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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회주의 등대 꾸바의 이모 저모 댓글:  조회:1492  추천:0  2017-05-13
사회주의 등대 꾸바의 이모 저모 차룡수           아름다운 하와나엔 우리집 있어요     찬란한 해빛 새 지붕 비추고     붉은꽃 펴요       근 60년전, 붉은넥타이 매던 시절 부르던 노래다.     2016년도 막 가는 12월 16일 오후 2시30분 우리방문단 일행을(우리부부와 손녀) 태운 비행기는 꾸바의 수도 하와나 상공에 들어선다. 비행기 아래로 보이는 지면의 풍경은 그야말로 한포기의 수채화다. 다양한 색채의 농작물과 화초, 수목들을 적, 등, 황, 록, 청, 남, 자 특유의 색채에 맞춰 그려놓아 두눈을 황홀케 한다. 필경 어느 화가의 손에서 가공된 거대한 지상 화폭이다.   이 나라  토지 국유 제도의 우세는 가히 통일적으로 배치하여 남들보다 더크게 더멋진 채색비단화폭을 이땅에 수놓을수 있는것이다.  같은 제도하에서 사는 백성이여서 그런지 처음 오는 외딴 곳이건만 어릴때 엄마손 잡고 친척집 가던 기분이다.       리마에서 아침 8시 반에 리륙한 비행기는 오후 두시 반에 하와나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비행기는 활주로에 선채로 움직일 줄 모른다. 손녀의 말에 의하면 탑승구에 비행기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 안내원이 승객들에게 량해를 구한다고 한다. 올해 아홉살난 이 손녀는 이번 3인 방문단의 단장이자 번역 담당이다. 훌륭한 생활환경의 영향으로 영어, 에스빠냐어를 류창하게 다루고 중국어에 능숙하며 조선말도 얼버무리느라 한다. 올해부터는  또 프랑스어를 외국어로 배운다고 자랑이다. 게다가 중학교부터는 또 이태리어….이애의 앞날을 눈앞에 그려본다.     한시간후에야 찜통같은 비행장에 내렸다. 짐 나르는 전송대는 손님들을 골려주듯이 몇분에 한번씩 멈춰선다. 세시간만에야 간신히 짐을 찾았다. 리해된다. 독립후 수십년동안 미국놈들의 악착한 경제봉쇄를 받아 모든 분야의 필수품들이 다 결핍한 정황이다.  이 나라 사람들만의 인내력, 네시간만에 공항을 나오건만 모두들 큰 불평이 없다. 이처럼 악랄한 환경에서도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사회주의 제도를 견지 해 나가는 이 땅의 주인들한테 진심으로 탄복한다.     공항으로 나오니 딸애가 보낸 스물 댓살 되는 키가 자그마한 성이 양가라는 처녀애가 마중 나와 있었다. 지금 하와나 대학에서  석사 과정 공부중이라 한다.     우리를 태운 9인석 봉고차는 시 중심을 향해 달린다. 꾸바의 겨울은 아름답기만 하다. 눈보라 치는 우리 고향의 겨울과는 달리 활짝 핀 가로수들이, 무성한 공원의 화목들이 우리를 반겨 맞는다.     민박집에 우리를 배치하였는데 호화하기를 총통급 호텔을 련상시킨다. 마누라와 손녀가 한방에, 내가 따로 한방에  큼직한 객실까지 달렸다. 게다가 주방, 화장실, 욕실, 휴식용 베란다, 화식칸엔 내가 하루도 없어서는 안되는 술, 실로 부러운것 없다. 쇼양의 말에 의하면 국영호텔은 이 정도면 하루 주숙비가 인민페로 천원 넘지만 이 민박집은  3백원도 안 된다 한다. 또 자기가 아는 집이여서 아주 안전 하다고 한다. 만족이다, 이 이상 더 바랄게 없다. 기분좋게 행장을 풀었다.     나의 요구에 따라 저녁은 중국식당에 배치하였다. 차로 5분정도, 아주 깔끔한 식당이다.      메뉴에는 20여가지 중국 료리들이 있다. 중국 사람이 왔다고 하니 집주인 아줌마가 나왔다. 광동 사람이라 하지만 광동에서는 보기 드문 훨끔한 여자다. 화사한 태도에 보답하느라 중국돈 200여원어치 반찬을 주문하고 이곳 명주 랑모주를 청하였다. 근 70년동안 중국에서만 살아 그런지 출국하여 며칠만 되면 중국 음식 냄새가 그립다. 내가 좋아하는  양고기 파볶음, 졸인 돼지고기, 짠지, 튀운 물고기, 이곳에서는 대단히 풍성한 축이라 한다. 여기 사람들의 한달 로임으로는 어림도 없단다. 거의 두달 로임에 맞먹는다. 허기 차던차에 세 사람 다 게걸스레 먹어줬다.     배가 부르니  한바퀴 돌아 본다.  300평방 넘어 보이는 꽤나 규모 있는 식당이다. 듣는 말에 의하면 이곳의 대부분 중국 식당은 가짜라 한다. 중국 간판을 걸고, 본지 사람들이 경영한단다. 물론 질도 형편없고, 아메리카 이땅에 가짜 중국 식당 간판까지 걸수 있게 하는 중국사람들의 수완에 탄복하지 않을수 없다. 중국 사람들은 이 먼 아메리카 땅에 와서도 능란하게 삶의 길을 개척 해 나가고 있음을 설명한다. 꾸바인구의 1프로를 차지하는 중국인들은 꾸바의  독립전쟁에서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세웠고 사회주의 건설에서도 꾸바는 중국과 중국인들을 떠날수 없다고 한다. 지금 이 땅에는 13만 넘는 중국인들이 살아 가고 있는데 꾸바인들과의 관계가 대단히 좋다고 한다. 중국놈으로서 자랑스럽다.     금방 식사를 끝내고 나니 민박집 주인이 마침 차를 갖고 마중왔다. 쇼양의 배치에 따라 래일은 먼저 아메리카 명주인 꾸바에서 꾸바의 명주인 유명한 유람구인 장도로 가기로 하였다.      잠이 오지 않는다. 꿈만 같다. 한달전 딸애가 아메리카의 유일한 사회주의국가, 세계 다섯개밖에 없는 희소한 사회주의 국가중의 하나인 꾸바 구경시킨다 하더니 어느새 이땅에 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60년대말 대련 근처의  바다가에서 한국산 약용 비닐병 하나 주었는데 그렇게 희구하던 일. 세상은 변했다. 중국 변강의 자그마한 곳에서 조선족 령감 노친네가 꾸바로 왔다. 태평양을 가로 질러 지구를 반바퀴 빙 돌아, 인젠 5대주 4대양 신체만 튼튼하면 못갈데 없다… 몸조리 잘하여 오래오래 살아야겠다. 평생을 파초 더미에서 뒹굴며 살아 왔으니 인젠 복 누릴 일밖에 안 남았다. 노친네 말 잘 들으면서.     이틑날 12월 17일 아침 우리는 하와나에서 장도로 가는 공항으로 향하였다. 길거리의 절반 이상 차량들은 5, 60년대의 구라파의 고풍스러운 아바이 차들이다. 이 유명한 성시의 색다른 풍경이다. 한결 돋보인다. 새차를 살 여건이 안 되니 낡은 차들을 수리하고 또 수리하여 쓰는 판이다. 듣는 말에 의하면 이곳의 거의 모든 기사들은 수준급의 수리공이라 한다. 뻐스는 거의 세시간 천천히 달리며 우리를 시내구경 시킨다. 자그마한 시골 뻐스잠 같은 공항에 도착하였다. 11시가 거의 될때 44인 탑승용 비행기에 올라탔다.  40여분만에 장도에  도착하였다.     푸르른 하늘 푸르른 바다 푸르른 섬, 천하 만상이 청록색 세계에 파묻혀 있다. 띠염띠염 펼쳐진 백사장만이 이곳이 륙지임을 알려준다.      공용 뻐스가 우리를 유람구로 실어다 주었다. 다시 편의 짐차에 앉아 주숙지에 도착하였다. 한층에 두집씩인 3층 짜리 별장 20여채가 야자나무 슾속에 질서 정연하게 배렬돼 있다. 짐을 부리고 창문 열고 바라보니 남쪽에는 백여메터를 사이 두고 이곳 특유의 맑고 푸르른 가없는 바다가 우리를 반겨 넘실대고 있다 .바다가에는 밀가루를  편듯 하얗고 보드러운 모래장이 아칠에게 펼쳐져 있다. 이 역시 이곳의 특유의 풍경이라고 한다. 배가 촐촐해난다. 손녀를 따라 식당으로 향한다. 식당 근처는 수영장으로 에워쌓여있다.푸 르면서 투명한 물, 거울같이 고요한 물, 밑 바닥까지 환히 들여다 보인다. 담방이라도 뛰여 들고싶다. 그 주위에는 또 이름모를 각가지 꽃들이 요염한 자태로 손님들을 유혹한다. 세계각국 미남 미녀들이 온몸을 헝겊오리로 살짝 가리우고 미인 선발  대회에서 표현하듯이 꼬리질 하며 싸다닌다. 그자태 그대로 휴식용 의자에 늘어 져서 그 아름다움을 시위 하는 놈들도 있다. 실로 자유세계의 놈들다운 호방함이다.      손녀의 배치에 따라 야외식당 좌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오늘부더 먹고 마이는것 일률로 면비라 한다. 각가지 음료에 술은 양주부터 호프, 포도주, 랑모주… 반찬도 륙해공군 없는것이 없다. 주식은 주로 햄버거, 빵, 비빔밥, 이태리 국수, 술만 마침이 마이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하란다. 손녀의 지시다. 대식품 시대 초근, 목피, 콩깍대, 겨떡 닥치는대로 먹어본 령감이다. 실컷 먹어주자. 이렇게 좋은 세상도 있구나.     손녀가 여러가지 안주에 얼음을 탄 양주 한잔 청해 준다. 그리고 마누라에게는 포도주 자기는 콜라를 들고 두량주의 쾌락을 위하여 건배하잔다. 기쁜 기분에 쭉… 그만 다 내 버렸다. 손녀에게 한바탕 꾸지람, 그래도 너그럽게 큰 고뿌에 호프 한잔 더 가져다 준다. 앞으로는 한끼에 배갈 두냥 초과 못한단다. 세계 명승지에서의 멋진 한끼다.     식사후 수영복을 바꾸어 입고 수영장에 뛰여 들었다. 너무나도 맑고 깨끗한 물, 몸 잠그기도 미안하다. 발끝까지 환히 들여다 보인다. 수영은 우리 이 손녀의 체육 특장이다.  어느새 물속으로 10여메터 미끄러져 나간다. 나도 버둥거리며 따라 가느라 하지만 어림도 없다. 5분도 안되여 헐떡 거리며 두손을 들었다. 젊어서는 하느라 했는데, 불복이다. 한쉼 쉬고 또 도전이다. 잠시후 박수 소리에 고개 돌려 바라 보니 손녀의 자맥질 재간에 이웃 나라 친구들이 박수갈채를 보낸다. 변두리에 있던 마누라도 첨벙거리며 다가온다. 좀 아느라고 내딴에 교련으로 나선다. 인젠 실컷놀자. 시집 와 거의 40년 너도 고생이 많았다. 고집 불통 시어미를 모실라니, 싸움에 이골이 튼 승냥이 무리같은 시동생 셋에 시누이까지, 게다가 제 자식까지 둘, 모두 춰 세우느라 속으로 피눈물도 많이 떨구었을거야! 나도 셈이 들지 않아 자그마한 직장들에서 쪼꼬만 책임을 지고 큰 노릇 하는것처럼 수십년 밤낮없이 술판에서 돌아치고… 마음껏 원망해다오. 셋이서 물싸움도 신난다. 물론 손녀의 대승으로 끝난다. 손녀가 맥이 진할때까지 놀아 주고 수영장 옆의 야자나무 그늘 아래 장의자에 힌들 들어 누워 대자연이 하사한 혜택을 마음껏 향수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22도 좌우 마침한 한겨울 날씨다. 손녀는 태양욕을 하라고 외할미를 한사코 볕으로 끌어낸다.     실컷 놀아주고 또 기신기신 술집으로 찾아든다. 야자나무 잎으로 가려진 그늘에 앉아 나는 호프, 마누라는 포도주, 녀석은 콜라 또 새로운 전투를 시작한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고 신선 놀음이 따로 있나. 수백년 동안 미국놈들의 민족 기시를 받아온, 지금도 그 쇠사슬에서 완전이 해탈되지 못한 이땅에 공산주의 모텔을 세운 이나라 영웅적 민족들에게 숭엄한 경의를 드린다. 물론 아직까지는 국한된 땅에 국한된 사람들에게만 차려지는 혜택이지만 그 언젠가 이 지구우에 가장 먼저 공산주의를 실현 할 나라가 바로 꾸바일 것이라 굳게 믿는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더니 째글 째글 끓던 해는 어느새 서쪽 바다에 숨어 버렸다. 셋이서 엇갈아 그물 그네에 앉아 흔들흔들. 시간을 보낸다. 저녁 8시 이곳 중등 수준의 술집에서 뷔페를 차리니 시간을 맞춰 광림 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윽고 짜른바지, 긴바지, 짜른치마, 긴치마,  아예 팬티바람에, 웃통은 일률로 드러나지 안을 정도로, 노란머리, 하얀머리, 깜장머리 중머리. 한발되는 머리, 각종 각양의 인종들이 2백여명 용납할수 있는 큼직한 식당의 홀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대단히 풍성한 뷔페다. 한평생 공산당 덕분에 숱한 뷔페 회식에 참가 해 보았지만  이토록 풍성한 장면은 처음이다. 소, 양, 돼지, 노루, 사슴, 또 이름모를 짐승, 상어고기를 망라한 수십가지 해산물, 각가지 과실과 채소, 신선들의 연회에는 이외에 또 무엇이 더 있는지? 나의 견식으로는 더 주어 댈것이 없다. 수산물 좋아하는 나는 해산물 위주로 로친은 소채위주  손녀는 고기위주 한상 가득 찼다. 우선 랑모주 한잔 또 성수나게 우겨준다. 술 제한령을 어길가바 노친네 앞에도 양주 한잔 놓고 내가 대신 슬금슬금 마여준다, 이 좋은 판에 술을 적게 들면 어쩐지 그 누구에게 미안한것 같다. 손녀의 비위를 맞춰주며 또 호프 한잔 더 드니 알딸딸한게 기분이 좋다.     장도에서의 하루, 공산주의 생활의 첫날을 더없이 유쾌하게 보냈다. 저녁에는 은근이 모기 근심하였더니 부질없는 근심이였다. 창문을 열어 놓고 자도 온밤 한놈도 얼씬하지 않는다. 실로 살기 좋은 곳이다.     이튿날 12월 18일 아침 8시까지 늦잠을 자고 샤워후 뷔페에서 아침을 에때우고 택시를 잡아타고 해변가로 달린다. 오늘의  스케줄은 우선 돌고래쇼이다.  10여분 되니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야자수 수림을 끼고 앉은 술집, 왼쪽에는 백사장을 품어 안고 해수욕장, 오른쪽에는 돌고래 사육장, 오늘은  손녀의 흥취를 자극하는   날이다. 어느새 수영복을 바꾸어 입더니 바다에 뛰여든다. 능숙한 수영 재간이 제격이다. 자연스럽게 돌고래한테 접근하더니 인차 제법 어울린다. 다가오는 돌고래를 슬슬 만져주니 재롱 부리며 힌들 드러 눕는다. 두손을 뻗어 두마리 돌고래 허리를 잡으니 쏜살같이 내달린다. 숱한 구경군들이 한결같이 환성을 지른다. 돌고래 사육원이 호각을 부니 방향을 되돌려 달려온다. 호각소리에 따라 물속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두마리가 각기 주둥이로 손녀의 두발을 떠이고 솟구쳐 오른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전문 훈련받은 연원같다. 근처에 있는 유람객들이 다 모여든다. 자랑스럽다. 노친은 긴장한지 두주먹을 꽉 틀어 쥐고 있다. 유치원 다닐때부터 동물들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3년전 아마죤 삼림을 유람 할 때다. 한 밤중에 독거미 구경하는데 우리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데 어느새 손을 내밀어 쥐자고 해서 크게 놀란적 있다. 또 한번은 집에 들어온 부나비를 아바이가 잡아 쥐였는데 그렇게도 섧게 울어대며 야단을 쳤다. 다행이도 벌레가 죽지 안았기에 소동이 인차 멈추었다. 평생 고기잡이에 흥취가 있어 낚시질, 반두질, 그물질, 채발질 지어 손잡이까지 갖은 수단으로 무수한 생령을 해친 이 아바이의 죄악을 대신 씻어 주는 모양이다.     동물들과의 이런 남다른 인연이, 훈련도 없이 멋진 돌고래 쇼를 펼칠수 있는 원인인것 같다.  원래 40분인 돌고래 쇼는 사육원들의 지휘 하에 한시간이나 더 연장되였다. 그들도  이렇게 훈련도 없이 잘 노는 애를 처음  본단다.       어느새 반나절이 지났다.     오후 한시가 다 돼서야  유쾌한 기분으로 주숙지에 돌아왔다. 손녀는 성공적인 돌고래쇼로 흥분되여 병원도 안 간단다. 이틀채 기침이 낫지 않아 병원으로 가기로 하였던것이다. 겨우 달래서 의사를 보였더니 큰 탈이 아니니 약을 한이틀 먹이라 한다. 이곳의 의료봉사는 듣던바와 같이 우월하다. 약을 떼여주고는 주의 사항까지 상세히 교대한다. 오늘 저녁은 이곳 유람객들한테 일주일에 한번씩 차려지는 최고급 회찬이라 한다. 각가지 료리들은 어딘가 평시와는 좀 달라 보인다. 특히 통돼지 구이와 왕새우는 어느새 군침이 돌아치게 한다. 한사람 하나씩 왕새우를 청하였는데 나혼자서 거지반 우겨주었다. 중국에서 이 정도의 새우를 먹자면 적어도 천여원은 들어야 한다. 또다시 이곳 공산주의 혜택을 통쾌히 향수하고 수영장 근처의 그물 그네에 들어 누워 흥얼 흥얼 코노래 부른다. 이상한 일이다. 동창들 가운데서 노래 못하기를 소문 놨는데 요새는 너무도 잘된다.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노친네도 따라 부른다. 저 맑은 하늘 화창한 별 나라를 유람 하노라니 시간 가는줄 모르겠다.     12월 19일, 오늘 계획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잠수도 하고 낚시질도 할 예정이였다. 그런데 꼬맹이의 기침이 낫지않아 포기하고 주숙지 근처의 바다가로 나갔다. 주숙지에서 5분거리다. 여기는 천연적인 수영장이다. 아칠한 백사장을 끼고 푸르른 바다가 넘실거린다. 륙지의 모래는 금모래, 은모래라 하건만 이곳의 모래는 희디흰 떡가루를 련상시킨 그대로 뒹굴어도 이성의 살결처럼 오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대 자연이 이 나라 사람들에게 하사한 훌륭한 놀이터다. 보기에는 사나와 보이는 이곳 바다는 천여메터 들어가도 허리를 넘지않아 우리집 노친 수준에도 마음대로 몸을 잠글수 있다. 밀물이 들어 올때마다 잇따라 터지는 환성소리에 시간 가는줄 모른다. 맑디맑은 바다는 찾아온 손님들을 품에 걷어 안고 놓아주질 안는다. 한참만에 손녀가 잃어졌다. 깜짝놀라 도처로 찾아 다니는데 모래속에서 깔깔댄다. 잎과 코만 내놓고 전신을 모래속에 감추고 우리를 골려준다. 노친은 시름의 한숨을 활 내쉰다. 놈은 더 신이나서 깔깔대고…야자수잎으로 엮은 초막밑 장의자는 잠을 청하기가  맞춤하다. 한잠 자고 일어나니 놈은 아직도 모래장을 떠날념 안한다. 할수 없어 다시 바다에 몸을 잠근다. 아차 이건 또뭐냐. 숱한 잔 고기들이 다리에 다리 사이에 허리에 마구 달라 붙는다.  어리광 부리듯이… 싫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낚시질 못하여 궁금 하던 차 네놈들하고나 놀아주자. 한참 싱갱이질 하여 손 가락보다도 작은놈 한마리 붙잡았다. 오늘 고기잡이 군을 뗐다.  바다에서 손잡이로 고기를 잡다니, 내 수준은 그래도 이놈들이 알아준다. 혼자서 흥이 난다.      12월 20일 어느새 장도에서의 삼박사일이 다 지나갔다. 평생 처음으로 만끽한 공산주의 생활의 순간 순간들이다. 아침 여덟시 아침 식사가 끝나자 우리는 섬마을공항으로 가는 뻐스에 몸을 실었다. 다시 돌아본다. 진짜 그림에서 보던 그대로다. 애초에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께서 이 세상을 만들었을 때의 그 바다, 그 륙지, 초목, 동물 지어 저 하늘까지 인간들을 제외하고 모든것이 그토록 순수하다. 제발 영원히 이 세상의 갖가지 오물들에 오염되지 말아다오. 공항 대합실에 도착하였다,  손녀가 갑자기 기침을 세게 하더니 게우닥질 한다. 옆에 친구들이 더 야단법석이다, 약을 찾아준다, 의사를 불러준다, 지어 옆에 앉아 잔등까지 도닥여준다. 아! 이곳의 인간들은 이곳의 대자연처럼 깨끗하고 아름답구나.     장도에서 리륙한 소형 비행기는 40분만에 하와나에 도착하였다. 하와나는 서인도양 군도에서 제일 큰 성시이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시라고 불리운다. 꾸바의 정치, 경제, 문화, 유람의 중심지로서 인구는 213만에 달한다. 년 평균 기온은 24도이며 사시절 기후 차이가 현저하지 않다. 하와나는 로성 구역과 신성 구역으로 구분되여 있다. 로하와나는 좁은 거리에 길 량켠에는 력사가 유구한 에스빠냐식 옛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져 버티고 서 있는데 여기는 이 나라의 상업의 중심지이며 고적지가 가장 많이 집중된 곳이다.  우리는 우선 로구역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이 로성 구역은 세계적인 건축 예술의 보물고로서 500년간의 각시기 부동한 풍격의 건축물들이 보존 되여있어 1982년에 련합국교과문조직으로부터 인류문화유산으로 인정 받았다.      나의 주장에 따라 고풍스러운 아바이차를 잡아 탔다. 이전에 사진으로나 보아 오던 서양귀족들이60여년전에 타던 차인데 차문의 손잡이 두개는 다 다슬어 떨어졌는지 나무를 깎아 못을 박아 고정 시켜 놓았다. 박물관에서나 볼수 있는 고물단지이다. 기사 선생에게 탄복한다. 이 정도의 페물을 몰자면 웬간한 차 수리 기술로는 어림도 없을것이다. 대부분 수리부는 개인차를 대상 안하기에 자체로 다 수리한단다. 생각 밖에 차소리는 아주 자연스럽다.  4년 쓴 나의 차만 못지않다. 택시에서 내려 천주교회당을 지나 이 나라의 문화중심인 음악성을 지나 비둘기 광장에 도착하였다. 손녀가 꿇어앉자 숱한 비둘기들이 후루룩 후루룩 모여들었다. 또 동물들과의 남다른 인연이 표현되는 시각인상 싶다.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없는듯 이 애의 주변에만 수십마리 모여든다. 깔깔대며 먹이를 뿌려 준다. 얼마전까지 괴롭히던 감기는 어디로 갔는지 즐겁기만 하다.          겨우 겨우 달래여 요행 비둘기 광장을 떠났다. 천천히 걸어 광장을 한쪽으로 에도니 길 한쪽켠에 불란서 로 신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소박하고 자애로운 그 모습은 동방의 불상을 련상시킨다. 전하는데 의하면 그 신사의 손가락을 만지면 사랑의 운이트고 수염을 만지면 재수가 붙는다 한다. 숱한 사람들이 수염을 쥐고 기념사진을 남기고 청년 남녀들은 손가락을 잡아 쥐고 영원한 사랑을 기원한다.  손녀는  수염을 쥐고 나는 늙으막 새 사랑을 꿈꾸며, 슬그머니 신사의 손가락을 쥐고 기념사진을 남  긴다.  얼마후 맥주 광장에 도착하였다. 맥주공장에서 직접 쏟아지는 호프를 바라보며  목구멍이 방아질하여 그냥 지나칠수 없다. 햄버거 네개에 호프 두개 청하였다. 또 꾸바식이다. 반시간이나 지나서야 나왔다. 쇼양은 자기는 이미 이곳의 느러진 절주에 적응 되였다 한다. 90해리를 사이두고 미국이라는 몰렴치한 파쇼들의 수십년동안의 억압을 받아오며 어쩌면 늘어진 이 절주가 오히려 꾸바식 사회주의 건설 수단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남들처럼 천리마요, 만리마요 하다가는 오히려 멸망이나 가속화 시킬것이라 생각된다. 손녀의 눈치를 봐가며 호프 두잔 거뜬하게 해치운다.      로성구역에 왔다가 쇼바이궁을 보지 못하면 서운하다고 한다. 1929년에 미국 화성둔 국회를 모방하여 지은 호텔인데 한때는 이 나라의 국회청사로 쓰이였다. 가까이에서 봐서 그런지 미국 바이궁 보다 훨씬 더 커 보인다. 사실 높이가 94메터로서 미국것보다 한메터 더 높다고 한다. 옛날부터 미국놈들에게 눌리우지 않으려는 이 땅의 거룩한 민족들이 항상 돋 보인다. 한메터라도 더 높이 세우는걸 보시라. 이러한 기백과 용기로 군사, 경제상에서 비할바 없이 우세인 코밑의 강적들과  맞서서 근 60년을 싸워오며  사회주의 국가의 본때를 보여주고있다. 장하다 꾸바여…일찍 이 호텔은 중의원 참의원으로 쓰이였는데 지금은 과학기술환경보호부, 과학도서관, 자연력사박물관으로 쓰이고있다. 