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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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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수필 - 인간과 물고기 그리고 나무 댓글:  조회:71  추천:0  2024-07-04
수필                                                                          인간과 물고기 그리고 나무                                                                                          리광학    세상에서 영원히 한 곳에 정착하며 정지되고 변하지 않은 민족은 없을 것 이다. 피난과 도망, 생을 위한 떠남 가고 또 가면서 이동하며 긴긴 세월을 지내 온 민족이 우리 민족이 아닐가 싶다. 우리들의 선인들은 고향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의 낯설은 곳에 찾아와 두 손으로 밭을 일구고 집을 짓고 하며 삶의 려정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간신히 북간도에 정착을 하고 살다 또 더 나은 삶을 지향하며 먼 장춘지역으로 이주해 간 우리 민족 선인들이 있다. 1945년 광복을 맞고 얼마 안되여 당시 연길현과 화룡현의 일부 우리 민족 농호들이 수전개척단에 합류하여 길림성장춘시 류수현의 동부와 북부 라림하 (拉林河)를 계선으로 흑룡강 오상시가 바라보이는 곳으로 이주했다. 박달 나무 얼어터지는 북방의 추운겨울, 이주민들은 거이 빈몸이나 다름없이 류수현 허허벌판에 땅을 파고 움집을 짓고 겨울을 났다. 봄이 오자 온갖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란 벌판의 풀들을 맨손으로 제거하고 물도랑을 파고 하며 악착같이 한빼미 한빼미의 논밭을 일구어 냈는데 나중에 그 논면적이 무려 5백여 헥타르에 달했다.    그렇게 힘들게 류화땅에 깊숙히 뿌리를 내려 일떠세운 곳이 바로 길림성장춘시류화현 ‘연화조선족향’이다. 연길현의 ‘연’자에 화룡현의 ‘화’자를 따서 연화라고 지명을 단 것이다.    우리 민족은 그 힘든 렬악한 환경에서 어찌하여 용케 뿌리를 내려 살아 남을 수 있었을가? 물론 이런저런 여러가지 안받침한 원인들이 많았겠지만 그 중에서 그래도 가장 주되는 원인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본능과 주관능동적인 사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가 싶다. 하기에 인간은 삶의 과정에 나타나는 곤난과 역경에 대처하고 이겨 나갈 수 있는 의지와 지혜를 갖고 있다. 이런 인간의 가지고 있는 내재적인 근거를 가진데다 그 당시 동북3성의 많은 지역들은 선인들의 고향은 비길 수 없을 만큼 살진 땅과 최적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지 않았을가. 어릴적 어느 한여름 장마철에 생긴 일이다. 하늘은 창이 뚤렸는지 며칠간 쉴새없이 물줄기를 퍼부어대더니 큰 강물은 강뚝을 넘어 논을 덮치고 작은 물도랑은 버드나무가지나 풀줄기같은 잡다한 물건들이 무작정 떠내려와  휘감기며 다리를 메우는 바람에 미처 물이 빠지지 못해 길우로 흙탕물이 넘쳐났다.작은 물도랑 앞에 자리를 잡은 생산대의 우사간도 재앙을 면치 못했다. 도랑물이 뻗치며 우사간의 소들의 배설물들이 흐르는 곳까지 닿아 련결이 되였다.    며칠 후 비가 끊기고 넘치던 물이 점차 빠지자 사양원이 우사간바닥의 널판자를 들자 믿기 어려운 광경이 벌어졌다. 숱한 미꾸라지가 우글우글 거릴 줄이야! 미꾸라지들이 도랑물이 넘쳐 소들의 배설물이 흐르는 곳과 련결이 되자 기회를 다잡아 떼를지어 모여든 것이 분명하였다. 어른들은 이게 웬 떡이냐며 손을 모아 너무 쉽게 가마니에 미꾸라지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미꾸라지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아쉽게 사람들의 밥상에 오르게 되였다.   그때는 어린탓에 미꾸라지가 왜 하필이면 우사간 널판자 밑에 모였을가 하는 아리숭한 의문만 가졌었다. 썩 후에 어른이 되여 서야 미꾸라지는 양지보다는 음지를 흐르는 물보다는 고인물에서 즐겨 서식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미꾸라지와 정반대의 특성을 가진 물고기가 있다. 바로 산천어란 물고기이다. 산천어는 주로 환경과 공기 좋은 심산계곡에서 흐르는 깨끗한 물에서 서식한다. 만약 산천어의 기본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들의 주관 욕심과 의지에 따라 마을 주변의 물도랑이나 늪의 고인물에 놓아주면 생존 할 수 있을가.    연길분지의 복판으로 부르하통하가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굽이쳐 흐른다. 부르하통하는 만주어로 버들숲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가 어릴때 기억에 의하면 우리 마을 강변이나 마을주변 학교운동장 그리고 어디를 막론하고 버드나무가 없는 곳이 거이 없었던 것 같다.    봄이 오면 마을주변의 여러가지 나무들 중에서 제일 먼저 가지에 하얀 개지를 곱게 업고 기지개를 쭉 펴며 봄 소식을 알리는 나무가 바로 버드나무였다. 그로부터 얼마 안지나 버드나무에 파란 물기가 오르면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 버들피리를 부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름이 오면 어른들은 강변에서 쭉 빠진 밋밋한 버드나무 가지를 베여다 생활에 필요한 광주리를 틀거나 고기잡이 통발을 만들었다. 추운 겨울이 오면 아이들은 강변의 곧은 버드나무 가지들을 잘라 송곳을 만들어 얼음강판에서 썰매 놀이를 즐겼다.    그제날 연길 시가지의 가로 세로의 가로수들 대부분이 수양버들이였다. 하남다리 서북쪽에 자리잡은 아름답고 수려했던 “청년호” 도 실실이 늘어진 수양버들로 인해 더 이채를 돋구었었다. 이로부터 보아 버드나무는 연길분지에서 서식하기 가장 알맞는 나무의 일종이 아니였을가 싶다.     그러던 연길분지의 버드나무는 사회의 발전에 의한 도시화의 진척으로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부르하통하의 버드나무 숲은 언녕 자취를 감추고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요즘 도시를 아름답게 건설하려는 취지하에 록색형명의 푸른 바람이 거세차게 일고 있다. 각양각색의 나무들이 선정되여 도시에 자리를 잡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 평생 산에서만 자리를 잡고 살던 소나무도 그들속에 끼여 이곳저곳에 이사를 하고 있다. 헌데 소나무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 그 자람새가 시원치 않다. 적지않은 소나무들이 이사를 와 3년을 못넘기고 아쉽게 요절되고 있다. 심지어 연길 서출구로 가는 길 남쪽에 위치해있는 유명한 소구역내의 여러가지의 나무들 가운데더서 웬지 소나무만 병들어 누렇게 시들어 가고 있다. 소나무가 자리를 잡아 10년 세월이 거이 가는데 말이다. 병들어 죽어가는 한 그루의 소나무일지라도 그것은 우주의 생명체이기에 극히 소중한 것이다.    움직일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고 생각 할 수 있는 인간은 그 어느 생명체보다 뛰여나게 자연 환경에 적응하는 생존능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물고기는 그래도 자유로운 편이다. 움직일 수 없고 생각을 가질 수 없고 말을 할 수 없는 소나무는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을 따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사철 푸른 소나무의 위상에만 매료 되지 말고 소나무의 기본특성과 옮기고자 하는 자리의 자연 환경을 고려해 주고 생각해 주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세상은 더 아름답지 않을가.    지금 이 시각, 도시의 어디에 선가 소나무는 울고 있다.  
21    수필 - 저 산 너머에 댓글:  조회:313  추천:0  2023-10-30
수필 저 산 너머에   리광학 외손주가 태여 나자 나와 안해는 딸을 도우려고 낯설은 고장 청도에로 오게 되였다. 청도에 온지 잠깐 사이같이 느껴지는데 벌써 두 번째 해가 저물어 간다. 뒤돌아보니 기간 우리는 하루하루 지리지리 한 황혼육아의 고달픈 나날들을 보낸 것 같다. 그러다 지난 10월 하순 외손자가 두돐이 지나 유치원에 입학하게 되자 우리 량주는 조금이나마 숨통이 틔우게 되였다. 오전 8시30분 좌우에 애의 손목을 잡고 5분 거리를 걸어 유치원에 맡겼다가 오후 4시30분 좌우에 다시 애를 유치원으로 부터 집으로 데려오면 그만이였다. 외손주가 없는 사이 오전과 오후의 황금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집안의 잡다한 자질구례한 일들을 하고도 여유가 생겼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책을 보고 컴퓨터에 마주앉아 글을 긁적거리며 자유의 시간을 만끽했다. 손주놈에게 감겨 꽁꽁 묶이운 몸이 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잠시 나마 거기에서 벗어나고 보니 생활은 너무 편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매일 똑같은 여유로운 일상이 반복되다 시간은 바람같이 쉭이익하고 지나 어느 덧 11월 중순이 되였다. 이런 같은 내용의 시간이 길어지자 나는 저도 모르게 생활이 너무 단조롭고 지루한 느낌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맨날 안해가 곁에 있어 말동무가 되긴했지만 그게 아니였다. 이럴 때 연길에 있으면 친구들을 불러 술 한 잔하며 시원히 덕담이라도 나누며 즐겼을 텐데 이곳은 타지이다 보니 낯익은 사람도 없다. 좀 시간이 더 지나자 스멀스멀 외로움과 고독감이 밀려 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차 어느 날인가 딸의 권고에 의해 청도조선족 작가 협회에서 조직한 독서모임에 참가하게 되였다. 우연이라고 해야 할가 아니면 그대로 연분이라고 해야 할가 모임에서 길림시서란중학교에서 교직에 몸을 잡다 퇴직하고 청도에 와 만년을 보내고 있는 김성기선생님을 알게 되였다. 그리고 모임에서 선생님의 소개로 ‘청도시 조선족교사 친목회’의 정황을 알게 되였고 또 선생님의 살뜰한 관심과 간절한 요청에 의해 결국 ‘포로’가 되여 교사친목회에 가입하기로 약속하고 예정된 금요일에 활동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내가 김성기선생님과의 약속에 의해 교사친목회와 ‘맞선’을 보기로 한날 청도의 날씨는 11월의 끝자락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봄날처럼 따스하였다. 교사친목회의 활동장소는 청도시성양구의 외각 자그마한 진에 자리 잡은 조선족이 경영하는 ‘전주식당’ 2층이였다. 차에서 내려 2층으로 향하며 웬지 설레이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도그럴것이 이제 곧 청도라는 낯 설은 고장에서 생면부지의 얼굴들을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이날 나외 또 한명의 선생님이 ‘맞선’을 보기로 했는데 그가 바로 내몽고 치치할시에서 온 엄선생님이였다. 우리가 2층 입구를 지나 곧 바로 활동실에 들어서자 이미 활동실에 오신 선생님들이 약속이나 한듯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높이 환성을 지르고 박수를 쳐대며 반기였다. 이런 일은 처음 대하는지라 어정쩡한 김에 어쩔바를 모르다 겨우 안정을 취하고 자리에 앉아 주위를 휘둘러보니 환성을 지르며 박수를 쳐대던 선생님들이 말짱 녀선생님들일줄이야! 허, 이러고 보니 우리가 운좋게 꽃밭을 찾아 온 셈이였다. 조금지나 회장 김성기선생님의 소개에 의해 안 일이지만 이 협회에는 30여명의 회원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3분의 2이상이 녀선생님들이란다. 오늘 엄선생님과 내가 새 회원으로 참가 하게 되면 남성이 9명으로 되여 오랜만에 남성이 3분의1의 비중을 채울 수 있단다. 기간 협회에서는 남성회원들을 모집 하려고 여러모로 애쓰다 요행 오늘 두 선생님들을 맞이하여 녀성회원들이 더 들끓고 기뻐하고 있단다. 오, 그랬었구나! 순간, 마음이 붕 뜨며 어깨가 으쓱해지는 건 웬 일일가. 그러고 보니 내가 살고 있는 작은 도시의 연길로인무도장에서 남성들이 들어서면 녀성들이 앞다투어 커피나 음료를 사들고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이 뜬소문만이 아닌 것 같았다. 청도시 조선족교사친목회총회에는 총회회장단을 주축으로 산하에 시구지회, 성양구지회, 이창지구지회 등 조직들로 구성되였단다. 거이 100여명에 가까운 협회회원들이 모였는데 다수가 동북3성에서 퇴직한 로교사들과 약간명의 기관, 사업단위에서 퇴직한 간부들이란다. 듣고 보니 이곳은 알쭌하게 지식인들만 모인 장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협회는 협회의 장정에 근거해 총회회장단과 각 지회회장단의 임기를 2년으로 정하고 회원 모두가 참여한 민주적선거의 방법으로 총회회장단성원과 각 지회회장단 성원들이 선출된다고 한다. 시구지회는 모두 3개조로 구성되였는데 엄선생은 1조에 편입되고 나는 연길에서 왔다는 명분하에 연변에서 온 선생님들 이 가장 많은 3조에 편입되였다. 이제부터 신입생의 생활이 여기에서 시작된 셈이다. 내가3조에 자리를 옮기자 조장의 사회하에 회원들마다 자아 소개를 진행하게 되였다. 선생님들 모두가 한뉘 교사직에 종사했던 분들이라 정색해서 또박또박 자아 소개를 하였다. 그런데 열심히 듣고 있을수록 어쩐지 옛날 내가 교직에 몸 담갔던 학교시절로 돌아 간듯한 느낌으로 젖어만 갔다. 흑룡강 에서 오신 선생님이 자기는 ‘밀조중’이라고 한다. 조금있다 또 한 선생님이 자기는 ‘계조중’이라고 한다. 궁굼한걸 참지 못하는 내가 ‘밀조중’이 뭐고 ‘계조중’이란 뭔가를 묻자 두 분은 웃으며 줄임말이라고 하였다. 그제사 나는 그들이 말하는 원뜻을 알 수 있었다. 한국과 수교후 우리는 서로간의 문화교류와 더불어 그들이 일상에서 영어발음 그대로 사용하는 말들과 줄임 우리 말을 많이 사용하여 말하는 본인은 진작 알고 있지만 듣는 사람의 위치에서는 무슨 뜻인지 묘연하여 어정쩡할 때가 많다. 어느 술 좌석이였던지 누군가 술잔을 높이 들고 ‘진달래’ 하며 소리를 먹이자 좌석에 앉은 모두가 일제히 일어나며 ‘위하여’ 하고 받아 넘기며 잔을 굽을 냈다. 나는 ‘진달래’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말인 줄로 생각하고 덩달아 기분 좋게 잔을 굽냈다. 그런데 좌석에서 말하는 ‘진달래’란 그런 뜻이 아니였다. 이 말도 우리 말 줄임 말로서 ‘진지하고 달콤한 래일을 위하여’란 희망과 행복을 바라는 뜻일 줄이야! 흐르는 시간은 빠르기도해 이런저런 행사가 마무리되고 드디여 점심식사 시간이 되였다. 분조별로 안배된 좌석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라 회원들마다 얼굴에 웃음꽃이 력력히 어려 있어 무척 행복해 보였다. 기분 좋은 점심식사가 끝나자 조장이 일어서며 오늘 점심식사 총비용에 대하여 설명하고 개개인이 부담해야 할 부분을 납부하란다. ( 이건 또 뭐야, 회비는 이미 납부하지 않았는가? ) 내가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을 짓자 옆에 앉은 선생님이 재빠르게 눈치 채고 점심식사 비용은 회원개개인이 부담한다고 알려주는 것 이였다. 그리고 회원 회비는 협회의 큰 행사 때마다 사용하는데 이를테면 교사절이 라든가 년말 총결과 같은 행사가 포함된다고 한다. 듣고 보니 리해가 갔다. ( 아, 이것이 소위 외국에서 류행되는 “A,A제”란 결산 방법이구나! ) . 청도시에는 지금 많은 조선족협회들이 조직되여 활발히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며 우리 민족공동체의 단결과 발전에 한몫을 하고 있다. 또 이를 통해 인구가 천만을 넘도는 해변 도시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협회들은 20여전부터 협회활동식사 비용을 “A,A제”결산 방법으로 치르고 있다. 처음에는 회원들마다 좀 너무 야박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습관이 되여 잘 받아들이고 있다. “A,A제”는 비교적 공정하고 투명하며 부담스럽지 않는 통쾌한 결산 방법이다. 또 “A,A제”는 협회를 위해 긴 시간을 지탱 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뒤받침해 줄 수 있는 좋은 계책이다. 과거 우리는 오랜 세월 무엇이나 ‘우리’라는 큰 틀 속에서 생활하며 문제를 고려하고 처리하여 왔다. 그리하여 웬간한 일들은 그 어떤 조직이나 군체에 의례하는 경우가 많았고 한상 차리고 기분 좋게 먹고난 후이면 트림을 하고 기지개를 켜야 함이 지당하겠건만 식당문을 벗어나기 바쁘게 움추리며 이빨 쑤시듯 의문덩이를 쑤셔대는 일들이 비일비재였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했다. 우리는 개혁개방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과감히 옛날 틀을 깨고 “A,A제”와 같은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회식자리분담 방법들은 받아들이고 따라가야 발 빠른 사회변화에 적응 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사협회는 매주 금요일이면 활동장소에 모여 활동을 진행 하였다. 비록 이미 퇴직한 교사들이 모여 활동을 진행하건만 조직규률성 만은 재직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특히 동북3성과 기타 지방에서 한곳에 모인 분들이고 소학교 교사로부터 대학교 교수들, 그리고 정부기관, 사업단위에서 온 분들이 한자리에 모인 장소라 시비곡절이 많게 됨은 인지상정이다. 모든 걸 자각에 맡기는 건 무리이다. 사람들이 모인 단체라면 거기에 걸 맞는 시스탬이 갖추어 져야 하고 건전한 취미와 오락성이 결합된 활동들을 많이 조직하고 발전시켜야 그 단체가 ‘장수’ 할 수 있다. 금요일 오전 9시30분, 협회회장이 활동 시작을 선포고 이어 각 조별로 인원 점검에 들어간다. 거기에 기초하여 출석부에 실제 참가한 분들과 사유로 청가를 맡은 분들을 출석부에 기입한다. 또 그것을 근거로 년말 총화에 개근생을 뽑는다. 출석점검이 끝나면 다음은 전체 회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체육부장이 인솔하에 록음기에 맞추어 방송체조를 한다. 세월이 흘러 40여년이 훨씬 넘었지만 선생님들은 학교시절 방송체조의 매 동작들을 한점 틀리지 않고 재현한다. 참으로 탄복이 절로 나오는 걸 금할 수 없는 장면이였다. 방송체조 절목이 끝나자 이번에는 문예부부장이 인솔하에 광장무를 추었다. 이미 평시에 갈고 닦은 무용동작들이라 전혀 어색함이란 없고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우아한 나머지 황홀하게만 느껴졌다. 누가 이들을 늙었다고만 하랴 그들에게는 아직도 꿈이 있고 희망이 있고 가슴 벅찬 랑만의 세계가 있다. 방송체조와 광장무 절목들이 끝나면 잠간 휴식을 취하고 다음은 회원들의 집체 학습시간이 계속 된다. 회장단에서는 선생님들의 실제 정황에 근거하여 개성 있고 특장이 겸비한 교사들을 골라 강의 내용들을 미리 준하게 하고 30분좌우의 시간을 할애하여 강의를 진행하게 하였다. 강의 내용들을 보면 정치, 시사, 자연지식, 유머이야기, 스마트폰사용법, 건강과 생활상식 등 다종다양한 분야였다. 선생님들이 학습시간이 끝나면 다음은 로인들에게 알맞는 여러 가지 유희활동을 진행 하는데 이때면 선생님들 저마다 승부욕이 되살아나며 동심의 세계로 푹 빠져 들어 10년은 더 젊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교사협회에서는 또 선생님들의 년령과 건강을 념려하여 재직 시절때와 같은 시기에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안배하여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를 마련하여 주었다. 매년 총화모임은 12월에 안배하는데 교사총회의 통일요구에 의해 각 지회에 개인 선진 명액을 정해주고 각 지회에서는 지회 개인선진명액을 정한다. 여기서 재미있는건 선진개인을 선출함에 있어서 모두가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며 열정적으로 토론을 전개하는데 재직시절의 교사토론회와 별다른 점이 없다. 청도시조선족교사친목회의 매년 총화모임에는 청도시에 있는 여러 사회단체의 대표들과 주청도한국영사관대표들이 한자리에 앉아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청도에서 근3년 간 황혼육아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시기 조선족교사친목회라는 좋은 단체를 만나 외로움과 울적한 심경 속에서 인차 벗어 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의 마음과 정은 여럿이 함께 어울리며 키워가는 것 같다. 교사협회에 참가 하고부터 이상하게도 은근히 기다려지고 자연히 눈길이 가 닿게 되는 곳이 일력장이였고 한번한번 지나가는 금요일은 기간 정을 붙힌 선생님들의 하나하나의 익숙한 얼굴이 아니였나 싶다. 여러 지방의 퇴직교사들로 무어진 낯설은 얼굴들이 모여 무엇 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일을 벌려 좋은 결과를 얻어내기 보다는 힘을 합쳐 노력하며 황혼의 여유를 즐기는 그 과정이 더 재미있고 더 뜻 깊고 아름다웠던 것 같다. 교사협회에 참가한 덕분에 생애 처음으로 합창단의 일원으로 되여 무대에서서 마음껏 노래를 부르게 되였고 생애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 무용이랍시고 팔다리를 놀려 보았다. 그리고 협회의 요청에 의해 몇 번인가 강의 내용들을 준비해 가지고 선생님들 앞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을 가지게 되였다. 특히 세개 지구 협회회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20차당대회의 정신을 주제로 한 강의를 진행하여 선생님들에 의해 긍정과 찬사를 받게 되었다. 이는 내 생애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가슴뜨거운 추억으로 남을 것 이다. 바다 물결이 출렁이는 아름다운 해변의 도시 청도는 3월의 봄을 맞아 어디라 없이 따스한 기운이 넘쳐나고 거리마다 나무들에 각양각색의 꽃이 피여 봄을 장식 하고 있다. 그 속에 기회의 땅을 찾아 뿌리를 내린 연분홍 진달래도 뒤질세라 봄을 만끽하고 있다. 여기까지 컴퓨터의 키보드를 누르며 글을 갈무리 하다 불현듯 우리 나라 송조시기 시인 륙유 (陆游)가 ‘산서촌을 거닐며’남긴 시, 몇구절이 떠올라 그대로 적어본다. ‘ 산 첩첩 물 겹겹 길이 없는가 하였더니 버들숲속 꽃핀 곳에 또 한 마을이 있네 ’.     2023년3월6일    
20    단풍잎 하나 댓글:  조회:310  추천:0  2023-10-23
