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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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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즐거운 실천활동 댓글:  조회:1294  추천:0  2014-10-14
학생들의 자신심과 의지를 키우고저 9월19일 룡정중학교에서는 초중 1학년 120여명 학생들을 조직하여 룡정시 동성용진에 건설된 룡정시중소학교 종합실천활동기지에 가 즐거운 1박2일 종합실천활동을 했다. 1박 2일간의 실천활동에서 학생들은 너나없이 유쾌하고도 적극적으로 매 교육과정에 참여하여 완강한 의지를 키웠는바 자부감에 온 얼굴에 웃음꽃이 사그러질줄 몰랐다. 룡정시정부는 2010년부터 종합실천활동기지를 건설, 근 5년간의 시간을 들여 현재 중소학교의 5개 학년의 40여개 교육과정을 설치하고 전문 교원을 배치하여 룡정시 각 중소학교 학생들의 종합실천활동 장소로 했다.
7    중학생들의 택시리용과 소비 댓글:  조회:2270  추천:2  2014-05-29
중학생들의 택시리용과 소비      사회경제가 발전하고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생활수요도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며 그 수준도 날로 향상되고 있다. 그중 택시는 사람들의 생활에 많은 편리를 갖다주며 많은 사람들이 리용하고 있는 중요한 교통수단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조선족부모들의 “대량적인 출국과 고향리탈” 등 조선족인구의 대규묘적인 류동속에 우리 조선족학생들이 부모의 품을 떠나 조부모나 외조부모 그리고 기타 친척집에 위탁되여 결손가정환경에서 성장하면서 우리 조선족 중학생들도 택시를 자주 리용하고 있는 중요한 군체로 떠오르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그 리용정황에 대하여 궁금하여졌다.       10여년전까지만 하여도 학생들이 택시보다도 자전거를 더 많이 리용하여 등교하고 하학하는것은 일반사였다. 허나 지금 현재상황은 많이 변하여 자전거로 등교하는 학생은 현저히 줄어들고 반면에 자전거보다 택시를 리용하는 학생수가 더 많아지고 있다.        매일아침 등교시간 때만 되면 교복을 입고 택시를 잡아타는 학생들을 거리의 골목 여기저기서 보이고 점심시간에도 조선족중학교학생들이 하학할 때만 되면 학교대문앞에서는 많은 택시들이 줄지어 학생들을 태우려고 기사들이 서로 자리를 경쟁하면서 대기하고 있는 풍경 또한 가관이다. 비록 교통경찰들이 학교대문앞에서 교통질서를 소통시키느라 부지런히 뛰여다녀도 퇴근하는 교직원들과 하학하는 학생들, 그리고 학생들을 태우려고 서로 다투는 택시까지 가담되여 학교대문앞은 사람과 차들로 아수라장이 되기가 일쑤다.        이런 현황에서 우리 조선족중학생들의 택시승차현상에 대한 실태를 알아보고저 모 중학교학생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하여 보았다. 설문조사에 참가한 117명 대상중 택시를 리용하는 학생이 66명으로 전체 조사대상의 56.4%를, 리용하지 않는 학생은 46명으로 전체 조사대상의 39.3%를, 나머지 5명학생은 부모의 자가용을 리용한다고 적었다.         설문조사에서 학생들이 택시를 리용하는 시간대를 살펴보면 아침에 리용한다고 적은 학생이 64명으로 점심과 저녘에 리용하는 학생총수 51명보다 더 많았다. 학생들이 점심과 저녘에 아침보다 택시를 적게 리용하는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점심에 적지않는 학생들이 집으로 가지 않고 부모가 준 소비돈으로 학교주위거나 학교와 가까운곳에서 점심밥을 사먹거나 간식으로 점심을 에때우고 저녘에는 같은 곳에 있는 친구들이 짝을 무어 속심을 나누며 걸어가기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택시를 리용하는 학생들의 리유에 대해 알아보면 아침에 늦잠을 자거나 등교시간이 늦어서 리용한다는 학생이 37명, 등교거리가 멀어서 리용하는 학생이15명, 날씨거나 신체문제(상해서) 등 기타 원인때문에 리용하는 학생이 12명으로 집계되였다. 점심과 저녘에는 시간이 늦어서는 20명, 거리때문에는 14명, 날씨거나 기타원인에는 17명으로 집계되였다.       그리고 택시를 리용할 때 혼자 리용하는 학생은 32명, 친구거나 집과 가까운 동학과 같이 리용한다는 학생 34명으로 집계되였다. 그리고 매주 10차이내로 택시를 리용한다고 하는 학생이 46명, 10차이상 리용한다고 적은 학생이 25명으로 집계되였다.      설문조사에서 아침등교시간이 늦어서 택시를 리용하는 대부분 학생들은 늦잠때문에 아침은 거르고 등교하여 제1교시가 끝나기 바쁘게 학교상점이거나 학교주위에서 매식으로 굶주린 배를 달래고 있다. 사먹는 음식이나 음료도 학생들사이에 서로 비기는 풍기가 있어 소비는 그야말로 만만치 않다.        전국적으로 음식안전감독력도를 가강하면서 불량음식제조거나 판매하는 행위를 엄히 다스리고 타격하고 있는 이때 우리의 많은 학생들이 점심도 학교주위의 음식점이거나 부페집의 배달음식을 사먹는데 여기에서도 우리학생들이 누가 무엇을 먹으면 나는 다른 더 좋은 음식을 먹는다는 소비심리가 역반응하여 학생들의 소비에 붙는불에 키질하는 양상이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조선족중학생들이 매일 쓰는 교통비와 매식에 드는 소비는 적어서 몇십원으로부터 많게는 백여원까지 엄청나다. 택시리용도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는 교통수단이라고는 하지만 오늘날 록색소비와 건강소비를 제창하는 이때 우리 학생들에게 음식안전과 건강문제, 그리고 환경의식과 소비관념을 서로 결부하여 옳바른 길로 소비를 인도하는것이 바람직한 선택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택시를 리용하는 원인에서 제일 비중이 많이 차지하는것이 등교시간이 늦어서를 적었는데 여기에는 학생들의 학습부담때문에 저녘늦게까지 공부를 하는 등 여러가지 원인도 있겠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면 그래도 중학생으로서 응당 갖추어야 할 생활자립문제가 학생들속에 존재하고 있다는것도 쉽게 알수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긍정적인것은 택시를 합승하는 학생이 34명으로 동학이나 친구사이에 서로 번갈아 택시비를 지불한다고 적은 점으로부터 우리 중학생들도 재산관리에 대한 의식이 점차 수립되고 있고 같이 합승하는 친구거나 학생들사이에 서로 협동할줄 알고 서로 생각해줄줄 아는 우정애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아주 보귀하다고 본다. 허나 우리 중학생들은 필경은 한창 성장하고 있으며 사회경험과 자립, 자강 등 여러가지 면에서 미숙하므로 이에 대해 가정에서나 학교, 더 나아가서 전반 사회가 이에 더 많은 중시를 돌리고 더욱 적극적인 인도와 교육감독을 돌려야 한다고 본다. 