이 나라의 위용을 더 빛내려고 그 바쁜 경제 여건에서 자금을 모아 지금 한창 더 멋지게 수선하고있다.  로 총통부도 이곳에 있는데 역시 원형 건물이다. 일망무제한 대해를 등지고 그 주위에는 숱한 고목들과 더불어  울울창창한 수목으로 에워 싸여 한결 더 돋보인다.  듣는말에 의하면 내부는 금빛 찬란한, 휘황한 벽화로 장식하여 눈부실 정도라고 한다.  1959년 이 땅의 거물 카스트로는 꾸바의 친미 독재 정권을 이곳에서 몰아내고 꾸바혁명의 승리를 취득하였다. 지금은 자랑스럽게 력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해빈 대도쪽으로 한창 걷노라니 기념탑이 바라 보인다. 일찍 1931년 꾸바정부와 인민들이 중국인들을 기념하여 세운탑이다. 18메터 높이의 흑색 원주형 대리석 기념비이다. 탑에는 (꾸바독립 전쟁중에서 중국인은 한명의 도주병도 없었고 한명의 반역자도 없었다.) 중국인들에 대한 고도의 평가이다. 옛적부터 줄곧 중국인을 알아주는 아메리카의 유일한 나라인듯 싶다. 중국인의 긍지감 한가슴 뿌듯이 사진 한장 남긴다.      12월21일 우리는 쇼양의 안내하에 신성 구역을 돌기로 하였다. 민박집에서 나와 한창 걸으니 하와나대학에 도착 하였다. 큰 거리에서 학교 정문을 향하여 높다란 층계가 펼쳐져 있었다 쇼양은 모교의 자랑에 끝이 없다. 그의 소개에 의하면 하와나 대학은 일찍 1728년에 세워졌는데 아메리카에서 가장 일찍 세워진 력사가 유구한 대학이라 한다. 자연과 인문 과학등 15개의 계에 25개 전업이 있고, 14개 연구 중심이 있다 한다. 그외 석사전업반만 하여도 25개라 한다. 또 국가 고등 교육부에서 전문 농민들을 대상하여 꾸리는 교육 과정이 있는데 오후와 저녁에만 교학한단다. 그외 600여명의 발전중 국가의 류학생들이 이곳에서 에스빠냐어와 의학을 전공하고 있단다. 꾸바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신 카스트로도 일찍 1945년 이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을 전공하며 반미운동에 적극 참여 하였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은후 학교의 면모는 한층 크게 발전하였다.  여러차례에 걸쳐 학교기지를 확충하고 새로 류학생을 모집 할뿐만 아니라 거금을 들여 아프리카에 대학생 기지도 건설하였다. 1964년부터는 우리 중국 류학생도 대량 받아들여 에스빠냐어와 기타 여러가지 전업의 대학생들을 배양해 주고 있다.  2백메터도 넘어 보이는 층계가 끝나니 대학 정문 마당이 안겨 온다.  희구한 거목들이 보기좋게 배렬된 가운데 고 로마 어머니 신의 상징인 아마.마더르 청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아마.마더르 청동상은 구라파에서 학문. 대학의 동의어라 한다. 꾸바의 교육 사업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아메리카에서는 미국을 초월하여 1위로 꼽히고 있다. 소학교부터 대학까지 일률로 면비로 교육을 실시한다. 소학교는 입학률이 100%이고 초중이 95%, 그중 고중에98%,  그중 대학 혹은 전문 대학에85% 간다. 이 나라의 경제 조건에서 이는 대단한 일이다.  국가 재정 지출의 20%이상을 국민 교육에 지출한다고 한다. 아늑한 교정과 교육시설 들에 연속 찬사를 보내며 교정을 빠져나온다. 외손녀에게 이곳에 와서 연구생 공부를 하라는 부탁을 남기며…      모두가 컬컬하던차에 마침 교문밖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그옆에는 공원 대문을 향하여 수백명이 줄처있었다. 쇼양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사면 하나에 40전인 아이스크림을 줄을 서서 공원에 들어가 사면 25전에 다섯개씩 판단다.  무슨 장사비결인지 리해할수 없다. 우리는 가까운데서 비싼것으로 사먹고 길을 재촉한다.  아바이차를 잡아 타고 신성 구역으로 달린다.  30분정도 달려 신성구역에 도착하였다. 눈이 번쩍 띄게 넓은 거리에, 가는데 마다  울창한 화목과 아름다운 화원이 사람들을 반겨 맞아 주었다. 하와나의 가장 중요한 집회 장소인 혁명광장이 한가슴 탁 트이게 쫙 펼쳐져 있다. 그 중앙에는 민족영웅 허싸이.마티의   백색 조각상으로 된 기념탑이 우아하게 솟아 있다. 허싸이.마티는 유명한 시인이며 작가인데 꾸바의 자유 독립의 상징이며 그의 명성은 아메리카에서 자유의 동의어이다. 그 탑 주위에는 나라의 주요 부서들인 국가도서관, 무장력량부, 내무부, 교통부, 국가 대극장, 그리고 기념탑 뒤에는 꾸바중앙과 꾸바정부청사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쇼양의 소개에 의하면 이런 으리으리한 기관들 내부는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소박하다고 한다. 대부분의 재정지출을 인민들의 생활 향상에 돌리느라 불필요한 정부비용을 될수록 줄인다고 한다.  정부의 처사에 내심으로 경탄하며 이리저리 각도를 맞추어 기념사진을 남긴다.          계획내의 오늘 참관구역을 다 돌고나니 아직도 저녁시간까지 두시간 남았다. 쇼양은 우리를 이끌고 자기집으로 향하였다. 택시 타고 반시간, 침실 두개에 객실, 자그마한 주방에 화장실, 70여평방되는 아담한 2층 아파트다. 남자친구가 이곳 중국 국영기업에서 근무 하는데 로임은 국내 동항들보다 좀 높은축이고 이곳에서는 상등축에 속한단다. 집값이 너무 비싼축이 아니여서 몇년간 저축한 로임에 한3분의1가량 부모들이 대여 주어서 결혼전에 집을 살수 있었단다. 이곳 사람들의 개인집은 상속 받은것이 위주고 말로는 집도 공급제라 하지만 출근족들은 개인집 얻기가  하늘에 별따기라 한다. 1962년초부터 방산의 자유매매를 허용하였지만 아직까지 대부분집들은 국영 방산인데 일부는 정책에 따라 기를 나누어 규정된 금액을 들여 놓고 사유화하기로 하였다 한다. 그는 공급통장을 내보이면서 꾸바의 실황을 소개하였다. 공급범위는 실로 다양하였다. 쌀, 기름, 고기, 비누 심지어 소금까지도… 이외 무릇 이 나라에 긴장한 모든 생활필수품인 세척제, 사탕, 비누, 세수비누, 쵸콜레트 지어 성냥까지 거의 다 공급제라 한다. 공급물품들은 시장가격의 몇십분의 일,  거의 무상으로 공급하다 싶이 한단다. 완전히 자기공민들을 돌보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다.   모든것을 다 시장화하면 임시 들어와 떠돌이로 사는 외국놈들의 배만 불리고 제 백성이 굶어 죽을판이니깐… 나는 충분히 리해된다. 일반시민들의 로임은 꾸바돈 170비숴인데(인민페 100원정도.) 닭알 빵, 가격이 1비숴 정도로서 로임의 58%정도는 식료품소비에 들어야 한단다. 그러나 3세기동안 에스빠냐 통치를 받아오다, 이어서 연속 60년동안 미국 침략군들의 식민지로 살아오다, 해방후 거의 60년 또 그자들의 혹독한 경제봉쇄를 받아오며 모든 필수품은 다 그토록 긴장한판에 국민들을 먹여 살려내는 그 수완에 탄복하지 않을수없다.     쇼양은 또 이곳 의료제도에 대해 아주 만족스럽게 소개하였다. 이 나라 정부에서는 전국 재정 예산의 3분의1을 의료 사업에 투자하고 있는데 교육 투자와 함께 두개 항목이 전반 예산액의 절반을 차지하는 셈이다. 애가 임신되여 배안에서부터 죽을때까지 나라에서 책임져 준다. 의학원 졸업생들은 졸업하면 일률로 농촌에, 기층에 보내 제일선 의료 봉사업에 참가하게 한다. 농민들을 포함하여 매10호당 책임의사 한명씩 차려지기에 웬간한 병은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처리된다. 기층에서 해결할수 없는 큰 병만이 의사의 소개로 2급 병원 3급병원으로 호송 된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전민의료 체제가 형성되여 어디가나 가정의사, 문진병원, 종합병원 등으로 그 체계가 아주 구전하다. 전국적으로 만명당 의사가 134.6명으로서, 미국 125.1. 카나다93.5명을 훨씬 초과한다. 하기에 듣는말에 의하면 큰 병원들은 그렇게 조용하다 한다. 병원에 입원하여도 돈을 쓰는법을 모르며 심지어 호리하는 가족의 화식까지도 병원에서 책임진단다. 이런 우수한 사회의료 보건제도 덕택으로  이 나라 백성들의 평균수명은 근 80세에 달하여 미국보다도 2년가량 초월한다고 한다. 미국 전대통령 오바마도 꾸바 방문시 이 방면의 진보를 충분히 긍정하였다 한다. 속으로 생각한다. 우리 위대한 중국에서는 언제면 이 절반만큼이래도 따라올가? 같은 사회주의국가인데? 쇼양의 소개에 의하면 이 나라 사람들은 아무런 가정부담도 없단다. 한평생 자기건강만 차리면 된단다. 교육, 의료, 생활소비품 모든것을 나라에서 알아서 처리 해주니깐.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 비하면 진짜 리상천국이다.     강철 같이 단합된 우월한 사회주의 제도하의 꾸바인민들의 지혜와 용기는 그 어떤 날강도들도 꺾지 못할것이다. 물론 잠시나마 물질상 다른 나라들에 많이 뒤지고 있지만 바야흐로 이 세상에 승리자의 모습으로 그 거룩한 모습을 자랑 할것이다. 세계적으로 앞장선 교육, 의료사업의 뒤를 이어 이 근년에 고속도로 발전하여 국민 경제의 제일 기둥산업으로 발전한 유람업의 현실을 보기로하자. 보석처럼 빛발치는 수백개 해안선의 풍경구, 찬란한 해빛, 맑디맑은 바다물,  떡가루를 편듯한 백사장은  근 2000여개섬으로 구성된 이 나라 유람업의 보물고이다. 개방정책의 혜택으로 2003년부터 190만 이상의 유람객들이 모여 드는데 그 수입은 해마다 20억딸라를 초과 한다.  2016년에는 200만명을 초과하여 전해보다 11.7%증가하였다. 2015년부터는 미국과의 관계가 호전되면서 미국 유람객 증장 폭도 76.55에 달한다. 이 속도로 발전하면 멀지않아 유람업 수입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크게 향상 시킬것이다. 혼자 중얼거린다. 이웃 나라 우리민족들도 이렇게 살아 갔으면 좋으련만!!      지구의 서쪽 절반 땅에서 범죄률이 가장 낮은 나라. 일찍 세계자연기금회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지속 발전한 나라 라는 높은 평가를 받은 국가이다.     12월 21일 우리를 실은 주인집 자가용차는8일간의 지상락원 생활을 마친 우리 일행을 싣고 공항으로 달린다. 차창 밖으로 붉은넥타이를 맨 명랑한 어린애들의 모습이 보인다.     바로 이것이다. 사회주의 등대 꾸바에서 공산주의 신앙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위인의 말처럼 점점의 불꽃은 료원의 불길로 타 오를것이다. 아메리카의 유일한 사회주의, 꾸바의 빛발은 조만간에 만천하를 뒤덮을것이다.  
5    직원들에게 미안한 일들을 회억하며 댓글:  조회:1066  추천:0  2015-12-26
1999년 2월부터 2001년 2월까지 2년동안 길림신문사 사장 겸 주필 담당시 잘한일들은 기억에 아리숭한데 책임을 다 못하여 직원들에게 미안한 일들을 저지른것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99년 3월 장춘 우리 신문사에 도착한 나는 크게 놀랐다. 성재정에서 500만원을 투자하여 세운 사무청사는 주체만 달랑 일떠세운채 장식에 손도 못대고 추위에 떨고있었다. 성도라하여 옮겨온 박문희부주필 등 여러 직원들의 주택들은 난방도 보장받지 못하고 꽁꽁언채로 겨울을 보내고있었다. 세맡은 사무실은 어느 파산된 기관단체같이 썰렁하였다. 신문사 재정은 적자운영으로 몇달동안 인쇄비도 갚지 못하고 직원들의 로임도 제기한에 발급하지 못하고있었다. 내가 간 두달후에는 지방법원에서 1임사장시기의 외채 10만원을 강제집행하여 몰수해갔다. 1년에 근 1억원을 다스리던 단위의 법인이던 내가 1전한푼 없는 가난뱅이 단위로 온것이다. 재정평형을 위하여 나는 우선 연변직원들을 사회보험에 가입시켜 1년에 10만원 이상의 혜택을 받았다. 또 유관인사들을 통해 성재정과 관계를 달아 사무청사의 장식비용도 일정하게 해결받았다. 사회각계의 지원으로 신문사 성립 15주년에는 나의명으로 기업의 지원 6만원을 받고 본때스레 15주년을 경축한 동시에 그해 7월 28일에 새 사무청사에 입주하였다. 그해 년말에는 재정위기에서 기본상 벗어났다. 2000년도에는 신문사 제3산업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단위의 수입을 증가하고 직원들의 주택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우선 당조에서 충분히 토론하고 중층간부이상 행정회의에서 여러번 토의하여 한국 친구들의 협조를 받아 한국의 모형제조회사와 식용균생산농장과 합자기업을 세우기로 하였다. 제3산업 주관인 박문희부주필과 함께 한국에 가서 유관부문과 담판하여 모형제조회사에 로무일군 10명을 파견하고 식용균농장에 5명을 파견하기로 협의를 보았다. 파견일군들에게서 톡톡한 수입이 들어온다. 식용균전문가를 청하여 한국에 보냈다. 이외 직원들의 자원 집금으로 19만원 5천원을 주고 연길에 4000여평방기지에 2400평방되는 건물도 사놓았다. 여기에 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기회를 보아서 주택을 지을 예정이였다. 그후 성에 우리 신문을 귀속시키면서 조선족신문사에 력사상 처음으로 문화혁명때와 비슷한 “타민족관제”가 실시되였다. 그 지도자 분들은 불문곡식하고 알심들여 조직한 제3산업을 거둬장지였다. 로무일군들에게서 거둔 비용 12만 5천원 중 비자 비용으로 3만원 버섯균종을 한국에 수출하는데 식용표전문가와 두 주필의 한국행, 한국분들의 비용 등에 5만원이 지출되였다. 단위 직원들 로임지출에 2만원을 돌려썼다. 아직 2만여원이 남아있었다. 원래 생활이 곤난한 로무일군들은 출국못하게 되자 돈을 돌려달라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지도자분들은 나의 여러차례의 유관사업인계 요구를 무시한채 나 개인에게 억지로 죄를 덮어씌우며 그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나는 나의 개인 돈 근 4만원을 털어 일부분 환불해주었다. 공장기지도 기어코 처리하겠다고 하여 내가 나서서 원값에 팔아주었다. 그 건물을 산 사람은 1년반후 75만원에 되넘겨 팔아 순수입 50만원이상 벌었다. 이돈은 우리 집금인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만… 2000년도 말에는 직원들의 주택개혁을 시작하였다. 장춘의 일부 로간부들은 연길에 집을 마련해주기도 하고 돌려보내고 집없는 장춘 골간 청년들에게 집을 주었다. 이미 단위의 집을 차지하고있는 직원들은 유관 정책에 따라 집을 값을 쳐서 개인소유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면 두곳의 집값은 60만원 좌우 거두어 들일수 있었다. 거기에 일정하게 집금하면 2001년에는 길림신문사 주택을 얼마든지 일떠 세울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도 “타민족관제” 지도자들로 부터 묵인되여 버렸다. 그때 집없이 연길로 간 분들과 도처에서 돈을 주어서 집값을 낸 분들한테 항상 죄송스럽다. 2000년도 말, 이미 퇴직한 분들과 최혜순, 량고범 등 단위의 훌륭한 고문들은 다음해에는 방법을 대여 우리신문사를 성에  귀속시킬것을 제의하였다. 합리한 건의였다. 행정령도는 연변자치주에서 재정지출은 성에서 이는 성신문사로서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았다. 12월말 림열지(조선족과 관계가 상당히 좋은 해방시초 동북국서기 림풍의 아들)가 선전부문을 주관하는 성위 부서기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은 기회였다. 일주일 동안 성위 반공청에 드나들다 끝내 림서기를 만났다. 아주 통쾌한 분이였다. 그는 조동해온지 15일도 안되는데 꼭 이 문제를 길림성에 조동에 온후의 첫 사업으로 락착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나를 데리고 직접 길림신문집단에 찾아가서 유관인원들을 만나 구체방안을 토의하였다. 그때 나는 성급신문으로서의 우리 신문은 아직 현퇀급이니 이것도 불합리하다고 하였다. 길림신문집단의 10대신문은 모두 청급단위인데 우리도 응당 그에 따라야하지 않겠는가? 림서기는 확실히 격에 맞지 않으니 성에 귀속시키면서 해결하자고 하였다. 길림신문집단에서 우리 신문을 입수할 책임을 진 분은 말끝마다 인원을 감소하고 연질거점에 몇명만 주재기자형식으로 남기자 하였다. 나는 갖은 리유를 대면서 그렇게 하면 민족정책에도 맞지 않고 우리 신문사에도 유리한것 없다 강력히 주장하였다. 내가 개혁의 제일 큰 장애물이 된것이다. 아니나다를가 성위당위 판공회의에서 개혁의 제1조목으로 차룡수 사장부터 따돌린다하였다. 그후 사업교대도 없고 면직령도 없이 말할기회도 안주고 9개월간 취업대기를 하였다. 얼마후 과연 연길의 20명간부들은 (8명 퇴직간부포함) 주요골간 최혜순 한창 발전중에 나어린 골간였던 최승호, 김청수를 포함하여 몽땅 밀어냈다. 그후 나는 이 20명 직원들을 볼때마다 죄책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일부분 사람들은 내탓에 쫓겨난 신세가 됐다고 나를 욕지거리하였다. “같은신세이면서도”… 그후 또 15년이 지나갔다. 우리 신문사는 아직도 현퇀급이라니 이게 무슨 민족정책인지 모르겠다. 내가 주관할 때 신문사업에도 여러분들의 덕분에 많은 진전을 가져왔다. 우선 발행량이 력사기록을 훨씬 돌파하였다. 광고사업도 크게 발전하였다. 또 한정일 주임의 노력으로 대외 활동이 대단히 활발해졌다. “인터불”컵 조선족 해외수기 공모, 조선족학생 미술콩클…등 큼직큼직한 활동들이 외국인들의 지원으로 빈번히 전개되여 우리 신문의 지명도는 대단히 올라갔다. 길림신문 서울지국(유일한 한국동포신문지국)장 류재복의 노력으로 나와 박문희 부주필은 청와대를 방문하였다. 김대중대통령이 접견하기로 하였는데 특수 사연으로 하여 그의 대변인 박준영을 만났다. 우리는 중국조선족 대변인 각도로 “페스카마호사건”주모자 전재천의 사형을 견결히 반대한다는 주장, 한국에서의 우리 조선족의 지위를 높여주어야 한다는 등 주장을 강력하게 제의 하였다. 이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다. 이외 박문희부주칠의 노력으로 중국에서의 한국인들을 위한 우리신문의 부간 “동북저널”을 출간하였다. 또 리원철부주필의 노력으로 우리 민족이 집결해있는 청도에도 우리신문부간을 내놓았다. 더욱 큼직한 일은 김성걸기자의 애타는 노력으로 최소의 비용을 들여 전성 최초로 우리신문 사이트를 개통하였다. 그때 길림일보도 사이트를 개통하지 못하였다. 이것 역시 나의 죄장으로 되여 얼마후 제지 당하였다고 한다. 급급히 ㄲㅂ겨나는 통에 신형사업에 공헌이 큰 이상의 친구들에게 보답하지도 못했다. 길림신문사에서 밀려난지 어느덧 열다섯해가 된다. 우리직원들을 위하여 좋은 일 할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놓친것으로 하여 항상 가슴이 아프다. 차룡수 1999년 2월부터 2001년 2월까지 2년동안 길림신문사 사장 겸 주필 담당시 잘한일들은 기억에 아리숭한데 책임을 다 못하여 직원들에게 미안한 일들을 저지른것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1999년 3월 장춘 우리 신문사에 도착한 나는 크게 놀랐다. 성재정에서 500만원을 투자하여 세운 사무청사는 주체만 달랑 일떠세운채 장식에 손도 못대고 추위에 떨고있었다. 성도라하여 옮겨온 박문희부주필 등 여러 직원들의 주택들은 난방도 보장받지 못하고 꽁꽁언채로 겨울을 보내고있었다. 세맡은 사무실은 어느 파산된 기관단체같이 썰렁하였다. 신문사 재정은 적자운영으로 몇달동안 인쇄비도 갚지 못하고 직원들의 로임도 제기한에 발급하지 못하고있었다. 내가 간 두달후에는 지방법원에서 1임사장시기의 외채 10만원을 강제집행하여 몰수해갔다. 1년에 근 1억원을 다스리던 단위의 법인이던 내가 1전한푼 없는 가난뱅이 단위로 온것이다. 재정평형을 위하여 나는 우선 연변직원들을 사회보험에 가입시켜 1년에 10만원 이상의 혜택을 받았다. 또 유관인사들을 통해 성재정과 관계를 달아 사무청사의 장식비용도 일정하게 해결받았다. 사회각계의 지원으로 신문사 성립 15주년에는 나의명으로 기업의 지원 6만원을 받고 본때스레 15주년을 경축한 동시에 그해 7월 28일에 새 사무청사에 입주하였다. 그해 년말에는 재정위기에서 기본상 벗어났다. 2000년도에는 신문사 제3산업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단위의 수입을 증가하고 직원들의 주택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우선 당조에서 충분히 토론하고 중층간부이상 행정회의에서 여러번 토의하여 한국 친구들의 협조를 받아 한국의 모형제조회사와 식용균생산농장과 합자기업을 세우기로 하였다. 제3산업 주관인 박문희부주필과 함께 한국에 가서 유관부문과 담판하여 모형제조회사에 로무일군 10명을 파견하고 식용균농장에 5명을 파견하기로 협의를 보았다. 파견일군들에게서 톡톡한 수입이 들어온다. 식용균전문가를 청하여 한국에 보냈다. 이외 직원들의 자원 집금으로 19만원 5천원을 주고 연길에 4000여평방기지에 2400평방되는 건물도 사놓았다. 여기에 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기회를 보아서 주택을 지을 예정이였다. 그후 성에 우리 신문을 귀속시키면서 조선족신문사에 력사상 처음으로 문화혁명때와 비슷한 “타민족관제”가 실시되였다. 그 지도자 분들은 불문곡식하고 알심들여 조직한 제3산업을 거둬장지였다. 로무일군들에게서 거둔 비용 12만 5천원 중 비자 비용으로 3만원 버섯균종을 한국에 수출하는데 식용표전문가와 두 주필의 한국행, 한국분들의 비용 등에 5만원이 지출되였다. 단위 직원들 로임지출에 2만원을 돌려썼다. 아직 2만여원이 남아있었다. 원래 생활이 곤난한 로무일군들은 출국못하게 되자 돈을 돌려달라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지도자분들은 나의 여러차례의 유관사업인계 요구를 무시한채 나 개인에게 억지로 죄를 덮어씌우며 그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나는 나의 개인 돈 근 4만원을 털어 일부분 환불해주었다. 공장기지도 기어코 처리하겠다고 하여 내가 나서서 원값에 팔아주었다. 그 건물을 산 사람은 1년반후 75만원에 되넘겨 팔아 순수입 50만원이상 벌었다. 이돈은 우리 집금인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만… 2000년도 말에는 직원들의 주택개혁을 시작하였다. 