명문대 졸업생이라도 온정한 직장이 없고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품팔이족이면 멋지다는 찬사를 듣기 아주 어렵다. 오히려 언틀먼틀 생겨도 쪽걸상이 아닌 회전의자에 비스틈이 앉아 빙글빙글 돌아가면 “참, 잘났어, 제격이야!”하며 엄지손을 내민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작은 그릇이 큰 그릇으로 변하여 호칭이 따르고 영향력을 행사하면 자연 ‘멋지다’에 감탄부호를 달게 된다. 로타리에서 고급승용차 모는 아저씨가 부럽지, 불더위 속에서 지휘봉을 잡은 교통안전원은 보이지 않는 비슷한 심리라고 할가, 머리우로 윙ㅡ소리내며 떠오르는 비행기를 쳐다보며 흔히 어떤 멋쟁이들이 앉았을가 올인하지만 눈덮인 활주로를 간밤에 쓸어낸 아저씨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결국엔 초라한 차림새는 면구스럽고 얼굴에 기름기 번지르르한 정장차림새가 한층 멋져보여서일 것이다. 어느 집안에 멋진 사내가 있었다. 하지만 손에 쥔것이 부족해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겼어도 잘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다 친척끼리 모여앉아도 원두쟁이 쓴외 보듯 씁쓸히 비웃던 사람들이 그가 후날 외국에 나가 돈 벌어 장가 들고 회사까지 척 차리니까 그제야 아주 생김새가 탤렌트 같다는지 화가의 붓끝에서 탄생한 명작이라는지 미사려구를 아끼지 않으며 엎어 끓었다.   애초에 모든 남자들 미남으로 태여날 수는 없겠지만 괴춤의 넉넉함과 부족함에 따라 천평에 실린 무게가 달라진다. 마치 같은 탄소라지만 연필심과 다이아몬드가 외관상, 가치상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붕 뜨면 하늘가의 칠색무지개요 뚝 떨어지면 돌틈사이에 스며든 물방울과 같은 존재이다. 해놓은 일이 없이 왈가불가하며 잘난 체하는 사람보다 어리숙해서 때론 바보같이 보여도 아늑한 보금자리는 남한테 성큼 양보하고 자신은 어설픈 끝자락을 택하는 진국에 뭇시선에 찐한 감동을 준다.   간혹 그 이미지가 굴절되고 변형되여 일시 곤혹스러울지 몰라도 눈부신 형상은 심금에 자리잡은 대나무처럼 예나지금이나 울울창창, 기상천외하다. 시시콜콜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리익보다 의리를 지키는 사람의 인기가 짱이다. 성숙한 인간이 되려거든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물러서지 말라. 한번 욱ㅡ하고 배짱을 앞세워 본때있게 해보는 과정에 미릅이 터서 경력자가 되고 달인이 되여 매스컴의 렌즈가 줄곧 따라다니는 훤한 인물로 뜬다.   인생행로에서 지름길을 버리고 험한 벼랑길을 톱아오르던 사람이 갑자기 몸을 돌려 자신있게 손을 흔들며 히죽이 웃어보이는 구리빛 얼굴과 근육질 몸매를 두고 누구나 현혹된다. 이때 튕겨나오는 “멋지다!”의 표현이야말로 가식없이 미남아에 대한 철저한 평가가 될 것이다.   길림신문 2017-7-7
27    기부는 고상한 문화이다 댓글:  조회:1277  추천:0  2017-06-24
십시일반이란 말이 있다. 열숟갈의 밥을 한그릇 만들어 주린 창자를 달래주려는 사회의 적선을 일컫는다. 생활 속에서 특별히 잘 나가는 행운아가 있으면 반대로 이중삼중으로 가난의 시달림을 받는 불행아가 있기 마련이다. 가뜩이나 살림기반이 튼튼치 못한 처지에 갑작스런 재앙이 들이닥쳐 생활질서가 엉망이 된 불우한 이웃을 본체만체 그냥 흘러보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제 집안일처럼 안타까운 심정으로 발벗고 나서는 지성인도 있다.   일전 연변부덕축구팀의 ‘거미손’ 지문일 선수가 불우한 학생을 도울 일념을 안고 연길시제2고급중학교에 10만원을 기부한 사적이 신문지상에 실렸다. 교육환경 개조에 얼마만큼이라도 보탬을 주려는 고매한 덕성에 감격은 물론 학생들은 마음속의 아이돌을 몸 가까이에서 본 것만도 흡족한데 기부하러 왔다니 경사에 희사가 겹쳐 교정은 말그대로 명절 같은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손에 쥔 것이 없어 마른 속을 태우던 학교지도부에 가뭄에 단비를 뿌려주듯 실로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말로써가 아닌 행동으로 실천한 본보기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우리 주변에서 평소 극심한 생활난을 겪는 사람들이 적잖다. 일을 게을리 하고 투전판을 즐기면 빈곤은 어차피 숙명처럼 찾아오겠지만 손발이 닳도록 꼬리 없는 소처럼 평생 분망히 보내도 가난의 멍에에 짓눌려 기를 못 펴는 약소군체에 한해서 사회와 정부는 대책마련에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돈 없어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하는 현상, 병마에 시달리지만 병원은 감히 엄두도 못 내는 가냘픈 그림자가  아직도 적잖게 있다.   문명한 의식을 갖춘 국민을 둔 사회일수록 기부문화가 매우 활약적이다. 참다운 기부문화 역시 문명시대에서 창출한 정신적 브랜드다. 보통 장사군들은 남의 지갑의 돈을 털어내기 조련찮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옆낭에 들어온 돈을 다시 내놓기란 더 아름찬 일일 수 있다. 자선이 말로는 쉽지만 실천이 어려워 희귀성을 가졌다는 일설도 있지만 그 매력 때문에 진주 같은 나눔의 이야기가 인간세상에 진한 감동의 열풍을 일으킨다.   지난해까지 련속 3년 동안 북경 중앙민족대학에 장학금을 기부한 커시안의료기계유한회사 박걸 회장이 금년에 또 교육발전기금의 명의로 연변대학에 360만원을 기부했다. 어려서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면서 후대들에게 사회의 존중을 받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여달라는 절절한 기대와 관심이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감격으로 흠뻑 젖게 했다.    옛날에 소를 팔아 자식 공부를 시켰다지만 그런 힘도 없는 취약군체의 어려움을 하나하나 풀어주는 헌신성이 민족의 장래를 구하는 훌륭한 정신적, 물질적 기부라고 해야겠다. 제한된 재력을 무한정 시혜로 베풀려고 하는 생각보다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의미가 있게 지원의 손길이 가닿는 일이 복지사회의 원칙에도 부합된다고 본다. 물심량면은 기부문화를 실천하는 핵심 요소이다.   인간의 평온한 걸음이 두 다리의 힘에 의거하는 것과 같이 수혜자가 위구심이 없고 후원자 또한 떳떳한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여 장기적인 포옹력으로 취약군체에 희망과 용기를 듬뿍 안겨주는 후덥고 넉넉하고 일관적인 체제를 갖춰야 한다. 기부가 고상한 문화인 것 만큼 더는 숨기지 말고 적극 홍보하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여 너도나도 동참하는 흐름세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름다운 마음과 선량한 행실은 그림자처럼 슬픔이 머문 곳을 찾아가면 아픔을 녹여주고 기쁨을 선사한다. 공은 쌓은 데로 간다고 했거늘 정부가 펼친 ‘빈곤공략전’에서 자신도 한몫을 당당히 해냈다는 성취감이 사회의 일각에서 한낱 평범한 이야기로 들려올 때 진짜 살맛이 나는 세상이 아닐가 생각한다.   길림신문 2016-6-22
26    생명례찬 댓글:  조회:2399  추천:0  2017-06-15
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우화이다. 력사는 선과 악을 구분할 줄 모르는 동곽선생을 바보취급을 해왔지만 개미 한마리도 상할가봐 념려하는 자비심은 대대로 전하며 칭송할 바라고 본다.   연길시에는 서른댓명으로 이뤄진 진달래등산팀이 있다.  일전 등산팀이 삼도만 산비탈을 찾은 적 있었다. 한창 잎새 무성한 나무가지를 헤치며 걷던 팀원들이 귀가에 문득 애처롭게 구원을 청하는 듯한 애기양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날가 모두 두리번두리번 사위를 살펴보던 중 멀지 않은 빨간벽돌집 마당가에서 솜뭉치 같은 몸을 가냘프게 바르르 떨고 있는 애기양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뜨락에 들어서자 애기양은 줄곧 매ㅡ매ㅡ 울면서 령물스럽게 집 뒤울안으로 뛰여갔다.   영문을 모르고 팀들은 의아해서 애기양을 따라가 보았더니 웬걸 눈앞의 광경에 모두 멍해졌다. 글쎄 굴뚝아래 개자리에 머리를 틀어박은 어미양이 안쪽벽모서리에 뿔이 걸려 더 들이밀지도 빼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고 있지 않는가! 몸뚱이가 바짝 말라 뼈가 앙상한 걸 보면 며칠 째 싱갱이질한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구해줄가, 개자리령역을 넓혀야 뿔이 빠져나올 수 있다고 판단한 팀원들은 하나 같이 큰 돌맹이를 찾느라 분주히 뛰여다녔다. 한번, 두번 돌맹이로 번갈아가며 벽을 까부셨다.   한참 지나 어미양이 구출되였다. 팀원들은 지쳐서 비틀거리는 양에게 갖고간 꿀물을 먹인다, 음료수를 먹인다 야단법석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어미양이 잠깐 후 기운을 찾는 듯하더니 새끼를 찾아 이끌고 풀뜯기를 시작했다. 팀원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며 긍지감을 시위하듯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며 경이로움을 표했다.   기실 이들이 생명체를 살려낸 일이 이번 뿐이 아니다. 몇해 전 한여름 사냥꾼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메돼지를 구하느라 온종일 등산을 포기하고 비지땀을 흘린 일이 있었다. 깊은 절망속에서 뛰쳐나온 메돼지가 골짜기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얼굴에서 희열과 감흥이 물결쳤다. 조물주가 세상을 만들 때 누리에 평등한 생존권을 주었다. 지구촌의 주인공이라 일컫는 인간은 모든 생명체들을 잘 관리하고 보호하여 생태균형을 바로잡는 의무가 있다.   말할줄 모르는 짐승이라 하여 제나름대로 욕설하고 학대하고 살륙하는 란폭성은 인간을 잔혹과 공포의 상징으로 내몰아 존엄에 먹칠하는 결과만 낳는다. 반만년 력사에서 인류는 산짐승을 가두어 가축으로 길들여 생산공구로 부려먹었다. 채식으로 배를 불리울 수 없어 육식을 턱대고 가끔 손에 닿는대로 멸종에 이른 산짐승까지 마구 잡아들인다. 입고 쓰는 물건마저 타조가죽이요, 악어가죽이요, 수달피요 하며 인간의 살갗을 풍요롭게 분칠하려 든다.   인간을 믿고 사는 짐승을 무작정 도륙을 내는 아둔함이 결국 우리 자신의 생존공간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도미노골패가 되는 줄 모른다.  인과보응을 입버릇 처럼 외우면서 제 배짱대로 사이비한 불찰을 저지르는 리유는 무엇일가. 옛날의 흥부는 다리 부러진 제비가 그냥 불쌍해 약을 발라줬을 뿐인데 이듬해 제비가 물어온 박씨를 심어 큰 복을 누렸는가 하면 놀부는 앙큼한 수작을 피워 화를 좌초한 이야기는 인간의 선과 악을 그려낸 극치라 해야겠다.   갖가지 산새들이 즐겁게 노래부르고 ‘왕관’ 떠인 사슴떼들이 맑은 물에 비끼여 수채화를 방불케 하는 무릉도원은 오로지 인간의 팽창된 욕심을 자제하고 생명체를 보살피는 아량에서만 비롯된다. 오스트랄리아 어느 도심에서 진행된 테니스경기에서 운동원이 날린 공이 공교롭게 공중에서 배회하던 새를 명중시켰다. 새는 주검으로 땅우에 떨어졌고 운동원은 시합을 중지하고 새 곁에 다가가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실수을 빌었다.   아름다운 소행은 산출한 모태가 달라도 찐한 감동은 그처럼 비슷하다. 령장의 허울을 벗고 기꺼이 중생의 벗이 되여 자연의 섭리를 지키는 모범생으로 살자. 땅덩어리에 서식하는 모든 생명의 령역이 자유롭고 평화스러울 때 우리 자신도 그만큼 기름진 호강을 누리며 즐거움을 만끽할 것이다./ 길림신문 2017-6-14
25    세상은 아는 것 만큼 보인다 댓글:  조회:1576  추천:0  2017-06-13
