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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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밤하늘의 별은 반짝이건만… 댓글:  조회:637  추천:0  2019-02-20
우리 연변처럼 맑은 공기, 푸른 산, 정갈한 물, 파란 하늘, 반짝이는 별을 갖고 있는 청정지역도 드물 것이다. 우리 나라의 많은 도시들은 황사요, 초미세먼지요, 수질오염이요 하면서 야단법석을 떨고 아우성을 치지만 연변에서는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다. 아름다운 자연을 만긱하면서 생활할 수 있으니 이야말로 연변사람들에 대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요즘에는 아름다운 환경에 걸맞지 않는 가끔은 눈살을 찌프리게 하는 몰상식한 행실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며칠전 설 련휴 때 대련에서 연길에 와서 며칠 지낸 친구를 공항까지 바래다주게 되였다. 공항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데 웬 50대의 택시기사와 30대의 남자승객이 서로 얼굴을 붉히며 티격태격 다투고 있었다. “에잇, 더러워서! 설이라고 택시비를 더 받는 곳은 연길 밖에 없는 것 같다!”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여직껏 연길은 깨끗한 도시라고 자부하면서 조선족자치주 수부에서 사는 것을 무척 뿌듯하게 생각했었다.  설이라고 택시기사가 료금을 더 요구한 게 분명했다. 핸들을 잡고 돌아올 때 그 30대 승객의 볼부은 소리가 내 귀전을 아프게 때렸다.  “에잇, 더러워서!…” 물론 극소수일 것이다. 하지만 한 도시의 문명수준은 택시문화가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진대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택시기사들이 연변의 형상을 흐리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도 답답해서 나는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휙 불어들었다. 문득 지난해 로씨야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한 크로아티아축구팀이 조국으로 귀환하는 화면이 떠올랐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동화 속의 풍경 같은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도, 눈부신 바다도, 앙증맞은 주황색지붕의 독특한 건축물도 아니였다. 바로 자국의 축구팀을 환영하려고 자그레브의 반옐라치치광장에 모인 수만명의 인파, 그들의 뜨거운 함성과 흥분된 얼굴들이였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크로아티아 국가텔레비죤방송국에서 전하는 ‘특대뉴스’였다. 지방과 외국에서 더 많은 크로아티아인들이 수도에 오게 하기 위해 철도공사에서 기차표값을 절반이나  ‘파격할인’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항공사에서도 택시회사에서도 련달아 가격을 낮추었다! 또 광장 부근의 가게들에서는 생수며 맥주며 빵이며 아이스크림을 열광하는 팬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크로아티아는 오랜 세월 참혹한 전쟁을 겪다 보니 유럽에서도 가장 빈궁한 나라의 하나다. 하지만 상인들은 이 기회에 상품을 무더기로 팔아 횡재를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나라의 영예와 민족의 자부심을 함께 누리면서 나눔과 베품의 미덕을 보여주고 온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축제의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어디 그 뿐인가. 