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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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말' 또 그 '말'을 말해본다(수정고) 댓글:  조회:1004  추천:4  2015-04-24
    인류의 사유 도구이자 사회 정보전달의 수단인 언어는 인류의 가장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지목된다. 서로 다른 민족에게 언어의 체계는 다르며 언어의 상이성은 여러 민족공동체의 구분에서 중요한 징표로 된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의 언어학의 대가인 홈볼트는 자신의 언어학 리론에서 “민족의 언어는 그 민족의 정신이며 민족의 정신은 그 언어”라고 설파하면서 “언어를 소유한다는것은 현실에 대한 관념과 더불어 그 문화를 전승케 하는 언어를 물려받는다는 뜻이며 언어는 각자가 고유하게 세계를 파악하고 기술하고 리해하는 토대가 된다”고 밝히고 언어는 세계관(Weltanschauung)의 형성에도 불가결의 요소임을 강조했다. 특히 조선족처럼 이중언어생활을 하는 민족에게 있어서 자민족의 언어규범과 언어를 포함한 문화적 패턴에 대한 소홀과 외면은 민족의 정체성에까지 영향을 줄수 있는 중차대한 사안임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현실은 그 괴리를 심심찮게 선보여 주변을 안타깝게 한다.     민족언어를 고양하고 지키는곳이 바로 학교이고 교사이며 이들이야말로 우리 언어의 파수군이라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이곳도 이미 무풍지대가 아니다. 행정사무 일상 언어가 이미 오래전부터 거의 다 한어로 된 현실은 어쩔수 없이 받아들인다쳐도 지금 민족언어의 산실이고 민족 문화 고양의 전초기지인 조선족학교도 주체민족 언어의 충격을 결코 비껴갈수 없는 현실에서 곤혹을 치르고 있다는 점은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특히 산재지역의 적지않은 조선족학교에서 인젠 조선어문을 제외하고 우리 말로 출판된 교과서조차 쓰지 못하고 있으며 주요한 교수용어가 한어로 전이되고 있어 주변을 안타깝게 한다. 산재지역 모 조선족학교의 교장에 따르면 그 주되는 원인은 애들이 조선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데 있다고 한다. 하지만 머리에 의문부호가 그려지지 않을수 없다. 그전에도 이 지역에 숱한 조선족애들이 무난하게 우리 말로 공부하고 우리 말 교과서를 썼는데 대체 어느때부터 애들이 우리 말조차 못알아들었는지? 사회여건이나 주변환경이 이렇게 만들었을가(?) 아니면…그나마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가정의 애들이 우리 말을 그래도 좀 낫게 구사한다고 한다. 여러가지 원인가운데서 결국 우리애들의 민족언어 사용에 차질을 빚게된것은 많이는 우리 말 언어환경이 주어지지 않은 탓, 즉 가정언어환경으로 그 윈인의 천평이 기운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결론이 치밀한 조사와 접근으로 내려지지 않았지만 가장 일상적인 우리 말 대화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애들을 보면서 우리 부모들의 자성이 더러  요청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말 언어환경이 주로 가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산재지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지금 중학교에 학생을 둔 부모라면 60년대말 아니면 70년대 출생한 세대들에 해당한다. 이 세대는 사실 정치풍파가 교육의 형식이나 내용 지어 기회마저 좌지우지 하던 시기와 구별되는, 개혁개방후에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은 세대들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 세대들 일부(?)가실리를 바탕으로 한 “미래지향적인 안광”으로 모두 한어에만 매달리고 우리말을 홀대했다면, 혹자는 가정에서 우리 말에 별로 신경 안쓰고 살았다면 사회나 행정시책들이 주는 영향력을 잠시 떠나서 우리 부모들 생각자체에는 문제가 없는지 한번 가슴에 손을 얹어봐야 할 일이다. 얄팍한 실리에 매달려서였든 아니면 불감증에 걸려서였든, 자의든 타의든 결과적으로는 부모의 방심과 차실로 후대들이 민족의 부호를 서서히 잃어가고 정체성의 상실속에서 살아가게 될것이라는것을! 공성은 언제나 개성과 공존한다. 개성이 없으면 공성도 역시 담론이 불가하다. 통합 역시 개성속의 통합일뿐이다. 서로 다른 개체와의 민족의 구분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적인 징표가 사라지면 다른 문화적인 부호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 상례다. 