인간의 가시거리는 태여날 때 별반 차이가 없었다. 사는 동안 점차 보고 듣고 느끼면서 인간의 눈높이가 달라졌을 뿐이다. 정상을 향해 벼랑길도 서슴지 않는 담대한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쥐꼬리만한 능력에 안주하며 비에 젖은 포스터처럼 혼신이 얼룩덜룩한 타입도 있기 마련이다. 흔히 시야가 좁은 사람을 우물 안의 개구리라 비웃지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주변에 어디 한둘뿐인가. 인간이 평생의 노력을 경주해도 터득 못해 대를 이어가며 배우는 지식을 금방 어섯눈 뜨고 일목료연한듯 돌아앉아 문빗장을 치니 책과 담을 쌓고 사는 혹자의 고집을 돌려세우기란 참 힘들 수 밖에 없다. 며칠 전 연길시는 3선급 도시로 부상했다. 원인 중 상업의 물동량이 한자리 톡톡히 차지했다. 길량켠은 영업가게들로 즐비한데 다닥다닥 붙은 간판 속에서 책 파는 가게를 찾기란 풀밭에서 바늘 찾기다. 고작 몇집 밖에 안되는 서점마저 경영난으로 책수량이 적고 정보가치가 떨어진 내용들로 수두룩해 평소에 식당이나 오락장소는 문전성시를 이룬다지만 서점은 고객보다 판매원이 훨씬 많은 느낌이 들어 썰렁하다. 살펴보면 공공장소나 직장에서 잡담소리가 요란하지만 책 보는 정숙한 자세를 찾아보기 어렵다. 책 보는 일은 마치 학자 외에 자신들과는 무관하게 여기는 자체가 일종 무식의 발로이다. 체계적인 지식도 없으면서 뭇사람들 앞에서 아는 체하며 좁은 소견과 얕은 잔꾀로 세상물정을 해석하려니 자연 불가사의한 일들이 공공연히 자행된다. 간혹 “왜 책 보기 싫은가”고  물으면 “그걸 어디에 써먹어요? ” 대답이다. 하긴 일자무식이 돈 버는 사례가 흔하디 흔한데 그까짓 거 체념해서 랑패 볼 일이 없을 것 같다. 벽돌장 규격을 몰라도 집짓기를 해서 괴춤이 늘어난 졸부가 얼마 많이 생겼던가. 배우려는 의욕이 없고 항상 두리뭉실한 속구구로 이른바 상식과 경험 따위를 갖고 헤덤벼친다면 만사는 대길이 아닌 불길일 수 밖에 없다. 상식은 익혀둬야 할 격식일진대 경험은 지나온 과거사일 뿐이다. 그래서 세상을 보다 넓고 밝은 안광으로 살피는 지혜를 갖추려면 젊은이든 늙은이든 할 것 없이 꾸준히 배우며 터득하라는 것이다. 나뽈레옹은 평생 책보기를 즐겼다. 전호 속에 엎드려도 보고 말안장에 앉아서도 책이 손에서 떠날 줄 몰랐다. 일개 가난한 병사가 구라파의 방대한 제국을 세워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하사 받는 특전을 누릴 수 있었던데는 7천여권에 달하는 책들을 탐독하면서 얻은 천리혜안의 파워를 떠나 상상할 수 없다. 고금중외에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한 사례는 많다. 오늘날 시대가 바뀌여진 시점에서 맹목적인 공부보다 어떤 목적으로, 어떤 범주에서 상상력을 과시하는 공부를 할 것인가에 따라 내용과 결과가 달라진다. 맹자는 일찍 “무턱대고 책 속에 빠지는 것이 읽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고 말했다. 글줄을 익히는 기억력을 공부의 실력으로 착각하고 외우고 쓰고를 반복하는 빈껍대기 공부가 오히려 인간의 노력과 시간을 랑비하는 결과 밖에 없다. 하나를 알면 열가지를 터득할 수 있는 신명은 오로지 창의적인 공부에 의해서 실현이 가능하다. 인공지능시대가 현실로 다가서는 과정에는 응축된 리론의 공간을 파헤치고 폭넓게 다양한 예측을 할 줄 아는 비전이 약속된 인재를 요구한다. 인재란 분석과 판단이 빈틈없는 정확한 사람을 짚어 말할 때 사물에 대한 시각차를 근근히 견해차이로만 인식한다면 그 이상 억울한 오판은 없을 것이다. 백여년 전 스웨리예의 과학자 아레니우스가 인류 최초로 지구의 온난화를 경고했다. 삼림을 보호하고 화석연료의 사용을 막아 이산화탄소의 균형을 유지할 것을 호소했으나 환경오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르는 무지몽매한 처사가 현명한 제안을 여지없이 짓뭉개버렸다. 때아닌 폭설, 홍수피해가 잇따르자 아뿔싸! 뒤늦게 무릎을 철썩 치며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면 돌아오는 징벌이 무서운 법이다. 그나마 해가 뜨면 달이 지는 신비 속을 훤히 꿰뚫어보는 인간의 선견지명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충격적인 미래를 슬기롭게 대처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천만다행스럽다. 삼라만상을 담아두는 마음의 그릇이 크고 작음에 따라 가꾸는 터전의 모양새가 변화를 이뤄내는 상식 쯤은 미리 익혀두자. 세상이 아는 만큼 보이는 까닭에 인생사도 항상 그에 따르는 희로애락으로 푹 절어있다. 길림신문 2017-6-7-12
24    작가의 돈지갑 댓글:  조회:1396  추천:1  2017-06-05
  (흑룡강신문=하얼빈)한국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2015년 예술인 실태조사"에 의하면 한국예술인 예술활동연간수입을 분야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건축(4832만원)(이하 모두 한화), 방송(3957만원), 만화(2002만원) 순으로 많았으며 문학(214만원), 미술(614만원), 무용(861만원)은 적었다.   누군가 글쓰기는 고역으로서 뼈와 살을 깎는 아픔은 없지만 정신상 육체상의 이중 시달림을 겪는 고달픈 노동이라 하였다.그런 만큼 글을 써서 발표한 후 원고료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또한 일반적인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보다 더 높은 보수가 주어져져야 한다.하지만 글쟁이들은 가련하게도 많은 경우 무보수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니 글 쓰는 사람이 점점 적어지고 글쓰기 열정도 점점 식어가는 것만은 사실이다.필경 글쟁이도 의식주는 담보 받아야 하지 않는가.그래서 어떤 이는 오늘날은 먼저 돈을 벌어놓고 글을 쓰라고 하는데 뜻인즉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창작의 시간적 여유와 정신적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글만 쓰며 살아가기란 여전히 어렵다. 누구나 한번쯤은 시인과 작가를 꿈꾸지만 글은 밥이 될 수 없음이 엄혹한 현실이다.중국이나 한국 문인 중에서 원고료를 받아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사람은 백에 한 명, 아니 천에 한 명도 되지 않는다. 글쟁이들은 원고료로는 여러번 얼어 죽고 굶어 죽었을 것이다. 많은 경우 글을 발표하고도 원고료 한푼 받지 못하는가 하면 설사 원고료를 받는다 쳐도 그 원고료가 형편없이 적다.현재 한국문예지에서 2~3천자되는 에세이 한편의 원고료가 고작해야 5~7만원,그나마 감지덕지다.현재 중국 조선족 언론지의 원고료가 전에 비해서는 많이 올라갔다.하지만 아직도 너무 낮은 수준이다.언젠가 한 선배작가가 현재 글짓기는 여가로 하되 전업으로 하다간 밥 빌어 죽 쑤어먹는 처지로 되고 만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과연 적절한 말이다.   내가 알기에 글쟁이 중 소수를 내놓고는 대부분이 1년원고료가 가련할 정도로 적다.심지어 자유기고인이라 칭하는 전업작가들도 대부분 그 원고료수입이 결코 많지 않다.가끔 문우들을 만나 원고료를 얼마 벌었는가 물으면 다들 먼저 허구픈 웃음부터 짓는다. 오늘날 책 한 권 펴내기가 얼마나 힘든 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돈이 없어 책을 펴내지 못하는 작가들이 수두룩하다.책을 내면 낼수록 밑지는 세상,가뜩이나 돈이 없어 쩔쩔매는 판에 책마저 내면 식구들은 굶어 죽고 한데로 나 앉으란 말인가? 이 몇 해 나더러 이미 발표한 글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내라고 권유하는 사람들이 꽤나 된다.그럴 때마다 나도 마음이 들떠 그렇게 해볼 생각을 한다. 그러나 금세 도리질 한다.내가 쓴 글들을 남들이 좋아할지 안 할지를 모르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 책을 사줄 사람이 얼마나 될지를 파악이 없기 때문이다.괜히 좋지도 않은 책을 이 수단 저 방식으로 남이 사가도록 하기도 싫고 더욱이 남이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지 못해 책을 사도록 하고 싶지는 않다.어쨌든 책을 내서 팔지 못해 경제적으로 밑지고 싶지는 않다.   중국의 당대 작가 장현량(张贤亮)의 말을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난다."남들은 나를 당대 작가중의 수부(首富)라고 하는데 기실 나는 거지왕초(丐帮首领)에 지나지 않는다.작가들은 빈민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이는 중국에서 작가들의 처지를 현실적으로 보여준 말인데 작가들은 빈민층에 속한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비록 그가 고급 차를 몰고 다니고 브랜드 옷을 걸치고 다닌다 하지만 그는 다만 작가들 중의 부자일 뿐 사회적으로는 중산층에도 서기 바쁘다.   작가들의 빈곤은 글을 발표하고도 원고료를 너무 적게 받거나 아예 원고료를 받지 못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글짓기를 주업 또는 제일 부업으로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적은 원고료,언제 받을지 기약할 수 없는 원고료로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작가도 성현이 아닌 만큼 돈을 벌어야 하고 살림을 해야 하는데 받는 원고료가 적거나 심지어는 아예 받지 못하게 되니 자연히 경제상 쪼들리기 마련이다. 베스트셀러 시집을 냈던 한국의 한 유명 여류시인이 최근 세무서로부터 근로장려금을 신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해서 큰 얘깃거리가 됐다. 근로장려금이란 연 소득이 1,300만원(한화) 미만인 무주택자에게 정부가 주는 생활보조금이다. 글품을 파는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우울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몇 해 전에도 한 여류 작가가 가난과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세대 주택 지하 단칸방에서 혼자 글을 쓰던 시나리오 작가는 췌장염 등을 앓고 있었지만,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작가는 이웃집 현관에 이런 쪽지 글을 남겼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슬픈 글은 없을 것이다. 새해를 맞아서 이웃집 사람은 며칠 집을 비워 그 쪽지를 보지 못했고, 32세의 작가는 숨졌다.   얼마 전 한 선배문우의 농담 섞인 말이 지금도 머리에 메아리 친다."난 이제부터 글을 잔뜩 써서 모아뒀다가 공모전에만 응모할래,그러다 어떻게 한번 당선되면 그래도 목돈을 쥐어보잖아,그렇게 하지 않고 전처럼 그렇게 글을 발표해서야 어디 살아나가겠어?" 선배님,누군들 그런 생각이 없겠습니까? 헌데 당첨률이 얼마나 될까요? 다들 그런 생각이 있을 것이니 요행은 좀 바라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물론 내가 써낸 책이 베스트셀러 50위안에만 들어도 밥값은 나오겠지,그런데 나에게 그런 운명이 차례 질까? 현재 한국에서 매개 공모전에 보내오는 원고수가 적어도 천편을 넘어서는데 그중 당선작은 기껏해야 몇편이다.그러니 그런데는 웬간하면 바라보지 않는게 좋다.   사실 문인들은 거의가 가난이 뼛속까지 번져 있다. 글만을 팔아서는 신발 한 컬레, 옷 한 벌 제대로 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글쟁이란 자부심으로 가난을 내쫓아보지만 생활의 궁핍함은 엄연한 고통이다. "선비가 글을 잘하면 곤궁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처지가 곤궁한 뒤라야 글을 잘하게 되는 것인가?[豈士能文則困窮耶?抑窮而後工也?]"가난이 문인의 숙명이라면 물론 슬픈 일이다.어쨌든 쓰고 싶은 글은 써내야 하는 것이니 작가는 가난을 달게 여기는 인간으로 밖에 될 수 없다. 가련할손 돈지갑 빈 글쟁이들이여!