눈부신 활약으로 준우승을 한 크로아티아팀은 국제축구련맹으로부터 2,300만유로(인민페로 2억원 남짓함)의 묵직한 상금을 받게 되였는데 국가팀의 감독과 선수들은 이 상금 전액을 전국 각지에 있는 유소년축구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거액의 상금을 받은 후 감독과 선수들이 우선 생각한 것은 고급아빠트도 호화려행도 풍성한 파티도 아니였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유니폼, 축구화, 축구공도 변변히 갖추지 못하고 열심히 뛰면서 축구꿈을 꾸고 있는 불우한 유망주들이였다! 그들은 눈앞의 리익 대신 조국의 미래를 생각했고 이루어놓은 성적보다 래일에 창조할 후배들의 또 하나의  ‘기적’을 꿈꾸고 있었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만 있으면 우리 주위 일부 사람들은 혈안이 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수도물이 하루만 오지 않으면 그 부근의 상점들은 1, 2원짜리 생수를 10원씩 받고 판다. 정전이 되면 몇원씩 하는 초도 부르는 게 값이다. 선진국에서는 식료품을 고를 때 유효기가 가까운 식품에 손이 먼저 가지만 여기서는 유효기가 많이 남아있는 식품을 고르느라 물건을 들고 올리보고 내리보면서 아까운 시간만 허비한다. 우리는 어디까지 왔는가? 이제 시간이 얼마나 더 걸려야 할가?… 인재들이 고향을 떠나지 말라고 또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연변적 선수들이 타팀으로 이적하지 말라고 웨치고 또 웨친다. 진정 인재들이 홀가분한 심정으로 귀향하여 따뜻한 보금자리를 틀 수 있도록 두팔을 벌려 뜨겁게 맞이할 준비가 되여있는지? 맑고 깨끗한 물과 푸른 산도 우리의 귀중한 자산이요, 인재들을 흡인할 수 있는  ‘매력덩어리’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문적 환경이라 생각한다. 물보다 더 깨끗하고 산보다 더 푸른 우리 모두의 아름다운 심성을 보여줄 때 우리의 연변은 비로소 이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청정지역으로 되지 않을가?… 차창 밖으로 밤하늘의 별들만이 말없이 반짝인다… 길림신문
7    중국축구의 비애 댓글:  조회:700  추천:0  2017-09-26
9월 23일, 연변축구팬들이 제일 주목하는 경기는 오후 3시 30분 2017중국축구 슈퍼리그 연변팀이 홈장에서 치르는 료녕개신팀과의 경기, 그 다음 주목한 경기는 저녁 7시 30분 진행되는 천진권건팀과 천진태달팀과의 경기였다.   이날 오후에 펼쳐진 슈퍼리그잔류가 걸린 생사의 관건적경기에서 연변팀은 피말리는 접전끝에  1대 0으로 상대팀을 꺽고 금싸락 같은 3점을 챙겼다. 슈퍼리그잔류의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자 연변축구팬들은 너나없이 격동의 가마니에 빠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변축구팬들이 승리의 기쁨은 잠간, 행복에 도취된 시간은 불과 고작 두시간뿐이였다.   저녁 7시 30분 시작된 천진태달팀과 천진권건팀과의 경기는 연변축구팬들에게, 아니 중국축구를 사랑하는 모든 축구팬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이게 4등(제25라운드까지 천진권건팀 순위)과 부반장 팀(천진태달 연변팀과 점수 16점으로 같음. 15위)과의 경기란 말인가?!   이게 아세아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노리는 팀과 슈퍼리그잔류를 위해 아득바득하는 팀과의 경기란 말인가?!   천진 두 팀과의 경기를 두고 사전에 추측이 란무했다. 수준차이로 볼 때 천진권건팀이 진다는 것은 어부성설이다. (물론 축구에서 이외의 결과도 발생할 수 있음)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연변축구팬들은 억이 막혔다! 아니 축구축구를 사랑하는 모든 축구팬들이라면 중국축구에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어느 팀이 4등팀이고 어느 팀이 15등 팀입니까? 어째 15등 팀이 더 잘 찹다? ”   천진란만한 소학생 조카가 묻는 말에 난 뭐라고 답할 수 없었다. 자라나는 아이들한테 순진무구한 축구꿈을 꾸고 있는 나어린 축구팬들에게 뭐라고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부끄럽다! 중국축구야!   아직도 슈퍼리그에 이런 추악한 경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창피하다! 중국축구야!   아직도 중국축국에 이런 더러운 보기 싫은 추태가 있다는 사실이!   무능하다! 