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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직원들에게 미안한 일들을 회억하며 댓글:  조회:1065  추천:0  2015-12-26
1999년 2월부터 2001년 2월까지 2년동안 길림신문사 사장 겸 주필 담당시 잘한일들은 기억에 아리숭한데 책임을 다 못하여 직원들에게 미안한 일들을 저지른것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99년 3월 장춘 우리 신문사에 도착한 나는 크게 놀랐다. 성재정에서 500만원을 투자하여 세운 사무청사는 주체만 달랑 일떠세운채 장식에 손도 못대고 추위에 떨고있었다. 성도라하여 옮겨온 박문희부주필 등 여러 직원들의 주택들은 난방도 보장받지 못하고 꽁꽁언채로 겨울을 보내고있었다. 세맡은 사무실은 어느 파산된 기관단체같이 썰렁하였다. 신문사 재정은 적자운영으로 몇달동안 인쇄비도 갚지 못하고 직원들의 로임도 제기한에 발급하지 못하고있었다. 내가 간 두달후에는 지방법원에서 1임사장시기의 외채 10만원을 강제집행하여 몰수해갔다. 1년에 근 1억원을 다스리던 단위의 법인이던 내가 1전한푼 없는 가난뱅이 단위로 온것이다. 재정평형을 위하여 나는 우선 연변직원들을 사회보험에 가입시켜 1년에 10만원 이상의 혜택을 받았다. 또 유관인사들을 통해 성재정과 관계를 달아 사무청사의 장식비용도 일정하게 해결받았다. 사회각계의 지원으로 신문사 성립 15주년에는 나의명으로 기업의 지원 6만원을 받고 본때스레 15주년을 경축한 동시에 그해 7월 28일에 새 사무청사에 입주하였다. 그해 년말에는 재정위기에서 기본상 벗어났다. 2000년도에는 신문사 제3산업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단위의 수입을 증가하고 직원들의 주택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우선 당조에서 충분히 토론하고 중층간부이상 행정회의에서 여러번 토의하여 한국 친구들의 협조를 받아 한국의 모형제조회사와 식용균생산농장과 합자기업을 세우기로 하였다. 제3산업 주관인 박문희부주필과 함께 한국에 가서 유관부문과 담판하여 모형제조회사에 로무일군 10명을 파견하고 식용균농장에 5명을 파견하기로 협의를 보았다. 파견일군들에게서 톡톡한 수입이 들어온다. 식용균전문가를 청하여 한국에 보냈다. 이외 직원들의 자원 집금으로 19만원 5천원을 주고 연길에 4000여평방기지에 2400평방되는 건물도 사놓았다. 여기에 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기회를 보아서 주택을 지을 예정이였다. 그후 성에 우리 신문을 귀속시키면서 조선족신문사에 력사상 처음으로 문화혁명때와 비슷한 “타민족관제”가 실시되였다. 그 지도자 분들은 불문곡식하고 알심들여 조직한 제3산업을 거둬장지였다. 로무일군들에게서 거둔 비용 12만 5천원 중 비자 비용으로 3만원 버섯균종을 한국에 수출하는데 식용표전문가와 두 주필의 한국행, 한국분들의 비용 등에 5만원이 지출되였다. 단위 직원들 로임지출에 2만원을 돌려썼다. 아직 2만여원이 남아있었다. 원래 생활이 곤난한 로무일군들은 출국못하게 되자 돈을 돌려달라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지도자분들은 나의 여러차례의 유관사업인계 요구를 무시한채 나 개인에게 억지로 죄를 덮어씌우며 그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나는 나의 개인 돈 근 4만원을 털어 일부분 환불해주었다. 공장기지도 기어코 처리하겠다고 하여 내가 나서서 원값에 팔아주었다. 그 건물을 산 사람은 1년반후 75만원에 되넘겨 팔아 순수입 50만원이상 벌었다. 이돈은 우리 집금인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만… 2000년도 말에는 직원들의 주택개혁을 시작하였다. 