장춘의 일부 로간부들은 연길에 집을 마련해주기도 하고 돌려보내고 집없는 장춘 골간 청년들에게 집을 주었다. 이미 단위의 집을 차지하고있는 직원들은 유관 정책에 따라 집을 값을 쳐서 개인소유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면 두곳의 집값은 60만원 좌우 거두어 들일수 있었다. 거기에 일정하게 집금하면 2001년에는 길림신문사 주택을 얼마든지 일떠 세울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도 “타민족관제” 지도자들로 부터 묵인되여 버렸다. 그때 집없이 연길로 간 분들과 도처에서 돈을 주어서 집값을 낸 분들한테 항상 죄송스럽다. 2000년도 말, 이미 퇴직한 분들과 최혜순, 량고범 등 단위의 훌륭한 고문들은 다음해에는 방법을 대여 우리신문사를 성에  귀속시킬것을 제의하였다. 합리한 건의였다. 행정령도는 연변자치주에서 재정지출은 성에서 이는 성신문사로서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았다. 12월말 림열지(조선족과 관계가 상당히 좋은 해방시초 동북국서기 림풍의 아들)가 선전부문을 주관하는 성위 부서기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은 기회였다. 일주일 동안 성위 반공청에 드나들다 끝내 림서기를 만났다. 아주 통쾌한 분이였다. 그는 조동해온지 15일도 안되는데 꼭 이 문제를 길림성에 조동에 온후의 첫 사업으로 락착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나를 데리고 직접 길림신문집단에 찾아가서 유관인원들을 만나 구체방안을 토의하였다. 그때 나는 성급신문으로서의 우리 신문은 아직 현퇀급이니 이것도 불합리하다고 하였다. 길림신문집단의 10대신문은 모두 청급단위인데 우리도 응당 그에 따라야하지 않겠는가? 림서기는 확실히 격에 맞지 않으니 성에 귀속시키면서 해결하자고 하였다. 길림신문집단에서 우리 신문을 입수할 책임을 진 분은 말끝마다 인원을 감소하고 연질거점에 몇명만 주재기자형식으로 남기자 하였다. 나는 갖은 리유를 대면서 그렇게 하면 민족정책에도 맞지 않고 우리 신문사에도 유리한것 없다 강력히 주장하였다. 내가 개혁의 제일 큰 장애물이 된것이다. 아니나다를가 성위당위 판공회의에서 개혁의 제1조목으로 차룡수 사장부터 따돌린다하였다. 그후 사업교대도 없고 면직령도 없이 말할기회도 안주고 9개월간 취업대기를 하였다. 얼마후 과연 연길의 20명간부들은 (8명 퇴직간부포함) 주요골간 최혜순 한창 발전중에 나어린 골간였던 최승호, 김청수를 포함하여 몽땅 밀어냈다. 그후 나는 이 20명 직원들을 볼때마다 죄책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일부분 사람들은 내탓에 쫓겨난 신세가 됐다고 나를 욕지거리하였다. “같은신세이면서도”… 그후 또 15년이 지나갔다. 우리 신문사는 아직도 현퇀급이라니 이게 무슨 민족정책인지 모르겠다. 내가 주관할 때 신문사업에도 여러분들의 덕분에 많은 진전을 가져왔다. 우선 발행량이 력사기록을 훨씬 돌파하였다. 광고사업도 크게 발전하였다. 또 한정일 주임의 노력으로 대외 활동이 대단히 활발해졌다. “인터불”컵 조선족 해외수기 공모, 조선족학생 미술콩클…등 큼직큼직한 활동들이 외국인들의 지원으로 빈번히 전개되여 우리 신문의 지명도는 대단히 올라갔다. 길림신문 서울지국(유일한 한국동포신문지국)장 류재복의 노력으로 나와 박문희 부주필은 청와대를 방문하였다. 김대중대통령이 접견하기로 하였는데 특수 사연으로 하여 그의 대변인 박준영을 만났다. 우리는 중국조선족 대변인 각도로 “페스카마호사건”주모자 전재천의 사형을 견결히 반대한다는 주장, 한국에서의 우리 조선족의 지위를 높여주어야 한다는 등 주장을 강력하게 제의 하였다. 이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다. 이외 박문희부주칠의 노력으로 중국에서의 한국인들을 위한 우리신문의 부간 “동북저널”을 출간하였다. 또 리원철부주필의 노력으로 우리 민족이 집결해있는 청도에도 우리신문부간을 내놓았다. 더욱 큼직한 일은 김성걸기자의 애타는 노력으로 최소의 비용을 들여 전성 최초로 우리신문 사이트를 개통하였다. 그때 길림일보도 사이트를 개통하지 못하였다. 이것 역시 나의 죄장으로 되여 얼마후 제지 당하였다고 한다. 급급히 ㄲㅂ겨나는 통에 신형사업에 공헌이 큰 이상의 친구들에게 보답하지도 못했다. 길림신문사에서 밀려난지 어느덧 열다섯해가 된다. 우리직원들을 위하여 좋은 일 할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놓친것으로 하여 항상 가슴이 아프다. 차룡수
4    이런 효자도 있는지 댓글:  조회:1333  추천:1  2015-11-14
        나를 아는 모든 친척, 친구들과 이웃들은 나를 대단한 효자로 본다.         그도 그럴것이20년도 넘게 해마다 자기의 생일을 안쇠고 대신 아버지 로친네 생일을 쇠여 드렸으니깐.         엄마가 운신하기 힘들어 하고 사유가 좀 흐트러지기 시작하니 나는 엄마를 모시고 안해가 법인인 경로원에서 6년나마 동무해 드리느라 했다.         87세 되여 엄마는 치매에 걸려 뒤가 흐트러지는것도 몰랐다. 뒤를 검질해주는 나의 안해를 되려 욕한다. 목욕시켜 드리자 해도 한바탕 전투를 해야 한다.         “어제 금방 했다. 이 아매하구 물어봐라. 너네 나를 머저리로 보재? 시끄럽다. 시끄럽다…”하면서 마구 욕지거리를 해댄다. 때로는 한방에 있는 할머니의 옷을 자기것이라 하며 빼앗기도 하고 자식들이나 친척들이 위문오면서 가져온 맛갈스러운 음식을 곁에 할머니를 드리면 눈을 부릅뜨고 불만을 토한다. 남은 음식은 기어코 이불밑에 감추어 놨다가 증손들을 주라고 하면서 나에게 떠맡긴다. 받아서 옆에 할머니(치매할매)에게 드리면 또 욕지거리다. “그 로친네 그리 곱으믄 콱 데리구 살아라. 제 새끼들도 돌볼줄 모르는게…”나는 밸을 참지 못하고 맞받아 욕지거리를 한다. “엄마는 왜 자기밖에 모르오. 에잇, 아부지도 고생했겠다…”         정신이 흐트러진 엄마와 싸움질 하는 내가 우습기도 하다.         엄마는 젊어서부터 제집 욕심밖에 차릴줄 몰랐다. 생산 대장인 아버지가 식량이 곤난한 이웃들에게 쌀을 좀 주어도 욕지거리, 시내에 있는 친척이나 신세진 친구들에게 맛보라고 햇입쌀을 퍼주어도 욕지거리다.         이 나라가 가장 곤난할 때 일이다. 도살장에 친구가 있는 아버지가 시내 사촌 형님네한테 돼지 대가리를 얻어준적이 있다. 며칠후 엄마가 사촌형님에게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이것이 큰 화근이 되여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 사흘동안 절식하면서 숟가락도 들지 않았다.         이래저래 엄마에 대한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두돐이 되여 내가 한창 젖을 파먹을 때 아래 동생을 덜렁 낳아서 젖도 맘껏 못먹고… 내가 어릴 때에는 아버지하고 싸움하고는 나한테 분풀이 한다. “이 머저리 같은 새끼야, 제 에미 맞아대도 말릴줄 모르는 쌔끼. ”비자루를 찾아 쥐고 패댄다. 내가 누나를 때려도 나를 뚜드려주고 내가 동생들을 때려도 나를 혼찌검 내주고. 나는 엄마가 때리려고 비자루를 쳐들기만 하면 제꺽 앞마당의  물도랑을 살짝 뛰여건너 건너쪽 도랑뚝에 걸터 앉는다. 때리지 못하니깐 또 욕지거리로 성풀이를 한다. “조고 조고 보리만티(내가 똥똥하다고) 같은게…”         나는 해쭉해쭉 웃으면서 “못 때리겠지, 못 때리겠지…”하고 골려준다.         듣자니 다른집 엄마들은 맛있는것이 있으면 맏아들부터 준다한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큰것들은 먹지말아. 쪼꼬만 아이들이나 주게”라고 한다. 그덕에 어려서부터 사탕, 과자의 맛이 어떤지 모른다.         한창 진보도 전쟁때 군대가는 나를 보내면서 성격이 강하기로 소문난 아버지도 돌아서서 눈꿉을 찍는데 엄마는 “영광스러워서” 그렇게 기분 좋아했다. 내가 제대하여 돌아와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하니 아버지가 닭알 한소래를 가져다 기름에 틔워 먹여라 하였다. 엄마는 한꺼번에 큰 사발 하나씩 틔워주었다. 아마도 동생들과 나눠먹으라는것 같았다. 그때 고모가 나를 몸춰세우라고 씨암탉 한마리를 가져왔다. 남의 엄마같으면 제꺽 닭곰이라도 해서 먹이겠는데 온집식구가 먹기에 성차지 않는지 그냥 내버려 뒀다가 족제비 체메에 든적이 있다.         나이를 처먹고 서방비위가 나서 동창생녀자(지금 안해)를 데려왔더니 빽 돌아앉아서 인사도 안 받았다. 그가 간 다음 “무슨 새기가 없어서 저런 떼놈간나 같은걸 데려왔니? 서방 못갈가봐 걱정이야.”하면서 또 욕지거리다.         그통에 아버지가 없지 동생들이 넷씩이나 도는 내 처지에서  요행 장가 갔다.         안해가 들어온 후에는 안해가 퇴근하기전에 밥하는 법이 없었다. 불만 때고…         두번째에도 딸을 나으니 한이틀 시중하더니 모르는척하였다.         나는 평생 엄마를 아니꼽게 보았다. 남들에게 소개할 때도 엄마라 안하고 아버지 앙까이라고 한다.         그래도 아리숭하게 나마 좋은 인상도 좀 있다. 우리 마을 나보다 힘쎈 나먹어리 애들이 나를 때려본적 없다. 내가 싸움질 할때면 어느새 달려와서 역성들어 준다. “개새끼 같은 아새끼들아, 어째 쪼고만 아를 때리자하니. 털끝하나 다쳐봐라. 다 죽여 치운다.”         나를 감동시킨적도 있다. 문화혁명 때 연길시에서 8.2, 8.4대폭란이 일어났다. 나는 제딴엔 혁명하느라 련 며칠째 전투판에서 떠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워댔다.         엄마는 나를 찾아 연변일중, 하남당교, 주정부, 주위, 빈관… 온시내를 걸어서 참빗질 한다. 어떻게 찾았는지 주빈관에서 나를 찾아내서 집으로 끌고갔다. 그덕분에 그번 전투에서 같이 한칸에서 자던 세 친구가운데 한 전우는 “희생”되고 한 전우는 부상당했지만 나는 멀쩡하였다. 친구들한테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이런 엄마덕분에 우리집 촌놈자식 6남매중 대학생이 4명이 나오고 박사도 나오고 퇀장급 간부도 나왔다. 나도 그 엄마 성격을 닮았는지 항상 약자들편에 서고 어느 친구가 누구한테 맞았다하면 기어코 찾아가서 복수하여준다. 내 동생들과 자식들에 대한 요구도 대단히 높고, 좀 출세한후에는 하급들을 구별없이 대해 줄줄도 알았다.          한평생 미워하던 엄마가 2년전 령감보러 갔다.  나는 자식구실 하느라고 친척, 친구 120명도 넘게 청하여 평범한 생산대장의 로친네 장례를 좀 굉장하게 치뤄드렸다. 때늦게나마 효성하느라고.         지금도 장마당을 돌다가 감자떡을 보면 “엄마가 좋아했는데…”또 싱싱한 풋파를 보고도 “엄마를 사주었으면…”구운 고구마를 봐도…늦게 나마 셈이 드는지…          나를 효자로 보는 분들에게 미안하다. 이세상에 나처럼 엄마에게 불평 많은 효자도 있는지?
3    중한사전의 편찬과 번역에 관하여 2 댓글:  조회:1127  추천:2  2014-09-23
중한사전의 편찬과 번역에 관하여   2                                  남광철     필자는 2014년 제1기에 중한사전(흑룡강성 조선민족출판사 출판, 2012.8월)의 편찬과 번역을 둘러싸고 이미 첫 편의 론문을 발표하였다. 이제 그 계속으로 11-20페이지 부분에 관하여 일부 의견을 더 발표하려 한다.   (11폐이지)【安检】ānjiăn 動 안전검사하다. “安全检查”의 준말. ¶机场~人员;공항 안전검사원. /贩毒者被~抓获;마약 밀매자들이 안전검사 과정에서 붙잡혔다. 사전은 “安检”을 동사(动词)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고해야 할 문제는 “安检”이 “安全检查”의 준말이라는 것이다. 만약 “安全检查”를 동사로 본다면 동사 성분은 바로 “检查”에서 온 것이다. 왜냐하면 “安全”은 형용사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원래의 동사로 풀이한다면 그 역문은 응당 “안전하게 검사하다”로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安全检查”란 단어결합의 진정한 함의는 “안전분야의 검사(행위)”, 또는 “안전분야의 검사인원(기관)”이란 뜻이다. 바로 “纪检”이 “纪律检查”의 준말인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이 경우 “纪检”은 “규률분야의 검사”, 또는 “규률분야의 검사기관”이라는 뜻이다. 례를 들면 “腐败嫌疑人被纪检调查”에서 “调查”는 동사이고 “纪检”은 조사 행동의 실시자 즉 규률검사기관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명심하여야 할 바는 이 단어결합은 바로 동사를 명사식으로 차용(借用)하기 위하여 취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는 중국어의 단어결합에서 늘 보는 현상이다. “贩毒者被~抓获”라는 “主谓结构(주어술어 구조)” 구절에서 동사술어는 “抓获”이다. 여기에서 “安检”은 “붙잡는” 동작을 주동적으로 실시한 측, 즉 주동자를 가리키지 동사가 아니다. 결론은 매우 간단하다. 즉 “ 名 안전검사”로 되어야 한다. 이외에 보충할 점은 “마약 밀매자들”이다. 원문에서는 복수토 “들”을 가해야 할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2. 【安靖】ānjìng 形文 (사회가) 안정되다. ¶边陲~;변경이 안정되다. “安靖”은 형용사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사회가) 안정하다.”로 해석하여야 한다. 그런데 사전은 동사 “안정되다”로 해석하였다. 왜 이렇게 형용사를 동사로 돌려 해석해야 하는가? 아무런 리론적 근거도 없다. 3. (올림말 “安静”의 부록 부분) 注意:“平静”과의 차이점: “安静”은 사람의 행위·동작·환경을 형용하고 “平静”은 사람의 심정·표정 또는 사회·국가의 질서 등에 쓰인다. “安静”과 “平静”이 이런 차이점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아래의 한어대사전 례문을 보기로 하자. “玄至镇,休兵养士,然后督诸将守讨击胡虏及伯固等,皆破散退走。在职三年,边境安静。”(교현은 진에 이르러 병사들을 휴양시킨 후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외적과 백고(伯固) 등을 토벌하여 모두 패전 퇴각하게 하였다. 재직 3년 간에 변강은 안정하였다.” “林白霜渐渐安静下来了。”(림백상은 점차 안정을 회복하였다.) “安静”에 관한 상기 2개 례문, 즉 “변강이 안정되었다.”는 말과 주인공의 심정이 점차 안정되었다는 내용은 바로 사회의 질서와 사람의 심정에 대하여 쓴 것이다. 즉 상기 “注意”에서 말하는 범위 내에서 “安静”과 “平静”은 예로부터 동의어로 사용되여 왔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이 그 사용 의미를 분류하는 것은 도리가 없다. 더욱 불가사의한 일은 (제1503페이지) 올림말 “平静” 부분에서 사전은 “국가나 사회의 질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도 않은 것이다. 4. 【安居乐业】ān jū lè yè 成 안거낙업. 평안히 살면서 즐겁게 일하다. 이 올림말은 성어(成语)인데 아무런 례문도 주지 않았다. 이는 독자들의 리해와 실용에 불리하다. 그러므로 적당한 례문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례를 들면 “¶削平祸乱,乡村人各各~;난리를  평정하니 향촌 사람들은 저마다 평안히 살면서 즐겁게 일하고 있다.”와 같은 것이다. 5. 【安澜】ānlán 形文 ······¶天下~,比屋可封;천하가 안정되고 태평스러워 집집마다 덕행에 힘쓰다. (土褒«四子讲德论») 여기에서 “안정되다”는 동사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하였기에 중복하지 않는다. 그 뒤의 “태평스럽다”는 형용사이다. “安澜” 자체가 형용사이므로 역문을 “천하가 안정하고 태평스러워”로 하여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덕행에 힘쓰다.”에서 “힘쓰다.”는 동사의 원형으로 되었다. 이렇게 긴 구절에서 마지막 종결에 쓰이는 말을 동사 원형으로 처리함이 합리하지 못하다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다. 문제는 본 페이지【安降】ānjiàng에서 출현된 “¶~机场;공항에 안전하게 착륙하였다.”이다. “安降机场”은 동사와 그 목적어의 간단한 단어결합이다. 이 경우 시간적인 결과를 고려할 필요가 없이 “공항에 안전하게 착륙하다.”로 처리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서술형으로 처리하여야 할 곳에서는 동사의 원형으로 처리하고 원형으로 처리하여야 할 곳에서는 서술형으로 처리하니 전반 문체가 매우 혼란하게 되었다. 간단한 것 같지만 이 역시 매우 중시하여야 할 문제이다. 다음, 례문의 출처에서 그 저자는 “土褒”인데 이런 사람이 대체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잘못 쓴 글자인셈 칠 수도 있지만 문제는 대사전도 아닌 이 사전에서 왜 반드시 례문의 출처를 밝혀야 하는가이다. 적지 않은 례문에서는 그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서도 왜 일부 례문에서는 이렇게 까다로운 출처를 밝혀야 하는지가 의문이다. 한국 고려대학교 민족문학연구소에서 출판한 은 일체 례문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사전의 품위, 수준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왜서 그러한가? 그것은 바로 사전 자체의 용처에 의한 것이다. 즉 상기 은 중국어 학습 및 보급을 위한 교재이지 중국 문학사를 연구하는 자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출처를 비롯한 많은 자료는 《汉语大词典》,《辞海》와 같은 사전에서 망망대해와도 같이 얼마든지 제공하고 있다. 중사전 규모인 은 중국어 초학자나 중등 수준의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참고 교재로서 례문의 출처를 밝힐 필요가 없다는 점은 구구히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6. 올림말 “安乐椅”,“安眠药”,“安全玻璃”,“安全带”,“安全岛”,“安全门”,“安全梯”. 이상 몇 개 올림말은 전부 명사이다. 사전은 전부 례문이 없이 주로 대역본 식의 명사로 종결지었다. 대응되는 한국어 명사로 올림말을 해석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고 또 얼핏 보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한 명사이기 때문에 더 복잡해지는 것이다. 즉 “안락의자”나 “수면제” 같은 단어는 매우 쉬운 말이지만 그것을 독자가 중국어로 단문을 지으려고 한다면, 즉 실제로 응용하려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사전은 전반 체계로부터 볼 때 올림말에 례문을 주는 것으로 독자의 리해를 돕는 동시에 특히 독자가 올림말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독자의 사유 범위를 확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한 례문, 즉 주어와 술어, 동사와 목적어 같은 단어결합 식의 례문이라도 올리는 것이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 경우 아래와 같은 간단한 례문들을 준다면 쉽사리 독자를 완전히 새로운 경지에로 이끌 수 있다. 례문: “他在安乐椅上睡着了。”(그는 안락의자에 앉은 채 잠들었다.),“服用安眠药”(최면제를 복용하다.), “安全玻璃的透明度不亚于普通玻璃“(안전유리의 투명도는 보통유리보다 못하지 않다.),“乘车要按规定系安全带”(승차 시에 반드시 규정대로 안전벨트를 매야 한다.),“在几十米宽的马路中间设置两米多宽的安全岛”(수십 미터 너비의 신작로 중간에 2미터 남짓한 너비의 안전지대를 설치하였다.),“在地铁安装安全门系统。”(지하철에 비상문 시스템을 가설한다.),“车辆上装有移动式安全梯”(차량 위에 이동식 철제 계단이 가설되어 있다.)。 그외 첨부할 문제는 올림말 “安全梯” 뒤에 붙인 자이다. 즉 이것은 “광업”에서 쓰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이는 시종 건물에 설치하는 안전 시설이다. 차량에 설치하는 것은 개별적인 실례이다. “광업”이라고 덧붙인 것은 책임감이 부족한 문제이다. 다음, 사전은 “비상용 계단”이라고 하였는데 실제는 “비상용 철제 계단”이라고 밝혀야 한다. 왜냐하면 그 재료는 반드시 비연소 재료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생활에서 건물에 쓰이는 비연소 재료라면 철제밖에 없으니 여기에서 철제라고 밝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7. 安全剃刀 ānquán tìdāo →[保险刀] 여기에서 올림말 “安全剃刀”에 해석을 가하지 않고 그저 화살표로 “保险刀”에 련계시키고 있다. 이런 경우 이것이 동의어라 할지라도 대역식의 해석 한마디만은 주는 것이 좋다. 독자들이 수고스레 찾아보았는데 만약 대역식의 해석만을 요구한다면 그저 “안전면도”라는 말 한마디면 바로 해답을 찾아 다시 수고스레 화살표를 따라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먼 74페이지를 따라 가서 다시 “保险刀”를 찾은 결과이다. 사전은 그 해석을 “안전면도기”라 하고 아무런 례문도 주지 않았다. 례문 이야기는 중복하지 않더라도 “안전면도기”라는 해석만은 의문을 가득 가져다 준다. 한국 에 “면도기”라는 말이 없다. “안전”과 결합할 경우 역시 “안전면도”는 대사전에 올렸지만 “안전면도기”라는 말은 없다. 그러면 어디에서 “면도기”가 왔는가? 혹시 민간용어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상관없이 그 어떤 근거도 없는 이런 말은 독자를 의혹에 빠뜨릴 뿐이다. 8. 安全填埋 ānquán tiánmái 안전하게 매립하다. 안전하게 파묻다. ¶ 污染物要做到~:오염물은 안전하게 매립해야 한다. 