축구협회여!   푸르른 잔디밭을 오염시키는 것을 눈 펀히 뜨고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리그 한껨도 바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한껨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축구협회!...중국축구가 월드컵을 못나가는 리유가 뭘가?...   증거가 뭐길래?   축구협회 자신의 눈을 의심해보라! 소경이 아닌지?...   축구협회 자신의 귀를 의심해보라! 귀머거리가 아닌지?   삼척동자도 “가짜 경기”라는 것을 다 아는 사실을 왜 축구협회만 모를가?...이상하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중국축구를 사랑하는 수많은 축구팬들의 목소리이다!   가장 확실힌 근거는 중국축구를 사랑하는 수많은 축구팬들의 탄식이다!   축구협회여, 천진권건팀과 천진태달의 경기를 보지 못했다면 다시 한번 록상이라도 보라! 이게 가짜 뽈이 아니면 어떤 뽈이 가짜란 말인가!...   축구축구가 개탄스럽다!   중국축구가 부끄럽다!   중국축구가 창피하다!      반면 연변축구가 자랑스럽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좁쌀과 보총”으로 수많은 “설음”을 이겨내며 애면글면하는 연변축구가...   그래서 난 영원한 연변축구팬이 될 지언정 중국축구팬이 되고는 싶지 않다!   중국축구가 정화될 때까지...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할 가?   연변축구여, 슈러리그 잔류가 단지 우리의 실력으로 된다면야 오죽 좋으랴만?...    길림신문 2017-9-24
6    축구의 고향 댓글:  조회:1719  추천:3  2015-10-31
축구의 고향 장수철 장백산아래 조국의 동북변강, 푸른 산, 맑은 물의 청정지역, 여기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이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연변은 예로부터 “축구의 고향”, “가무의 고향”이란 미칭을 갖고있다. 연변사람들처럼 축구를 알고 축구를 좋아하고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를 담론하고 축구를 화제로 하는 곳도 아마 전국에서 찾아보기 힘들것이다. 얼마나 축구를 좋아할가, 얼마나 사랑할가, 얼마큼이나 축구에 대한 정이 간절할가. 외지인들은 잘 모르거니와 리해할수 없을것이다. 축구여, 그대는 무엇이길래 연변인민들은 그대를 그토록 사무치게 사랑하는가? 축구는 연변에서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이다! 연변인민들은 축구에 포용되면서 환희를 느꼈고 격정을 느꼈고 설음과 쓴맛도 느꼈다. 갑급팀 우승도 했었고 갑A무대에서 파란도 일으켰고 국가팀에 유수한 선수를 수송도 하면서 축구 고향의 향기를 먼곳까지 뿌렸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축구의 고향이란 명침에 걸맞지 않게 축구가 색바래졌다. 팔려가고 떨어지고 할퀴고… 그래도 축구는 히질긴 생명으로 연변땅에서 사라지지도 죽지도 않았다. … … 그 사이 강산은 몇번이나 변했던가,기나긴 기다림끝에 드디어 축구는 축구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박태하감독은 21껨 불패의 기록, 갑급 우승이란 쌈박한 축구로 연변장백산축구팀을 슈퍼리그에 착륙시켰다! 한 명인은 말했다. “인간에게 있에서 고향은 영원히 없이지지 않는다고!” 연변인민들은 말한다! “연변에서 축구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것이라고!”              11월호
5    동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 댓글:  조회:1746  추천:3  2015-10-15