6    조선왕조 600년 경복궁에서 느끼다 댓글:  조회:1631  추천:0  2014-05-28
조선왕조 600년 경복궁에서 느끼다   지난 겨울방학에 서울에 다녀오면서 서울에 있는 형님의 안내로 경복궁을 유람하는 기회를 갖게 되였다. 서울은 조선왕조 600여년 력사의 도성으로서 유람할수있는 유적이 많은데 그 가운데서 왕궁은 규모가 제일 크고 보존이 가장 완벽한 문화유산이라고 한다.                  경복궁의 정문-광화문앞 세종대왕동상앞에서 올해 서울의 겨울은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겨울이였지만 이날따라 날씨는 퍼그나 쾌청하고 맑았다. 게다가 형님의 친구 황씨가 동행하여 기분은 더 상쾌하고 심정은 기쁘기만 하였다. 일행은 세종거리를 거쳐 광화문으로 경복궁에 들어섰다. 관람권은 매인당 성인은 한화 3천원, 어린이는 1천5백원이였는데 10명 이상의 단체관람권은 성인은 2천4백원, 어린이는 1천2백원이였다. 그리고 종합관람권도 있는데 종합관람권은 매인당 한화 1만원으로서 여기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과 종묘를 모두 관람할수 있는데 단체관광팀일 경우 팀의 요구에 따라 시간대에 맞추어 가이드가 한국어, 영어, 일어와 한어로 관광안내를 하는 서비스도 첨부되여 있었다. 우리일행은 3명인데다가 정해진 코스에 따라 기계적으로 유람하는 단체코스가 부자연스러워 자유로 유람할수있는 코스를 선택하였다. 서울에 있는 조선왕조시대의 왕궁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 다섯개가 있는데 그중 경복궁은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1호 왕궁이다. 경복궁은 태조 리성계가 조선왕조를 건립한후 국가의 기틀을 튼실히 하기 위하여 제일 처음으로 건설한 왕궁으로서 력사가 가장 유구하고 규모도 방대하고 구조 또한 엄밀하고도 완벽하다.        경복궁 평면도(1.광화문 3.근정전 4.사정전 6.강녕전 11.경회루 16.신무문) 경복궁은 북악산, 인왕산, 락산과 남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성곽안의 평원지구에 건설되여 있는데 중앙으로 청계천이 흘러지나고 풍수 또한 뛰여난 곳이다. 경복궁은 광화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 남북으로 된 축을 중심으로 기타 전각들이 좌우대칭으로 주밀하게 배렬되여 있다.            세종대왕의 동상에서 바라본 광화문일각 광화문(光化门) 정문으로 들어서서 흥례문을 지나면 곧 보이는 전각이 근정전(勤政殿)이다. 근정전은 정전(正殿)으로서 국왕이 문무백관들과 조회하고 사신을 접견하고 책봉, 혼인 등 중요한 나라대사를 진행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정전광장중앙에는 국왕의 어명을 전하는 도로를 중심으로 그 좌우량옆에는 신하들이 통행하는 도로가 있으며 도로 좌우량켠에는 대신들이 자신의 직위순위에 따라 설 품위석이 가지런히 배렬되여 있다. 이는 한 측면으로 조선시대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엄격한 신분제도를 보여준다.                                       근정전 내부의 어좌(御座) 근정전을 지나 북악산을 향해 남쪽으로 에돌아가면 사정전이다. 사정전(思政殿)은 편전(便殿)으로서 국왕이 평시에 국사를 처리하는 곳이다. 사정(思政)이란 《깊이 사색하고 고려하여 국사를 처리》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사정전은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과 학문을 토론하던 곳인데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궁내에 설치하여 인재를 배양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기구로 하였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해마다 한국뿐만아니라 세계각지 조선족사회에서는 한글글짓기대회를 조직하는 등 여러가지 활동을 통해 한글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있다. 세종대왕은 조선왕조력사에서 가장 현명하고 치적과 업적도 가장 많이 이루어낸 군주이다.                                                           사정전 내부 강녕전(康宁殿)은 국왕이 기거하고 있는 침전(寝殿)으로서 사정전 바로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국왕은 강녕전에서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는데 가끔씩 대신들과 한담도 하는 곳이기도 하다. 경복궁후원과 많은 원림가운데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경회루(庆会楼)와 향원정(香远停)이다. 경회루는 아주 큰 루각으로서 련못중심의 인공섬에 건설되였는데 일반적으로 국왕이 사절들을 접대하거나 또는 대신들과 규모가 비교적 큰 연회를 거행하는 곳이다. 또한 경회루는 어린 단종이 권력타툼에 혈안이 된 자신의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게 눈물을 흘리며 국새를 넘겨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경복궁의 많은 전각과 후원을 둘러보면서 조선왕조가 《례의》와 《도덕》을 숭상하고 사치를 경계하였음을 엿볼수 있었다. 