역사를 반추해봐도 한때는 중원에서 사슴을 쫓으며(中原逐鹿) 천하를 호령하던 민족이 지금은 자신의 말도, 글도 없이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는 무가내한 현실을 우리는 보아왔고 보고 있다. 그 와중에서도 그나마 애들을 한족학교가 아닌 우리민족 학교에 보내온 부모들, 산재지역에서, 대도시에서 강대한 주체민족문화의 포위속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애들을 조선족학교에 보내는 그 몸부림을 눈물겹게 치하하고 싶고 그 뜻이 가상하다고 할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산재지역 조선족 학교의 현황을 들여다보면서 학교가 아닌 가정의 평범한 일상에서 우리의 언어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것도 역시 부모들 나가서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초미의 문제로 대두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또한 가정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정부부문의 시책 역시 상기의 현상을 유발할수 있는 빌미가 될수 있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당면 공무원 시험이나 기타 사업단위 인원등용제도에서 보면 부정비리 차단의 장치로 사람을 쓰는 단위가 행사하는 역할이 대폭 위축된것은 자타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획일화된 행정지침으로 전문성을 강조하는 실무위주의 사업단위의 인재 영입에는 부적절한 요소도 동반한다는 언중의 평가도 적잖이 들려온다. 그리고 정부행정관련부서에 힘이 많이 실려지게 되면 힘의 역학적 론리에 따라 역으로 또 다른 부정비리를 부를수 있는 소지가 있고 그 리스크도 감내해야 한다는 일가견 역시 간과해서는 안될것 같다.  순 우리말로 일하는 회사의 경우 이를테면 조선말 잡지사 같은 경우에 비록 영입 사원에 대한 회사의 요구가 어느정도 인사부문을 통하여 실현된다고 보아도 현재 실행되고 있는 필답과 면접이라는 이중 시스템으로는 그 사람의 직업적 자질과 능력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지목되는 조선어 능력을 제대로 테스트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전문성과 덕목을 함께 테스트할수 있고 또 부정비리도 단절할수 있는 보다 완벽한 영입시스템이 고민되여야 할 시점이다. 인재등용에서 언어로 인한 불리익이 결국은 제반 사회 대중의 가치판단과 추향에 영향이 미치고 있음을 해당 관계자들은 명심해야 할것이다.    류동성이 강하고 강한 생활력과 적응력을 수반한 민족군체의 특질 역시 우리의 언어 사용에 문제점을 안겨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일례로 우수한 조선족 젊은이들의 교원직업기피와 동반한 한족교원영입 역시 일부 학과목에서 우리 말 교과서 사용이  불가능한 요소로 등장하고 나가서는 언어습득과 사용을 방해하게 만든다.    언어학의 차원에서 접근해보면 지금 세계는 다중언어구사능력(multilingualism)이 류행으로 되고 있으며 단일언어보다 이중언어거나 다중언어 사용자가 더 많다. 일반적으로 다중언어 구사능력이 지적 기능에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다중언어구사능력을 이 사회가 필요로 하고 있고 또 다중언어능력소지자가 단일언어사용자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경험에서 우위한다는 점도 연구를 통하여 점차 가시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애들에게 그 플랫폼을 만들어주지 않거나 부모의 짧은 안목에 비롯된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에 안주하여 애들의 언어사용문제를 도외시하거나 안일하게 대처하는 애들에게 날개를 더 달아주지는 못할지언정 있는 날개마저 꺾는 우를 범한다면 참 통탄할 일이 아닐수 없다.     말은 언제나 말해야 말이 된다. 
4    소 잃기전에 외양간 고쳐라 댓글:  조회:2894  추천:141  2008-05-15
소 잃기전에 외양간 고쳐라김창진  요즘 이른바 모아산 새 등산길 2기공사를 두고 인터넷을 포함해 항간에 반발이 거세다.그 파장의 초점은 하나같이 새 등산길 포장방식, 바로 천만원이라는 거금을 투입하여 화강암, 대리석으로 넓이 2메터 되게 등산길을 포장한다는 해당부문의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된 공사추진에 있다.     연길도심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연길시민의 등산과 유람의 명소인 모아산이기에 그만큼 연길시민들의 관심이 뜨거울수밖에 없다. 열기가 확확 풍기지 않으면 차디찬 콩크리트와 매캐한 매연으로 숨이 턱 막히는 도심의 일상에서 탈출하여 자연에 잠간이나마 몸을 잠그며 지친 심신을 추스릴수 있는 곳 중에 가장 쉽게 발이 닿는 곳이 바로 모아산이다. 