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한사전의 편찬과 번역에 관하여 1
남광철
중한사전의 편찬과 번역은 관계 범위가 극히 넓고 복잡하지만 그 기본 원칙은 복잡하지 않다. 그것은 바로 중국어를 전면적으로 정확하게 한국어 독자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이미 출판된 사전에 관하여 여러 독자들이 평론하는 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래에 중한사전(흑룡강성 조선민족출판사 출판, 2012.8월)의 편찬과 번역을 둘러싸고 일부 독자들과 본인의 의견을 종합하여 1-10페이지 부분에 관한 몇 가지 평론 및 의견을 서술하려 한다.
음독자의 처리 문제.
[吖] ā 입을 크게 벌린 모양 아:
이 올림자는 현대 화학물질의 영어발음 “아(a)”를 표현하기 위하여 새로 “ā”음을 채용한 글자이다. 즉 “ā”로 발음할 때에는 화학물질만 표시하지 “입을 크게 벌린 모양” 같은 건 표시하지 않는다. 바로 그 아래에 표시한 “吖啶 아크리딘”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므로 천자문 음독자는 응당 “화학물질 아”로 써야 한다. 만약 “입을 크게 벌린 모양”이라고 올렸다면 해석 부분에 반드시 이에 상관되는 례를 들어 설명하여야 한다. 천자문식 음독자와 올림자의 해석이 일치하지 못하다면 이는 공연히 독자의 의문을 자아낼 따름이다.
다음, 예로부터 이 글자는 “yā”로 발음한다. “입을 크게 벌린 모양”이란 말처럼 형용사 격으로 쓰이는 말이 아니다. 이는 “웨치다”는 뜻의 동사이다. 그러므로 “yā”음으로 올린다면 “웨칠 아”라고 올려야 한다. 문제는 사전에서 “yā”음의 경우는 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毐]:ǎi음란할 애. 인명에 쓰이는 글자.
이 글자의 음독 해설이 “음란할 애”인 이상 “음란하다”는 내용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①에서 “남자의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다.”를 밝혀야 한다. 물론 례문을 준다면 더욱 좋다. 연후에 ②에서 인명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올림말 해석 문제.
(1) [阿訇] āhōng 이맘(iman).
이는 본래 “아홍”이라 쓰고 “지식인 또는 교사”로부터 시작하여 해석하여야 한다. 이 말은 페르시아어 “ākhūnd”에서 온 말로서 ”ahung”이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맘”은 본래 “지식인 또는 교사”라는 뜻이 없다. 그리고 만약 이 경우에 쓴다면 “imam”이라 쓰는 것보다 “Imam”이라 쓰는 것이 타당하다.
[阿混] āhùn 게으름뱅이. 어성꾼. 건달. (현 상황에 만족하여) 그럭저럭 살아가는 자.
“어성꾼”은 한국 출판 이희승 편저 (이하 모두 이 사전에 준함)에서 우선 방언이라 밝힌 후 3가지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방언이란 차원에서만 말해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그외에 3가지 뜻은 게으름장이, 한산인(闲散人), 거간(居间)이다. 그렇다면 이 뜻을 몇 번째에 맞추는가도 시끄러운 일이다. 이런 경우 어성꾼은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례문에서 보아도 그러하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자”. 이 말에서 “자”는 “얕잡아 이르는 말”이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데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전부 얕잡아 이른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그럭저럭 살아가는 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腌臜] āzā ① 지저분하다. 더럽다. 불결하다.
이 올림말의 원 뜻은 “더럽다. 불결하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맨 처음에 “지저분하다”로 해석하고 있다. 이 “지저분하다”에 대한 한국어사전의 해석은 2가지이다. ① 거칠고 깨끗하지 못하다. ② 어수선하고 더럽다.
이 2 가지 해석은 어느 것이나 원뜻인 “더럽다, 불결하다”와 대등하지 않다. 비슷한 점이 있다고 이렇게 보태어 넣는 것은 올림말에 대한 독자의 리해를 방해할 뿐 아무런 도움도 없다.