또한 유구한 력사의 전통적인 향기와 대자연의 아름다움도 한껏 느끼게 되였다. 흥분된 심경으로 관람하면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나오니 바로 한국의 권력중심지인 청와대 입구에 이르게 된다. 청와대입구의 보초병과 청와대를 멀리 바라보느라니 력사와 현실이 교차되는 묘미를 느낄수 있었다.                                        북악산과 청와대를 멀리 배경으로 경복궁(景福宫)의 글뜻은 《만년의 휘황과 복을 누리는 궁전》으로서 《천자의 뜻에 따라 백성들을 다스리고 자손만대가 길이길이 태평을 누리》려는 조선왕조의 강렬한 념원과 리상이 포함되여 있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1342~1398)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것이라고 한다. 경복궁은 태조때부터 건설되여 세종재위시기에 궁전의 기본체계를 확립하였다가 16세기 명종과 선종재위시기 화재와 임진왜란으로 회손되여 270여년동안이나 줄곧 페허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세기 고종재위시의 수건과 화재로, 20세기 민족수난시기의 파손과 수건, 그리고 《6.25》사변이후 한국정부차원에서의 대대적인 수건으로 하여 경복궁은 비로소 오늘날의 모습을 되찾게 되였다. 이외에도 경복궁에는 교태전, 자경전, 태원전, 건청궁, 동궁, 아미산, 집옥재 등 전각과 후원, 부속건물과 원림들 그리고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이 수건되여 있어 조선왕조 600여년의 전통문화와 우리 민족의 삶, 그리고 건축예술을 페부로 느낄수 있었다. 한국은 우리 민족의 풍속습관과 문화전통을 끊기지 않고 현재까지 대대로 전하여져 내려온 나라가운데의 하나로서 민족의 긍지와 자랑거리이다. 현대와 전통이 완미하게 결부된 경복궁을 즐거운 심정으로 관람하고 광화문을 나서는데 면바로 성문을 지키는 파수군들의 교대의식이 있었다. 광화문에는 조선시대의 장수복을 입고 성문을 지키는 파수군들이 있는데 매일 시간마다 옛날 방식대로 교대의식을 거행하는 행사를 진행할뿐만아니라 성문을 지키는 장수들과 유람객들의 기념촬영도 허락되여 있어 더 많은 유람객들의 발목을 사로잡고있다. 새로 수건된 경복궁이 참신한 모습으로 더 많은 유람객들이 선호하고 즐겨 찾는 유람지로 거듭나는 앞날을 그려보면서 귀로에 올랐다
5    한가위 즐거운 등산 댓글:  조회:2396  추천:0  2013-10-11
한가위 즐거운 등산 글 / 김군욱   한가위휴가를 맞아 한국에서 귀국한 큰형과 모친 그리고 이모사촌 내외와 딸애, 이렇게 가족들이 모아산으로 등산을 다녀오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갖게 되는 가족등산인지라 어쩐지 나의 심정과 기분이 소학교에 다니는 딸애못지 않게 둥둥 부풀어 올랐다. 일행은 오전 일찍 준비를 마치고 올해 봄에 새로 개통한 모아산행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모아산등산객들과 시가지를 드나드는 선로주변의 시민들을 위한 맞춤형 서비스선로로서 룡정버스역에서 출발하여 룡정시내를 에돌아 신교(해란교)를 거쳐 유신촌방향에서, 다시 새로 포장된 공업집중구도로에 들어서서 해란촌과 룡산촌을 거쳐 모아산산자락에 새로 설치한 정류소를 종점으로 왕복 행차한다. 맑고 해살 넘친 가을날씨에 차창으로 불어들어오는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차창으로 필림처럼 스쳐가는 창밖의 가을경치를 보느라 언제 옆에 앉아 종알대는 딸애의 말에 신경쓸새 없었다. 한가위를 맞은 가을의 산과 들은 무르익은 곡식들로 한창 파아란빛에서 황금빛으로 단장하기 시작하였고 높고 푸르른 가을의 하늘은 눈부신 해빛으로 눈을 부시도록 간지럽게 하였다. 모아산정류소에서 내려 기념사진을 남기기려고 산중턱에 있는 호랑이석상앞에 좋은 위치를 잡고섰다. 한발로 바위를 짚고 대지를 굽어보며 천하를 호령할뜻한 호랑이석상은 마치 장백산을 쩌렁쩌렁 울리며 표효하는 장백호랑이가 그 기염 그대로 굳어진것만 같았다. 산속의 숲을 따라 산중턱으로부터 산정상까지, 다시 산정상에서 산중턱으로 이르는 등산로는 상행선과 하행선으로 나뉘여 모두 목각으로 축조되었고, 산정상에 축조된 3층 전망대도 모두 목각을 기본골조로 축조되어 원시적인 자연의 풍취를 한결 보태주었다. 자연의 풍취를 만끽하며 록음이 우거진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모아산의 정기를 담은 맑고 신선한 공기가 페부를 적시면서 몸속에서 흐르는 붉은 피까지 맑아지게 하였고이름모를 새들과 벌레들의 지저귐소리는 시원한 가을바람이 스쳐지나가는 귀를 간지럽게 하였고 가끔씩 소나무숲가지에서 재롱을 부리면서 등산객들을 맞아주는 다람쥐들의 귀여운 모습은 가을의 풍취에 초점을 잃은 눈길을 사로잡게 하였다. 산정상의 전망대에 올라서니 해란강이 흘러지나가는 풍요로운 들판, 장길도의 한 축으로 용트림치며 새 기상을 자랑하는 연변의 수부도시 연길, 동아세아에서 제일 높이를 자랑하며 우뚝 솟아 그 기염을 자랑하는 기상탑, 그리고 발밑에서 시작되여 시야의 저끝까지 뻗어나간 아세아 제일 만무사과배과원 등 정경이 한눈에 안겨왔다. 추석명절을 맞아 모아산은 등산객과 유람객들로 차넘치였다. 점심무렵이 다가오자 산중턱 소나무숲과 정자 여기저기에 가족별, 단위별, 회원별, 동창별 등 여러가지 모임들로 오찬들이 조직되여 가고 있었다. 