산이 좋은것은 공기 시원하고 물 맑고 자연의 훈향이 듬뿍듬뿍 묻어난다는데 있다. 산의 매력 포인트가 바로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원초적인 자연이라는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사실 산에 있는 나무를 그대로 두면서 원래의 등산길을 나무로 포장하여 만든 1기공사에는 별로 반발이 없었던것으로 안다. 하지만 이번만은 아니다. 산에 화강암이든 대리석이든 한벌 씌워보겠다는 정부의 착상이 어떻게 출범했는지 몰라도 그 대의명분을 살펴보면 시민들에게 여가생활을 즐길수 있는 쾌적한 공간을 마련해주려는데 있음이 분명하다. 정부행정시행의 목적도 바로 인간본위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친민적인 조처라는데 착안점을 둔것이라고 사료된다. 그럴진대 굳이 흙을 덮어버리고 풀을 파던지고 나무를 없애고 발바닥을 딱딱하게 올리받치는 포장길을 만드느라고 어렵사리 모아진 시민의 세금을 쏟아붇는다는것은 어불성설이다. 적어도 너무 서뿔리 내린 용단이라고는 폄하를 받을만 하다. 시민에게 편의를 줄 목적으로 만들어지는것이라면 사전에 시민을 대상한 청문회같은것도 있어야 했었고 또 여러분야의 전문가들의 조언도 들어본 다음 움직여야 했을 사항이라고 보아진다. 물론 결책자체의 대의명분과 목적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지만 물건을 만들자면 쓸 사람의 입장을 우선시 해야 되는것처럼 그 활용의 주체인 시민들의 편의와 생각을 최대한 배려해주는것이 상식인듯 싶다. 황차 천만원이라는 꽤나 어마어마한 투자도 있고 하니말이다. 돈도 적게 쓰고 환경도 파괴하지 않는 방편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를 충분히 감안하고 고민하는것이 정부의 책임이고 도리이다.     친환경은 지금 국제적인 추세이고 국내에서도 환경에 대한 중시는 어느때보다 중요한 사안으로 다루어지는 시점이다. 환경을 희생하면서 이룩하는 발전은 지양되여야 하고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발전이 아니라는것이 지금 글로벌 사회의 정론으로 정립된지도 오래다. 그것은 그 소위의 《발전》으로 하여 치른 인류의 대가가 너무나 처절했고 또 지금도 계속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를 포함한 인류는 현재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현대문명의 향연을 만끽하는 동시에 그 발전과정에 짓밟았고 혹사하였던 자연의 보복을 받고 있다. 지구의 온난화가 바로 그 일례다. 지금 친환경주의가 지구촌에서 대두하고 환경보호에 대한 중시도가 날이갈수록 높아지는것은 일면에서 소잃고 외양간고치기가 된다고도 볼수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그것을 자각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하고있다는 자체가 불행중 다행이 아닐수 없다. 그 노력을 단순한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로만 볼수 없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모아산 등산길포장 론란도 돌이켜보면 아직은 그래도 경미한 상태, 그러니 소잃기전에 외양간고치기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혹시 공사 진척이 너무 빨라서(7월에 공사를 마무리한다고 하니깐) 이미 소를 거의 잃은 상태가 되였다 해도 외양간은 고쳐야 할 시점이다. 그것은 외양간을 영원히 고치지 않으면 앞으로 영영 소를 보지 못할수도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제언하는데 우리의 해당부문에서 지금이라도 좀 스톱을 불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부측으로 말하면 그것이 인간본위 즉 이인위본(以人爲本)과 과학발전관 시달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가!     뭇새가 지저귀고 나무와 꽃이 어우러진 자연의 내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등산길이 새로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3    가을송가(번역문) 댓글:  조회:1973  추천:171  2007-04-28