대조적인 의미가 강한 올림말을 올리는 문제.
사전은 올림말 “哀乐(āiyuè)”를 올렸다. 그런데 이 악(乐)자는 다음자(多音字)로서 다른 한 발음은 즐거울 락“乐(lè)”이다. “哀乐(āilè)”는 위 올림말과 대조하는 의미에서 보든지, 아니면 그 자체의 사용 빈도로부터 보든지 모두 올릴 필요가 있다. 례를 들면 “十多个县分的城镇给我留下了人世哀乐的印象:10여개 현의 도시들은 나에게 세상의 슬픔과 즐거움에 관한 인상을 남겼다.”와 같은 경우이다. 물론 “哀乐(āilè)”에서 “喜怒哀乐”와 같은 성어(成语)와 대조하도록 기회를 주는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다음에 “→”로 “哀乐(āiyuè)”와 련결시킨다면 학생, 독자들의 전면적인 리해에 훌륭한 역할을 일으키게 된다.
사전은 성어(成语) “爱才若渴”는 올렸지만 사용 빈도나 뜻이 매우 비슷한 “爱才如命”은 올리지 않았다.
사전은 성어(成语) “爱财如命”, “哀鸿遍野”는 올렸지만 “爱财”나 “哀鸿”처럼 성어(成语)는 아니지만 독립적으로 쓰이고 그 빈도 또한 높은 단어는 올리지 않았다. 례를 들면 “君子爱财,取之有道: 군자는 재물을 사랑하더라도 도(道)에 맞게 취한다.”거나 “哀鸿失群;무리에서 뒤쳐진 기러기가 슬피 운다. /连年灾荒,哀鸿满路;해마다 연속되는 기황으로 이재민이 넘친다.”와 같은 경우이다.
사전은 “爱女”는 올렸지만 “爱子”는 올리지 않았다. 또 “安检”, “安监”은 올렸지만 “安纪”는 올리지 않았다.
사전은 올림말 “安好”에서 첫째로 그 형용사 용법, 즉 “평안하다”는 해석하였지만 두 번째 용법, 즉 “安好机器 기계를 설치해 놓다”와 같은 경우의 동사 용법은 해석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학생, 독자들의 전면적인 리해에 큰 지장을 주게 된다.
사전은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이는 올림말에 대하여 홀시하는 경향이 뚜렷이 보인다. 례를 들면 “爱戴 애대하다.”는 올렸지만 이와 거의 반대로 쓰이는 경우인 “爱戴高帽子”는 홀시하였다. “人老了就容易爱戴高帽子: 사람이란 늙으면 흔히 춰주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는 말은 속담 범주에 속하지만 “애대하다”는 의미와는 반대이면서 그 사용 빈도 또한 상당히 높다.
성어(成语)에 관한 인지 문제.
사전은 “挨饥受冻”을 올리고 성어(成语)라고 밝혔다. 그러나 성어(成语) 사전에는 모두 “挨饿受冻”, 또는 “挨冻受饿”으로 올리거나 이 두 가지를 함께 올렸다. 즉 “饥”와 “冻”은 결합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성어(成语)를 올림에 있어서 제대로 대조하여 보지 않은 문제이다.
사전은 “爱搭不理”,“爱理不理”를 모두 성어(成语)로 올렸다. 그럼 이 두 올림말이 성어(成语)가 맞는가? 그렇지 않다. 이 두 가지 말은 모두 성어(成语)가 아니다.
특히 “爱理不理”는 매우 흥미 있는 구조를 가진 말로서 “아랑곳하지 않거나 냉담하게 대하다. 본체만체하다.”는 식으로만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爱理不理”에는 “爱…不…”라는 고정 격식이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응대하고 싶으면 응대하고 그렇지 않으면 응대하지 않다.”는 격식을 교대하여야 한다. 이로부터 숫한 올림말들이 파생하게 된다. 즉 “你爱看不看” “너 보고 싶으면 보고 싫으면 그만 둬라.”, “你爱吃不吃” “너 먹고 싶으면 먹고 싫으면 그만 둬라”, “爱管不管” “상관하고 싶으면 상관하고 싫으면 그만 둬라”는 등등이다. 그래 이런 말들에 다 성어(成语)라는 모자를 씌워줘야 한단 말인가? 세심한 학생, 독자들이 성어사전과 대조하여 본다면 그 후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초학자들을 그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출판사나 나라의 위신에도 손상이 되는 것이다.