우리가족도 등산을 마치고 산중턱 아담진곳에 자리를 잡고 준비하여간 음식보따리를 풀고앉았다. 자연에서 정취를 만끽하며 나누는 음식 또한 별미였다. 여유롭게 식사를 마치고 한참이나 흥취도도히 이야기를 나누며 휴식을 취한후 다시 돌아오는 뻐스에 몸을 실었다. 지난해부터 룡정시정부에서는 생태룡정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많은 실제적인 일들을 추진해왔다. 시가지에는 룡드레우물 한락연공원 해란강쉼터 가야금광장 배꽃광장 륙도하인구문화원 등 시민레저휴식을 위한 광장들, 비암산 동산 마제산 대포산 등 주변산을 이용하여 시민들의 등산운동을 이끌어가고 있는 등산로들, 룡정촌지부, 윤동주생가, 주덕해생가, 15만원탈취유적지 등 우리 민족의 역사를 돌이켜보게 하는 홍색관광을 위한 많은 유적지들, 어곡전농부절 배꽃축제 송이버섯축제 등 우리민족의 풍속들을 체험하게 하는 축제문화 등 다양한 문화공간들이 육속 발굴하고 홍보하여 우리 시민들의 생활 속에 소리없이 뿌리내려 점차 자리매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한국제주유배문화와 연변 민족문화를 활용한 스토리텔링 연수반이 연변대학에서 개강되였는데, 그 취지는 스토리텔링을 통한 자원활용 및 경제, 문화 산출에 성공한 한국제주문화를 학습하고 연변의 민족문화를 다양한 분야의 자원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부차원에서 적극적인 자세로 우리 주변의 다양한 문화공간들이 진일보 발굴발전하고 더 완벽하게 보듬고 다듬어 가면서 타인의 우수한 점을 적극 학습하고 응용하고 여러가지 콘텐츠를 적극 활용한다면 우리에게도 더 많은 독특한 문화샘플들을 창조할수 있다. 여기에 우리시민들도 주인공적인 자태로 민족문화건설에 적극 참여한다면 우리의 특색을 띤 민족문화는 기필코 다양한 분야에서 더욱 아름답게 활짝 꽃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 고향은 우리 시민들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이방인들이 즐겨찾는 살기 좋고 인심 좋은 연변으로 만방에 이름을 떨칠 것이 아니겠는가. 그날을 기대해 본다.  
4    뻐스환경과 서비스 댓글:  조회:2162  추천:1  2013-08-12
뻐스환경과 서비스     일전 고향마을에 있는 숙부벌이 되는 친척의 생일로 도문행뻐스에 올랐었다. 그날 서둘러 표를 끊고 뻐스에 오르고 보니 승객들로 붐벼서 겨우 운전석옆 제일 앞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을수 있었다. 떠나기 앞서 금방 집에서 샤외하고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찌물쿠는 날씨에 승객들로 붐비는데다가 뻐스안의 침침하고 타박한 공기에 얼굴과 온몸은 금새 땀으로 범벅이 되였다. 통풍이나 시키려고 가까스로 차창을 열었으나 차창밖의 찌물쿠는 날씨탓인지 별로 시원한감을 느낄수 없었다. 그런대로 땀을 훔치면서 주위를 보니 참 억이 막혔다. 땅바닥에는 휴지와 음료통, 담배꽁초에 그리고 여러가지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었고 차창턱과 운전석옆 발동기덮개주위는 언제 청소했는지 분간키 어렵게 먼지와 여러가지 얼룩으로 형체를 가릴수 없었고 지어 차창턱에는 이름모를 새똥까지 뭍혀있었다. 게다가 뻐스안에서는 파리떼까지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행차시간표를 찾아보니 응당 승객들의 눈에 쉽게 띄우는 차창 높은곳에 있어야 할것이 운전석앞 차창유리와 턱사이에 휴지, 캡슐약, 손컬레와 여러가지 잡동사니와 같이 끼여져 있었다. 눈길을 돌려 기사석 뒤를 보니 거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땅바닥에는 소화기, 디젤유통과 같은 여러개의 캡통, 쪽걸상이 비닐봉지와 긴호스와 같이 지저분하게 널려있고 기사석과 뻐스벽체사이에는 수세미와 여러가지 잡동사니들이 되는대로 끼여져 있었다. 께름직하고 메쓱스럽게 만드는 기분이였다. 이때 뒤좌석에 앉아있던 나이 지긋한 한족승객의 말이 나의 귀전에 날아들었다. 원래 아침에 출발하여야 할 두대의 뻐스운전수가 승객이 너무 적다는 리유로 발차를 취소하였기에 사정이 급한 일부 승객들은 택시로 이미 떠나갔고 사정이 급하지 않는 승객들이 여직껏 남아 기다렸다는것이다. 자신도 이미 두시간이나 기다렸다면서 승객들을 불편스럽게 만든다면서 불만을 털어놓는것이였다. 이러고보니 일찌감치 나와 뻐스에 탑승했는데도 승객들로 붐빈 리유를 금새 알수 있었다. 아무리 시장경제시대에 뻐스마다 개인이 도급맡아도 승객의 편리보다 경제리익때문에 사전통보도 없이 마음대로 발차를 취소하는 행실이 참 어처구니가 없어보였다. 한참 지나 발차시간이 되였는지 운전기사가 뻐스에 올라 손님과 표를 서로 대조하면서 점검하더니 몇몇 표를 사지않은 승객들을 그 자리에서 표를 사게하고는 뻐스역무원과 서로 교대하더니 이내 기사석에 올라탔다. 좌석에 앉아서는 먼저 담배를 꼬나물면서 발동기앞 작은 덮개를 열더니 뻐스전자감시시스템의 전원을 떼여버리는것이였다. 옆에 앉은 낯익은 사내와 주고받는 말을 들어보니 과속운전이 시스템에 찍히면 벌금을 내야하니 시끄럽다면서 사전에 예방한다는것이였다. 참 경제리익이 밝은 기사였다. 승객 모두가 길을 떠날때면 누구나 다 편안하고도 기분좋게 안전히 목적지에 도착하고 운전수 또한 그렇게 하여야하는것이 기사와 승객사이의 계약책임인데 그 책임보다 돈벌이에 더 신경을 쓰고 중요시 여기는 기사의 본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런 찜찜한 기분속에 차는 출발하였다. 