수필 단풍잎 하나   리광학   연변단풍수필회창립25주년을 맞아 이미 고인이 된 전임 비서장 최균선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을 담아 이 글을 쓴다. 내가 최균선선생님을 알게 된 계기는 아마도 2011년 수필대가 오태호선생수필문학연구토론회의 그때인 것 같다. 전에는 그저 신문이나 잡지에서 선생님의 문학작품을 통하여 접했을 뿐이다. 실제로 본 선생님은 후리후리한 키에 고수 머리에다 검은테 안경을 쓴 비교적 잘 생긴 미남형의 남자였다.  그 후 2013년 10월, 나는 단풍수필회창립15주년기념 활동에 초대되여 다시 한 번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그 번 행사에도 선생님은 수필회 비서장의 신분으로 기념행사의 사회를 맡으셨다. 선생님은 비교적 밝은 표정으로 회의를 사회하였다. 긴장된 정서나 따분한 분위기와는 달리 타이밍에 맞추어 유머를 슬슬 던지는데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단풍수필회와의 잦은 인연으로 하여 나는 2016년에 단풍수필회 회원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 하여 매월 한차례 조직하는 단풍수필회 활동에 참가 할 수 있었고 그 과정을 통해 진일보로 선생님에 대하여 깊은 료해와 인식을 가지게 되였다. 뒤늦게야 알게 된 일이지만 선생님의 단풍수필회의 비서장직은 이순이라 불리우는 60대의 나이에 처음으로 가져보는 ‘장’자 벼슬이였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보아 알 수 있듯이 어릴 적 학교생활로부터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사람이면 몇 번씩은 ‘장’자 벼슬을 가져본 경험이 있을 수 있다. 헌데 선생님의 경우는 달랐다. 살던 고향 마을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남의 얼굴을 보고도 웬만한 속내를 다 읽을 수 있는 수준이였건만 현실은 그냥 그걸 인정해 주지 않고 무시하며 마땅한 설자리마저 있을 수 없게 몰아갔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원인과 그에 상응한 결과가 따로 있는 법이다. 내가 단풍수필회 회원가입을 하고 몇 차례를 걸쳐 선생님과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선생님의 억울하고 서럽고 가슴쓰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해방을 맞기 두 해 전 유서 깊은 일송정 아래 룡강촌의 최씨가문의 막내로 태여났다. 네살 때 토지개혁이 실시 되여 몰락세가의 천덕구러기로 동년, 소년시절을 흘러 보내며 잔뼈를 굳혔다. 그 후 사회라는 큰 마당으로 밀려왔었는데 가정출신이 남달랐던 원인으로 그 딱지가 어디를 가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혔다. 선생님의 말을 빈다면 출생의 불운으로 하여 ‘바람이 불면 바람부는 대로 불려가고 비가 오면 비에 젖어가며 누가 뭐라든 무조건 허리를 굽히고 세상이 하라는 대로 죽어 지냈다’ 그랬다. 출생의 불운으로 첫사랑을 잃고 뒤늦게 겨우 대상자를 만나 결혼식을 치르던 날, 달콤한 동방화촉의 신혼의 밤을 행복의 도가니에 빠져도 모자랄 판에 조리돌립을 당하며 비판대에 올랐다.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하고 서러운 일인가? 어찌 그 뿐이랴! 사랑하는 첫 아들이 태여나 생의 축복이였으나 그들에게는 아니였다. 대에 대를 이은 출생의 불운은 방금 태여난 피떵이에게도 끈질기게 이어져 병 보일 자격마저 잃어버려 사흘 밤을 못 넘기고 요절의 비운을 면치 못했다. 그 세월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서러움을 당한 사람이 어찌 선생님 한분에 그치랴! 그때 그 서러움이 선생님의 잠재의식에 작용해 슬픔과 서러운 생의 바탕이 되고 민들레의 홀씨같이 떠다니며 지지리 뒤몰리다 ‘쥐구멍에도 볕들날’이 있었던가 선생님은 서른다섯을 다 먹고 행운의 등에 업혀 교단에 서게 되였다. 교단에 서면서부터 선생님은 꽤나 전전하며 꽃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영성촌소학교에서 두만강기슭의 명동촌소학교로 갔고 거기서 다시 도문시교육학원으로, 또 다시 연변사법학원 으로 돌고 돌았다. 어렵게 핀 꽃은 더 귀하고 소중한 법이다. 선생님은 어렵사리 차려진 교육사업이라는 기회를 소중히 여겨 자기의 소명을 다했고 그에 따른 괄목할만한 성과들을 이루었다. 다망한 일상 사업과 복잡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 본과 과정을 전부 마쳤고 지상에 400여편의 문학작품과 교육론문을 발표했으며 수준 높은 3권의 문학저서도 펴냈다. 지금에 와 다시 선생님의 문학작품들을 읽어보면 작품마다 인간의 생의 본능과 철리가 다분하고 작품마다 지식인의 냄새가 찐하게 느껴온다. 또 작품마다 평시에 많은 책을 읽고 갈고 닦은 흔적들이 력력히 보여진다. 진정 자신의 피타는 노력과 끈질긴 의지력으로 지식의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선생님은 단풍수필회의 비서장직을 맡고도 각별히 본직을 아끼고 사랑을 몰부었다. 매번 협회활동을 진행하기 전에 꼭 메모지에 활동사항들을 하나하나 적어두어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1년에 한 번씩 연변인민출판사의 출간으로 된 ‘단풍수필회 회원작품집’의 원고들은 우선 협회가 지정한 편집원의 손을 거쳐 원고가 모집되고 편집된 다음 출판사로 보내지게 된다. 선생님은 몇 년간 작품집의 편집을 맡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원만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일부 회원들이 컴퓨터에 서툴어 볼편으로 쓴 원고들을 보내오면 시끄러움을 마다하고 자신이 직접 타자원이 되여 원고들을 정리하여 회원 개개인에게 만족을 주었다. 편집을 하며 컴퓨터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견주염이 도져 아픔을 덜기 위해 아파트 1층 창고에 철봉대를 설치하고 턱걸이 운동을 해가며 편집일을 견지하였다. 2017년 협회의 회장기바뀜을 거쳐 젊은 홍천룡선생이 회장직을 맡았다. 선생님은 년장자의 립장임에도 언제나 자세를 낮추고 늘 후임 회장을 잘 받들어 협회의 리익과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이를 통해 또 회원들에게 솔직하고 진실한 참다운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해 5월의 어느 활동일이라고 기억된다. 그날 선생님은 몸이 말째여 몹씨 불편해하셨다. 우리는 이젠 선생님이 년세가 지긋하니 어련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별다르게 여기지 않았다. 그 후 선생님이 매년 맡아 하시던 협회의 년검(年检) 엄무를 나에게로 넘기면서 선생님의 불편한 몸의 ‘비밀’을 알게 되였다. 선생님이 넘겨준 수필회년검에 관한 서류들을 받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이것저것 체크하는 과정에 우연하게 가방에서 선생님이 연변병원에서 병을 치료하며 남긴 의료보험 결산서와 병지를 발견하였다. 그제서야 선생님께서 장기간 ‘방광암’이라는 불치의 병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하늘도 야속하지 어쩌다 뒤늦게나마 인생의 귀틀집에 해가 들어 사회의 양지에서 기강을 펼쳐나가며 자신 넘치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펼쳐나가는 판에 이런 날벼락이 떨어지다니! 불치의 병은 수시로 야금야금 선생님의 육체를 괴롭혔다. 하지만 선생님은 전혀 병에 대하여 티를 내지 않고 협회의 모든 활동에 참가하여 자기가 맡은 수필회 비서장의 역활에만 열중했다.  2018년 단풍수필회는 창립 20주년을 맞이하게 되였다. 기념행사를 맞아 협회의 이런저런 준비사업들은 거이다 회장과 비서장을 주축으로 진행되였다. 기념행사를 위한 주제모임도 잦았고 자료수집도 많았으며 여기저기 초청해야 할 곳도 많았다. 하지만 협회 상하 회원들이 똘똘 뭉치니 순리롭게 준비사업들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단풍수필회 창립20주년 기념행사의 그날, 선생님은 정중하게 검은색 의상을 차려입고 자신있게 수필회 기념행사의 사회를 맡아 전반 회의 의제들을 매끄럽게 진행하여 회의 참가자들의 절찬과 긍정을 받았다. 2018년 11월 16일 단풍수필회 회원 최상운선생님의 작품집 출간의식이 또 한성호텔에서 거행되였다. 이번 행사에도 선생님께서는 지난번 행사 때처럼 산뜻한 검은색 의상을 차려입고 출간의식 사회를 맡으셨다. 이날 따라 선생님께서 입으셨던 검은색 의상은 선생님께 너무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았다. 사실 선생님께서는 평시에도 검은색 의상을 즐겨 입으셨다. 늘 머리에는 검은색 중절모에 검은테 안경을 걸고 검은색 의상에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검은색 구두를 신고 다니셨고 뜨거운 삼복철일지라도 환하고 밝은 옷들은 별로 입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왜 검은색을 즐겼을가? 궁금하던차 컴퓨터 검색을 해보고서야 다소 근사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인간은 자신을 지키고 싶을 때 검은색 옷을 입는다고 한다. 검은색이 모든 색을 흡수, 차단하는 강한 색이므로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단다. 거이 반평생을 남의 눈치를 봐가며 기죽은 삶을 살았던 선생님이였으니 그럴만도 하겠구나 하고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최상운선생님의 작품집 출간의식이 끝나고 이듬해 어느 날인가 사모님께서 불시에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서 치료를 거쳐 조금 호전되자 북산가사회구역양로원에 기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수필협회 회장단 성원들이 회원들의 위문금을 모아가지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회장단성원 일행이 양로원 직원의 안내에 따라 양로원에 들어서는 순간 대번에 숨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양로원은 비교적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내외 분들은 침대 하나를 놓은 작은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침대에는 무의식 상태가 다된 사모님이 누워 점적주사를 맞고 있었고 선생님은 방모서리에 달랑 걸상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계셨다. 최상운선생님의 작품출간의식 행사 후 처음으로 선생님을 만났다. 헌데 선생님은 하얀 짧은 머리에 살이 쏙 빠져 원 모습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왜소한 늙은이로 변해있었다. 그 제날 카리스마로 넘쳤던 선생님의 멋찐 모습은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하긴 자신이 불치의 병으로 치료를 받으며 다른 사람의 시중을 들어야 할 처지에 있으니 이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헌데 이번 병문안 길에 또 하나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되여 내내 가슴이 쓰려났다. 병상에 누워계시는 사모님이 여지껏 농촌호구로 되여 있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란다. 맙시사! 우리 사회에 아직도 이런 음지가 있다니,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당당한 대학교 부교수직함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 가족에서 말이다. 참, 이런건 누구의 탓이라고 나무람 해야 옳은가… 단풍수필회 회장단에서 양로원으로 다녀 온지 얼마 안되여 사모님은 저 세상으로 갔다. 또 얼마나 지났을가 선생님도 사모님을 만나러 하늘나라로 총망히 떠나셨다. 운명의 신은 너무 불공평했다. 선생님께서 살아 생전에 억울함과 서러움으로 긴 시간을 고생했다면 후생에는 마음껏 여유로움과 복을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단풍잎 하나가 모진 비바람과 역경을 이겨내며 몸부림을 치다 끝내 나무위에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단풍잎은 무엇이 그리 아쉬운지 한들거리며 겨우 겨우 땅에 가 닿는다. 이제 다시 봄이 오가며 세월이 바뀌면 떨어진 단풍잎은 순수한 밑거름으로 변해 나무의 생장에 한몫을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 생겨난 단풍잎들에서 우리는 그리운 선생님의 얼굴을 찾아 볼 수 있을른지 아리숭한 상념에 잡겨본다.   2023년10월
19    수필- 인도의 나무잎 쓸기 댓글:  조회:692  추천:3  2023-06-14
    인도의 나무잎 쓸기 리광학 오늘도 아파트 소구역의 출입구를 벗어나 손주놈을 데리러 유치원으로 가는 인도에 들어섰다. 조금 쌀쌀한 마가을이 여서일가? 뿌연 하늘 아래 살랑이는 바람결에 오동나무잎들이 쉴새없이 한들한들 춤을 추다 인도에 살며시 내려앉는다. 조금지나 인행도 여기저기에 누런 나무잎들이 지저분하게 널부러져 버린다. 이때 노란 수건을 머리에 꼭 쓰고 마스크를 건 환경 미화원이 긴 비자루를 좌우로 휘드르며 떨어진 나무잎들을 쓸어 모은다. 온 여름 푸르름을 자랑하다 가을을 맞아 누렇게 변하고 오그라지고 가벼워진 나무잎은 아직도 무슨 에너지가 남아 있는지 비자루의 끝에서 요리조리 날리며 장난을 치다 결국 환경미화원의 의지대로 한곳에 모여 진다. 그리곤 환경미화원이 준비한 커다란 비닐주머니에 곱다란이 무더기로 채워진다. 환경미화원은 부지런히 인도의 앞만보고 발볌발볌 나아 가며 나무잎을 쓸어 모은다. 아이로니한 것은 환경미화원이 쓸고 지나 같던 인도의 뒤로는 또 얄미운 나무잎들이 바람에 실려 떨어지며 인도를 어지럽힌다. 하지만 환경미화원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나무 잎들만 쓸고 모으며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 간다. 떨어진 나무잎을 그대로 버려두고 앞으로 만 나아가는 환경미화원의 마음도 홀가분하지 않겠건만 그런 대로 앞으로만 나아 간다. 가령 환경미화원이 뒤를 지나칠 수 없어 등 뒤의 떨어 지는 나무잎을 남김없이 쓸려고 수시로 돌아서기를 한다면 하루의 일과가 끝을 보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다. 수시로 떨어지는 나무잎을 다 쓸고 지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환경미화원은 지나온 곳은 련련하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 간다. 환경미화원의 등 뒤에 서서 나무잎 쓸기를 하는 뒤 모습을 지켜보다 문뜩 요즘 결단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고민거리가 생각났다. 안해와 나는 청도에 살고 있는 딸애의 집에 와 황혼육아로3년세월을 흘러보내고 보내고 있다. 기간 시간이 지나며 우린 심신이 어느 정도 지칠때로 지쳐가고 있었다. 더구나 코로나19로 인한 복잡하고 다사한 일들이 수시로 반복되면서 스트레스를 받으니 삶이 평온 할 수가 없었다. 딸애의 집에 온 후 끼니를 마련하고 집안청소를 하는 것은 우리가 도맡아하다보니 딸과 사위는 맘 놓고 바깥 일을할 수 있었다. 시간이 길어 지니 딸과 사위는 아예 집안 일은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는다.  손주놈은 매일매일 무럭무럭 커갔다. 애가 유치원에 다니며 말귀를 알아 듣고 재잘재잘 말을 하게 되니 의사 소통이 활발하게 진행되였다. 미운 세살이라고 손주놈은 전에 비해 장난기가 많아졌고 혹간 아찔하게 위험한 행동을 반복하며 우리를 힘들게 한다. 애를 보살피고 챙기는 것이 예전 같지 않다. 이제는 매일 커가는 손주놈과 매일 늙어 가는 우리들 사이의 반비례 현상은 날이 갈수록 뚜렸해져만 갔다. 이렇게 기약 없이 황혼육아를 계속  견지해야만 하는가? 헌데 사람이 마음이란 참, 요상스럽다. 힘들고 지칠 때는 당장 일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정작 용단을 내리고 그만 두자니 자꾸만 애들 뒤근심이 앞서고 기간 정이 들대로 든 손주가 눈앞에 얼른거리며 여린 마음을 파고 들어 굳혀진 마음을 바꾸게 된다. 그렇게 반복된 고민을 거듭하며 하루하루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 마침 환경미화원의 인도 나무잎 쓸기를 보면서 고민 거리를 어떻게 풀가를 깨달았다. 지금까지 우리 부부는 황경미화원처럼 앞만보고 인도 나무잎 쓸기를 한것이 아니라 이미 쓸고 지난 뒤를 련련하며 마음을 다잡지 못한 것 같다. 이제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마무리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러지 않으면 황혼육아가 언제 끝을 볼지 모르겠다. 랭정하게 생각해보니 이젠 손주놈이 유치원으로 다니고 있으니 복잡하고 힘든 고비를 넘긴 것 같다. 이럴때 애들에게 하루빨리 홀로 서기를 시켜 자립하게 하는게 애들에도 도움이 되고 우리도 좋을 것 같다. 오늘 저녁에는 애들을 앉혀 놓고 환경미화원처럼 ‘인도 나무잎 쓸기’를 해야 겠다. 마음을 굳히니 유치원으로 가는 발걸음도 한결 홀가분해 진다.     2023년 청년생활6기          
18    수필 _ 효자손 릴레이 댓글:  조회:427  추천:0  2022-08-02
수필 효자손 릴레이 리광학 별것이 아니였지만 너무나 후회가 되였다. 크게 자리를 차지하지않을 물건임에도 진작 트렁크에 넣었더라면 그대로 올 것을, 다 데면데면한 나의 그 습관이 초래한 것이다. 청도에 있는 딸집에 도착하여 일주일이란 시간을 넘기며 별것이 아니였지만 고것이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요긴하고 필요한 물건임은 절실히 느꼈다. 어제는 낯설은 곳에서 겨우 리발소를 찾아 머리를 손질하고 집에 돌아와 그 참에 시원히 샤워를 하였지만 잔등이 여전히 근질근질해 났다. 아직도 머리오리가 잔등에 붙어 있는 건가, 이럴 때 고것을 가지고 한바탕 긁어대면 시원하려만. 잔등의 피부가 민감해서 일가, 나에게는50대 부터 등 긁개를 사용하는 습관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이젠 그것이 고질적인 습관이 되여 버렸다.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등 긁개로 뒤 잔등을 아래우로 팍팍 긁으면 삽시에 잔등이 얼얼해 나고 이어 시원한 감각이 온 몸에 쫙 퍼지는 느낌이 온다. 그리고 인차 자리에 누으면 편안한 기분 상태로 빠져들어 가게 되며 잇달아 잠도 잘 오는 듯싶다. 그래서 등 긁개는 늘 애물단지처럼 베개머리 가까이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그런 애물단지를 청도에로 오며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이런 불편함을 당하는 건 너무 당연한 것이다. 잔등이 가려울 때마다 딸이 살고 있는 집이라지만 필경은 내 집이 아닌지라 시도 때도 없이 곁 사람들의 손을 빌기에는 너무나 무리였다. 내가 불편을 격는 눈치를 챘는지 딸이 온라인을 통해 등 긁개를 사주겠단다. 온라인으로 등 긁개마저 구입한다고 하니 참, 요즘 사람 사는 세상이 빠르고 편하게 변해 가고 있구나 싶다. 이러다간 멀지않은 장래에 하늘의 별도 온라인으로 예약하면 따올지 모르겠다. 아무튼 딸이 등 긁개를 사준다고 하니 불편한대로 참으며 며칠 기다려 보기로 했다. 전에 직장으로 출근하는 편리를 위해 도시에 집을 마련하고 온 집식구가 이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사를 하던 날 이사짐을 챙겨 차에 다 싣고 살펴보다 옥수수갱이와 싸리나무가지로 만든 등 긁개를 발견하고 새집으로 가는데 너무 지저분한 것 같아 여이치 않고 버려버렸다. 헌데 나의 그 어이없는 단순한 행동으로 새집들이를 하여 편하고 기뻐해야 할 어머니가 한동안 불편을 격게 될 줄이야! 곁에 자식들과 손주들이 있었건만 어머니의 불편함을 제때에 덜어 드릴 수 없었다. 며칠 후 내가 짬을 타 철길 옆에 있는 싸리나무가지들 중에서 매칠하고 곧은 가지를 골라 베여 오고 옛 집터를 찾아 옥수수갱이를 주어 등 긁개를 새로 만들어 드려서야 어머니의 고충을 덜어 드릴 수 있었다. 그 후 80년대 말 심양으로 가는 출장길에 해성서류시장에 들려 대나무로 만들어진 등 긁개를 사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그 당시는 대나무로 만든 등 긁개가 비교적 고급스러웠다. 어머니는 대나무 등 긁개를 만지고 또 만지면서 얼마나 기뻐하셨던지 지금도 그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내가 지금 등 긁개가 필요한 어머니의 나이가 되고 보니 그때 어머니의 그 심정을 혜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살아온 지난날을 뒤돌아보니 자식이 되여 부모의 등을 시원히 긁어드린 기억이 별로 없다. 어릴 때는 어려서 커서는 자기의 일에 쫒기운다는 핑계로 부모님들한테 너무 등한시한 것 같다. 더구나 한지붕을 이고 함께 살았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보잘것없는 옥수수갱이 등 긁개라도 있어 엄마의 불편함을 덜어드렸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였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살다보면 꼭 필요 할 때는 자식보다 머리가에 있는 등 긁개가 났다는 말이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일가, 언젠가부터 초라한 것 같은 등 긁개가 우리 말로 효자손이라고 좋은 호칭으로 상대접을 받게 되였다. 그런데 이쯤하면 등 긁개에 대해 너무 과분한 호칭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건만 사람들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우리 부모의 세대들은 이미 저세상의 부름을 받고 떠나가고 우리가 그 인생의 계주봉을 이어 받아 부모가 되였다. 전에 비해 지금의 삶의 조건과 환경 그리고 삶의 수준과 질이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등이 가려우면 긁으며 살아야 하는게 현실생활이다. 그렇다고 하여 애들에게 무작정 등을 들이 밀거나 효성을 바라서는 안되는 게 요즘 세상이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우리 세대가 부모한테 별로 효성한 게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손아래 자식들에게 이런저런 일에 너무 바라거나 기대서야 되겠는가, 살아 보면 효도란 별거 아니다. 부모의 각도에서 보면 자식들이 사회의 본분을 잘 지키고 큰 다툼이 없이 가정을 잘 지키며 부모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드려 가슴을 아프게 하지 않아도 이미 효도가 된 것이다. 가슴이 아픈데는 아무리 좋은 효자손이 있더라도 쓸모없다. 등이 가려우면 효자손이 옆에 있으면 된다. 등이 근질근질 가려울 때면 남의 눈치 볼게 없이 자기의 소원대로 잔등의 이곳저곳을 팍팍 긁어대면 된다. 살다보면 효자손을 가지고 내 절로 내 등을 팍팍 긁어댈 때가 인생에서 가장 마음 편하고 행복 할 때일 수도 있다. 간혹 살다가 병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몸이 돼 버리면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못해 효자손이 옆에 있어도 안타깝게 무용지물이 돼 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는가. 그래서 전인들은 행복이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작은 곳에서 찾아야 하고 래일보다 살고 있는 오늘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을가. 딸애가 온라인으로 주문한 효자손이 하루반만에 반갑게 내 손에 쥐여 졌다. 이젠 시름 놓고 등이 가려울 때면 팍팍 뒤 잔등을 긁을 수 있게 되였다. 비록 작은 물건임에도 나에게는 꼭 요긴하고 필요한 물건이기에 항상 딸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써야 겠다. 인생의 로정에서 이제 효자손을 가지고 내 절로 내 등을 어느 때까지 팍팍 긁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생의 계주봉은 나의 부모에서 나에게로 또 내 자식들에게로 이어 질것이다. 그 과정에 효자손의 릴레이도 계속해 이어지지 않을가. 2022년 에 발표
17    산문 - 만과도화원의 아침 댓글:  조회:397  추천:0  2022-05-11
산문 만과도화원의 아침 리광학 새벽4시가 되면 어김없이 고요한 새벽의 적막을 깨뜨리며 쟁그랑, 쟁하고 쇠붙이가 뒹구는 소리가 뒤창문을 두드린다. 아파트 동북쪽 모퉁이의 대형마트를 건설하고 있는 공사장에서 농민공들이 새날을 잡아 아침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아침 5섯시가 되면 만과도화원(万科桃花源)의 아침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된다. 따라서 내 하루의 삶의 려행도 시작 된다.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차려 입고 엘리벨트를 타고 아래층으로 행했다. 엘리벨트가 1층에 뭠춰 서자 문이 좌우로 활짝 열리며 한걸음 현관에 나서는데 안경을 건 청소공아줌마가 먼저 반기며 알은체를 한다. 그러자 나도 머리를 끄덕이며 ‘쎄이쎄이, 싱쿠라’(谢谢,辛苦了!)하고 맞인사를 건넸다. 청소공아줌마와 그저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 받았음에도 웬지 아침기분이 좋고 마음이 즐거워지는 걸 금할 수 없다.    청도에 와서 엘리벨트나 복도에서 입주민들이 서로 만나면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꼭 인사를 주고 받으며 지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아 왔다. 처음은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 그렇게 주고 받는 인사가 좀 부담스럽기까지 느껴지다가 시간이 지나가며 점차 버릇처럼 습관이 되여 갔다. 몇일전의 일이다. 누군가 아파트의 출입문을 똑똑똑 노크하기에 열어주었더니 2층집 주인이 자기집의 하수도배관이 고장이생겨 수리해야기에 웃집들에서 한시간만 물사용을 금지해 달란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가? 또 누군가 출입문을 똑똑똑하고 노크를 했다. 문을 열고 보니 7,8세가 돼보이는 낯모를 어린애가 바구니에서 손바닥크기와 비슷한 땅콩 두 봉지를 내밀며 감사하다고 연신 허리를 굽힌다. 2층집 주인은 하수도관 수리가 끝났으니 그런대로 가만 있어도 무방하 겠지만 애를 시켜 웃층의 집집에 들려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다. 주인은 작은 땅콩 두 봉지로 이웃들간의 상호 리해와 협조 그리고 친분을 키우는데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어찌 그뿐이랴, 땅콩 두봉지로 어린애들 문명교육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를 제시해 주고 있지않는가. 고향 연길에서30년 가깝게 아파트 생활을 해왔지만 땅콩 두 봉지로 마음을 전해가는 이런 경우를 이곳에서 처음 격어 보았다. 작은 일에서부터 문명한 행위를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는 이곳 사람들을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명불허전이라고 공자의 례의 고장이 다르긴 다르구나 하고 가슴으로부터 찐한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다. 아파트 1층 현관을 지나 출입문을 열고 밖에 나오니 9월의 시원한 아침공기와 더불어 어제낮 벌초를 마친 잔디밭의 싱그러운 풀냄새를 더해 류별라게 코를 자극하며 기분이 한결 상쾌해진다. 아파트내 다양한 나무들은 아직도 진록색을 잃지 않고 있다. 복숭아나무와 귤나무의 열매들은 이제사 희미한 누런색으로 변해 가고 있다. 거기에 이름모를 나무 몇그루는 때 아니게 가을 꽃을 피우며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우리 고장 연길에서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는 보았지만 주책없이 백로가 지난9월에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거이 보지 못했다. 일년 사계절 겨울 한철을 제외한 계절에 내내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이곳 아파트구역을 거기에 걸맞게 도화원이라고 이름 지은게 아닌가 싶다. 아파트단지의 아스팔트길에 나서면 제일 눈에 확 띄우게 보이는 것은 자가용차들이다. 어제 낮동안 띠염띠염 차가 보이던 주차장은 밤을 자고 나니 빈자리가 없이 꽉 차있다. 아파트단지의 가로세로 뻗은 아스팔트길옆 주차장의 마지막 번호 645호에 지하 주차장의 차들을 더하면 아파트단지의 자가용은 천여대가 훨씬 넘을 것 같다. 아마 입주민들 가가호호에서 한두대의 자가용차를 갖추고 사는것 같다. 개혁개방을 맞아 시민들의 자가용시대가 활짝 열렸다는 것을 이곳에서 다시 한번 눈으로 실감 할 수 있다. 자가용차 시대가 열려 시민들의 생활수준이 전례없이 제고 된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려되는 점도 있는 건 사실이다. 차가 많으면 에너지 공급이 뒤따라야 할 것이고 거기에 또 배기가스로 인한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 문제가 뒤따르지 않는가, 그러지 않아도 아침이 다 되였는데 늦게 귀가한 주차장의 적지 않은 차들에서 남아있는 열기가 계속 뿜어 나오고 있다. 아침이면 자가용차들 다음으로 맞띠우게 되는게 생활 쓰레기통이다. 아파트단지의 물업관리부분에서는 단원마다 출입문어구에 큰 플라스틱쓰레기통을 놓아 입주민들에게 생활 쓰레기 버리는 편리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입주민들이 하루에 버리는 생활쓰레기가 어찌나 많은지 밤을 자고나면 큰 플라스틱쓰레기통 마다 차고 넘친다. 버려지는 쓰레기들 가운데 크고 작은 종이박스가 류별라게 많은걸 보면 젊은 층들이 온라인으로 여러가지 물건을 직접구입하는것과 련관이 있는 것 같다. 매일 아침 5시반이 되면 환경미화원들이 어김없이 쓰레기수거차로 쓰레기를 실어 지정된 곳에 가져다 처리한다. 헌데 항상 이들보다 한발 먼저 플라스틱쓰레기통을 뒤지며 넝마주의를 하는 입주민 몇분이있다. 