장춘의 일부 로간부들은 연길에 집을 마련해주기도 하고 돌려보내고 집없는 장춘 골간 청년들에게 집을 주었다. 이미 단위의 집을 차지하고있는 직원들은 유관 정책에 따라 집을 값을 쳐서 개인소유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면 두곳의 집값은 60만원 좌우 거두어 들일수 있었다. 거기에 일정하게 집금하면 2001년에는 길림신문사 주택을 얼마든지 일떠 세울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도 “타민족관제” 지도자들로 부터 묵인되여 버렸다. 그때 집없이 연길로 간 분들과 도처에서 돈을 주어서 집값을 낸 분들한테 항상 죄송스럽다. 2000년도 말, 이미 퇴직한 분들과 최혜순, 량고범 등 단위의 훌륭한 고문들은 다음해에는 방법을 대여 우리신문사를 성에  귀속시킬것을 제의하였다. 합리한 건의였다. 행정령도는 연변자치주에서 재정지출은 성에서 이는 성신문사로서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았다. 12월말 림열지(조선족과 관계가 상당히 좋은 해방시초 동북국서기 림풍의 아들)가 선전부문을 주관하는 성위 부서기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은 기회였다. 일주일 동안 성위 반공청에 드나들다 끝내 림서기를 만났다. 아주 통쾌한 분이였다. 그는 조동해온지 15일도 안되는데 꼭 이 문제를 길림성에 조동에 온후의 첫 사업으로 락착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나를 데리고 직접 길림신문집단에 찾아가서 유관인원들을 만나 구체방안을 토의하였다. 그때 나는 성급신문으로서의 우리 신문은 아직 현퇀급이니 이것도 불합리하다고 하였다. 길림신문집단의 10대신문은 모두 청급단위인데 우리도 응당 그에 따라야하지 않겠는가? 림서기는 확실히 격에 맞지 않으니 성에 귀속시키면서 해결하자고 하였다. 길림신문집단에서 우리 신문을 입수할 책임을 진 분은 말끝마다 인원을 감소하고 연질거점에 몇명만 주재기자형식으로 남기자 하였다. 나는 갖은 리유를 대면서 그렇게 하면 민족정책에도 맞지 않고 우리 신문사에도 유리한것 없다 강력히 주장하였다. 내가 개혁의 제일 큰 장애물이 된것이다. 아니나다를가 성위당위 판공회의에서 개혁의 제1조목으로 차룡수 사장부터 따돌린다하였다. 그후 사업교대도 없고 면직령도 없이 말할기회도 안주고 9개월간 취업대기를 하였다. 얼마후 과연 연길의 20명간부들은 (8명 퇴직간부포함) 주요골간 최혜순 한창 발전중에 나어린 골간였던 최승호, 김청수를 포함하여 몽땅 밀어냈다. 그후 나는 이 20명 직원들을 볼때마다 죄책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일부분 사람들은 내탓에 쫓겨난 신세가 됐다고 나를 욕지거리하였다. “같은신세이면서도”… 그후 또 15년이 지나갔다. 우리 신문사는 아직도 현퇀급이라니 이게 무슨 민족정책인지 모르겠다. 내가 주관할 때 신문사업에도 여러분들의 덕분에 많은 진전을 가져왔다. 우선 발행량이 력사기록을 훨씬 돌파하였다. 광고사업도 크게 발전하였다. 또 한정일 주임의 노력으로 대외 활동이 대단히 활발해졌다. “인터불”컵 조선족 해외수기 공모, 조선족학생 미술콩클…등 큼직큼직한 활동들이 외국인들의 지원으로 빈번히 전개되여 우리 신문의 지명도는 대단히 올라갔다. 길림신문 서울지국(유일한 한국동포신문지국)장 류재복의 노력으로 나와 박문희 부주필은 청와대를 방문하였다. 김대중대통령이 접견하기로 하였는데 특수 사연으로 하여 그의 대변인 박준영을 만났다. 우리는 중국조선족 대변인 각도로 “페스카마호사건”주모자 전재천의 사형을 견결히 반대한다는 주장, 한국에서의 우리 조선족의 지위를 높여주어야 한다는 등 주장을 강력하게 제의 하였다. 이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다. 