한참 달리다 뻐스기사가 어디엔가 높은 소리로 한참이나 통화를 해댔다. 기동차운행중 기사가 통화하는 행동은 올해부터 실시하는 새 교통규칙에 분명히 위반되는 행위인데도 아랑곳없이 한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면서 한손으로 운전하는 위법운전이였다. 그러다 운전하는 도중에 가끔 동업자의 차가 보일때면 언제나 귀청을 찢는듯이 높은 경적을 울려대는 행동도 여러번이나 목격되였다. 려행도중 피곤한 승객들이 걸상에 비스듬히 앉아 조으는것도 가리지 않고 말이다. 한국에 다녀오면서 공항뻐스, 마을뻐스 등 공공뻐스를 여러번이나 타보았고 길을 다녀보아도 길에는 사람보다 차가 더 많다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에서도 기사사이에 언제나 서로 손을 들어 인사를 하지 절대 높은 경적소리는 울리지 않는다. 작은 세절에서도 발달국가와의 문명의 차이가 보이는 일면이다. 이렇게 달리던 뻐스에서 기사석 뒤로 두번째 좌석에 앉은 한 녀성승객이 목적지를 잘못 말해 뻐스를 세웠더니 기사는 뻐스를 몰면서도 투박진 목소리로 여러번이나 그 승객에게 불만을 토로하는것이였다. 고개를 돌려 그 승객을 보니 나이가 반백도 훨씬 넘어보이는 년장자인데 해도해도 너무 한다싶었다. 그리고 도중에 승객들이 뻐스에 올라탈 때면 앉을 좌석은 관계치 않고 어디로 가느냐 표부터 사라고 떵떵거리면서 승객의 돈을 하나하나 다 받은 다음에야 출발하는것이였다. 승객의 편리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돈벌이밖에 모르는 무지막지한 기사의 언행에 또 한번 눈길을 찌푸리게 한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동안 차창으로 스쳐지나가는 창밖의 록음이 우거진 그림같은 산과 들의 경치를 보아도 목적지에 도착하는 내내 찜찜하고 불쾌스럽고 께름찍한 기분과 심정은 가셔지지 않았다. 전 사회적으로 조화사회, 문명사회건설을 창도하면서 문명하고 례의스럽고 성실과 신용을 추구하는 정신풍모와 새기상이 발양되고 꽃피고 있는 이때 뻐스기사도 승객을 손님으로 깍뜻이 모시고 보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할 대신 자기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되는대로 승객을 대하고 승객에 대하여 한점의 책임감도 없어어야 되겠는가? 유관부문의 엄한 감독과 적시적인 조치도 중요하고 필요하다지만 뻐스기사 자신부터 운수업도 봉사업종의 한부분으로 옳바른 서비스관념을 수립하고 자아수양을 진일보 강화하여 승객들에게 편리를 도모하고 보다 깨끗한 환경과 친절봉사 등 서비스를 제공하여 승객들의 호감과 긍정을 받는 본보기로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뻐스행차표에 가려진 “준법,우질”의 글자가 보이는 감독게시판
3    한국 노가다 체험기 댓글:  조회:2484  추천:3  2013-04-12
한국 노가다 체험기 지난 겨울방학 한국을 다녀오면서 노가다일을 하는 소중한 체험을 갖게 되였다. 이번 일은 출국전부터 한국에서 건축일을 하고있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얻은 일인데 친구가 《교원인 네가 어떻게 한국에서 힘든 노가다일을 하냐》고 근심조로 여러번 말했어도 《너희들도 하는 일인데 나라고 왜 못하겠는가》 하고 배심을 부리면서 무작정 할수 있다고 《생떼》에 《장담》까지 하였었다. 이번 한국행에 친구가 소개한 노가다일은 아파트건축현장에서 하는 형틀목수일이였다. 아파트건축현장에서 목수일이라면 하는 일에 따라 형틀목수, 지경목수와 내장목수로 구분된다. 내장목수일은 다 지어진 건축물내부에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를 설계하고 장식하는 일이고 지경목수일은 건축현장에서 건축자재를 관리하고 현장팀에 자재를 발급하는 한편 하루일이 끝난 현장을 청리하는 등 잔일을 하는것이다. 형틀목수는 철근팀이 철근을 설치하고 설비팀이 상하수도와 전기를 설치한후 합판으로 만든 폼을 삔으로 고정하면서 콩크리가 새지 않도록 틀을 맞추어 벽체를 붙이고 천정에는 먼저 나무막대기로 구조에 맞게 틀을 짠후 나중에 비닐합판과 나무합판으로 나무틀우에 집천정을 붙이고 그 밑에다 사뽀로(철로 만든 받침대)로 고정하면 한층을 짓는 건축일이 마무리된다. 그리고나서 콩크리트팀이 콩크리트를 때리고 그것이 일정시간 지나서 굳으면 다시 철근팀 그리고 형틀목수와 기계팀 순서로 반복되여 건축현장에 투입된다. 이렇게 각 팀이 일사불란하게 반복투입되면서 건축물은 점차 지어진다. 형틀목수일을 난생처음 해보는 나는 처음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근심만 태산같았다. 출근 첫날인 1월 12일 아침, 다섯시 반에 기상한 우리는 소형뻐스에 앉아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건축현장으로 달렸다. 현장은 숙소에서 소형뻐스로 약 한시간 가량의 거리였다. 현장에 도착하면 우선 현장에 있는 휴계실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노가다현장에서는 반드시 안전모에 안전띠, 그리고 안전화를 착용하여야 한다. 그리고는 현장에 있는 함바식당(현장에 림시로 설치한 식당)으로 향하였다. 