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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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귀신 • 별찌 • 룡 댓글:  조회:1737  추천:0  2013-06-21
귀신 • 별찌 • 룡 홍천룡 누구나 천진란만했던 동년시절을 겪어왔을것이다. 저 밤하늘의 별처럼 아득하게만 보이는 동년시절, 야- 그 시절엔… 그 시절에 헐벗고 굶주리며 살아왔든 잘먹고 호강스레 살아왔든지간에 동년시절은 그립기만 하다. 등산하다가 촐랑거리는 시내물에 시원히 발을 잠구면 어쩐지 동년시절이 그리워진다. 동년시절에 나는 옛말을 듣기 좋아했었다. 특히 귀신옛말이라면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무서워서 오돌오돌 떨면서도 들었다. 내가 살던 공신촌”웅덩개”마을에서는 정구형님이 귀신옛말을 귀신같이 했었다. 여름 밤, 검푸른 하늘에 별들이 총총할 때면 정구네 마당가엔 쑥을 태우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고 그 주위에는 늘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눈이 초롱초롱해서 빙 둘러앉는다. 코를 훌쩍거리는 놈, 쑥연기에 콜록거리는 놈, 별놈들이 다 있다. 그러다가도 옛말이 아슬아슬한 정절에 이를 때면 녀석들 코물이 허옇게 드리워도 훌쩍거리지 않았고 쑥연기가 자오록해도 콜록거리지 않는다. 한번은 정구형님이 “… 그 야밤삼경에 솨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갈대밭이 량쪽으로 쫙 갈라진거야. 바로 그때였지…” 라고 하였을 때 뒤쪽에 앉은 “코풀레기”가 “귀신이다!”라고 소리질렀다. 순간, 심장이 뚝 멎는것만 같았다. 밤바람에 옥수수잎이 우수수 떨리는 소리만 소름 끼치게 들려올 뿐이였다. “어디?” “저기!” 그 녀석이 손가락으로 밤하늘을 가리켰다. 모두들 고개를 쳐들고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빨간 불티같은것이 가늘고 긴 꼬리를 감추며 밤하늘에 금을 긋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것이였다. “야-” 저마다 나지막하게 감탄을 뽑았다. “귀신이 아니고 별찌야.” 정구형님이 해석해주었다. 허지만 나는 별찌가 귀신이 아니라면 하늘에 있는 귀신이 별찌에 불을 달아준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빨갛게 타번지고있었는데… 귀신이 못하는 노릇이 없잖아! 귀신옛말을 들어보면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바다밑에서나 사람이 못하는 노릇을 귀신이 하고있었던것이다. 소학교 3학년 때 어느 한 교학시간이였다. 강선생님이 낡은 사회에서는 제국주의, 관료자본주의, 봉건주의 등 3대큰산이 로동인민의 머리를 지지리 억누루고있었는데 압박이 있는 곳엔 반항이 있기 마련이라며 결국 누가 이 3대큰산을 뒤엎었겠는가 하는 계발성문제를 제기했었다. 누군가 얼마나 큰산이였는가고 묻자 선생님은 자연적인 모아산이나 히말라야산과는 비교할 바도 못되는 어마어마한 사회적인 산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눈이 머룽머룽해서 대답을 못하고있었다. 내가 한창 귀신옛말에 빠져있을 때라 별로 생각도 없이 심드렁해서 “귀신!”하고 내뱉았다. 와! 하고 아이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뭐, 귀신?” “예!” 나는 당당하게 긍정했다. 그 어마어마한 큰산을 귀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뒤엎을수 있단 말인가! “이 동무의 세계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학후에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오시오.” 선생님의 얼굴은 대뜸 배추잎처럼 퍼러딩딩해졌다. 하학후에 교무실에 들어서니 선생님이 나를 세워놓고 호되게 꾸짖는것이였다. 어찌나 달달 볶아댔는지 곁에 남선생님이 보아주기 민망했던지 한마디 끼여들었다. “허허, 그 학생의 상상력이 기발하구만. 귀신까지 련상시키다니. 그렇지 뭐, 당시 3대큰산을 뒤엎기 위해서는 귀신이 있었다면 귀신도 끌어당겼을터였지. 모택동이 단결할수 있는 력량을 다 쟁취하여 통일전선을…” “최선생, 계급관념으로 학생의 세계관을 개조시켜주고있는 이 엄숙한 마당에 그게 무슨 태도입니까, 예? 선생은 그래…” 그 남선생님이 연신 팔을 내둘렀다. “됐소됐소. 나야 뭐 그게 그저 그렇다는거지. 허허.” 후에 강선생님이 어머니를 찾아 단단히 침을 놓은것 같았다. 어머니의 단속에 나는 옛말 들으러 가기 힘들어졌다. 우리 어머니도 귀신은 몰라도 미신은 은근히 믿어온 터였다. 내가 자주 앓는다고 점은 얼마나 쳤고 “방토”는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소학시절에 나는 몸이 약해서 늘 앓음자랑을 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연길시내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다녔다. 5학년 여름방학에 어머니는 명신골에 용한 의사가 있다는 풍문을 듣고 또 나를 데리고 갔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 까까머리에 흰안경을 코등에 건 의사가 녀환자의 배를 만지며 곁에 앉은 령감과 롱담을 걸고있었다. “녀자들의 배를 슬슬 어루만지며 벌어먹는 내 팔자도 괜찮지.” “또, 또, 쌍소릴…” 내 차례가 되였을 때 그 의사는 나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나의 뒤통수를 툭 쳐주는것이였다. “이 녀석이 기가 절반 죽어있구만. 이름이 뭐지?” 나의 본명은 “홍순룡(洪淳龙)”이였다. “어허, 이름이 틀려먹었어. 룡이란 놈은 순박하지 않아. 순수한 놈도 없고. 돼지주둥이에 소대가리에 뱀꼬리에 두루두루 합친 놈이여서 하늘땅 치며 우쭐렁거리는거야. 이름부터 고쳐. ‘순’자를 빼고 하늘 ‘천’자를 넣지.” 그리고는 아예 “홍천룡”이란 이름으로 처방을 떼주는것이였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이튿날로 파출소에 가서 내 이름을 고쳤다. 정말 귀신이 곡할 일이였다. 그때로부터 장장 40여년동안 나는 크게 앓아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입원해보지 못했고 몸에 수술칼 한번 대보지 못했다. 그런 연고가 있어서인지 어떤 때는 정말 귀신이 되여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옛날에는 귀신이 하늘에서 별찌를 가지고 놀았지만 지금은 사람도 달나라 별나라로 날아다닌다. 그게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우주공간으로 별찌처럼 날아다닐고! 지금 아이들은 귀신옛말을 듣지 않는다. 허지만 “해리포터”같은 환상소설이나 텔레비드라마는 죽기내기로 본다. 그런 소설과 드라마의 장면을 두루 스쳐보면 그제날 귀신옛말과 흡사한데가 많다. 아이들은 그런걸 보면서 상상의 날개를 키운다. 우리 민족의 후대교양에도 “귀신옛말”같은 교육이 따라갔으면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지금 아이들은 학교에 붙으면 교과서가 눈을 가리워주고 시험이 수족을 비끌어매준다. 이런 교육체계를 부정하는것은 아니지만 부동한 기질에 부동한 천부에 부동한 꿈을 꾸는 아이들에게는 부동한 양성대책이 따라가야 할것 같다. 글로벌시대에 우리 민족이 세계선진행렬에 당당하게 들어서자면 아이때부터 “귀신”이 되여보겠다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키워주고 별찌처럼 날아다닐수 있는 날개를 키워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귀신”이 많이 나올수 있고 “귀신”들의 왕인 “룡”도 나올수 있는것이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노벨상수상자명단에는 우리 민족의 이름이 단 한사람만이 올랐다. 평화상을 수여받은 김대중대통령이다. 그밖에 넓고도 넓은 과학분야와 문학방면은 공백이다. 전 민족이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모든 아이들이 판에 박은듯한 공식속에서 양성된다면 영원히 “귀신”이 나올수 없고 “룡”이 나올수 없고 노벨수상자가 나올수 없게 된다. 귀신이 되여보겠다는 많은 “귀신”들이 요람속에서 요절되여가고있다. 가슴아픈 일이다. 나는 이미 쉰고개를 넘은 사람이지만 다시한번 “귀신꿈”을 꿔보고 싶다.