그들은 생활 쓰레기통에 버린 페트병이나 종이박스, 그리고 기타 팔아 돈이 될만한 물건들은 죄다 찾아 낸다. 날씨가 찬 아침이면 괜찮지만 무더운 여름날에는 쓰레기통에서 더러운 악취가 풍겨나와 숨막힐텐데 그들은 노다지를 캐느라 여념이 없다. 어느 날 아침 쓰레기를 버리려고 아래층 문어귀에 내려갔다 마침 넝마주이를 하고 있는 안로인 한분과 마주쳤다. 나는 쥐고 있던 종이박스를 로인에게 건네주며 이런걸 팔면 한달에 얼마나 벌 수 있는가고 물었다. 로인은 쑥스러워 하며 한달에 3,4백원씩 은 쉽게 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말 뒤끝에 묻지도 않는 말로 자식들은 줏지 말라고 말리지만 심심풀이로 하고 있는데 이래 보여도 이돈이면 아파트의 전기와 물세 그리고 가스비가 넉넉하단다. 참말로, 이런 분들이야 말로 돌무지에 올려 놓아도 살아 남을 사람들이다. 옛날부터 아끼고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산동인들이 아닌가. 안로인은 앞의 쓰레기통을 뒤지고는 또 서쪽 쓰레기통을 향해 급히 발걸음을 옮긴다. 멀어져가는 안로인의 뒤모습을 바라보며 허구한 날 허파에 바람찬것처럼 큰것만 바라고 웬간한 것은 거들떠 보지않는 우리 “량반”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걸 어쩔 수 없다. 우리들은 쓸데없는 자존심들을 쓰레기통에 과감히 버리고 겸허하게 이분들을 따라 배워야 할 것 같다.    나는 걸음을 빨리하며 도화원 아파트단지의 아스팔트길을 지나 외각 인행도에 들어 섰다. 내가 아침 걷기운동을 하며 도화원아파트단지 외각 인행도를 선택한 것은 인행도 량옆에 여러가지 푸른 가로수들이 있어 기분이 상쾌한 데다 걸으면서 거리의 이런저런 풍경과 길옆 상가들의 아침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행도를 한바퀴 에돌면 30분 정도 소요되여 아침운동에 알맞춤하기 때문이다.    인행도에는 벌써 많은 주민들이 아침운동을 즐기고 있었다. 나의 앞 멀지않은 거리를 사이두고 한로인이 반려견을 앞세우고 걷고 있었다. 한참을 가다 불시에 반려견이 걷지를 않고 주저 앉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얼굴이 굵은 주름투성이고 잔등이 빨래판처럼 넓은데다 꼬리가 뭉텅 잘리운 것처럼 몽통한 녀석이 헉헉 거리며 걷지 않고 떼를 부리고 있다. 사람으로 치면 꽤나 나이든 로인이 틀림없었다. 주인이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 꺼내여 생떼를 부리는 반려견의 입가에 가져다 대자 녀석은 텁텁하고 요란스레 먹어댄다. 그리고는 언제 그랜냐 싶을 정도로 자리를 차고 다시 일어나 비뚱거리며 걷기를 시작한다. 참, 요상한 놈이다. 이런걸 두고 개팔자가 상팔자가 아닌가 싶다.      아침 나절 인행도를 걷다보면 반려견을 앞세우고 걷기 운동을 하거나 산책하는 주민들과 많이 맞띠운다. 반려견 관리규제에 따라 하나같이 반려견의 목줄은 잡고 있지만 문제는 반려견의 배설물은 관계치 않고 그대로 버려 인행도를 더럽히는 것이다. 좋은 아침에 좋은 인행도를 좋은 기분으로 걷다 반려견의 배설물을 피해 에돌아 걷노라면 기분이 잡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래서 항간에서는 반려견을 기르려면 우선 사람이 공중도덕 수양을 갗추고 기르라는 말이나온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나 개인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사는 세상이 아닌가.    인행도를 따라 10여분거리를 걸어 동남쪽 모퉁이에 이르면 천여평방메터 실히 되는 공간에 놀이터가 있다. 바닥에 대리석 바닥재를 깔아 놓아 주민들이 아침 운동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놀이터 복판에는 아름드리의 뽕나무 한그루가 서있고 그 옆에는 돌로 쌓은 대형기린 모형이 보기좋게 우뚝 솟아 있다. 아침이면 세부류의 로인들이 이곳을 찾아 둔각삼각형을 이루고 아침 운동을 즐긴다. 둔각삼각형 북쪽 교차점에는 60대 로인이 좌우와 머리우로 죽절편 (竹节鞭)을 휘두르며 무예를 련마하고 있다. 죽절편을 휘두를 때마다 제법 쉭쉭하는 거칠은 소리가 난다. 휘두르고 있는 죽절편 맨끝머리에 달아맨 예리한 철붙이가 나무잎사귀에 닿는 순간 나무잎사귀가 여지없이 쪼개 지며 한들한들 땅바닥에 떨어진다. 사람이 맞으면 당금 머리통이 터져 묵사발이 될 것만 같다. 둔각삼각형 남쪽 교차점에는 70대후반 로인이 양걸춤의 전승인이라고 자처하며 자리를 잡고 있다. 로인은 맨날 록음기를 틀어 놓고 여러가지 색갈의 부채와 열십자로 만들어진 채색나무 막대기 그리고 긴 천오리로 만들어진 소도구를 빙빙 돌리며 멜로디에 맞추어 리듬을 타며 같은 동작으로 춤을 춘다. 양걸춤을 잘 모르는 나지만 웬지 보기에 너무 어설푸게만 보인다. 둔각삼각형 서쪽 교차점에는 다섯 로인들이 록음기의 멜로디에 맞추어 열심히 태극권을 수련한다. 로인들이 어찌나 가볍고 민첩하게 밀고 당기고 돌리는 동작을 거듭하며 수련에 열중하는지 지나가던 길손들의 발목을 그대로 잡고 있다. 하얀 운동화를 신은 두발은 땅이 꺼질세라 살며시 땅에 대이고는 살짝 들어 올린다. 그 동작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우아한지 70대초반의 로인들이라 믿기질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세부류의 로인들이 누가 먼저 발기했는지 뽕나무가지에 빨간 리봉을 매여 놓고 높이차기 경기을 벌리였다. 그러지 않아도 로인들에게 궁굼한것이 많던차라 이김에 잘 됐다 싶어 걷던 걸음을 뭠추고 구경하기로 했다. 내 눈짐작으로는 뽕나무에 달아맨 빨간 리봉의 높이는 1.70메터가량은 실이 되는상 싶었다. 먼저 죽절편을 휘두르던 60대의 로인이 두다리를 걷어 올리고 자신있게 빨간 리봉을 겨냥하고 오른 발길질로 걷어 찼다. 그런데 웬걸 쉽게 발끝이 빨간리봉에 터치 못했다. 너무 쉽게 생각했던지 60대 로인은 몇번 같은 동작을 거듭하다 아쉬운 대로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이번에는 태극권을 돋보이며 가벼운 움직임으로 내 부러움을 자아내던70대초반의 로인들이 하나둘 나섰다. 내 짐작으로는 이분들은 쉽게 성공할 것 같았다. 평시 로인들이 두다리를 곧게 편 상태에서 허리를 굽히고 손바닥을 지면에 쉽게 대이는 동작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헌데 내 예상은 빗나갔다. 로인 한분도 발끝이 빨간 리봉에 터치 못하고 너무 싱겁게 물러났다. 기대가 컷었는데 이럴수가? 아, 이래서 나이란 속일 수 없다는 전인들이 말이 실감이 났다. 마지막으로 맨날 아침이면 멜로디에 맞추어 양걸춤을 추던 로인이 슬슬 몸을 움직이며 앞에 나섰다. 나는 로인에게 별기대를 걸지 않았다. 태극권을 수련하던 로인들이 안되는데 양걸춤을 추는 로인이 되겠는가? 헌데 내 예상은 또 빗 나갔다.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양걸춤을 추던 로인이 단발차기로 빨간 리봉을 차는데야, 그리고는 두 다리를 한일자로 벌리고 보기좋게 다리찢기를 한다. 맙시사, 고수가 따로 있었구나! 기간 로인을 너무 우습게 보아 왔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두손을 마주치고 로인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보냈다. 구경하던 모든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한편 눈에 보이는것 만으로 쉽게 판단한 나의 결과가 너무 초라하고 무색한 지라 나는 인차 그 자리를 떠났다. 아파트단지의 동쪽과 서쪽에 입주민과 차량들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가 있다. 아파트단지 물업관리에서는 보안인원들을 배치하여 24시간 구역내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동쪽출입구와 잇달아 있는 북쪽건물1층에 40대자매가 어느때부터인가 아침 편의음식가게를 경영했다. 아침운동을 즐기는 분들이나 기타 입주민들이 아침을 에때우는 좋은 곳이다. 늘 아침때가 되면 사람들이 즐겨 찾는걸 보면 장사도 비교적 온당하게 잘 되는 것 같았다. 그러던 지난3월 입구로 들어오는 남쪽모퉁이에 50대부부가 네바퀴가 달린 이동식편의음식차를 대기하고 아침장사를 벌렸다. 비록 밖이라고는 하지만 차안에서 음식을 만들고 팔고 하는걸 보면 위생적으로도 별문제가 없을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입구건물에서 장사를 벌리던 두자매가 같은 업종의 경쟁자를 만난 것이다. 아무래두 제한된 영업액을 빵으로 비유한다면 빵하나를 두집에서 나누어 먹어야 될 판국이 벌어졌다.      그런대로 시간은 흘러 4월이 되였다. 어느 날 길북쪽 모퉁이에 30대부부가 또 이동식편이차를 대기하고 아침장사를 벌렸다. 인젠 빵하나를 세집에서 나누어 먹게 되였다. 그런데 놀라운것은 30대부부가 돐이지나 갓 걸음마를 타기 시작한 어린애를 동반하고 경쟁에 뛰여든 것이다. 아빠, 엄마가 차안에서 음식을 손님들에게 팔고 있는 와중에 어린애는 땅바닥에 편 담요에서 놀이감을 가지고 제멋대로 놀고 있다. 손님들도 이광경을 보고 측은했던지 발길을 북쪽으로 향한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 젊은이들이 취업난에 모대기며 힘들어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오죽 생계가 힘들었으면 저러기까지하랴 싶으며 마음이 절로 쓰려났다. 그런대로 시간은 흘러 한달가량시간이 또 흘렀다. 세집의 영업경쟁에서 결국 출입구 문어귀건물1층에서 가게를 벌렸던 두자매가 “백기”를 들고 영업방출입문에 하얀 종이로 영업정지 라는 계시판을 붙혔다. 굴러온 남, 북쪽의 돌들이 백힌돌을 뽑은 것이다. 그후 6월초 나는 일이있어 고향 연길로 가 일들을 처리하고 8월중순에 다시 청도 만과도화원으로 돌아 오게 되였다. 이튿날 아침운동하는 걸음에 동쪽출입쪽문에 들렸다. 그런데 웬걸, 길 남, 북쪽에서 장사를 하던 두집 가운데서 남쪽 50대부부가 보이지 않고 30대 부부가 길남쪽 모퉁이에서 버젓이 아침 장사를 하고 있지 않는가, 두집 영업경쟁에서 50대 부부가 “백기”를 들고 투항한 것이다. 30대 부부는 분주히 손을 놀려 손님들에게 여러가지 음식을 팔고 있었다. 몇달전과 다르다면 땅바닥에서 제멋대로 놀던 어린애가 보이지 않았다. 어린애는 어쩌고 너희들만 장사를 하느냐고 묻자 애엄마는 친정의 엄마가 애를 봐주고 있단다. 동병상련이라고 외손자를 돌보러 이곳 타지에 온 처지가 같아서 그런지 참, 어린애가 고생을 면하게 되여 다행이로구나 하고 시름이 놓였다. 시장경제의 큰 그림에서 보면 굴러온 돌이 백힌돌을 뽐는 일은 비일비재로 일어나겠건만 한편 굴러간 돌이 돼버린 40대자매와 50대부부를 생각하니 별로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들 모두가 먹고 살기 위해 이 아침, 영업경쟁에 뛰여 들지 않았던가. 아침걷기운동을 마치고 아파트단지출입구에 들어서며 시간이 퍼그나 지난것 같아 시계를 보니 6시반을 넘기고 있었다. 이때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하얀 교복에 책가방을 메고는 떼를 지어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뭐니뭐니 해도 사람사는 곳에 애들이 많아 생기가 더 차고 넘친다. 거기에 아침 일찍 출근하는 출근족들의 차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입구를 향하여 미끄러져 나가고 있다. 9월의 가을 아침, 아파트단지의 고층건물 사이로 붉은 태양이 서서히 올라 오고 있다. 그 눈부신 해살은 도화원의 이곳저곳을 어루만지고 있다. 그 와중에 입주민들의 삶의 이야기로 넘치던 아침은 뉘엿이 지나가고 또 다른 삶의 현장은 계속하여 이어 지고 있다. 2022년 5월호
16    수필 - 공존 댓글:  조회:541  추천:0  2021-09-01
   공 존 리광학 분망한 봄이 가고 록음이 막 무르녹는 그해 여름, 복잡하고 번화한 도시속 생활이 싫어 공기 좋고 조용하고 아늑한 곳을 선택해 이사를 간곳은 연길외각에 위치한 농촌 마을이였다. 농촌 마을이라고는 하지만 촌지도부에서 새마을 전망설계에 따라 지은 1,2층 아파트단지여서 살기에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다. 거기다 이곳은 2천여년전 한나라 전후시기의 북오저 고대인들이 살았던 유적지를 중심으로 반경 2백메터를 아우르는 곳이라 하니 앞으로 이런 명당자리에서 산다는 자체가 마음이 마냥 즐겁고 든든하였다. 새마을 앞으로는 낡고 좁은 아스팔트길이 서쪽으로 뻗어 있고 아스팔트길로부터 남쪽 부르하통하 제방언제까지는 푸른 남새발이 보기 좋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 높지 않은 마을 뒤 산은 동서로 릉선을 이루고 그 릉선 양지쪽에는 이깔나무와 과수나무 그리고 골짜기의 이름 모를 잡목들이 어울려 제법 푸른 숲을 이루고 있었다. 새마을 서쪽 담 너머에는 단층집들이 질서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담 너머에서 밤이면 멍멍 하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른 아침이면 군데군데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 올랐다. 동쪽 백여메터 사이거리에 도시를 에도는 외각 아스팔트길이 띠를 늘인 둣이 남에서 북으로 흘러가 도시와 농촌 구역을 선명하게 선을 그었다. 이사를 간 첫날밤은 너무 고요하였다. 오고가는 차들이 별로 없는데다 온밤 대낮처럼 환히 비추던 가로등마저 없는 곳이라 방안은 카텐을 두르자 완전히 캄캄한 어둠속에 잠겨 버렸다. 저도 모르게 신비로운 적막 속에 빠져 들었다. 그런대로 오랜만에 천국에 온 기분으로 편안하게 잠을 잤다. 그해 가을, 아파트 앞 정원의 과일나무들은 울긋불긋 단풍들기 시작하고 파란 잔디밭은 누런색이 가고 있었다. 날이 저물면 정원에서 찌르륵 찌르륵 풀벌레 소리가 들려와 귀를 간지럽혔다. 날이 밝으면 색깔고운 무당벌레들이 무리를 지어 창턱과 유리창문에서 버성기며 앞 다투어 집요하게 틈사리를 찾아 헤맸다. 걔네들이 바깥보다 집안이 따스한걸 어떻게 알가. 날씨가 차지며 새마을아파트에 입주하는 호들이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날이 희끄무레 밝아오자 정원에서 짹짹거리는 소리가 유별라게 소란스러웠다. 창문카텐을 젖히자 참새 떼가 잔디밭에서 먹이를 찾는 모습이 안겨 왔다. 사람들이 새마을로 이사를 오니 참새들도 동참하여 이사를 온 것이다. 예로부터 참새는 집을 짓고 살아가는 인간들과 공조하며 살아 왔다. 초가삼간으로부터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인간들과 동떨어져 산적이 없는 새다. 헌데 이놈들은 번마다 자기 투자는 하지 않고 무상으로 사람들을 따라 다나며 새집에 홀랑 얹져 들어와 산다. 에끼, 이놈들 너무 렴치 없는게 아니냐, 막 창문을 열어졌히고 참새들을 쫓으려다 그만두었다. 한창 먹이를 먹고 있는 참새들에게 너무 과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기실 참새는 인간의 삶에 유익한 동물이다. 참새는 곤충과 풀씨를 주요먹이로 일삼는 새로서 자연생태계나 인간들의 삶에 도움을 주는 유익한 일들을 한다. 헌데 우리에게는 참새를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아간 무지몽매한 부끄러운 력사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60여년전, 참새들이 알곡을 먹는 다는 리유 하나로 “4해” 제거 대상에 넣고 전 촌민들이 다 동원 되였다. 참새 잡이에 새총과 그물망 같은 고급적인 무기 외 큰 소리를 낼 수 있거나 때릴 수 있는 민간의 원시적인 도구들이 다 무기로 사용 되였다. 하늘과 땅에서 합세하여 참새를 잡는 전략과 전술이였다.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같은 시기에 적지 않은 지식인들도 새들과 비슷한 억울함을 당했었다. 세월이 흘러 그릇된 사건이나 일들을 시정하는 운동에서 인간들에게는 루명을 벗겨주고 보상을 해주었다. 헌대 그 당시 억울함을 당하고도 말 못하는 참새들에게는 그 누가 올바른 대접을 했단 말인가. 나는 잰 걸음으로 주방에 달려가 잡곡들을 넣어 두었던 비닐봉지를 들고 창문을 활 열어져끼고 참새들에게 뿌려 주었다. 그러자 놀란 참새떼들이 잔디밭에서 포르릉 날아 과일나무에 옮겨 앉았다. 창문을 닫자 다시 포르릉 잔디밭으로 옮겨 앉았다. 그해겨울은 참새들과 어울려 무난하게 지났다. 또 이듬해 화창한 봄이 성큼 돌아왔다. 날씨가 더워지고 만물이 기지개를 활 펴는 아지랑이 피여날 무렵 새마을에로 또 다른 손님이 이사를 왔다. 아파트 공간을 요리조리 날렴하게 날아예며 제비가 찾아 왔다. 제비는 오자마자 자기네들이 살 둥지를 짓기 위해 분망하게 보냈다. 제비는 령리한 건축가였다. 참새처럼 쉽게 기와 밑 공터를 그대로 비집고 둥지를 잡는 게 아니라 기와를 받쳐주는 추녀와 벽사이의 각이난 공간을 리용하여 진흙과 기타 건축자재를 쉼 없이 물어다 자신의 침을 가첨하여 열심히 둥지를 지었다. 어미제비 한 마리는 아파트 복도의 구석진 곳을 택하고 진입해 둥지를 지었다. 그 바람에 그 아파트단원에서는 제비네 가족을 위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복도 문을 닫지 못하고 지냈다. 제비는 비록 인간이 지은 건축물에 더부살이 집을 지을지라도 책임성 있게 완정한 둥지를 만들었다. 제비의 부지런하고 끈질긴 인내심은 인간들이 본받아야 될 것 같다. 오뉴월이 다가 오자 참새와 제비네 가족들은 둥지에서 새끼가 까나와 어미들이 먹이를 물어다 줄때마다 짹짹 찍찍 소리를 지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파트정원의 잔디밭과 과일나무들은 새들의 놀이터이고 먹이를 찾는 사냥터였다. 그해 여름, 새들의 가족은 즐겁고 평화로운 나날들을 보내며 번성했다. 또 황금빛 결실을 맺는 가을이 소리 없이 찾아왔다. 기간 참새네 가족과 제비네 가족들이 시름없이 재미있게 알콩달콩 살아가는 정경을 유심히 지켜보는 덩치 크고 심술궂은 관객이 따로 있었다. 바로 뒤 산에서 살고 있던 꿩들이였다. 꿩들이 시샘이 났다. 쬐고만 참새나 제비들이 인간들과 어울려 잘 살아가는 꼴을 그저 지켜 볼 수 없었다. 하늘 트이고 맑고 시원한 가을의 어느 날, 꿩 한마리가 두리번거리다 용기를 내여 산골짜기를 벗어나 새마을로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마을앞줄은 쭉 영업집들이 동서로 앉았는데 꿩은 주춤주춤하다가 아파트 이영위로 날아올라 앉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뭘 보고 착각했는지 불시에 식당집 뒤줄에 살고 있는 리로인네 2층 베란다로 총알같이 돌진하였다. 두 겹으로 된 유리창이 순식간에 짱하고 깨여지며 꿩이 바닥으로 떨어져 너부러졌다. 갑작스레 벌어진 사태라 거실에 있던 안로인이 유리창 깨지는 소리에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였다. 꿩의 한순간의 실수로 인한 돌연적인 습격으로 리로인네는 놀란 것은 물론 돈 팔아 유리창을 다시 수건하는 번거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보잘것없는 작은 꿩이 공중에서 아래로 급강하며 주는 충격과 힘이 이럴진대 전쟁에서 늘 사용되는 미사일의 위력과 거기에 따르는 인간들의 피해는 어떻겠는가. 꿩의 실수로 인한 무모한 희생으로 슬펐던지 그 후 뒤 산의 꿩 몇 마리가 아파트 보이라실 뒤쪽 숲에서 새벽이면 꾸억꾸억 하고 몇 년을 슬프게 울어 사람들의 여린 가슴을 파고들었다. 새마을에서 새들과 공존 속에서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시내 쪽의 개발붐이 서쪽으로 급격히 밀려오며 길 남쪽의 남새밭에 고층건물이 수풀처럼 일어서 새마을 작은 2층 아파트의 시선을 가로 막았다. 마을 뒤 산릉선을 따라 고속철이 부설되며 연선에 철조망과 기타 부설물이 설치 되여 마을과 나무숲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골짜기 몇 개의 배수구가 철길 밑으로 지나 남북통로 사용되고 있지만 웬지 사람들이 잘 나들지 않는다. 꿩들이 용감하게 마을로 내려오는 일은 다시없었다. 고속철 역방향으로 국가2급도로가 수건 되여 밤낮으로 차량들이 실북처럼 드나든다. 가로등이 설치 되여 밤이면 거리가 대낮처럼 환하다. 새마을 담 너머 서쪽마을은 언녕 파가 이주해 버렸다. 잠간 새 새마을은 연길외각의 복잡하고 번화한 도시로 변해가고 있다. 다행인 것은 이런 발 빠른 변화 속에서도 참새와 제비가족들은 드팀없이 마을사람들과 공존하며 살고 있다. 헌데 들려오는 골목소식에 의하면 우리 마을도 도시 새 전망계획에 들었다고 하던데 그럼 우린 어쩌지? 참새야, 제비야! 하지만 너무 걱정 하지마, 요즘 건설하는 신축아파트 단지들은 생태화원으로 건설되여 환경이 이곳보다 더 좋을 수도 있단다. 우리가 이사를 가면 너희들도 우릴 따라 오면 되는 거다. 어차피 너희들은 빈 몸으로 이사 올 건데 뭐, 그렇게 또 함께 살면 되는 거다. 2021년9월호 청년생활
15    수필- 아, 기약없는 황혼육아여 댓글:  조회:523  추천:0  2021-07-09
     아, 기약 없는 황혼육아여!                                      리광학 딸애가 뒤늦게 결혼하고 결혼식 이듬해인 지난해 10월 덜렁 남자애를 낳았다. 결혼하고 자연 순리대로 적정시기에 무탈하게 외손자를 안아 보게 되였다. 우리 집에는 복덩이가 굴러 온 셈이고 계속하여 마이너스 인구증장을 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는 자그마한 보탬이라도 된 게 다행이다. 주변에서 애들이 늦게 결혼한데다 제때에 애가 들어서지 못하면서 속절없이 애만 태우고 있는 부모들을 심심찮게 보아오던 차 혹시 우리 애들이 그러면 어쩌랴 싶어 은근 슬쩍 근심을 한 우리 량주였다. 좋은 일에 기쁜 심정은 딸애의 시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딸애의 시어머니가 한국에서 하던 일을 접고 한달음에 청도로 달려와 며느리의 산후조리와 손자의 시중을 도맡아 나섰다. 그로부터 5개월 만에 시집의 사유로 시어머니가 하던 일을 더 할 수 없게 되였다. 딸과 사위가 회사에 출근해야 되는 상황에 보모를 고용하여 애를 돌보려면 한달에 적어도 5,6천 원의 금액을 지급해야만 하고 그나마 마땅한 보모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자식들이 애를 낳고 남들처럼 잘 살아 보겠다고 하는데 그걸 ‘강 건너 불 보듯’ 해서는 부모로서의 도리가 아니므로 아무래도 우리가 청도로 가야만 했다. 우리가 몸과 정성으로 때우면 자식들이 한 달에 5,6천원의 비용을 절감 할 수 있지 않는가, 토론 끝에 안해가 먼저 선발대로 떠나고 집에 있는 내가 뒤처리를 하고난 다음 뒤따라가기로 일단 매듭을 지었다. 4월초 코로나로 인한 복잡한 시국에 번잡한 수속을 마치고 안해가 연길공항에서 청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딸집에 도착하여 이튿날, 출근한다던 사위가 아침을 먹고 쇼파에 앉아 시름없이 텔레비를 보고 있었다. 웬 일인가고 물었더니 타지방의 인원이 청도에 오면 회사 규정대로 15일간 자가 격리의 상태로 집에 있어야 한단다. 안해는 참, 이런 일도 있구나 싶어 허구픈 웃음이 절로 나왔단다. 안해는 낮이면 외손자를 돌보는 한편 삼시세끼 때시걱을 도맡아하다보니 온종일 채바퀴 돌듯 분망하게 보냈다. 시간이 지나며 지친 나머지 저녁이면 스마트본을 통해 나더러 어서 들어오라 독촉이 성화같았다. 나는 뒤일를 시급히 처리하고 선발대의 뒤를 이어 보충병으로 4월말이 되여서야 청도에 도착하게 되였다. 다행히도 이때는 코로나병 사태가 조금 완화되는 시기여서 사위의 자가 격리 같은 불편한 일은 더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튿날 안해의 제의로 안해가 장보기와 때시걱을 도맡고 내가 외손자 돌보기와 집안청소를 맡기로 하였다. 혹시 남자가 웬 육아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고 사는 게 요즘 세월이다. 속으로는 좀 불편하고 짜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자세를 낮추고 근 반시간 넘게 안해의 육아에 관한 현장 수업을 받고 본격적으로 일에 착수하였다. 우선 하얀 종이에 물과 분유의 비례와 우유 먹일 시간을 작성하여 눈에 잘 띠우는 곳에 반듯하게 붙여 놓았다. 육아에 사용되는 우유병소독기, 더운물기계, 가열기, 보온기 등 기계들은 모두가 현대식 전자 제품들이라 생소한 데다 사용 안내판 글자마저 너무 작아 다루기가 여간 불편스러운 게 아니였다. 더운물에 우유 가루를 타는데 손에 익지 않아 늘 알갱이가 지여 안해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그런대로10여일이 지나서야 겨우 일이 순서가 잡히고 손에 익어갔다. 외손자는 6개월부터 모유를 중단하고 우유에 의존하였다. 본능적으로 식욕이 특별히 강해서인지 우유병만 보이면 가지고 놀던 놀이 감을 던져 버리고 무작정 기여 온다. 우유를 먹일 시간이 될 쯤 이면 우유병을 챙기느라 조금만 어물거리며 늦어지면 마구 소리지르며 울어 댄다. 먹을 걸 앞에 놓고는 갖은 재주를 다 부려달래도 전혀 먹혀들지 았는다. 그걸 알고 다급히 우유병꼭지를 입에 물리면 걸탐스레 빨아대며 순식간에 굽을 내고서야 시름을 놓고 해시시 웃는다. 참, 우유가 없으면 어쩌랴, 지금은 수요와 공급이 윤활하여 우유는 돈만 주면 살 수 있다. 지금 애들은 복이 넘치고 있으니 마땅히 좋은 세월에 감사해야 한다. 헌데 우유는 젖소가 생산하고 있으니 가급적이면 젖소에게도 톡톡히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을가, 그렇다고 젖소를 낳은 엄마외의 또 다른 엄마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다. 외손자는 배부르게 우유를 먹고 나면 여기저기 기여 다니거나 놀이 감을 입에 물고 자유롭게 논다. 그러다가도 불시에 괜히 짜증을 부리며 놀이 감을 팽개치고 눈을 비벼댄다. 잠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이럴 때면 빠르게 눈치 채고 조용한 육아방으로 모시고 가야 한다. 처음에 그걸 모르고 애를 달래려고만 들다보니 타이밍을 놓치고 잠투정만 길어지게 되였다. 투정부리는 애를 안고 쪽쪽이를 물려주고 살살 다독여 주면 스르르 잠이 들어 버린다. 쪽쪽이를 엄마로 착각한 모양이다. 쪽쪽이는 어느 때 누구의 발상으로 만들어 졌는지 잠투정을 부리는 애들에게 물려주면 세상 편하다. 쪽쪽이가 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나로서는 뭘 가지고 애를 달랜단 말인가. 7달을 잡으며 외손자는 앉아있는 차수와 시간이 길어지고 자꾸만 서려고 하니 애 엄마가 온라인으로 보행보조기 (学步车)를 사들였다. 보행보조기가 있으니 외손자의 세상을 보는 시야는 한결 넓어졌고 어른들의 손끝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시간이 길어졌다. 처음은 보행보조기를 타는데 좀 서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앞뒤와 좌우를 자유자재로 운전했다. 집안의 이것저것 거치장스러운 물건들을 치워 교통정리를 해주면 대번에 물 만난 고기가 돼 버린다. 무엇이 그리 신나고 신기한지 매일 집안의 방마다 다 돌아보고야 시름을 놓는다. 그러던 어느 날 끝내 교통사고를 내고야 말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외손자를 먼저 먹이고 보행보조기에 모셔 놓았다. 그리고는 시름 놓고 밥상을 차려 식구들이 수저를 들려는 참에 손자 녀석이 불시에 보행보조기를 타고 밥상으로 돌진하였다. 그 충격에 뜨거운 국사발의 국물이 쏟아지며 애의 팔다리에 확 튀였다. 