함바식당은 부페식으로 보통 한가지 고기복음채에 3개 좌우의 김치, 그리고 김치찌개거나 부대찌개가 전부였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팀원들은 추운 겨울날씨에 현장에다 난로불을 지피고 언 몸을 녹이면서 현장소장이 배치하는 그날의 일들을 들으면서 그에 필요되는 건축자재와 도구들을 일일히 챙긴다. 배치가 끝나면 나를 제외한 기타 팀원들은 몇해씩 건축일에 종사한 베테랑답게 모두 말없이 자기가 할 일을 찾아 일을 시작한다. 생뜨기인 나로서는 데모도(잔일이나 심부름따위의 일)일이 차례져도 어떻게 해야 할지 두서가 잡히지 않았다. 다행히 고향 선배인 팀장이 건축자재를 나르거나 준비시키는 일을 시킬 때마다 어떠어떠하게 하라고 반복적으로 해석하여 설명해주기에 실수를 줄이면서 이내 일이 손에 쉽게 잡히게 되였다. 혹간 나의 불찰로 팀일에 영향을 끼칠 때면 팀장은 자기도 초기에는 그런 실수도 하였다면서 리해해주고 격려해주기에 일에 더욱 마음붙이고 열심히 할수 있었다. 하루동안의 현장일은 휴식시간이 따로 없이 오전과 오후 새참을 먹을 때에야 난로불을 쪼이면서 잠시간 동안의 휴식을 취할수 있었다. 현장에서 공급되는 참은 캔우유거나 음료에 빵 하나씩 배분된다. 한참 땀 흘리며 일하고 허기질무렵에 먹는 참은 그야말로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점심은 12시가 다되여야 작업복차림 그대로 함바식당에서 먹을수 있었다. 점심식사후에는 현장의 양지쪽이거나 바람받이가 되는 장소를 찾아 풍덩 앉아서는 약간의 휴식을 취할수 있었다. 오후 작업은 1시에 시작되여 5시가 되여야 끝나는데 일이 딸릴 때에는 연장근무를 하기도 한다. 오후 퇴근하여 숙소에 돌아와 대충 샤와를 하고 팀원끼리 저녁밥을 지어먹고나면 늦은 밤중이 다되여간다. 저녁식사후 피곤한 몸은 이불을 펴고 눕기 바쁘게 꿈나라로 들어가고 고된 하루일과는 이렇게 끝난다. 현장일에서 아파트건축현장일은 대형상가 등 건축현장일보다 좀더 까다롭고 힘들다. 대형상가 등 현장일은 한층을 짓고는 폼, 사뽀로와 나무판 등 건축자재를 지정된 곳에 모아놓으면 기중기로 웃층에 옮겨서 다시 쓰는 대신 아파트건축일은 폼, 사뽀로와 나무판 등 건축자재들을 인력으로 하나씩 아래층에서 웃층에 옮겨다 다시 써야 하는 불편함이 존재한다. 폼은 20×140㎝로부터 60×160㎝에 이르기까지 각양인데 모두 철판과 두꺼운 합판으로 만들어 그 무게가 십여근으로부터 몇십킬로에 달하며 사뽀로도 모두 철근으로 만든것이라 몇십킬로는 훨씬 간다. 건축현장에서 이처럼 몇백개나 되는 건축자재들을 사다리잇기식으로 아래층에서 웃층에 옮기고나면 추운 겨울날씨일지라도 온 몸은 금방 땀벌창이 되고 입에서는 겨불내가 물물 나게 된다. 여직껏 교원사업에만 종사해오면서 이와 같은 육체로동을 한번도 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노가다건축현장의 일은 그야말로 고역에 고역이 아닐수 없었다. 건축현장은 한곳만이 아니다. 한곳의 일이 끝날가 하면 또 다른 현장일이 잇달아 들어온다. 팀원들이 합심하여 매사에 질량을 담보하면서 일축을 빨리 내야 현장소장의 신용과 믿음을 얻어 다른 건축현장의 일을 더 많이 맡게 된다. 매일 아침 출근 할 때에는 사지가 쑤셔나고 몸은 피곤하여도 일단 현장에 도착하면 누구나 열심히 일한다. 만약 누가 힘들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 게으름을 피운다면 경쟁이 치렬한 한국사회에서 이내 잘리고만다. 일단 노라리를 피워 잘리거나 신용불량자란 딱지가 붙으면 어느팀에서도 반기지 않는다. 때문에 누구나 다 열심히 일한다. 한국출국시기가 마침 겨울방학인지라 추운 날씨와 명절휴식, 그리고 친척, 친구들과의 약속때문에 노가다일은 십여일밖에 못 뛰였지만 그들과 같이 생활하고 일하면서, 그들이 부지런히 열심히 뛰는 모습으로부터 한국사회의 치렬한 생존경쟁의 일면을 인식하게 되였다. 그리고 그들이 고향의 가족을 위해 열심히 피땀을 흘리며 일하는 모습과 일상의 분주함에서 내가 종사하고있는 교원사업의 소중함,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새롭게 느끼게 되였다. 이 체험을 내 인생에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재부로 간주하면서 나의 사업과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자신의 앞날을 위하여 더 열심히 뛰여보련다. 글/룡정시룡정중학 김군욱(청년생활 2013년10기 발표작)
2    아빠들의《술주정》이 주는 사색 댓글:  조회:1370  추천:3  2013-01-09
아빠들의《술주정》이 주는 사색   일전 필자는 소학교에 다니는 딸애의 학부모회의에 갔다가 회의 뒤끝에 조직된 오찬모임에서 애들이 재잘거리며 말하는 아빠들의 술주정이야기들을 듣게 되였다. 얼핏 들어보면 아빠가 술을 마시고 애들앞에서 무의식간에 행한 언행이 애들 눈에는 우습강스러운 모습으로 여겨서 하는 말 같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런 아빠들의 바르지 못한 음주습관이 가정교육에 대한 무책임적인 언행이 아닌가 사색해보게 된다.   그날 어른들의 상에 여러가지 복음채가 오르자 이내 술상이 벌어졌다. 술을 붓고 권하면서 화제가 저도 모르게 술이야기로 넘어가자 옆상에 앉아 밥먹던 학생들의 상에서 총기 넘쳐보이는 한 녀자아이가 먼저 말을 꺼내는것이였다. 《저의 아빠는 술만 마시면 핸드폰으로 여기저기 쉴새없이 전화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어제저녁에는 밖에서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와서는 친구한테 전화를 건다는것이 텔레비죤리모컨을 핸드폰인가고 거꾸로 쥐고 온 저녁 소리쳐도 아무 대꾸 없으니 지쳐서 쏘파에 누워잤습니다.》 