이 올림말은 별 문제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安全填埋”는 그저 파묻는 것과는 좀 다르다. 즉 “오염물, 유해물질”에 대하여 쓰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석 뒤에 “(위험 폐기물 또는 유해 폐기물에 대하여 쓰임)”이라고 밝혀두는 것이 좋다. 9. 【安身】ān / shēn 動① 몸을 붙이다. 몸을 의탁하다.[어려운 처지에 많이 쓰임] ¶无处~;몸을 의탁할 곳이 없다. ②文 안신하다. 거처하다. 몸을 편안하게 하다. ¶今夜哪里去~?: 오늘 밤은 어디 가서 편히 잠잘까? ③文 입신(立身)하다. 출세하다. ¶人无刚骨,~不牢;속담에 “사람이 힘이 없으면 처신을 바로 하지 못한다”고 했어요.(施耐庵 «水浒传») 제2부분은 얼핏 보면 실수한 것 같다. 즉 문언문이라고 밝혀놓고서도 례문은 도리어 현대문 실례를 든 것이다. 그런데 중국어 사전과 대조하면 간단한 실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올림말은 제3부분의 문언문 해석을 제하고도 기실 또 하나의 문언문 해석이 있다. 즉 “몸을 보존하다. 몸을 의탁하다.”이다. 거기에 든 례문은 이러하다. “子之来也,非欲~也,为国家之利也,故不惮勤远而听于楚。”(그대가 온 건 몸을 의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리익을 위해서외다. 그렇기에 그 먼길의 로고를 두려움없이 초나라에 와서 이런 말들을 듣는 것이외다.) 이로부터 보면 제2부분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안신하다. 거처하다. 몸을 편한하게 하다.”는 해석은 기실 제1부분 해석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제2부분은 제1부분과 함께 해석하고 례문도 2가지를 다 포괄시킬 수 있다. 즉 “今晚只好在破庙里~了。”(오늘 저녁은 낡은 절에서 거처할 수밖에 없다.) 다음은 문언문이라는 동그라미 ‘文’자 문제이다. 문언문 용법이라 해서 고정불변으로 그냥 문언문이라고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 사용 빈도가 점차 높아지면서 고대 어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현대 어휘에로 전화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은 기본적으로 현대화되어 현대의 많은 소설, 저서들에서 상용하고 있다. 제3부분의 역문 문제: 속담에 “사람이 힘이 없으면 처신을 바로 하지 못한다”고 했어요. 국어대사전에서 “처신”을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몸을 가지는 일. 행신(行身).”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나 자신의 행실(구실)을 하다.”로 리해할 수 있다. 그런데 올림말의 해석은 “립신하다”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다른 차원의 해석이다. 즉 “나 자신의 행실(구실)”이 아니라 그에 의거하여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 번역은 응당 “사람은 굳센 의지가 없으면 사회적으로 입신할 수 없다.”로 되어야 한다. 다음, “속담에 ᠁했어요.”를 보면 이는 완전히 소설 역본 속의 대화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문제는 베끼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 역문이 잘못 번역되었다는 뜻이다. “처신”이란 주관적으로 하는 것이고 “립신”이란 객관적으로 “사회적인 인정”을 받아야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번역함은 물론 타당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명작이라 해도 사전의 례문을 번역할 때에는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정확히 번역해야 한다. 이것은 명작 역본의 역자에 대한 존중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10. 【安神】ān∥shén 動 안신하다. 정신을 안정시키다. 올림말 “安神”을 음독으로 처리하여 “안신하다”라고 했는데 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안신하다”의 한자 음독은 “安身” 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에다 “안신하다”를 달아 주었으니 두 가지 올림말이 결국은 한 가지 해석으로 되어버렸다. 즉 이 두 올림말은 동의어라는 말이 된다. 이런 저급적인 오류는 구구히 분석할 필요조차 없다. 11. 【安生】ān shēng 形 ① 안생하다. 안거하다. 편안하게 생활하다. ¶到处奔波,不得~;도처로 분주히 돌아다니게 되면, 편안히 생활하지 못한다. 례문은 짧은 두 구절의 말, 즉 “도처로 분주히 돌아다니다”와 “편안히 생활하지 못하다”로 되어 있다. 이것을 련결시키는 곳에 쉼표 “, ”를 달았는데 여기에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짧은 구절을 련결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돌아다니게 되면,”이다. 이건 “가정”의 뜻, 즉 “만약 그렇게 된다면”의 뜻이다. 그런데 원문은 그저 “到处奔波,”뿐이다. 즉 “도처로 분주히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원문은 기성 사실을 들어 설명하는 것인데 역문은 “가정”의 뜻으로 풀이하였다. 앞뒤 짧은 두 구절의 의미적인 련계를 보아도 가정의 뜻은 보아낼 수가 없다. 이 역시 분명히 보아낼 수 있는 오역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도처로 분주히 돌아다니면서 편안히 생활하지 못한다.”로 되어야 한다. 12. 【安适】ānshì 形 ① 쾌적하다. 편안하다. 호젓하다. 국어대사전에서 “쾌적하다”는 3부분으로 나누어 해석하였다. 그중 제1부분의 해석은 “심신에 적합하여 기분이 썩 좋음.”이다. 제2부분, 제3부분은 다른 차원의 의미여서 언급할 필요가 없다. 중국어 한어대사전의 해석은 “安乐舒服,安静舒适”(즐겁고 편안하다, 안정하고 쾌적하다.)이다. 그러니 첫 해석인 “쾌적하다”는 뭔가 좀 부족한 감이 든다. 역시 중국어 자체의 해석대로 하는 것이 상수이다. 두번째 해석 “편안하다”도 부족하다. 특히 세번째 해석 “호젓하다”는 너무도 동이 닿지 않는다. 국어대사전에서 “호젓하다”의 해석은 “무서운 느낌이 들 만큼 고요하고 쓸쓸하다”이다. 중국어 올림말의 원뜻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세 마디 해석은 모두 한자어식으로, 즉 단마디명창식으로 해석하였는데 이 역시 론의할 필요가 있는 일이다. 이 올림말은 한국어에 “안적(安适)하다”라는 한자어가 없는 이상 풀어서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올림말 자체에 내포된 2가지 내용을 제대로 풀이할 수가 없게 된다. 억지로 단마디명창을 추구하면 그 결과는 대혼란에 빠지게 될 뿐이다. 13. 【安守本分】ānshŏu běnfèn 안분지족하다. 편안히 본분을 지키다. 자신이 처한 지위 및 환경에 만족해하다. “안분지족하다”는 말은 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한 걸음 후퇴하여 뒤의 2가지 해석을 한곳에 집중시키기 위하여 “안분하다.”와 “지족하다.”는 한자어를 합쳐 형성하였다 하더라도 “안분지족(安分知足)하다”의 식으로 한자를 주어야 독자의 불필요한 혼란을 면할 수 있다. 다음, 이 2개 어휘의 말을 한곳에 집중한다면 좀 지저분한 감이 있으므로 국어대사전에서 올리지 않은 말은 될수록 피면하는 것이 좋다. 14. 【安泰】āntài 形 ①文 안태하다. 안정하다. 태평하다. 중국어 한어대사전에서 “安泰”의 해석은 바로 “안정하고 태평하다”이다. 즉 “안정하다”와 “태평하다”를 합쳐 풀이하여야 한다. 한국어에 “안태하다”는 한자어가 있는데 살펴보면 그 뜻이 바로 “안정하고 태평하다”이다. 그런데 왜 이 양자를 갈라서 “안태하다”와 같은 격식으로 3개의 어휘를 써야 하는가? 이 역시 단마디명창을 추구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다음, 본사전은 “安泰”를 문언문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문언문이 아닌 “安舒”라는 어휘는 왜 올리지 않았는가? 이 역시 이미 현대화되어 여러 작품들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말이다. 즉, 【安舒】ānshū 形 편안하고 쾌적하다. 마음이 편하다. 홀가분하다. ¶坐在椅子上很~;의자에 앉으니 편안하고 쾌적하다. /将来的梦想已不能~他的精神;장래의 꿈은 이미 그의 정신을 홀가분하게 만들지 못하였다. 15. 【安恬】 āntián 形 편안하다. 태평스럽다. ¶ ~地睡了一夜;편안하게 한잠 잤다. / ~度日;태평스런 나날을 보내다. 중국어 한어대사전에서 “安恬”의 해석은 “편안하고 조용하다”이다. 그것을 본사전은 “편안하다”와 “태평스럽다”로 갈라서 각각 해석하였다. 여기에서 “편안하다”는 그 해석이 좀 빠진 것이고 “태평스럽다”는 그 해석이 다른 차원에로 비뚤어졌다. 국어대사전 중 “태평(大平)”에 대한 “세상이 무사하다”는 해석이든 “태평(泰平)”에 대한 해석이든 모두 “安恬”의 본뜻과는 대등하지 못하다. “恬”자의 “마음심 변”이 말해주듯이 이 올림말은 주관적인 마음 자세와 조용한 분위기를 갈라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례문 “安恬度日”는 응당 “편안하고 조용하게 나날을 보내다”로 되어야 한다. 16. 【安妥】 āntuŏ 形① 무난하다. 타당하다. 안전하다. 이 경우 “安妥”에 대한 중국어 한어대사전의 해석은 “안전하고 타당하다”와 “안전하다”이다. 그런데 본사전은 첫번째 해석에 “무난하다”를 주었다. “무난(无难)하다”에 대한 국어대사전의 해석은 “어렵지 않다”이다. “타당하다”는 말과 “무난하다”는 말은 련결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这件事让他办很~;이 일을 그에게 맡기면 무난할 것이다”에서 역문은 응당 “이 일을 그에게 맡기면 매우 안전하고 타당하다”로 되어야 한다. 17. 【安息香】 ānxīxiāng 名① 안식향. ② 안식향나무. 사전은 “안식향”을 화학명칭으로, 안식향나무를 식물로 갈라 해석하였다. 정말 그러한가? 이건 상식 문제이다. “安息香”을 “안식향”이라 해석하였을 때 그 전체는 바로 , 즉 식물의 범주이다. 안식향은 나무를 가리키기도 하고 그 나무 껍질에서 떨어지는 액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는 “바나나”라는 명칭이 그 식물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 열매를 가리키기도 하는 것과 같은 류형에 속한다. 그외 많은 식물을 약용할 경우 그 식물 자체와 약의 명칭이 역시 같은 명칭을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화학명칭을 론의하자면 “安息香酸”을 주어야 한다. 이건 완전히 다른 경우이다. 18. 【安闲】 ānxián 形 안일하고 호젓하다. 편안하고 한가롭다. 중국어 한어대사전에서 “安闲”에 대한 해석은 바로 “편안하고 한가롭다”이다. 앞의 해석에서 “안일하고 호젓하다”를 먼저 주었는데 “호젓하다”는 앞에서 이미 언급이 되었기에 중복하지 않는다. 즉 대등하지 못하고 올림말의 원뜻과 련결이 되지 않는다. 19. 【桉】ān 안석 안 名 유칼립투스(eucalyptus).   사전은 “桉”을 식물로서 그 명칭만을 전달하였다. 설명이 부족한 감이 든다. 즉 (상록 교목으로 목질이 굳어 침목이나 갱목 등으로 쓰이며 잎과 작은 가지로는 기름을 짬)과 같은 내용을 보충설명으로 주는 것이다. 20. 【氨】ān 기체 이름 안 名 암모니아. ᠁᠁ 【氨基酸】 아미노산.  ᠁᠁ 【氨水】 암모니아수. 사전은 “氨”과 “氨基酸”과 “氨水”에 대하여 3가지 류형의 기호, 즉 “천문학”, “화학”, “농업”의 기호를 주었다. “천문학”은 오자의 실수인 듯하나 “농업”은 그런 것 같지 않다. 기실 암모니아수 역시 화학공장의 제품으로 농업에서 그것을 비료로 사용할 뿐이다. 21. 【谙练】ānliàn ①動 숙련(熟练)하다. 능숙하다. ②形 능하다. 능란하다. 사전은 제1부분에서 동사의 경우 “숙련(熟练)하다. 능숙하다”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숙련(熟练)하다”는 동사이지만 “능숙하다”는 형용사이다. 중국어 동사를 한국어 동사로 풀이해야 된다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숙하다”는 “익히다”로 바꿔야 한다. 22.  【岸标】ànbiāo  해안의 항로 표지.       【岸冰】ànbīng  연안(沿岸) 빙층(冰层).       【岸吊】àndiào  연안(沿岸) 기중기. 상기 3개 올림말은 모두 례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위에서 올림말 “岸边”에 대해서는 례문을 주었다. 기실 독자, 학생으로 말할 때 이 3개 올림말은 리해하거나 단어결합을 장악하는 면에서 모두 “岸边”보다 난이도가 크다. 그러니 역시 례문을 주어야 한다. 례: “建设塔型岸标”,탑 모양의 항로 표지를 건설하다.     “薄而透明的冰层叫做初生岸冰”,언덕에 앏고도 투명하게 깔린 얼음을 초생 빙층(初生冰层)이라 한다.     “岸吊是主要的装卸设备”,연안 기중기는 주요한 적사 장비이다. 이런 문제는 매우 많지만 다음 페이지(15)의 실례를 하나 더 들면 “按酬付劳”에서 비교적 뚜렷하게 반영된다. 이 올림말에 대하여 사전은 “보수를 주는 만큼 일을 하다.”라고 해석했을 뿐 례문을 주지 않았다. 이 올림말은 사회 생활에서 흔히 부정적인 의미로, 충고나 교양의 대상으로 쓰이므로 례문을 주지 않으면 그 무게를 파악하기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对工作不能按酬付劳,每天应该多做一点点”(근무 시 보수를 주는 것만큼만 일할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이라도 더해야 한다)와 같은 례문을 주는 것이 응당하다. 23. 【按部就班】àn bù jiù bān 成 제대로 착실히 하다. 조리 있게 착착 진행하다. 순서에 맞게 해 나가다. [본뜻은 일정한 분류·순서에 따라 문장을 구성하고 어휘를 사용함을 가리킴. 파생적인 뜻은 일을 관례대로 순서에 따라 하는 것을 가리키거나, 또는 상규에 얽매이어 창조성이 부족함을 가리킴.]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괄호 []이다. 이것은 완전히 참고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본뜻은” 또는 “파생적인 뜻은” 그저 참고로 제공할 뿐이고 실제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언어의 발전은 항상 사회의 발전과 같은 보조를 취한다. 또한 실제 생활에서 2대 부류는 모두 정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경우 번호①과 ②를 달지는 않더라도 동등하게 설명하고 례문도 동등한 자격으로 주어야 한다. 즉 “有些职工只是在意工薪,做什么工作都是~;일부 직원들은 노임에만 신경을 쓰면서 항상 규정에만 얽매이어 일한다.”와 같은 것이다. 24. 【按揭】ànjiē 動 저당 할부. 이 역시 동사를 명사로 해석하는 문제이다. 응당 “저당 할부로 대부하다.”로 되어야 한다. 25. 【按需分配】ànxūfēnpèi 수요에 따라 분배하다. 이 올림말은 공산주의 사회의 분배원칙을 가리킨다. 비교적 높은 차원에서 경제학을 접촉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일반적인 한국어 독자는 그 용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역시 례문을 주어야 한다. ¶ 共产主义实行各尽所能,~的原则;공산주의는 각자는 능력을 다하고 수요에 따라 분배하는 원칙을 실시한다. 26. 【案】àn B) ④ (중대한 사회적) 사건. ¶ 五卅惨~;오삼십 참사사건. 사전은 “惨案”을 “참사사건”으로 번역하였다. 국어대사전에서 “참사(惨死)”는 “아주 참혹하게 죽음”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대한 사회적) 사건과는 대등하지 못하다. 게다가 더욱 불가사의한 일은 “참사하다”로 쓰일 경우 이는 자동사라는 점이다. 즉 저절로 참혹하게 죽었다는 뜻이다. 세상이 다 아는 학살 사건을 “저절로” 죽은 사건으로 풀이하다니, 이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5·30대학살(또는 학살사건)”이라고 번역하여야 한다. 27. 【案件】ànjiàn 名 사건. 안건. [소송(诉讼)이나 위법(违法)에 관련된 안(案)] 국어대사전에서 “안건”은 “토의하거나 조사해야 할 사실. 문제가 되어 있는 사실.”로 해석하고 있다. “소송이나 위법에 관계되는” 사건과는 다른 차원이다. 그러므로 “案件”은 한자어식으로 “안건”으로 해석에서는 안 된다. 그 해석은 바로 “사건”이다. 28. 【案目】ànmù ①動 주시하다. 이 올림말은 현대어에서 찾아 볼 수가 없다. 즉 동그라미 “文”자를 주어야 한다. 29. 【暗淡】àndàn 形 암담하다. ① (광선이) 어둡다. (색깔이) 선명하지 않다. 진부한 모양. 국어대사전에서 “진부하다”는 “묵어서 썩음. 낡고 헒”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어 한어대사전이든 현대한어사전이든 “暗淡”에 대한 해석은 모두 “진부하다”는 뜻이 없다. 이것은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삭제해야 한다. 30. 【暗渡陈仓】àn dù Chén cāng 成 ☞ [暗度陈仓] 일반적으로 “暗度陈仓”으로 표기함. “渡”와 “度”는 확실히 같이 쓰였지만 현대에 이르러 이미 “渡”로 규범되어 쓰이고 있다. 이는 , 등에서, 특히 에서 모두 통일적으로 지적한 바이다. 그리고 “渡”의 뜻을 “飞跃”로, 즉 “지나가다, 건너다”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글자는 응당 그 위치를 바꾸어 놓아야 한다. 31. 【暗扣】ànkòu 名① 속단추. ② 부정 할인. 이 올림말은 제2부분의 경우 본래 동사이다. 중국어 한어대사전의 해석은 “몰래 잘라내다(공제하다)”이다. 그것이 실제 사용 빈도가 많아짐에 따라 명사로 활용될 때도 있지만 그 원형이 동사란 점은 반드시 교대하여야 한다. 이것은 “回扣”라는 말이 명사로만 쓰이는 것과는 다르며, “活动”이란 말이 원형이 동사이지만 동시에 명사로도 쓰이는 것과 같은 도리이다. 그러므로 동사라는 점을 반드시 교대하여야 한다. 32. 【暗射】ànshè ☞[影射] 이 올림말은 그 원형이 “影射”와 대등하지 않음은 물론, 본래의 형상적인 내용이 있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반드시 그 원형을 소개한 후 확대된 의미를 소개하여야 한다. 【暗射】ànshè 動①文 암전을 쏘다. ¶长箭不~;긴 화살은 암전으로 쓰지 않는다. ② 빗대어 말하다. ¶这首诗用的全是~,没有一句明言;이 시는 한 마디도 점찍지 않고 전부 빗대어 말하였다. →[影射] 33. 【暗算】ànsuàn 動 몰래 음모 또는 흉계를 꾸미다. 해칠 궁리를 하다. 이 올림말의 원형은 바로 “속으로 계산하다”이다. 우리 말의 한자어 “암산(暗算)하다”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왔는데 이 내용을 삭제해야 할 리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올림말은 반드시 2부분으로 나누어 해석하여야 한다. ② 암산하다. 마음속으로 헤아리다. ¶~乡程隔数州,欲归无计泪空流;헤아려 보니 고향 길 여러 주를 거치거늘, 돌아 갈 노비가 없어 눈물만 흘리누나. 34. 【暗息】ànxī 名 …… ② 고리대. 사채. ¶民间的~借款; 사채를 내다. 이 올림말 제2부분의 례문에서 “사채를 내다”는 동작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다만 모종 성격의 고리대를 말해줄 뿐이다. 즉 명사를 동사로 풀이하였는데 이렇게 번역하면 한국어 학생들의 기본기능 훈련에 큰 지장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역문은 아래와 같이 고쳐야 한다. ¶民间的~借款;민간의 고리대금. 사채 35. 【黯】àn 시꺼멀 암 形 검다. 어둡다. ¶露明星~;이슬은 밝고 별빛은 어둡다. 이 올림자는 “검다. 어둡다.”는 뜻 외에 또 “실의에 찬 모양”이란 두번째 뜻이 있다. 그리고 이 뜻은 사용 빈도가 제1부분의 뜻보다 훨씬 더 많다. 먼 것은 그만 두고라도 바로 아래의 “黯然”,“黯然失色”,“黯然销魂”이란 3개의 올림말도 모두 이 뜻을 떠나지 못한다. 즉 그 어원으로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2부분으로 나누어 해석하여야 한다. ② 실의에 찬 모양. ¶悄无语,~沉吟; 아무 말도 없이 실의에 찬 기색으로 침묵을 지킨다. 36. 【昂昂】áng′áng 形 헌앙하다. 기세가 드높다. 기운차다. 이 올림말의 원뜻은 “기세가 드높다. 기운차다.”이다. 그런데 사전은 그 앞에 우선 “헌앙하다.”를 주었다. 한국어의 “헌앙하다”는 한자어로서 그 해석은 “풍채와 의기가 당당하고 너그러워 린색하지 않다.”이다. 다음 한자어의 한자 “轩昂”의 중국어 해석을 보아도 역시 “기세가 드높다”는 뜻이다. 한국어 “헌앙하다”는 어원이 “轩昂”이지만 그에 부여한 의미는 훨씬 더 넓다. 그러므로 번역 시 이를 대역어로 쓰기는 적합하지 않다. 이것은 중국어와 한국어 한자어 간에 대등하지 못한 경우에 대한 하나의 실례이다. 그러므로 “헌앙하다”는 넣지 말아야 한다. 37. 【凹】 āo 오목할 요 形 오목하다. [가운데가 들어간 모양] 이 올림말은 형용사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동사로도 쓰인다. 그러므로 동사의 해석도 주고 례문도 주어야 한다. ②動 꺼지다. 패이다. ¶眼窝深深地~进去; 눈구멍이 옴푹하게 꺼졌다.