대번에 손자애의 야들야들한 피부가 벌어건 색을 띠는 건 물론 째지는 듯한 손자의 울음소리가 온 집안을 뒤 흔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모두가 놀라 빠져있는 판에 그래도 안해가 먼저 정신 차리고 다급히 애의 옷을 벗기자 이어 애 엄마가 약을 바르며 애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애가 진정 되고난 후 애의 상처를 살펴보니 병원으로 가야 될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하며 뒤 수습을 다 하고나니 나와 안해는 사맥이 뚝 떨어지며 십년 더 감수한 느낌이 확 몰려왔다. 천만다행이였다. 만약 손자애가 위중하여 병원에라도 실려 가면 어찌되겠는가? 이래서 애를 보기가 까다롭고 속을 말리는 힘든 일이구나 하고 심심히 느꼈다. 조금이라도 책임과 안전의식을 늦추어서는 안 되였다. 그날 식구들의 정심식사는 손자 애의 보행보조기 교통사고로 하여 더는 이어갈 수 없었다. 딸 내외가 살고 있는 청도시청양구 사회구역 아파트단지들의 기초시설과 환경은 너무 좋아 작은 공원을 방불케 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하기에는 최상의 장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까이에 바다를 끼고 있는데다 어디라 없이 나무숲이 우거지고 파란 잔디로 포장되여 무더운 여름날이지만 덥다는 느낌이 별로 없는 곳이다. 그래서 일가, 지금 청도에 살고 있는 조선족이 15만 명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손자애가 7달을 잡자 면역력과 사회성을 키워주기 위한 목적으로 하루 한두 번씩 유모차에 모시고 밖에 나간다. 코로나로 인해 계속 집안에만 갇혀있던 애가 갑자기 또 다른 낯선 세계의 사람들을 보자 겁부터 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차차 적응되여 곁을 지나던 사람들이 손을 내밀면 과감히 잡는 희한한 행동을 보였다. 요상한 놈이 유모차를 멈추면 몸을 탈며 괴상한 소리를 지르다 다시 움직이면 조그마한 얼굴이 삽시에 웃음기가 어린다. 나무그늘 밑에 차를 세우고 마주보며 듣건 말건 두서없는 이야기를 해야 점잖게 가만있고 그러지 않으면 또 투정을 부리며 차에서 내리려고 덤빈다. 손자 애의 육아를 책임지고부터 손자 애는 자연히 우리 량주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온 하루 우리들의 손끝에서 맴돈다. 요놈이 시름없이 잘 놀다 저녁때가 되여 집안이 어둑시룩해지기 시작하면 매삼 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양이 포착 된다. 은근히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모양새다. 그러다 갑자기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감지되면 보행보조기를 밀고 문 쪽으로 불이 나게 달려간다. 그리고 아빠를 맞이하고는 너무 기쁘고 흥분한 나머지 괴상한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아빠가 가방을 벗어 놓고 손을 씻는 과정이 길어지면 막 울어 대다 일단 아빠의 품에 안기면 얼굴을 어깨에 딱 붙이고 비비며 야단친다. 그럴 땐 내가 손을 내밀어도 빽 돌아진다. 요놈이 온 하루 고생은 늙은이들을 시켜놓고 앵돌아진다. 순간 조금은 서운했지만 그게 천륜이고 순리 인 걸 어찌하랴! 8개월을 잡으며 손자 애가 말이라고 할 가 아니면 그저 소리라고 할 가 시시 벌 중얼대는 차수가 많아진다. 그런데 명심하고 들어보면 엄마라는 소리보다 아빠라는 소리가 먼저 튀여 나온다. 엄마라는 엄자에 밭침이 붙어서 그럴 거라 짐작되지만 곰곰이 따지고 보면 애가 그럴 법도하다. 지금까지 인간이 대를 잇고 번성하는데 이어가는 유전자를 남자가 먼저 전해 주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 당연히 아빠라고 먼저 부르게 되는 것 같다. 남자인 내 리해이긴 하지만. 사람이 모르고 지나쳐 그렇지 빠르게 거침없이 흘러가고 있는 게 시간인 것 같다. 청도에 온지 어제 같은데 애가 벌써 9개월을 잡고 있다. 뒤돌아보니 기간 아침6시에 애가 깨는 시간이자 우리 량주가 “출근”하는 시간이였고 저녁8시에 애들 엄마, 아빠 손으로 넘겨주는 시각이 “퇴근” 시간이였던 것 같다. 황혼 육아를 하며 힘들었던 일은 애의 투정을 달래는 것도 똥오줌 컬레를 갈아 치우는 일도 아니였다. 가장 힘겨웠던 일은 이젠 70을 바라보는 나이라 무더운 긴긴 여름날 점심을 치르고 나면 자연히 식곤증으로 하여 잠이 몰려온다. 그런 와중에 그걸 겨우겨우 참아가며 말똥말똥 해서 놀고 있는 손자 애의 시중을 드는 일이였다. 그리고 손자 애의 안전 때문에 한시각도 시름을 놓을 수 없이 긴장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이어 간다는 게 너무 힘겹다. 시간이 길어지며 피곤이 쌓여서 인지 몇 년 전의 이알이가 다시 도지며 야금야금 몸을 괴롭핀다. 평시에 고르기만 하던 혈압도 오르내리며 머리가 불편스럽다. 늙은이들이 손군들을 돌보며 생생한 기를 되받는다고 하더니 웬지 힘들기만 하다. 나는 오늘도 외손자애를 안고 베란다에서서 청도의 아침을 맞는다. 창밖의 나무숲은 한결 더 푸르고 무성해 보인다. 한낮이면 찌르르릉, 찌르르릉 소란스레 울어대던 매미들은 늦잠을 자는지 소리라곤 들리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건만 숲이 우거져 새들은 꽁지도 보이질 않는다. 갑자기 까치 한마리가 베란다 창밖 너머에 있는 버금 나무가지 (法桐树)우로 날아와 길 다란 꽁지를 흔들거 리며 깍, 깍, 깍, 울어 댄다. 와, 지금껏 이렇게 가까이서 까치를 보기는 처음이다. 그것도 버금나무와 창문 높이가 거이 수평을 이루는 시각에서 말이다. 희소한 특정된 자리에서 그렇게 계속해 까치를 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 고향에 비워두고 온 집 생각이 절로 난다. 그리고 집 문만 나서면 만나게 되는 하나하나의 익숙한 얼굴들이 그리워 난다. 이렇게 잠깐 무심결 고향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움직거림을 하지 않은 탓에 손자 놈이 또 몸을 비탈며 품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린다. 편안히 서 있지 말라는가 부다. 나는 다시 베란다의 좌우를 움직이며 외손자를 살살 다독여 준다. 이 시각, 이제 방금 시작에 불과한 우리들의 황혼 육아의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힘들고 보람같은걸 기대하긴 모연한 황혼육아일지라도 이는 우리 세대가 묵묵히 감수하고 극복해야 될 현실 과제가 아닌가 싶다. 가족이란 이렇게 보이지 않는 릴레이 속에서 이어지고 있지 았는가, 아, 기약 없는 황혼 육아여!   2021년 1월 로년세계    
14    기구한 운명 댓글:  조회:654  추천:0  2021-05-31
 단편소설 기구한 운명 리 광 학 어느 화창한 봄날이였습니다. 나의 또래 많은 애들은 소수레에 실려 운동장처럼 넓고 아늑한 밭머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윽고 아저씨들과 아줌마들이 자로 잰듯이 한일자로 밭이랑을 치고는 적당한 간격을 사이두고 우리들을 세워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래몸에 바람이 샐것같아 파헤친 흙을 발로 살살다져 주기도 하였습니다. 또 우리들에게 주기적으로 여러가지 영양소와 물을 뿌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아무런 근심걱정이 따로없이 잘 지내며 너무도 행복하였습니다. 해가지고 달이가며 우리들은 감기 한번 걸리지 않고 잘도 커 갔습니다. 우리들의 몸은 점점 통통히 실해지고 키도 쑥쑥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때부터 인가 우리들은 자리가 비조운감이 자꾸들면서 쩍하면 서로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서로가 먹이와 령력을 놓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수없이 싸웠습니다. 그렇게 지루히 싸우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해 초봄이였습니다. 우리가 싸우기를 밥먹듯해서였는지 관리일군 아저씨와 아줌마들은 우리에게 덮어주었던 흙을 살살 파헤치고 우리들의 웃머리를 쥐여 당겨 한곳에 집결해 놓는것이였습니다. 아줌마들의 주고받는 말을 들어보니 우리들을 이사 시키려고 준비를 다그치고 있었습니다. 조금지나 짐을 싣는 트럭이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무작정 자동차에 실려 우리들이 모르는 그 어디엔가 실려가고 있었습니다. 자동차는 벌을 지나 어느 사이에 산골자기에 들어 어느 이름모를 산 양지쪽에 뭠춰 섰습니다. 차가 뭠춰서자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달려왔습니다. 나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넥타이를 맨 어느 녀자애 한테 배당되여 내가 살아야 할 집터로 찾아가게 되였습니다. 녀자애는 삽으로 웅뎅이를 깊게 파고는 나의 아래몸을 조심스레 넣어주고 깜직한 작은 발로 꽁꽁다져 주었습니다. 이로부터 산속에서의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였습니다. 내가 이사온 첫날밤, 산등성이의 밤은 너무도 고요했습니다. 초봄의 날씨는 꽤나 추었지만 온 하루 이사를 오느라 차에서 곤욕을 치르고 자리를 잡느라 지쳤는지 저도 모르게 꿈나나로 가버렸습니다. 이튿날 아침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하자 나는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키가 너무 작아 먼 곳은 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여기저기 주변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와 함께 이사를 와 자리를 잡은 친구들의 얼굴들이 보였을 뿐입니다. 이곳의 환경은 너무도 평온하고 아늑하였습니다. 좀체로 오고 가는 인간들은 물론 뭇짐승들이나 새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매일과 같이 땅속의 수분과 영양분을 섭취하기에 정력을 몰부었습니다. 하여 얼마지나지 않아 낡은 뿌리를 갈고 새로운 뿌리들을 뻗치여 나갔습니다. 우리와 함께 이사 온 애들중 몇몇 애들만이 이런저런 원인으로 새로운 터전에 뿌리를 내지지 못하고 요절하였을 뿐입니다. 산속에서의 세월은 너무도 빨리 흘러 우리들의 키는 단층집키를 넘어 섰습니다. 이젠 예전에 키가 작아 보지못했던 산속의 이곳저곳을 가려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토끼며 여우같은 짐승들도 자주보였습니다. 이름모를 새들도 찾아와 내 목마를 타고 지저귀기며 함께 놀기도 하였습니다. 간혹 노루와 같은 큰 짐승들도 눈에 띄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걔네들은 종래로 우리들을 괴롭히거나 상하게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 친구들도 들에서처럼 서로가 먹이나 자리다툼을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솔직히 지상락원이란이 따로 없었습니다. 공기가 맑고 주변이 고요한데 새들이 귀맛좋게 우짖고 산토끼가 뛰놀며 꾸억~꾸억 꿩들의 울음소리가 저 멀리에서 메아리로 들려왔습니다. 삼림속에서의 생활은 너무도 평화롭고 포근하여 너무너무 행복하였습니다. 또 몇해를 지난 어느 해 늦은 가을, 그날은 을씬스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입고 있던 푸른 옷은 살살 불어여는 가을 바람에 우수수하고 스산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바야흐로 꽁꽁얼어 터지는 추운 겨울이 다가 오고 있는것입니다. 그날 오후 갑작스레 산 아래에서 자동차 엔징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윽고 꼬불꼬불한 산굽이를 에돌아 트럭 한 대가 우리들의 터전에와 칙~칙 소리를 내며 뭠춰섰습니다. 이어 트럭위에서 삽이며 괭이를 든 장정 네댓명이 뛰여 내렸습니다. 차에서 뛰여내린 한 장정이 우리 애들 속에서 칠칠하고 미끈한 애들만 골라서 표시를 하는가 싶더니 이윽고 웃옷을 활활 벗어던지고 손에 침을 바르고는 무작정 우리들의 아래몸 주변을 파헤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휘두르는 삽과 괭이 날에 우리들의 작은 손발들이 무차별 잘리웠습니다. (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도대체 어쩌자고 이러는 겁니까? 예전 처럼 이사를 가란 말입니까? 인젠 이사를 다닐 나이가 이미 썩 지났다구요! ) 우리가 이러면 안된다고 억울하다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그들은 들은척도 들어 볼려고도 하지않습니다. 너무도 소리지르고 너무도 많고 많은 작은 손발을 잘리우다보니 우리는 탈진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결국은 정신이 흐려지며 아리숭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건 말건 그들은 관계치 않고 땅속 깊이 파묻쳐있는 우리들의 손발을 제거하고 쓰러 눕혔습니다. 그리고 어디선가 새끼오리를 가져다 우리들의 아래몸을 감싸며 꽁꽁 묶는 것이였습니다. 그 다음 날, 트럭과 기중기차량 한 대가 산에 왔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의 몸을 긴 바줄로 동여 매고 거뜩 쳐들어 빙~돌리며 트럭에 박아 싣는 것이였습니다. 차가 떠나며 뒤를 보니 산 여기저기에 봉분을 파헤친 자리와도 같은 웅뎅이들이 보기 싫게 그대로 내버려져 있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고 지났을가? 웬지 몸이 따뜻해지고 서고 있는 자리가 온기로 느껴지며 온몸을 부드럽게 간지럽히는 감각이 들었습니다. 가까으로 정신을 차리고 눈에 힘을 주어 뜨고 보니 따스한 바람이 솔솔 부는 봄이 아니겠습니까? 이게 웬일일가고 기억을 더듬으며 되새겨보니 지난 늦가을부터 시작을 하여 이미 7개월이 지난것입니다. 눈을 더 크게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서고 있는 앞쪽은 운동장보다도 더 넓었는데 풀 한 포기보이지 않는 공지에서는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차들이 서로 뒤질세라 붐비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고 뒤쪽은 하늘을 치솟는 고층빌딩이 줄지어섰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습니다. 난생 처음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 아~ 이곳이 옛말로만 들어 왔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 도시라는 곳이구나! ) 그러고 보니 우리들은 도시의 도로 량켠의 가로수 역활을 하려고 이곳에 오게 된것이였습니다. 우리들의 도시생활은 이렇게 운명적으로 시작 되였습니다. 아니 사람들에 의하여 억지로 도시생활을 하게 된것입니다. 내가 이런저런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가로수 관리 일군이라 짐작되는 두 남성이 우리들이 넘어질세라 삼각형으로 세개의 버팀목을 세워주고 물을 충족하게 주는것이였습니다. 지난 가을에 많은 작은 손발을 잘리워 제대로 서기가 영 힘들었는데 조금은 나아진것 같았습니다. 또 시원한 물로 목을 추기니 정신이 버쩍들었습니다. 그런대로 해가 지고 날이 어두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삼림속은 이맘때가 되면 벌써 어둠이 지고 하늘에 별들만이 남았을 겁니다. 헌데 이곳 도시는 완전히 다르군요. 어둠이 깃들자 거리의 가로등이 눈을 깜박이며 환히 비추고 집집의 들창마다 전등이 밝게 켜져 있는 와중에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불빛들이 번뜩이며 합세하여 거리는 말그대로 황홀한 불빛세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삼림속은 밤하늘이 어두어지기 시작하면 사방이 어디라없이 쥐죽은듯 고요했습니다. 하지만 이곳 거리는 밤에도 뻐스와 택시차들의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거기다 이따금씩 오토바이가 부르릉 요란하게 괴성을 지르며 고속으로 달리는데 그 아찔한 소리는 소름이 끼치게 하는군요. 거기다 사람들은 또 어찌나 시끌벅쩍거리며 다니는지 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이런 소란하고 어지러운 속에서 잠을 어떻게 잔단 말입니까? 오늘 저녁은 시름놓고 푹 자리라 속다짐 하였댔습니다. 밤은 깊어만 가고 있는데 내 눈은 점점 말똥말똥해 지기만 하는 군요. 이러다 밤을 지새우기라도 하며는 어쩌나요. 래일은 할일도 많을텐데… 이사를 방금왔으니 주변의 환경에 익숙해야 하고 또 해가뜨면 열을 흡수하고 될수록 몸을 빨리춰세워야 이곳에 살아 남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전처럼 자고만 있을때가 아니지요. 자고만 있으면 해볕에 속까지 말라버리면 영영죽고 말것이니까요. 그럭저럭 잠을 못이루다가 날이 밝을 무렵 주변이 조금 조용해 져서야 겨우 쪽잠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천만다행이였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아오자 도시의 거리는 어제와 여전 하였습니다. 나는 될수록이면 몸에 수분을 보장하기 위하여 몸아래 발들을 펴고 물을 빨기에 안간힘을 다 하였습니다. 오늘 저녁은 어제와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소란스러워 잠을 이루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여전하였습니다. 5일째 되는날 저녁에는 거의 미칠 지경이였습니다. 마침 그날 저녁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차량들과 사람들이 뜸해지면서 조금은 안정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였지요. 그런대로 곤욕을 치르며 한달을 실히 넘겨서야 점차 주변환경에 적응이 되고 나의 몸도 조금조금씩 춰서기 시작했습니다. 몇달을 지나자 작은 손발들이 새로 생겨나기 시작하고 따라서 얼굴색도 짙은 푸른색을 띠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날도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못하고 있던중 자정이 지나 방금 어려풋이 잠이들었는데 불시에 한쪽으로 몸이 쏠리는 감각이 들어 버쩍 눈을 떴습니다. 한 사나이가 우리들에게 받쳐주었던 버팀목을 도둑질해 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깜짝놀라 소리를 지르려 하였는데 목이 꺽 메여 소리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사나이는 나무 막대기를 쥐고는 두리번 거리다 사라지는것이였습니다. 받침대를 잃은 나는 몸의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다나니 장밤 눈 한번 제대로 붙히지 못하였습니다. 이틑날 관리 일군이 발견하고 다른 버팀목을 받쳐 주어서야 몸을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은 아마 성탄절이라고 기억됩니다. 초저녁부터 푸실푸실 눈이 내리고 사방에 붉은 전등빛이 번쩍거리는 아름다운 밤이였습니다. 오늘 저녁은 신성한 날인만큼 소란스럽지않고 조용하게 보낼것이라 짐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또 일이 생겼습니다. 몇몇 청년들이 비틀거리며 노래방에서 나오더니 한 청년이 곧추 나한테 몸을 기대더군요. 이윽고 청년은 왝~왝 거리며 내 몸에 음식물을 토해 대는것이였습니다. 삽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술냄새와 여러가지 음식물의 지독한 냄새가 확 풍겨와 숨도 제대로 들이 쉴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 이번에는 바지춤을 제치고는 오줌을 쏴~하고 내몸에 갈기는것이였습니다. 이런 한심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날 저녁 그 후로 이듬해 봄 눈이 녹아내리고 비가 오기전까지 나는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 쓰고 몸살을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역겹고 지루한 나날을 얼마나 보냈는지 시간은 빨리도 흘러 5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가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튼튼이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더는 죽음의 위험을 느끼지 않아도 되였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그제날 산속에서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뇌리를 치면서 그리워지는 마음을 속일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몸이였습니다. 우리들의 의사와는 무난하게 이곳에 꽉 매인 몸이니깐요. 운명에 맡길수 밖에는 다른 방법은 없으니깐요. 어느 날이였습니다. 내 남쪽줄에 선 애들이 무엇인가 수근대는 소리가 들리였습니다. “애들아 무슨 좋은 일이 있기에 소곤대는 거야, 나도 알며는 안되는거니? ” “안될것도없지, 다 알게 될 텐데 뭐.” 하며 자신도 옆집 가게를 꾸리고 있는 아저씨와 아줌마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해 들었다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의 현장이 바뀐다는것이다. “참, 애들도 현장이 바뀌는데 우리들과는 무슨 상관인데?” “이런 맹충이라구야, 현장이 바뀌면 가로수도 바뀐다는것도 몰라, 참!” 이 몇해사이에 이곳의 기온이나 환경은 고려없이 지도자가 바뀌면 가로수들도 바뀌는 악순환이 여러번 반복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여 장원한 타산이 없이 웅뎅이를 파고는 메우고 메우고는 파헤치는 어리석은 작업으로 하여 인력재력을 수없이 랑비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문제가 엄중하였다고 합니다. 듣고보니 쉽게 넘어갈일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거지?” 그렇지 않아도 어제저녁 꿈자리가 어지러웠는데. 가뜩이나 올봄을 잡아 흐리고 찬기온으로 몸 전체를 감싸는데 뜻하지않는 불길한 소식을 듣고보니 가슴이 덜렁내려 앉는걸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후로 매일과 같이 죄여드는 가슴을 부여잡고 불안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5~6월이 지나고 7월이 지났습니다. 더 이상 소식이 없으니 그저 지나가는 소리였겠거니 생각을 하고 잠시 근심스러웠던 일을 잊고 말았습니다. 올 8월은 류달리 더웠습니다. 낮온도는 쉽게 34~35도를 웃돌때가 많았습니다. 이맘때 산속에서는 풀들이 많고 나무들이 많아 이만큼한 더위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도시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넓게 트인 아스팔트의 열기에다 고층아파트에서 나오는 빛과 열, 그리고 차량들이 붐비며 내뿜는 연기와 열은 태양의 열기와 합심을 하여 도심을 더 달구어 놓군합니다. 다행히 푸르고 풍성하게 자란 우리들의 몸체가 뜨거운 태양을 가리워 주어 가로수 주변의 영업호들에서는 그 신세를 톡톡히 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늘밑에 일감을 벌이거나 차를 세우기도하고 때론 놀음판도 벌리기도하였습니다. 어느 날 내가 살고있던 뒤집 영업주인이 바뀌였습니다. 주인은 원래의 영업간판을 떼여버리고 다른 영업간판을 번듯하게 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몇달간 영업을 벌리다 영업이 잘 되지않자 우리들의 가지와 잎사귀들이 영업집의 시야를 가린다고 여겼던지 도시관리일군들이 주의하지않는 틈을 타 깜쪽같이 가지치기를 해버리는것이였습니다. 우리들의 몸체는 때아닌 봉변으로 앙상한 겨울나무가 되여버렸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몸을 춰세우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모양 이꼴이 된단 말입니까. 아지치기를 한후에도 주인의 영업은 별로 더 잘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매 주인의 영업이 잘되고 못되는 원인은 나의 탓이 아닌것 같았습니다. 헌데 더 한심한 일은 뒤에 있었습니다. 어느 깊은 밤 영업방주인은 가느다란 세줄오리로 나의 아래몸을 꽁꽁 동여 놓았습니다. 어찌나 은페적으로 죄였는지 눈여겨 보지않으면 발견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쇠줄오리는 시시각각 죄여오며 부풀어 오르는 나의 몸을 괴롭혔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떼여 버릴래야 떼여 버릴 수 없는 악성종기가 붙은 셈이였지요. 이듬해 또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되였습니다. 그런대로 나의 몸의 가지와 잎사귀들은 점점 수분과 영양분을 요구하고 웃몸은 커져가며 아래 몸의 고통은 가중해졌습니다. 몸은 점차 가분수처럼 위가 크고 아래가 작은 기형으로 변해갔습니다. 그해8월, 태풍 “삼바”에 의해 하늘에는 폭우가 련속 내리고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안깐힘을 모아 몸체의 평형을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얼마를 더 지탱하지 못하고 드센 비바람에 의해 우지끈 짱, 하는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나무는 꽁공 죄여왔던 쇠줄오리를 계선으로 아래우로 잘려지고 그 바람에 쇠줄오리가 풀리여 튕기며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웬지 베여 버리자고 작심했던 나무가 없어지자 영업방 간판은 환하게 보였지만 이상하게 영업방주인의 영업은 흥기 할줄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손님이 더 줄어들더니 나중에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자연과 생태를 파괴한 무지막지한 영업방주인의 보응이 였겠지요.    