4    포대기를 버리든지 빗강대를 내리든지… 댓글:  조회:1104  추천:0  2013-06-20
- “아기문화”를 두고 한두마디 홍천룡   세월이 먹고 살만하게 되니 너도나도 “문화”를 관심하고있다. 먹고 살기 바쁠 때에는 “먼저 배나 채우고 봐야지”였고 살림살이가 구차할 때에는 “먼저 돈이나 벌고 봐야지”였다. 그런데 노래 한수를 부르고 몇만원씩 챙겨넣고 그림 한장에 몇십만원씩 메친다고 하니 모두들 눈이 휭- 돌아가고 입이 딱 벌어지지 않을수 없었다. 대합창이나 부르고 구호마디나 웨치던 군중문화속에서 도야되고 입학, 임직, 참군시에 꼭 써넣어야 하는 “문화정도”란에만 관심을 돌렸던 사람들도 요즘에 와서는 “음식문화”요 “패션문화”요 하는 “변두리문화”에까지 눈길을 돌리고있다. 문화란 대체 무엇이길래? 한두마디로 딱 찍어 말하기 곤난하다. 그 범위가 너무 넓고 그 함의가 너무 깊어서… 옛날에는 서당집 온돌방에서 언문풍월을 듣고 나와도 첨지쯤으로는 인정해주었고 후에는 뒤고방 야학당에서 “가, 갸. 거, 겨…”를 배우고 나와도 시골선비쯤으로는 인정해주었었다. 지금은 학교문을 나와야 문화인으로 인정해준다. 나라에는 나라문화가 있고 민족에는 민족문화가 있고 가정에는 가정문화가 있다. 누런 력사책을 뒤적여보면 주먹깨나 쓴다고 펀펀한 사람을 데려다가 자기집 노예로 만든 악인이 있었는가 하면 세세대대로 물려온 자기들의 언어를 버리고 다른 민족의 언어를 받아물고 냠냠거리는 동화족도 있었다. 근대에 와서는 돈깨나 있는 나라들에서 못사는 나라들에 “변리”를 놓아 폭리를 얻었는데 현대에 와서는 차원이 높은 나라들에서 “광대놀음”같은 문화산업으로 다른 나라의 눈길을 잡아끌고있다. 옛날에는 남의 눈에 나면 남먼저 얻어맞는다고 하였지만 지금은 남의 눈에 나야 엽전이 더 날아든다. 뭐, 각설이식 문화경제타령이라고나 할가! 그 문화의 힘이 마력같고 그 문화의 영향이 료원의 불길처럼 퍼진다. 탱크로도 밀어낼수 없고 만리장성을 열개나 더 쌓는다 해도 막아낼수가 없다. 한 녀자가 할일도 없고 돈도 딸리니 필을 들고 긁적거리며 환상소설을 써냈다. 생각밖에도 그것이 베스트셀러가 되여 전세계 언어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나라와 민족들이 다 번역해갔고 또한 영화와 드라마를 찍어서 세계각지에서 다 볼수 있게 하였다. 그 경제적가치를 따지니 현대화설비를 갖춘 자동차공장을 몇개 앉힌것보다 더 높다고 하니 기가 딱 막힐 일이다. 그래서 요즘엔 너도나도 “문화”에 뛰여든다. 문화의 중점이 대개 발굴, 계승, 창조에 있는 것 같다. 옛날에 추었던 학춤같은것도 발굴해내고 상모춤같은것도 계승해 받아들이고 새로운 관광문화같은 것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나도 이 기회를 빌어 “아기문화”에 대해 한두마디 해볼가 한다. “아기문화”란 아무래도 아기를 키우면서 쌓아온 경험이나 노하우 같은 것일것이다. 여기에는 먹이는 것, 입히는것, 위생적인것, 교양적인것 등 다방면이 들어있다. 아이 둘을 키워봤지만 남자이니까 아버지란 각도에서 팔짱이나 끼고 잔소리나 좀 했을 뿐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는 말하기 곤난하고 싱거운 포대기문제나 하나 꿰들고 피루어보련다. 털이 많이 나는 서양에서는 어쩌는지 모르겠지만 솜이 많이 나는 동방에서는 아기가 태여나면 대개 포대기에 싸안고 키운다. 요즘에는 뭐 거위털을 깐 업을수도 있고 안을수도 있는 다용적포대기도 있기는 하지만서두…아기는 저항력도 약하고 면역력도 약하기 때문에 포대기에 싸안고 젖도 먹이고 바깥출입도 하는 것이 더없이 필요한 대책이다. 어느 날, 3선뻐스에 올라앉았는데 아기를 포대기에 싸안은 젊은 각시가 오르기에 자리를 내여주었다. 그 뒤로 대여섯 사람이 우루루 따라 오르더니 각시가 앉은 주위를 빙 둘러싸는것이였다. “얘, 이 포대기앞을 좀 젖히자. 애가 숨이 막히겠다.” 몸집이 비대한 50대의 녀인이 숨이 차서 헐떡이면서도 팔을 뻗쳐 포대기의 앞섶을 들려고 한다. 분명 각시의 친정 어머니같았다. 헌데 마중켠에 선 걀편한 녀인이 그 팔을 밀어친다. “이봅소 안사둔, 요즘 류행성감기가 무섭습꾸마. 괜히…” “그래그래! 저 안사돈말이 옳다니.” 뒤에선 50대의 나그네가 목을 왜가리처럼 길게 빼들며 연신 주억거렸다. 젊은 각시는 두 녀인을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레 포대기의 앞섶을 포개놓는다. 전염성병균이라도 들어갈가봐. “자기야, 그래도 애가 좀 숨이나 쉬게 해야지. 자꾸 꽁꽁 싸기만 하면 어떻해?” 삼십대의 젊은이가 아기의 아빠인 것 같았다. 신랑의 권위적인 건의에 각시는 다시 조심스레 포대기의 앞섶을 열었다. 빠금히 열려지는 포대기속으로 아기의 얼굴이 나타나기도 전에 “응아!”하는 울음소리가 튕겨나왔다. 젊은 각시가 “어마나!”하며 다시 포대기앞섶을 조심스레 포개놓으며 신랑을 향해 고운 눈을 할기쭉거린다. “봐요, 자기도 참!” “그래그래. 꽁꽁 덮어라.” 뒤에 선 나그네 둘이 덩달아 께끼여든다… 참, 한 아이를 놓고 두 세대 세 가정이 구순하게 구는 모습이 재미있고 행복해보였다. 포대기속에 꽁꽁 싸인 아기는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고나 있을가? 모를것이다. 숨이 막혀 쌕쌕거리며 불평스레 발버둥질 쳤을것이다. 이처럼 아기의 불편은 모르고 자꾸자꾸 감싸기만 하는 페단이 우리의 조기교육에 엄중하게 존재하고있다. 일반적으로 아기는 6살까지 대뇌의 모든 갖춤새가 다 갖춰지고 성숙정도가 90%이상에 도달된다고 한다. 대개 6살부터 12-15세가량까지는 모든 사유기관이 발달되면서 객관사물을 접수하고 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어떤 교양과 환경이 조성되는가 하는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포대기는 아기가 한두살 때에 수요되고 일단 걷기 시작하면 별로 그다지 수요되지 않는다. 헌데 아기의 첫 교육자인 어머니가 포대기에 대한 애틋한 정과 그걸 써오던 습관을 떼여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 아기가 나날이 커가는데도 그냥 자꾸만 감싸고 돌기만 한다. 