이외 박문희부주칠의 노력으로 중국에서의 한국인들을 위한 우리신문의 부간 “동북저널”을 출간하였다. 또 리원철부주필의 노력으로 우리 민족이 집결해있는 청도에도 우리신문부간을 내놓았다. 더욱 큼직한 일은 김성걸기자의 애타는 노력으로 최소의 비용을 들여 전성 최초로 우리신문 사이트를 개통하였다. 그때 길림일보도 사이트를 개통하지 못하였다. 이것 역시 나의 죄장으로 되여 얼마후 제지 당하였다고 한다. 급급히 ㄲㅂ겨나는 통에 신형사업에 공헌이 큰 이상의 친구들에게 보답하지도 못했다. 길림신문사에서 밀려난지 어느덧 열다섯해가 된다. 우리직원들을 위하여 좋은 일 할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놓친것으로 하여 항상 가슴이 아프다. 차룡수 1999년 2월부터 2001년 2월까지 2년동안 길림신문사 사장 겸 주필 담당시 잘한일들은 기억에 아리숭한데 책임을 다 못하여 직원들에게 미안한 일들을 저지른것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99년 3월 장춘 우리 신문사에 도착한 나는 크게 놀랐다. 성재정에서 500만원을 투자하여 세운 사무청사는 주체만 달랑 일떠세운채 장식에 손도 못대고 추위에 떨고있었다. 성도라하여 옮겨온 박문희부주필 등 여러 직원들의 주택들은 난방도 보장받지 못하고 꽁꽁언채로 겨울을 보내고있었다. 세맡은 사무실은 어느 파산된 기관단체같이 썰렁하였다. 신문사 재정은 적자운영으로 몇달동안 인쇄비도 갚지 못하고 직원들의 로임도 제기한에 발급하지 못하고있었다. 내가 간 두달후에는 지방법원에서 1임사장시기의 외채 10만원을 강제집행하여 몰수해갔다. 1년에 근 1억원을 다스리던 단위의 법인이던 내가 1전한푼 없는 가난뱅이 단위로 온것이다. 재정평형을 위하여 나는 우선 연변직원들을 사회보험에 가입시켜 1년에 10만원 이상의 혜택을 받았다. 또 유관인사들을 통해 성재정과 관계를 달아 사무청사의 장식비용도 일정하게 해결받았다. 사회각계의 지원으로 신문사 성립 15주년에는 나의명으로 기업의 지원 6만원을 받고 본때스레 15주년을 경축한 동시에 그해 7월 28일에 새 사무청사에 입주하였다. 그해 년말에는 재정위기에서 기본상 벗어났다. 2000년도에는 신문사 제3산업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단위의 수입을 증가하고 직원들의 주택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우선 당조에서 충분히 토론하고 중층간부이상 행정회의에서 여러번 토의하여 한국 친구들의 협조를 받아 한국의 모형제조회사와 식용균생산농장과 합자기업을 세우기로 하였다. 제3산업 주관인 박문희부주필과 함께 한국에 가서 유관부문과 담판하여 모형제조회사에 로무일군 10명을 파견하고 식용균농장에 5명을 파견하기로 협의를 보았다. 파견일군들에게서 톡톡한 수입이 들어온다. 식용균전문가를 청하여 한국에 보냈다. 이외 직원들의 자원 집금으로 19만원 5천원을 주고 연길에 4000여평방기지에 2400평방되는 건물도 사놓았다. 여기에 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기회를 보아서 주택을 지을 예정이였다. 그후 성에 우리 신문을 귀속시키면서 조선족신문사에 력사상 처음으로 문화혁명때와 비슷한 “타민족관제”가 실시되였다. 그 지도자 분들은 불문곡식하고 알심들여 조직한 제3산업을 거둬장지였다. 로무일군들에게서 거둔 비용 12만 5천원 중 비자 비용으로 3만원 버섯균종을 한국에 수출하는데 식용표전문가와 두 주필의 한국행, 한국분들의 비용 등에 5만원이 지출되였다. 단위 직원들 로임지출에 2만원을 돌려썼다. 아직 2만여원이 남아있었다. 원래 생활이 곤난한 로무일군들은 출국못하게 되자 돈을 돌려달라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지도자분들은 나의 여러차례의 유관사업인계 요구를 무시한채 나 개인에게 억지로 죄를 덮어씌우며 그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나는 나의 개인 돈 근 4만원을 털어 일부분 환불해주었다. 