  가을송가                                            로란     가을의 아름다움은 맑고 깨끗함에 있다.     어떤 사람의 눈동자는 가을을 닮았고 어떤 사람의 풍채는 가을의 운치가 력연하다.     가을을 대표하는 단풍나무의 아름다움은 그 서리를 맞은 담담한 빨간 빛갈에 있을뿐만아니라 또한 바람을 맞는 름름함에도 있다.     나무잎이 차츰차츰 성기여지면서 가을수풀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소탈함을 자랑한다. 이는 어떤 장식도 외면한 소탈함이요. 속세의 번화함을 개의치 않는 도고함이다.     가장 감동을 주는것은 가을수풀에 비낀 락조이다. 하늘가에서 취한듯 붉게 타는 빛갈은  깊어지는 황혼을 돋보이게 한다. 맑고 서늘한 기운을 가진  저녁바람은 짙어가는 황혼에 물들여져 일종 애상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면서 당신으로 하여금 감회에 젖은 눈물을 흘리고 싶지만  차츰차츰 옅어지는 발가우리한 색조에 겁먹고 분방한 감정을 기꺼이 굳어버리게 한다.   일찍 한 화가가 서리의 세례를 받은 단풍나무숲을 화폭에 담은 ≪가을정원≫이라는 그림을 그린적 있다.  높다란 단풍나무가 정원의 정적을 조용히 덮고 나무뒤에 대문이 굳게 닫겨 있어 괴괴함이 넘쳐흘러 마치 내가 일찍 그 속에서 살면서 가을의 적막함을 맛본것 같았다. 그래도 난 남몰래 조용히 그 그림속으로 들어가 굳게 닫겨진 대문을 노크해보고  그 안에 얼마만한 세월의 먼지가 쌓였고 얼마나 많은 생활의 자취가 보관되여있는지를 살펴보고싶다.     가장 흥미를 끄는것은  가을하늘에 한가하게 떠도는 구름이다. 담담하고  여유작작하고 조용히 속세를 떠나 속세의 소란에 태연하기만 하다.     가을바람은 어떤 꾸밈도 없는 가장 순결한 바람이다. 시원스럽게 원림을 가볍게 스쳐지나가고 우수수 떨어지는 락엽을 돌봐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 계절도 신진대사도 생사도 비환도 모두 그 자체의 섭리대로다. 참여할 필요도 연연할 필요도  없다.     가을의 물은 바람처럼 맑다. ≪강물을 스쳐 날아예는 백로와 갈매기≫란 말은 바로 가을의 맑음을 그려낸 것이다. 근심할것도 긴장할것도 집착할것도 없는것이다. ≪인간세상 만호후(万户侯)도 깔보면서 까막눈노인처럼 안개자욱한 물우에서 고기를 낚네≫ 가을은 이처럼 티끌한점 없이 맑고 깨끗하다.     ≪한운야학(闲云野鹤)≫은 가을의 제목이다.  가을의 청청한 하늘에 떠있는 한송이 흰구름이야말로 한가하다는 한(闲)자에 부끄럼없을것 같다.들학의 아름다움은 가을물처럼 담박하고 가을산처럼 멀어보여 종잡할수 없는 소탈함과 대범함으로 안일이라는 일(逸)자에 손색이 없을것 같다.≪한≫과 ≪일≫ 두 글자야말로 가을의 본색임이 틀림없다.     이런 가을의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들도 더러 있다. 또 이런 사람들이여야 가을의 아름다움을 가질수 있다. 이런 아름다움은 가슴깊에에서 흘러나오는것이다. 이들은 모든것을 다 가질수 있으면서도 그 무엇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이는 깊고깊은 인지(认知)와 깨달음으로 이루어진 투철함과 소탈함이리라.     가을은 성숙의 계절이고 수확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또한 담박한 계절이기도 하다. 봄의 발랄함과 여름의 번성함을 겪을대로 껵은 가을은 찬미와 총애를 더는 영광으로 알지 않는다. 가을은 찬미와 총애를 담담한 가을빛밖에 몰아내고 한가롭고 유유하고 머나먼 바라볼수 있지만 가까이 갈수 없는 그런 가을이 되기를 원할뿐이다.
2    [사회] 환경보호와 연변의 승부수 (김창진3) 댓글:  조회:1847  추천:127  2007-03-11
환경보호와 연변의 승부수김창진《…산 좋고 물맑은 여기 바로 내 고향 연변이로세…》라는 노래가사가 아직도 서먹하지만은 않다. 간혹 그 가사가 감미로운 추억의 편린으로 떠올려지기도 하여 감회가 여간하지 않다.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의 터전, 아름다운 우리 고향을 과연 그냥 산 좋고 물 맑고 정자 좋은 곳이라고 할수 있을는지?! 물이 맑다는 이야기는 저쪽 산골 깊숙하게 들어가면 모를가? 적어도 도시랍시고 우리 족속들이 오구작작 많이 모여사는 연길의 도심에서는 순수한 자연이 가져다 준 맑은 물 구경을 해본지 너무 오래된다. 천만다행으로 그래도 그나마 몇백리밖에 백두산도 있고 인류의 발자욱이 적게 닿은 곳에서 아직도 울울창창한 수풀과 산골자기를 감돌아 흐르는 맑은 시내물 구경을 할수가 있어 외지손님들이 오면 언제나 엄지손을 내밀고 감질을 내는것이 연변의 청산록수다. 하지만 그 내속을 들여다보면 자연이 우리에게 선물한 이 천혜의 땅은 경제발전의 상승그라프와 함께 몸살을 많이 앓고있다. 우리의 경제발전전망기획을 조명해 볼 경우 환경보호에 대한 중시도가 아직도 미비하다는 점에 유감이 없지 않다.. 우리의 경제건설대안은 언제나 공업이다. 공업흥주(工业兴州), 공업흥시(工业兴市)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다. 물론 지역경제의 발전에서 공업의 발전은 불가결의 요소다. 하지만 획일적인 단언은 금물이다. 무조건 자금인입이고 무조건 공업총량의 증대라는것은 과학적인 요소가 결여된 판단이다. 경제총량이 부족한 문제가 지역경제의 가장 큰 걸림돌이고 우선적인 치유대상이라고 전제할 경우 경제총량은 반드시 공업을 통해서 늘여야 한다는 론법이 쉽게 나올만도 하겠지만 기실 경제의 총량과 종합경쟁력의 제고는 한가지 해법만이 아니다. 일원일차방정식인 것이 아니라 이원일차 혹은 삼원일차방정식이 될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국가적 차원에서 종합국력을 운운하듯이 우리의 종합경쟁력도 말그대로 종합적인 우위가 실현되여야 한다. 