올림말 해석의 삭제 및 증가 문제
(1) “艾子水” 쑥을 달인 물. 쑥탕. [민속에서 아이가 태어난 지 3일째 되는 날에 이 물로 씻어 주는 것을 “洗三”이라고 함.]
여기에서 민속의 함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약효에서 기원했음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특히 성인 피부병에 대하여는 상용약으로 쓰이고 있다.
(2) [哀荣] 사후에 받는 영예.
중국어 사전의 해석은 “생전이나 사후에 모두 존경을 받음. [특히 사후에 받는 영예를 가리킴] ”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단순히 “사후에 받는 영예”라고 줄이면 너무나도 무단적이다.
[哀子] 애자. [어머니가 돌아가고 아버지만 계신 상중의 사람이 자기를 일컫는 말]
중국어 사전의 해석은 “본래는 부모를 여윈 아들, 후에 어머니를 여윈 아들을 가리킴”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본래의 의미를 삭제한다면 이 역시 어원을 단절시킨 것이다.
[哀婉] 애완하다. 애절하고 느리다. 완곡하고 처절하다.
“애완하다”는 한자어에 대하여 한국어사전은 “슬프고 어여쁘다”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어 사전에서 “哀婉”에 대한 해석 중 “어여쁘다”는 말이 없다. 이것이 바로 중국어와 한국 한자어의 섞갈리기 쉬운 문제로서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글자 음독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면 쉽사리 오류가 생기게 된다.
다음, “애절하고 느리다”는 말을 보면 “느리다”가 “婉转”에서 온 듯하다. 그러나 중국어 사전에는 역시 “느리다”는 해석이 없다. 이렇게 대등되지 않는 해석을 가하는 것은 절대 취할 바가 못 된다.
(5) [爱怜] “爱怜幼子” 어린 자식을 귀여워하다.
중국어 “幼子”는 “어린 아들”이란 말이다. 그런데 “어린 자식”이란 “어린 아들이나 딸”을 가리킨다. 즉 이 번역은 그 의미를 보탰으므로 대등하지 못하다.
[挨不得] “非专业人员挨不得污染物品” 전담자가 아닌 분은 오염물을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역문은 완전히 대중에 대한 경고 패쪽에 쓰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바로 여기에 현묘한 차이가 있다. 중국어 원문은 그런 풍격이 아니라 그저 객관적인 립장, 또는 평소의 대화에서 하는 말투이다. 만약 역문의 풍격대로 말한다면 중국어 원문은 “非专业人员请勿挨近污染物品”이라고 써야 한다. 이는 중국어 원문 풍격에 대한 리해 문제이다. 중국어 원문에 상대하면 역문은 “전담자가 아니면 오염물을 다루지 못한다”로 되어야 한다.
[挨肩儿] 년년생이다. 년년 터울이다. “挨肩儿三姐妹” 년년 터울인 세 자매.
올림말 “挨肩儿”은 “손아래, 손위 관계”를 말할 뿐이다. 년년생과는 상관이 없다. 또 부녀들이 년년생만 낳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다. “년년생”이란 말이 확실히 많이 사용되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중국어를 번역할 경우 반드시 그 뜻을 정확하게 반영하여야 한다. 중국어 원문을 보고서는 세 자매가 “년년생”인지 아닌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즉 원문을 잘못 번역한 것이다.
[挨着] 가까이하다. 잇대다. “在班级我俩挨着” 우리 둘은 짝꿍이다.
이 례문 번역에서 우선 “在班级” 즉, “학급에서”를 삭제하였다. 여기에서 이것을 삭제해야 할 아무런 리유도 없다.