13    수필 ㅡ크면 다 좋은가? 댓글:  조회:602  추천:0  2021-05-18
     크면 다 좋은가? 리광학 지난 불볕이 내리 쬐여 지글지글 땅이 달아오른 무더운 삼복염천의 어느 날, 조카애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칠새도 없이 물동이만큼 큰 수박 하나를 안고 집에 들어섰다. 마침 무더위에 속이 컬컬하던 참에 인사격식을 차릴새도없이 묵직한 수박을 그대로 받아 안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칼을 찾아들고 이등분을 가려잡고 막 수박을 자르려는데 안해가 너무 크게 자르면 다 먹을 수 없다고 다급한 소리를 지른다. 하긴 둘밖에 없는 단촐한 식솔이 수박 절반을 먹어치운다는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다시 사등분을 가려잡고 칼로 그 중 한몫을 저며 냈다. 나머지는 비닐주머니에 잘 포장하여 랭장고에 넣으려고 하였으나 너무 큰 수박이여서 그대로 북쪽에 있는 서늘한 베란다에 놓아 두었다. 며칠 후 어느 날 수박 생각이나 포장했던 수박을 다시 헤치고 칼을 대니 물렁물렁 변해있을줄이야. 더운때 변질한 음식은 금물이라 아까운 수박을 버릴 수 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환한 대낮에 남들의 눈에 걸리면 어쩔가 두려워 어두운 밤을 빌어 검은 비닐주머니에 수박을 넣고 슬며시 쓰레기상자에 버리고 재빠르게 자리를 떳다. 그날 밤 버려버린 사분의 삼의 수박을 두고 우리 부부는 서로 대방의 잘못인양 실없이 언성을 높혔다. 그후 간혹 거리를 지나다 수박난전에 맞띠우면 살욕심은 있었지만 주머니 사정보다 수박들이 너무 큰 것들이라 (다 먹을수 있을가?) 하고 고민부터 앞서며 용단들 못내릴때가 많았다. 지금 거리의 난전이나 시장매대에서 류통되고 있는 수박들을 두루 살펴보면 다수가 엄청 큰 것들 뿐이다. 수박장사들은 리익을 창출하려는 단순한 목적이나 의도에서 무게를 누룰수있는 큰 종자들만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헌데 그걸 소비해야 할 소비자들의 심리와 가정구조를 념두에 깊이 두지 못한것이 못내 아쉽다. 박경리는 개혁개방의 드높은 열기에 들떠 90년대중반, 국문을 넘어 로씨야의 원동지구인 인구가 6만여명이 살고 있는 아르쫌이란 작은 진으로 채소농사를 지을 목적으로 찾아갔다. 이틑날 행장을 풀고 임대할 밭들을 돌아보며 박경리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채소밭은 두께가 50센치메터이상으로 검은색의 부식토로 쫙 깔려있고 비닐온실시설은 굵직한 콩크리트틀로 만들어져 비닐방막을 치면 웬간한 눈이나 바람에 끄덕없을것 같았다. 중국에서는 볼래야 볼 수 없는 정경이였다고 한다. 로시야인들의 말에 의하면 채소밭이나 온실 시설들은 그들이 50년대 국영농장때부터 사용 하던것이라 했다. 땅이 비옥하겠다 거기다 체구가 크고 호방한 로씨야인들이 큰 건만 좋아할줄로 믿고 박경리는 중국에서 제일 크고 산량이 높은 오이종자를 선택하여 심었다. 중국에서 오이전문가를 초빙하여 기술지도를 하고 지극히 정성을 몰부어 농사를 지었더니 땅은 거짓이 없는지라 오이대풍을 맞았다. 박경리는 신바람이 절로 났고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했다. 오이가 출하를 시작하여 인구가 많은 빈해성시장에 올랐는데 시장에 박경리네집 오이만큼 큰 오이는 없었다. 헌데 로시야인들이 오이가게에 진렬된 큰 오이들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지나치더란다. 오이가 팔리지 않아 애간장을 태우던 박경리는 끓어번지는 속을 삭일 수 없어 산더미처럼 오이무지를 만들고 불도제로 짓깔아버렸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서야 로시야인들이 감자, 오이, 도마토와 같은 남새류들은 우선 맛을 전제로 작은것들을 더 선호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단다. 전문농가에서 농산물을 심는 목적은 시장에 팔려는것이다. 하다면 우선 소비자가 어떤것을 선호하고 어떤것을 꺼려하는 지를 잘 파악하는것이 중요한 것이다. 아마 그걸 알려고 하는것이 시장 조사이고 그에 맞게 품종을 선택하는것이 질을 보장하는 것이다. 맛과 질을 고려하지않는 시대는 이미 지난것 같다. 무턱대고 산량을 추구하여 큰 것만 고집하면 농사를 망쳐 먹게 될수도 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시행 착오를 범하는것을 심심찮게 보아왔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는 살림집이나 자가용은 남들보다 큰 것을 선호했다. 직장의 지도자들은 큰 사무실, 큰 사무용 책걸상, 큰 컴퓨터, 큰 자동차... 하여튼 남보다 크면 직성이 풀리고 만족해 온것같다. 새 사무청사에 입주하게 되면 직장의 1인자부터 시작하여 직위순서에 따라 큰 사무실, 큰 사무용품들을 챙겼던것도 사실이다. 헌데 요즘 들어 개발상이 리익창출에만 목적을 두고 큰 집만 설계하고지은 큰집들은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한다. 몇해전에 지은 중고형 집들도 면적이 100평방메터를 넘으면 팔기 힘들다고 한다. 원인은 명백하다. 사실 적은 식솔에 집이 크고 보면 집값은 물론 기타 장식, 전기, 물, 난방, 관리 등 비용들이 엄청 많이 든다. 또 집이 크면 생계를 위해 드바삐 출근하는 젊은이들이나 기맥이 모자라는 로인족들에게는 품을 들여 집안 거두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다. 중앙의 “ 8가지 규정 ”이 나오면서 기관 사업단의 사무청사나 사무용품들도 그에 따른 격식이나 표준에 맞아야 한다. 규정을 어기면 처벌을 면치 못한다. 어떤 단의에서는 검사조가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거액을 들여 사놓은 대통령사무용책상처럼 큰 사무용책상들을 처리하고 표준에 맞는 작은 사무용책상들을 구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헌데 이런 형편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구업체들은 크고 고급스러운 사무용책걸상이나 쑈파들을 잔뜩 만들고는 그 물건들을 팔기 위해 매일 텔레비를 통해 애타게 광고를 진행하고 있다. 텔레비를 켜고 그걸 볼때마다 어쩐지 안스럽기만하다. 지금 누가 감히 중앙의 규정을 어기고 크고 고급스러운 사치품들을 갖춘단말인가. 단위에서 통이크게 크고 고급스러운 사무용품 들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쓰던 시대는 영영 지나갔다. 그런 시대가 다시 돌아와서는 안된다. 몇해전 독일에 가본적이있다. 독일은 세계 경제대국이고 소문높은 자동차왕국이다. 벤츠자동차의 성능과 질은 세계에서 손꼽힌다. 나는 독일에 들어서면 거리마다 호화롭고 큰 벤츠자동차들이 길을 메울것이라 믿었었다. 헌데 거리에 직접나서 보니 나의 상상은 너무나 빗나갔다. 거리에서 달리는 자가용차 대부분이 소형차들일 줄이야. 작은 자가용에 깜찍한 바곤을 달고 달리는 정경을 보면 놀이감자동차를 방불케 했다. 덩치큰 독일사람들과 보잘것 없어보이는 작은 차들을 번갈아 보면 어쩐지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걸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작은 오지도시 연길거리로 휩쓸고 다니는 차들이 오히려 차원이 더 높았다. 독일사람들이 작은 차들을 선호하는것은 치솟는 기름값을 절약하고 배기량을 줄여 날로 극심해지는 대기요염을 줄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돋보이는 국민 의식이다. 개혁개방을 통하여 우리 사회는 천지개벽의 발전과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들의 삶도 전례없이 풍요로워졌다. 오늘날 사회발전과 더불어 사회의 작은 세포조직인 가정구조 형태가 변하였다. 그 제날 사람들은 많고 큰 것들에만 집착하던 데로부터 지금은 실제적이고 실용적이며 간편하고 편리하며 질이 좋고 절약 할수있는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무턱대고 많아야 되고 커야되는 시대는 이미 지난것 같다. 2017년9월에 발표
12    수필 ㅡ 3월의 봄은 아름답다 댓글:  조회:613  추천:0  2021-04-01
3월의 봄은 아름답다 리광학 우수, 경칩이 지나자 이곳 청도성양구는 완연 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양지쪽의 언덕에는 어느새 민들레와 냉이들의 새잎사귀가 파랗게 커가며 기지개를 켜고 있고 거리에는 이름모를 나무들이 개화기를 맞이하여 서로 앞다투어 아름다운 꼿을 피우며 봄의 향기를 짙게 하고 있다. 거리에 나서 여러가지 꽃나무들을 유심히 살펴보다 용케 살구나무꽃을 가려내는 순간, 저도모르게 관자노리 아래에서 시큼한 감각이 느껴 온다. 고향 연길의 살구나무꽃은 4월하순 부터 피기 시작하여 5.1절에 이르러야 그 환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 이곳은 연길에 비해 봄이 3,40일은 더 이른것 같다. 아, 흐르는 시간은 빠르기도 하다. 또 새봄을 맞은 것이다. 이곳, 청도에 온지 거이 일년시일이 되여 온다. 이곳에서 너무 이르게 봄을 맞아 봄의 향기에 취하고 보니 웬지 마음은 싱숭생숭해진다. 그런김에 며칠 한번씩 꼭 가는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딸집으로부터 5분사이에 가닿는 성양구시민 운동장이다. 지난해 성양구정부에서는 거금을 들여 낡은 운동장의 시설들을 새롭게 개조하였다. 파아란 인조잔디를 편 축구장과 주황색륙상코스는 대형경기를 치를 수 있는 수준이다. 그외 가지가지 운동기구들을 설치하여 시민들에게 편리를 제공하고 있다. 운동장 주변에는 여러가지 나무들을 빼곡히 심었다. 하여 여름철에는 시민들에게 서늘한 그늘을 제공해 주고 겨울철에는 바람막이가 되여 안온한 감을 준다. 시민들이 휴식의 한때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봄을 맞아 이곳도 여느 곳에 뒤질세라 여러가지 꽃나무들이 환하게 웃음짓고 사람들을 반긴다. 여러가지 꽃나무들과 더불어 이곳은 여러부류의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다. 휴일에는 축구를 비롯한 구류종목과 광장무에 취미가 있는 젊은 축들이 많이 찾아들고 평일에는 로인과 어린애들, 그리고 걷기운동을 즐기는 분들이 찾고 있다. 사람의 눈과 감각이라는 것은 이상하다. 가끔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거나 소풍하며 시간을 보내는 많은 분들이 보이는데 유표하게 눈길을 끄는 분들이 있다. 그들의 옷차림이나 혹은 걸음걸이를 보고 저분이 우리 민족이 구나 하고 판단하면 8,90프로는 맞아 떨어 진다. 아마 같은 민족이여서 차림새나 정서적으로 공동한 점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이런 경우를 두고 피는 속일 수 없는가 보다. 그래서 요즘 화창한 봄을 맞아 운동장 출입이 잦아지며 여러명의 우리 민족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년령때가 비슷하고 언어가 통하는데다 하나같이 황혼육아로 청도에 온 분들이라 얼마 안가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남자들이 셋이상 끼리끼리 모이면 서로간 덕담을 나누는게 일상이다. 헌데 이야기를 하다보면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정치적인 이야기가 우선 화제로 오간다. 이곳도 마찬가지이다. 늘 마나면 국내정치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웃나라의 정치까지 거론하며 한바탕 이렇쿵저렇쿵 쟁론을 하다 결과는 싱겁게 끝난다. 다음 화제는 말로하는 축구다. 축구를 론하는걸 들어보면 모두가 축구에는 전문가 수준이다. 이대로라면 중국축구가 쉽게 아세아를 넘어 월드컵에 나설것 같다. 정말 못 말리는 우리 민족의 축구 사랑이다. 축구를 론하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그 다음 화제는 옛날 고향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아마 모두가 나이를 먹을만큼 먹었으니 쉽게 추억에 빠지는가 보다.   재미있는것은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면 고향은 서로 다르지만 살고 있었던 곳들은 모두가 벼농사를 짓는 벌방이라는 것이 공동한 점이였다. 그러니 벼농사는 동북3성 그 어디서나 우리 민족선인들이 선도해 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다. 모두가 벼농사를 지은 경험이 있어 그런지 오고 가는 말들이 자연스럽고 서로가 수긍하는 면이 많았다.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들는 와중 언제부터 궁굼게 하나 있었다. 6,70년대 우리 연변은 벼농사를 짓는 곳이였지만 량식고생을 엄청 했었다. 벼무당 산량은 그 어느 곳들보다 훨씬 높았음에도 말이다. 예전 ‘안쪽’에서 살았던 분들을 마주했으니 이참에 시원히 물어보기로 했다. 그당시 연변의 량식표준은 국가에 바치는 징구량을 완성하는 전제에서 벼걷곡으로 인당 450근 표준이였다. 헌데 ‘안쪽’에서는 순입쌀로 인당600근 표준으로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료녕성에서 온 분이 시무룩히 웃으며 그곳에는 토지대장에 기입된 수전면적보다 기입되지 않은 면적이 훨씬 더 많았다고 했다. 오, 그랬었구나! 그러니 연변에서의 량식고생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운동장에서 모르고 지내던 사람들이 만남이 잦아지자 어느날 자연스레 술자리를 함께하게 되였다. 남자들이란 여러번 술자를 함께하면 서로가 닫고있던 장벽이 스르르 무너지며 거리가 좁혀져 허물없이 지내게 된다. 그리고 서로가 어렵게 부르던 호칭이 갑자기 형님동생으로 변하며 우정을 다져 간다. 이곳에도 례외가 아니다. 이래서 술이란 참, 신비하고 좋은 ‘물건’이 아닌가 싶다. 매번 운동장에서 걷기운동을 즐기는 분들의 장면은 참, 가관이다.  타원형으로 만들어진400메터 륙상코스에는 사지가 펀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걷는가하면 뇌졸증으로하여 거동이 불편하여 쩔둑 거리며 걷는 사람도 있다. 또 애들의 유모차를 밀고 땀흘리며 힘겹게 걷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두 발로 걷지 못하자 아예 휠체어에 걸터 앉아 타인의 도음으로 륙상코스를 도는 로인들도 있다. 지어 전동휠체어에 몸을 간신히 의지하고 륙상코스를 빙 도는 사람들도 있다. 갑자기 휠체어에 의지해 돌고 있던 로인 부부가 멈춰선다. 그리고는 안로인이 바깥로인을 조심히 부축하여 내려 간신히 몇걸음을 걷다 다시 휠체어에 오른다. 얼마나 땅을 딛고 걷고 싶었으면 저러랴, 가슴이 뭉클하는 장면이다. 그러고보니 아직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걸을 수 있는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솔직히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륙상코스를 도는 모습은 보기에 좀 민망스럽고 안스럽다. 한편 오죽하면 그몸으로 걷는 시늉이라도 하며 존재감을 과시 할가하고 생각하면 그분들의 심정을 리해하게 된다. 기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불편한 사람들이 정상인에 비해 걷는 속도나 질은 차이가 있겠지만 걸어가고 있고 돌고 있는 방향만은 정상인들과 일치한 것이다. 그러니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정상인들처럼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같은 방향을 향해 긍정적인 마인드로 움직이고 있다는 자체가 참, 존경스럽고 대견스럽다. 이 정경을 보며 이곳이야 말로 사람들이 다양한 삶을 사는 또 다른 아름다운 진풍경이 아닌가 싶다.    오늘 따라 이곳 청도의 봄날은 유난히 따스하다. 3월하순이 거이 지나 가며 기온이 급상승하여 령상20도를 훨씬 넘어선다. 그러자 운동장 주변의 가지가지한 나무들의 꽃들이 개화기의 절정에 이르는 상 싶다. 온 운동장엔 봄기운이 가득차 흐른다. 그 속에 열정에 넘치는 가지가지한 사람들이 나름대로 가지가지한 운동을 즐긴다. 노래 ‘하늘길’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운동장에 울려퍼지며 녀인들이 신바람나게 광장무를 추고 있다. 몇몇 젊은이들은 아예 운동장 잔디우에 대자를 그리고 누워 태평스레 포근하고 따뜻한 봄의 향기를 만끽하고 있다. 3월의 봄은 아릅답다.