우리의 사고방식에는 아직도 기획경제시대의 획일적인 사고방식이 잔류해 있으며 일부 지도일군가운데는 치적의식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랭정하고 과학적인 판단에 힙입은 합리하고 가능성있는 결책만이 과학적인 발전을 가져올수 있는 첩경(捷径)이다. 연변과 연해의 발달도시를 비해보면 공업발전규모나 제품구조 류통면에서 우리가 많이 처지고 있는 실정이다. 자금인입도 떨어져도 한참은 떨어졌다. 광동성의 동관시를 례를 들어도 그곳의 웬만한 조그마한 진의 공업생산총액이 우리주의 한개 현 혹은 몇개 현을 초과한다고 한다. 연해발달지구에도 이런 례는 기수부지이다. 지어 한개 촌행정규모의 공업생산총액이 우리주의 총공업생산총액을 초과하는 곳도 있다(화서촌 같은 것이 일례). 단순히 공업발전으로 그들을 따라잡자면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미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졌다. 게다가 우리가 이면에서 제대로 달리지 못하기에 거리가 좁아지기는 희망이 아주 묘연하다. 남이 걸을 때 우리가 달아도 따라갈가 말가하는 정도다. 성정부에서 제기한 경제발전의 쾌속질주라는 사로도 여기에서 나온것이라고 제나름대로 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기실 우리는 뛰기도 숨가쁘다. 짐이 무겁고 다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꼭 공업 하나에 매달려 연해발달지역과 발전을 겨루는것은 연변의 약세로 남의 강세와 비하는 지는 게임이 되기 다반사. 남들한테 있고 나한테 있는것을 비하는것도 미타한데 하물며 남에게 있을뿐만아니라 우리보다 더 좋은것을 우리가 기어이 비하려 해서야 될말인가? 어쩌면 패배는 당연지사다. 연변과 내지를 비해볼 때 우리의 강세는 곧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과 풍부한 자연자원, 그리고 민족특색의 전통과 독특한 풍토, 변경지역이라는 지연특점에 내재한 문화적인 인문우세이다. 아마 여기에 승부수를 띄워야 승산이 크지 않을가. 지금도 우리 연변에 머물러 있었던 내지사람들은 우리의 맑은 물과 산 그리고 입쌀, 토산물을 잊지 못해한다. 김치, 랭면, 찰떡, 장국도 언제나 이들에게 있어서 지울수 없는 추억의 향연이고 끊을수 없는 끈끈한 인연이다. 이들은 당년의 자상한 이웃들과 소박하고 넉넉한 인심들을 눈물나도록 고맙게 생각하고 가슴깊이 차곡 차곡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것이 바로 자원이고 남에게 없는 우리의 강세다. 나무를 채벌해내고 공장을 세워 오물을 방출하고 시내물이 말라버리고 전통마저 색바래진다면 우리한테 앞날은 정녕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그 누구의 차지도 아니다. 누구나 다 이 땅에서 머무르다 가는 나그네 일뿐이다. 내 이 한몸이 하루밤 잘 주무시고 잘 먹자고 다음날에 올 나그네 생각을 안해서 될 말인가! 프랑스의 어느 국왕처럼 《내가 죽은 다음 홍수가 밀려온들 무슨 대수랴》 하는 식은 용납될수 없다. 《우리가 던진 오수를 우리의 후대가 마십니다》라는 공익광고의 대사를 잘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미국의 콜로라도대협곡에 국가공원을 세워 보호하지 않고 당초의 기획대로 땜을 만들었더라면 어떻게 되였을가? 아마 전기도 냈을거고 짧은 시간에 경제효익도 꽤나 짭짤하게 봤을것이다. 하지만 지구촌에는 콜로라도협곡이라는 이 유일무이한 비경이 사라졌을것이고 지금의 미국애들은 그림에서나 협곡을 볼수 있었을것이다. 물론 몇개 땜을 건설하고도 남을 거대한 관광수입도 그림의 떡이였을거고. 더우기는 그 자연환경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음으로, 양으로의 혜택을 누려보지 못했을 것이다. 환경보호를 돈이 들어가는걸로만 생각하고 환경을 적당히 희생하더라도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치적의식은 애초부터 잘못된것이다. 좋은 생태환경은 인간의 건강에 좋은것은 물론 무진장한 관광자원이기도 하다. 매년 장가계, 구채구에 구름같이 몰려드는 인파를 못보았는가…. 자연의 원초적인 미가 그윽한 진짜 산 좋고 물 맑은 곳이기 때문이다. 천리 두만강이 바다에 흘러들어갈 때까지 푸른 파도를 처절석이며 흐른다면 그 관광의 경제적가치는 그야 말로 무진장할 것이다. 부르하통하의 물을 물막이를 해서 억지로 가두어놓지 않아도 푸른 물이 감돌아 흐르고 고기떼가 뛰논다면, 시내복판을 흐르는 연집강에서 물장구치고 미역을 감는 애들로 시끌벅적하고 아낙네들의 얼씨덩 빨래방치소리가 귀맛을 댕긴다면, 푸른 해란강, 푸른 가야하, 푸른 훈춘강...오염없는 강물로 관개하고 화학비료가 없이 생산한 윤기 자르르한 진짜 록색입쌀을 우리가 먹는다면... 여름에는 피서의 명승이요 겨울에는 빙설천국의 묘미를 즐길수 있는 진짜 살기좋은 고장 친환경의 연변, 무한경쟁력을 가진 천혜의 땅―산 좋고 물 맑은 내 고향 연변으로 거듭날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우리가 이길수 있는 승부수가 아닐가?!