여기에서 60세 넘는 로인도 어머니의 눈에는 아이로 보인다는 말이 나진 것 같다. 하여 커가는 아이도 자꾸만 아기로 보여 늘 시름이 놓이지 않아 잔소리만 나간다. 그것이 아이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가? 어느 소학교마당에서 신입생입학식이 있던 날이였다. 빨간옷을 입은 신입생이 등뒤에 멜가방을 달싹이며 달려가는데 가방에서 파란 노트가 떨어졌다. 뒤에 따르던 곤색옷을 입은 아이가 그걸 주어가지고 “빨간옷”을 쫓아가서 넘겨주었다. 헌데 “빨간옷”이 자기의 가방안에서 노트를 훔쳐냈다고 “곤색옷”을 오해하고 가슴을 툭 쳤다. 억울하게 된 “곤색옷”이 가만 있을리 만무했다. 역시 주먹을 내들고 “빨간옷”을 쳤다. 두 아이가 서로 얼크러져 돌아가자 학부모들이 모여들어 뜯어놓고 타일렀다. 특히 “빨간옷”이 오해도 풀지 않고 손을 댄 것이 잘못이라고 꾸짖기도 했다. “빨간옷”은 코를 풀쩍이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어딘가 자기의 잘못이 알렸는지…그때 “빨간옷”의 어머니가 나타났다. “빨간옷”이 어머니의 품에 와락 안기며 와-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어머니 역시 아들의 잘못을 중복했다. 원인도 캐여묻지 않고 “개학날에 재수없이 아이를 울긴다”고 침방울을 튕겼다… 어머니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빨간옷”은 그날 자기의 잘못을 얼마간 깨달았을것이다. 헌데 어머니가 나타났기에 그는 어머니가 그동안 그자리에 없었기에 자기가 어른들의 꾸중을 받았다는 억울함이 솟구쳐 그 깨우칠가 하던 반성마저도 까맣게 지워버리게 되였다. 이렇게 포대기로부터 인기된 감싸고 도는 습관이 느티나무처럼 아이의 성장에 긴 그늘을 지워준다. 그래서 자립, 자존, 자강정신이 부족하게 된다. 사람은 많으나 인재가 부족하고 천재가 희소한 원인을 따져보면 그 뿌리가 여기에 있다. 사물은 언제나 모순속에 처해있는것이다. 포대기속에서 포근하게 자라던 아이도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면서 자기의 의사를 고집하고 반항할 때가 있게 된다. 그 반항의 첫 맞적수가 바로 그 어머니이다. 어머니와의 겨룸에서 유아원이나 학교에 입학하기전까지는 아이가 이기는 비례가 더 높다. 학교에 붙게 되면 학교의 요구가 있게 되고 사회의 감독도 있게 되기에 어머니쪽에서 늘 지면서 아이의 요구를 만족시켜 줄수 없게 된다. 그런데 늘 “상승장군”으로 뻗대오던 아이가 어머니의 한두마디에 “투항”하자고 하겠는가? 그래서 “무력”을 쓰지 않을수 없게 된다. 무력을 쓰자면 무기가 좋아야 한다. 어머니들이 흔히 쓰는 무기는 “빗강대”였다. 우리 조선족들이 온돌방에서 쓰는 비는 자루가 짧은 조막비였다. 그것을 거꾸로 거머쥐고 아이의 엉뎅이를 잡아치면 몽둥이로 치는것처럼 뼈를 다칠 위험이 없었고 회초리로 치는것처럼 굴뱀이 갈 흔적을 남기지 않는것이다. “무력”의 허풍으로 아이를 굴복시킬수도 있고 또 가슴 아린 흔적도 남기지 않으면서도 수시로 방구석에서 챙겨잡을수 있는 좋은 “무기”였다. 그 무시무시한 “빗강대취조”에는 아이들중 열에 일여덟은 굴복하고 만다. 한두번의 승전에 재미를 보게 된 어머니들은 아이가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빗강대를 집어들군 한다. 그러면 어떤 아이는 어머니가 빗강대를 집어들기만 해도 아예 두손을 들고 “투항”하고 만다. 생활방식이 많이 변한 오늘날 비를 쓰지 않는 집이 많아짐에 따라 “빗강대무력”대신 다른 “폭력”을 쓰지만 실질은 한가지이다. 이것이 점차 어머니들의 고질로 되여 나중에는 무엇이나 다 자기의 의사에 따라 자식들이 해줄것을 강요하게 된다. 이것이 무섭다. 지금 대학입시에서 70-80%가량의 수험생들이 부모의 의사에 따라 지망을 선택한다고 한다. 어머니가 없으면 세계는 없다. 세계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돌아가고있다. 어머니의 거룩한 사랑과 위대한 업적은 한입으로 다 표달할수 없다. 그래서 “무엇으로 그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까!”하고 목메여 부른다. 그만큼 거룩하고 그만큼 위대하기에 또한 그만큼 자사적이고 그만큼 비속적인것이다. 세상의 나쁜 습관과 욕망은 어머니들이 싹틔워 준다. 처음에는 “포대기”로 감싸고 돌다가 후에는 “빗강대”로 길들이다가 나중에는 “포대기”와 “빗강대”를 번갈아 교차적으로 리용한다. “포대기”는 아이의 연약성을 감싸주고 “빗강대”는 아이의 개성을 짓눌러버린다. 때문에 아이들은 자기보다 강한 자의 앞에서는 뒤걸음질 치며 보호자를 찾게 되고 찾지 못하면 굴복하고 굴복해도 안되면 아첨하게 된다. 서로들 개성이 부동하게 두드러지질 못했기에 강약이 비슷한 제또래끼리는 평등하기를 요구한다. 누가 좀 삐여질가 하면 자연히 질투하게 되고 꼬집게 된다. 반면에 자기보다 약한 자의 앞에서는 우쭐해지면서 남을 깔보게 된다. 이 점이 또한 우리 민족의 한가지 렬근성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은 왜서 장시기동안 남의 예속하에서 살아왔는가? 물론 여기에는 력사적, 지리적, 문화적인 요소들이 내포되여 있는것이지만 자기민족의 렬근성도 고려해봐야 하는것이다. 문제는 이런 렬근성이 우리의 경제사업에 우리의 문화사업에 우리의 기타 사업에 수시로 장애를 조성시켜 주고있다는 점이다. 짧은 밤에 긴 노래는 부를수 없기에 일일이 실례를 들어가며 언급하기는 곤난한데 일단 우리 모두 우리의 구체사업에서 누가 “포대기”를 안고 다니며 감싸주기를 좋아하고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며 “빗강대”질 하기 좋아하는가를 유심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 다음에야 무슨 대책이 있어도 있어야 할게 아닌가!