2    중한사전의 편찬과 번역에 관하여 1 댓글:  조회:1225  추천:1  2014-09-23
중한사전의 편찬과 번역에 관하여                                              남광철   중한사전의 편찬과 번역은 관계 범위가 극히 넓고 복잡하지만 그 기본 원칙은 복잡하지 않다. 그것은 바로 중국어를 전면적으로 정확하게 한국어 독자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이미 출판된 사전에 관하여 여러 독자들이 평론하는 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래에 중한사전(흑룡강성 조선민족출판사 출판, 2012.8월)의 편찬과 번역을 둘러싸고 일부 독자들과 본인의 의견을 종합하여 1-10페이지 부분에 관한 몇 가지 평론 및 의견을 서술하려 한다. 음독자의 처리 문제. [吖] ā 입을 크게 벌린 모양 아: 이 올림자는 현대 화학물질의 영어발음 “아(a)”를 표현하기 위하여 새로 “ā”음을 채용한 글자이다. 즉 “ā”로 발음할 때에는 화학물질만 표시하지 “입을 크게 벌린 모양” 같은 건 표시하지 않는다. 바로 그 아래에 표시한 “吖啶 아크리딘”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므로 천자문 음독자는 응당 “화학물질 아”로 써야 한다. 만약 “입을 크게 벌린 모양”이라고 올렸다면 해석 부분에 반드시 이에 상관되는 례를 들어 설명하여야 한다. 천자문식 음독자와 올림자의 해석이 일치하지 못하다면 이는 공연히 독자의 의문을 자아낼 따름이다. 다음, 예로부터 이 글자는 “yā”로 발음한다. “입을 크게 벌린 모양”이란 말처럼 형용사 격으로 쓰이는 말이 아니다. 이는 “웨치다”는 뜻의 동사이다. 그러므로 “yā”음으로 올린다면 “웨칠 아”라고 올려야 한다. 문제는 사전에서 “yā”음의 경우는 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毐]:ǎi음란할 애. 인명에 쓰이는 글자. 이 글자의 음독 해설이 “음란할 애”인 이상 “음란하다”는 내용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①에서 “남자의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다.”를 밝혀야 한다. 물론 례문을 준다면 더욱 좋다. 연후에 ②에서 인명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올림말 해석 문제. (1) [阿訇] āhōng 이맘(iman). 이는 본래 “아홍”이라 쓰고 “지식인 또는 교사”로부터 시작하여 해석하여야 한다. 이 말은 페르시아어 “ākhūnd”에서 온 말로서 ”ahung”이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맘”은 본래 “지식인 또는 교사”라는 뜻이 없다. 그리고 만약 이 경우에 쓴다면 “imam”이라 쓰는 것보다 “Imam”이라 쓰는 것이 타당하다. [阿混] āhùn 게으름뱅이. 어성꾼. 건달. (현 상황에 만족하여) 그럭저럭 살아가는 자. “어성꾼”은 한국 출판 이희승 편저 (이하 모두 이 사전에 준함)에서 우선 방언이라 밝힌 후 3가지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방언이란 차원에서만 말해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그외에 3가지 뜻은 게으름장이, 한산인(闲散人), 거간(居间)이다. 그렇다면 이 뜻을 몇 번째에 맞추는가도 시끄러운 일이다. 이런 경우 어성꾼은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례문에서 보아도 그러하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자”. 이 말에서 “자”는 “얕잡아 이르는 말”이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데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전부 얕잡아 이른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그럭저럭 살아가는 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腌臜] āzā ① 지저분하다. 더럽다. 불결하다. 이 올림말의 원 뜻은 “더럽다. 불결하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맨 처음에 “지저분하다”로 해석하고 있다. 이 “지저분하다”에 대한 한국어사전의 해석은 2가지이다. ① 거칠고 깨끗하지 못하다. ② 어수선하고 더럽다. 이 2 가지 해석은 어느 것이나 원뜻인 “더럽다, 불결하다”와 대등하지 않다. 비슷한 점이 있다고 이렇게 보태어 넣는 것은 올림말에 대한 독자의 리해를 방해할 뿐 아무런 도움도 없다. 대조적인 의미가 강한 올림말을 올리는 문제. 사전은 올림말 “哀乐(āiyuè)”를 올렸다. 그런데 이 악(乐)자는 다음자(多音字)로서 다른 한 발음은 즐거울 락“乐(lè)”이다. “哀乐(āilè)”는 위 올림말과 대조하는 의미에서 보든지, 아니면 그 자체의 사용 빈도로부터 보든지 모두 올릴 필요가 있다. 례를 들면 “十多个县分的城镇给我留下了人世哀乐的印象:10여개 현의 도시들은 나에게 세상의 슬픔과 즐거움에 관한 인상을 남겼다.”와 같은 경우이다. 물론 “哀乐(āilè)”에서 “喜怒哀乐”와 같은 성어(成语)와 대조하도록 기회를 주는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다음에 “→”로 “哀乐(āiyuè)”와 련결시킨다면 학생, 독자들의 전면적인 리해에 훌륭한 역할을 일으키게 된다. 사전은 성어(成语) “爱才若渴”는 올렸지만 사용 빈도나 뜻이 매우 비슷한 “爱才如命”은 올리지 않았다. 사전은 성어(成语) “爱财如命”, “哀鸿遍野”는 올렸지만 “爱财”나 “哀鸿”처럼 성어(成语)는 아니지만 독립적으로 쓰이고 그 빈도 또한 높은 단어는 올리지 않았다. 례를 들면 “君子爱财,取之有道: 군자는 재물을 사랑하더라도 도(道)에 맞게 취한다.”거나 “哀鸿失群;무리에서 뒤쳐진 기러기가 슬피 운다. /连年灾荒,哀鸿满路;해마다 연속되는 기황으로 이재민이 넘친다.”와 같은 경우이다. 사전은 “爱女”는 올렸지만 “爱子”는 올리지 않았다. 또 “安检”, “安监”은 올렸지만 “安纪”는 올리지 않았다. 사전은 올림말 “安好”에서 첫째로 그 형용사 용법, 즉 “평안하다”는 해석하였지만 두 번째 용법, 즉 “安好机器 기계를 설치해 놓다”와 같은 경우의 동사 용법은 해석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학생, 독자들의 전면적인 리해에 큰 지장을 주게 된다. 사전은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이는 올림말에 대하여 홀시하는 경향이 뚜렷이 보인다. 례를 들면 “爱戴 애대하다.”는 올렸지만 이와 거의 반대로 쓰이는 경우인 “爱戴高帽子”는 홀시하였다. “人老了就容易爱戴高帽子: 사람이란 늙으면 흔히 춰주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는 말은 속담 범주에 속하지만 “애대하다”는 의미와는 반대이면서 그 사용 빈도 또한 상당히 높다. 성어(成语)에 관한 인지 문제. 사전은 “挨饥受冻”을 올리고 성어(成语)라고 밝혔다. 그러나 성어(成语) 사전에는 모두 “挨饿受冻”, 또는 “挨冻受饿”으로 올리거나 이 두 가지를 함께 올렸다. 즉 “饥”와 “冻”은 결합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성어(成语)를 올림에 있어서 제대로 대조하여 보지 않은 문제이다. 사전은 “爱搭不理”,“爱理不理”를 모두 성어(成语)로 올렸다. 그럼 이 두 올림말이 성어(成语)가 맞는가? 그렇지 않다. 이 두 가지 말은 모두 성어(成语)가 아니다. 특히 “爱理不理”는 매우 흥미 있는 구조를 가진 말로서 “아랑곳하지 않거나 냉담하게 대하다. 본체만체하다.”는 식으로만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爱理不理”에는 “爱…不…”라는 고정 격식이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응대하고 싶으면 응대하고 그렇지 않으면 응대하지 않다.”는 격식을 교대하여야 한다. 이로부터 숫한 올림말들이 파생하게 된다. 즉 “你爱看不看” “너 보고 싶으면 보고 싫으면 그만 둬라.”, “你爱吃不吃” “너 먹고 싶으면 먹고 싫으면 그만 둬라”, “爱管不管” “상관하고 싶으면 상관하고 싫으면 그만 둬라”는 등등이다. 그래 이런 말들에 다 성어(成语)라는 모자를 씌워줘야 한단 말인가? 세심한 학생, 독자들이 성어사전과 대조하여 본다면 그 후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초학자들을 그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출판사나 나라의 위신에도 손상이 되는 것이다. 올림말 해석의 삭제 및 증가 문제 (1) “艾子水” 쑥을 달인 물. 쑥탕. [민속에서 아이가 태어난 지 3일째 되는 날에 이 물로 씻어 주는 것을 “洗三”이라고 함.] 여기에서 민속의 함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약효에서 기원했음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특히 성인 피부병에 대하여는 상용약으로 쓰이고 있다. (2) [哀荣] 사후에 받는 영예. 중국어 사전의 해석은 “생전이나 사후에 모두 존경을 받음. [특히 사후에 받는 영예를 가리킴] ”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단순히 “사후에 받는 영예”라고 줄이면 너무나도 무단적이다. [哀子] 애자. [어머니가 돌아가고 아버지만 계신 상중의 사람이 자기를 일컫는 말] 중국어 사전의 해석은 “본래는 부모를 여윈 아들, 후에 어머니를 여윈 아들을 가리킴”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본래의 의미를 삭제한다면 이 역시 어원을 단절시킨 것이다. [哀婉] 애완하다. 애절하고 느리다. 완곡하고 처절하다. “애완하다”는 한자어에 대하여 한국어사전은 “슬프고 어여쁘다”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어 사전에서 “哀婉”에 대한 해석 중 “어여쁘다”는 말이 없다. 이것이 바로 중국어와 한국 한자어의 섞갈리기 쉬운 문제로서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글자 음독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면 쉽사리 오류가 생기게 된다. 다음, “애절하고 느리다”는 말을 보면 “느리다”가 “婉转”에서 온 듯하다. 그러나 중국어 사전에는 역시 “느리다”는 해석이 없다. 이렇게 대등되지 않는 해석을 가하는 것은 절대 취할 바가 못 된다. (5) [爱怜] “爱怜幼子” 어린 자식을 귀여워하다. 중국어 “幼子”는 “어린 아들”이란 말이다. 그런데 “어린 자식”이란 “어린 아들이나 딸”을 가리킨다. 즉 이 번역은 그 의미를 보탰으므로 대등하지 못하다. [挨不得] “非专业人员挨不得污染物品” 전담자가 아닌 분은 오염물을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역문은 완전히 대중에 대한 경고 패쪽에 쓰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바로 여기에 현묘한 차이가 있다. 중국어 원문은 그런 풍격이 아니라 그저 객관적인 립장, 또는 평소의 대화에서 하는 말투이다. 만약 역문의 풍격대로 말한다면 중국어 원문은 “非专业人员请勿挨近污染物品”이라고 써야 한다. 이는 중국어 원문 풍격에 대한 리해 문제이다. 중국어 원문에 상대하면 역문은 “전담자가 아니면 오염물을 다루지 못한다”로 되어야 한다. [挨肩儿] 년년생이다. 년년 터울이다. “挨肩儿三姐妹” 년년 터울인 세 자매. 올림말 “挨肩儿”은 “손아래, 손위 관계”를 말할 뿐이다. 년년생과는 상관이 없다. 또 부녀들이 년년생만 낳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다. “년년생”이란 말이 확실히 많이 사용되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중국어를 번역할 경우 반드시 그 뜻을 정확하게 반영하여야 한다. 중국어 원문을 보고서는 세 자매가 “년년생”인지 아닌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즉 원문을 잘못 번역한 것이다. [挨着] 가까이하다. 잇대다. “在班级我俩挨着” 우리 둘은 짝꿍이다. 이 례문 번역에서 우선 “在班级” 즉, “학급에서”를 삭제하였다. 여기에서 이것을 삭제해야 할 아무런 리유도 없다. 다음은 “짝꿍이” 문제이다. 한국어 사전에서 “짝꿍이”는 “딱친구”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학급에서 우리 둘이 잇대어 앉는다” 하여 꼭 “짝꿍이”라는 법은 없다. 둘이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하면 바로 잇대어 앉기 때문에 사이가 버성기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늘 쓰는 말이라 하여 역문에서 경솔히 써서는 안 된다. 그 다음 여기에서 반드시 지적하여야 할 엄숙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올림말 “挨着”는 동사라는 점이다. 간혹 동사가 명사로 번역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동사가 명사로 번역이 되어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잇대어 앉는다”라는 동사 체계로 번역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또 이렇게 하여야 한국어 독자, 학생들이 정확한 체계를 갖추도록 인도할 수 있다. [艾] ài A)…B)…C) 아름답다. “少艾” 젊고 아름답다. “少艾”는 고문(古文)에서 젊고 아름다운 녀자, 즉 미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慕少艾”라는 말은 바로 “아름다운 소녀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녀자라는 뜻을 삭제하니 마치 남자도 가리키는 듯하다. 이 역시 독자들에게 혼동을 일으키는 말로 된다. [哀苦] 슬프고 고통스럽다. [挨淹] 물에 잠기다. 물에 빠지다. [矮个] 난쟁이. 왜인. 키작은 사람.  이상 3개 올림말은 아무런 례문도 없다. 앞의 2개는 비교적 적게 쓰이는 말인데 적게 쓰이므로 례문을 주어야 리해를 도울 수 있다. 세 번째 올림말은 자주 쓰는 말인데 바로 자주 쓰기 때문에 례문을 잘 주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이 경우 “哀苦无依的人; 의지할 곳 없는 슬프고 괴로운 사람”, “家园挨淹吓不倒这些农民, 고향이 물에 잠겨도 농민들은 힘을 버리지 않았다”거나 좀 유모아적인 방식의 례문으로 “她是个身高只有1米65的矮个排球明星; 그녀는 신장이 불과 1미터 65의 난쟁이 배구 스타이다”는 식의 참고 례문을 주는 것이 너무나도 필요하다. [哀戚] 슬퍼하고 서러워하다. 비통하다. “孝子之丧亲也,哭不偯……食旨不甘,此哀戚之情也, 효자가 어버이 상을 당하면, 곡을 하되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아니하니, 이것은 슬퍼하고 서러워하는 정 때문이니라.” 우선 올림말 해석에서 “서럽다”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한국어 사전에서 이 말에 대한 해석은 “원통하다”, “분하고 억울하다”, “몹시 원망스럽다”로 련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올림말 자체는 “비통하다”는 뜻으로 끝이다. “서럽다”는 말과는 련결이 되지 않는다. 대등하지 않은 말은 쓰지 않는 것이 상수이다. 그 다음, 중국어 례문에서 “偯”라는 글자를 썼는데 이 글자는 리해하기 몹시 어렵다. 그러나 본 중한사전에서는 올림자로 올리지도 않고, 례문 중 글자 뒤에 괄호로 병음, 즉 발음을 표기하지도 않고, 또 역문에서 이 글자를 번역하지도 않았다. 또 하나 불가사의한 일은 이 글자 뒤에 생략부호를 주어 독자가 더욱 오리무중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慈母新逝,不胜哀戚, 자애로운 모친께서 돌아 가셔서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소이다.”는 식으로 례문을 준다면 간단하기도 하고 리해하기도 쉬운 것이다. 중국어 올림말 사용 규범 문제 [艾滋病]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 注意: “爱滋病”으로도 표기함. [瑷] ài ① … ② 지명에 쓰이는 글자. [瑷珲] 애휘. [중국 흑룡강성(黑龙江省)에 있음. 일반적으로 “爱辉”로 표기함.] 우선, “爱滋病”은 초기에 사용한 문자로서 후에 “艾滋病”으로 규범하여 지금은 모두 이것에 준하고 있다. “‘爱滋病’으로도 표기”하는 문제가 아니다. 다음, “爱辉”는 “일반적으로 표기”하는 문제가 아니다. 국무원 유관 부서는 이미 1956년에 “爱辉”로 규범하여 지금까지 반 세기도 넘게 사용하고 있다. “瑷珲”는 단순히 “瑷”자가 지명으로 쓰인 력사를 반영할 뿐이다. 언어문자의 규범에 대하여 과학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큰 문제를 초래하는 근원으로 된다. 8. 이상은 1페이지부터 10페이지까지의 문제점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10페이지 마지막 부분에 들어가야 할 올림말에 대하여 한 가지 언급하여야 할 문제가 있다. 중한 사전은 “安徽”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安徽”란 올림말을 올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기타 올림말을 해석하는 부분에서는 “안휘성”이란 말을 자주 쓰고 있다. 올리지도, 해석하지도 않은 “안휘성”을 가지고 다른 올림말을 해석하다니 이런 문제는 어떻게 리해하여야 하는지? 독자에게 대하여 말하면 의문을 푸는 것이 아니라 의문을 더해줄 따름이다. 그래서 두루 펼쳐 보면 이것은 우연히 빠뜨린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인명, 지명을 다 빼버린 것이다. 심지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북경마저 빼버린 것이다. 그런데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은 “北京烤鸭”를 올린 것이다. 그래 북경과 북경오리구이의 문화적인 가치나 내포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사전의 첫 페이지에 “阿尔巴尼亚”를 올리고 그 수도는 티라나라고 밝혔다. 그런데 중국을 올릴 경우에는 수도를 언급하지도 않고 북경을 올려야 할 경우에는 북경오리구이만 올린다면 이는 중국을 일부러 내리깎는 편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 사전 자체가 중한사전인데 중국을 이렇게 홀대한다면 이 사전의 가치가 어데 있겠는가! 여기에서 한 가지 대조하여 말할 문제가 있다. 즉 1960년도에 조선에서 출판한 (6권)에 확실히 모든 인명 지명을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평양”이라는 올림말도 그 줄은 텅 비고 그 아래에 다만 “평양 나막신”이라는 등의 속담밖에 없다. “함흥”이라는 올림말도 그 줄은 텅 비고 그 아래에 다만 “함흥 차사”라는 속담밖에 없다. 아마 그런 영향으로 인하여 이렇게 처리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로부터 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런 도리도 없는 일이다. 필자는 그 당시 조선의 사회배경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고 있지만 확실히 이러한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 언급되고 있는 사전은 중한사전이다. 즉 중국어를 한국에, 또는 한국어 독자에 소개하는 사전이다. 한국에서 출판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5년)은 인명, 지명에 대하여 매우 명심하여 올리고 있다. 중한사전은 물론 대사전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그러한 풍격은 통일하는 것이 마땅하다. 분명히 눈에 뜨이는 상기 평양의 경향을 한국에, 한국어에 강요한다면, 그래 이것이 공평한 일이며 순탄하게 통과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 다음, 인명과 지명이 대체 문화에 속하는가, 속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땅에서 이 사람들이 살면서 문화를 창조하는데, 그래 땅 이름과 사람 이름이 가장 중요한 문화가 아니란 말인가? 물론 그렇게 많은 지명, 인명을 다 올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예로부터 내려오는 명인 리백, 두보라든가, 현대의 명인 모택동이라든가 하는 명인마저 올리지 않는다면, 40개 정도밖에 안 되는 성급 지명마저 올리지 않는다면 중국의 문화에 대하여 크게 손색이 가지 않겠는가? 또 하나 대비하여 말할 문제가 있다. 중한사전은 “八国联军”, “鸦片战争” 같은 력사학 올림말은 올렸다. 여기에서 보면 력사학에 대해서는 문화로 인정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리학은 문화가 아니란 말인가? 대학의 력사학부는 문화학부에 속하고 지리학부는 문화학부에 속하지 않는단 말인가? 총적으로 사전이 고도의 과학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점은 자명한 일이다. 중한사전의 편찬과 번역에 있어서 우리가 시종 명기하여야 할 점은 독자, 특히 학생들에게 책임지는 것이다.