1    [사회] 승냥이는 과연 왔는가?! (김창진2) 댓글:  조회:1503  추천:78  2007-03-11
승냥이는 과연 왔는가?!김창진 연변교육출판사 총편판공실 주임 거짓말 잘하는 애가 거짓말로 승냥이가 왔다고 마을사람들을 여러번 얼렸다가 결국 진짜로 승냥이가 왔을 때 마을사람들은 거짓말로 여기고 누구도 구하러 가지않는 바람에 목숨을 잃게 되였다는 교훈적내용을 담은 이야기가 생소하지는 않을것이다.적신호는 있었는데…90년대초반을 좌우로 학계에서는 이미 조선족인구의 마이나스장성에 대해 거론했고 그후부터는 부분적 조선족향진의 인구가 마이나스장성이라는 사실이 매스컴에도 다루어지게 되였다. 다시말하면 승냥이가 왔다는 적신호를 우리 사회에 보내준것이다. 그때로부터 7, 8년사이에 조선족인구마이나스장성문제는 급전직하(急轉直下)의 일로를 걸어 제반 조선족향진에 파급, 지금에 와서는 그 충격을 도회지에서도 체감할수있다. 진정 승냥이는 온것이다. 사회발전행정에서 농촌인구가 줄어드는것은 도시화의 추세로 인한 필연적 결과라는 해석이 설복력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조선족집거지구가 그 충격파의 선두에서 허덕인다는 점에서 우리는 민족자체의 자성이 필요한것이다. 충격의 첫대상―농촌교육우리는 돈을 벌었고 생활수준도 제고되였다. 하지만 우리가 치른 대가 또한 가볍지 않다. 전원생활의 랑만을 선물하던 그 아늑하고 평화스러운 삶의 터전이 점차 삭막해지고 있고 피페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수 없다. 동구밖에서 오구작작 떠들어대며 놀음으로 해를 지우고 마을의 조용함을 허물던 애들을 인제는 별로 찾아볼수 없다. 응석을 부릴 나이를 잃은 소학교기숙생들, 그것을 학교운영분포조절이라는 명분하나로 여린 마음을 감싸주고 농촌교육발전의 일환으로, 추세로 해석하기에는 너무나 힘벅찬 일이 아닌가싶다. 여나문되는 학생을 두고 학교랍시사고 운영나간다는것도 무리인것만은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애어린 기숙생들이 나타난것이다. 풀만 무성한 운동장과 함께 주인없는 한산함과 쓸쓸함을 꾸역꾸역 토해내는 농촌학교의 현주소를 도시화라는 한마디말로 덮어감추기는 역부족이다. 어찌보면 농촌교육의 부진이 도시화에 가세했다. 자식망치겠다고 무작정 시가지로 들어와 사는 시골사람들, 그들의 선택을 그르다고만 할수 없다. 교육이 살아야 농촌이 살고 농촌이 살아야 도시도 산다는 말을 또 한번 실감케한다. 현재 조선족농촌의 다른 한풍경, 덜먹총각은 많은데 처녀들은 보기 어렵다. 도회지로 장사길에 오른 사람, 외국으로 돈벌이간 사람, 자식공부때문에 울며겨자먹기로 도회지의 구석에 몸을 비비고 사는 사람들로 농촌의 인구는 줄고 농촌에서 처녀구경하기 어렵다. 일년가도 아이돌생일잔치음식한번먹기 어렵다. 《생산》은 못하고 《수출》만 하니 시간이 가면 바닥이 날것은 강건너불보듯하다. 후공업사회로 이전하는 발전행정에서 농경문화가 감내해야 할 응분의 고통이고 필연적 충격이라는 《유식》한 해석하나로는 너무나 창백하다.무풍지대가 아닌 도회지네온싸인이 명멸하고 도회지의 유흥가들이《연변의 명동》이요. 《작은 향항》이요하며 번화함을 자랑하는 도회지 역시 무풍지대가 아니다. 인구의 마이나스장성으로 인한 충격은 도회지에서도 피부로 닿아오고있다. 그 충격을 가장 실감하는것이 교육인가본다. 사회적으로 일컫는 《병목현상》이 나타난것이다. 연길시를 일례로 초중은 아직까지 초부하상태, 한개학년 10개정도의 학급을 보유하고 학생도 정원을 초과해 초대학급을 이루기에 학교를 증설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소학교의 상황은 《머리가 크고 다리가 약한》 구도를 이루고있다. 6학년이나 5학년은 6개내지 8개 혹은 그보다 더 많은 학급으로 규모를 이루고있지만 저급학년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적어지고 올 7월에 6학년이 졸업하면 학급이 대폭 줄것으로 예정된다한다. 일전 모 소학교의 책일일군은 올해 8개학급이 졸업하는데 새 학기엔 두개 학급의 정원(定員)이나 채워지겠는지 하며 한숨을 톱았다. 실리를 바탕으로 하는 한족학교입학열여기에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일찍 7ㅇ년대에 불어치던 본민족어의 무용론이 쇄도하기 시작한것이다. 민족의 근간을 이루고 민족군체의 리더가 되여가고있는 지식층, 우리민족의 지적힘이 되고있는 엘리트들마저 분분히 자식을 한족학교에 입학시키고있다. 