23    사랑의 장벽 댓글:  조회:1371  추천:1  2017-06-02
인간의 사랑이 언제부터 시작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아마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그 시조일 것이다. 원초적 사랑에은 조건이 없었지만 순결하고 깨끗한 사랑에 점차 이런저런 요구가 곁들며 두터운 장벽이 형성되여 자유로운 남녀 사랑을 가로막아 나섰다. 하여 수많은 청춘남녀가 뜻밖의 장벽에 부딪혀 슬피 울었다. 춘추시기 미생(尾生)이 바로 그 세파속에 묻힌 하나의 조약돌일 것이다. 미생은 온종일 책과 씨름하는 가난한 남산골샌님이였다. 그런 그가 앞집 처녀한테 열렬한 사랑을 고백했지만 처녀 부모들한테서 퇴짜를 맞았다. 리유란 돈 없는 거렁뱅이한테 딸을 안준다는 것이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약속한 강뚝에 앉아 처녀가 오기를 기다리던 미생이 뜻밖의 폭우를 만났다. 우르르 쾅쾅-나무뿌리같은 번개불이 시커먼 구름장을 찢으며 퍼붓은 창대같은 비줄기가 졸지에 섬약한 미생을 삼켜버렸다... 후날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생명까지 바친 미생을 두고 공자의 제자 증삼(曾三)이 사랑에 충성한 귀감이라며 극구 찬양했다. 세월이 흘러 수천년, 미생과 같은 전설의 인물이 얼마전 연해도시 혼례식장에 있었다. 훤칠한 키에 멋진 차림을 한 총각이 신부 없는 결혼식을 올려 하객들을 아연케 했다. 꽃다발을 든 총각이 혼자 무대우에 나타나 사랑의 굴곡적인 스토리를 피력했다. 워낙 총각은 대학시절 한 동창생처녀와 사귀였다. 도서관에서 만난 인연이 캠퍼스에서 무르익어 서로 흠모하며 결혼까지 약속했건만 결혼 사흘을 앞두고 갑자기 처녀집에서 일방적인 혼인취소절연장이 날아왔다. 리유는 역시 돈 없는 총각한테 딸을 시집 보낼 수 없다는 부모들 립장이였다. 총각은 억울하고 격분했지만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사랑은 신성불가침이라 하여도 높은 학벌 앞서 재산을 우선시하는 굳어진 룰을 깨뜨릴 수 없어 총각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과 같은 심각한 번뇌에 빠졌다. 하지만 남자가 내린 결심은 단호했다. “오늘 비록 가난하여 사랑하던 처녀를 놓쳐버렸지만 후날 백만장자가 되였을 때 꼭 그 처녀를 찾아가 이 꽃다발을 안겨주며 백년가약을 맺으리라...” 총각의 비장한 결심을 읽은 듯 하객들 모두 뜨거움을 금치 못하였다. 돈 없는 남자 장가들기 힘든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근간 조선족 실태를 살펴보아도 그렇다. 요즘은 인간의 순수한 감정도, 열렬한 사랑도 배금주의 장벽에 부딪혀 산산히 깨여지는 비극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게 현실이다. 약자의 숨소리가 강자의 목청에 의해 릉멸되는 현실 앞에 옛날 전설 속의 ‘이몽룡과 성춘향’의 로맨스는 창백하기 그지없다. 수천년 내려오며 문당호대(门当户对)란 낡은 관념이 깊숙히 뿌리내려 머리 속에 온통 돈과 직위로 혼인의 성사여부를 결정짓는 틀이 꽉 들어박혀있다. 같은 렬차를 타지만 배석자리가 연석, 좌석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부자집자식이 가난한 집안과 통혼하면 마치 궤도를 벗어난 것처럼 당황해하며 지나치게 사랑의 부등식을 주장한다. 결혼한 신접살림이 부러운 것 없이 버젓이 살기보다 두손 맞잡고 하나,둘 가장집물을 마련하며 사는 멋이 제격이다. 하루하루 애면글면 노력한 흔적이 자식에게는 천금 주고 바꿀 수 없는 생생한 삶의 기록이며 진선미로 가득찬 생활의 보람찬 열매이다. 자식들에게 결혼 후 사회무대에 진출하여 능력를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라. 운동선수가 올림픽수상식에서 수여받은 금메달를 움켜쥐고 꼭 깨물어보는 리유가 곧바로 수년 동안 피타는 노력을 경주한 캐리어를 확인하는 즐거움을 동반한 영광일 것이다. 인생은 이런 눈물겨운 즐거움과 영광이 방울방울 맺혀져 강을 이뤄 굽이치는 과정일진대 결혼은 그 속에서 급물살이 서로 부딪쳐 하얗게 솟아오른 물기둥이다.  어찌보면 꽉 막혀있을 줄 알았던 혼인장벽에 오가는 소통의 창구가 빠끔이 열려져있어 천만 다행스럽다. 서서히 열리는 틈바구니에서 청춘의 용기와 희망이 파릇파릇 새싹처럼 돋아난다. 아무렴, 엄청난 견고성을 뽐내던 마지노선도 하루아침에 무너졌은즉 해빙기를 맞은 사랑의 장벽도 오래잖아 력사의 유적으로 남아 걸어온 전철을 반추해보는 좋은 거울로 될 것이다. 사랑은 멍에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을 때 진짜 행복하다. 길림신문 2017-6-1
22    볼록렌즈의 삶을 살자 댓글:  조회:1301  추천:0  2017-05-23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삶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강한 집중력을 가졌다는 거다. 마치 레이저 불빛처럼 한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그들은 목표를 이루기전까지 단 한치의 곁눈질도 하지 않는다. 에디슨은 "일어나 잘 때까지 모든 생각을 한가지 목표에만 집중하라. 하루에 16시간 한가지 목표에 집중하라."고 했다.   "한가지 일에 집중하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은 아무것도 안하느니만 못하다" 이는 이것저것 집적거리다 한가지도 못하고 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인 듯하다. 볼록렌즈가 햇빛을 모아 검은 종이를 태우듯 한곳에 전심하면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가지 일에 전심한 것이다. 한곳에 자신의 전부를 쏟을 때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물리학자가 된 것은 평생 물리학만 공부하고 연구했기 때문이다. 일본에 '센몬빠가(专门马鹿)' 란 말이 있다. 우리 말로 '전문바보' 라는 뜻인데, 이는 한 분야에 바보스럽게 몰입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다른 것은 몰라도 된다. 다른 것은 못 해도 된다. 하나만 잘하면 그것이 최고다. 한 분야의 1인자가 최후의 1인자다." 이것인즉 '센몬빠가'에 숨어있는 정신이다.   '하버드 새벽 4시반'에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참새만한 크기의 작은 새가 풀밭에서 먹이를 찾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수풀속에서 뱀이 나타나더니 새를 한입에 집어삼킬듯 덤벼들었다. 위험을 느낀 새는 재빨리 움직였지만 멀리 날아가지 않고 뱀의 머리를 사정없이 쫏기 시작했다. 워낙 작은 새였기 때문에 뱀이 치명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였고 공격받은 뱀도 슬슬 반격하기 시작했다. 새는 뱀의 공격을 피하면서 계속 부리로 뱀의 머리를 쪼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부위만을 쪼았다. 그렇게 백번넘게 쪼아댄 결과, 뱀은 결국 수풀속으로 사라져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힘으로도 덩치로도 한참 밀리는 작은 새가 어떻게 무시무시한 뱀을 물리칠 수 있었을가? 그것은 새의 공격법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새는 뱀의 머리중에서도 한군데를 골라 모든 힘을 그곳에 집중해서 끊임없이 쪼아댔다. 그 결과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시간과 삶을 통째로 걸고 곁눈 팔지 않는 힘. 그것이 우리 생활의 수많은 달인을 만들었다. 달인은 수십년간 한 분야에 종사하며 부단한 열정과 노력을 기울인데서 생겼다. 특기를 기르는데 있어서는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는 식으로, 한가지 것을 붙들고 늘어져서, 뛰어난 한가지 솜씨를 보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 하겠다. 누구나 한가지만 잘하면 천재가 될 수 있다. 각자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을 즐기면서 계속하면 많은 성취를 거둘 수 있다.   25살의 영국 청년 대니 매커스킬은 4살 때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걷는 것보다 자전거를 더 많이 타며 자랐던 대니는 금세 자전거로 나무를 타거나, 철제 울타리 위를 달리는 등의 묘기를 아주 익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성인이 되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거리에서 자전거로 묘기를 부렸다. 그의 친구가 대니의 묘기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자 한달도 안돼 500만건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며 순식간에 '자전거명인'으로 유명세를 탄 대니에게 각종 CF와 영화, 방송출연 등의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한 이유는 능력이나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열정을 집중할 수 있는 하나의 뚜렷한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정도의 힘과 시간이 이곳저곳에 분산되고 목표가 계속 바뀌어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어느 현자가 이런 말을 했다. "성공은 얼마만큼 많은 일을 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집중해서 일을 하느냐에 달렸다." 동시에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항상 한가지 일을 해결해야 할 때에는 그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집중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다. 우리 인생은 한가지만 잘해도 성공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흑룡강신문 2017-5-23
21    평화시대의 애국자 댓글:  조회:1291  추천:1  2017-05-22