1    뻬루려행기 댓글:  조회:1696  추천:6  2014-08-27
뻬루려행기                                                  차룡수     2013년도 다가는 지난 11월 20일 우리 부부는 작은 딸의 요청으로 지구 남반도 남아메리카주의 뻬루 려행을 떠났다.     뻬루는 우리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들에게는 비교적 생소한곳이다. 유구한 인류발전사에서 남아메리카주를 신비한 곳이라고하면 뻬루는 그중 가장 신비한 곳이다, 그 유혹으로 우리는 더욱 큰 흥취를 갖고 길을 떠났다.     이곳 연길시는 며칠전부터 온 큰 눈에 온 세계가 이미 은백색 바다로 변하였다. 령하 20도를 치닫는 호된 추위를 헤치면서 우리를 실은 자가용차는 공항으로 향하였다. 연길시에서  뻬루로 가려면 북쪽으로 유럽을 거쳐 갈수 있지만 우리는 남쪽으로 한국을 거쳐 다시 태평양을 가로질러 미국에 들렀다가 가기로 하였다. 이렇게 가면 원형 지구를 절반 에돌게된다. 뻬루, 그곳은 우리 나라와 13시간이나 있어 우리의 낮은 그곳의 밤, 우리의 한 밤은 그곳의 한낮이다. 점심 12시 우리가 탑승한 한국행 비행기는 눈 바다를 가로 질러 흰구름을 뚫고 하늘로 날아 올랐다.     아세아 지구의 여러개 나라는 가보았지만 지구의 한 끝으로 가는 길이여서 그런지 가슴은 저도 모르게 들먹이였다. 뻬루의 풍부한 유람자원은 점점 더 많은 지구인들의 눈길을 모으고 유람객들의 발길을 끌고있다 한다. 세계적으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디디카카담수호, 류량이 가장 크고 가장 넓은 아마죤강, 가장 웅위롭고 가장 긴 안디스산맥 모두 뻬루를 경과한다. 한때 남아메리카를 제패하던 잉 까제국의 600만 인구중 뻬루인과 에꽈또르인이 대부분이라 한다.     뻬루에는 또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기원 3세기전 천문대유적도 있다. 보존이 아주 잘된 13개의 석탑이 300메터 길이로 이어져 있는데 천문학자들의 관찰에 의하면 이 천문대에서 부동한 날자에 태양이 부동한 위치에서 솟아오르고 지는것을 볼수 있다한다. 이는 고대 천문학연구에 큰 기여를 하고있다.     뻬루에는 이외에도 세인의 주목을 끌고있는 2000년전 사막에 새겨놓은 거대한 나스카지도, 세계 100대문명 기적인 쿠스커성, 싸카사라만성, 창창고성, 또 근년에 숱한 유람객들의 발길을 끌고있는 마츄픽츄 고성도 있다.     오후 두시가 좀 지나 비행기는 한국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열번도 더 다녀간 한국이여서 그런지 큰 흥취가 없었다. 공항에서 나도 안가고 일곱시간정도 기다려 미국 로스안젤레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미 한 밤중이건만 잠기라곤 조금도 없어 열한시간 줄곧 부대끼며 저녁 여덟시쯤 되여 미국 령해에 들어섰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미국 땅은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극락세계였지만 나의 눈에는 거무칙칙한 다 뚜져먹은 황페한 광산의 한 모퉁이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젊은 시적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중국인민 해방군이였던, 수십년간의 중공 당원인 내가 부부동반으로 미제국주의 국가에 들어선다는것은. 1971년도 부대에 있을때의 일이다. 대련근처의 바다가에서 우리 말로 씌여진 대한민국 상표가 찍혀져있는 비닐약병을 주은적 있다. 멀고 먼 남쪽나라 우리 민족의 고향땅에서 만들어진 그 약병은 그렇게도 우리 한민족 친구들의 눈길을 끌었다. 우리는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서로 서로 돌려보면서 놓기 아쉬워했다. 나는 그 보물을 2년동안 고이고이 모시다가 그만 잃어버렸다. 어떻게도 아쉽던지. 그때 생각에는 한국땅은 그렇게 아득한 직접 내발로 딛는다는것은 상상도 못할 다른 세상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떳떳이 이 공포의 땅으로 알던 미제국주의 나라로 들어서고있다. 실로 세상은 변했다. 로스안젤레스공항에 들어서니 딸의 안배로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다. 한국에서 떠날 때 이미 밤중이였는데 여기로 오니 또 새로운 밤이 시작되였다. 미국땅에서의 일주일 유람은 눈 깜짝할새에 지나가고 11월 25일 뻬루 리마시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아홉시간 날아 이곳 11시에 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기 출구를 나서는 순간 더운 공기가 콱 안겨왔다. 지금 여기는 한여름, 기온은 령상 25도였다. 리마시공항에는 뻬루 국기가 나붓기고있었다. 좌로부터 홍, 백, 홍 세개 장방형이 수직으로 있고 백색장방형 그 중앙에는 뻬루 국휘도안이 새겨져있는데 자유, 민주, 평화, 행복, 승리, 영예, 렬사에 대한 추억, 삼림, 농업, 희유동물, 광산자원 등 여러가지 뜻을 상징한다고한다.     공항출구로 나와서 잠간 기다리노라니 딸 혜영이가 땀벌창이 되여 달려왔다. 처음 혼자서 자가용차로 공항으로 오노라니 길이 익숙하지 못하여 조금 늦었다고 한다. 우리 혜영이는 어려서부터 다른 녀자애들과 성격이 좀 다르다. 웬간한 일은 대수로와 하지 않는다. 공부에도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고중 입학 시험 칠 때도 아버지 친구들이 마작치기하는 방에 들어와서는 창문턱에 털석 들어 누워 중얼중얼 과문을 외운다. 공부하다가 피곤하니 맥주깡통을 들고 아버지칸에 들어와 건배를 하자고 지껄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 애의 어릴때의 념원도 좀 유다르다. 다른 애들처럼 그 무슨 공무원이요, 교수요, 아나운서요 하는것이 아니라 커서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세계유람하는것이라 한다. 기특하기만 하다. 이번에 아마 그 념원을 실현하느라 숱한 돈을 팔면서 우리를 지구의 한 끝으로 모셔온것 같다.     자가용차의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니 리마시의 풍경은 그닥지않았다. 내가 돌아 본 서울, 방콕, 홍콩, 북경, 상해보다 훨씬 못해 보였다. 10층이상 건물은 눈에 띄우지도 않았다. 딸애의 해석에 의하면 이곳은 지진다발성지구여서 고층건물을 제한한다고한다.     딸애의 집에 가 보니 셋이 사는 집으로는 너무나 큰 160평방되는 집인데 위생실만도 네개나 달려있었다.     이튿날부터 우리의 려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딸은 우리를 안내하기 위하여 회사에 청가를 내였단다. 1. 리마시     리마시는 뻬루의 수도인데 850만 인구로서 전국 인구의 28.4%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곳의 기후는 세계적으로 특수하다. 가장 추운 겨울이 7, 8월인데 최저 기온이 극상 령상 16도이다. 가장 더운 여름이 2월인데 평균 기온이 23도이다. 이곳 사람들은 아마 덥고 추운 감각을 모를것이다. 또 이상한것은 이곳에는 일년 가도 비가 얼마 안 내려 이곳을 “비없는 성”이라 한다. 한여름 날씨건만 너무 더운 감이 없었다. 길가의 가로수들은 거의 모두 꽃나무인데 그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은 꽃에 감정이 무딘 나건만 수시로 발걸음을 멈추고 록상기를 부지런히 돌리게 하였다. 자그마한 공원도 여러개 지났는데 저마다 독특한 특색이 있었다. 이 리마시는 일찍 1535년에 스페인 모험가 부랑시스커가 이곳에 총독부를 건설하면서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한 때 스페인 침략자들의 대 본영이 되였으며 그후 1821년 뻬루의 독립과 함께 이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 되였다. 1)로성시구역     리마 로성은 우리의 주숙지에서 자동차로 40분가량 가면 도착한다. 그닥 높지 않은 고대 인디안식 건물과 스페인식 건물들이 아담하게 들어앉은 해변가의 아름답고 깨끗한 구역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1535년 스페인 식민주의자 피싸러가 차고있던 검으로 이곳에 바둑판형의 건축 기초도를 그리고 그 선에 따라 시공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후 18세기 70년대에 해적 방지를 위하여 이곳에 외성을 건설하면서 그 형태가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1970년대에 그 외성을 허물면서 지금 리마시의 형태가 이루어졌다. 이 로성 구역에는 지금도 외교부, 교회당, 수도원 등 호화로운 건물들이 줄쳐 있어 유엔으로부터 인류문화유산칭호를 수여받았다. 1960년대 이전에 인구가 200만 안 될 때 이 구역에는 정부, 상업은행 등 사회 주요시설 청사들이 허다하여 나라와 성시구역 권력의 주요 상징으로 되였다.     그후 농촌 인구가 대량 밀려들어오면서 성시 복무업이 제한을 받아 점차 새 구역으로 확장되였다. 그러나 아직도 려관, 려행사, 음식업체, 약방, 신문사와 일부 국가관리기구들이 밀집하여 그 번화로운 자색을 잃지않아 유람객들의 발길을 끌고있다. 때때로 민간 연예인들이 연출하는 장면에 맞띄우게 된다. 그 정채로움에 나는 저도모르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그만 잘못 걸릴 줄이야. 따라 다니면서 돈을 내라한다. 방법이 없어 궁한 호주머니를 턴다. 안해의 핀잔을 받으면서…그래도 기분은 깨지지 않는다. 2) 중심광장     우리 일행이 중심광장에 도착 하였을 때는 점심 12시, 때마침 총독부 근위대의 교환의식이 한창이였다. 총독부 마당에서는 군악단의 멋진 연주가 있었다. 우리는 려행자들의 틈새에 끼여서 열심히 샤타를 누른다. 총독부 건물은 완전히 스페인식이다. 큼직한 마당이 두개인데 하나는 지금 군악단이 표현하고있는 이곳인데 군대들의 전문용이고 다른 한 마당에는 각종 화초식물로 아롱지다.     중심광장의 네변은 총통부, 리마시정부, 교회당과 상가들로 둘러졌다. 이 건물들은 지금까지 유구한 력사시기를 거치면서 이 나라의 정치생활의 살아있는 견증물로 서있다. 리마시의 창시자 피싸러는 1541년에 이 총독부에서 피살되였다. 이전에 이 광장은 투우장, 종교재판소, 사형장, 시체소각장으로 쓰이였다. 지금은 이 자리에 청동으로 아름다운 분수장을 만들어 놓았다. 1821년 이 자리에서 뻬루의 독립이 선포되였다.     총독부 측면에 있는 천주교 대교회당은 1625년에 세워진 전형적인 구라파식 건물이다. 우리의 발길은 저도 모르게 교회당입구로 빠져들어간다. 천주교는 이 나라 대부분 사람들이 신앙하고있는데 이 나라의 국교로 지정 되여있다. 내가 알기에는 16세기후 이 천주교는 구라파에서 신용이 쇠약해지면서 아세아와 아메리카주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교회당 실내의 그 호화로움과 장엄함은 우리더러 저도모르게 이 세상 구세주의 거상앞에서 머리수그리게 한다. 안해는 제법 엄숙하게 성모 마리아 앞에서 기도를 드린다. 신자도 아닌 그가 도대체 무슨 내용으로 기도 드리는지 궁금하여 물었더니 그저 자식들이 잘되게 해달라고 빌었다한다. 내가 제법 아는체 하면서 알려주었다. 하느님과 그의 식구들은 “나를 무엇무엇 해주십사”하는 리기주의 자들을 좋아 안한다고, 빌겠으면 꼭 “하느님 아버지께 수요된다면…해주십시오.”하고 빌어야 한다고.     듣는 말에 의하면 이 교회당에는 피싸러총통의 유해가 안치 되여있다고한다. 이 외에도 리마시에는 1735년에 세운 외교부 건물,1551년에 세운 아메리카주 첫대학 성마커대학도 있다. 리마시와 린접한 카야어항구는 전국 출입국 화물의 80%를 먹고 토한다한다. 3)화인거리(당인거리)     리마시에 온 중국놈치고 아마 화인구역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것이다. 우리도 자칭 중국놈인지라 자연히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게 되였다. 자가용차를 타고 거의 40분 달려 리마시 변두리 같은 곳에 도착하니 화인구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간판들에는 거의 다 중국글이 새겨져 있었다. 어쩌다 내가 아는 글을 보니 성수가 났다. 그도그럴것이 이곳에서 우리는 완전한 문맹이였다. 서점에 가면 아라비아수자밖에 아는것이 없고 길에서는 마구 귀머거리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19세기 중엽부터 중국 사람들이 이곳에 오기 시작하였다. 10여만명이 실려와서 처음에는 철도건설장에서 일하였다. 그후 점차적으로 농업에 종사하다가 일부는 이파루라와지역에 발을 부치였다. 그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고있는데 음식업, 상점과 기타 도매업을 하고있다. 이외에도 공예품 등 인문 특색이 있는 업종들을 벌려 점차 이곳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이 화인구역을 형성하였다. 사방 수백메터밖에 안되는 이 거리는 제법 번성하다. 오가는 사람들중에는 우리와 비슷한 놈들이 많았다. 가게마다에서 중국말이 통하였다. “명월루술집” “중국량유피발공사” “경덕진도자기” “소주비단” 모두가 중국글로 씌여져 있었는데 진짜 우리나라 한쪽 귀퉁이 같았다. 이외에도 이곳 화인들은 단합하여 그럴듯한 건물도 세워 유람객들의 발길을 잡고있다. 거리 중간쯤에 “중화통혜총국”이라고 새겨진 간판이 버젓이 걸려있다. 듣는말에 의하면 이곳의 “깡패조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리마시정부와 관계가 대단이 좋아 우리 중국인들을 위하여 많은 좋은 일들을 하고있다 한다. 이곳 정부에서는 이 구역 건설을 아주 중시하고있다. 1997년에는 리마시 시장이 직접 출마하여 다른 민족의 잡화점들을 몽땅 밀어내고 1999년부터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순 중화민족의 민족특색이 있는 지역으로 건설하여 유람객들의 발길도 끌고 구역 경제 문화발전도 크게 추진하고있다. 나는 돌고돌다 중국의 썩두부 한병 샀다. 아마 중국의 이런 냄새에 물들었는지 그렇게도 구미를 당기였다. 나는 이 거리를 떠나면서 저쪽에는 꼬리빵즈거리를 앉히지 못할가 엉뚱한 궁리를 하였다. 세계어디에나 중국거리는 거의 다 있다는데…이곳의 한국인 실력도 대단하다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민족은 중국인들처럼 응집력이 없이 제각기 너펄대고있다. 그래서 아마 전쟁이 결속된지 60년도 넘어 전패국인 독밀마저 통일되고 왜놈들마저 똘똘뭉쳐 다시 아세아 제패를 꿈꾸고있는데 소위 전승국이라고 하는 우리 한반도는 저들끼리 물고 뜯고 지랄발광하는지 모르겠다. 4)특수한 유람구     세계적으로도 아마 뻬루정부처럼 솔직한 정부는 없을것이다. 그들은 려행사들에서 빈민구유람을 조직하는것을 허용하고있다. 리마시교구의 빈민구는 한번 가볼만 하다. 리마시의 현대구역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거의 원시적인 집거지이다. 갈대 혹은 기타 풀로 엮어 지은 집. 어디에서 주어왔는지 모를 철판, 비닐, 나무조각으로 조합한 올망졸망한 집들이 여기저기에 널려있다. 이런 집들에는 근로자, 실업자, 반 실업자 및 파산된 농민들이 살고있다. 택시기사들도 살고있는데 그들은 정부의 정책을 리용하여 토지를 개인소유로 만들기위해 이곳에 주숙하고있다한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형식의 집이든지 황무지에 지어놓고 3년을 지내면 그곳을 개인의 소유로 한다고한다. 죽어도 묻힐땅조차 찾기힘든 우리 중국사람들을 실어다가 이런 땅에 정착시켰으면 좋겠다. 살아있을 때에나 땅의 주인이 돼 보게~     리마시의 인구는 1940년대의 50만으로부터 지금의 850만으로 고속증가하고있으나 20%의 주택에는 물이 없고 10%의 주택에는 전기조차 없다고 한다. 이외에도 치안, 위생 등 허다한 문제들이 존재하고있다. 이곳 려행사들에서는 유람객들에게 안전을 위하여 개별적으로 빈민구역을 가지 말것을 권고하고있다. 딸애도 빈민구를 지날때만은 자가용의 유리창을 꼭 닫고 긴장하게 빠른속도로 지나치고있었다. 내려서 좀 돌아보자는 나의 건의를 무시한채… 2. 리마시의 고대성곽과 인디안인들의 제사장소 1)싼페리페 성곽(궁전)     사위놈의 휴식일을 잡아 우리 부부간에 사위, 딸, 외손녀 동반으로 시교에 있는 옛궁전으로 구경을 떠났다. 사위놈의 차 솜씨는 괜찮은 편이여서 꽤나 먼 거리에 있는 성곽에 한시간 되나마나하여 도착하였다. 웅위로운 고대풍이 확확 풍기는 고성앞에 잠간 멈추어섰다. 아주 자그마한 민족인 스페인인이 남반도의 이 머나먼 땅에 건설한 고전형적인 16세기 중엽의 구라파성곽건축 풍격을 갖춘 기적적인 건물앞에서 저도모르게 우리 민족의 자비감을 느끼게 된다. 그토록 자칭 자랑스러운 민족이 수천년간 제땅도 지키지 못하고 옆집사람들의 기시만 받아오며 살아오는 가증한 이 신세…     이 성곽은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이 아메리카에서 건축한 가장 크고 가장 견고한 성쇄이며 스페인 왕실건축으로 가장 완정하고 의의있는 방어공사이라칠수 있다. 일당백의 자세로 카야아대안에 수백년동안 우뚝서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1747년 전례없던 대 지진과 해조는 뻬루항구를 평지로 만들었다. 스페인 식민자들은 통치를 가강하기 위해 이 페허우에 특대자연재해도 막아내고 영국 해적들의 빈번하고 창궐한 침범을 막아내기 위하여 이 땅에 더욱 크고 더욱 견고한 방어공사를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1747년 8월 1일 당시 총통의 직접 참여하에 이 땅에서 굉장한 개토의식이 성황리에 개최되였다. 당시 서방의 가장 출중한 건축사, 수학가와 시공전문인들이 참여하였다. 20여명의 기술일군과 400명의 장일군들로 일을 시작하여 전후 29년의 시간을 들여 500만립방메터의 돌을 써가며 이 방대한 성곽을 이 땅우에 세웠다. 돌은 대부분 빠나마와 스페인에서 실어왔는데 올때는 돌을 실어오고 갈때는 이 땅에서 략탈한 숱한 재물을 실어갔다. 나의 눈에는 다시 저도 모르게 북반부 우리 땅의 다른 화폭이 수치스럽게 떠오른다. 2천여년동안 대대손손 전문수레길까지 내면서 자체로 자기 땅에서 난 피륙과 약재 등 특산과 마소, 노예, 심지어 숱한 미녀들까지 대국으로 실어가는 그 광채로운 모습이…빼앗지는 못할 망정 거저…     성곽우에 올라서서 보노라니 우선먼저 눈앞에 띄우는것이 가도가도 끊없는 태평양의 거룩한 얼굴이다. 박식한것처럼 외손녀와 지껄인다. 이쪽으로 가고가고 또 가면 네가 태여난 우리의 고향이라고. 비행기를 타면 20여시간 배로가면 한달정도…     카야아 항구도 한눈에 안겨온다. 한때는 영국해적들이 물밀듯이 쓸어오던 저 바다. 바로 이 성루가 그 사나운 바다와 그 흉악한 해적들을 맞아 이곳에 자랑스럽게 솟아있다. 성곽을 둘러보니 부등변 5각형으로 되여있었다. 매개 변마다 보루가 보기좋게 솟아있었다. 보루에는 전문약창고들이 있어 화약 등 물자들을 보관하는데 썼다고한다. 두 보루에는 따로 보탑이 있었는데 들림다리로 나들게 되여있었다. 아마도 큰 놈들이 나들던 보탑같다. 탑과 탑사이에는 흙으로 통로를 내였는데 전반성곽의 교통도로인듯 싶다. 한 보탑에는 다른 포두로 향하는 길이 세갈래나 있었다. 다른 한 포루에는 사달, 복도, 포두, 숙소, 단독간방 등 설비가 아주 구전하였다. 바로 이 감방에 당년에 숱한 뻬루, 아르헨띠나 반정부투사들이 갇겨있었다한다. 전반 성곽의 외벽은 돌로 쌓이여 있었고 내벽은 벽돌, 돌, 석판, 자갈 등 부동한 건축재료로 쌓여져 있었다. 수백년간의 세월의 흐름과 태풍의 시달림, 외적의 침범을 이겨내고 지금도 보란듯이 서서 그 웅위로운 위풍을 떨치고있다.     성곽의 전반면적은 7만평방메터, 성곽의 총길이는 1580메터, 높이는 5.88메터, 두께는 12~14메터에 달하여 외적의 폭격을 얼마든지 막아낼수 있었다한다. 성곽력사에서 한세기동안이나 한번도 점령당한적 없어 그야말로 성벽 건축사의 새별호칭에 부끄러움이 없다. 이 성곽에는 188건의 청동포, 124문의 철포를 배치하였다. 그 포소리의 위력만도 대단하여 수차례나 해적들을 보기좋게 막아내여 18세기말부터는 해적들이 이곳에 얼씬도 못하였다고한다. 1821년 7월 28일 뻬루는 독립을 선포하였는데 스페인 침략자들은 성곽의 우세를 믿고 이곳에서 2달동안 버티였다고한다. 그후 이 성곽은 림시정부소재지로 있다가 그후 국회와 의원의 소재지로 되였다. 지금은 뻬루륙군군사박물관으로 쓰이고있다. 성안의 한마당에는 군대의 창시자이며 1868년 이 성루의 보위자인 브장시스거 피뤄네기시싸이만티 상교의 기념비가 세워져있었다. 박물관내에도 수십개의 각 시기 이 땅을 지켜 싸운 영웅들의 동상이 모셔져있었다. 군대의 각 력사시기 즉 창건, 성장사, 군대전통 등이 상세히 소개되여있고 년대별로 사용하던 여러가지 무기장비들이 배렬돼여 있었다. 박물관의 해설원은 스페인언어가 청산류수이고 연기 기능도 상당하였다. 나와 안해는 멍하니 꼭두각시놀음만 구경하고있는데 여섯살나이의 손녀가 옆에서 제법 류창한 한어로 우리에게 해설원의 말을 번역해 주고있었다. 말이 나온바에 말이지 이 놈은 금방 여섯돐 생일이 지났는데 좋은 환경의 덕분에 영어, 스페인어를 아주 류창하게 하고 한어도 제법 잘하고 조선말도 적지않게 알고있다. 이 수준의 외국어를 국내에서 배우자면 아마 6~10여년은 잘 걸릴것이다. 학교에서는 영어, 놀이터에서는 스페인어, 집에서는 한어, 우리 늙은이들과는 때때로 조선말. 이 나라, 이 가정 환경이 배양한 장래의 훌륭한 외교관감이다. 2)파차카아의 유적지     이 유적지는 리마시 남쪽 20공리 되는곳에 있는데 전문안내원인 딸이 소문을 못들었는지 내가 여러번 가자고 하였지만 먼곳의 유람지만 중시하다가 코앞의 유적지 방문은 자꾸 뒤로 미루기만하였다. 방법이 없어 내가 아는 이 유적지의 내용을 사위놈과 지껄이면서 가자고 떼질써서 끝내 사위가 차를 몰고 떠난다. 바다가를 따라 리마시 시교를 금방 빠져 큰 모래산구역을 지나니 금방 도착하였다.     도착하여 보니 입구에 유적지 정황을 소개한 내용이 있고 페쇄된 성터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왔다. 기원전 200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여 15세기에 이르러 고도에 도달하여 제법 해변가의 이땅 수호신으로 우뚝 솟아났다.     그후 1537년 이 땅에 기여든 스페인침략자들에게 여지없이 파괴되였다. 그러나 지금도 돌로된 기초, 토벽들, 담벽과 흙으로 다져진 성벽, 거센 풍랑을 이겨내고 이 땅을 지켜선 력사의 견증자로 꿋꿋이 서있었다. 허물어진 옛집터 자리에서도 웅위로움과 장엄함이 엿보여 이 뻬루 중부해안의 유적지에 찬사를 아낄수 없다.     성벽에는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이구역에서만 볼수 있는 특별한 사다리형 창문이 보인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보니 태양궁이라하는 6층높이의 건물이 바다를 마주하고 산정에 솟아있었다. 그뒤에는 관상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태양출몰시간을 따라 농력을 계산하였다고 한다. 고대 잉까인들의 문화발전수준을 보여주는 훌륭한 견증물이다. 태양묘 아래에는 월량궁이 건축되여있었다. 그 옛날 이 부근의 미녀들을 이곳에 집중시켜 어려서부터 여러가지 기예를 베워주었다한다. 아홉살전후 가장 예쁜자를 골라서 왕비로 하고 나머지는 궁녀 혹은 궁실의 교원으로 써먹었다한다. 월량궁의 복도는 숨박곡질하는 미궁같다. 궁내에는 또 옛날 미녀들이 썼다는 목욕탕도 보이였다. 산정을 에돌며 바다쪽을 바라보니 그 옛날 전설로 아롱진 두개의 바위섬이 안겨온다. 