11    수필 ㅡ 뒤주의 변화 댓글:  조회:554  추천:0  2021-03-22
뒤주의 변화□ 리광학 요즘 젊은 세대들은 뒤주를 보았을가? 지금까지 흘러온 시간을 뒤로뒤로 슬슬 밀고 이미 저 세상으로 가신 아버지 세대의 고달픈 삶을 살펴보면 뒤주가 보이기 시작한다. 농사군인 아버지의 소박한 꿈은 큰 뒤주를 갖추고 뒤주에 곡식을 꼴독 채워 흡족하게 바라보는 것이였다고 한다. 그게 아마 부자꿈이 였으리라. 그래서 감자골이라 불리우는 두메산골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에라, 이곳이 아니면 못살랴!)싶어 태를 묻고 정들었던 고향을 뿌리치고 무작정 이주민들 속에 끼여 두만강을 건너고 개산툰 후동고개를 넘어 화첨자라는 곳에 정착했다. 화첨자는 감자골 보다는 조금 나아 감자를 섞은 보리밥으로 때를 에울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소유한 땅이 없이 부자집 소작살이만 했는지라 쪼들리는 생활은 계속되고 좀처럼 여유가 생기지 않아 아버지의 뒤주의 꿈은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게 겨우겨우 생활을 이어가다 광복을 맞이하고 이어 땅을 분배받게 되였다. 후에 살면서 보니 그당시 아버지의 소박한 부자꿈이 이루어 지지 않은것이 천만 다행이였다. 만약 그 세월 아버지가 자신의 소유한 땅이있고 거기다 여러개의 뒤주를 갖추고 생활에 여유가 있게 잘 살았더라면 어찌 가정성분을 빈하중농으로 획분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세월 지주, 부농가정 락인이 찍히고 정치적으로 악몽과도 같은 다른 궤도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만해도 무서운 일이다. 세상일이란 요지경으로 때론 이렇게 나쁜 일이 오히려 좋은 일로 번져질 때가 있는가 보다. 토지개혁으로 아버지는 오매에도 바라던 땅의 주인이 되고 당신의 땅에 당신 손으로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였다. 아버지는 인젠 자신의 소박한 뒤주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몇해간 아글타글 등이 휘고 손뿌리가 터지게 밭농사에 올인하였다. 하지만 워낙 척박한 땅과 렬약한 환경인데다 운마저 따라 주지 않아 먹을 량식마저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또 땅을 팔고 소수레에 한해 농사에서 얻은 알곡과 짐을 챙겨 싣고 바람에 실려 다니는 민들레씨처럼 날려간 곳이 부르하통하가 굽이쳐 흐르고 버들방천 우거진 솔완자라는 연길벌이였다. 솔완자는 참, 살기 좋은 고장이였다. 이곳에서 아버지는 그 당시 중국 어느 농촌들과 다름없이 호조조, 합작화, 인민 공사를 맞이하게 된다. 아버지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희망과 꿈이 벅차올랐다. 허나 록록치 않은 현실 생활은 늘 아버지의 뒤주꿈을 멀리 날려 보냈다. 그후 60년대 중기에 이르며 나라에서는 전한 단계의 극 ‘좌’적이고 실제를 떠난 그릇된 농촌정책을 시정하고 새로운 농촌정책을 실시하였다. 아버지의 뒤주꿈은 희망이 생겼다. 나라에서 대약진과 3년재해를 이겨낸 이듬해 고향마을은 대풍작을 거두었다. 생산대에서는 일년 량식을 분배하여 주었다. 다섯 식구의 량식은 겉벼로 거이 2천근이 넘었다. 겨울과 봄 사이에 집식구들이 먹을 벼를 찧고 알곡이 나머지가 생겼다. 아버지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뒤주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다음해 봄 아버지는 초가집 아래간에 뒤주공사를 벌렸다. 나무가 귀한 곳이라 요행 여기저기에서 널판자를 주어다 벽 세면을 두르고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밑면은 돌로 구들고래를 켰다. 앞면은 널판자를 가로 고정시키여야 했는데 못이 참나무에 잘 들어 박히지 않아 애를 먹었다. 박으면 못이 휘여들기를 반복하던 중 누군가 못 끝에 콩기름을 바르면 잘 들어간다기에 그대로 했더니 과연 틀림없었다. 다만 인당 한달에 2냥으로 공급된 귀한 콩기름을 아쉽게 못박이에 허비해야만 했다. 그해 우리 집 초대형 뒤주공사가 드디여 마무리가 되여 아버지의 뒤주꿈은 한단계 이루어졌다. 아버지의 뒤주꿈이 이루어 지고 뒤주에 벼가 차있어 보기에는 그럴듯 했다. 하지만 웬지 해마다 먹을 량식은 모자라 량식고생은 계속되였다. 집집마다 벽에 량식절약공약이란 게시판이 번듯하게 붙혀있어 시시각각 안주인들의 신경을 조이였다. 량식고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는6, 70년대 나라에서 제정한 농촌량식표준을 보면 불보듯 뻔했다. 수전지방의 량식표준은 징구량을 완성하면 인당 겉벼로450근이고 완성못 하면350근 이였다. 말이450근이지 거기에서 메주콩이나 기타 잡곡들을 덜면 그 수량에 가닿지 못하였다. 그러다보니 생산대의 거이 모든 집들이 량식고생을 하였다. 먹을 량식이 부족하니 사람들은 늘 배고프고 허기진 상태여서 혹 좋은 음식을 만나면 뒤를 가리지 않는 일이 벌어지곤 하였다. 따라서 뭐든지 많이 먹는 먹방 스타들이 나타났다. 60년대 말 중학교시절 전쟁준비로 학교 운동장 옆에 방공굴을 판 적이 있다. 돌도 씹으면 소화시킬 한창 때이고 일이 힘들고 지친 상태라 우리 반 남자애가 청무우와 입쌀을 섞은 죽 여섯 그릇을 해치웠다. 아래 마을 청년은 한끼에 두부 열한모를 소멸하고도 아쉬워 하더라고 했다. 또 앞마을 청년은 운동대회가 끝나고 저녁회식에 참가하여 국수 다섯그릇을 훌쩍 비웠다. 출출하고 허기진 김에 보신탕을 마주 하자 급한김에 큰 국자로 마구 퍼먹는 젊은이가 있어 주변을 놀래우기도 했다. 특수 환경과 년대에 우리가 몸소 겪고 본 아이러니한 일들이다. 명절이거나 집에 손님이 올 때에나 하얀 밥이 음식상에 오르고 일반시에는 입쌀에 감자나 청무우를 섞은 밥그릇이 오르기 일쑤였다. 어릴 적 섞음밥이 너무 싫어 때 아니게 명절이나 손님이 그리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후 아버지가 세상을 뜬 이듬해인 80년대 초 나라에 서는 집체를 단위로 한 생산경영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호를 단위로 한 도급제를 실시하였다. 도급제를 실시하자 첫해에 이변이 일어났다. 우리 집은 호에 해당한 징구량을 나라에 바치고도 아버지가 만든 뒤주에 벼를 넘쳐나게 저장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평생 이루지 못한 꿈과 소망을 끝내 이루어 냈고 그로 하여 지겨웠던 량식고생은 종말을 짓게 되였다. 어머니가 기뻐하신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해 넉넉한 식량에 다달이 지급되는 나의 교사로임이 더해져 생활은 처음으로 그 어느 때 보다 여유가 있게 되였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다. 그후 가족이 성시식량배급을 받게 되자 아버지가 남겼던 뒤주는 자리만 차지하고 쓸모없는 페물이 되여버렸다. 80년대 말 시내의 단층집에 이사를 가 살게 되니 여러개의 작은 오지독들이 뒤주를 대신하였다. 오지독을 사용하니 자리를 적게 차지하고 보기에도 좋았으며 사용하기에도 퍽 편했다. 어머니의 손길은 늘 오지독에 가 있었다. 어머니의 손길을 머금은 오지독은 언제보나 반들반들 광택을 내며 온 집안의 넉넉한 삶을 보란 듯이 자랑하였다. 90년대 중기에 아파트에서 살게 되자 오지독도 편하지 않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오지독은 뒤주의 사명을 다 한것이다. 오랜 세월 사용해 오며 손때 묻고 애지중지하며 세월을 함께해 온 오지독을 버리게 되니 어머니는 너무 괴로워하고 아쉬워하셨다. 여러개 오지독 가운데 밤빛 오지독은 어머니가 광복 이듬해 화첨자에서 연길장에 가 사서 왕복100여리 길을 머리에 이고 온, 년륜이 가장 긴 오지독이였다. 오지독은 연길에서 화첨자로, 화첨자에서 연길 교외 솔완자로, 솔완자에서 다시 연길 도심으로 원형을 그으며 주인을 따라다닌 애물단지였다. 그것을 버리게 된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삶의 환경과 질이 변화를 거듭하며 쌀뒤주의 변화도 거듭되였다. 처음 아파트로 이사를 와 50키로그람 비닐통 쌀뒤주를 사용했는데 가볍고 매우 편했다. 그후 또 버튼을 누르면 계량되여서 쌀이 나오는 30키로그람 용량을 가진 미형 쌀뒤주를 사용했다. 헌데 시간이 지나며 그것마저 크고 거치장스러워 아예 5키로 용량의 초미형 쌀뒤주를 사용했다. 또 몇해가 지나 시장에는 1키로그람 용량의 원기둥이나 압축용으로 포장된 비닐쌀뒤주가 류통되여 장보고 들고 다니는데 상당한 편리를 가져다 주었다. 헌데 그것 마저 불편하다고 아예 마트에 전화를 걸어 집까지 쌀을 배달시켜 먹는 젊은이들이 수두룩하다. 너무 편해 누워서 떡먹거라 손발에 털이날 지경으로 호강스럽다. 쌀뒤주가 대형으로부터 소형으로의 변화는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지나온 우리들의 삶의 력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자라고 귀할 때는 많고 큰것을, 넉넉하고 넘칠 때는 적고 편한 것을 바라는게 사람의 마음인 것 같다. 수량보다는 질과 맛 그리고 몸에 리로운 유기농쌀을 선호하는게 요즘 사람들의 삶의 태세인 것 같다. 참, 살기가 편하고 쉬운 좋은 세상을 맞았다. 큰 뒤주를 꿈꾸며 배를 곯는 허황한 세월은 영영 가버리고 지금과 같은 넉넉함의 환경에서 편리하고 간편한 쌀뒤주의 시대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연변일보 해란강부간 3월19일
10    수필 - 늦으면 늦은대로 댓글:  조회:1197  추천:0  2021-03-05
     늦으면 늦은 대로   리광학 며칠 전, 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녀성 지인 한분을 만났다. 례의상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버스가 언제 오나 기웃거리고 있는데 그녀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래 자네 딸은 올해 몇 살인가?” 서른셋이라고 대답했더니 “나이가 적지 않구먼, 어이구”하며 아닌 걱정을 한다. ‘허참, 오지랖이 넓어도 유분수지. 속이 타도 내가 더 탈 텐데 당신이 무슨 한숨을 쉬고 그래’라며 속으로 아니꼽게 생각했다. 솔직히 딸애가 서른 고개를 넘어서부터 딸애의 장래가 심히 걱정된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주위 사람들이 딸애의 혼인상황을 두고 뭐라 할 때마다 저도 몰래 위구심이 들면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얼렁뚱땅 둘러댄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다행히 요즘 딸애가 좋은 사람을 만나 얼마 전 약혼을 하고 결혼식 날자까지 잡은 터라 어깨가 으쓱해서 말했다. 이쯤하면 “어이구, 축하해요, 이젠 한시름 놓겠어요”라는 말로 위로를 해주는 것이 례의 건만 도대체 뭐가 그리 궁금한지 꼬치꼬치 캐여 묻는다. “그래 신랑은 몇 살이우?” 살짝 짜증이 났지만 대놓고 내색 할 수는 없는지라 곧바로 서른여섯이라고 알려주었다. “어이구, 로총각이 구먼” 또다시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그걸 굳이 로총각이라고 콕 꼬집어 말해야 직성이 풀리나? 내 딸이 서른을 넘겼는데 그렇다고 산에 가서 애고사리를 뜯겠는가?“ 지인의 입에서 또 어떤 말이 튀여 나올지 지레 겁부터 났다. 오늘따라 제시간에 딱딱 도착하던 버스마저 전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가 지인이 또 한발 들이밀며 집요하게 물어왔다. “신랑감은 조선족이요, 한족이요?” 남이야 조선족한테 시집가든 한족한테 시집가든 무슨 상관이냐고 한마디 따끔하게 내뱉으려는 순간 그토록 기다리던 버스가 역에 도착하여 난처한 상황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10여간 타향살이에 길들여졌던 딸애는 아마도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까지 야근하는 일상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거기에 세방살이 해수가 한두해 이어지면서 나이는 늘어나는데 전혀 결혼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마음이 급해난 건 우리 쪽이였다. 첫 몇해는 그래도 명절 때마다 고향에 돌아오는 딸애를 붙러놓고 “너도 이젠 련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지”하며 권고 반 걱정 반으로 슬슬 밀어 붙혔다. 하지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번이라고 결혼애기가 되풀이 되자 어느 날 갑자기 딸애가 아주 홀로 살겠다고 배수진을 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괜히 심기를 건드린 게 아닌가 싶어 더럭 겁부터 났다. 그후부터는 결혼이라면 아예 도리질하는 딸애 앞에서 결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 썩 내키지 않았다. 자식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하는데 “그래, 잘 생각했어, 네가 어떤 결정을 하던 우린 그걸 백프로 지지할거다”라며 등을 밀어줄 너그러운 부모는 이 세상에 흔치 않을 것이다. 요즘 세대를 보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벌써 20중반이다. 언제결혼을 고려할 겨를도 없이 취업 때문에 혈안이 되어있다. 치렬한 취업 경쟁 속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각종 자격증도 따야 한다. 인차 취직을 하지 않더라도 석사, 박사 과정까지 밟고 나면 서른을 넘기는 건 비일비재이다. 몇 년간 힘들게 갈고 닦은 실력으로 자신을 튼튼하게 포장했으니 몸값도 그많큼 뛰여 올라 결혼상대가 줄쳐서 기다릴 거란 기대는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만다. 현실은 왕왕 무정하다. 눈이 높아 웬만한 상대는 거들 떠 보지도 않지만 그 웬만한 상대마저 알고 보면 오래전에 임자를 정해둔 몸일 때가 많다. 모든 부모는 자식이 성장하면 홀로 서기를 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게 그리 녹녹치가 않다. 타향에서 요행 적성에 맞는 일자리를 찾아 월급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방에 비하면 훨씬 많이 받는 것 같지만 그곳의 높은 소비수준에 맞추어 집세에 필요한 지출까지 하고 나면 손에 남는 돈이 거의 없다. 그러니 취직을 하고 나서도 부모에게 손을 내밀지 않으면 되려 자식에게 고마워해야 될 판이다. 결혼을 하려면 집 장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새 아파트들이 하루가 멀다 하게 일떠서서 빌딩숲을 이루는데 하늘 뚫을 기세로 치솟는 건 아빠트뿐이 아니다. 부부가 꿈을 품고 이국 타향에서 3년만 벌면 고향에 돌아와 근사한 아파트를 장만하던 시절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 얘기다. 요즘 세대들이 자기 힘으로 신혼집을 장만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경제 발전과 더불어 요즘 젊은이들의 가치관에도 많은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두 손으로 하나하나 갖추어갔던 우리 세대의 소박한 삶의 방식은 어느새 빛을 잃어가고 무었이든 다 이루고 다 갖춘 다음에야 결혼을 저울질하는 게 요즘 세대들이다. 어디 그뿐이랴, 자고 일어나면 몰라보게 달라지는 사회와 빠른 생활절주는 미래생활에 대한 불안정감을 야기시킴과 동시에 진정한 경제적 자립에 대한 정의를 갈수록 흐릿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들을 두루 살펴보았을 때 결혼 적령기를 놓치는 게 어찌 애들만 탓할 일이겠는가? 해마다 봄이 오면 진달래는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떄론 모진 꽃샘추위를 이겨내고 뒤늦게 꽃망울을 터치며 피여난 진달래가 더 오래피고 더 아름다울 떄가 있다. 우리 부모들도 느즌한 마음으로 애들의 결혼을 기대해 보는 건 어떨가? 2020년 로년세계1기
9    “부이덕”의 눈빛 댓글:  조회:567  추천:0  2021-03-01
  단편소설 “부이덕”의 눈빛 리 광 학 “눈깜쟁이, 새끼를 낳았다…” 어느 남자애의 다급한 소리에 마을 탈곡장 주변에서 놀던 코흘리개 들이 가지고 놀던 나무꼬쟁이들을 그대로 쥐고 우르르 줄을 지어 우사간 마당으로 달려갔다. 아닌게 아니라 먼 산장에서 방목을 하던 “눈깜쟁이”이라 불리우는 세살배기 암소가 새끼 송하지 한 마리를 덜컥 낳았던 것이다. 그것도 수송아지를 말이다. 사양원오령감의 입이 귀에 걸려 다물지를 못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생산대에 부림 수송아지 한 마리가 늘어났는데, 이런 경사가 또 어디에 있으랴. 집체로 농사를 짓던 지난 세월, 소는 힘든 농사일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명물이였다. 마득하면 항간에 “농사일에 아버지가 없어도 되지만 소가 없으면 안된다”는 말이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기나긴 농경사회에서의 소의 중요한 작용과 소의 부지런하고 끈끼있고 오직 인간에게 주는것밖에 모르는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한때 연길시의 중심교인 “하남다리” 량옆 입구에 위풍스러운 소의 조각상을 정중히 모시기도 했었다. 한국의 여의도 증권가에 큰 황소상이 있는데 듣는 말에 의하면 황소상의 커다란 그곳(불알)을 만지면 부자가 된다는 설에 시집가지않은 처녀들도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에 끌려 그 곳에 가면 꼭 소의 그 곳을 살살 만지고 소원을 빈다고 한다. 이렇듯 소는 힘과 부의 상징으로 받들려 왔다. 세상이 발달되여 대부분 기계로 농사를 짓고있는 지금 우리 고장에서는 소가 농사일에 밀리면서 인젠 고기소를 기르는 산업이 자리를 굳히고 있다. 하기에 소의 세계에서도 음성양쇠라고나 할가 그 제날처럼 힘꼴을 쓸수 있는 수소가 값비싼것이 아니라 모래발에서 무우를 뽑듯이 새끼를 쑥쑥 낳을 수 있는 암소가 절대적인 높은 가격과 좋은 대접을 받는다. 어미배속에서 방금 떨어진 송아지의 몸체에는 진득진득한 하얀 막과 량수물이 그대로 흘러 바닥에 펴 놓은 벼집우에 흘러 내리고 어미소는 넙적 고무신바닥같은 큰 혀를 쉴새없이 놀려 새끼소의 몸뚱이를 핧아 댄다. 새끼 송아지는 수시로 몸체를 오돌오돌 떨어대는가 하면 말똥말똥하고 부허연 빛을 내는 눈알을 굴리며 자주 씀벅이기도 한다. 사양원 오령감이 어디에서 주어왔는지 낡은 고무신 한짝을 흘러내리고 있는 암소의 태반에 달아 맨다. 고무신짝은 암소가 움직일 때마다 시계추처럼 우습게 좌우로 흔들거린다. 옆에서 이 장면을 구경하뎐 애들이 나무꼬쟁이로 낡은 고무신을 톡톡 쳐보다 오령감의 “ 아서라, 이놈들!” 하는 불호령 소리에 놀라 후닥닥 달아난다. 어미소가 한참 지극히 핧은 덕에 새끼 송아지몸체의 물기가 점차 사라져갔다. 이윽고 새끼 송아지는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죽기내기로 뻐득거린다. 그러다 끝내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는 구부정한 네 다리를 뻗치고 평형을 잡으려고 애쓰지만 아직은 몸체가 자꾸만 앞뒤로 흔들린다. 조금 지나자 제법 비틀거리며 어미 소의 젖무덤을 향해 한발한발 움직인다. 송아지가 세상을 본지 얼마나 됐다고 모든 것이 동물의 본능에 의해 진행되는 소행이라지만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참, 생명이라는 것은 보귀한것이고 위대한 것이다. 새끼 송아지는 쩝쩝 소리를 내며 어미젖을 잘도 빨고 있다. 따스한 가을 해볕에 부시시한 털이 마르기 시작하자 이윽고 송아지의 실체가 들어나기 시작한다. 송아지의 연한 털은 어미소의 짙은 누런 색갈과는 달리 조금은 보얀 색을 띠였다. 분명 애비소의 털 색갈을 닮은것이 분명하였다. 그럼, 애비소는? “눈깜쟁이” 어미소는 지난 봄에 저 멀리 황지기골이 라는 깊은 산속에 있는 방목장으로부터 생산대부역의 수요에 의하여 끌려 왔다. 소의 임신기는 아홉달반이다. 그렇다면 시간적으로 보아 애비소는 방목장에 있는것이 틀림없었다. 지난 70년초 생산대에서는 많은 소들을 벌방인 마을에서 키우기 어려운 점을 감안해 풀놀이가 좋고 공지가 넓은 타지방의 깊은 산장을 빌려 방목지를 세웠다. 그해 방목장에는 소사양 경험이있는 로인 한분과 젊은이를 짝을 무어 파견하였다. 그들은 일년사시절 인가가 없는 깊은 산속에서 외롭게 소들과 동무하며 긴 시간을 흘러 보냈다. 며칠 아니 몇달을 사람머리하나 구경못하는 때가 많고도 많았다. 늙은이는 늙었다고 치고 장가도 가지않은 젊은 사양원은 자고나면 힘이 뻗치는 지라 이성에 대한 그리움으로 미칠건만 같았다. 거기다 원체 로인이 과묵한데다 젊은이와의 너무 큰 세대차이가 있어 온 하루 일에 관한 말 이외는 오고가는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저녁이면 누워서 반도체라지오를 듣는 일과 석유등잔 밑에서 장기를 두는 재미뿐이였다. 하도 적막하고 무료한 나머지 어느 날 누가 먼저 제기하였는지 장기를 두고 이기는 쪽이 손가락을 놀려 대방의 이마를 튕기기로 하였다. 그래서 뜻하지않게 두 사람의 배꼽이 떨어질듯한 웃음판이 벌어지도 했다… 우리 고장의 새끼 송아지들은 보통 6, 7개월이면 젖을 떼고 어미와 떨어져 먼 방목장에 보내진다. 그 곳에서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생활을 마치고 세살이 차면 다시 벌방으로 돌아와 멍지를 메게 된다. 방목장에서는 소들을 더 살찌우고 잘 관리하기 위해 암송아지들과 수송아지들을 따로 “두 개 반”으로 격리시켜 사양하였다. 송아지들의 성장은 비교적 빨라 암송아지들은 세살에 가까우면 새끼를 밸 수 있었고 빠른 수송아지들은 한살반이 넘으면 제법 숫놈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당시 방목장에는 세살에 가까운 수송아지들이 여러 마리 있었다. “못된 송아지 엉뎅이부터 뿔이 난다” 더니 수송아지들 가운데 어느 놈이 사양원들 몰래 “눈깜쟁이” 암소와 눈이 딱 맞아 자유련애 끝에 행운스럽게 덜컥 새끼를 뱄던것이다. 이는 동물의 원초적인 욕망과 종족보존을 위한 자유스럽고 용맹한 행위로 이루어진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집체화시기에 사람들의 욕심과 의지에 의해 소들의 자유번식은 금물이였다. 생산대마다 우량종소를 받아내기 위해 한, 두 마리의 몸체가 크고 색갈이 좋고 튼튼한 종자소를 선택했기에 그 소들만 “사랑”을 할 수 있고 후대를 남길 수 있는 자격과 행운이 주어졌다. 다른 많은 수소들은 그 곳을 거세하지는 않았지만 억울하게도 본능에 의한 씨를 남길 자유나 기회가 박탈 당한채 공손하게 한생을 머리만 숙이고 멍지를 끌어야 할 “복”만 주어졌었다. “눈깜쟁”이 새끼는 탈없이 잘도 컸다. 원체 어미、애비소가 젊고 건강하고 거기다 가장 적절한 기회를 포착해 왕성한 기를 타고 태여나서인지 석달을 훌쩍 넘긴 수송아지는 제법 “음메, 음메”하는 소리를 지르며 재롱을 부리는가하면 어미소가 수레를 끌때면 요리조리 수레바퀴를 피해 바싹따라 못다니는 데가 없게 되였다. 색갈도 황소의 일반적인 누런색과는 달리 유달리 부연색을 띠였는지라 사양원은 “부이덕”이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다. 소에게 이름을 지어부르는 것은 집체화때의 류행이라면 류행이였다. 소에게 이름을 지어 부르게 된것은 소사용시의 편리한 점을 고려한것도 있었겠지만 더 중요한 리유중의 하나가 바로 소도 생산대의 고정자산명세에 빠짐없이 기입되여야 하기 때문이였다. 하기에 그때는 생산대의 어느 소에게나 다 이름을 붙여 “호적”에 올렸다. 소의 모양새를 따라 “물레뿔이요, 쓰깔이요, 얼룩이요”, 소의 성질에 따라 “순돌이요, 암소 오라비요, 쌉쌀개요”라고 불렀고 때론 거북하게 사람의 이름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 60년대말 박주장이 모처럼 사업시찰로 아래 마을로 내려왔다. 박주장은 시찰을 내려오며 그 촌의 생산을 부축하고 지지하는 의미에서 감지덕지하게 생산대에 좋은 수소 한 마리를 척 선사하였다. 생산대에서는 부림소 한마리가 공짜로 늘어남으로 하여 기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런데 그후 소의 이름을 가지고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며칠후 한 사원이 처음으로 박주장이 선물한 소를 부릴려고 우사간에 들어갔다. 사양원이 소를 가리키며 어망결에 박주장의 이름석자를 그대로 부르며 “박성남을 부리오” 하고 크게 소리쳤다. 그 이 후로 소의 이름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통해 옮겨져 마을의 코흘리개들 까지도 그 소만보면 “박성남”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입에 슴배여 소를 부르는데는 별다른 거부감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개별적인 일꾼들은 소를 부리며 일축을 내기 위해 채찍으로 후려치며 입으로는 “박성남”이라고 줄욕을 퍼붓자 듣는 사람이 너무 거북스럽고 민망스러웠다. “눈깜갱이”암소가 낳은 새끼 송아지는 사양원으로부터 정식으로 “부이덕” 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생산대의 고정자산에 번듯하게 등록되였다. 가을을 넘기고 추운겨울을 용케 견디고 무럭무럭 잘도자라 또래 새끼소들보다 덩치가 더 컸고 빨랐다. 때론 어미소가 먹는 여물도 제법 잘 먹어댔다. 이듬해 봄, 별탈없이 반년을 넘게 자란 “부이덕”이는 어미를 떠날 림박이 다가왔다. 