강뚝길을 따라 걷는 산책은 즐겁다. 우둠지 사이로 쏟아지는 해살을 등지고 일부러 셈평좋게 늘쩡늘쩡 걸으면 저도 몰래 흥흥 코노래가 날 때 있다. 언젠가 그날도 강뚝길에서 향기로운 화초들의 풀내음을 맡으며 산책을 하던 중 뜻밖에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웬 로인이 밀짚모자를 꾹 눌러쓰고 관목숲 틈바구니에 비집고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일했다. 호기심이 동해 다가가서 살펴보니 나무꼬챙이로 숲 그루 사이에 끼인 휴지쪼각, 담배꽁초, 잡동사니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비닐주머니에 넣는 것이였다. 강뚝길을 청소하는 일군은 따로 있는데 왜 하필 저 로인이 고달프게 고생을 찾아할가? 의문스럽고 또한 궁금해서 저 만치 돌의자에 앉아 다리쉼하는 나이 지숙한 분과 물어보았다. “저 령감말이우? 평생 위생청결부문에서 일하다 퇴직하고 나니 심심해 그러겠지우...” 대답해주는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지만 뒤돌아보며 걷는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로인에 대한 감탄사가 그들먹히 차올랐다. 그런 와중에 또다른 광경이 나의 시선을 자극했다. 끼리끼리 둘러앉아 벌리는 야외마작판이였다.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담배꽁초, 잦은 다툼질을 감내하지 못해 코를 힝 풀어 내동댕이친 휴지장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금방 목격한 이름 모를 로인의 덕성과 대조적인 살풍경을 이뤄 부풀어올랐던 심정이 김 빠진 공처럼 대번 후줄근해졌다. 백메터도 안되는 거리에서 낮과 밤의 다른 판이한 두 얼굴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실망감이 컸다. 몇년전 정부가 시민들의 휴식터를 마련하고저 재정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각고의 노력끝에 일궈낸 공간을 부르하통하공원으로 명칭을 달았다. 낮에는 일매진 물마루 넘실거리며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가 찌물큰 몸을 시원히 식혀주는 매력 넘친 강뚝길, 저녁에는 밤하늘의 별무리가 통채로 내려와 우중충 솟은 건물 외곽에 불빛의 신비한 환상을 얹혀 놓아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한껏 뽐낸다. 누구나 이 산간도시를 선뜻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너무 경망스러운 것 같고 차분히 더듬으면 끈끈한 정이 온몸을 휘감아 멀리 떠난 타향의 몸일 지라도 그 감격이 사무쳐 꿈속에서조차 부르며 찾는 고장이다. 비록 가난의 흔적이 듬성듬성 남아있어 괴로운들 어이하랴. 옛날 멧새 슬피 울던 버들방천을 개척한 선조들이 땀방울이 방파제의 물갈기로 흩날리는 듯 일초일목에 하얀 넋이 깃들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뭔가를 보태주고 싶은 정열이 앞다투어 긍지가 새롭다. 도시를 가꾸는 몫이 어찌 개인이 따로 있고 정부가 따로 있겠는가. 전문 설계사가 전망계획을 그려내고 정부가 비준하고 시민들이 캠페인 식으로 하루이틀 동원되여 성과놀음을 탐내던 시절은 이미 멀리 지나갔다. 구역구역 아빠트단지의 록색공원이 전체 도시공원과 융합되여 공동체를 형성하는 생산성 가치를 창출해야 도시의 이미지가 유명 브랜드처럼 급부상한다. 강뚝공원을 한낱 세면트구조물 사이에 끼인 침묵의 시설물로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내집 정원처럼 알뜰히 정비하여 생명의 약동소리 차넘치게 할 것인가. 여기에는 전반 시민들의 한결같은 마음과 노력이 필요하다. 도시환경이 엉망진창인데 유람객이 안 온다고 아우성치는 일은 마치 구역질 나는 가게에서 음식장사하려는 어리석음과 같은 리치이다. 사람들은 흔히 오장륙부를 자신의 몸속에서 떼여놓고 생각하지 않지만 더불어 숨쉬며 사는 도시를 자신의 생활테두리밖으로 뿌리쳐버리고 자기중심의 극단을 고집한다. 제 집 문 앞 눈만 쓸고 한치의 울타리밖 눈더미는 본체만체하는 리기심이 둥지를 틀고 앉아 사회청결활동이 항상 쟁개비열정으로 뽀르르 끓다 만다. 건설의 힘도 멋지겠지만 그 거리를 보석처럼 깨끗히 닦고 또 닦는 정성이 더욱 값지고 보람차다. 애민애족의 뜻을 모아 감싸안아 세운 도시의 혈관속에 분명 우리의 심장에서 터져나온 뜨거움이 굽이친다. 청춘의 활력이 끓어번지는 도시에는 녀인의 몸 치장과 같은 화려한 친환경문화가 샘처럼 용솟음쳐 흘러야 한다. 부르하통하공원 시공을 도맡은 연변돈황환경예술유한회사 송영학사장은 시민들에게 좋은 환경을 선사하기 위해 밤낮이 따로 없이 악전고투하여 공사를 기한전에 훌륭히 완성했고 손수 키운 갖가지 중키나무, 애솔나무 도합 24만원 어치를 무상으로 강뚝에 심었다. 그의 로고와 헌신정신을 치하해주는 사람들과 나누는 송영학사장의 이야기가 항상 이렇다. “ 응당 해야 할 일인데 뭐 대단할 것 없습니다.” 낮은 자세로 겸손을 지키는 아량이 지극하다. 말보다 실천에 옮기는 주인공의식이 우리 사회를 문명으로 리드해나가는 힘의 원천이고 동력이다. 지난날 빼앗긴 강토를 찾기 위해 목숨까지 바쳐싸운 수천수만의 영웅들을 애국자라 부른다면 평화의 오늘날 한줌의 흙, 한그루의 나무, 한방울의 물을 자신의 살점처럼, 피방울처럼 귀중히 여기는 귀감들을 시대의 영웅이라, 애국자라고 자랑 높이 부르고 싶다. 금싸락은 작지만 뿜는 빛이 눈부시다. 물 한방울의 시작은 미세하지만 대하를 이뤄 바다로 흐를 때 기세가 용용하다. 길림신문 2017-5-22
20    술값과 몸값 댓글:  조회:1449  추천:1  2017-05-18
      요즘 우리 사는 주변에는 갖가지 핑게를 대고 벌이는 술판이 많다. 동창생 모임이요, 직장동료 파티요, 기념행사요, 하여튼 이름이 가닿는 대로 모여앉는 장소에서 어떤 술을 쓰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진다. 그저 돌림식으로 잇대는 술추렴이라면 보통술로 대충 얼버무려도 무방하겠지만 명심하고 본때있게 청하는 좌석에서 고급명주가 안 오르면 서글퍼진다.   높은 술값이 초청 받은 손님들의 몸값을 은근슬쩍 올려주어 가슴이 뿌듯한 나머지 자세부터 고쳐앉으며 경건함을 표시한다. 오가는 말투도 체호브의 에서 나오는 대화처럼 “이렇다, 저렇다”가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존칭어로 바꿔쓴다. 선배이든 후배이든 례우를 갖춰서 고급술을 선사한 귀인의 말씀을 잠자코 듣는 게 이미 굳어진 관례이다.   접때 친구의 초청을 받고 파티에 참석한 적 있다. 장소가 뀀점이라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아 갈가말가 망설였는데 정작 가보니 웬걸 엄청 수량의 장어구이와 모태주, 독일맥주를 올렸다. 찌뿌둥하던 날씨가 갑자기 쨍ㅡ하니 해 뜨는 기분이랄가, 감지덕지해 두손 맞비비며 후한 대접을 받고보니 헤여질 무렵 저마다 황송해서 초청인의 손목을 오래도록 잡아주며 감개무량해했다.   력대로 술문화는 태반 사회 상류층에 속해있었다. 자연재해가 련속부절히 들이닥칠 때마다 온갖 금주령을 내려 백성들은 술맛을 잊은 채 살아야 했다. 매일 흥청망청 술판을 벌리는 임금에게는 의례당당할지 몰라도 영웅호걸이나 음풍영월을 읊던 풍류인들은 술잔을 기울이면서 자신들이 정신상 받은 트라우마를 무마하려 애썼다. 그 와중에 량산박 무송이 술기운을 빌어 맨주먹으로 범을 때려잡은 전설이 생겨났는가 하면 한번의 음주에 백편의 즉흥시를 날리는 리백의 신화가 세상을 희한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시대가 변하여 옛날 그처럼 귀하던 술이 백성들의 밥상에 싫을 정도로 오른다. 아침 한잔, 저녁 한잔, 누군가 명절에 들고온 고급술을 음미하면서 셈평 좋은 생각에 웃음집이 흔들흔들해진다. 어찌 보면 고급술이 더 이상 부자들의 독점물이 아닌 듯하면서도 일반인이 선뜻 손을 대지 못하는 리유는 무엇일가. 단지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 비싼 가격 때문일가?   사실 눈덩이처럼 부풀어오른 명주가격이 저소득계층이 아연실색할 정도여서 입맛만 쩝쩝 다시기 일쑤이다. 저 비싼 술을 누가 마실가, 고개 갸우뚱 해봐도 십중팔구 구매자 본인이 마실 것 같지 않고 마시는 이들은 또한 제 돈으로 산 것인지 분명치 않다. 한때 청탁놀음이 사회 도처에서 기승을 부렸다. 어린이 유치원부터 성장하여 대학까지, 직장에서 승급은 물론 생활의 구석구석에 포도넝쿨처럼 청탁놀음이 뻗칠대로 뻗쳐있었다. 마치 거대한 치륜이 서로 이가 맞물려서 잘 돌아가는데는 윤활제가 필수인 것처럼 끊어진 사슬을 이어주며 성패를 가르는 최대 변수는 역시 술이였다.   천마디, 만마디 말보다 한병의 고급술의 힘이 막강하다. 값진 술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요지경과 같다. 언제부터인지 술값과 몸값이 정비례 관계로 전환됐다. 술값이 오르면 몸값도 잇달아 오른다. 그라프를 살펴보면 변곡점을 모르는 불마켓 양상으로 줄곧 오르기만 한다. 인간의 허영심과 과시욕이 사회 베블런효과를 극도로 팽창시켜 고급술을 마시는 사람은 유능하고 재부를 축적한 귀중한 신분을 지닌 존재로 부상했다.   혼사집에서 아무리 상다리 부러지게 산해진미 차려놓아도 고급술이 없으면 하객들은 시큰둥한 기색을 떠올리지만 값비싼 명주가 등장하면 벌써 흥분에 들떠 어깨부터 으쓱해진다. 먼 후날에 가서도 기억을 더듬으며 “그때 참 잘 차렸다” 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성의를 표시하려면 반드시 고급술을 대접해야 배배 탈렸던 일도 술술 풀리는 신통력을 가지지만 차원이 낮은 술은 결례가 되여 오히려 대사를 그르친다는 인식이 사회 보편성을 이룬다. 그 서슬에 가짜술 때문에 생긴 일화가 폭죽처럼 여기저기서 터져나와 사회 물의를 일으켰다.   어느 량반은 평소 몸속에 배일 정도로 가짜 모태주를 마셨던 까닭에 진짜 모태주를 맛보고 가짜라고 오판해서 항간의 웃음거리가 됐다. 고급은 거룩함을 자랑하여 맹목적인 숭배를 받고 일반은 소박하고 단백해서 의미지가 없어보여 거부한다. 서로 비기며 끓어번지는 소비심리가 인간의 진국을 배척한 탓으로 사특한 기운이 술잔을 추켜든 팔뚝에서 감때사납게 불끈거린다.   과연 공손히 서서 따르는 술잔에도 표리 부동한 그림자가 비껴든다면 괴리에 따른 우롱과 모멸감이 인간의 성실성을 맥없이 무너뜨리지 않겠는가. 술값이 부추켜준 몸값이 화려하게 포장해낸 상품처럼 인기를 누릴 때 값싼 술은 차가운 시선을 피하기 어렵다. 워낙 한토양, 한뿌리에서 태여난 쌀이건만 가격차이란 이슈가 딱지를 붙여 술가마에서 익혀져 뿜기는 냄새부터 은은한 품위를 느끼게 한다. 그런 고가의 술을 여유작작 마실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시선이 가닿는 곳의 차이는 천양지차이다.   혹자는 뛰여넘을 수 없는 장벽에 막혀 곤혹스러운 몸짓을 드러내겠지만 하필 참새가 기어이 황새걸음을 쫓아가야 한다는 리유는 없을 것이다. 그저 인간의 원초적 본새를 감추지 말고 스스로 우러나오는 성심성의를 표현할 줄 알고 또 너와 나의 꿈의 거리를 단축하는 즐거움 속에 인간의 몸값이 약속되여있음을 굳게 믿고 살뿐이다. 길림신문 2017-5-16