원래 건설할때는 토착민들의 토지신묘, 그후엔 잉까왕국의 성쇄, 스페인침략자들에게 여지없이 파괴된 그토록 아름다왔던 유적지를 돌아보고 자꾸자꾸 뒤돌아보며 귀로에 오른다. 3)고대인들의 제사장소 와까     딸의 집에서 상업구역으로 가는데 번마다 지나치는 곳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의 말로 와까라고 한다. 바로 미라부리스(주지안나라고도함)구역에 있는 또 다른 특색이 있는 유람구이다. 소개에 의하면 기원 5세기에 세워진 토지묘라고 한다. 진흙으로 다져 만든 토벽돌로 쌓은 거대한 금자탑식 묘이다. 이곳에 토벽들을 다져 만드는 옛인들의 모형도 보이고있다. 멀리서 보면 자그마한 금자탑식 산봉오리 같은데 가까이 가보니 한장한장의 토벽돌로 올리쌓은 굉장한 작품이였다. 그 벽돌에는 아직도 옛 창조인들의 손가락자리가 력력히 보인다. 전반 토지묘는 행정구역과 례의 중심 두곳으로 갈라져있었다. 행정구역은 이 묘의 북쪽에 있는데 옛날 이 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였다고 한다. 주위는 담장으로 쌓았는데 꽤나 큰 정원과 경사면이다. 행정관리장은 여러가지 물품, 보관소로 쓰이였다고한다. 이곳에 1984년7월부터 유적지 박물관과 진렬실을 세워 유람업 운영을 시작하였다. 다른 한곳은 주체건축물인데 금자탑식 모형을 이루고있다. 숱한 계단으로 구성되였는데 아마 계단마다에서 제사지낼수 있게 한것 같다. 제일 높은데 올라가니 이곳에서 출토된 미이라가 원형 그대로 굴안에 보존되여있었다. 어린애 시체같은데 무엇에 쓰이는가 해설원한테 물어보니 얼버무리며 딱히 찍어 대답못한다. 아마 옛날사람들이 신에게 드리는 제사희생품이 겠지 하면서 내려오니 자그마한 토지묘 박물관으로 안내하였다. 박물관은 규모가 작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도자기, 방직품, 석기, 목기둥이 구전하게 배렬되여있었다. 리마시의 다른곳에서도 우리는 이 와까보다 작은 규모의 토지묘를 두개 더 보았는제 그 건축년대와 건축목적이 모두 비슷하다. 3.박물관     이곳사람들은 자기들의 력사를 자랑할수 있는 력사적 증거를 아주 중시하는것 같다. 거의 거리마다 가는곳마다 크고 작은 박물관을 맞띄울수 있다. 1)    국가박물관     사위의 휴식날을 찾아 우리는 리마시의 성버르타구에 있는 국가박물관을 찾았다. 9층건물인데 그 조형과 결구가 아주 특색있었다. 바깥에 줄쳐있는 사람들을 보고 박물관 참관자들인줄 알았는데 은행에서 로임을 찾는 사람들이라한다. 이른 아침이여서 인지 박물관에는 참관자들이 거의 없었다. 우리 일행 4명을 위하여 전문해설원이 따라나선다. 소개에 의하면 이 박물관청사는 1976년에 건축하여 처음에는 어업부 사무청사로 쓰이다가 후에 은행청사로 되였다한다. 1988년 3월 14일 국가박물관건립에 관한 뻬루공화국의 법령에 따라 1990년 2월 19일부터 국가박물관에서 쓰기로 되여 그때부터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문화장소로 되였다한다. 지하실부터 4층까지는 전람장으로 쓰이고 4층부터 9층까지는 사무실, 도서실, 저장실 및 안전계통으로 쓰이고있다고한다.     전람부분은 주로 모형, 지도, 도편, 사진 출토실물 및 그에 따른 문자설명이였다. 주로 스페인 침략자들이 오기전의 이 나라 문명사 즉 인문, 농업과 기타 경제발전사였다. 전람청은 (1)도자기시대이전시기, (2)형성시대, (3)지구발전 정황 (4)지구종합자료 (5)후기왕국 (6)잉까제국 등으로 나뉘였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 중국처럼 보수적이 아니였다. 박물관내에서 마음대로 록상하고 사진 찍을수 있었다. 저도모르게 몇년전 어느 한 유적지에서 사진 찍으려다가 무참하게 저지당하던 일이 생각났다. 그곳에서 묘실내의 정경따위를 록상하다가는 아마 몇년 콩밥을 먹어야 할것이다. 지난해에는 지방 박물관에서 사진기를 꺼냈다가 무안당한적도 있다. 그것은 아마 그곳에서는 이곳 사람들처럼 모든 력사를 이 세상에 공개하여 인류공동의 문화재산으로 하는것이 아니라 모 시대의 력사를 자기들의 목적에 따라 새로이 장식하거나 혹은 공개됨을 꺼리기 때문일것이다.     1층에서 우리는 시비왕묘에서 발굴된 대량의 문물들을 돌아볼수있었다.     1987년부터 이 문물들은 리마에커성시버지구에서 시비왕묘와 아홉개의 한장묘에서 발굴된것들이 있다. 이 문물들에서 우리들은 잉까시대 즉 12세기전의 뻬루 사회, 경제, 문화 및 풍속습관들을 충분히 료해할수 있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이 묘지들에는 아직도 대량의 문물들이 발굴을 기다다리고있다한다. 뻬루 정부에서는 이 유적지에 대하여 아주 큰 긍지감을 느낀다한다.     이 박물관에서는 또 국내외의 각종 회화작품, 교육, 문화 및 기타 내용으로한 전람도 조직하였는데 그중에는 중국5000년문명사도 포함된다. 2)황금박물관     이곳의 황금박물관은 리마시중심에 위치하여 아무때나 찾아가볼수있다. 황금박물관과 세계병기박물관을 총칭하여 황금박물관이라 일컫는다. 리마시의 수르크라하는 지역에 있는데 1966년에 창립된것이였다. 전람품들은 주로 농학가이며 금융가, 외교가인 미지르무시카, 쟈제가족에서 수장한것이였다. 전람관은 주로 두개 부분으로 나뉘였다. 첫부분은 16세기이래의 세계 각국의 병장기들이였다. 그중에는 아메리카 독립전쟁중에서의 영웅이쓰던 보검, 나프롱이 쓰던 병기, 중국고대의 칼, 검, 및 다른 나라들의 군복, 갑옷, 마구 등이 있었다. 여러가지 물품들은 각기 그 공예의 뛰여남과 조형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있었다.     두번째부분에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 5세기까지의 뻬루에서 출토된 각종 금, 은, 제품과 복장, 조각품, 도자기 등 외에도 미이라가 배렬되여 있었다. 이는 뻬루 력사상 “머치가,치무”와 “나스카 문화”및 고대 토착민들의 생활습관 풍속습관들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있으며 그 예술가치도 세계적 의의가 있는 문물들이라한다.     이 박물관은 이미 정부에서 제정한 국가문물단위이다. 그중 일부 진렬품들은 북아메리카, 구라파, 일본과 남아메리카 지역들에서도 진렬되고있다.     우리의 눈길을 따로 끄는것은 모택동이 증송한 보검, 리붕총리의 “찬란한 문화유산 수장가의 로동결정”이라는 제사와 문물복제품 한건, 또 정협 주석 리서환이 쓴 “뻬루문화의 보석, 잉까문명의 교오”라고 쓴 액자와 고화페 한권도 진렬되여있었다. 다른 중국사람들은 자랑으로 생각할는지 몰라도 나는 저도 모르게 수치감을 느꼈다. 아무리 박물관에 주는 선물이라하여도 어쩌면 이 민족이 가장 꺼리는 불우호의 상징, 도전의 뜻인 검을 증정하며 그 큰 중국땅에 걸음마다 진짜 문물들인데 아무리 린색한들 어쩌면 수치스럽게 나라의 선물로 복제품을 주는지? 진짜를 주면 우리나라의 빛이 더 날것 같은데…     이외에도 뻬루에는 고물박물관, 수석박물관, 개인문물박물관 등 허다한 박물관이 있는데 몇곳을 다니고 나니 나같은 력사문맹도 눈을 좀 뜨게 되였다. 4. 마츄픽츄와 쿠스커 1)마츄픽츄     이곳 려행을 떠나기전에 내가 알고있는 뻬루에 관한 지식은 기껏하여 쿠스커라고하는 잉까의 옛수도가 뻬루에 있다는것과 마츄픽츄라고 하는 상상하기도 힘든 순 돌로 쌓아 올린 옛 성시가 있다는것 뿐이였다.     1월 5일 나와 안해는 리마에서 쿠스커행 비행기에 올랐다. 자그마한 비행기에 앉아 쿠스커에 도착하여보니 공항은 똑 마치 큰 뻐스대합실 같았다. 활주로는 비행기, 자동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딸이 배치한 안내원이 마중나와있었다. 대만에서 살다가 이곳에 이적해 왔다고 하는 50대 초반의 로처녀였다. 인물은 아주 수수하였지만 말할때마다 해쭉해쭉 웃는것이 퍽 인상적이였다. 그가 갖고온 자가용에 앉아 마츄픽츄를 향해 황페한 산지를 달리고 달려 다섯시간만에 유람자들의 전문용 판점에 도착하였다.     꽤나 큰 규모의 판점이 였는데 뷔페식이였다. 술두냥을 청하여 마이고 질쩍질쩍 오는 비를 가르며 다시 출발하였다. 다시 한시간정도 달려 소형렬차 정거장에 도착하였다. 동화집에서나 보던 40여명씩 타는 자그마한 렬차였는데 손님들의 수량에 따라 서너바구니씩 달고 뛰였다. 퍽 깨끗하고 안전하여보였다. 렬차는 울울창창한 고산준령의 야산을 뚫고 표호하는 강반을 따라 두시간 정도 달렸다. 산세가 어찌도 높고 험준한지 렬차의 천장에 난 유리창으로도 산봉우리의 경치를 포식할수 있어 부지런히 록상기를 돌렸다. 안해도 사진기의 샤타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녁이 어슬어슬 찾아올무렵 우리는 마츄픽츄 산밑의 호텔에 안내되였다. 안내원과 함께 저녁을 먹기시작하였다. 발밑에선 강이 제노라 자랑하며 표호한다.제 딴엔 시노라 중얼 댄다. 쏟아져 내리느냐 무너져 흐르느냐 왔노라 타래질 가느라 룡트림 막을소냐 너 감히 이산 저산 뒤로주춤 바위 돌 멱따친다 산산조각 되게스리 고산성 마츄픽츄 수호신 따로있나 허구한날 너를 지켜 우루반바타하 감도누나     아아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고 올리솟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달이 산중턱에 걸려 산뒤로 숨어드는 장면이 눈에 띄워 환성을 지르며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샤타를 누르기 시작하였다. 실로 인생 64에 처음으로 보는 절승경개였다. 맥이 진해 떨어졌나 쉬다가자 내려왔냐 아이참 부끄러워 날 좀 숨겨다오 수줍은 그 얼굴 산중턱에 걸렸구나     우리가 든 호텔방은 우루반바타강옆의 별장식 호텔방이 였는데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듯 거의 폭포에 가까운 강물의 요란한 소리에 텔레비죤소리도, 곁의 사람의 소리도 들리지 않을정도였다. 창문을 열고 그 자연의 소리를 음미하며 아아득한 산을 바라보는 나의 심정은 똑 마치 그 출렁이는 물결 같았다. 대자연이 낳은 미묘한 황홀한 이 정경 유독 이곳에서만 만끽할수 있을것이다.     이튿날 다시 뻐스에 올라 마츄픽츄 정상으로 달렸다. 한시간정도 달려 고성에 도착하였다. 소개에 의하면 이 성은 고잉까제국의 고성 페허인데 지금 뻬루의 가장 유명한 유람성지의 하나로서 련합국에서 비준한 인류문화유산이라한다. 잉까언어로 마츄픽츄란 “오랜산봉우리”란 뜻인데 고잉까수도 쿠스커성의 서북쪽 112공리 되는 고원에 위치하여있다. 해발 6264메터인 산봉에 자리잡고 우루반바하 산곡을 내려다보고있다.     성쇄의 입구에서 바라보니 대개 200여개의 돌 건축물이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있었는데 거의 다 주거용집들로 보이였다. 그외의 일부는 묘, 창고용이였다하였다. 입구에서 당지 인디안인들이 옛사람들의 시늉을 하면서 흙을 다루고있었다. 제전을 쌓을 때 이렇게 이런 흙을 쓴다고하였다. 일하는척 하고있었다. 성터의 면적은 13평방공리이고 고성터의 600메터 절벽아래서는 우주반바타강이 타래쳐 흐르고있었다. 이 지방의 령물인 퉈양(驼羊)이 제전에서 여유럽게 풀을 뜯고있었다. 우리는 안내원의 뒤를 따라 성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소개에 의하면 1911년 6월 예루대학의 해레무, 빈거하무교수가 이곳을 발견하였다한다. 당시 전반 성쇄는 몽땅 식물에 감춰져 있었는데 그후 예루대학에서 발굴하기 시작하였다한다. 절벽에 세워진 이 보루의 외부는 돌담으로 에워져있고 내부는 여러갈래의 작은 길로 교차되여 있는데 그 가운데 있노라면 똑마치 미궁에 들어선 감을 준다. 성쇄의 정문으로부터 한갈래의 계단이 산을 에워쌓고 올라 전성을 꿰지르고있다. 건축가들은 교묘한 건축술로 흙을 쓰지 않고 건축과 자연환경을 하나로 융합시켰다. 전성은 몽땅 암석결구인데 그야말로 잉까제국의 건축예술의 절정이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 가다가 보노라면 어떤 돌은 지어 30여개의 변으로 이루어졌는데 반들반들 닦아진 돌들의 크기는 서로 달랐지만 어떻게 잘 쌓았는지 개미도 나들수 없을 정도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인디안인들은 청동이거나 돌로 건축용돌을 자르고 모래로 이렇게 닦아낸다고 하였다. 어떤 건축들은 원자리에서 그곳에 돌들을 잘 조각하여 다양한 모형을 이루었고 바위를 뚫고 끌어들인 음료수와 배수구들은 그 정교함에 하늘나라 사람들의 조화가 아닐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문득 인디안인들의 전설이 생각난다. 한 마을에 전쟁이 끝난후 아주 용감한 총각 한사람만 남았다. 그는 사람으로 변할수 있는 독수리의 딸과 결혼하기 위하여 독수리왕을 찾아 청혼한다. 독수리왕은 딸과 결혼하겠으면 자기의 세가지 요구를 완수해야 한다고하였다. 완수 못하면 죽인단다. 그중 한가지가 아아한 산봉의 바위돌로 궁전을 지어야 한다는것이다. 총각이 수심에 잠겨 막연해 있을 때 지렁이 한마리가 나와서 총각을 도와준다하더니 숱한 지렁이들이 나왔다. 갈고 뚫고 하면서 이어놓아 해지기전에 궁전을 지었다한다. 혹시 이 세계기적의 궁전을 만든후 전해내려온 우화가 아닌지 모르겠다.     산중턱에 올라가니 숫처녀들만 관리하였다는 태양신묘가 눈앞에 나타났다. 전하는데 의하면 태양신을 숭배하는 인디안민족은 태양신에게 성의를 표하기위하여 왕족의 가문에서 가장 훌륭한 처녀들을 수백명, 지어 수천명까지 물색하여 한평생 정조를 지키며 태양신만 모시게 하였다한다. 만약 외도하기만하면 본인이 처형당하는것은 물론 그 가족까지도 처참한 처형을 면할수 없었다한다. 이곳의 태양묘는 성중간에 가장 좋은 위치에 정중하게 지어져있었다. 귀족들이 살던 집은 아주 세밀하게 잘 쌓아져있고 담벽에 장방형, 삼각형 창문도 나있다.     산등성이 가장 높은곳에 오르니 태양력계산기도 교묘하게 장치되여있었다. 이 민족의 고도로 발달한 문화수준을 엿볼수있었다. 이 페허의 성벽에는 때때로 아직 알수없는 부호와 표기들이 있었는데 그 뜻은 후세사람들의 풀이를 기다리고있다. 성쇄의 궁전과 평대는 그야말로 웅위롭고 장관이다. 성에는 여러가지 작업소, 보루 등이 알아볼수 있을 정도로 쌓아져있었다.     현대인들에게 숱한 수수께끼를 남긴 이 성쇄는 500여년전에 건설된것이라고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은 또 수천년전 잉까시초의 왕궁이라고도 주장하고있다. 왕궁 아래서부터 질서 정연하게 산아래까지 쌓아진 다락밭들은 왕궁시민들의 식량을 해결하는 밭이라고 한다.     안내원을 따라 반나절 돌고 산아래로 내려오면서 자꾸자꾸 머리를 돌려 그 아름다운 한폭의 실화를 머리속에 새기노라하였다. 귀로에서 중국의 신화사 기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도 만났는데 이 절승경지에서 고향친구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 대만인, 북경인, 길림꼬리빵즈인들로 사진 한장 남겼다. 2)    쿠스커     이튿날 마츄픽츄를 떠나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일생에 다시 이런 절승경개에 와 볼수 없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서운하였다. 다시 렬차를 타고 대만 안내원이 안배한 자가용차를 타고 다섯시간정도 달려 저녁때가 되여서야 쿠스커려관에 도착하였다. 려관은 아주 수수하지만 쿠스커성 중심광장 근처에 있어 우리부부가 단독으로 활동하기 편리하였다. 쿠스커는 원래 뻬루남부의 저명한 고성이며 옛 잉까민족의 수도이다. 유명한 고적지였다. 쿠스커란 옛언어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안디스산 고원분지에 위치하여 해발 3410메터에 달한다. 뻬루사람들은 이곳을 “안디스산맥 왕관의 명주”라고 한다. 해발고도가 높아 웬만한 사람들은 고원반응으로 한참 고생해야 한다. 나의 심장이 남보다 부실하다 념려되여 딸이 퍽 근심하면서 약까지 달아보냈다. 그런데 고원반응은 나보다 안해가 더 심하였다. 그런대로 우리는 아침을 대강 에때우고 거리에 나섰다.     려관으로부터 중심거리로 가는 길 량켠에는 백색2층건물이 줄쳐있었다. 이는 옛 인디안인들의 건물이였는데 돌로 쌓아진 그 기초가 수백년전에 쌓은 그대로여서 이 지방의 옛 풍격을 그대로 살려주고있었다.     옛날 그때 인디안인들이 이 가원을 꾸리느라 숱한 고생을 하였는데 그들이 숭배하는 태양신을 감동시켰다한다. 하여 태양신은 그들에게 금도끼를 선사하였다. 기원 1200년전후에 국왕 만거 카바거는 아버지 태양신의 지시에 따라 디디카카호로부터 이곳에 옮겨와 웅위롭고 화려한 쿠스커성을 건설하였다. 아울러 이곳을 중심으로 강대한 잉까제국(태양의 자손)을 건립하고 잉까문화의 요람으로 남미주대륙의 최고봉 궁전을 건설하였다. 그후 1533년 스페인침략자들이 기여들어 무수한 재물, 문물들을 략탈하고 이 아름다운 성시를 여지없이 파괴하였다. 또 빈번한 전쟁과 여러차례의 지진이 이 성을 구타하였지만 아직도 잉까문화의 상징인 가도, 궁전, 묘소 등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열심히 샤타를 누르며 쿠스커성의 중심거리에 들어섰다. 눈앞에 잉까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사면에 구라파식의 건물들이 나타났다. 그 중간에 2만평방도 넘어보일 광장이 보기좋게 위치하여있었다. 이 시내중심이 바로 무장부대광장이라고한다. 광장중앙에는 어느시대의 영웅인물인지 인디안인의 조각상이 우뚝 솟아있었다.     그 주위에는 또 스페인식의 복도형거리가 펼쳐져있고 또 네개의 교회당이 우아하게 세워져있었다. 돌로깐 좁은 길이 사방으로 펼쳐져있고 길 량켠에는 잉까인들의 토벽돌집도 드문드문 보란듯이 늘어서있다. 광장 동북쪽엔 다섯칸대청의 금자탑형 태양묘가 세워져있다. 그외에 또 달신, 별신, 태양녀신, 뱀신 등 이 민족이 숭상하는 여러 신들의 걸작이 보인다. 서남쪽의 자그마한 광장은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군대들 개선식 장소라한다. 두 광장부근에 또 고물박물관도 있어 고대 잉까제국시대의 도자기, 방직품, 금은기물들과 여러가지 조각품들을 진렬하여 놓았다. 우리의 발걸음은 자연히 가장 굉장한 교회의 대문으로 빨려들어갔다. 성모마리아의 거상앞에서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안해를 보노라니 뭔가 측은한 생각이 난다. 같이 살아 37년동안 언제 한번 자기를 위한적 없이 항상 나의 어머니, 동생,  또 자기 자식들에게만 정성을 부어온 인생이다. 멋이란 피워못보고 향수란 누려못보며 어느새 60을 넘었다. 오늘도 꼭 또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것이다.     이 쿠스커성에서 3리가량 떨어진곳의 300여메터 높이되는 언덕에 세계적으로도 소문이 높은 태양제를 지내는 곳이 있는데 “싸가와만”이라하는 원형식의 고대건물이다. 이 보루를 기점으로 인디안인들은 2~3천키로메터 되는 길을 닦았는데 그때로부터 이 땅의 가장 중요한 교통간선이라한다. 그 보루에서 동쪽으로 가면 또 다른 칸커라는 유적지가 있는데 고증한데 의하면 이 종교제사중심에는 신묘와 무예경기장의 흔적도 있다한다. 유적지에는 거대한 돌로된 제단도 찾아볼수 있다한다. 이외에도 이 성에는 1692년도에 건립한 오랜 대학건물들이 있다한다. 또 볼만한 온천, 폭포도 있다하지만 우리는 스케줄의 제한으로 일일이 볼새없이 귀로에 올랐다.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도시를 떠나오노라니 가장 어릴때의 가장 자랑스럽던 그 기분이다.     내 인생의 가장 어릴때의 기억인데 옆집마당의 아름드리 버드나무에 서너메터 기여올라 격동을 금할수 없어 나무우에서 오줌을 내리 쏜적있다. 오늘 이 멋진 성시를 돌아보고 가노라니 형용하기 어려운 자호감에 그 잘하는 노래를 저도모르게 흥얼흥얼하게 된다. 포뚀를 한다는 안해의 조소도 무시한채… 5. 파라카스     파라카스 또한 뻬루의 유명한 유람지여서 국내외의 유람객들이 거의 다 찾는 명승지이다. 사위의 휴식날을 기다려 딸네식구까지 다섯이 자가용으로 려행길에 올랐다. 이 유람구는 리마시 남쪽으로 247공리되는 이카성 경내에 있는 곳인데 총면적은 33만헥타르에 달한다한다.     우리는 이 구역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가장 끄는 새의 섬으로 가기로 하였다. 이 새섬은 남도, 북도, 중도 등 여섯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졌다고한다. 그중 북도는 가장 큰데 그 면적이 64헥타르에 달한다. 손녀가 멀미가 심하여 사위하고 바다가에서 놀기로하고 우리부부와 딸이 유람선에 올랐다. 우리가 탄 유람선은 질풍같이 달려 한시간 거의 되여 이 멋진곳에 도착하였다. 유람선은 한 반시간쯤 달려 멈춰섰는데 안내원의 손길을 따라 바라보니 우아~ 앞의 섬의 측면에 거대한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게…그모양은 똑마치 옛사람들의 불달때 쓰는 초대와도 같고 선인장과도 비슷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도안을 옛사람들의 도항용 도안이라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외성인의 걸작이라고한다. 도대체 무슨 용도로 어느 년대에 그려진건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한다. 나는 나의 “연박”한 지식으로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수천년전 하늘인들이 이 지구상의 미개인들을 개화하기 위해 이곳에서 사업하면서 자기들의 고향—별 나라에 보내는 표식일거라고…     유람선은 거의 한시간 달려 “새의 섬”에 도착하였다. 때때로 유람객들의 환성이 터진다. 와~ 아~ 와~ 아~ 담이 큰 물범들이 유람선주위에서 뛰여오른다. 섬의 아래측에 숱한 물범들이 보기좋게 늘어져서 볕쬐임을 한다. 새무리가 날아옐때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진짜 동물들의 극락세계이다. 안내원의 소개에 의하면 이곳에는 물범, 펭귄새, 물새, 거북, 물개가 숱해있는데 그중 물범이 가장 많다고한다. 멸종에 가까운 해양동물과 바다새들도 이곳에서 서식하고있다고한다. 섬위를 바라보니 수백만마리의 검고 흰 새들이 뒤덮여있는데 장대기도 박을 자리가 있을 같지 않다.     안내원은 펭귄새를 가리키면서 이곳에서만 찾을수 있는 희귀한 품종이라 하였다.     한때는 이 섬에 새똥이 어떻게 많은지 이 지방의 주요 경제 개발 항목이였다고한다. 소개에 의하면 이 명승지는 구성된지 이미 5000여년이나 된다고한다. 산에도, 들에도, 바다에도 도처에 명승지인 이 땅의 아름다움에 절찬을 보내면서 우리는 귀로에 오른다. 6. 나스카지도     나스카지도는  전세계에 알려진지 오래다. 나도 남아메리카에 관한 서적들에서 두루 보고 대개 알고있었다.     사위놈의 휴식일을 잡아 손녀까지 데리고 우리 다섯이 유람길에 올랐다. 사위놈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앉으니 딸이 모는 차에 앉기보다 퍽 안전한감을 느꼇다. 여섯살난  손녀와 희희닥거리는 사이 차는 시속 120공리로 질주하고있었다. 하루종일 달려 오후 세시쯤하여 나스카시와 련결한 도시에 도착하였다. 려관방에 행장을 풀고 사위는 우리를 싣고 사막지대로 달렸다. 한참 잘 달려 도착한곳은 사면이 모래산으로 에워쌓인 유람지였는데 모래섬 한가운데 꽤나 큰 아주 깨끗한 호수가 있고 호수주변은 이곳 특유의 나무들로 에워쌓여 있었는데 상가들도 즐비하게 늘어서있었다. 차를 대기하기 바쁘게 손녀놈이 사막산으로 올리 뛰였다. 재미있다고 환성을 올리며 올리 뛰는 손녀의 뒤를 어린애의 수호신인 로로(姥姥)가 뒤따른다. 쫓거니 쫓기거니 하는 모습이 퍽 재미있어 보여 나도 뒤따랐다. 사위와 딸도 잇따라왔다. 500여메터 올리 기고나니 숨이 턱에와 닷는다. 