그 누가 말했는지 장훈고속철을 “동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이라고했다. 고속기차가 제일 아름답다고, 고속철로가 제일 아름답다고 한것이 아니다. 고속철의 연선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는 뜻일것이다. 천고마비의 계절, 고속철 창밖으로 스쳐지나는 풍경은 눈부시다. 푸른산이 거기 있고 맑은 물이 그렇게 굽이치고있다. 휘귀한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울창하던 수림은 어느덧 울긋불긋 가을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하고있다. 태고적 오염되지 않은 원시림, 고즈넉한 산골의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수줍은 시골처녀처럼 부끄럽게 살포시 미소짓고 있다. 새소리 맑고 물소리 기운차고 하늘은 높고 푸르다. 산, 산자락, 들, 계곡, 꽃, 풀, 물 그 어느것이나 청정자연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누구도 흉내낼수 없고 누구에게도 짝지지 않는 청정지역-연변! 그 어디에 가더라도 우리 연변처럼 공기좋고 아름답고 여유로운 곳을 보지 못할것이다. 그래서일가, 같은 풍경이건만 훈춘에서 북경으로 가는 고속철에 앉아 바깥 풍경을 감상할때의 느낌과 북경에서 훈춘으로 오는 고속철에 앉아 바깥 풍경을 만끽할때의 느낌이 묘하게 다르다. 어느 책에서 읽은 시구가 자연히 떠오른다. 산아, 산아, 나는 산이 좋아 산으로 들어가건만 물아, 물아, 너는 무엇이 싫어 산에서 나오느냐 21세기는 힐링의 시대, 려행의 시대라고도 한다. 인류사에 길 하나, 철길 하나가 그 지역의 운명을 바꾼 사례가 너무나도 많다. 한때 유럽에서 가장 찌들게 가난했던 스위스가 오늘날 전세계의 부러움을 가장 받고있는 복지천국이 된것은 철로때문이였다. 해발 4000m의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곳, 빙하와 만년설로 뒤덮인 원시적 자연이 남아있는 유럽의 유일한 지역 스위스는 오랜 세월 가난과 추위와 싸워왔다. 추위를 쫓자면 석탄이 필요했다. 알프스의 혹한과 험난한 지형을 넘기위해 스위스는 일찍부터 기차를 놓기 시작한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다른 유럽인들이 개발하지 못한 정밀한 기계를 만들어냈다. 알프스의 암벽바위에 철길을 놓기위해서는 고도의 계측기술이 발달할수밖에 없었던것이다. 결국, 스위스의 시계산업의 발전에는 알프스에 기차를 놓기위한 스위스인들의 피나는 노력이 깔려있다. 그런데 험준한 알프스를 넘어 석탄을 실어나르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된 스위스의 철도사업은 이후 스위스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스위스는 알프스에 석탄보다 더 가치있는 사업이 있다는것을 발견했다. 바로 관광사업이였다. 우람한 산봉우리들, 빙하와 만년설로 뒤덮인 원시적 자연은 알프스를 등정하기 위한 발달한 유럽국가들의 산악인들을 손짓했다. 기차는 이들을 실어 나르며 스위스는 더욱 발전했다. 알프스 산악철도의 새로운 전기가 시작된것이다. 사람들은 스위스는 관광으로 먹고 산다고 말한다. 한국의 강원도는 푸른산, 맑은물의 청정자연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한때는 한국에서 경제가 가장 락후한 지구였다. 지역의 3/4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척박한 자연환경으로 농사마저 변변하게 지을수없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났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상속에서도 강원도는 변하지않는것이 있었다. 곧바로 천혜의 자연경관이였다. 몇십년의 세월속에서 강원도의 산천은 더더욱 푸르렀다. 그 때문에 도시 삶에 찌든 사람들이 휴가철에 가장 찾고싶은곳으로 태여났다. 설악산, 동해, 단풍, 설경 등이 일년사계절 자연의 풍미를 만끽하려는 사람들을 유혹했다. 귀향하는 사람, 귀농하는 사람들이 강원도로 앞다투어 줄을 이었다. 또 천혜의 경관으로 2018년 동계올림픽까지 치르게 되였다. 친환경적인 노력이 천혜의 자연환경을 그대로 유지한 지금의 친환경강원도를 있게한 원동력이다. 올 국경휴가철 연길시나 훈춘시의 유명한 랭면집, 보신탕집, 양고기뀀점, 두부집, 순대집, 떡집 등 문앞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는 진풍경을 심심찮게 볼수 있었다. 모두들 고속철개통이 외지의 관광객들을 많이 실어왔다고 혀를 찼다. 하지만 아무리 고속철이라도 사막이나 민둥산, 일망무제한 평원을 달린다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질가? 