모 한족소학교의 한개학급 50여명학생가운데는 조선족학생이 20여명, 절반을 점하고있다. 한족학교에 붙고 전학해가는 조선족산재지구의 개별현상이 조선족집거지구의 보통현상으로 옮겨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놀랍게 아니,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있다. 인구자연장성의 감소와 거기에 가세한 한족학교로의 입학과 전학은 조선족소학교 소학생수의 격감을 유발하고있다. 조선족소학교학생수의 격감은 인젠 리론으로서가 아니라 피부로 다가오고있다. 모시에서 졍협의안으로까지 제기될 정도로 문제는 심각하다. 《…민족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선전강도를 강화하고…조선족교원의 한어교수수준을 높여야한다…》는 의안에 대한 처리대답 또한 《신을 신고 가려운데를 긁는》 격으로 명답은 못된다. 공식적인 인상이 다분하다. 문제의 심각성으로 감안할때 너무 간단하게 내린 답안이 아닌가싶다. 실리적인 가치관 지양해야민족자치의 권리는 국가에서 부여한것이고 신성불가침이다. 당과 국가의 성공적인 민족정책과 배려를 더 충분히 향유하지는 못할지언정 저절로 그 권리를 포기하는 못난짓은 할수없다. 우리가 지금 그 못난 짓을 하고있는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영달 혹자는 자녀의 립신양명(立身揚名)을 고집하면서 실리적인 삶의 방식을 택한다 할 때 이런 사람들로 합쳐진 군체의 저력 또한 있을수없다. 저력없는 군체의 존재는 무기력한것이고 쉽게 허물어지고마는것이다. 유태인은 나라없고 땅없는 천년을 넘는 력사의 풍전등화속에서 자신의것을 지켜왔기때문에 세계우수민족의 수림속에서 끈끈한 뿌리를 내리고있는것이다. 설명해둘것은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주자는것은 절대로 편협한 민족주의와 협애한 지역사상이 아니라는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의 리유와 존재의 뿌리를 회멸하며 일시의 영달을 꿰하는 그런 실리적인 일대를 후날의 력사에 살게 해도 안된다. 경제발전이라는 광환으로 모든것을 가리자는 생각은 어리석다. 경제의 발전과 우리를 지키는 작업은 모순될수없고 또 모순되여서도 안된다. 이면에서 우리 자치주의 리더역할을 하는 부분적민족간부들에게 섭섭한 감을 금할수없다. 우리의 농촌교육, 우리의 농촌, 우리의 도시 우리의 제반교육, 우리의 언론, 출판, 문화가 상품경제와 실리본위주의의 충격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와중에 승냥이가 왔다는 이야기는 분명 들었을 이들이 불감증에 걸려있다는 슬픈 현실을 감지하며 마음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조선말을 하지 않고 조선글을 보지않는이들, 혹자는 될수록 하지않고 될수록 쓰지않는 우리민족의 간부들이 구경 어떠한 책임을 져야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책임이라야 도의적 책임이나 량심적 책임일뿐이다. 조선문신문발행을 일례로 《조선문신문은 농촌에서 보고 한어신문은 기관에서 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선문신문은 정부기관에서 소외당하고있다. 조선문신문발행이 난항인 여러가지리유가운데서 한가지를 꼽으면 조선족간부들부터 앞장서 민족어로 된 신문을 보고 홍보하는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민족언어를 홀대하는데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한어수준이 간부로서는 중요한 능력일환이고 필수적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제어디서나 그나마 변변치않는 한어를 들먹일 필요가 있을가? 이들은 본의아니게 우리민족지역사회의 가치관에 막중한 영향을 주고 있다. 상품경제가 가져온 실리적인 가치관과 전통적인 관본위(官本位)사상에 걸직한 거름을 붇는다는 얘기다. 지도일군이 되자면 우선 한어를 잘해야하고 한어를 잘하자면 한족학교에 가야한다. 조선어는 글을 뜯어볼정도면 된다. 이런 비뚤어진 론리가 제반 민족공동체의 가치관을 좀먹고있다. 