생산대에서는 관례대로 일꾼 두 사람을 파견하여 “부이덕”이를 포함한 다른 몇 마리 젖을 뗀 새끼 송아지들을 모아 먼 곳에 있는 방목장에 보냈다. “눈깜쟁이” 어미소는 새끼 송아지 “부이덕”이를 보내고 련며칠 여물도 잘 먹지 않고 새끼를 찾아 울어 댔다. “음메, 음메-”하는 소리가 너무도 처량하여 사양원도 며칠 밤잠을 설쳤다. 그로부터 시간은 빨리도 흘러 어느덧 두해 세월이 훌쩍 지나버리고 그해 가을이 다가왔다. 생산대에서는 부림소가 모자라 보충하기 위해 소방목장으로부터 알맞춤한 예비부림 소들을 끌어왔다. 큰 소들이 멍지를 비웠으니 작은 송아지들이 그 뒤를 이어 멍지를 멜 판이다. 도합 다섯 마리의 수송아지들과 암송아지들이 부림소로 끌려왔다. 그중에 “부이덕” 이도 있었다. 세살을 잡은 “부이덕”이는 이젠 송아지의 티를 거이 다 벗어 있었다. 름름한 키꼴에 빽빽히 들어박힌 누렇고 보얀 털은 윤기가 번지르르 돌았고 커다란 두 눈빛은 정기가 차넘쳤고 곤두뿌리를 쳐들고 겉는 모습 또한 다 성숙된 소답게 힘있어 보였다. 다만 옥에 티라고 할가 다리가 여느 소들에 비해 조금은 짧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였다. 하지만 부림소로치면 아무 탈도 아니였다. 매번 다 큰 송아지들이 부림소로 되자면 넘겨야 할 첫 고비는 바로 코를 꿰매는 일이였다. 우리 고장에서는 사양원들이 미리미리 산에 들어가 물에 잘 썩지 않고 피부나 살에 감염이 생기지 않으며 질기고 탄력있는 물푸레나무를 선택하여 껍질을 벗기고 매끈하게 다듬어 소코뚜레미를 만들어 썼다. 소코뚜레미를 꿰매는 일은 마음이 모질지 않으면 못해낸다. 소를 틀에 가두어놓고 네 각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은 다음 잘 다듬고 뾰죽하게 만든 물푸레나무가지로 소의 여린 코를 가로 찌른다. 그러면 소의 고통스러운 모진 울음소리는 물론 생생하던 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구경꾼인 아이들은 사양원이 물푸레나무가지로 코를 찌르는 순간 너무 무서워 저도 모르게 눈을 딱 감고 얼굴을 가리우며 돌아서 버린다. 이를 본 사양원이 눈을 치켜뜨며 이후 말을 잘 듣지않는 애들은 코를 꿴다고 우스깨를 하며 한수를 더 떴다. 그러자 애들은 그걸 정말로 믿고 사양원만 보면 겁을 절절내며 피해버렸다. 소는 첫날에 부려보면 소의 성미를 알 수 있다. 방목장에서 끌려온 송아지들을 대상으로 하루동안 부림 연습을 진행하였다. 성질이 급한 암소들은 멍지를 메우자 무작정 뛴다. 제일 덩치 크고 힘꼴을 쓸만한 종자소 “물레뿔 아들”로 태여난 송아지는 애비의 성미를 그대로 닮아 서인지 멍지를 목에 걸자 시끄럽다는듯 머리를 좌우로 마구 흔들며 뿌리친다. 그리고는 퉁방울같은 두 눈을 부릅뜨고 뿌리질하며 사람이 언절에 붙게 못한다. 성질이 사나운 놈이다. 이번엔 “부이덕”이에게 멍지를 씌우니 웬 일지 곰상곰상 말을 잘 듣는다. 일해먹을 놈이 틀림없었다. 며칠간의 간고한 멍지 메우기와 끌기 연습을 거쳐 송아지들은 얼마간 길들여졌다. 사나운 “물레뿔 아들”은 제외되고 말 잘 들어 부리기 쉬운 “부이덕”이는 탈곡장 닦기에 선발되였다. 목에 멍지를 메고 무거운 석마돌을 굴리며 일꾼이 이끄는 대로 돌고돌며 탈곡장을 누빈다. “부이덕”소가 고분고분 말 잘 듣고 부리기 쉽다는 소문이 동네에 쫙 퍼졌다. 사람이 모인 군체에 늘 상중하가 있듯이 부림소 군체에도 대개 세개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부리기 힘든 소, 부릴만한 소, 부리기 쉬운 소로 나뉜다. 부리기 힘든 소들은 일반적으로 성질이 사납고 괴벽하여 일반 일꾼들은 다루기가 힘들어 꺼려한다. 부릴만한 소들은 성질은 그리 사납지는 않지만 소가 너무 느리거나 힘꼴이 수수한 소들인지라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꺼려한다. 부리기 쉬운 소들은 성질이 온순하고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힘꼴이 괜찮은 소들이다. “부이덕”은 세번째 부류에 속하여 생산대의 사원들이 소를 쓸 일이 나지면 너도나도 앞다투어 부리는 소가 되였다. 늙은이와 녀성들, 지어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 남자애들도 마을의 공급판매합작사거나 정미소를 갈일이 있으면 서슴치않고 “부이덕”이를 골라잡았다. 다른 소들이 갈 수 있고 가야 할 곳도 “부이덕”이 몫으로 돌아왔다. 일년 365일 쉬는 날이 없는 소가 바로 “부이덕”이였다. 다행히 부역을 많이하는 소들치고 여물을 잘 먹고 변덕 없는 소인지라 별탈없이 그럭저럭 잘 넘겼다. 이듬해 밭갈이철이 돌아왔다. 그해는 논갈이를 정액제를 하기로 정하였다. 마을에서 “참새에게 굴레를 씌운다”는 지나치게 약빠르고 꾀가 많은 한 일꾼이 처음으로 밭갈이에 나서는 “부이덕”이를 골라잡았다. 밭갈이를 시작해서 3일째되던날 사양원이 “부이덕”이에게 여물을 담아주다 소의 목이 크게 부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양원이 손으로 만지자 순하던 소가 머리를 마구 저어댔다. 소의 궁둥이를 살펴보니 피자욱이 너덜너덜했다. 사양원은 대뜸 파악이갔다. 꾀가 많은 일꾼이 공수를 많이 벌기 위해 채찍끝에 뾰죽하고 예리한 작은 쇠줄오리를 달아매고 모질게 소를 후려쳤던 것이다. 얼마나 소를 괴롭혔으면 여물도 잘 먹지 않겠는가. 사양원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호되게 그 일꾼을 질책하고 수의사를 청해 소의 목을 치료했다. 너무 심하게 부려 “목이 넘어간” 소를 계속부리면 망치게 되기에 사양원은 “부이덕”을 며칠 쉬게 하고 다른 소를 밭갈이에 내보냈다. “부이덕”은 목을 상한 “덕”에 며칠간 쉴 수 있게 되였다. 어느 해 “부이덕”이는 탈곡한 벼를 박아실은 공량수레를 끌고 현 량식창고에 가게 되였다. 벼를 다 바치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일꾼들은 현성의 작은 식당에 들려 식사를 하게 되였다. 그때는 누구나 공량바치는 일에 나서기를 좋아했다. 그것은 공량 바치러 가는 기회에 현성식당에 들려 술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매 일꾼에게 30전의 화식보조가 차례졌기에 여러 일꾼들의 돈을 합쳐 함께하면 한때는 떼울 수 있고 설사 먹은 금액이 초과되였다 하더라도 평균으로 부담하고 개인 왕래장부에 기입하고 년말결산 때 개인수입에서 잘라내면 되는것이다. 가난하고 힘든 세월에 그렇게라도 먼저 먹고 즐기기를 모두가 선호하였다. 그날 늦은 점심인지라 빈속에 술이 들어가자 모두가 인차 거나하게 되였다. 일꾼들은 뒤늦게야 술판을 깨고 트림을 하며 수레에 올랐다. 그날도 “부이덕”이 끌고 가는 수레를 맨 앞에 세우고 그 뒤를 이어 수레들이 한일자로 줄을 지어 길을 떠났다. 날씨가 춥고 모두가 술을 마신 뒤라 공량마대를 쓰고 수레에 앉았다. 넓은 신작로에는 가물에 콩씨나듯 자동차가 어쩌다가 한대씩 지나갔다. 하기에 몰이꾼은 소수레를 오른쪽에 세우고 앞에 있는 수레를 따라 가면 되는 판이다. 현성식당에서 떠난지 얼마나 되였을가 앞에선 일꾼이 찬바람을 맞아서인지 울컥하고 속이 치밀어 올랐다. 불시에 머리를 숙여 연신 토하다가 “억-”하는 소리를 지르며 그만 수레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수레가 당금 일꾼의 몸을 깔며 지날 아슬한 판국에 “부이덕”이 멈춰섰다. 뒤를 따르던 수레들도 멈춰섰다. 일꾼들이 하나둘 수레에서 내려 앞차에 다가왔다. 모두들 “부이덕”의 거동에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소를 어찌 말못하는 아둔한 짐승이라고만 보겠는가. 그런데 인간들은 세상을 살면서 지금도 어리석고 아둔한 사람을 늘 소에 비해 야비하게 비웃거나 멸시한다. 기실 어리석고 아둔한 짓은 인간들이 하면서 말이다. 공량바치러 갔던 그 일이 썩 지난 몇 해후, 공사에서는 전 공사범위 내에서 우량종소평의 대회가 있었다. 생산대에서는 “물레뿔 아들”을 선택하여 우량종소평의 대회에 보내려고 하였다. “물레뿔 아들”은 몇 년간의 시간을 거쳐 몰라보게 변했다. 키도 전에 비해 컸고 몸뚱이도 살쪄 름름한 자태가 위풍있어 보였다. 성질이 사납고 우락하고 까탈스러운 덕분에 부역을 적게 다니고 놀고 먹기만 해서인지 다른 소들보다 누런 털도 유난히 반지르르 하여 보기가 좋았다. 몇 해 동안 종목소로 선정되여 여러번 후대를 남기는 작업에 투입되여 “사랑”을 해보는 행운을 가져 보기도 했었다. 사양원은 평의 선발전을 위하여 매일 소의 털을 다듬고 쓸고 지어 엉뎅이에 누릉지처럼 말라붙은 소똥도 물을 쳐서는 뜯어냈다. 먹이도 그 시절에 사람도 자주 먹을 수 없는 찰떡이며 두부며 좋다는것은 다 먹이며 부산을 피웠다. 드디여 우량종소평의 대회가 열리였다. “물레뿔 아들”의 허리에는 붉은 띠를 보기좋게 두르고 목에는 구리로 만든 방울을 달아 놓아 걸을 때마다 왈랑절랑 절주있게 소리를 냈다. 그번 평의에서 “물레뿔 아들”은 공사내의 모든 우량종소들을 져치고 제일 우수한 우량종소로 평의를 받았다. 장금은 생산대에도 주어지고 사양원들에게도 차례졌다. 만약 그번 평의를 우량종소의 선발이 아니라 부역을 제일 잘 하고 많이한 소를 평의 한다면 당연히 “부이덕”이였을 것이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평의는 없었다. 사실 그때 소를 기르는 목적은 농사일을 하기 위해서인데 말이다. 소가 멍지를 잘 끌면 되지 소의 색갈이 검으면 어떻고 얼룩이면 어떻고 눈이 작으면 어떤가? 소에게 생산대의 사원들처럼 일을 하면 공수을 기입해 준다고 하자, 그러면 여지껏 부역을 한것을 합치면 그 가치가 얼마나 되겠는가. 매일 부역에 시달리는 “부이덕”은 세월이 가면서 다른 소들보다 더 빠르게 늙어갔다. 예전처럼 그렇게 름름하지도 않고 털도 윤기를 잃어가며 푸실푸실하게 변해갔다. 가까운 곳에 멍지를 메고 가면서도 인츰 코에 땀이 송골송골 돋으며 몹시 힘들어 했다. 이듬해 봄, 새풀이 돋아 오르기 시작하자 더 멍지를 멜수 없게된 “부이덕”은 사양원의 제의에 의하여 부역을 그만두고 먼 방목장에 보내졌다. 방목장에 보내진 “부이덕”은 더는 사람들의 시달림을 받지않고 자유로운 나날을 보냈다. 애어린 송아지떼들 속에 그것도 여린 암소들 무리에 늙은 소 한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새김질하는 모습이 유표하게 안겨왔다. 공기 좋고 풀놀이가 좋고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인지 늙은 소이였지만 몇 달을 넘기자 제법 또 다시 살이 오르기 시작하고 부연털이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부이덕”은 자기가 여지껏 부역에 나가서 사람들을 위해 일을 했으니 지금은 그에 따른 보상을 받고 있는거라 고맙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여지껏 점잖고 순하기만 하던 “부이덕”은 머리를 쳐들고 코를 실룩거리다 입에 거품같은 침을 흘리며 어린 암소들의 뒤를 어슬렁어슬렁 쫓아다니며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고개를 높이 쳐들고 “워-어엉…”을 반복하며 숨이 넘어가는듯한 거칠고 둑한 소리를 질러댄다. 그 바람에 얌전하게 풀을 뜯고있던 암송아지들이 후뚤 놀라며 멀리 달아난다. 이런 일이 시도때도없이 일어나자 암소들이 싱숭생숭 해지며 시름놓고 풀을 뜯을 수 없었다. 뒤늦게야 이 광경을 젊은 사양원이 발견하였다. 말못하는 짐승들에게 고유한 본능적인 이성지간의 피치못할 행위임에도 사양원의 가슴속의 그 무엇을 야기시켰는지 별스레 사양원이 격해졌다. “이 빌어먹을 소새끼, 늙어빠졌다고 암소무리에 두었더니 늙따리소가 웬, 쌍지랄이야!” 젊은 사양원은 사정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부이덕”은 멋도 모르고 사양원의 채찍에 어디라 없이 호되게 얻어맞았다. 한참 소를 채찍질하던 사양원이 제풀에 맥이 지나자 격하게 소고삐를 끌고 왼쪽켠으로 갔다. 비록 그날, “부이덕”은 젊은 사양원에게 실컷 물매를 맞고 암송아지들과 “사랑”를 이루는 성스러운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부이덕”의 생애에서 이성지간의 가장 가까웠고 자유스럽고 소중한 순간이 바로 암송아지들 무리속에서의 즐거운 생활이였다. 그일 후로 “부이덕”이는 암송아지무리에서 축출되여 수송아지 무리속에 버려졌다. 생면부지의 “부이덕”이를 발견하자 젊은 수송아지들은 씩-씩 코를 실룩거리며 다가선다. 이윽고 상대가 맥없는 늙은 소임을 판단하고 눈을 희번뜩거리며 부릅뜨고 앞발로 땅을 파헤치며 공격태세를 취한다. 젊은 수송아지들은 잠간사이에 사나운 소리를 지르며 “부이덕”을 밀쳐 낸다. 이에 겁을 집어먹은 “부이덕”은 비뚱거리며 구석 쪽으로 피해 달아난다. 젊은 수송아지들은 심심하면 아무리유없이 “부이덕”이를 쫓아다며 괴롭힌다. 수송아지들 속에서 “부이덕”은 왕따를 당해 항상 무리들 맨 뒤쪽에 떨어져 외로이 풀을 뜯었다. 그해 8월 추석이 다가 왔다. “부이덕”은 사람들에 의하여 다시 하번 마을로 끌려왔다. “부이덕”을 다시 부리자는것도 아니고 다른 곳에 팔아넘기자는 것도 아니였다. “부이덕”은 올 추석, 사람들의 식탁과 제사상의 수요에 의하여 마지막 피와 살점을 바치기 위해서였다. “부이덕”이 마을 뒤에 있는 강변으로 끌려 가던날, 가을 날씨는 맑고 하늘은 푸르렀다. 누렇게 무르익은 논판은 가을의 정경을 더 짙게 했다. 날씨가 차지며 강물은 류달리 맑아져 물밑에 있는 작은 돌들까지 환히 들여다보였고 물 우에는 잠자리 몇 마리가 꼬리를 흔들거리며 날아옌다. 원체 성미가 온순한 “부이덕”은 영문을 모르는 채 터벅터벅 사람이 이끄는 대로 공손히 따라갔다. 강기슭에 닿자 일꾼 몇이 소의 네 다리목을 꽁꽁 묶고 담이 큰 한 일꾼이 “부이덕”의 뿔 아래쪽의 앞이마를 겨냥하고 큰 메를 휘둘렀다. “텅”소리와 함께 소가 움찔한다. 또 다시 “텅”하는 소리가 나자 무방비 상태에서 불이의 타격을 받은 “부이덕” 은 비칠거리다 옆으로 쓰러진다. 그리고 네 다리를 부르르 떨며 경련을 일으키고 툭 튀여 오른 커다란 맑은 두 눈은 오돌오돌 떨며 눈물이 가랑가랑 어리다가 주르륵 흐른다. 조금 지나 의혹과 원망에 찬듯한 “부이덕”의 눈빛이 부였게 흐려지며 점차 빛을 잃어갔다.    
8    [수필] 우긋한 사랑 댓글:  조회:754  추천:0  2013-12-27
키(簸箕)는 강변이나 습한 버들방천에서 곁다리가 없이 쭉 빠지고 알쭌한 버들가지들만 골라 파란 껍질을 바르고 튼다. 키의 결은 앞은 넓고 평평하고 뒤는 좁고 우긋하게 생긴 농구이다. 키는 지나온 농경사회에서 농사군들이 즐겨 썼던 전통농구중의 하나였다. 키는 일년동안 땀을 흘리며 수확한 농작물을 모으고 담는 작업과 곡식따위를 까불러 쭉정이나 티끌을 걸러내는 일에 제격이였다. 농사일에 한족들은 광주리(框子)를 즐겨 사용했고 우리 민족은 키를 즐겨 사용했었다. 키는 이렇듯 농군들에게 자못 중요했지만 집집이 다 갖추고 사는것은 아니였다. 서로 빌려쓰고 빌려주며 농가의 소통과 인맥을 돈독히 했다. 키는 농사일외에 또 다른 일에도 사용했다. 지난 세월, 우리 마을에서는 미신을 믿어 그랬는지 아니면 아이한테 자극이나 벌을 주려고 그랬는지 어느 집 애가 오줌을 가릴 나이가 되였지만 밤에 하얀 이불에 보기 싫게《지도》를 그리면 부모들은 애의 볼기짝을 가볍게 때리고는 키를 머리에 씌워 동네집으로 소금 빌러 다니게 했다. 농사군인 아버지는 키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새 키를 사면 키를 사용하기전에 꼭 키의 웃모서리를 두꺼운 천쪼박이나 혹은 가죽으로 감싸고 마대를 깁는 코바늘에 삼으로 꼰 가느다란 실을 꿰여 한뜸한뜸 꿰맸다. 아버지의 터실터실한 손이 닿은 정성이 슴배여서인지 우리 집에서 사용했던 키들은 앞부분이 닳아떨어질 때까지 사용했다. 키는 어머니가 주로 사용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키를 떠올리면 약소한 체구에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이것저것 키에 담아 부지런히 키질하며 다듬어내던 어머니의 그 아련한 모습이 잔잔히 안겨온다. 모든게 부족하고 귀하여 가증스러웠던 지난 세월이였기에 어머니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란 거의 없었고 또 그 고달픔속에서 어머니는 키에 무엇이든 담고 키질하며 다듬는 일솜씨를 잘 익혀왔었다. 어머니의 키질하는 능숙한 솜씨는 가히 수준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아무리 어지러운 곡식도 어머니가 키를 두손에 잡고 아래우로 절주 있게 흔들면 휙휙 바람소리와 더불어 묘하게도 잡것은 키의 앞부분의 넓은 곳으로 대부분 슬슬 밀려나가고 영근 낟알은 뒤부분의 우긋한 곳으로 곰실곰실 신나게 밀려들었다. 어느해인가 어머니는 논에서 다 여문 돌피이삭을 모았는데 마대에 차고넘쳤다. 어머니는 그것을 가마에 넣어 푹 쪄낸후 마당에 널어놓고 싸리꼬챙이로 돌피이삭을 톡톡 치니 용케도 줄기에서 돌피알들만 똑똑 떨어졌다. 돌피알들을 해볕에 며칠 잘 말리우니 제법 한주머니의 《겉곡식》이 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적은 수량이라 서뿔리 정미소에 갈수 없어 한나절이나 절구에 찧고 키에 담아 부지런히 까불러 겉겨를 버리고 우긋한 곳으로 밀려온 먹음직하고 알쭌한 돌피쌀만 골라냈다. 그해 우리 형제들은 돌피쌀로 배고픔을 달래며 어려운 고비를 넘길수 있었다. 어쩜 어머니는 한생을 키를 잡고 삶을 터득하신것 같다. 지지리 가난하고 힘든 세월임에도 늘 지나친 욕심과 자질구레한 근심걱정들을 훌훌 키질하여 털어버리고 우긋한 곳으로 느릿느릿 밀려오는 주어진 삶에 만족하시며 불평 없이 평범하게 한생을 보내셨다. 헌데 세월이 흐르며 어머니 삶의 로련한 키질에도 털어버릴수 없는것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바로 자식들에 대한 근심걱정이였다. 내 나이 지천명을 넘겼지만 매양 날이 어두워지면 하염없이 창문밖을 내다보시며 근심어린 얼굴로 퇴근하는 아들을 기다리셨다. 근심할 필요가 없다고 늘 말했지만 들을념도 안했다. 어머니의 년세면 이젠 마음속의 잡다한 물건들을 키질하여 쓱쓱 날려버리고 편안한 삶을 즐길 때인데 말이다. 그때는 도무지 리해되지 않아 내가 늙으면 절대 어머니처럼 자식들에 대해 근심걱정하지 않으리라 속다짐을 했었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는 근심걱정을 다 버리시고 하늘나라에 가시고 이제 내 자식들도 커서 사회인으로 되였다. 품안에서 나가고 눈에서 멀어져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속절없이 자식들에 대한 근심걱정이 끊임없이 밀려오는것은 웬 일일가? 곁에 둔 자식은 곁에 둔 리유때문에, 멀리 가있는 자식은 멀리 가있기에 근심한다. 딸애한테서 한주일 좀 넘게 소식이 뜸하면 이런저런 엉뚱한 근심에 갑갑해나고 불편하다. 참지 못하고 딸애한테 먼저 전화하면 잘 지내고있고 쓸데없는 근심을랑 하지 말라고 짜증섞인 대답을 한다. 그러면 스스로 까닭 모를 서글픔이 밀려오기도 한다. 어머니처럼 근심걱정을 부둥켜안고 피곤하게 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어머니를 닮아가고있지 않는가?! 이러고보니 인생이란 다 그런가부다. 살다보면 자식이 쓸데없는 근심걱정을 한다고 푸념하지만 이제 제 자식을 다 키우고 우리 나이가 되면 내가 어머니를 닮아가듯이 자식들도 우리를 닮아갈것이다. 이래서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했는가? 하다면 아무리 《키질》에 능한 어머니일지라도 키앞부분의 넓은 곳으로 자식들을 한시도 밀어낼수 없었다. 언제나 가슴속의 우긋한 곳으로 짜릿하게 파고드는 자식사랑을 털어버리지 못한 어머니셨다. 이것이 바로 《키》의 우긋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리광학
7    하얀 꽃방석 댓글:  조회:981  추천:1  2013-05-24
하얀 꽃방석 안해는 시집을 오면서 하얀 꽃방석 두개를 가지고 왔다. 30여년전에는 결혼식을 앞두고 우리 민족 처녀들이 준비하는 여러가지 혼수감가운데의 하나가 바로 꽃방석이였다. 초가삼간 신혼방의 간소하고 초라한 살림살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것은 그래도 노르스름한 색상을 올린 나무농짝우에 소복이 얹은 원앙이불과 이불우에 씌운 하얀 이불보 그리고 또 이불보우에 쌍으로 가지런히 곱게 올려놓은 하얀 꽃방석이였다. 보기에는 너무 간단하고 소박한 꾸밈새였지만 신혼방으로 하여금 포근하고 안락한 감을 느끼게 하였다. 결백한 하얀색을 즐기는 우리 민족이여서인지 꽃방석 역시 거죽으로부터 속까지 모두 하얀 색을 가진 감으로 만들었다. 하얀 무명실을 골라 코바늘로 꽃을 수놓아 거죽을 만들고 속은 하얀 천과 하얀 솜을 맞춤하게 싸서 포근하고 보기 좋게 만들어져 보기에도 참 좋은 사치품이였다. 그 모양은 원형으로 된것도 있고 정방형으로 된것도 있었다. 원의 모양은 인생을 둥글게 정방형의 모양은 네변이 똑 같듯이 반듯하게 살라는 의미였을것이다. 꽃방석은 결혼식이나 혹은 웃방에 귀한 손님을 모실 때 사용되기도 하고 직장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사무용걸상에 얹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나는 안해가 선물한 하얀 꽃방석을 교직생활을 하면서 딱딱한 나무걸상에 얹어 사용하였는데 너무 편하고 따뜻하였다. 고향마을 처녀들은 시집갈 나이가 차면 거의 모두가 코바늘을 갖추고 뜨개질을 배웠다. 이는 그 당시 우리 민족 처녀들의 류행으로 되였다. 아줌마들은 처녀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처녀들의 정성어린 솜씨와 순정이 슴배인 꽃방석만 보고도 손쉽게 처녀의 손재간과 그 성품을 읽을수 있었다고 하니 뜨개솜씨야말로 처녀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니였나싶다. 우리 마을 처녀들은 늘 자그마한 보꾸레미나 가방을 챙겨가지고 다니면서 일터 휴식시간을 리용하여 뜨거운 해볕과 바람을 피해 밭머리의 우묵진 곳이나 나무그늘 또는 생산대회의실에서 회의를 진행하는 짬이나 농한기에 초가삼간의 따뜻한 아래목과 조용한 안방에 앉아 부지런히 코바늘을 날름거리며 뜨개질로 결혼식에 쓸 혼수감을 마련하였다. 마을 처녀들은 특별히 수줍음을 탔던것 같다. 처녀들은 꽃방석을 뜨면서 늘 주변 아줌마들의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거나 “총각이 누구냐?”와 같은 악의없는 놀림을 당했다. 그러면 처녀들은 쑥쓰러운 나머지 거의 모두가 눈을 흘기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그리고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얼굴에 발그스레한 홍조가 어리군 하였다. 아줌마들은 처녀들이 부끄럼을 탈수록 더 신이 나 골려주군 하였다. 그때는 웬지 수줍음을 타는 처녀가 총각들에게는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것으로 보였다. 너무 개방적이고 왈패스러운 처녀들은 총각들이 추구하는 신부감이 아니였던것 같다. 처녀들은 조용한 환경에서 꽃방석을 한코 한코 뜨며 그 시각만큼은 그 어디에 있을 오직 자기에게만 속할 백마왕자를 그려보기도 하고 아들딸 낳고 알콩달콩 살아갈 소박하고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꿈꾸었다. 또 코바늘을 붓으로 삼아 한번 먹은 마음 영원토록 변치 말자는 티없이 깨끗한 마음을 하얀 꽃방석에 새겨넣었을것이다. 그렇게 처녀들마다 결혼을 앞두고 마음을 다스리고 키워서인지 그때는 처녀총각들이 일단 가정을 이루게 되면 책임과 의무감이 강했고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 세월, 넉넉하지 못하고 째지게 가난한 환경속에서도 초심을 잃지 않고 가정의 사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곤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며 가정을 용케 영위하였다. 지난 70년대 내가 살았던 고향마을은 300여세대 인가가 살았었다. 짝을 찾고 결혼하여 새 가정을 이룬 젊은축들이 비교적 많았지만 리혼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우리 민족 처녀들이 꽃방석을 뜨며 소박하게 결혼 혼수감을 준비하던 정겨운 풍경은 우리의 시선에서 멀어져가며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결혼을 앞두고 결혼혼수감에 공 한푼 들이지 않고 돈만 있으면 하루이틀 품을 들여도 쉽게 장만할수 있는게 요즘 세월이다. 얼마전 큰 례식장에서 진행되는 결혼식에서 신랑신부를 마주 세우고 허리굽혀 맞절을 시키며 사용하는 정방형으로 만들어진 큰 꽃방석을 본적이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꽃방석은 처녀들의 정성어린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기계로 틀에 맞추어 만들어진 완성품이였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모든것을 능률과 리윤을 목적으로 하는 시장경제의 흐름속에서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활절주는 너무 빠르고 너무 거침없이 진행되고있다. 젊은이들은 치렬한 삶의 경쟁속에서 숨가쁘게 돌아치고있다. 이런 실정에서 처녀애들에게 예전처럼 안방에 앉아 따분하고 숨막히게 뜨개질이나 하라면 기절초풍할지도 모른다. 시대의 맥박이 빠르게 뛰고 하루 다르게 변해가는 환경속에서 현대인들의 사랑과 련애관 그리고 인생을 사는 가치관도 너무 빠르게 변화되는것 같다. 사랑을 위한 의무나 책임, 희생따위의 거창한 말들은 낡은 초가삼간의 뒤마당에 밀려난지도 오래된것 같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 빠르게 사랑을 하고 너무 쉽게 등을 돌리고 너무 가볍게 포기하는 일들이 비일비재로 일어나고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가하게 꽃방석을 뜨며 사랑과 혼인에 대한 마음의 다스림과 같은 일들을 반복할수는 없겠지만 세월이 아무리 변할지라도 옳바른 사랑관념과 삶의 가치관 그리고 가정과 자식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을 굳혀야 함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것이라 믿는다. 결혼식의 혼수감이였던 하얀 꽃방석에 슴배인 우리 민족의 티없이 맑고 결백한 사랑의 마음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리라.