그 말에 나는 기타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엔 웃음으로 넘겨보냈다.   그러자 그 옆에 앉은 남자아이도 자기 아빠의《술주정》이야기를 하는것이였다.《저의 아빠는 밖에서 술만 마시면 번마다 친구들을 우리 집에 청해와서는 또 맥주를 마시는 습관이 있습니다.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높은 소리로 말해 이웃들도 시끄러워 의견이 많습니다. 이튿날 아빠가 술을 깬후 엄마가 잔소리를 할라치면 다시는 안 그런다고 번마다 약속은 잘하지만 못 고칩니다.》   맞은켠에 앉아있던 남자아이도 아빠의 《주정사》를 말하는것이였다. 《저의 아빠는 술에 취하면 잘 때 이발을 갈고 노래부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때면 우리 식구들은 다른 방에서 이불을 푹 쓰고 자도 잠들기 힘듭니다.》   애들이 하는 이런 이야기는 얼핏 보면 개별적 아빠들의《고약한 술버릇》에만 한한것 같지만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이보다도 더 험한 그릇된 음주습관과 술주정현상들을 찾아볼수 있다. 술모임이 이뤄지면 언제나 1차로부터 시작하여 수차는 걸쳐야 하고 지어 아침에 길거리의 두부장사가 《뚜포-》 하고 소리칠 때까지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호객들, 술은 취하기 위하여 마시는 음식이라고 떠벌이며 마시는 술군들, 취한후 신경세포가 흥분되고 자제력을 상실하여 일어나는 부부싸움, 자식학대 등 가정폭력으로부터 길거리 행패, 무리싸움 등 극단적인 행위까지 발생되기도 한다. 이러한 음주습관과 《음주문화》가 다름아닌 우리 조선족사회에서 자식을 둔 아빠들속에서도 존재하고있다.   목전 조선족학교 학생들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결손가정자녀와 독신자녀가 대부분이고 부모쌍방과 같이 생활하고있는 학생은 아주 드물다. 그런데 자녀곁을 지켜주고있다는 아빠들마저 자녀의 학습을 지도해주고 고뇌를 풀어주는 친구가 되여주지는 못할망정 애들앞에서 이런 부정적인 추행만 드러내고 자녀한테서 문제만 생기면 돈으로 부모의 역할을 대체하려 한다.이런 부모들은 자녀들이 바라는것이 무엇인지 모르고있다.   기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식의 마음을 리해해주고 온집식구가 오손도손 모여앉아 맛나는 음식을 나누어먹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따뜻한 가정을 그리고있다. 진정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의 미래를 위하는 부모라면 자신을 반성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 아빠라는 이름은 갖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쉽지 않는 일이니까.   애들의 인정을 받는 부모로, 부모로서의 옳바른 처사를 다 하자면 나부터 참답게 반성하고 새롭게 살아보련다.나도 딸애를 둔 아빠이니까.  /김군욱(길림성 룡정시 룡정중학교)
1    선구촌을 찾아서 댓글:  조회:1266  추천:1  2013-01-09
선구촌을 찾아서 글/ 김군욱   삼복철더위에 집에서 방학휴식일을 보내고 있던차 선구촌에서 살고있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선구촌마을을 다녀오게 되었다. 중조변경에 자리잡고 있는 개산툰진 선구촌은 동으로 두만강을 사이두고 조선의 종성읍과 마주하고 있는 곳으로 내가 태여나서 즐거운 동년시절을 보냈던 마을이다. 력사도 유구하고 전설도  많은 산좋고 물맑은 고장이다.   29일 오전, 콩크리트포장도로를 달려 한시간만에 마을에 도착하고보니 이른 점심시간이다. 차에서 내려 친구에게 마을을 좀 돌아보고 곧장 들어갈테니 그리알라는 기별을 하고 마을밖의 길을 따라 거닐면서 동년의 꿈이 묻혀있는 고향의 산천을 돌아보았다. 고향마을의 본명은 광개향 선구촌 제6소조인데 그 이름부터 유래가 깊다. 광개라는 명칭은 고려시기 광개토왕이 북벌하여 령토를 점차 확장하면서 개간한 땅이라 하여 지어진것이며 선구라는 지명은 고향마을 동쪽에 두만강을 사이두고 부두가 있어서 선구(船口)라고 지어진것이다.   마을을 또 산성촌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마을의 서북쪽산정상에 선구산성이 있어서 지어진것이다. 산성비문에 따르면 이 산성은 금나라때 (기원1115년~ 기원1234년)에 축조된것으로 동남성과 서북성으로 이루어졌고 평면은 릉형에 가까우며 방향은 140도이다. 동남성의 둘레는 1960메터, 서쪽모서리근처에는 대형건축물자리 한곳이 있고 동남과 동북모서리에는 사람이 거주했던 터가 있으며 서남과 서북에는 문자리 하나씩 있다. 서북성의 둘레는 1814메터, 이 성은 동남성이 축조된후에 쌓은 부속성이다. 성안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괴면기와막새 처마기와, 손가락누름무늬기와, 륜제니질회색토기그릇밑굽 등이 있다.   언젠가 정동중학에서 사업할 때 한국에 류학간 고향친구가 한국인 선배로부터 연변의 유적을 답사하는 걸음에 선구산성도 답사하려는데 길안내를 서달라는 제의를 받고 흔쾌히 따라나선적이 있다. 