3    무용-랑만의 깃을 펴는 천사의 날개 댓글:  조회:1150  추천:0  2013-06-19
무용-랑만의 깃을 펴는 천사의 날개 홍천룡 “소곰재(잠자리)꽁-꽁-, 앉은 자리에 앉아라, 먼데 가면 죽는다…” 잠자리를 잡는것이 아이로 자라면서 시작되는 첫 사냥이였다. 그것도 인간의 기만술을 배워서 어설프게 실천하면서 말이다. 배재굽이에서 수수대꼬리를 잡고 식지 하나만 빼들고 잠자리야 고기에 앉으렴 하고 홀린다. 빠알간 꼬리에 유리 같은 날개를 파득이는 잠자리가 앉을가 말가 하다가도 살풋이 내려앉는다. 긴장해서 숨을 죽이는 순간, 엄지를 내밀어 가시발 같은 고놈의 발가락을 잡으려는 찰나, 앗차, 엄지 먼저 식지가 꼬부라진 실수! 고놈이 날개를 파르르 떨며 살짝 날아오른다. 먼데로 날아가면 죽는다는 말에 더 높이는 날지 않고 곧바로 머리우에서 맴돌며 하늘하늘 춤춘다. 붙잡히우지 않았다는 행운을 경축하는 양, 쌍쌍이 돋은 날개를 즐겁게 뱅뱅 돌린다. 아, 날개가 있어 자유스러운 녀석이다. 자유스럽기에 춤을 추는 녀석이다. 자유의 특징적표현방식이 춤이다. 그러니 춤을 춘다는 자체가 자유스러움을 의미한다. 어릴 때에는 춤에 대해 흥취도 없었거니와 춤을 추는걸 구경하기조차 싫어했다. 동네돌이를 해보면 대개 술뒤끝이면 춤판이 벌어지군 했다. 그런 춤판은 혼잡스럽기 그지 없다. 절반은 주정뱅들이 뚱땅거리며 주정부리는 발광이여서 곁에 가서 구경하기도 무섭다. 그다음 좀 점잖은 춤판은 결혼잔치뒤끝에 벌어지는 오락판이였다. 그런 오락판에서는 “주석”의 사회하에 질서있는 차례순서를 지키면서 그 집안에 걸려드는 친척들과 친구들이 자기의 장끼를 보여주면서 분위기를 돋군다. 노래가락이 흐르면 남녀가 팔을 흔들며 좁은 방안을 빙글빙글 돌아친다. 혹간 웃기는 사람들이 있어 볼만한 구경거리로도 되군 했다. 50년대중반에는 무도바람이 불었다. 쏘련의 “마우재”들 “딴스”가 류행되였었다. 마을에서는 직장으로 다니는 직장인들이나 다녔고 농호촌민은 다닐 엄두도 못내였다. 직장인들 가운데서도 젊고 멋이나 부리는 “하이칼라 도끼머리”들 아니면 “스까드 치마”들이 다녔을 뿐이였다. 춤에 대해 흥취를 가지게 된것은 “문화대혁명”시기부터였다. 우사칸마당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충성무”를 배워주었다. 가도주임이 동원해서 배웠는데 우리 어머니도 전에 없던 열성을 보였다. 나갈 때면 꼭 새옷을 바꿔입고 나갔다. 나도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데 어머니의 동작이 굼떴고 팔과 다리가 맞지 않아 엉거주춤거릴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내가 어머니의 앞에 나서 시범동작으로 리드했던것이다. 집에 돌아와서는 체경과 마주 서서 배운 것을 련습하군 하셨는데 동작이 생각나지 않거나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밖에 나가 놀고있는 나를 불러들이군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다른 사람의 동작을 한두번만 보면 비슷하게 모방할줄 알았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머리, 목, 팔, 손목 등 주요부위의 움직임요령과 선률흐름에 따르는 동작의 변화를 상세하게 가르쳐드리군 했다. “너 정말 어물쩍하구나. 배고프지? 식장안에 달걀이 있어. 딱 하나만이야!” 춤동작을 배워준 “학비”로 아버지께만 드리는 삶은 닭알 하나씩 맛보는 장려를 받군 했다. 그러면 그날 하루는 기분이 둥 떠서 온하루 휘파람을 불어댄다. 지금 말로 피룬다면 “예술적세포”가 있었다고나 할가! 어느날 아버지가 시뻘건 입장권 몇장 가져왔다. 온집 식구가 입이 함박만해져 저녁밥을 일찌감치 해먹고 저마다 새옷을 떨쳐입고 나섰다. 동네골목을 와짝 짜기며 자랑질에 우쭐렁거려보기도 했다. “공인문화궁”이라는 건물앞에 이르러 나는 저으기 주눅이 들었다. 그처럼 웅장한 건물앞에 서보기는 처음이였다. 지금 내가 출근하는 직장인 출판사가 바로 그 옛날 “공인문화궁”과 마주 앉아있어 매일 두세번씩 그 앞을 지나다니게 된다. 매번 그때 생각을 하게 되면 어이없어 웃음이 나오게 된다. 지금 보면 한낱 고태가 력력한 구식건물에 불과한것뿐인데… 그때 나는 처음 무대공연을 관람하게 되였다. 무대우에서의 무용표현은 술놀이 뒤끝에 벌리는 춤판도 아니고 결혼잔치뒤끝에 진행되는 오락판도 아니고 우사칸마당에서 수십명씩 추는 집체무도 아니였다. 좌우량켠의 강렬한 조명이 무대를 신비스러운 다른 한 세계로 만들어놓고있었다. 배경에는 수려한 산천도 나오고 휘날리는 붉은기도 나오고있었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한 세계처럼 보였고 거기에 올라가 보고싶은 동경심을 자아내는 유혹적인 꿈나라처럼 보였다. 그다음 나의 마음을 황홀한 선경에로 이끈 것은 음악선률이였다. 가끔씩 우사칸회의실에 손풍금수가 와서 풍금을 쳐도 그 소리가 듣기 좋았었다. 고요한 한밤중에 마을에 학철형님이 하모니카를 불어도 그 가느다란 소리가 은은하게 마음을 휘저어놓았는데 지금 이 극장안으로 흐르는 선률은 손풍금소리도 아니고 하모니카소리도 아닌 이름 모를 숱한 악기들이 어울려서 내는 협화음이였다. 때론 잔잔하게, 때론 경쾌하게, 때론 우렁차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놓고있었다. 그리고 인상적이였던 것은 공연배우들의 화장한 얼굴이였다. 들어올 때 입구에서 한 녀배우가 새빨갛게 화장한 얼굴을 해뜩거리며 우리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인차 귀신이 아니냐는 생각부터 들었던것이다. 정구형님의 귀신옛말에서 나오는 요사한 요귀들이 일반적으로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다녔던것이다. 헌데 무대우에 올라선 배우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선남선녀와도 같은 아릿다운 모습이였다. 아마도 무대조명의 귀신 같은 조화였을것이다. 정채로운 절목가운데서도 나를 흥분시키는 것은 그래도 무용이였다. 독무도 있었고 쌍무도 있었고 집체무도 있었다. 독무를 추는 녀배우의 날씬한 몸짓, 버들가지처럼 하느작거리는 팔짓, 딛는듯 마는듯 잠자리날개인양 뱅뱅 돌아가는 다리짓에 눈이 가물거릴 지경이였다. 남녀쌍무 역시 동작도 경쾌했고 어울리는 분위기도 흔쾌했다. 큰 폭에 원을 그리다가 잦은 가락에 작은 폭으로 이어대는 앙금질뒤끝에 서로 빙글빙글 돌아서 감기고 스리살짝 풀리면서 돌고 하는 반복동작이 마치도 살짝쿵 소쿠라지는 시내물소용돌이를 보는듯 상쾌해진다. 더욱이 군무는 나에게 격동과 힘을 주었다. 동작들이 힘차고 폭이 컸을 뿐만 아니라 착착 꺾어지고 이어지는 교차성이 일치했고 선명했다. 종적횡적으로 부단히 변화되는 배렬, 원점으로부터 각을 이루며 갈라지는 대각선, 각이 큰 팔짓과 다리짓이 반복되면서 이루어지는 박력감,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는 조형감, 군무가 보여주는 것은 앙양되는 투지력이였다… 그 공연을 관람한 후부터 나에게는 한번 무대에 올라가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무대가 천당처럼 신성해보였고 그 우에서 춤추는 배우들이 선녀나 신선처럼 보였던것이다. 