공장기지도 기어코 처리하겠다고 하여 내가 나서서 원값에 팔아주었다. 그 건물을 산 사람은 1년반후 75만원에 되넘겨 팔아 순수입 50만원이상 벌었다. 이돈은 우리 집금인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만… 2000년도 말에는 직원들의 주택개혁을 시작하였다. 장춘의 일부 로간부들은 연길에 집을 마련해주기도 하고 돌려보내고 집없는 장춘 골간 청년들에게 집을 주었다. 이미 단위의 집을 차지하고있는 직원들은 유관 정책에 따라 집을 값을 쳐서 개인소유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면 두곳의 집값은 60만원 좌우 거두어 들일수 있었다. 거기에 일정하게 집금하면 2001년에는 길림신문사 주택을 얼마든지 일떠 세울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도 “타민족관제” 지도자들로 부터 묵인되여 버렸다. 그때 집없이 연길로 간 분들과 도처에서 돈을 주어서 집값을 낸 분들한테 항상 죄송스럽다. 2000년도 말, 이미 퇴직한 분들과 최혜순, 량고범 등 단위의 훌륭한 고문들은 다음해에는 방법을 대여 우리신문사를 성에  귀속시킬것을 제의하였다. 합리한 건의였다. 행정령도는 연변자치주에서 재정지출은 성에서 이는 성신문사로서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았다. 12월말 림열지(조선족과 관계가 상당히 좋은 해방시초 동북국서기 림풍의 아들)가 선전부문을 주관하는 성위 부서기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은 기회였다. 일주일 동안 성위 반공청에 드나들다 끝내 림서기를 만났다. 아주 통쾌한 분이였다. 그는 조동해온지 15일도 안되는데 꼭 이 문제를 길림성에 조동에 온후의 첫 사업으로 락착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나를 데리고 직접 길림신문집단에 찾아가서 유관인원들을 만나 구체방안을 토의하였다. 그때 나는 성급신문으로서의 우리 신문은 아직 현퇀급이니 이것도 불합리하다고 하였다. 길림신문집단의 10대신문은 모두 청급단위인데 우리도 응당 그에 따라야하지 않겠는가? 림서기는 확실히 격에 맞지 않으니 성에 귀속시키면서 해결하자고 하였다. 길림신문집단에서 우리 신문을 입수할 책임을 진 분은 말끝마다 인원을 감소하고 연질거점에 몇명만 주재기자형식으로 남기자 하였다. 나는 갖은 리유를 대면서 그렇게 하면 민족정책에도 맞지 않고 우리 신문사에도 유리한것 없다 강력히 주장하였다. 내가 개혁의 제일 큰 장애물이 된것이다. 아니나다를가 성위당위 판공회의에서 개혁의 제1조목으로 차룡수 사장부터 따돌린다하였다. 그후 사업교대도 없고 면직령도 없이 말할기회도 안주고 9개월간 취업대기를 하였다. 얼마후 과연 연길의 20명간부들은 (8명 퇴직간부포함) 주요골간 최혜순 한창 발전중에 나어린 골간였던 최승호, 김청수를 포함하여 몽땅 밀어냈다. 그후 나는 이 20명 직원들을 볼때마다 죄책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일부분 사람들은 내탓에 쫓겨난 신세가 됐다고 나를 욕지거리하였다. “같은신세이면서도”… 그후 또 15년이 지나갔다. 우리 신문사는 아직도 현퇀급이라니 이게 무슨 민족정책인지 모르겠다. 내가 주관할 때 신문사업에도 여러분들의 덕분에 많은 진전을 가져왔다. 우선 발행량이 력사기록을 훨씬 돌파하였다. 광고사업도 크게 발전하였다. 또 한정일 주임의 노력으로 대외 활동이 대단히 활발해졌다. “인터불”컵 조선족 해외수기 공모, 조선족학생 미술콩클…등 큼직큼직한 활동들이 외국인들의 지원으로 빈번히 전개되여 우리 신문의 지명도는 대단히 올라갔다. 길림신문 서울지국(유일한 한국동포신문지국)장 류재복의 노력으로 나와 박문희 부주필은 청와대를 방문하였다. 