다음은 “짝꿍이” 문제이다. 한국어 사전에서 “짝꿍이”는 “딱친구”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학급에서 우리 둘이 잇대어 앉는다” 하여 꼭 “짝꿍이”라는 법은 없다. 둘이 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하면 바로 잇대어 앉기 때문에 사이가 버성기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늘 쓰는 말이라 하여 역문에서 경솔히 써서는 안 된다.
그 다음 여기에서 반드시 지적하여야 할 엄숙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올림말 “挨着”는 동사라는 점이다. 간혹 동사가 명사로 번역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동사가 명사로 번역이 되어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잇대어 앉는다”라는 동사 체계로 번역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또 이렇게 하여야 한국어 독자, 학생들이 정확한 체계를 갖추도록 인도할 수 있다.
[艾] ài A)…B)…C) 아름답다. “少艾” 젊고 아름답다.
“少艾”는 고문(古文)에서 젊고 아름다운 녀자, 즉 미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慕少艾”라는 말은 바로 “아름다운 소녀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녀자라는 뜻을 삭제하니 마치 남자도 가리키는 듯하다. 이 역시 독자들에게 혼동을 일으키는 말로 된다.
[哀苦] 슬프고 고통스럽다. [挨淹] 물에 잠기다. 물에 빠지다. [矮个] 난쟁이. 왜인. 키작은 사람.
이상 3개 올림말은 아무런 례문도 없다. 앞의 2개는 비교적 적게 쓰이는 말인데 적게 쓰이므로 례문을 주어야 리해를 도울 수 있다. 세 번째 올림말은 자주 쓰는 말인데 바로 자주 쓰기 때문에 례문을 잘 주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이 경우 “哀苦无依的人; 의지할 곳 없는 슬프고 괴로운 사람”, “家园挨淹吓不倒这些农民, 고향이 물에 잠겨도 농민들은 힘을 버리지 않았다”거나 좀 유모아적인 방식의 례문으로 “她是个身高只有1米65的矮个排球明星; 그녀는 신장이 불과 1미터 65의 난쟁이 배구 스타이다”는 식의 참고 례문을 주는 것이 너무나도 필요하다.
[哀戚] 슬퍼하고 서러워하다. 비통하다. “孝子之丧亲也,哭不偯……食旨不甘,此哀戚之情也, 효자가 어버이 상을 당하면, 곡을 하되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아니하니, 이것은 슬퍼하고 서러워하는 정 때문이니라.”
우선 올림말 해석에서 “서럽다”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한국어 사전에서 이 말에 대한 해석은 “원통하다”, “분하고 억울하다”, “몹시 원망스럽다”로 련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올림말 자체는 “비통하다”는 뜻으로 끝이다. “서럽다”는 말과는 련결이 되지 않는다. 대등하지 않은 말은 쓰지 않는 것이 상수이다.
그 다음, 중국어 례문에서 “偯”라는 글자를 썼는데 이 글자는 리해하기 몹시 어렵다. 그러나 본 중한사전에서는 올림자로 올리지도 않고, 례문 중 글자 뒤에 괄호로 병음, 즉 발음을 표기하지도 않고, 또 역문에서 이 글자를 번역하지도 않았다. 또 하나 불가사의한 일은 이 글자 뒤에 생략부호를 주어 독자가 더욱 오리무중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慈母新逝,不胜哀戚, 자애로운 모친께서 돌아 가셔서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소이다.”는 식으로 례문을 준다면 간단하기도 하고 리해하기도 쉬운 것이다.
중국어 올림말 사용 규범 문제
[艾滋病]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 注意: “爱滋病”으로도 표기함. [瑷] ài ① … ② 지명에 쓰이는 글자. [瑷珲] 애휘. [중국 흑룡강성(黑龙江省)에 있음. 일반적으로 “爱辉”로 표기함.]
우선, “爱滋病”은 초기에 사용한 문자로서 후에 “艾滋病”으로 규범하여 지금은 모두 이것에 준하고 있다. “‘爱滋病’으로도 표기”하는 문제가 아니다.