그때 산성촌마을의 정황을 잘 알고있고 정부로부터 산성관리를 책임졌다는 윤씨할아버지를 청하여 선구산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산성에 대하여 더 많은것을 알게 되였는데 산성의 남쪽산(뱀이 따발을 틀고 앉은것 같다하여 일명 따발산이라 부름)정상에는 봉화대와 야장간도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길 없다. 그리고 산성을 축조할 때 서남대문자리 기초로 사용되였던 아주 큰 돌은 본고장의 돌이 아닌것으로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아 성새의 존재에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성새에 올라서 굽어보면 천년전 고려군사와 성새의 금나라군사들이 두만강을 사이두고 치렬한 쟁탈전을 벌렸을 전투장면이 눈앞에 떠오른다.   산성촌마을로부터 편서남쪽으로 약 600여메터 떨어진곳에 새마을이라고 부르는 초기의 부락이 있었다. 그때는 70여호가 넘는 큰 마을이였는데 후에 지금의 산성촌마을과 새마을 서쪽켠의 마을로 한두호씩 이사하면서 차츰 새마을이 없어졌다고 한다. 산성촌마을의 북쪽켠에는 실개천을 사이두고 자그마한 마을이 있었는데 일명 꼬리섬(미도尾岛—사이섬의 끝부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부두는 지금의 산성촌마을 동쪽 밭끝자락 이왕의 사이섬의 동북쪽켠에 있었다. 조선조말기 일제의 침략과 략탈에 배달민족이 살길을 찾아 일제놈들의 감시를 피해 가만히 두만강을 건너 사이섬과 그 부근의 땅을 개척하면서부터 점차 새마을과 부두가 생기기 시작하였었다. 부두가 생겨서 부두로부터 새마을로 통하는 구간에는 당시에도 규모가 퍼그나 큰 집시무역시장이 형성되였다고 한다.   부두가 생긴후 일제는 부두에다 세관을 설치하고 부두를 오가는 행상들에게서 관세를 징수하였을 뿐만아니라 경찰서까지 설치하고 오가는 행인과 마을의 이민들을 감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몇차례의 큰물이 졌는데 무역시장과 세관은 홍수에 밀려 사라지고 사이섬도 홍수에 의해 그 형태가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사이섬은 두만강물줄기가 두갈래로 흐르면서 강바닥의 침점과 홍수의 범람으로 점차 생겨난 섬인데 물학성(지금의 개성촌)으로부터 산성촌 북쪽마을의 꼬리섬까지 사이에 있었었다. 그러다가 두만강물의 류량이 많이 줄면서 서쪽의 물줄기가 점차적어지고 또 홍수에 의해 뭍히면서 사이섬은 점차 천평벌과 이어지게 되였다. 해방이후(지난세기 60년대-뚝을 쌓기전까지도 나루터앞에는 두만강의 큰 줄기와 작은 줄기의 물이 흘렀었는데 그때의 민공들이 나루터 앞의 작은 물줄기를 건너가서 뚝을 쌓았다고 함) 물학성으로부터 산성촌마을북쪽끝까지 홍수방지로 뚝을 쌓으면서 부두와 사이섬은 두만강과 완전히 떨어지게 되여 그 형태를 감추게 되였다.   그무렵 촌민들이 농지개간으로 물도랑을 파면서 시장이 있던 자리에서 많은 도기그릇과 술병들이 출토되였는데 번성했던 당시의 나루터의 존재와 집시무역시장의 존재를 가히 알수있다.   여기에는 또 이런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대홍수가 지기전에 농부들이 일군 밭이 아주 비옥하였는데 그때 많은 비옥한 땅을 소유하고있던 대지주가 홍수와 곬물에 많은 땅이 묻힌것이 너무 아까워 그 땅을 다시 개간하려고 몇날몇밤을 패가면서 주산알을 튕겼으나 인건비가 너무 아름차 포기, 눈물만 글썽이다가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돌아간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것.   동북이 광복되기전까지도 마을의 젊은 남성들과 아주머니들은 생계를 위하여 지게를 지고 물함지를 메고 두만강을 건너 종성읍에 나들며 보따리장사로 생활보탬을 하였다고 한다. 어린 동년시절 동년배들과 즐겁게 물장구도 치고 수영도 하였던 강변의 모래밭, 산딸기랑 살구랑 산열매를 따먹으면서 숨박꼭질도 하였던 따발산, 물고기를 잡아 여름더위를 피하여 물고기탕을 끓여먹고 옥수수도 구워먹었던 돌다리, 그리고 마을 북쪽산에도 몇채의 인가가 들어섰던 명당마을, 그곳에서 돌배도 따먹던 즐거운 추억들, 이 모든것이 내가 알고있는 고향의 력사와 전설과 함께 어우러져 즐거운 환영에 빠지다나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깜빡 잃었다.   문뜩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받고보니 친구로부터 금방 집으로 올것이지 어디에 정신이 팔려 점심시간이 다 지나가는것도 모르느냐는 푸념소리다. 반죽좋게 웃어넘기고 금방 간다고 대답했다.   친구의 집에 들어서니 친구외에도 너무나 낯익은 고향의 어른들도 계셔 서로 정답게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한상에 앉았다. 비록 차린것은 진수성찬이 아니였지만 허물없이 지내던 동년의 고향친구와 고향의 어른들을 만난 기쁨과 고향에 왔다는 즐거움에 음식도 별미였고 기분도 한결 상쾌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한담을 나누는 가운데 당의 새농촌건설과 흥변부민 등 일련의 정책속에 산성촌 마을이 모두 벽돌기와집으로 변신하였고 농민들의 수입도 많이 늘어나 생활형편이 많이 개선되였다는 좋은 소식들에 귀가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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