김대중대통령이 접견하기로 하였는데 특수 사연으로 하여 그의 대변인 박준영을 만났다. 우리는 중국조선족 대변인 각도로 “페스카마호사건”주모자 전재천의 사형을 견결히 반대한다는 주장, 한국에서의 우리 조선족의 지위를 높여주어야 한다는 등 주장을 강력하게 제의 하였다. 이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다. 이외 박문희부주칠의 노력으로 중국에서의 한국인들을 위한 우리신문의 부간 “동북저널”을 출간하였다. 또 리원철부주필의 노력으로 우리 민족이 집결해있는 청도에도 우리신문부간을 내놓았다. 더욱 큼직한 일은 김성걸기자의 애타는 노력으로 최소의 비용을 들여 전성 최초로 우리신문 사이트를 개통하였다. 그때 길림일보도 사이트를 개통하지 못하였다. 이것 역시 나의 죄장으로 되여 얼마후 제지 당하였다고 한다. 급급히 ㄲㅂ겨나는 통에 신형사업에 공헌이 큰 이상의 친구들에게 보답하지도 못했다. 길림신문사에서 밀려난지 어느덧 열다섯해가 된다. 우리직원들을 위하여 좋은 일 할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놓친것으로 하여 항상 가슴이 아프다. 차룡수
1    이런 효자도 있는지 댓글:  조회:1333  추천:1  2015-11-14
        나를 아는 모든 친척, 친구들과 이웃들은 나를 대단한 효자로 본다.         그도 그럴것이20년도 넘게 해마다 자기의 생일을 안쇠고 대신 아버지 로친네 생일을 쇠여 드렸으니깐.         엄마가 운신하기 힘들어 하고 사유가 좀 흐트러지기 시작하니 나는 엄마를 모시고 안해가 법인인 경로원에서 6년나마 동무해 드리느라 했다.         87세 되여 엄마는 치매에 걸려 뒤가 흐트러지는것도 몰랐다. 뒤를 검질해주는 나의 안해를 되려 욕한다. 목욕시켜 드리자 해도 한바탕 전투를 해야 한다.         “어제 금방 했다. 이 아매하구 물어봐라. 너네 나를 머저리로 보재? 시끄럽다. 시끄럽다…”하면서 마구 욕지거리를 해댄다. 때로는 한방에 있는 할머니의 옷을 자기것이라 하며 빼앗기도 하고 자식들이나 친척들이 위문오면서 가져온 맛갈스러운 음식을 곁에 할머니를 드리면 눈을 부릅뜨고 불만을 토한다. 남은 음식은 기어코 이불밑에 감추어 놨다가 증손들을 주라고 하면서 나에게 떠맡긴다. 받아서 옆에 할머니(치매할매)에게 드리면 또 욕지거리다. “그 로친네 그리 곱으믄 콱 데리구 살아라. 제 새끼들도 돌볼줄 모르는게…”나는 밸을 참지 못하고 맞받아 욕지거리를 한다. “엄마는 왜 자기밖에 모르오. 에잇, 아부지도 고생했겠다…”         정신이 흐트러진 엄마와 싸움질 하는 내가 우습기도 하다.         엄마는 젊어서부터 제집 욕심밖에 차릴줄 몰랐다. 생산 대장인 아버지가 식량이 곤난한 이웃들에게 쌀을 좀 주어도 욕지거리, 시내에 있는 친척이나 신세진 친구들에게 맛보라고 햇입쌀을 퍼주어도 욕지거리다.         이 나라가 가장 곤난할 때 일이다. 도살장에 친구가 있는 아버지가 시내 사촌 형님네한테 돼지 대가리를 얻어준적이 있다. 며칠후 엄마가 사촌형님에게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이것이 큰 화근이 되여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사흘동안 절식하면서 숟가락도 들지 않았다.         이래저래 엄마에 대한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두돐이 되여 내가 한창 젖을 파먹을 때 아래 동생을 덜렁 낳아서 젖도 맘껏 못먹고… 내가 어릴 때에는 아버지하고 싸움하고는 나한테 분풀이 한다. “이 머저리 같은 새끼야, 제 에미 맞아대도 말릴줄 모르는 쌔끼. ”비자루를 찾아 쥐고 패댄다. 내가 누나를 때려도 나를 뚜드려주고 내가 동생들을 때려도 나를 혼찌검 내주고. 나는 엄마가 때리려고 비자루를 쳐들기만 하면 제꺽 앞마당의  물도랑을 살짝 뛰여건너 건너쪽 도랑뚝에 걸터 앉는다. 