19    살림집 구조에 얽힌 인간관계 댓글:  조회:1535  추천:1  2017-05-09
북경에 가면 사합원(四合院)을 볼 수 있다. 3천년 력사를 내려오면서 지어진 사각형 살림집 구조체이다. 건축물의 공간을 해부해보면 본채는 가족에서 급수 제일 높은 할아버지 아니면 아버지가 류숙하고 동쪽 사랑채에는 맏아들, 서쪽 사랑채에는 둘째아들 그리고 딸이면 본채 맨 뒤쪽 건물에 류숙한다. 남쪽 건물은 밖으로 드나들 때 현관처럼 사용하는데 하인이 주거하는 공간이다.   벌집구조처럼 계선이 분명한 실내에서 활동령역은 또한 철저해 누구도 감히 범접 못한다. 오늘 현대사유로 표현하면 가족 내에서도 엄격한 등급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혹시 등급제도를 론하면 이웃나라 인도의 카스트를 운운할지 모르겠지만 옛날 중국도 그에 못지 않게 사람 사이에 엄격한 등급을 일부러 조성하여 정신상 꼼짝 못하게 사족을 꽁꽁 묶어놓았다. 공자에 이어 맹자, 동중서에 이르러 비로소 완벽해진 유교사상과 로자, 장자를 비롯한 로장사상이 옛날 우리 민족 한옥에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하늘에 나래 치듯 건뜩 치솟은 추녀밑을 살펴보면 칸을 단위로 이뤄진 구조체가 벽에 달린 문을 열어제끼면 실내가 구석구석 일목료연하게 안겨온다. 상류층 계급의 주택은 주거공간을 상, 중, 하로 구획했다. 즉 량반이 사용하는 사랑채와 안채와 머슴이 기거하는 행랑채, 청지기가 기거한 중간채는 분명했다. "남녀 칠세 부동석 부동식"은 조선시대의 가법가률이였다. 남녀로소가 구분된 구조내부에서 현시대처럼 활발한 의사소통이란 거의 불가능이였다.   고대 중국인이 조선의 제도와 문물을 탐방하는 의미에서 쓴 《동방기략(東國記略)》의 기록에는 "집이 침실은 모두 온돌이지만 실외는 목판으로 만들고 집이 모두 구석마다 꺾이여 구불구불 이어졌다." 고 밝혀있어 당시 중국과 조선의 가옥에서 비슷한 것 같지만 확연히 다른 문화임을 조명했다. 립식생활로 거취를 행하는 일상과 좌식생활로 거취를 택하는 공간은 자연 다를 수 밖에 없다. 풍속은 일종 민족생활습관으로 비롯된 가치관념이다.   문호개방을 하면서 대륙의 주거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지난 80년대부터 서민주택구조에 객실이란 ‘신조어’가 붙여졌다. 가옥구조의 일대 혁신으로서 차원이 한층 껑충 뛰여오른 셈이다. 구조상 가옥중심 위치에 놓인 객실은 오가는 바깥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하기보다 힘든 일상을 끝내고 가족끼리 모여앉아 텔레비죤프로를 감상하며 흥미롭고 기상천외한 이야기로 소통의 즐거움을 만긱하는 자유의 공간으로 되였다.   그 때문에 실내 인테리어에서 객실이 차지하는 비중이 자못 크다. 천정, 벽체, 바닥재의 풍격을 최대한 살려 예술적인 패러다임을 꿈꾸며 초점의 렌즈를 객실 장식에 맞춘다. 화합과 단결을 최우선하는 시대의 호흡을 맞춰 불필요한 담장을 없애고 레저공간을 설치하여 이웃 사이에 소통의 기회를 만듦으로 하여 근근히 인간이 먹고 잠자는 생물학적 욕구만 충족했던 과거에 종지부를 찍었다.   건축대가 루이스 칸은 집설계를 할 때 인정미를 듬뿍 담아 선과 점을 찍었다 한다. 벽돌 한장, 나무 한토막에도 인간성을 부여하여 무엇이 되고 싶은지 대화를 나누면서 친절을 베푼다. 그 손끝에서 완성된 건물의 미세한 부분일지라도 끈끈한 정이 흘러 분양 받은 세대주마다 그의 오묘하고 합리한 구조 설계에 혀를 내둘러 한때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건축물은 한 민족의 문화결정체이다. 그럼 앞으로 인간 중심의 건축물 구조는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어떤 건축설계사는 가족 내의 교제를 실내에서 실외로 옮기려는 의도로 현재 옷가지를 씻어 말리우는 베란다를 객실의 연장선으로 훨씬 크게 넓히고 화초, 나무가 자라는 생태공간으로 바꿔 식후 가족들은 싱그러운 풀내음을 맡으며 산책도 하고 의자에 빙 둘러앉아 대화하는 장소로 설계했고 또 다른 건축설계사는 건축물을 아예 거대한 버섯모양으로 하늘높이 띄워 한채에 5만명 이상의 인간이 함께 사는 갖가지 봉사시설, 거리가 건축물속에 응집된 살림공간을 설계했다.   평등한 인간관계를 수립하고저 생존의 플래트홈을 허공에 띄우려는 환상적 몸부림인지 몰라도 막힌 벽을 넘어 융합의 손목을 잡으려는 애쓴 노력만은 그래프에 력력하다.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여 울안에 풀 몇포기, 나무 몇그루 옮겨 심는 눈가림식 공법을 떠나 신비하고 조화로운 자연의 음악적 리듬을 실내 구조물에 옮겨 가상의 세계처럼 인간이 사는 공간과 자연의 령역이 혼선을 빚을 것 같은 쾌적한 환경이 너와 나의 가족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줄 것이다.   꿈은 아득히 멀어보이지만 지척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분명히 들린다. 길림신문 2017-5-9
18    등산도 ‘자격’을 갖춰야 댓글:  조회:1531  추천:1  2017-05-02
차운전을 하려면 면허증이 필요하 듯 등산도 역시 ‘자격’을 갖춰야 한다. 등산활동이 대중생활의 일환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휴식일을 맞아 사람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등산길에 오른다. 그속에는 젊은이도 있고 늙은이도 있고 애를 안은 녀성도 있다. 하다면 남달리 갖춰야 할 ‘자격’의 의미는 무엇일가. 머리에 쓰는 모자부터 시작하여 몸에 걸치는 등산복, 마찰력이 좋은 신발, 필수용품을 넣은 배낭 그리고 든든한 지팡이까지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전신무장’으로 흠잡을 곳 없는데다가 10년, 20년의 화려한 등산경력이 눈부셔 베테랑의 자부심을 뽐낼지도 모른다. 필자는 지난해 11월달에 대만의 아리산을 다녀온 적 있다. 모두 백년 이상 자란 아름드리 나무들이 산정상에 병풍처럼 꽉 들어선 기상이 가관이였다. 산줄기 따라 오불꼬불 정교하게 만들어놓은 코스에 취해 힘든 줄 모르고 한창 걸을 때였다. 앞서 걷던 가이드가 문뜩 허리 굽혀 바닥에 버려진 휴지쪼각을 집어드는 것이였다. 좌우를 둘러봐도 쓰레기통이 없으니 휴지통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걸어갔다. 가이드가 인행도에 흘린 휴지쪼각을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의무가 없겠지만 산을 자신의 살림집 뜨락처럼 생각하고 깨끗이 정돈하는 갸륵한 마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필자의 형인 최정무씨도 20년 경력을 가진 진짜 등산애호가이다. 연변의 산봉우리를 죄다 손금안에 넣고 살 만큼 성취감도 있고 전문지식도 있고 하여 연변텔레비죤프로에서 여러번 소개한 적 있다. 언젠가 백리 밖의 등산을 조직했는데 돌아올 때 팀들의 생활쓰레기를 버릴 곳이 마땅치 않아 그냥 집울안까지 들고와서 쓰레기통에 넣었다고 한다. 그 일로 하여 형수님의 ‘꾸지람’을 듣긴 했어도 심정만은 개운하고 거뜬했을 것이다. 자고로 산을 아버지에 비유했다. 너그럽고 듬직하고 말없는 사랑으로 삼라만상을 품어 고요히 잠재우는 신비한 요람에 끌려 사람들이 산을 즐겨 찾는지도 모른다. 금방 퍼부은 소나기에 흠뻑 젖은 바위돌, 나무우듬지, 한포기 풀잎, 움켜쥐면 살갗처럼 부드럽고 싱그러워 혼은 벌써 그 내음에 묻힌 채 끝간데를 모르고 헤맨다. 아마 그 때문이리라. 산자락을 톱는 걸음이 씨엉씨엉 활기차고 정상에서 내리는 마음 또한 흥겨워 코노래 절로 나는 것이. 산의 무게에서 인간 터전의 두께를 재여보며 생의 직분과 사명감을 두고 새롭게 깨달음을 얻는다. 구름과 높이를 다투지 않고 계곡과 깊이를 비기지 않는 무아지경에 인간은 자신의 령혼을 반추해보며 성찰로 자기 완성의 시간을 갖는다. 생의 마감자락마저 산속에 묻히려는 인간의 욕망을 락엽 귀근의 섭리로 묵묵히 감싸안아 지켜주는 흉금을 어찌 인간의 좁은 궁냥으로 가늠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전설속의 영웅들은 생사판가리를 앞둔 긴박한 고비마다 산을 찾아 운명을 의탁하며 빌고 또 빌었다. 리조 창시자 리성계는 나라를 세우기 앞서 계룡산을 축으로 여러 명산들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뜻을 아룄다. 그중 번마다 좋은 감흥을 주는 산이 고마워 성공하면 꼭 산마루에 비단옷을 입히겠노라 약속했다. 드디여 왕위에 오르던 날 산을 찾은 리성계는 후날 세세대대 은혜를 전하고저 어명으로 금산(錦山)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한다. 신세를 지면 어련히 갚는 응과보응의 좋은 례라고 해야겠다. 오늘 현대화 시대에 사는 인간이 산이 베푸는 무궁무진한 혜택을 그저 응당한 것으로 여기고 혹시 망각하고 사는 이들은 없는지 새삼 둘러보게 된다. 산은 깨끗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다가서는 사람에게 좋은 기운을 뿜어주며 건강을 선사한다. 거드름을 피우며 산의 질서를 무시하고 아무데나 휴지, 음식쓰레기를 마구 버리는 몰상식한 인간을 꺼린다. 평소 건강의 리유를 앞세워 혼자만의 세상을 주장하는 아집은 산신령한테 통하지 않는다. 혹한을 이겨낸 터실터실한 나무껍질을 어루쓸어주며 령역표시런 듯 때론 잔등을 갖다대고 비비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 성심을 보여야 한다. 풍상고초를 겪은 자랑찬 리력서를 나무의 년륜속에 숨겨두는 겸손과 대범의 귀감을 상대로 인간은 대화의 만남을 갖고 기쁨을 만긱할 줄 알아야 한다. 흐트러진 삶의 자세를 바로잡고 새로운 용단과 결심을 갖는 지혜로운 릉선에 올라서서 드넓은 세상과 함께 숨쉬며 사는 법을 익히는 노력이 중요하다. 어버이를 우러러 모시듯 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뜨거움이 마음속 깊은곳에서 찐한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할 때 인간이 비로소 등산의 자격을 갖췄다고 말할수 있다. 인자요산(仁者乐山)이라 했거늘 명실공히 산을 닮은 아들로 거듭나려면 이제부터 말씀의 열성자가 되지 말고 행동에 옮기는 실천가가 되자. 길림신문 2017-5-2
17    자랑속에 깃든 설음 댓글:  조회:1623  추천:0  2017-04-27