그후 나는 어디에서 무슨 공연이 있다하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입장권이 있든 없든간에 무조건 찾아가군 했다. 표가 없으면 보일러작업실을 리용하지 않으면 변소간유리를 깨면서라도 들어갔다. 한번은 들키워서 “로동자규찰대”한테 귀썀을 얻어맞고 극장안에서 쫓겨난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무대에서의 기본 무용동작을 익히느라 애를 썼다. 그래서 동네아이들을 웃길 때가 많았다. “임마, 제 주제꼴이나 좀 보고 너덜거려라. 네가 무대에 올라 춤추면 누가 봐줘?” 헌데 세상에는 이따끔씩 주제에 넘는 일이 생겨나기도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니 학교에는 “학교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가 있었고 각 반급에는 반급끼리 꾸리는 “반급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가 서게 되였다. 학교”선전대”와 반급”선전대”의 사이는 모주석의 말씀에 비추면 “양춘백설(阳春白雪)”과 “하리파인(下里巴人)”사이였고 지금 말로 풀이하면 전문직“수준급”과 과외직”아마추어”사이라고 할가? 아무튼 “반급”은 시시한 축에 속했고 “학교급”은 쟁쟁한 축이였던것이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나도 행운스럽게 “학교급”에 들었던것이다. 당시 허숙자선생님이 지도하신 “연길시3중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라면 연길시안에서는 제일 기백이 있고 꼴꼴한 공연대였다. 무슨 “5•1절”이요 “7•1절”, “8•1절”, “국경절”이요 하는 기념행사에는 꼭 우리들의 공연임무가 떨어졌고 주, 시혁명위원회의 주요행사에도 공연임무가 떨어지군 했었다. 그러다 보니 방학이란 없었고 절목련습에 밤을 팰 때가 많았다. 공부를 뒤전에다 둘 때라 뭐 학업에는 크게 영향이 없었고 다른 아이들보다 덕을 보게 된 것은 참가하기 싫은 비판회의나 동원대회 같은 정치활동에 빠질수 있었고 의무로동이나 “5•7농장”에 가서 기음을 매지 않았던것이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처음 무대에 올라서본 것은 그 웅장한 건물이였던 “공인문화궁에서였다. 주초대소(지금의 주당위사무청사임)에서 점심을 먹고 화장한 다음 렬을 지어 문화궁으로 갔는데 자꾸만 가슴이 두근닥근거렸었다. 무대에 올라서면 모든 것이 불빛아래에 드러나고 수백쌍 눈이 지켜보고있기에 그 어떤 미세한 실수도 감출수 없다는것이다. 우리가 나갈 첫 절목은 “동풍이 불고 전고가 울린다”였다. 전주곡이 울리였는데도 나의 가슴은 그냥 두근거렸었다. 드디어 전주곡이 끝나고 트럼펫 고음선률의 울림과 함께 우리는 2렬종대로 한결같이 팔을 반공중에서 절주있게 폈다 꺾으며 무대에 나섰다. 무대공간은 휘황하고 현란하기만 했다. 모든것이 활 풀리면서 가슴도 뛰지 않았다. 공산주의서광이 비껴오는 저기 저 동산마루로 활개쳐 오르는 기분으로 전환되였다. 무대아래에서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격정이 각일각 고조되고있었다. 무대우에서는 절대 관람석을 내려다 보지 말라고 선생님이 늘 강조하셨다. 높은 무대우에서 내려다 보면 눈가녁을 짙게 화장한 눈이 꼭 감고있는것으로 보인다는것이다. 무대우에서 눈이 감긴것으로 보이면 우선 전반 얼굴의 광채를 잃게 된다는것이다. 그러니 광채를 잃은 얼굴에서 감정표현같은 것은 더구나 운운할 여지도 없단다. 때문에 무대우에서는 눈을 늘 45도 높이를 바라보며 떠야 한다고 했다. 무대우에서는 45도가 아주 중요한 각도였다. 얼굴을 옆으로 돌릴 때에도 90도로 꺾지 말고 45도에 맞추어 탈고 팔을 쳐들 때도 45도 높이, 턱을 쳐들어도 45도 높이, 다리를 펴들어도 45도 높이… 그런데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몇번 관람석을 내려다 훔쳐보군 했다. 앞좌석 몇줄은 운무속에 잠긴 영상처럼 보얗게 알렸고 뒤쪽은 거뭇한 장막속에 가리운 까막 나라여서 보이지 않았다. 마치도 우리가 구름우에 떠서 해빛을 받으며 춤추는 천사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황홀함은 이루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일생에서 도대체 몇번이나 무아지경 황홀속에 빠져 넋을 잃어본적이 있는가! 그 격동, 또한 한가슴 뿌듯이 부풀어오른다. 그 희열적인 충격감은 무대에 올라가 직접 춤을 춰보지 못한 사람은 감수해낼수가 없다. 수백쌍 선망의 눈길이 지켜보고 열망의 가슴으로 안아주는 무대우에서 두팔을 날개처럼 마음껏 퍼득이며 행복의 요람으로, 희망의 언덕으로, 평화의 천당으로 날아예려는 매 하나의 동작, 매 한송이의 웃음꽃은 아름다운 미에 대한 부각이였고 사랑의 선물이였다. 그 첫 공연이 있은다음부터 나는 무용련습에 더 땀을 흘리군 했다. 기교를 잘 련마하여 더 많은 공연에 나가 표현하고싶었던것이다. 그래도 나는 일정한 “예술적세포”가 있다는 말을 가끔 듣기도 했다. 당시 우리 선전대의 남대원들의 우상은 발레무용극 “백모녀”에서 등장하는 남배우 “왕대춘”과 “홍색랑자군”에서 나오는 남주인공 “홍상청”이였다. 거리나 영화관에 나붙은 포스터나 팸플릿에서 그들의 형상을 볼 때마다 정신이 분발되고 힘이 막 솟구쳤다. (나도 이다음 꼭 저렇게…) 그들의 형상이 나어린 나의 가슴에 무용이라는 이 희망의 불길을 활활 지펴놓았다. 무용에 나의 일생을 바치리라 속으로 수없이 다지기도 했었다. 무용보다 더 우아하고 더 고상하고 더 예술적인 직업은 이 세상에 없다고 인정했기때문이였다. 허나, 그 랑만에 넘치는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비극이 한발자국 한발자국 소리없이 나에게로 발볌발볌 다가서고있음을 나는 감촉하지 못하고있었다. 후에 연변가무단이 회복되고 시문공단이 서면서 일부 대원들이 추천되고 뽑혀서 전문직 문예일군으로 되였다.지어 심양군구철도문공단이요 북경군구에서도 예술인재들을 모집하러 오게 되였다. 헌데 나는 초벌기음에 속하는 예선에도 뽑히우지 못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자연조건”이 얼마나 악렬했던지… 속상해서 소리없는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다른 아이들의 몸은 종적으로 우썩우썩 키돋음했지만 나의 몸은 어쩌라구 횡적으로 밀밀 뻗어나갔던것이다. 부모님들이 물려주신 “자연조건”임에야 어찌하랴! 허나, 후회는 없다.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그 시기 짧았던 무대경력이 나의 심신을 예술적으로 도야시켰고 무용에 대한 감성적인식을 가지게 하였던것이다. 생활에서의 무용은 희열의 표현이고 예술에서의 무용은 생활에 대한 반영이고 아름다운 미에 대한 부각이기에 앞으로 계속 훨훨 춤을 추며 천당어귀까지 날아가련다.