때리지 못하니깐 또 욕지거리로 성풀이를 한다. “조고 조고 보리만티(내가 똥똥하다고) 같은게…”         나는 해쭉해쭉 웃으면서 “못 때리겠지, 못 때리겠지…”하고 골려준다.         듣자니 다른집 엄마들은 맛있는것이 있으면 맏아들부터 준다한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큰것들은 먹지말아. 쪼꼬만 아이들이나 주게”라고 한다. 그덕에 어려서부터 사탕, 과자의 맛이 어떤지 모른다.         한창 진보도 전쟁때 군대가는 나를 보내면서 성격이 강하기로 소문난 아버지도 돌아서서 눈꿉을 찍는데 엄마는 “영광스러워서” 그렇게 기분 좋아했다. 내가 제대하여 돌아와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하니 아버지가 닭알 한소래를 가져다 기름에 틔워 먹여라 하였다. 엄마는 한꺼번에 큰 사발 하나씩 틔워주었다. 아마도 동생들과 나눠먹으라는것 같았다. 그때 고모가 나를 몸춰세우라고 씨암탉 한마리를 가져왔다. 남의 엄마같으면 제꺽 닭곰이라도 해서 먹이겠는데 온집식구가 먹기에 성차지 않는지 그냥 내버려 뒀다가 족제비 체메에 든적이 있다.         나이를 처먹고 서방비위가 나서 동창생녀자(지금 안해)를 데려왔더니 빽 돌아앉아서 인사도 안 받았다. 그가 간 다음 “무슨 새기가 없어서 저런 떼놈간나 같은걸 데려왔니? 서방 못갈가봐 걱정이야.”하면서 또 욕지거리다.         그통에 아버지가 없지 동생들이 넷씩이나 도는 내 처지에서  요행 장가 갔다.         안해가 들어온 후에는 안해가 퇴근하기전에 밥하는 법이 없었다. 불만 때고…         두번째에도 딸을 나으니 한이틀 시중하더니 모르는척하였다.         나는 평생 엄마를 아니꼽게 보았다. 남들에게 소개할 때도 엄마라 안하고 아버지 앙까이라고 한다.         그래도 아리숭하게 나마 좋은 인상도 좀 있다. 우리 마을 나보다 힘쎈 나먹어리 애들이 나를 때려본적 없다. 내가 싸움질 할때면 어느새 달려와서 역성들어 준다. “개새끼 같은 아새끼들아, 어째 쪼고만 아를 때리자하니. 털끝하나 다쳐봐라. 다 죽여 치운다.”         나를 감동시킨적도 있다. 문화혁명 때 연길시에서 8.2, 8.4대폭란이 일어났다. 나는 제딴엔 혁명하느라 련 며칠째 전투판에서 떠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워댔다.         엄마는 나를 찾아 연변일중, 하남당교, 주정부, 주위, 빈관… 온시내를 걸어서 참빗질 한다. 어떻게 찾았는지 주빈관에서 나를 찾아내서 집으로 끌고갔다. 그덕분에 그번 전투에서 같이 한칸에서 자던 세 친구가운데 한 전우는 “희생”되고 한 전우는 부상당했지만 나는 멀쩡하였다. 친구들한테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이런 엄마덕분에 우리집 촌놈자식 6남매중 대학생이 4명이 나오고 박사도 나오고 퇀장급 간부도 나왔다. 나도 그 엄마 성격을 닮았는지 항상 약자들편에 서고 어느 친구가 누구한테 맞았다하면 기어코 찾아가서 복수하여준다. 내 동생들과 자식들에 대한 요구도 대단히 높고, 좀 출세한후에는 하급들을 구별없이 대해 줄줄도 알았다.          한평생 미워하던 엄마가 2년전 령감보러 갔다.  나는 자식구실 하느라고 친척, 친구 120명도 넘게 청하여 평범한 생산대장의 로친네 장례를 좀 굉장하게 치뤄드렸다. 때늦게나마 효성하느라고.         지금도 장마당을 돌다가 감자떡을 보면 “엄마가 좋아했는데…”또 싱싱한 풋파를 보고도 “엄마를 사주었으면…”구운 고구마를 봐도…늦게 나마 셈이 드는지…          나를 효자로 보는 분들에게 미안하다. 이세상에 나처럼 엄마에게 불평 많은 효자도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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