로인들 한담 속에는 자랑거리가 많다. 조롱박처럼 주렁주렁 엮어내는 자랑 속에서도 유독 자식자랑이 톡톡한 인기를 누린다. 칭찬해주는 사람, 흠모해하는 사람 , 덤덤히 들어만 주는 사람, 각자의 표현은 다르지만 자식자랑이 물너울 타듯 늠실늠실 높아지는 것만 사실이다. 그중 뾰족한 아래턱을 슬슬 어루쓸며 《삼국지》 외우듯이 자식자랑하는 박아바이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여름철에 강뚝 장기팬들 속에 끼여앉아 장기판국에 별로 관심없는 듯 눈을 슴벅이며 애꿎은 담배만 풀썩풀썩 태운다. 후날 알고 보니 일 고생을 많이 했던 탓으로 겉늙어 보여 그렇지 기실 나보다도 세살 이상 밖에 안되였다. 모두 박아바이라 칭하니 나중에 공중장소에서 나도 그렇게 불렀다. " 나는 자식 공부를 시키느라 집까지 팔았수다." 언젠가는 내가 건네는 담배를 받아물며 자식자랑의 서두를 뗐다. 워낙 박아바이내외간은 농촌에서 살았는데 중학교를 갓 붙은 아들애가 어느 써클에서 일등을 한적이 있어 불시로 아들애 앞날이 무척 걱정되여 짐을 챙겨들고 부랴부랴 연길에 올라왔단다.   아내는 장마당에서 산나물을 되넘겨 팔고 남편은 뾰족한 손재간이 없어 닥치는대로 막일을 했다. 근 십년째 헐금씨금 일한 보람이 있어 아들애는 중점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으로 떠나던 날 내외간은 사실기쁨이 절반 근심이 절반이였다. 량주는 밤새도록 이리궁싯 저리궁싯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쓰고 사는 집을 팔아 학비를 대기로 했다. " 인젠 외국에서 일자리 찾은 지두 십년을 넘겼수다." " 그럼 돈 많이 벌었겠네요 " " 후유- 지금 젊은녀석들 왜 장가 들 궁리 안할가? " 나의 물음에 박아바이는 불쑥 아들의 혼인걱정을 내비치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방금전 한껏 부풀러 있던 기분이 반쯤 후줄근해진것 같았다. 하긴 자식혼사에 마음을 썩이지 않는 부모 어디 있으랴. " 해마다 생활비 몇만원씩 보내주웨다... 그리구, 또 집 사라구 엇그제 돈을 부쳐왔는데 집값이 엄청 올라서 에이쿠, 쿨럭쿨럭..." 박아바이는 갑작스런 기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집가격 상승으로 억울함을 당한 사람이 많다. 나는 더 캐묻자니 게면쩍어 얼른 화제를 돌렸다.   며칠후 박아바이 아들 내막을 잘아는 장기팬한데서 소식의 일부를 들을 수 있었다. 박아바이 아들이 입사 첫 고비에 심한 풍파를 겪었다. 찾은 회사마다 불경기 아니면 부도가 나서 몇해 동안 근근득식으로 지냈다. 게다가 한번은 출근길에 오토바이에 치여 무릅뼈를 크게 다쳐 반년 넘어 병원신세를 진적까지 있었다. 하지만 고향에 전화할 때면 부모들이 걱정할가봐 고달픈 심정은 애써 감추고 항상 웃음 띤 밝은 목청으로 문안하고 위로했다. 늙은내외간은 정해진 시간에 걸려오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는 명절같은 분위기에 붕- 떠있군했다.   때론 아들이 보고싶어 사진을 꺼내들고 점도록 지켜보다가 혹시 오늘이라도 집에 금시 들이닥칠 것 같아 이마언저리에 손채양하고 비행장쪽으로 서서히 착륙하는 려객기를 멍하니 바라볼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더우기 남들은 힘들어 고향으로 되돌아온다는 세월에 왜 오지 않을가하는 의구심이 생기다가도 저녁에 아들의 전화만은 받으면 귀가 무른 량주는 남들의 자식보다 자신 아들이 대견스러워 하냥 흐뭇해졌다. 기쁨을 나누면 커진다고 이튿날 박아바이 걸음은 자연히 어슬렁어슬렁 강뚝장기팬들속으로 향하는 것이 관례가 되였다. 외국에 나가야 출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발처럼 돈은 그냥 억수로 쏟아져 내리는 줄로 믿는다. 천대와 기시를 받으며 온갖 곤혹을 이겨온 낮과 밤의 대가로 손에 쥐여진 몇푼의 딸라가 기쁨인지 슬픔인지 가늠키 어렵다. 고향에 돌아오고 싶어도 얼키고설킨 사연 때문에 여기저기서 품팔이하는 애들도 기수부지다. 그렇게 번돈을 자식들 손에서 멋도 모르고 넙죽넙죽 받아쓰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귀향한 젊은이들을 다른 시각으로 보면서 비꼬으는 이들도 있다.   고생은 젊어서 보약이라 했거늘 이제 꼭 성공하여 금의환향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운명을 걸고 십년,이십년 부모와 자식 사이에 애타게 부르며 헤여져 사는 가족이 어찌 박아바이네 한집뿐이랴. 며칠전 나는 어느 병원 문앞에서 우연히 박아바이를 만났다. 돌뿌리에 걸치며 넘어진 것이 허리를 다쳐 안주인의 부축을 받으면서 겨우 운신했다. 왜 병원에서 가만히 누워있지 않느냐 물음에 오늘은 아들이 집으로 전화 오는 날인데 병원에 입원한 줄 알면 애가 걱정한다며 괜찮다는 뜻으로 나한테 억지 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어 보였지만 밀려드는 통증을 참느라 일그러진 이마와 뾰죽한 아래턱에는 땀이 송골송골 돋아있었다.   겯들어 택시에 앉혀 떠나는 뒤모습을 보며 나는 불현듯 가슴이 뭉클 젖어듬을 느꼈다. 통증은 얼마간 약물치료로 완쾌될 수 있겠지만 헤여져 살아가는 리산의 아픔은 언제쯤 치유될가.   후유ㅡ정답은 묘연한데 봄기운이 파아란 저 멀리 산등성이을 타고 철새 한마리 푸르릉 날개짓을 한다. 길림신문 2017-4-27
16    빈곤의 철학 댓글:  조회:1365  추천:0  2017-04-24
빈곤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사람들은 흔히 헐벗고 굶주림을 련상한다. 경제학자는 소득의 최저라인으로 빈곤를 책정하고 통계학자는 가정소비의 엥겔법칙으로 빈곤의 설명한다.   일찍 맑스는 빈곤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살림집이 크든작든 상관 없다. 주변의 집들이 하나같이 작다면 인간은 만족감에 묻혀 산다. 헌데 옆에서 갑자기 호화로운 궁전이 일어선다면 작은 집들은 금시 오두막처럼 가련하고 쓸쓸해보인다...” 가난은 연약과 무능의 그림자다. 오늘날 고급아파트에서 살고 호화형 승용차를 몰고다니는 사람을 빈곤에서 해탈 못했다고 삿대질하면 이상한 일이지 모른다. 어쨌든 얼굴에 기름기 번질번질한데 창백함을 감추지 못하는 당혹스러운 모멘트가 주변에서 자주 발생하는 현실이다.   풍요로운 물질적 부를 이뤄낸 반면 안하무인식 오만이 빚어낸 정신적인 빈곤이 사회 도처에서 화제로 떠오른다. 높은 건물이 기초가 든든해야 하듯 풍부한 물질사회의 창조는 드팀없는 정신도덕적인 받침이 있어야 한다. 한 늪에서 자란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을 못해 뿔뿔이 흩어지는 랭혹성이 우리 사는 세상에서 많이 연출된다. ‘나만 잘 살면 된다’를 생의 철학으로 삼고 승마장에서 뛰는 말처럼 재주와 능력을 비긴다. 현면한 승자는 월계관을 지지와 성원을 보낸 관중석에 돌리지만 아둔한 자는 승리의 과실을 제 품에 넣고 혼자 성취감에 취해 산다.   가령 “당신은 누구 때문에 성공했습니까”를 물으면 태반은 엄지손을 제 앞가슴에 갖다 댄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인줄 알면서 말이다. 현재 너나없이 당신의 도움이 꼭 필요한 적재적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발생하는 모든 일에는 본체만체 인지능력을 상실한 듯 무시와 배척을 일삼는다면 아무리 기름진 호강을 누리는 사회라고 해도 정신적 기반이 흔들려 또다른 불신과 의혹의 진통을 겪는다.   이렇듯 도덕적 빈곤은 인정미 없는 차디찬 얼음속 같은 인간존중이 차별화되는 불공평을 낳는다. 일전 연길시 번화거리 인행도에서 행인이 미끌어 넘어졌다. 같은 시각 대통로에서는 온갖 차량들이 물처럼 흘렀고 한가히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누구 하나 관심을 쏟는 이가 없었다. 넘어진 행인이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거들떠보지 않는다... 메마른 인심이랄가 아빠트 생활 10년 넘었어도 옆집 사람 면목을 모르고 산다.   공중장소의 불량행위는 보아도 못본체 자기 울타리 안의 리익만 챙길줄 알고 혼자 멋지게 땡소리 나게 잘살려는 욕심만 팽창할 뿐 사회의무, 책임감 같은 것은 안중에 없은지 오래다. 그러나 생활의 의미를 전부 물질적 부에 의탁하는 사람보다 별로 크게 가진 것 없어도 언젠가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한테 따듯한 손을 내밀줄 아는 이가 성숙된 부자스타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전에 고아로 자란 부부가 어버이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유족한 살림도 아니면서 반신불수가 된 한 로인을 아버지로 모시려 했던 사연이 인터넷뉴스로 뜨면서 큰 화제가 되였다.   어찌 보면 인간은 끈끈한 정감에 울고웃으며 살 때가 많은가 본다. 정 때문에 실날 같은 희망에 혼신을 받쳐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에게 준 정만 생각하고 자신이 받은 정은 말끔히 잊은 사람도 있고 정 나눔을 아예 거절하는 린색한 사람도 가끔 있다. 모든 일에 자기중심을 첫자리에 놓고 꼬물만큼 양보와 타협을 모르는 극단의 리기심은 백해무익의 과녁이 된지 오래다. 문뜩 모택동의 〈뻬쥰을 기념하여〉에서 나오는 구절이 떠오른다. “헌신적으로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은 고상한 사람이며 순수한 사람이며 도덕 있는 사람이며 저급취미에서 벗어난 사람이며 인민에게 유익한 사람이다.”   간소하게 살지라도 정신적인 부를 축적할 줄 아는 인간에 대한 값높은 평가이다. 고매한 삶은 솔선수범에서 시작된다. 금전만능의 소용돌이에 빠져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한낱 돈으로밖에 재일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필경 돈의 노예로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로 숨막히게 살 것이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생존자체가 먼저 자신을 위하는 데 있다. 하지만 사는 동안 자신의 삶의 가치를 한층 빛내는 이미지의 주인공이 되려면 사회에 대한 헌신적 로동과 의무감을 지닌 도덕적인 희생정신이 있어야 한다.   물질과 도덕의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을 허물어 조화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구축하는데 자신의 땀방울을 아낌없이 쏟아가는 사람의 생활궤도에 보람찬 삶의 순리가 슴배여있다. 상식을 떠나 한사코 가련한 유아독존 방식으로 세상사를 해석하려 들 때 인생철학은 빈곤이 몰아오는 허탈감에 빠져 슬피 운다. 길림신문 2017-4-21