자연이 주는 선물은 얼마나 위대한가! “동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속철”이기에 관광객들이 찾아드는것이 아닐가! 아름다운 자연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연변의 관광사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도, 유명 경제포럼의 환경성과 지수의 수치를 높이기 위해서도, 동북아의 관광업중심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시류에 맞춘 반짝하는 정책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본래의것을 그대로 유지하여 자식들에게 후대들에게 전해주려는 우리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이 강산의 소원이 아니겠는가!   연변일보 2015-10-14
4    [수필] 박바가지 댓글:  조회:727  추천:2  2014-04-10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집집마다 박을 심었다. 박은 무엇보다도 흰 회칠을 한 초가집에 잘 어울렸다. 순후하고 투박한 시골사람들은 제비가 돌아오고 새순이 돋는 봄이면 잊을세라 울바자밑이나 처마밑에 박씨를 뿌린다. 그러면 곧 싹이 트고, 금시 넝쿨은 새끼줄을 타고 울을 넘고 담을 넘어 추녀에 걸친 장대를 타고 잠잠한 이영으로 기여오른다. 할머니나 어머니의 무늬 없는 치마저고리 같은 하얀 박꽃은 달밤이면 다소곳이 피여난다. 푸른 덩굴이 사그라지기 시작하면 재빛 초가지붕 여기저기에 한아름의 탐스런 박들이 매달린다. 이때 사람들은 적당한 크기의 똬리를 만들어 박밑에 받쳐준다. 흥부네 박에서처럼 금은보화가 막 쏟아지지 않지만 흰 베적삼을 입은 동네 할아버지들은 옹골차게 잘 여문 박을 신나게 톱질한다. 때가 묻지 않은 하얀 속, 흰씨! 그 흰색이 좋아서인가? 머나먼 시절부터 바가지는 흰것을 사랑하는 백의민족과 애환을 함께 해왔다. 각종 생활도구로 쓰임새가 다양해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용품이였다. 지금은 쌀에 돌이 거의 없지만 이전에는 쌀에 돌이 많았다. 옛날 어머니들은 쌀을 일 때 처음에는 이남박과 바가지로 일고 그다음에는 두개의 바가지로 서로 쌀을 옮겨 담으면서 돌을 골라냈다. 마을 우물터에 가서 은색 바께쯔(양동이)로 물을 길어야만 했던 녀성들에게 바가지는 필수였다. 바가지로 물을 넘실넘실 담았고 물동이우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하루에도 몇차례식 물을 길었다. 그러면 물이 물동이에 가득 담겨있는데도 신통하게도 한방울도 넘쳐나지 않았다. 집집마다 일년 박농사중에서 특별히 크고 모양 좋은것을 골라서 복바가지로 만든다. 그리고는 그 박을 딸의 혼수감으로 사용하거나 보관했다가 아들 세간날 때 이사짐에 실어보내기도 했다. 둥그런 박의 성질을 본받아 삶이 원만하기를 지향하며 복바가지의 소원까지 기원했으리라. 김치움에서 아삭하고 시큼한 김치를 내올 때도, 식솔들의 장국을 뜰 때도 어머니는 바가지를 썼다. 쌀이 떨어져 한숨을 쉬며 쌀을 꾸러 동네를 다니던 어머니 손에는 늘 바가지가 들려있었다. 정든 고향을 떠나는 황소가 끄는 소수레 이사짐속에 바가지만은 꼭 있었다. 고향의 고개길옆 옹달샘에는 조롱박이 언제나 달랑 놓여져있었다. 바가지의 자연스러운 냄새와 갓 푼 물이 서로 어우러진 물맛은 참 향긋했다. 너나없이 배고팠던 시절, 어느 시골마을이나 설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소한 풍경들은 얼추 류사했으리라… 내가 살던 우리 동네에서는 설날이면 《바가지에 음식 돌리는》풍습이 있었다. 주로 어르신들이 있는 집이나 평소에 신세를 졌던 집, 혹은 친분이 좀 두터운 이웃들에게 색다른 음식을 한바가지 골고루 담아서 보내는데 받은 집에서도 빈 바가지로 돌려보내지 않았기에 주는만큼 되받아왔다. 바로 이 심부름은 우리 집에서는 막내인 나의 몫이였다. 가끔 한학급 녀자애네 집으로 가게 되면 혹시 마주치는게 창피스러워 은근히 누나한테 좀 시키길 바랐지만 《바가지와 녀자는 돌리면 깨진다.》는 타박만 들었다. (이건 뭔 소리람?) 나는 투덜거리며 심부름을 할수 밖에 없었다. 그해 설날, 우리 집에서는 두부를 앗았는데 어머니는 얼마전 우리 마을로 이사온 영숙이네 집으로 다녀오라고 했다. 《금방 이사 와서 마을에 아는 친척도 없겠는데…》 예쁘장하게 생긴 영숙이와 나는 한학급이였다.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광목올자국이 선명한 흰 두부를 담은 바가지를 들고 영숙이네 집앞에 이르렀다. 