다음, “爱辉”는 “일반적으로 표기”하는 문제가 아니다. 국무원 유관 부서는 이미 1956년에 “爱辉”로 규범하여 지금까지 반 세기도 넘게 사용하고 있다. “瑷珲”는 단순히 “瑷”자가 지명으로 쓰인 력사를 반영할 뿐이다. 언어문자의 규범에 대하여 과학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큰 문제를 초래하는 근원으로 된다.
8. 이상은 1페이지부터 10페이지까지의 문제점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10페이지 마지막 부분에 들어가야 할 올림말에 대하여 한 가지 언급하여야 할 문제가 있다.
중한 사전은 “安徽”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安徽”란 올림말을 올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기타 올림말을 해석하는 부분에서는 “안휘성”이란 말을 자주 쓰고 있다. 올리지도, 해석하지도 않은 “안휘성”을 가지고 다른 올림말을 해석하다니 이런 문제는 어떻게 리해하여야 하는지? 독자에게 대하여 말하면 의문을 푸는 것이 아니라 의문을 더해줄 따름이다.
그래서 두루 펼쳐 보면 이것은 우연히 빠뜨린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모든 인명, 지명을 다 빼버린 것이다.
심지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북경마저 빼버린 것이다. 그런데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은 “北京烤鸭”를 올린 것이다. 그래 북경과 북경오리구이의 문화적인 가치나 내포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사전의 첫 페이지에 “阿尔巴尼亚”를 올리고 그 수도는 티라나라고 밝혔다. 그런데 중국을 올릴 경우에는 수도를 언급하지도 않고 북경을 올려야 할 경우에는 북경오리구이만 올린다면 이는 중국을 일부러 내리깎는 편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 사전 자체가 중한사전인데 중국을 이렇게 홀대한다면 이 사전의 가치가 어데 있겠는가!
여기에서 한 가지 대조하여 말할 문제가 있다. 즉 1960년도에 조선에서 출판한 (6권)에 확실히 모든 인명 지명을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평양”이라는 올림말도 그 줄은 텅 비고 그 아래에 다만 “평양 나막신”이라는 등의 속담밖에 없다. “함흥”이라는 올림말도 그 줄은 텅 비고 그 아래에 다만 “함흥 차사”라는 속담밖에 없다.
아마 그런 영향으로 인하여 이렇게 처리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로부터 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런 도리도 없는 일이다. 필자는 그 당시 조선의 사회배경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고 있지만 확실히 이러한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 언급되고 있는 사전은 중한사전이다. 즉 중국어를 한국에, 또는 한국어 독자에 소개하는 사전이다. 한국에서 출판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5년)은 인명, 지명에 대하여 매우 명심하여 올리고 있다. 중한사전은 물론 대사전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그러한 풍격은 통일하는 것이 마땅하다. 분명히 눈에 뜨이는 상기 평양의 경향을 한국에, 한국어에 강요한다면, 그래 이것이 공평한 일이며 순탄하게 통과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 다음, 인명과 지명이 대체 문화에 속하는가, 속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땅에서 이 사람들이 살면서 문화를 창조하는데, 그래 땅 이름과 사람 이름이 가장 중요한 문화가 아니란 말인가? 물론 그렇게 많은 지명, 인명을 다 올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예로부터 내려오는 명인 리백, 두보라든가, 현대의 명인 모택동이라든가 하는 명인마저 올리지 않는다면, 40개 정도밖에 안 되는 성급 지명마저 올리지 않는다면 중국의 문화에 대하여 크게 손색이 가지 않겠는가?
또 하나 대비하여 말할 문제가 있다. 중한사전은 “八国联军”, “鸦片战争” 같은 력사학 올림말은 올렸다. 여기에서 보면 력사학에 대해서는 문화로 인정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리학은 문화가 아니란 말인가? 대학의 력사학부는 문화학부에 속하고 지리학부는 문화학부에 속하지 않는단 말인가?
총적으로 사전이 고도의 과학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점은 자명한 일이다. 중한사전의 편찬과 번역에 있어서 우리가 시종 명기하여야 할 점은 독자, 특히 학생들에게 책임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