15    “하루만 실컷 놀고 싶어요” 댓글:  조회:1369  추천:2  2017-04-10
상쾌한 봄날 아침이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고 투명하다. 겨우내 움츠렸던 추위에서 깨여나 삼라만상이 기지개 켠다. 이 좋은 날에는 모아산 등산이 최고다. 마침 일요일여서 내가 산기슭에 도착했을 때는 숱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나무 우듬지는 아직 쌀쌀한 바람에 앙상한대로 있었지만 양지쪽 가지에서는 도틀도틀한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서로 웃고 떠들며 오르는 등산코스에서 문뜩 둬발치 앞서 걷는 책가방을 짊어진 남학생 둘이 유표하게 눈에 띄였다. 보매 중학생같은데 절친한 사이인듯 하냥 즐겁게 동영상을 찍으며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자연의 신비로움에 흠뻑 취해있었다. 책가방을 멘 학생을 등산길에서 처음 만난것이 너무 신기하고 또 흥미로워 나는 애들 뒤를 바짝 다가서며 오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렸다.   “야, 모아산이 멋있지!”   “그럼, 나도 처음 와본다.”   “오늘 하루만 여기서 실컷 놀고 싶다야!”   “그러면 얼마나 좋겠니!”   공부에 묶이운 애들이 얼마나 놀고 싶으면 저러랴 싶은 생각이 피끗 들어 코마루가 시큰해났다. 두 애들의 얼굴색이 오래 동안 교실에 갖혀 해볓을 못본 탓에 피기없이 해쓱해 보였다.사실 요즘 세상 학생애들이 힘들게 보낸다. 어린 체구에 비해 육중한 가방을 메고 이른 아침 맨 먼저 길바닥에 나선다. 학교에 도착해서는 책속에 꽁꽁 묶여있다가 하학해서는 련이어 수학복습반이요, 영어지도반이요 빙빙 돌다 해질녘에 귀가해서는 또다시 숙제공부를 해야 한다.   애들태반 잠이 부족해 아침밥상에 마주앉아 끄덕끄덕 졸 때가 많다. 그런 애들을 오늘 등산길에서 만났으니 그저 막내아들같이 기특해 보였다. 어느덧 모아산정상에 올랐다. 넓은 해란벌이 시원하게 시야에 안겨온다. 굽어보니 푸른 소나무숲이 금시 물결쳐와 처절썩 발굽을 적실것만 같아 무등 신났다. “야호 , 야호!” 먼저 오른 두 학생애는 좋아라 손오가리하고 목청껏 외쳤다. 산새 한마리 푸르릉 날개짓을 하며 멀리 옮겨 앉는다. 아무렴 경관이 삐여진 모아산에서 감흥에 들떠 오늘 하루만 실컷 놀려무나.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곁에서 이윽토록 그애들만 지켜보았다. 그애들도 그러는 나를 의식했는지 먼저 다가와 수줍게 웃어보이며 핸드폰을 내밀며 사진촬영에 도움을 청했다. 나는 흔쾌히 응하여 여러가지 포즈를 취하는 그들에게 연신 샤타를 눌렀다. 어느새 우리는 서로 말을 건네며 친해졌다. 들썩이는 애들의 정서에 빨려들어 나도 한결 젊어지는 기분이였다. 한창 즐거움에 도취될무렵 문뜩 한 남학생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급기야 통화를 끝낸 남학생의 얼굴이 일그려졌다. 무슨 일이가, 불안한 예감이 스쳤지만 물을 수도 없어 부랴부랴 산아래로 줄달음치는 애들의 뒤를 따라 곧장 걸었다.   산자락에 내려오니 검은색 자가용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엄청 드살세게 생긴 실팍한 중년녀성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소리 질렀다. “너희들 정신 있느냐, 복습반은 뺑소니치고 산에 와서 놀음질에 탐하다니...” 녀인의 대성질호에 애들은 꼼짝달싹 못한 채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히고 차에 하나 둘 짐짝처럼 쳐박혔다. 오, 워낙 이런 일이였군. 내가 반응에서 깨여나기도 전에 쾅ㅡ차문이 닫기는 소리와 함께 차는 녀인의 화김을 담은대로 떠나갔다.   집에 돌아온 나는 어쩐지 밤중까지 잠이 오지 않아 궁싯궁신거렸다. “하루만 실컷 놀고 싶어요.” 모아산에서 만났던 애들의 목소리가 그냥 귀전에서 떠나가질 않는다. ‘후유ㅡ 실컷 놀 날이 있어야겠는데...’ 말은 하면서도 웬지 나도 몰래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길림신문 2017-4-10
14    망자성룡에 비낀 그늘 댓글:  조회:1335  추천:2  2017-04-06
망자성룡(望子成龙)은 고대 사자성어라지만 근년에 학부모들사이에 신조어 못지 않게 줄곧 인기가 높다. 자식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천하부모들의 마음이 비등점을 이룬듯 부글부글 끓어번지는 양상이다. 내 자식은 남보다 반드시 우수해야 한다는 승벽심이 극도록 작동하여 “공부는 꼭 일등해야 한다, 반장이 돼야 한다.”를 자식의 분투목표로 내세우고 부모가 설계한 코스를 한치의 드팀도 없이 완성할 것을 강요한다. 돈냄새 풍기는 집안은 자식이 명문대에 붙어야 체면이 서고 가냘픈 집안은 부모가 과거 공부를 못했던 몫까지 합쳐 세인이 화뜰 놀랄만큼한 기적을 두손모아 빌고 또 빈다. 정황이 이쯤되면 돈이 아까울리가 없다. 과외 무슨 학습반이라면 빼놓지 않고 참가시키고 자식이 싫어하든말든 소위 지력개발에 좋다는 악기는 무턱대고 사놓고 강의선생을 요청하는가하면 교실에서도 맨 앞줄에 앉히려고 반주임한테 치성을 올리며 분주히 뛰여다닌다. 학생이 어떤 자리를 차지했느냐에 따라 학부모들의 그림자가 언뜰거린다. 지나친 관심과 배려가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일으켜 어떤 애들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극단을 선택한 사례가 연길시에서 이미 여러번 발생했다. 부모의 무모한 간섭이 빚어낸 후회막급의 결과이다. 성적이 높고낮음은 기억력의 수치에 불과하다. 에디슨은 소학교 시절 학과마다 락제점수를 맞아 단임교원으로부터 저능아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깜짝 놀래우는 발명대왕이 될줄을 누가 알았으랴. 남보다 독특한 개성을 키우는데 힘을 넣어 가정과 학교에서 맞춤형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학생은 이미지부터 틀린다. 부모의 일방적인 생각을 취사선택할 여지없이 자식의 개성에 무조건 접목시키려는 행위는 몰상식이 가까운 난센스다. 부모는 자식의 몸을 낳아줬지만 뜻을 낳지 못한다. 생각의 출발점이 한 플랫폼에 놓여있지 않는까닭에 부모와 자식사이에 경상적인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큰 인물로 성장시킨다고 생각하기보다 미세한 목표일지라도 장래에 착실히 사는 법, 사회에 쓸모있는 인간이 되는 법을 차근차근 가르켜주는 것이 우선이다. 항상 완벽한 사과알을 추궁하기 앞서 한입 베어먹은 사과가 더 흥미로워지는 생활의 지혜를 미리 일깨워줌이 명지하다. 현명한 부모는 성장기 자식에게 학교생활외 일부러 혼자 흔상하고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을 알선해준다. 서책에서 부딪힌 난제들이 자유의 공간에서 예상밖의 해답을 찾을 때가 많은 연고로 명인들은 어릴적부터 자기만의 생활흥취에 묻혀살았다. 세계적인 건축설계 거장 프랑크 게리는 어려서부터 가족의 영향을 받아 물고기에 관심이 많았다. 하학해서는 물녘에 나가 돌면서 갖가지 물고기 살피기를 즐겼다. 후날 비늘, 지느러미, 살아 움직인 듯한 물고기형태가 그의 건축매스를 통하여 생동하게 드러났다. 세계 건축무대를 히트친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 자연의 숨결이 그대로 맥박치는 듯한 느낌을 주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상식을 뛰여넘은 재질은 오로지 커다란 우주의 자궁속에서만이 잉태가 가능하다. 지구촌 어데가나 교실창문은 하나같이 큼직하다. 인간이 소유한 한계를 바깥 세상과의 소통에 의해 보완하기 위해서이다. “무엇이든 하면 된다”를 생활철학으로 삼고 맹목성을 띤 실행을 앞세우다가 소기목적에 도달못하면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 자식만을 원망하는 부모들도 적잖다. 자식농사 어찌 부모의 단순한 념원 하나에서 비롯될가. 씨앗에 따라 토양 선택이 다르고 가뭄과 장마를 대처하는 세심한 마음이 하늘에 찐한 감동을 주었을 때만이 어거리대풍이 찾아드는 리치와 같이 배움의 적재적소에 자식이 꼭 맞게 들어앉혀야 희망이 비로서 큰 꽃망울을 이뤄낸다. 새가 멀리 날으려면 깃을 다듬어야하듯 자식에게도 배움의 령역을 넓히는 컨디션의 조절이 실력을 다지는 충전과정이다. 꽁꽁 묶인 탕개를 느슨히 풀어 자연속에서 딩굴며 물음표를 련발하는 호기심이 메마른 글줄을 외우고 정해진 공식을 되풀이하는 얕은 재간을 초월한 무궁무진한 발전공간이 약속되여있다. 명문대 졸업장을 믿고 으시대던 시기는 영영 지나갔다. 다양한 사회활동과 관찰력을 통해 기발한 상상력과 창조형으로 불패의 경쟁력을 스스로 갖추게끔 자식을 떠밀어주는것이 오늘날 부모들의 직책이다. 부역에 시달리는 천리마가 가긍하여 입던 저고리를 잔등에 덮어주던 백락의 아량을 읽으며 문뜩 맹모가 맹자의 앞날이 걱정되여 세번 이사하던 현명함이 담긴 스토리가 떠오른다. 한석봉이 멋진 필체와 함께 모친의 떡 써는 칼도마소리가 귀에 쟁쟁히 들리는듯 민족의 전설속에 탱탱 쇠소리나게 여물어진 자식농사 비결이 이미 슴배여있었음을 실감으로 느낀다. 길림신문 2017-4-6
13    변할줄 알아야 살아남는다 댓글:  조회:1354  추천:0  2017-03-31