2    남으로 북으로 갈래갈래 뻗은 길 댓글:  조회:1060  추천:0  2013-06-19
•수필• 남으로 북으로 갈래갈래 뻗은 길 홍천룡    어릴 때 내가 살던 싸리골 마을에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었다. 마을 한복판에는 두레박 우물이 있었고 그 우물을 축으로 여러 갈래 길이 오불꼬불하게 가가호호로 통했다. 제일 큰 길은 남쪽으로 곧게 뻗은 신작로였는데 현성과 통했다. 마을을 떠나가는 사람, 동네로 찾아오는 사람 다 그 길을 통해 오고가고 했다. 동네 아저씨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현성까지 가면 세계각지로 다 갈수 있단다. 다만 돈이 없고 가난해서 못갔을 뿐이였지… 그 다음에는 북쪽 뒤산골짜기로 올라가는 달구지길이였는데 수레바퀴에 의해 패인 홈채기가 두 줄기의 철길마냥 길을 따라 평형으로 뻗어올랐다. 온동네 땔나무가 그 길을 통해 실려온다. 동네 어르신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 길을 따라 뒤산을 넘어 산발을 타고 계속 가면 운무속에 아아하게 치솟은 백두산까지도 갈수 있단다. 다만 호랑이, 곰, 승냥이 같은 야수가 범람해서 가기 무서웠을 따름이지…  그 외에도 동쪽으로는 푸르른 주단처럼 펼쳐진 논밭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고 서쪽으로는 펑퍼짐하게 등을 내민 강냉이밭과 조이밭으로 통하는 길도 있었고 서남쪽으로는 큰강으로 통하는 길도 있었다. 그리고 윗마을, 아랫마을, 앞동네, 뒷동네에서 제각기 마을밖으로 통하는 소로도 많았다. 마을사람들의 발자국이 제일 많이 찍힌 길은 그래도 남쪽으로 뻗어나간 신작로였다. 먼 옛날 할아버지의 아버지이신 노할배께서도 그 길로 노할매랑 할배랑 남부녀대하여 이 마을로 들어왔다가 갈 길이 막히자 짐을 푼 것이 그대로 눌러 앉고말았단다. 그 후에 백부님이 흰 중치막자락을 펄펄 날리며 그 길로 동경고학을 떠나셨고 또 그후에는 삼촌이 가슴에 뻘건 꽃을 달고 그 길로 조선전선으로 나갔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는 날 꼭 돌아오마 하던 삼촌이 한장의 렬사증으로 되여 돌아올줄이야! 영원한 과부가 되고 영원한 렬사유가족이 된 아주머니가 유복자인 형철이를 업고 늘 동구밖 비슬나무밑에 서서 저녁노을에 가물가물해지는 신작로끝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애잔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내가 깜장 헝겊가방을 메고 그 길로 학교를 다닐 때에는 길 량켠에 팔뚝만한 애어린 백양나무가 줄느런히 늘어서있었고 길녘에는 코스모스며 민들레며 할미꽃들이 빨갛게 노랗게 하얗게 피여있었다. 그때 아침해를 맞으며 등교길에서 부르던 노래가 지금도 귀전에 쟁쟁하다. 푸른 가로수는 하늘하늘 춤추고 예쁜 꽃송이는 방울방울 웃어요. 학교로 가는 길은 하냥 즐거워 …… 이 노래를 부르며 나는 구름송이 같은 꿈결에 몽롱히 젖어들었고 민들레의 포자엽 같은 희망의 씨앗을 길녘에 날렸었다. 크면서 나는 그 길로 중학교도 다녔고 그 길로 고중도 다녔고 그 길로 큰 도회지에 있는 대학교로 갔었다. 대학교문을 나와서는 갈래갈래 뻗은 길로 연변 각지도 돌아다녔고 중국 내지도 띄염띄염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며 북조선도 띄염띄염 돌아다녀 봤다. 연변을 놓고 봐도 연길시를 축으로 남쪽으로 나가면 이민사의 흔적이 력력한 룡정이 있고 룡정에서 오랑캐령을 넘으면 북조선 회령이 내다보이는 두만강가에 이를 수 있고 북쪽으로 이란고개를 넘어 가야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빨찌산 옛말이 깃든 왕청에 이르게 된다. 동쪽은 훈춘인데 소반령을 넘어가면 삼국이 내다보이는 두만강하류인 방천에 이르게 되고 서쪽은 이룡산을 끼고있는 안도인데 거기에서 서남쪽으로 달리면 아아한 백두산에 이르게 된다. 대한민국을 놓고 봐도 서울을 축으로 갈래갈래 길이 삼면 바다로 쭉쭉 뻗어나갔다. 동해로 서해로 대한해협으로! 해안가를 따라 점점이 박힌 제도, 군도, 해도들이 하늘에 별무리가 내려 앉은것만 같다. 북조선을 놓고 봐도 평양을 축으로 갈래갈래 길이 동해로 서해로 백두산으로 금강산으로 길게 짧게 뻗어나갔다. 산이 많은 곳이라 벼랑길이 많았고 벼랑길마다 절승을 이루고있었다. 중국의 장강이남은 사철 푸른 봄과도 같다. 항주, 소주, 가흥일대에 가서 뻐스를 타고 한바퀴 빙 돌면 길가에서는 노오란 유채꽃이 끝없이 아우러지는가 하면 파아란 논밭이 층층히 겹놓이여 눈뿌리를 빼준다. 길을 가다가 막히면 나룻배나 보트를 탈수 있다. 농촌마을엔 육로보다 수로가 더 많다. 길마다 골목마다 물이 골똑 차서 찰랑거리는데 문만 열고 나서면 배를 탈수 있다. 가끔씩 고풍스러운 석돌아치교아래에서 패랭이를 쓴 녀인이 몸을 한들거리며 노를 젓는 모습은 유유히 흐르는 한가락 선률을 방불케 한다. 그야말로 “강남수향”(江南水乡)의 싱싱한 싱그러움에 시원히 젖어볼수 있는 곳이다. 허지만 아무리 경치가 좋고 유정한 곳이래도 우리 조선족이 살수 있는 고장은 아니였다. 중국의 중원지구나 남방에는 경치가 수려하고 살기가 좋은 곳이 많다. 허나 우리 조선족이 살기에는 별로 적합한 곳이 없다. 한번은 한국문학작가회의 강원지회를 찾아 강원도 속초시로 가본 적이 있다. 초행이라 모든 것이 신기하게 안겨왔다. 북한강과 소양강 연안을 따라 태백산줄기를 굽이굽이 에돌며 뻗어나간 포장길 연도에는 하얀 읍내거리며 파랗고 빨간 지붕을 인 농촌마을들이 연이어 나타나군 했다. 그림속의 그림 같기도 하고 스크린속에서 이동하는 화면 같기도 했다. 차창 밖으로 쑥 안겨왔다가는 서서히 빙 돌며 뒤로 밀려가는 포전이랑 마을이랑 개울가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처음 와보는 고장이라 생소한데도 있었지만 눈에 익은 곳이 더 많았다. 어쩌면 고향 마을의 이웃집 아줌마를 몇년만에 이 고장에서 만난 기분과도 같았다. 왜 이처럼 신통할가? 마치도 우리 고장 룡정에서 회령과 마주 앉은 삼합으로 나가는 길녘 같기도 하고 화룡에서 무산쪽에 있는 남평으로 가는 길 같기도 하고 북조선 원정리에서 나진항으로 나가는 길 같기도 했다. 산기슭을 따라 아담하고 밝게 들어앉은 부락들이며 뙈기뙈기 다루는 포전들이며 펑퍼짐한 언덕바지에 우거진 과일숲이며 그 사이를 거미줄 치듯 굽이굽이 에돌아 흐르는 냇물이며… 바로 이런 고장이다. 산도 있고 물도 있고 포전도 있고 숲도 있고 하늘에서는 제비가 지지배배, 들판에는 둥굴이의 워낭소리 둘렁! 그 어떤 해설도 필요 없고 그 누가 속이자고 해도 속일 수 없는 고장, 백의민족의 하얀 넋이 하얗게 슴배여 응고된 고장이다. 그래서 서로서로가 신통히도 떼닮은 곳들이다. 이런 곳에서 우리 조상들이 세세대대로 살아왔고 우리도 그 속에서 커오지 않았던가! 오늘날 우리 백의민족은 서로 국적이 다르고 제도가 다른 곳에서 살고 있지만 핏줄이 한줄기인 것만은 속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서로서로가 다르다. 