지도일군이 되는데서 한가지조건이던 한어가 선결조건으로 자리매김되였으니 조선족학생이 한족학교로 가는것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순으로 되였다. 《내가 죽인것이 아니지만 나로 인해 죽었다.》는 중국의 고전이 떠오른다. 우리의 민족간부들은 정부사업보고나 인대보고만 조선말로 할것이 아니라 처처에서 그 모범을 보여줘야할것이다. 민족언어불감증, 대학가부터 치유해야연변의 엘리트의 산실이라고 칭해도 전혀 과분하지않는 연변대학을 사업관계로 여러번 취재했지만 적지않은 경우 들리는것은 조선말냅새가 다분한 한어발언이고 보이는것은 한어표지뿐, 아마 두가지문자를 함께 쓴다는 조선어문사업위원회의 결정도 잘 모른는가본다. 아이러닉컬한것은 적지않은 모임에서 주석대에 앉아있는 교수님들이 중국조선어문의 권위들이고 제일인자라는것이다. 또 풍자적 의미를 띄는것은 그런 모임이 많이는 박사생학위수여식같은것이였고 조선어문학부의 행사가 많았다는 점이다. 소절에 구애되지 않아 그런것인지 모르겠지만 신문 잡지 론문에서 민족성과 민족진로를 가장 많이 거론하던 엘리트들이 민족언어불감증에 걸려있고 심지어 제자식의 손목을 잡고 한족학교의 대문을 두드린다는 사실에서 또 한번 마음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수 없다. 우리민족의 미래문제에 대해 모 교수는 인구가 계속 줄어도 연변지역의 조선족은 앞으로 지금의 산재지구의 조선족처럼 조선말을 잘모르는 정도이지 동화는 되지 않을것이라고 가볍게 예언, 또 한번 대학가의 불감증을 감지하였다. 세계일일권시대에 언어나 교육의 민족적인것만 고집하는것은 틀린것이라며 승냥이가 왔다는 사실조차 인정하려하지않는 지성인들도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지성인은 그 《지성》이라는 두글자에 부끄럽다.민족적인것과 세계적인것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겨적이라는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락후한것을 지양하고 선진적인것을 받아들이는 민족, 자신을 지키는 민족만이 희망있는 민족이다. 고루한것, 뒤떨어진것을 고집하고 진취를 거부하며 개혁을 경원시한다는것과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담보하는 자치권리인 자신의 언어, 자신의 교육문화를 지키고 발전해나가는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일본은 고대에는 선진적인 당조를 따라배웠고 근대에 와서는 선진적인 서방을 따라배웠다. 넓은 바다와 폭풍, 죽음을 무릎쓰고 고국을 등뒤에 둔채 중국에 온 견당사들, 란학(蘭學)을 배우고 구미를 읽으면서 바꾸후의 통치에 도전해나선 개혁파들, 이들로 하여 일본은 자신을 언제나 부정하면서 부강에로 가는 길을 이루었고 구미와 어깨를 겨루는 아세아의 강국으로 되였다. 비록 팽배한 야망으로 아세아와 세계를 전쟁에 휘몰아넣은 장본인이 되였지만 자신에 대한 과감한 부정은 우리가 따라배울바이다. 전쟁의 페허우에 경제의 기적을 이룩한 일본의 발전은 결코 민족성과 전통성에 대한 부정으로 이루어진것은 아니다. 상반대로 민족성의 철저한 발휘와 지킴으로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또 알아야한다. 자신의것을 지키지 않고 혹은 그것을 대가로 이룩한것은 오래 갈수 없다. 또한 그것은 결국 자신의것이아니다. 농촌으로부터 도회지까지, 교육으로부터 문화, 출판, 신문업 나가서 제반 문화사업까지 영향주고 심지어 민족의 존속까지 관여되게 심각한 문제를 대안이 없이 그저 보고만 있어서는 안될줄 안다. 《잘먹고 잘살면됐지, 한족학교면 어찌고 조선학교면 어떠냐? 애가 하나면 어쩌고 둘이면 어떠냐? 내가 편안하면 되지》 하는식의 자사적이고 실리적인 삶을 더는 고집하지말았으면 한다. 책임감 없고 사명감 없는 민족이 되여 자사적인 전통을 후대에게 그대로 심어주는것이 잘못되였다고 권장해본다. 승냥이가 왔다는 얘기도 한번 더 해보고싶은 마음이다. 인젠 믿어도 좋고 안믿어도 좋지만.로씨야의 명작가였던 뚜르게네브는 림종직전에 로씨야의 작가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우리들의 귀중한 유산인 로씨야어를 지켜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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