연길시내 변두리에 자리잡은 어느 한 음식점은 워낙 주인이 다년간 외국나들이로 벌어들인 백만원을 투입하여 세운 불고기전문집이였다. 경영면적이 그리 크지 않아도 깔끔하게 꾸려져 초창기에 괜찮은 수익을 올렸는데 웬일인지 손님 래원이 점점 줄어들면서 나중에 파리 날릴정도로 아예 딱 끊겼다. 무슨 영문일가? 주인은 고민끝에 시장조사를 했다. 결과 가게 근처에 평소 류동인구가 적고 아빠트단지에 운집한 인구 태반이 외지 품팔이 일군임을 감안해 주인은 대담하게 두부방설비를 사들여 초두부집으로 탈바꿈을 했다. 설마하고 개업한 장사가 첫 마수거리부터 뜻밖으로 잘되여 매일 빈자리 날틈이 없이 손님들로 붐볐다. 그만큼 매상도 부쩍 올라 3년도 안되는 사이에 투자전액을 거의 회수한 상태다. 실에서 득을 만들어낸 림기응변에 능한 좋은 사례다. 만약 결손위기에서 늑장대응하거나 중도포기했더라면 영리로 흐뭇해진 오늘날이 있었을가. 지금 연길시에는 크고작은 음식점이 1000여집이 있다. 해마다 10%를 차지하는 가게가 영업부진으로 끙끙 속앓이를 한다. 어떤 음식점들은 한해사이에도 주인을 여러번 바꿔도 좀처럼‘회춘’의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이를 두고 가게주인들은 불경기를 일종 음식업계 과잉존재에 귀결시킨다. 한계효용의 법칙을 빌미로 경쟁력부족점을 구차하게 해명하려는 억지를 부린다. 경쟁자가 많을 수록 더잘 리드해 나아가는 사업가를 상대로 배우며 연구하여 남다른 도약의 변화의식을 타진할 대신 아직도 앉은 자리에서 요행과 기회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신세타령을 하는가하면 외국이나 대도시에 진출하면 떼돈을 벌것같아 흥분해한다. 몸은 현시대에 와있으면서 사유패턴은 예날에 묻혀있으니 갓 쓰고 자가용 모는 형국이다. 병약자가 움직이기를 싫어하듯 변화를 부정적 시각으로 보면서 극력 외면하려 사람들이 허다하다. 변화의식이 없는 사회에서는 빈곤이 활개치며 주인노릇을 한다. 보통 변화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두가지 부류로 나뉘여진다. 견식이 넓고 신생사물에 민감하며 문제해결의 욕구가 강력한 사람이 사회 진두에 서서 변화를 이끄는 주인공이 된다. 한낱 경험에 의존하여 발전추이를 헤아릴줄 모르고 한사코 자신의 우격과 아집을 내세우기를 일삼는 사람은 격변시대에 너무 일찍 레드카드를 받는 불영예를 가진다. 평소 배움에 게을리하고 무엇이든 자기중심을 첫자리에 놓는 사람이 후자에 많이 속한다. 변화의 맥박수가 잦은 기업의 수명은 길고 변화의 숨소리가 느린 기업의 수명은 짧다. 연길풍무유한회사 사장이 걸어온 26년의 력사가 시대의 변화에 민첩히 반응하면서 꾸준한 노력을 경주하였던 까닭에 대기업의 스타 ‘연변 10대 걸출한 청년’의 월계관을 썼다. 변화속에서 자신의 설자리를 굳히고 창업아이템에 모지름을 쓰는 사람앞에는 고진감래라, 황금수레 왈랑절랑 영각소리 구성지게 울려 어깨가 으쓱해진다. 변화는 자연의 섭리이며 사회의 속성이다. 한층한층 높아지는 변화의 흐름은 꿈틀거리는 생명체와 같은 귀중한 존재이다. 어느 명인은 제일 고명한 처세술은 타협이 아니라 적응이라고 했다. 적응은 변화를 뜻하며 량적인 움직임이 허들을 뛰여넘는 질적인 도약을 이뤄내는 과정이다. 공룡은 기후변화를 못이겨 화석으로 남았고 반대로 카멜레온은 하루 일곱번 변화를 일으키는 장끼로 살아남았다. 류인원이 현대인으로 발전해온 비결은 반짝이는 변화로 이어진 창조성로동이 있어 가능했다. 변화는 탁상공론이 아닌 탄탄대로에서 커브를 꺾어 험한 길을 택하는 스타일에서 비롯된다. 겉치레 변화보다 마음의 변화, 생각의 변화를 이뤄야 사회가 전면적으로 발전한다. 길림신문 2017-3-30
12    바래지는 석양빛 댓글:  조회:1476  추천:1  2017-03-22
인생의 황혼을 석양빛에 비유한다. 빨갛게 물든 구름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눈부신 해살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노래도 많고 춤도 많아 생의 쾌락이 정점에 이른듯 싶다. 얼마전 동창생파티가 열렸다. 서로 반가와서 얼싸안고 덕담을 나누면서 술 둬잔 돌아가니 흥이 도도해졌다. 한창 파티가 무르익어갈쯤에 마주앉은 녀성동창생의 핸드폰소리가 크게 울렸다. 통화를 끝낸 녀성동창생의 얼굴색이 갑자기 흐려져 모두 의아해서 물었다. 연해도시에서 사는 딸이 애를 보살필 사람이 없어 급히 와서 봐달라는 내용이였다. 그 말에 웬지 동창생들 저마다 남의 일만 아니라는듯 막무가내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너도나도 당직을 서듯 몇번씩 겪어야 하는 곤혹을 인식해 부글부글 끓던 술판이 문뜩 찬물을 끼얹은듯 푹 깔앉았다. 현재 연변의 젊은이들은 대학교를 졸업하면 대다수가 큰도시 아니면 외국으로 나간다. 가난을 털어버리려는 욕심이 부풀어 타고장에서 가정을 꾸리고 애까지 낳는다. 신접살이 맞벌어 살기 힘든 세월에 애는 누가 보살펴야 하는가. 자연 부모들의 몫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키워줘야 한다. 부모를 부르는 초청장도 자녀가 둘,셋이 되는 집에서는 흔히 한꺼번에 겹쳐서 갈팡질팡할 때가 많다. 몇년째 바깥에서 이집저집 돌며 "품팔이"하는 동안 제 집일은 파밭이 되여 엉망진창이다. 부모들은 갓난애를 손자손녀라 이름 지어 강보에 싸안아보면 유별나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법이다. 나날이 커가는 영아의 밝은 모습과 재롱질에 홀딱 반하다싶이 밤낮이 따로없이 정성드려 보살피는 사이에 자신의 어깨는 어느새 휘우듬해졌고 이마에 패인 주름과 하얀 서리발이 지친 로고의 흔적으로 남는다. 물론 자식들은 태반 부모의 은혜가 고맙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해서 일부러 비싼 옷도 사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시키면서 못내 신경을 쓴다. 어린 애를 놓고 사돈집을 포함해 세가족이 팽이처럼 돌아간다. 때론 사돈끼리 눈치가 보여 서로 짐을 챙겨들고 먼저 떠나느라 부산을 피워 해프닝을 만들 때도 있다. 애를 키우는 일이 고역이다. 깊은 밤에 졸려도 부모는 자식에게 잠을 양보하고 뜬눈으로 애를 보살펴야 하고 걸음마 떼서부터는 애와 같이 갖가지 손짓몸짓해가며 놀아줘야 하고 때론 몸에 열기가 오르면 먼저 둘쳐업고 병원쪽으로 줄달음쳐야 한다. 오죽하면 살까기하려거든 애뒤바라지하라는 말까지 나왔을가. 힘들어도 항상 자식들앞에서 참고 웃어야 되니깐 자신 몰래 성격마저 변해서 의문스러워질 때가 많지만 무럭무럭 커가는 애들의 밝은 모습을 보면 지지리 고달펐던 기억이 깡그리 잊혀져 기분이 사뭇 거뜬해진다. 인생의 륙십을 청춘이라 했다. 성취감이 주렁진 고개마루에 올라 걸어온 자욱을 뒤돌아보며 이마에 흥건히 돋힌 땀방울을 쓰윽 문지르는 여유를 갖는 시절이다. 친구끼리 어울려 즐겁게 운동도 하고 가끔 들놀이도 펼치고 려행도 떠나고 다채로운 사회활동에 참가하여 그동안 방치되고 망각된 삶의 한 공간을 칠색도안으로 단청하여 아직 젊음을 넉넉히 가지고 있음을 세상에 자랑하는 계절이다. 평생 자식뒤바라지에 눈코뜰새 없이 살아오고도 부족하여 자신은 헐망한 집에서 살면서 자식에게 좋은 집을 마련해주려고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무등 애를 쓰는 부모들의 처지가 그저 불쌍하고 안타까울뿐이다. 일전 전국정협회의에서 몇몇 대표가 육아문제를 민생개선의 이슈로 부각시켜 제출한적 있다. 조만간 육아조건이 많이 바뀌여서 편한 세상이 되겠지만 가정을 말할진대 제가 낳은 자식은 제가 키워야 가정의 완벽한 질서가 잡힌다. 애의 성장도 친부모의 슬하에서 더 건실하고 총명해진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상식인데도 요즘의 부모들은 자식의 애한테 지나친 관심을 갖고 접근한다. 마치 소홀히 대하면 자식들한테 죄를 짓는 것처럼 힘에 부쳐도 애오라지 도맡아 키워야 시름을 놓는다. 대대로 내려온 전통적인 관념을 고치려면 당분간 힘들 것 같다. 세월이 흘러 대가 바뀌여도 아마 자식들에게 쏟는 부모의 일괄식 사랑이 먼 후날에도 끈끈한 뉴대로 이어질듯 싶다. 서산마루에 걸린 저녁노을이 오늘따라 물기를 머금고 누렇게 색바래져있다. 바람에 부대끼고 땡볕에 그을러 퇴색한들 어떠하리. 오늘도 행복의 웃음소리 흘러나오는 어느 아빠트창가를 쳐다보노라니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서글픈 석양빛이 부딪히는 술잔에 비껴 유난히 감동적이다. 오랜 쓴맛이 우려낸 찐한 향기가 황혼의 멜로디가 되여 마음마음을 뜨겁게 휘젓는다. 길림신문 2017-3-20
11    십원의 에너지 댓글:  조회:1214  추천:2  2017-03-07
돈 십원은 그저 택시 한번 리용할 료금이다. 어른 아닌 애들도 요즘은 십원짜리 지페에 관심 없는듯 아무렇게 내동이친다. 밥 한그릇마저 변변히 살수 없는 “미량원소”라 홀대하지만 작은 물방울이 해빛을 반사하듯 우리에게 반짝이는 뭔가를 깜짝 선사할 때가 있다. 일전 필자는 어느 부페집으로 간적 있다. 정갈한 분위기가 자못 상쾌했다. 일매지게 차려놓은 갖가지 반찬그릇을 둘러보다 문뜩 자그마한 게시판에 눈길이 멎었다. (랑비 없는 손님에게 십원을 할인해드림) 식사수금표준이 매인당 68원을 감안하면 적잖은축이다. 리윤의 일부를 떼내여 랑비를 막으려는 좋은 착상을 제시한 경영자의 아이디어가 신비하고 흥미로워졌다. 손님이 음식을 주문하면 그대로 만들어 올리는것이 음식업계의 관례이다. 많이 주문하면 그만큼 음식업체는 수익이 올라 쾌재를 부르기 일수다. 한쪽은 체면을 우선시하고 다른 한쪽은 엉큼한 리속을 챙기는편이여서 파티장소마다 항상 음식랑비 현상이 장마철 보물 터지듯 사회에 범람하여 물의를 일으킨다. 기실 우리 주변의 랑비현상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절약정신을 격려하는 캠페인이 수십년을 이어져도 랑비현상은 갈수록 심해지는 양상이다. 근간 사회에서 서로간 만나는 모임이 잦다. 왕왕 첫 스타트는 간단히 진행되지만 술이 둬순배 돌면 이것저것 자꾸 주문해서 먹지 못할 음식그릇이 무드기 쌓여진다. 며칠전 어느 잔치집에서는 축하공연이 길어져 손님들 태반 뿔뿔이 흩어졌는데 채그릇은 텅빈 상에 무턱대고 올라 두겹세겹으로 쌓여졌다. 어떤이들은 버려지는 음식이 아까워서 비닐주머니에 챙겨가지만 대다수는 무감각에 젖어있다. 결국 돈을 퍼주고 구정물 사는 실정이다. 규모가 좀 크다한 식당 하나가 웬간한 양돈장을 먹여 살린다. 그러고 보면 길바닥에서 돼지죽물을 나르는 차량이 분주히 달리는 리유를 알수 있을것 같다. 중국은 인구가 많아 대도시에서는 식당이 호황을 누린다. 하루의 음식 소모량이 어마어마하다. 그에 따라 랑비현상도 엄중하다. 국가통계국자료에 의하면 성급이상 도시에서 일년에 랑비된 음식물이 2000만톤 이상인데 3000만 인구가 일년에 먹을수 있는 식량과 맞먹는다고 한다. 13억 인구중 아직 수천만명이 배고픔을 달래고있는 실정을 감안하면 통탄할 일이다. 우리 주변 사람들은 체신을 중히 여겨 남들앞에서 항상 통이 크고 씀씀이가 초탈함을 흔상한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야박하고 옹졸하면 곁사람들의 눈총이 따가와서 얼굴을 쳐들고 다닐수 없다. 결국 사회교제가 비운을 맞아 성사될 일도 물거품으로 끝나고마는 경우가 많다. 억울해도 속수무책이여서 먹자판에서만 악성순환이 계속 이어진다. 절약은 일종 미덕이다. 농민의 로동성과와 인격을 배려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땅의 자원은 제한되여 쓰는만큼 즐어드는 반면 인구는 급증하여 생존위기가 문턱에 이르렀다. 해법은 농업기술의 도약과 발전외에 절약정신밖에 없다. 어찌보면 절약은 곧 증산이다. 하루 돈 십원을 절약하는 행동이 돈 십원을 창조하는 기술력과 맞먹는다. 가령 돈의 무게를 떠나 13억 인구가 매일 머리속에 단 십원을 절약한다는 이미지만 떠올려도 소비시장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생산할것이다. 랑비는 수치이고 죄악이다. 옛날 아르키메테스가 지레대로 지구를 움직이겠다던 야심찬 발상을 활용하여 오늘부터 십원짜리 지페로 오랜 세월속에서 소소리 높아진 랑비의 그림자를 저 멀리 세상밖으로 훌쩍 떠밀어버리면 어떨가 생각해본다. 길림신문 20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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