이명박대통령이 이끄는 대한국민들은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지도하는 북조선인민들 또한 어느 길로 가고 있고 호금도주석의 령도하에 있는 중국의 해외동포들은 또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가는 길이 다름에 따라 그 길이 탄탄대로로 이어질수도 있고 가시덤불 오솔길에 들어설 수도 있고 천 길 나락 낭떠러지에 이를 수도 있다. 이런 노래 한마디가 있다. 가시덤불 헤치고 험난을 물리치며 이 발자국 떼노라 길이 어디메냐 묻노니, 길이 발밑에 있거늘 …… 삼천리 강산이 비분에 떨던 그 시기, “한일합방”경술국치에 천만 동포들이 구경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가슴을 치며 낙루하였었다. 이완용은 무릎을 꿇고 매국의 길에 들어섰다. 민족을 모르고 나라를 모르고 살아온 인간이였으니깐. 김구는 애국계몽의 길을 찾아 해외에서 가시덤불을 헤쳤다. 도탄속에 빠진 민족과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충청북도 영동의 시골 마을에서 한 청년이 왜놈 순사를 때려눕히고 마을을 떠나 만주로 향했었다. 낮에는 대통로에 들어설 수 없었고 밤에는 길을 외끼군 했다. 산간벽지로 시골 마을을 에돌며 숲속을 비집고 삼림을 꿰지르고 태산준령을 톺고 강하개천을 헤가르며 길 아닌 길로 두달동안 걸어서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용정에 이르러 명동학교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독립”이란 나라찾는 길을 찾게 되였다. 그는 자기의 일체를 나라와 민족을 찾는 독립사업에 바치려고 맘먹었고 후에는 독립군에 들어가 백두의 밀림속을 넘나들며 수많은 왜놈들을 무찔렀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런데 그가 참의부와 정의부지간의 한차례 충돌에서 대방의 총에 맞아 죽었다. 결국은 다 같이 독립에 나선 사람들의 총에 맞아죽은 것이다. 죽을 때까지 그는 독립을 향한 길에도 당년에 만주로 가던 길처럼 갈래갈래 굽이굽이 다르게 뻗은 길이 많은 줄을 몰랐던것이다. 명년은 “6.25”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쟁은 수많은 미망인을 남겼고 수많은 고아를 만들었고 수많은 이산가족을 초래시켰다. 서로 눈에 불을 켜고 동족끼리 쏘고 찌를 때 그대들이여,집에 계시는 부모님을 생각해 보았는가?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생각해 보았는가? 눈이 또랑또랑 해서 기다릴 아들딸들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들이라고 왜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허지만 전쟁이란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되는 생사판가리마당이다. 누가 그런 마당을 만들어 놓았는가? 이런 역사의 인간비극을 시나리오로 꾸미고 연출해낸 것도 우리 민족이였고 그걸 역사의 무대에서 공연한것도 우리 민족이였고 그걸 보면서 눈물을 흘린 것도 우리 민족이였다. 6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 전쟁에 대한 “법정”이 개정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비극이 빚어졌고 오늘까지 이어졌을가? 서로서로의 가는 길이 달라서? 하긴 불행을 많이 당한 것만큼 우리에게도 복이 많이 떨어졌었다. 한국에서나 북조선에서나 또는 중국의 연변에서나를 막론하고 더는 외국인의 예속을 받지 않고 자기의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자기의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였다. 그 어디로 가나 우리 말을 떳떳하게 할 수 있고 그 어디로 가나 우리의 노래를 소리 높이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웃음과 노래소리가 그칠줄 모른다. 나는 한국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가정을 보았고 북조선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부부를 보았다. 나진으로 갈 때 저슬령밑에서 돌이 금방 지난 아기를 안고 우리 차에 올랐던 한쌍의 부부가 행복에 겨워 서로 구순하게 굴던 모습이 퍽 인상이 깊었었다. 우리 연길에도 행복하게 사는 집이 많다. 허나 그 집이 행복하다 해서 늘 웃음꽃만 피는 것은 아니였다. 오히려 그런 가정일수록 말썽이 더 많고 갈등이 더 심각할 때가 있다. 한국에 가서 몇 년씩 벌고 돌아온 친구들이 술좌석에 앉아 개탄할 때가 많다. 한국에선 하루 건너씩 농성이다 데모다 하여 소란스럽고 국회에선 당파분쟁이 그칠줄 모르고 거리에 나서면 일하고 먹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왜 그렇게 잘 사는 나라로 됐느냐 하고 말이다. 한국은 광주민주화운동이후부터 점차 유신체제에서 벗어나 진정 민주화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민주화의 힘이 얼마나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우리는 아직 진정 느껴보지 못했다. 오늘날 지금의 이 시각까지도 한국의 각 여당과 야당지간에는 국민의 권리와 리익을 놓고 분쟁이 치렬해지고있다. 분쟁이 치렬해질수록 그것이 통합과 가깝게 통하게 되는것이다. 즉 분쟁속에 통합이 있고 통합속에 분쟁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차가 많은 한국에 길이 한갈래 뿐이면 어떻게 될가? 당년에 박정희대통령이 경부고속국도건설을 추진시킬 때에 미친 짓을 저지른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었다. 지금에 와보면 그때 그런 비난속에서도 견정하게 그 일을 추진시킨 것이 얼마나 영명한 결책이였다는 것이 알린다. 북핵문제도 그렇다.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가 말가 하다가도 툭 끊어지며 시끄럽게 반복에 반복을 중복해왔다. 그래서 한반도가 세계의 주목을 끄는 초점이 되였다. 아직까지 그 어느 회사의 광고나 그 어느 영화의 포스터도 이처럼 놀라운 효과를 낸 적은 없었다. 문제의 해결이 시끄럽게 감기고 얽혀질수록, 무단적이고 극단화에 이를수록 문제는 해결하기 곤난해진다. 해결하기 곤난하다는 점이 바로 해결할 기회가 박두했음을 암시해주는 신호인것이다. 베이징“6자회담”이 진행해온지 이미 6년이 지났으니까 이제 다가올 6년내, 즉 2015년내에는 북핵문제가 철저히 해결될것이다. 정말일가? 우리 서로서로 두눈을 꼭 감고 두손을 모아쥐고 점치기게임을 해보자!