평시에 여기저기 아프다하던 안해는 손녀를 뒤떨군채 앞장서 올라가고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속으로 “저 년이 평시에 엄살을 부렸구나”하는 심술궂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막의 봉우리에 오르는 려행용차가 이 곳에 마련되여 있어 사위가 그것을 타자 하였지만 우리 일행은 만장일치로 거절하고 사막에만 있는 특유의 정취를 만끽하고 귀로에 올랐다.     이튿날 우리는 나스카지구를 향하여 계속 질주하였다. 또 반나절 달리니 우리앞에는 일망무제한 자갈들이 섞인 흑사막이 펼쳐졌다. 나스카지구에 도착하니 공로중간에 망루를 설치하고 유람객들을 끌었다. 우리는 망루우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았다. 근처에 있는 비행장 활주로의 표식같은 지도는 보였지만 먼곳의것을 볼수가 없었다. 전면적으로 잘 보려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올라서 굽어보아야 한다한다.     나스카려행사에 들려 안내원을 데리고 나스카공항(내가 평생 보아온중 가장 작은 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기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작은 규모인 4인용, 6인용 등 차례로 있었는데 우리는 4인용을 선택하였다. 사위와 로로, 손녀가 투항했기때문이다. 사위의 말에 의하면 이 비행기의 사고률이 아주 빈번하다한다. 손녀는 멀미가 심해서 투항했다. 안해의 거동을 보니 한시간타는데 사람당 80딸라라고 하니 딸의 돈을 남기려는 속산인것싶다.     앞자리에 기사와 해설원, 뒤자리에는 나와 딸 4인용비행기는 한참만에 하늘에 날아올랐다. 심하게 요동치며 기우뚱거리며 나는 비행기는 우리를 뒤흔들어 놔서 잠간새에 딸은 게우닥질하기 시작하였다. 딸은 토하던 말던 흥취가 고도에 오른 나는 딸의 손에서 록상기를 받아쥐고 록상기렌즈로 지면을 쓸기 시작하였다.     비행장 표식처럼 수공리 뻗은 화살표 또 벌, 새, 원숭이, 독수리 등 여러가지 짐승들도 비행기 밑에서 언뜻거리며 지나친다. 나스카지도 이 거대한 우리 인류의 풀지못할 수수께끼는 일찍 1939년에 미국인 보뤄 커커스가 이 지역에서 인디안인들의 수리관개계통들을 연구하다가 발견한것이다. 이 거대한 지도는 뻬루수도 리마에서 남쪽으로 300공리 떨어져있는데 지도의 면적이 250평방공리에 달한다고 한다. 건조한 사질땅표면에 수십센치메터 깊이로 새겨져 있는데 그 크기는 수십메터여서 8공리까지 이루는데 거대한 실선들로 련결되여 있다. 이 그림의 제작자와 제작목적에 대한 분석은 저마끔 다르다. 어떤 학자들은 이 지방 나스카문화를 창조한 인디안인들의 작품이라는 설이다. 그들의 분석에는 이 그림이 고대 인디안인들의 특수한 천문일력 혹은 수리관개계통이거나 도로라고 보고있다. 어떤 학자들은 인디안인들의 특수한 제사 행사장소라고도 보고있다. 어떤 학자들은 고대외성인들의 우주비행선 착륙표시라고 보고있다. 나는 후자의 관점에 동감하였다. 그것은 이 그림이 탄생한 세대는 바로 세계적으로 공자, 석가모니 잇따라 예수 등 명인들이 나타나 인류를 개화하기 시작하던 년대이기때문이다. 나의 어리석은 분석에는 이 명인들은 외계별의 지성인류가 미개한 지구의 인류를 개조하기 위해 내려보낸 특수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기원전 3~5세기의 그림과 이곳 나스카 문화—여러가지 도자기에 새겨진 도안들을 보면 옛 인다인안들의 걸작이라보는 관점이 잠시 우세를 점하고있다.     한시간동안 소형비행기에 들치우다가 기우뚱거리며 착륙하는 우리를 향해 지상의 대표단—사위, 로로, 외손녀가 환성을 지르며 손질하고있었다.     멀미에 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노라니 어쩐지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이 철모르는 애비를 기분좋게 하느라고 이 고통을 함께 겪어야 하는 일이. 사위말을 빌면 생명의 위험도 무릎쓰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이 나스카문화연구에 일생을 바친 독일 녀 과학자 마리아 리체의 박물관을 참관하였다.     1932년 그는 이곳을 찾아와 인디안문화연구사업에 종사하였다. 매일 같이 나스카지도의 먼지와 자갈을 쓸어내면서 구체적인 연구를 하였다. 필생의 연구끝에 끝내 “뻬루의 나스카 버파의 비밀”이라는 책을 펼쳐냈다. 1998년에 사망되였는데 뻬루정부에서는 그 공적을 시인하여 “국장”의 규모로 장례를 치뤄주었다.     박물관마당에는 존경스러운 녀과학자의 유체가 모셔져있었다. 나는 저도모르게 일생을 과학사업에 헌신한 거인 앞에 머리를 숙였다.     박물관내에는 거인이 고찰할때 쓰던 자동차, 거인이 발굴한 미이라 및 여러가지 도자기와 도면들이 진렬되여있었다.     거인의 노력으로 이 나스카지도, 이 나스카문화는 세인들에게 알려져 1994년 12월 4일 련합국에서는 이곳을 인류문화유산으로 규정하였다. 7. 아마죤지구     12월 4일 이른아침 그렇게도 가고싶던 아마죤지구 려행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남미주에 관해 알고있는것은 세계에서 제일 큰 강이 이 땅에 있다는것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억에는 이 지역은 공포의 지역이다. 이름 모를 짐승, 미개한 인종…     아침 일찍 일어나 우리 부부간과 딸, 여섯살난 외손녀 넷이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였다.     딸과 외손녀는 이미 한번 유람갔다왔지만 외손녀의 견식을 넓히는데 좋다고 하면서 또 데리고 떠났다.     아침일찍떠나 비행기편으로 아마죤 지구의 “이지퉈스”로 향하였다. 아마죤지구는 극히 드문 몇개 성, 진 외에 도처에 흩어진 1200개의 부락들로 이루어졌는데 뻬루수도 리마로부터 이 지역까지 아직 륙상 직통공로가 없다. 비행기편으로 “이지퉈스”에 도착하니 아침 여덟시좌우가 되였다. 이지퉈스시는 20만 인구가 되는 120여년의 력사가 있는 자그마한 시이다. 일찍 본세기 초에 세계적으로 고무생산 열조가 한창일때 이곳은 이미 본지방 지주들과 세계 방탕한 상인들의 유흥지로 소문 높았다한다. 시내 여기저기에 볼수있는 벽화까지 조각한 구라파식 건축물들은 아직도 당년의 자태를 뽐내고있었다. 고무생산열조가 지나간후 이곳 정부에서는 지속적인 경제진흥을 위하여 1960년대부터 이곳에 특수정책을 부여하였다.     이곳 공항은 이 나라의 리마시이외의 유일한 국제공항이라한다. 나라에서 400여종 상품에 대한 면세정책을 하달하여 대량의 구라파, 북미주, 브라질 등지의 상품들이 이곳으로 밀려들고있다한다. 자유항과 마찬가지인 이 정책은 이곳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크게 추진하고있다한다. 안내원은 30세 남짓한 멋진 인디안-구라파 혼혈인이였다. 접대실방에서 간단히 커피 한잔씩 들고 려행용배에 올랐다.     강은 강뚝도 따로 없고 그럴듯한 항구도 없다. 우리는 강안에 고정시킨 낡은 배를 거쳐 거기에 서로 동여서 이어놓은 나무다리를 지나 자그마한 8인용 려행선에 올랐다. 이곳 사람들은 강물이 부를 때 집이 떠내려가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무로 자그마한 집을 짓고 강에 박은 나무기둥에 고정하고 살림집을 꾸려 놓고 살고있었다. 유람선 주위에서 수십채의 이런 집들이 늘어 앉아있었다. 안내원의 스페인언어 해설을 딸이 우리 말로 번역해주고 외손녀가 때때로 삐치면서 한어로 번역해주었다.     소개에 따르면 이 강은 뻬루에서 발원하여 브라질을 경유하여 바다에 흘러드는데 총 길이는 6400공리에 달한다. 그중 680공리가 뻬루를 경유한다. 세계적으로 가장 넓고 물량이 가장 많다고한다. 이곳의 강폭 넓이는 3공리에 달하는데 강 량안이 아칠하게 바라보였다. 가장 넓은 곳은 80공리에 달한다고 한다. 초당 강물류량은 30만립방메터에 달하고 가장 깊은 수심은 240메터에 달한다한다. 이 강의 서안은 이지퉈스시이고 동안은 망망한 원시림이다. 인디안인들에게는 이 강에 대한 아름다운 전설이 있다. 이 강은 원래 달신의 한방울의 눈물이라 한다. 황홀한 경치에 매혹되여 시에는 문외한이건만 한마디 읊조린다. 전설 그 옛날 달님의 눈물 한방울 오늘 이 땅의 정기 업었느냐 장하다 그 기세 한몸에 700만 공리   이 대륙 땅 거의 절반 걷어 안고 아츨하다  그 넓이 수천메터 지어 20공리 어허 저 출구에선 80공리라 분노할땐 수백공리 이 땅 집어 삼키며 놀랍구나 매초에 30만 립방메터 내뿜누나 망망한 저 바다 향해 어쩌면 혼탁한 그 배설물 이 땅의 피비린내냐 너 달님의 저주이냐     옛날 이곳의 부녀들은 남편들의 학대에 반항하여 수령의 안해 퉈인사의 인솔하에 남편들을 리탈하여 이곳으로 피란왔다고한다. 이 튀인사의 이름으로 지명을 지어 불렀는데 그후 전하고 전해져 지금의 아마죤이라 부르고 강은 아마죤강이라 부른다고하였다. 이곳 백성들은 보통 어업과 종식업을 위주로하고있다한다. 농사는 주로 바나나, 망과, 목과 등 열대과일을 위주로 하고 벼농사도 한다고 한다. 그런데 벼농사 방식은 아주 특이하다한다. 따로 논도 없이 강물이 줄어들때 강변의 진탕에 벼씨를 뿌린다한다. 벼가 여물기를 기다려 거두어 들이기만 하면 된단다.     배에 앚아 주숙지로 가는 동안 때때로 물범들이 머리를 내밀어 우리 일행의 환성을 자아냈다. 실로 세계 어느곳에서도 볼수없는 삼라만상이 눈앞에 나타난다.     세시간정도 달려 아마죤강반 원시림속의 초대소에 도착하였다. 정연한 침구에 깨끗한 화장실 목욕실도 구전하고 앞마당에는 제법 수영장도 갖추어져있었다. 사람들을 졸졸 따라다니는 거의 닭만큼 큰 앵무새 몇마리가 배회하고있었다. 멋을 모르고 손을 내밀었다가 하마트면 손가락에 상처를 남길번하였다.     오후 두시부터 우리의 아마죤지역탐구가 시작되였다.     안내원을 바싹따라 여섯살내기 외손녀가 선봉, 그뒤에 딸, 안해, 나 순서로 원시살림을 꿰뚫기 시작하였다.     아아한 고목들은 어찌나 높은지 벌렁 누워야 그 끝을 볼 정도였다. 이 지역에서 가장 크다고하는 나무는 나의 아름으로 20개도 넘었다. 우리는 환호성을 올리면서 네사람이 가지런히 서서 팔을 벌리고 섰는데 그 한쪽 넓이를 채 막지 못하였다. 멋진 사진 한장 남기고 계속 길을 재촉하였다.     오전내내 온 비에 진득진득한 흙창길을 걸어야 했건만 외손녀를 비롯한 우리 일행은 지치는줄 몰랐다. 앞장서가던 안내원이 손에든 장도로 나무근처의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의아한 눈길로 지켜 보았다. 한창만에 거의 팔뚝만한 나무뿌리를 파들고 식용으로 먹는 나무감자라고하였다. 이 식물에도 인디안인들에게는 아픔을 준 전설이 전해내려오고있다하였다. 아주 오랜 옛날 사람들이 동물과 식물의 말을 알아듣던 시기였다. 서로 아주 화목한 마을에 눈같이 흰 피부에 아릿다운 소녀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그가 고기나 과일을 먹는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후 마을 사람들은 사냥물을 잡지 못하여 쫄쫄 굶주리게 되였다. 이때부터 소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매일 가루전을 만들어 대접하였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처녀의 얼굴이 날에 날마다 초췌해지더니 끝내 사경에 처하게 되였다. 그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가 자던 자리에서 톱날형잎이 있는 식물이 자라는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식물의 흰 뿌리가 달려 있는 관목을 발견했는데 처녀애의 신체와 똑같았다. 그후부터 이곳 사람들은 이 나무뿌리를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하여 생명을 위협하는 기아를 피면할수 있었다한다. 꼬박 3시간 이상 진창길을 밟으며 삶림을 지나쳤지만 우리의 꼬마선봉은 다리를 겨우겨우 옮기면서도 바쁘다는 소리 한마디 없었다.     안내원이 어린애의 행동에 감격하여 목마를 태우고 한창 걸었다. 나이보다 퍽 묵직한 어린애를 태우고 산속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을 보느라니 그 우람진 체대, 훌륭한 체력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주 평범하게 먹는 사람인데 이곳의 풍토가 좋아서 일가? 일로에 우리는 안내원의 덕분에 숱한 약초 약나무 식용식물 등 식물에 관한 지식을 배웠다.     주숙지에 도착하여 수영장에서 손녀와 함께 실컷 물장구를 쳤다. 산속을 헤메고다녀 그런지 저녁밥은 그렇게도 맛있었다. 화란돼지라고 하면서 연변에서도 그 종류가 류행된적 있었다. 다섯근좌우씩 밖에 안자라는 돼지인데 그 고기구이에 흰술 석냥, 맥주 한병이 시원스레 넘어간다. 이튿날 우리는 또 다른 세상 구경을 떠났다. 이곳 토배기 인디안인들의 생활습성을 료해하러 간다고 하였다.     가는 도중에 뱀도 보고 또 어제 못본 식물도 보다가 안내원의 손길을 따라 나무꼭두를 바라보니 주먹만큼한 원숭이들이 숨박골질하고있었다. 호텔의 개 두마리가 어제와 마찬가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리를 동반하였다. 두시간반 정도 삼림을 가르고 지나니 자그마한 몽고포같은 풀로 엮은 집이 나타났다. 70대의 훤칠한 령감이 풀로 앞만 가리우고 우리를 맞이하였다. 초막에 들러    보니 사면은 휑한채 그대로고 비만 가리우는 집이였다. 올망졸망한 1세부터 10세까지 어린애가 7명이나 있었다. 한창 포유기의 부녀 둘이 있었는데 앞가슴은 가리우지도 않고 절렁절렁 흔들어 대며 무어라고 지껄이고있었다.     이곳 풍습에 의하면 남자들이 돈 꽤나 번 다음 장가를 가야 하기에 부부간 남녀 차이가 10여년 지어 30여년은 보통이라 한다. 오늘 촌에 중요한 제사 행사가 있어 우리를 접대하는 사람들은 이 몇명뿐이라 한다. 해설원은 로인의 어깨를 정겹게 치면서 날고기를 생식한 덕분인지 이곳사람들은 그리 늙어 보이지 않고 체격도 아주 좋다고한다. 이곳 민속습관을 간단히 소개한후 그 로인이 퉁소같은 악기를 불기 시작하였다. 그 소리에 맞추어 녀인들과 아이들이 돌아치며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반라체로 춤을 춰대는 그들 일행은 퍽 인상적이였다. 한 녀인이 앞가슴을 흔들어 대면서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안해와 딸, 외손녀앞이지만 반 라체의 젊은 녀자와 춤을 추지 않을수 없었다. 어쩐지 또 바라기도 하였다. 딸은 그 장면을 록상기에 잡아넣기도 하였다. 한창 놀아댄후 그들의 상품—자체로 만든 수공예품인 나무씨로 엮은 목걸이, 손목걸이, 실로 수놓은 각종 모양의 놀이감들을 바줄에 줄줄이 달아 놓고 서로 자기 물건을 사라고 한다. 몇개를 골라쥔후 그 로인의 입활표현이 있었는데 화살이 그가 부는 대로 딱딱 들어가 맞았다. 내가 맞히자고 여러번 시도 했지만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술공장에 들리였다. 사탕수수의 당분을 기계로 짜서 자연발효시켜 만든 술이였는데 기관지에도 좋고 소화에도 좋은 비교적 소문 높은 이 지방 토배기 술이라 한다. 한잔 마셔보았더니 도수는 높지 않은데 대뜸 울기가 올랐다. 안내원의 낯을 보아서 두병사들고 귀로에 올랐다. 이튿날 유람제목은 내가 가장 즐기는 낚시질이였다. 손가락만큼 굵은 3메터좌우의 나무가지에 두메터 좌우의 낚시줄을 매여놓은 아주 초라한 장비였다. 닭의 껍질을 미끼로 한다고하였다. 우리는 다시 배를 타고 물이 조용히 흐르는 맞은켠 대안에 도착하여 낚시질을 시작하였다. 먼저 배사공이 한마리 잡아냈다. 두어냥정도의 이름모를 고기였다. 이따라 나도 한마리, 한창 놀아치던 외손녀가 낚시대를 나꾸어 채더니 한마리 걸어 냈다. 아빠 엄마와 바다낚시질 할때  항상 관군이라한다. 반나절 잡았는데 겨우 10마리 밖에 잡지 못하였다. 저녁에는 손수잡은 물고기에 백주한잔 들이켠다. 저녁 행사로 밤짐승 구경간다고하였다. 무시무시한 삼림을 한창 꿰지르고있는데 안내원이 소리쳤다. 다가가 보니 거의 쥐굴만한 구멍이 있었는데 나무가지로 살살 뚜지고있었다. 한참만에 애기 주먹만큼이나 거의 큰 거미가 뚜지는 나무를 잡고 따라나왔다. 와~ 아마죤의 독거미, 옛말에 듣던 이 굉장한 거미가 우리의 눈앞에 나타났다. 우리 일행은 저도모르게 뒷걸음쳤다. 우리의 안욕을 포식시키고 안내원은 아주 조심스레 거미를 굴에 밀어넣었다. 한길에 안내원의 이곳의 매하나의 동물, 일초일목을 그렇게도 귀중하게 아끼는 모습이 엿보였다.     7일간의 마아죤지구 려행은 손녀의 온몸에 모기 상처투성이를 만들어 놓았는데 놈은 긁어서 피까지 흘릴 정도였건만 괴롭다는 소리 한마디 없었다. 이곳 모기는 웬일인지 한번 물면 그 독이 10여일 지어 한달도 더간다고 하였다. 우리 어른들도 숱한 상채기를 달고 그러나 기꺼운 심정으로 귀로에 올랐다.     나의 심정은 똑마치 10여세 때 연길시에서 가장 높아 보이던 화학공장 굴뚝에 올랐다 내려온 심정이였다. 속으로는 중국조선족가운데서 아마죤지구 구경한 사람은 아마 우리밖에 없을것이다고 뇌까리면서… 8. 나의 놀음질—낚시질     리마에 와서 가장 즐거운것은 흥취만 있으면 매일이라도 낚시질을 할수 있다는것이다. 태평양 바다가는 딸집에서 걸어서 10분거리다. 아침 다섯시쯤 일어나서 낚시대를 들고 바다가를 가노라면 보는 사람마다. “올랴 올랴”하고 상냥하게 인사를 한다. 나는 중국놈이답시고 “你好,你好”하면서 지나친다. 이곳에서는 줄낚시거나 바다낚시로 고기를 낚는데 마침 사위에게 바다낚시 두틀이 있었다. 미끼로는 조개거나 돌드레 같은 바다벌레로 한다. 고기가 물린 같아 열심히 끌어 당기노라면 바다밑에 돌이 너무 많아 고기가 달아나지 않으면 낚시와 연돌이 끊어져버린다. 매일 한두마리, 매일 한두번씩 낚시와 연돌을 끊어먹었다. 낚시 한틀의 낚시선이 어느새 거덜이 났다. 손낚시대로 하면 좋을것 같았지만 사흘째 시내를 싸다녀도 파는곳이 없었다. 생각다못하여 바다낚시대에 직접 손낚시처럼 줄을 달고 시도해보았다. 기술개혁은 과연 효과를 보았다. 처음엔 5~6마리 최고로 열입곱마리, 기분좋은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낚시를 넣자마자 고기가 와 닥닥치더니 낚시를 끌고 돌틈에 들어갔다. 상통을 보니 큰놈같았는데 어찌도 아짜아짜한지 손바닥에 땀이 날정도였다. 이럴때면 저도모르게 우리 친구들중 낚시명장인 농업국 박정길 친구가 생각난다. 그 놈이라면 무슨 수단이 있을텐데…     속수무책으로 낚시대만 잡아 흔드는데 또 와닥닥하더니 고기가 돌틈에서 튕겨나왔다. 내가 배운 낚시기술을 몽땅 동원하여 얼리고 닥치고 하면서 겨우 변두리까지 끌고 와보니 이걸 어쩐담. 한놈은 거의 두근되고 다른 한놈도 그 절반정도는 될것 같았다. 잡아채자니 낚시줄이 끊어질것 같고 잡아끌자니 돌에 걸릴것 같고 반시간정도 씨닥거려 끌어 올리고보니 진짜 기분이 좋았다. 우리 친구 최송산 같으면 이런 고기 잡는다는것이 어림도 없지. 혼자 중얼기리며 집으로 향하였다. 고기를 꿰매여 남들이 보게 흔들어 대면서. 이곳 바다에서는 내가 알기에는 이 만큼한 고기를 낚을 사람이 없다. 최저한도 내가 볼 때…그것도 두마리씩이나.     돌아오는 길에 “你好,你好”소리는 어느때보다 우렁차다.     그럭저럭 리마에 있는 동안 아마 4~50번은 바다에 나간것 같다. 누구도 먹지 않아 말리워 보았는데 너무 딱딱하여 씹기 힘들었다. 딸은 바다낚시도 4번배치 하였는데 아주 흥이 났다. 처음에는 낚시줄을 늘어뜨리고 당기는 감각이 있어 잡아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볼라니 사공은 련속 게를 잡아낸다. 옳지 이거구나. 천천히 잡아 끌어보니 게가 대롱대롱 달려올랐다. 잠간새에 한구럭이 찬다. 그런데 이곳 게는 어쩐지 우리지방것만 맛이 못하다. 한번은 바다낚시를 나갔는데 손녀까지 협력하여 한뼘씩하는 고기를 60여마리 잡았다. 처리할 방법이 없어 딸의 직장 직공식당에 가져갔더니 그렇게 좋아하더란다.     낚시질 하면서 낚시 친구 두명을 사귀였는데 손짓, 발짓하면서 열심히 낚시 기교를 배워준다. 우리 사람들은 친구들끼리도 낚시질 밀방을 감추는데 말이다. 또 미끼가 없으면 자기들의것을 덜어준다. 내가 친한 또 한사람은 길을 청소하는 아줌마인데 전형적인 인도사람처럼 해반주그레 하게 생기고 큼직한 엉덩이를 갖춘 풍만한 녀자였다. 번마다 고기잡은 정황을 친히 검사한다. 큰것을 잡았거나 많이 잡아올때는 엄지손가락을 내들고 치하한다. 저런 녀자들과 친하면 이곳말도 빨리 배우겠는데 또 제좋은 생각을 한다.     이곳 사람들이 인도사람같다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일부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원래 한 종족이라 한다.     하늘나라 사람들이 한무리의 노예를 이끌고 아프리카에 와서 금을 캤는데 후에 이 노예들이 아프리카에서 인도로 인도에서 중동 중국 다시 시베리아 유럽을 거쳐 북미주, 남미주로 옮겨왔다한다. 아마 그때 인도인 후예들이 이곳으로 많이 왔겠지~ 나름대로의 생각이다. 9. 안해의 고질병     일이 있으나 없으나 시내 상가를 돌아치는것이 (아마 세간살이의 수요겠지. )안해 리금자의 만성병이다.     이 외딴곳에 와서 근 40년 같이 살아온 녀편네를 잃어버릴가봐 나도 꼭꼭 따라나선다. 그런데 진짜 따라다니는 보람이 있었다.     잉까시장(전통시장)에는 알록달록한 공예품이 숱해 진렬되여있다. 진짜 한폭의 말그대로 꽃바다를 이루고있다.     이곳 사람들의 문화수준, 예술수준을 반영하는 로천박물관이다. 상인들은 손님들을 아주 상냥하게 대해준다. 알아들으나 못들으나 지기 상품을 열심히 소개한다. 이것저것 만져보며 향수하고있는 안해를 바라보니 자기에게 적합한것은 외면한다. 손군들의것 딸것, 사위것, 시동생부부 지어 시누이…     다 만져보자면 최저 한시간 걸쳐야 한다. 나는 나대로 아무데나 걸터앉아 흥취있는 곳을 골라 부지런히 록상기를 돌린다. 또 우리네 주숙지에서 자가용을 타고 공항쪽으로 한시간가량 가노라면 “민까”라고하는 가장 큰 농상품시장이 있다. 이곳에서 이곳의 물고기종류, 채소과일 종류들을 료해할수 있다. 아마 사방 1평방킬로메터는 될것 같은 이 시장에는 진짜 없는것 외에는 다있다. 나의 가장 큰 흥취는 북반부에서 보지 못하던 고기, 보지못하던 채소, 과일을 구경하는것이다. 안해의 지시에 따라 한구럭 사들고 귀로에 오른다. 또 한 시장은 중국시장이라 하는데 우리 중국놈들이 즐겨먹는 채소, 과일, 여러가지 향료들이 있어 이곳은 우리가 가장 자주 발길을 옮기는 곳이다. 우리가 이곳을 올때 부부간이 뻐스로 온다고하니 그곳에 있는 중국친구들이 놀란다. 말도 모르면서 어떻게 뻐스를 타는가하고. 아마 손짓 발짓 손마선질의 능수인 나의 로친네 특장을 모르기때문일것이다.     백화나 옷가게를 지날때면 나는 아예 들어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보초를 선다. 그도 그럴것이 딸과 녀편네는 가게의 모든 옷을 다 만져보기전에는 떠날념을 하지 않으니깐. 심지어 모델이 입은 옷까지도 뒤적거려보고야 시름 놓는다. 세상에 인생에 옷을 몇벌 입는다고 저렇게 열심히…     뻬루의 고적지와 경관들을 거의 다 돌아보고 딸은 손녀동반으로 우리를 이끌고 린접국 브라질로 향한다. 브라질에서의 유쾌한 일주일은 눈깜짝할새 끝났다. 리마로 돌아온후 두루 성탄절이요, 원단이요 쇠노라니 시간가는줄 몰랐다. 이곳 어린이들은 유치원에서부터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 그 신앙정도가 아주 두터웠다. 외손녀는 성탄절날 선물을 보낸 사람은 꼭 성탄할아버지라고 믿고있다. 성탄절이 되기전에는 성탄소나무에 달린 뢰물함에 절대 손대지 말라고 “아바이”에게 심심 당부한다. 천주교 교육은 어린이들은 선량하고 침착하게 인도하는데는 아주 좋은 작용을 하는것 같았다. 두루두루 남미주에서의 근 백날이 지나 다시 고향을 향하여 나래친다.     잘 있어라. 남미주 뻬루야~나는 간다~     2014년 2월 27일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뻬루에서 아침 밥 미국에서 점심이라 한국에서 술잔 들고 중국에서 안주드니 둥근 뽈 반바퀴 하루사이 굴리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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