6    떠나는 사람들과 돌아오는 사람들 댓글:  조회:1121  추천:3  2013-04-16
 떠나는 사람들과 돌아오는 사람들 리광학 추석과 국경절이 겹치면서 8일간의 련일 휴가가 주어졌다. 련휴에 먼 려행을 떠나볼가? 몇년전까지만해도 국경절 련일휴가일이면 무작정 려행을 떠났었다. 그런데 지금은 주머니사정도 있지만 웬지 나이를 먹어가면서 드바삐 시간에 매우고 쫓기우는게 싫었다. 그리고 려행사 가이드의 꼬리를 잡고 북쩍이는 인파속을 헤집으며 오리처럼 졸졸 따라 다니는 행차가 정말 짜증이 났다. 그러면… 이런저런 고민을 거듭하다 이번 련휴는 집에 눌러앉아 조용히 책을 보며 즐기기로 마음을 굳혔다. 10월에 접어 들어서인지 책을 읽는동안 바깥 기온이 차지며 온몸의 깊은 곳까지 싸늘한 기온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다행이 점심때가 다가오자 유리창문을 꿰뚫고 가을 해볕이 사선으로 비껴들어와 몸을 따스하게 덮혀주어 울적한 기분에서 풀려나울수 있었다. 널직한 창문가의 책상에 마주앉아 산란한 마음을 정리하고 외부의 간섭없이 고요한 침묵속에서 책을 읽는다는것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수 없는 즐거움과 향수였다. 한참 책속에 빠져들었는데 별안간 작은 물체 하나가 하얀 책우에 똑 떨어졌다. 호기심에 끌려 자세히 눈여게 살펴보니 떨어진 물체는 바로 붉으스레한 바탕에 동그란 검은 점들이 박힌 한마리의 예쁜 무당벌레였다. 가을날씨 때문에 창문을 꽁꽁 잠깄는데 웬 무당벌레란 말인가? 놈이 창문가의 어느 틈을 찾아 용케도 방안으로 비집고 들어온것이 분명 하였다.( 깜직한 놈!) 나는 손끝으로 무당벌레를 살짝 밀쳐 놓았다. 그러자 무당벌레는 갑자기 작은 날개를 살짝 펴고는 포르르 날아 유리창문에 찰싹 들어붙었다. 나는 몸을 돌려 무당벌레의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유리 창문쪽을 향해 마주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바깥쪽 유리창문벽쪽에서도 몇마리의 무당벌레가 부지런히 기여다니고있다. 방안쪽의 무당벌레는 반듯하고 매끄러운 유리창문벽의 여기저기를 무작정 방향없이 자유롭게 한참 기여다니다 이번에는 방향을 유리창문 모서리쪽을 향하여 기여갔다. 그리고는 모서리에 있는 비닐로 만들어진 유리고정띠를 따라 헤맸다. 놈이 분명 유리창문 그 어딘가에 있을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것이 틀림없었다. (쳇, 그럴거면 애당초 방안으로 들어 오지나 말거지) 점심때가 지나고 오후가 가까워서인지 가을 태양은 유리창문을 더 뜨겁게 달구었다. 어제밤과 오전 내내 아빠트단지정원의 잔디밭과 과일나무의 그 어디에선가 숨어 잠자고있던 무당벌레들이 기온이 오르면서 하나 둘 창문가에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유리창문벽을 덮치고 마구 기여다녔다. 그놈들도 창문가의 그 어디 인가의 틈서리를 찾는것이 틀림 없었다. 조금 지나자 한놈이 성공적으로 틈서리를 찾고 방안쪽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이윽고 또 한놈이 들어왔다. 유리창문 안쪽벽에서 기여다니는 무당벌레의 수가 늘어났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이상한것은 방금 들어온 무당벌레들도 맨 처음 들어온 무당벌레처럼 다시 창밖으로 기여나가려고 허둥댔다. 투명한 유리창문벽을 사이두고 들어 오려는자와 나가려는 자들의 움직임이 한창 바삐 진행 되고있었다. 한참 흥미진지하게 무당벌레들의 거동을 지켜보다가 어쩌면 개혁개방으로 국문이 열리며 우리 민족들이 꿈과 희망을 찾아 지구촌 그 어느곳이 든 두려움없이 드나드는 정경이 눈앞에 또렷이 안겨온다. 연길공항이다. 매알마다 떠나는 사람들과 돌아오는 사람들로 시끌벅적 이였다. 검문대남쪽에 선 사람들은 다시는 기시받고 고달프고 힘든 그 곳으로는 발길조차 돌리지 않겠다고 열백번 속다짐을 하며 애끓는 마음을 달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다. 돈을 벌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면 종자돈으로 다른 삶의 타산이라도 있어야겠지만 열에 아홉은 속수무책으로 그럭저럭 허송세월을 보내다 또 다시 마음을 바꾸고 이국 타향으로 향하는데 검문대북쪽에 선 사람들이 바로 이런 부류들이다. 무당벌레는 결코 둔하지않은 곤충이다. 무당벌레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투명한 유리창문을 통해 바깥세계와는 완연히 다른 방안의 세계를 보고 방안이야 말로 자신들이 있을만한 좋은 안신처라 착각하고 필사적으로 틈서리를 비집고 방안으로 들어 왔을지도 모른다. 허나 조금 지나 방안의 여기저기를 직접 보고는 이게 아니구나 하고 또 다시 유리창밖으로 나가는 탈출구를 찾는다. 아마 자연의 섭리에 의해서일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정이 푹 절었던 고향을 떠나 살다보면 고향도 아리숭해 질수도 있고 타향도 정이들면서 마음을 붙일수 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이국 타향에서 시간이 얼마를 흐를 지라도 거이 모든 사람들이 이방인이라는 딱지만은 벗지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야 하고 가꾸어야 하고 지켜야 할 삶의 터전은 이국 타향이 아니라 태를 묻고 뼈를 굳힌 고향땅이 아니겠는가?!
5    실이 가는데 바늘이 따른다 댓글:  조회:1199  추천:1  2013-02-28
실이 가는데 바늘이 따른다 □ 리광학   어제 한낮까지만 하여도 해볕이 쨍쨍 내리쬐며 잘해주던 날씨가 태풍 “산바”의 영향으로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이리저리 몰켜 다니며 수시로 비가 올 잡도리를 한다. 요즘 안해는 세번째로 빨간 고추를 썰어 말리우고있다. 며칠전 두번에 거쳐 말리운 고추만 하여도 집식구들이 먹을 량은 넉넉히 될것 같은데, 내가 이젠 그만두면 안되겠는가고 간곡히 말렸어도 내 말은 마이동풍으로 듣더니 “잘 됐다” 싶었다. 고추말리기에는 흐린 날씨와 비는 금물이고 적이다. 지난 이맘 때에도 련속 사흘이나 비가 내려 채 마르지 않아 물기가 즈르르한 빨간 고추를 와락와락 방안에 거두어들여 며칠간 전기담요우에 널어 말리우면서 온 집안에 풍기는 독하고 매캐한 고추냄새를 맡는 곡욕을 톡톡히 치르기도 했었다. 나와 안해는 평소 그다지 다투지 않고 큰 말썽이 없으며 그저 평온하게 지내는 편이다. 헌데 해마다 립추가 지나고 빨간 고추를 말리우는 일이 시작되면 서로 티격태격 다투기 시작한다.나는 안해가 빨간 고추를 말리우며 달달 들볶는게 시끄럽고 짜증이 나며 싫다. 안해는 평소에 늘 몸이 이곳저곳 아프고 말째여 약을 달고있다. 시도 때도 없이 병원출입도 잦은 편이다. 헌데 빨간 고추를 말리우는 시기가 다가오면 새벽부터 마당주변을 쓸고 펴고 고추를 썰어 널고 번지며 펄펄 날아다닌다. 안해가 빨간 고추를 말리우는데 열을 올리기 시작하면 곁 사람도 그 절주에 맞추어 춤을 춰야 한다. 아니 춤을 추는 흉내라도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해의 잔소리를 듣기가 일쑤였다. 안해는 어디에서 그런 열정과 에너지가 넘쳐나는지 참말로 의문스럽기도 했다. 헌데 해마다 몇주일간 빨간 고추를 말리우는 “대회전”이 끝나면지쳐서 기진맥진한 안해는 며칠간 몸살을 한다. 곁에서 하도 보기가 안스러워 그러지 말고 차라리 시장에서 햇 고추가루를 골라 사면 편하지 않겠는가고 하면 장마당에서 파는 고추가루값이 얼마고 통고추가루값이 얼마인가고 눈을 치뜬다. 그래도 고추는 자기절로 직접 고르고 자기 손으로 말리워야 깨끗하고 색상이 고운 고추가루를 얻을수 있다며 고집을 꺽지 않는다. 그러면 결국 나는 손을 들게 되고 안해의 주견대로 일이 진행된다. 언제부터인지 가정에서의 안해의 위치와 영향력은 고추 말리우는일 뿐만 아니라 집 구석구석에까지 미친다. 예전에 우리 집의 많은 일들은 가장인 내가 주견을 세우고 처리하였다. 혹시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 안해가 두말 하면 나는 자존심을 세우고 언성을 높이며 그대로 밀고 나갔다. 결과 안해는 “바늘이 가는데 실이 따른다”는 식으로 수긍하고 뒤따랐다. 이러한 가정의 일상 흐름은 몇해간 지속적으로 습관되여 왔다. 솔직히 어떤 일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일들이 내가 주장했던것처럼 모두가 정확하고 옳게 처사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누군가 50대가 쉭~ 다가오면 남편들은 많은 일들에서 자신들의 주견을 보류하고 “최전방” 으로부터 점차 물러서서 안해들의 말을 고분고분 따른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실상 우리 집도 례외가 아닌것 같다. 세월이 흘러 무릎아래 자식들도 사회인이 되고 지천명의 나이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감에 따라 나는 자연히 기를 낮추게 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리게 된다. 따라서 가정의 많은 일들도 안해가 주관하고 처리한다. 친척들간의 이런저런 래왕이나 일상 일들은 안해가 알아서 나서주고 대신해주니 나는 참 편하다. 인심이 헤퍼서인지 때론 친구들의 생일도 잊을 때가 많은데 그때면 안해가 용케 기억하고 챙겨주기도 한다. 물론 가정에서 남자의 체면을 세우느라고 남편들이 집안 대소사를 좌지우지하는것은 지금도 가부장적인 오랜 관습으로 남아있지만 때론 안해의 말을 고분고분 따라주는것이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지켜가는 가치있는 삶이라면 나는 속편하고 가슴 뿌듯하며 행복하다. 실이 바늘을 따르든지 바늘이 실을 따르든지 가정의 평화나 안정만 잘 유지된다면 남편들의 자존심과 체면따위가 뭘 필요하겠는가. 더구나 요즘 30여년의 개혁개방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시대도 변해가고있고 사회의 세포인 가정의 구조나 성원들 간의 역할도 달라지고있는것이 오늘의 현실인데야. 이젠 빨간 고추 말리기도 남성들의 한몫이다. 하늘에서 후둑후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를 어서 빨리 거두어들여야 한다. 안해는 마당으로 총알같이 뛰쳐 나간다. 나도 다급히 꿍쳐두었던 전기담요를 찾아 방바닥에 펴고 전원을 련결한다. 그리고는 다급히 안해를 따라 나선다. 실이 가는데 바늘이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4    사라져버린 이색풍경 댓글:  조회:1117  추천:1  2013-01-25
사라져버린 이색풍경 리광학 찌는듯한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음력 8월이 다가오면 아침저녁으로 날씨는 신선해지며 하늘은 맑고 높아진다. 지난 세기 70년대, 이맘때가 되면 고향마을에서는 탈곡장을 닦는 작업을 다그치고 추석바심이를 서두른다. 탈곡장터는 일반적으로 마을이나 툰 변두리의 공지를 선책한다. 농민들은 탈곡장터의 농작물을 거두어 내고 보습으로 땅을 엷게 갈아번진다. 그리고 골고루 써레질을 한다. 써레질작업이 끝나면 소에게 석마돌을 메워 땅을 다진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마돌은 원기둥이나 량옆 직경이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원을 향하여 굴리는 석마돌의 한쪽 직경이 다른 한쪽 직경보다 작으면 원심력의 원리에 의하여 소가 적은 힘을 들이고 일축을 낼수 있다. 여기에 우리 조상들의 생산실천가운데서 터득해낸 지혜가 숨어있다. 땅이 다져지면 그우에 촉촉하게 물을 뿌리고 묵은 북데기를 골고루 펴고 또다시 석마돌을 굴린다. 석마돌을 굴리는 일이 끝나면 터갈라진 틈서리나 작은 홈채기를 메우기 위해 우사의 소똥을 실어다 붓고 또 물매질을 한다. 다 마무리된 탈곡장은 떡판처럼 반듯하고 운동장처럼 넓고 시원하다. 가을 백노가 지나면 농민들은 벼가 잘 영글고 배수가 잘되는 논뙈기를 골라 바심한다. 추석명절을 앞두고 탈곡장에서 벌어지는 소고기 나눔새는 너무나 이색적이다.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이 사냥을 한 수렵물을 나누듯이 소를 잡아 소가죽을 벗기고는 그 우에 고기와 내장 그리고 뼈를 골고루 섞어 인구에 따라 몫을 나누고 호를 단위로 무지를 만들어놓고 매 세대주의 이름자를 종이에 척 박아 표시를 해놓는다. 그러면 분배때문에 의견을 제기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제날 고기붙이가 너무나 드물었고 항상 제한된 식량으로 쪼들리게 생활하여 왔던 우리들에게는 추석날 먹는 소고기에 백옥같은 햇이밥이 천하별미였고 그 순간만큼은 모든게 부러울게 없이 행복하였다. 날씨가 점점 차져 개울가의 물들이 살어름이 지기 시작하면 고향 마을은 본격적으로 가을싣걱질과 탈곡에 들어간다. 탈곡장은 모든 농작물들의 집합 장소였다. 농민들이 봄에 힘들게 논이나 밭에 씨를 뿌린 모든 농작물의 결실은 고스란히 탈곡장에 모인다. 실어들이고 털어내고 저장하고 남기고 나누어주는 모든 작업들이 흐름식으로 진행되여 로력이 가장 많이 집중된 곳이 탈곡장이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기에 일을 하다 휴식시간이 되면 농민들은 집체로 정치학습이나 비판토론회 혹은 생산대 가을 분배와같은 일반회의를 벌릴 때도 있었다. 회의가 열리지 않을 때는 모여앉아 인생살이도 담론하고 때론 누군가 걸죽한 잡담을 늘여 놓아 탈곡장이 떠나갈듯한 웃음판으로 번져 지기도 하였다. 탈곡장은 농민들의 애환이 서렸던 곳이기도 하였다. 지겹게 어렵던 그 시절 아무리 힘들게 농사를 지어도 량식고생을 하는 군체가 바로 농민들이였다. 매년 탈곡이 시작되면 공작대가 내려와 나라와 집체, 개인의 3자 관계를 정확히 처리하여야 한다며 모든 농작물을 하나하나 체크해가며 철같은 원칙을 제기하고 누구든 그를 어기면 엄하게 다스렸다. 심지어 감자나 고구마도 30%를 곡물로 환산하여 농민들에게 지급하였다. 우리 고장은 나라의 공구량임무를 완성하면 인당 벼 450근이 차려졌다. 터밭에서 나는 남새외에 기타 농산물이 거의 없었던 그때는 그 량식표준 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여 농호 대분분이 량식고생으로 몸살을 앓았었다. 커가는 아이들, 특히 남자애들이 여럿인 가정들에서는 하는수 없이 입쌀을 시내에 지고 가 수량이 많은 옥수와 같은 잡곡을 바꾸어 먹기도 하였다. 당시 청년들은 밤탈곡을 유난히 좋아했다. 왜내하면 밤탈곡을 하면 생산대에서 지급하는 일인당 3량의 보조량과 기름이 조금 들어간 반찬이나 국물을 얻어먹을수 있었기때문이였다. 한번은 탈곡장에 감자를 실어들이고 아줌마들이 크기에 따라 분류하였다. 작업하다 보습날이나 호미날에 상한 감자들을 돼지먹이에 처넣기가 너무 아까와 담이 크게 슬그머니 탈곡장 변두에 있는 집체양돈장의 돼지죽가마에 삶았다. 때마침 어느 농가에서 가을배추김치를 버무리였다. 예로부터 삶은 감자와 김치는 찰떡궁합이였다. 하여 그날 탈곡에 참가했던 사원들은 휴식시간에 삶은 감자를 놓고 갑작스러운 “파티”를 열어 마음껏 즐기였다. 그후 “감자파티”에 참석했던 사원들이 누구나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에 그런대로 아무 탈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탈곡장은 마을 청년들의 활동장소였고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하였다. 탈곡장이 닦아지면 그 시기에만 있었던 여러 항목의 민병훈련이 진행되였고 아이들은 뽈을 차고 여러가지 재미있는 유희를 즐기였다. 어린시절 하학하면 몸 먼저 마음이 가닿는 곳이 탈곡장이였다. 책가방을 둘러메고 탈곡장에 들려 책가방 두개를 탈곡장의 변두리에 척하니 놓고 축구장의 꼴문대를 만든다. 편을 갈라 축구를 시작하면 서쪽하늘에 해가 지여 공이 보이지 않을 때에야 아쉬운대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제날 학교 축구팀의 대원들이나 이름을 날린 축구선수들은 거의 다 탈곡장에서 뽈을 익히고 뽈을 차던 “뽈개지”들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탈곡이 끝나고 마당의 곡식들이 다 거둬들이면 남는건 여러가지 북데기나 콩깍지들이다. 그러면 탈곡장은 집돼지들이 먹이를 찾아 모여드는 “동물농장”이 되였다. 보이지 않는 집돼지들은 탈곡장에 나가보면 십중팔구는 찾을수 있었다. 돼지를 찾아 탈곡장에 들어서면 돼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눈길을 북데기무지에 박고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저기에 하얀 서리가 끼여있고 연한 김이 살살 피여오르는 곳이 있다. 집돼지들이 길다란 주둥이를 북데기무지에 들이박고 정신없이 뒤번지며 “노다지”를 캐다 북데기속에서 그대로 잠이들어버린것이다. 돼지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면 당연히 돼지똥들이 널려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탈곡장엔 돼지똥이 별반 보이지 않는다. 매년 겨울만 돌아오면 학교에서 소학생들에게 비료모으기 임무를 준다. 어릴적 나도 비료모으기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작은 발구를 끌고 손을 홀~홀~ 불며 마을 골목길이나 여기저기 널려있는 공지를 누비며 돼지똥이나 개똥을 찾아 다녔다. 그중에서도 애들이 가장 많이 다녔던 곳이 바로 탈곡장이였다. 탈곡장에 가면 돼지똥들이 많이 널려있어 어렵지 않게 작은 발구를 채울수 있었다… 탈곡장을 둘러싸고 돌아가던 농촌에 어느해부터 인가 변화가 일기 시작 하였다. 호를 단위로한 호도거리가 시작되자 운동장과같은 큰 탈곡장은 무용지물이 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농촌산업구조가 변화하면서 고향에서는 벼농사마저 그만 두게 되였다. 탈곡장터에는 한집, 두집 기와 집들이 즐을 지어 일어서게 되였다. 요즘 고향 마을에는 또 거세찬 개발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마을 복판에 60메터 너비를 가진 아스팔트길이 동서로 아득히 뻗어나갔고 탈곡장터의 단층집들은 파가이주되고 그 자리엔 현대식고급아빠트가 그 높이를 자랑하며 하늘을 차고 일어서고있다. 예전의 탈곡장터의 흔적은 오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농민들의 삶의 터전이였고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슴배였던 곳이며 탈곡기가 윙윙 돌아가고 벼단이 춤을 추며 누런 낟알을 털어내며 들끓었던 탈곡장의 이색풍경은 서서히 력사의 뒤안길로 멀어져가고 말았다. 다만 아직 우리 세대의 추억속에 그 이색풍경이 살아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웬지 오늘따라 다시한번 추억의 끝자락을 붙잡고 흘러가버린 이색풍경에 푹 빠지고싶다.  
3    인생도 새끼꼬기이다 댓글:  조회:1216  추천:1  2012-12-18
인생도 새끼꼬기이다 리 광 학 1 시골 마을에서 흔하디흔하게 보는 새끼는 보기에는 싯누렇고 터실터실 하고 거칠어 보잘것 없는것이였지만 기나긴 농경사회를 살아온 우리 민족 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명물이였다. 겨우내 눈과 얼름밑에서 잠을 자던 땅이 기지개를 켜고 숨을 쉬듯 한껏 부풀어오르는 봄이 오면 터밭을 갈아번지고 터밭에 울바자를 치는것으로 몸맞이를 시작한다. 나무나 수수대를 겯고 거기에 긴 나무가지를 골라 띠를 두르는 작업에 새끼가 없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초가집 이영에 벼짚단을 골고루 펴고 새끼로 뜬 그물을 덮어야 한다. 또 닭들이 알을 낳을수 있도록 새끼로 닭등우리를 틀어주어야 한다. 분망한 봄이 가고 터밭에 심은 남새들이 우썩우썩 소리내며 자라는 여름이 오면 줄기가 길게 자라는 식물들엔 순을 주어야 한다. 순을 주는데도 새끼는 필수품이다. 오곡이 결실을 맺는 가을이 돌아와 곡식들을 타작하고 말리거나 보관하자면 새끼로 결은 방석이거나 망태기가 있어야 한다. 엄한이 대지를 휩쓰는 추운겨울이 오면 겨울나기차비로 배추나 무우 시래기는 가는 새끼로 꿰매고 초가집 뒤벽이나 겨울바람막이 바자에 걸어놓는다. 우리 민족의 식탁에 빠져서는 안되는 된장을 만드는 메주도 새끼로 달아맨다. 우리 연변시골에서는 50년대초까지도 짚신을 신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짚신은 새끼를 꼬아 만든다. 가마니를 짜는데도 새끼꼬기가 제일 기초적인 작업이다. 이럴듯 새끼가 우리들의 실생활에 “약국의 감초”처럼 빠질수 없었기에 그제날 농촌에서 살아왔던 지금의 40대이상의 사람들한테는 모두가 어릴적 새끼꼬기를 경험한 추억이 남아있다. 새하얀 성에가 창문에 꽃그림을 그려가고 박달나무가 탕탕 얼어터지는 추운겨울이 오면 우리 고장은 가마니를 짜는 좋은 계절이다. 가마니짜기를 시작하면 방안은 말 그대로 작업장이 돼버린다. 부엌쪽은 가마니를 짜는 곳이고 출입문쪽 바닥은 누기를 들인 벼짚을 쌓아놓고 추리는 곳이며 넓은 온돌은 새끼꼬기를 하는 작업장이다. 나는 일곱살때부터 아버지한테서 새끼꼬기를 배웠다. 아버지는 키가 크고 줄거리가 탄탄한 벼짚을 골라 추리고 누기를 적당하게 들여 새끼꼬기에 썼다. 새끼를 고르고 단단하게 꼬아야 하기에 아버지는 시작 부터 차근차근 벼짚오리를 쥐는 자세와 이어주는 방법을 가르쳤다. 나는 아버지가 가르치는대로 부지런히 벼짚오리를 고르게 이어주고 제때 에 짚나라미를 살살 잘라주어 새끼가 미끈하게 빠지도록 익혀나갔다. 새끼꼬기는 마지막 끝머리까지 한방향으로 비벼야 하기에 손바닥이 마르면 작은 손바닥에 침을 탁탁 바르면서 팔의 길이가 자라는데까지 비비고 또 비볐다. 그렇지 않으면 단단히 탈려오던 벼짚오리가 힘없이 스르르 풀어지기때문이다. 벼짚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짜고 가마니가 여러장 모아지면 공급판매 합작사에 판다. 우리 집과 공급판매합작사의 직선거리는 2리가량 되는데 그 세월 어머니는 머리에 가마니를 이고 힘겹게 공급판매합작사에 팔러다니였다. 추운 겨울날 가마니를 지고 탈탈 거리며 공급판매합작사까지 가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젖군하였다. 그때는 가마니를 팔아 기름과 소금같은 필수품을 사고 학교에서 쓰는 연필이나 필기장 등 학용품들도 마련하였다. 나는 새끼꼬고 가마니짜고 그것을 팔러다니면서 처음으로 돈은 힘들게 얻어지고 소중한것이며 로동으로 얻은 성취의 희열이 어떤것인지를 체험하게 되였다. 인젠 새끼꼬기는 먼 옛날의 과거가 되였다. 하지만 가끔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그때 아버지가 새끼꼬기를 배워주면서 삶의 지혜도 가르쳤다는것을 새삼느낀다. 새끼꼬기가 시작이 중요하다면 인생도 마찬가지로 사회에 내딛는 첫 발걸음이 자못 중요하다. 새끼꼬기를 하면서 지나치게 벼짚오리를 자주 이어주면 새끼가 굵어지고 유연함을 잃어 쓸모없게 돼버리듯이 인생도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도를 넘게되고 망가지게 된다. 하기에 항상 분수에 맞게 살고 처신해야 한다. 새끼를 꼴때 새끼의 지저분한 짚나라미를 다듬어 주듯이 인생을 살면서도 마찬가지로 부지런히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고 단속하며 흐트러진 자세를 제때에 바로 잡아 주어야 바르게 성장할수 있다. 새끼꼬기는 오른손은 바깥쪽으로, 왼손은 안쪽으로 하고 끌어당기면서 한방향으로 돌리고 돌려야 한다. 갑자기 방향을 돌려 왼새끼를 꼰다면 새끼오리는 힘없이 스르르 풀어지게 될것이다. 인생도 새끼꼬기처럼 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갔다가 하면서 갈팡잘팡 한다면 아무것도 성사할수 없다. 새끼꼬기는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무리가 더 중요하다. 인생도 목표를 정하고 실패와 좌절 앞에서 비관하거나 소침해 지지 말고 중도에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포기한다면 인생의 새끼는 뱅뱅탈리다 스스르 힘없이 풀려 지게 될것이다.   2   어릴적에는 오른새끼만 꼬는줄 알았다. 어른이 된후에야 왼새끼꼬기도 있다는것을 알았다. 먼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마을이나 집안으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내기 위해 완벽한 보호막을 칠 때 왼손으로 비벼 꼰 새끼줄을 썼다고 한다. 아기가 태여났을때 사립문에 고추나 숮을 끼워 걸었던 “금줄”도 왼새끼가 재앙을 막아준다는 민간신앙에서 연유한것이다. 또한 부모가 죽어 장례를 치르때 상주들은 흰 배옷과 흰 두건을 쓰고 허리에는 왼새끼를 질끈동여 맸다고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특정한곳에 특별하게 쓰이는것이다. 삶의 정도를 벗어나 외딴길을 가거나 또는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 일을 처사하거나 들쭉날쭉하는 사람들을 통털어 왼 새끼를 꼰다고 한다. 일전에 모아산 등산을 다녀 온적있다. 모아산삼림의 입구에 들어서니 벌써 상쾌한 공기가 한껏 기분을 돋구어 주었다. 등산객들속에 끼여 모아산기슭을 따라 조금 오르자 두 갈래의 갈림목이 나타났다. 갈림목의 등산안내표시도에는 오른쪽에 모아산 정상으로 톺아오르라고 “상행선” 이라고 표시하고 왼쪽에는 “하행선”이라고 똑똑하게 표시하였다. 그런데 일부 등산객들은 안내표시도를 무시하고 제멋때로 하행선으로 등산하고 상행선으로 하산하면서 마주오는 등산객들을 괴롭혔다. 뻐스에 오르고 내릴때에도 앞문으로 오르고 뒤문으로 내리는게 엄연한 상식임에도 일부 승객들은 이를 무시하고 앞문으로 밀치며 차에 오르는 승객들에게 불편을 끼쳤다. 저런 사람들이야 말로 왼 새끼꼬기를 하는 괴짜들이구나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또 도시의 아스팔트에서 우측 통행은 엄연한 교통규칙임에도 일부 택시기사들은 이를 무시하고 길 복판에서 방향을 돌려 역행하는 아슬아슬한 장면들이 벌어지군한다. 이런 일들로 하여 교통사고가 비일비재로 일어나고있다. 참으로 이런 사람들은 인간의 목숨을 가지고 왼새끼 꼬기를 하는 법맹이 아날수 없다. 현시대 아무리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천태만상의 일이 벌어지라도 사람마다 정도를 따라나간다면 조화롭고 질서 있는 사회가 될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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