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에는 험난도 있고 절벽이 가로 막힐 때도 있게 된다. 허지만 세월이 거꾸로 흐르는 법은 없다. 길이 험난하면 메우고 닦으면 되는것이고 길이 막히면 빙빙 돌아가도 되고 거길 뚫고 터널을 뺄 수도 있다. 길이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빼진것이니까. 길에 나서면 자연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희망이 보인다. 동해의 일출을 보려고 동틀무렵의 어둠을 헤쳐 나갈 때의 그런 기대감, 그 희망, 얼마나 숭엄해지는 기분이였던가! 해는 언제나 동쪽에서 뜬다. 그것이 우리에게 매일과 같이 생의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다. 차를 몰고 한강대교위에서 질주하는 중절모사나이여, 대동강유보도에서 치마자락을 날리는 녀인이여, 두만강언덕위에서 소잔등 타고 피리부는 목동아, 백두산정상에 올라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고 한나산정수리에 올라 서해의 낙조를 그려보시지 않으려는지… 차를 모는 아저씨, 녀인의 걸음이 더디다고 나무리지 마시라. 녀인의 걸음은 언제나 사뿐사뿐 안전한 걸음. 사뿐사뿐 걸어가는 처녀동무, 목동이 탄 소가 늦다고 나무리지 마시라. 소는 어정어정 걸어야 멀리 가는 법. 소를 타고 늑장 부리는 목동아, 차를 몰고 질주하는 아저씨를 원망하지 말아. 갈 길은 멀고도 먼데 시간은 너무나도 무정하단다.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는 개혁과 창조의 길을 열어주는 강한 리더십이 있고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보귀한 경험과 우수한 전통이념이 있다. 남으로 북으로 갈래갈래 뻗은 길은 길마다 너무나도 험난하고 장애가 많다. 그걸 소통시키고 연결시켜야 하고 서로서로지간에 리해와 통합이 이루어져야 진정 통일이 실현될수 있다. 마지막으로 필을 놓으면서 친구 김학송씨가 지은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시내물 흘러흘러 가닿는 곳은 꽃구름이 잠자는 가없는 바다 ……   
1    구질구질 했던 모내기철 댓글:  조회:844  추천:1  2012-07-16
요즘 참 날씨가 더럽다.  5월중순부터 잡아비트는 날씨는 내내 6월중순까지 찌뿌둥해져있다. 하늘이 설익은 시루떡을 먹었을가! 통 기분이 돌아서질 않는다. 그 날씨때문에 멋을 피우고 싶은 아가씨들의 허벅지자랑이 칙— 스톱되는 상황이다. 날씨 좋은 날이면 달랑 들릴가 말가 하는 미니스커트 아래로 떡국대처럼 길고 새뽀얗게 부어뺀듯한  젊은 녀자들의 긴 다리가 또각거리는 하이힐에 반주되여 거리에 절주감을 부여시킨다. 참,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던데… 요즘은 요망한 날씨때문에 거리에 나서도 움츠러만 드는 기분이다. 화창한 봄기운이나 초여름의 싱싱함이 구겨진다. 어쩐지 모내기철이면 요렇게 날씨가 변덕스러워질가? 모내기철 내내 구질구질해지는 날씨인데도 누구 하나 모내기에 대해 근심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하긴 모내기철을 모르고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니깐. 몰라도 배를 곯는 법이 없고 그 누구에게 죄송스러운 느낌도 없다. 풍년이 들었다 해서 더 얻어먹는다는 즐거움도 없어졌고 흉년이 들었다 해서 배를 곯는 고통도 없어진 세월이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 또한 느긋한 심사다. 누구의 방조도 바라지 않고 누구의 동정도 바라지 않는다. 한적한 분위기에 부부간, 또는 부자간, 좀 손이 딸리면 친척친구들, 일손을 돕는다기보다는 모여서 즐거움을 나누는 분위기다. 요즘엔 그런 모임도 잘 안돼여 품앗이두레 비슷한 삯군쓰기가 흥행되고 있다. 사람도 삯으로 쓰고 기계도 삯으로 쓰고 운수판매도 삯으로 리용한다. 쌍방에 다 리익이 되고 일이 빨리 끝나고 뒤끝이 깨끗하다. 농촌에서도 이제는 모든 일에 돈이 통한다. 쌀독에서 인심이 나던 농경시대와는 다르게 자본시대의 특징인 자본이 서서히 돌아간다. 경작지가 점차 소수 경영인에게 집중되면서 우리의 농촌도 점차 기계화작업에 자본화운영이 시작되고있는 추세를 맞이하고있다. 아직 사회주의공유제라는 큰 울타리에 더 기대여 보고싶은 심정이여서인지 좀 어설퍼지는 감정을 금할수가 없다. 요즘 날씨처럼…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몸이 오싹 떨리게 바람이 소슬해진 날씨에는 의례 속을 덥혀주는 술생각부터 난다. 술 한잔 들어가면 자연히 옛날옛적이 추억속에서 그리워진다. 그제날 공유제의 말단 형체인 생사대에서 모내기철이 닥쳐오면 한 보름쯤은 내내 전투적인 분위기에 휩싸인다. 푸름한 새벽부터 논물관리원이 하루의 모내기를 위해 물도랑을 점검하고 논고를 풀어놓는다. 그러면 써레군들이 모판을 공구고 이어 모내기대군이 출동하고 펄럭이는 기발을 따라 경색도 벌어진다.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날에도 하얀 비닐박막쪼각으로 몸을 무장하고 벼모꽂기가 찰랑찰랑 열을 올린다. 찬비속에서 찬기운을 이겨내는 로동의 즐거움을 맛보며 푸른 주단을 촘촘히 엮어가는 보람찬 화면작성에 풍작을 기대해 보는 희열도 느껴본다. 벼모나르는 총각의 벼모단뿌리기에 어느 처녀의 고운 얼굴이 흙탕물로 얼룩지면 논판은 웃음바다로 번지여진다. 가식없이 통쾌하게 웃어대며 함박꽃 피우던 그 얼굴들…그렇게 정다울수가 없다. 모내기철 내내 음침한 날씨에 랭랭한 랭기가 감돌아도 논판에서 수시로 터지는 폭소에 웃음꽃은 매일과 같이 그칠새 없었다. 더구나 모내기대회전이 승리적으로 끝나게 되는 총결만회는 내내 행복감속에서 기다려진다. 뉘집 돼지를 엎었던간에 그 고기맛이 그렇게 고소할수가 없었다. 볶음료리도 아니고 그저 장국탕에 훌훌 삶아내고 대충 썩뚝썩뚝 저며낸 그 고기가… 그런 분위기, 그런 맛을 지금 다시 음미해볼 수가 있을가! 농사군에게는 하늘이 괘씸한 요술쟁이다. 모내기철이 지나가면 하늘은 기다렸다는듯이 구름을 말끔히 밀어가고 맑은 모습에 해님을 띄워 무더위를 몰아온다. 그러면 또 호미를 얻어쥐고 콩밭기음이나 조이밭기음에 나서 얼굴을 까맣게 태워야 한다. 해살이 쫙 펴지면 논판의 벼모며 언덕밭의 강냉이며 길가의 풀포기며 모든 생장물이 소리치며 우썩우썩 자라면서 싱싱함을 뽐낸다. 아무튼 구름이 꽉 낀 음침한 날씨보다 찬란한 태양이 빛 뿌리는 맑은 날씨가 더 약동적인것 같다. 헌데 그 약동적인 무더위속에서 행복의 웃음꽃이 잘 피여나지 못하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잘 울려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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