문앞에서 한참 서성거리고있는데 때마침 구정물을 버리려고 영숙이가 문을 콱 열고 나오는바람에 나는 그만 손에 든 바가지를 떨구고말았다. 바가지는 깨졌고 두부는 땅에 흩어지고말았다. 내가 어찌할바를 모르고있을 때 영숙이 어머니가 나와서 부드럽게 타일렀다. 《일없다. 집에 돌아가 잘 먹겠다고 어머니께 전해라. 다른 말은 하지 말고.》 가슴이 한줌만해서 빈손으로 돌아온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어머니의 눈치만 살폈다. 얼마 지났을가, 영숙이 어머니가 바가지를 들고 우리 집에 들어섰다. 《따끈한 두부를 맛있게 먹었스꾸마. 이 골무떡이 맛있겠는지… 이 바가지도 씁소. 우리가 철이네 바가지를 쓰겠쓰꾸마.》 우리 집 바가지와 비슷한 바가지에는 고운 무늬가 새겨진 하얀 골무떡이 오롯이 담겨있었다… 그토록 고마운 영숙이 어머니, 나는 눈물이 울컥 솟아올랐다. 오늘까지도 나는 그날 영숙이 어머니가 빚은 그 골무떡만큼 맛있는 떡을 먹어보지 못했다. 바가지로 음식을 나누고 따뜻한 마음들을 나누던 그때가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랬다. 바가지에는 순수한 시골사람들의 질박한 생활과 무르녹은 인심, 도타운 정, 서로 믿고 돕던 따뜻함과 신뢰가 꽃처럼 피여있었다. 손끝에 물 마를 새 없는 부지런한 어머니들처럼 하루도 쉴줄 모르는 바가지는 하루 이틀, 한해 두해 지나면서 색갈이 누렇게 변하고 닳고 닳아 반지르르해지다가 금이 가고 깨진다. 그러면 어머니는 바가지를 물에 불궈놓고 굵은 이불바늘로 꿰맨다. 이렇게 어머니의 손때가 묻어있고 가족들의 삶의 애환이 깃들어있는 바가지는 집안에서 대를 이어 사용하는 대물림보배로 된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박을 단순히 식물로만 보지 않았다. 강남 갔던 제비가 갖다준 박씨를 심은 흥부와 놀부, 그러나 박을 타니 흥부네 집엔 보물바가지를, 놀부네 집엔 도깨비바가지를 주지 않았던가? 이처럼 《흥부전》에서 바가지를 신비한 존재로 다루고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박 같은 알에서 나왔다 해서 박씨가 되였다던가? 우리의 조상들이 빈털터리가 되여 눈물 젖은 두만강을 건너올 때 《쪽박을 차고》건너왔다고 말하지 않는가. 조상들은 바가지를 일상용구보다 흥부가 지녔던 소망 같은것과 함께 고향 초가지붕에의 향수마저 지니지 않았을가? 우리 민족 결혼식에서 무조건 빠지지 않는것이 신랑 신부가 함께 바가지를 던지는 장면이다. 바가지가 엎어지면 아들, 우로 향하면 딸이라는 결혼풍경은 우리에게만 있는 풍속이다. 또 바가지는 타령의 타악기로도 씌였다. 《삼국유사》의 원효조에 바가지를 두드려 악기로 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오랜 옛날부터 사용했던것으로 보인다.《바가지타령》도 있고 시골에서 겨울이면 아낙네들은 따뜻한 정지구들에 삥― 둘러앉아 바가지를 돌려 꼭지가 가는 사람에게 노래를 시키기도 했다. 녀인들은 바가지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면서 미운 정들을 날려보내고 살아갈 용기와 힘을 다듬어낸것은 아니였을가?! 많은것을 담았고 많은것이 넘쳐났던 모나지 않은 동그란 박바가지! 모든것을 포용하는 후덕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심성과 자태가 바가지에 어려있다. 언제부터인가 초가가 걷히면서 그토록 요긴하고 랑만과 정이 담긴 박바가지가 거의 사라지고있다. 그대신 앙증맞은 플라스틱 바가지가 범람하고있다. 값싸고 색상도 곱고 모양도 세련된 플라스틱 바가지지만 기분이 언짢아진다. 그때의 그 랑만, 그 바가지에서 풍겨나오던 그윽한 인심이 그래 인젠 영영 사라진단 말인가?! 부디 박바가지에 서린 민족적정서와 우리 녀성들의 대물림 사랑과 인고의 삶의 숨결 그리고《흥부의 박》같은 소망은 세월의 물살에도 영원히 씻겨내려가지 말아야겠다. 우리의 결혼식에서 바가지를 뿌리는 풍경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듯이. 그것은 우리의것이니깐! /장수철
3    정겹지 않는 이름 “부락” 댓글:  조회:1210  추천:7  2014-01-08
  오래된 초가와 기와집(瓦家)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초가 지붕우에 달덩이처럼 올라앉았던 박도, 흙담을 장식했던 호박도 이제는 옛 풍경화에서나 찾아보게 된다. 그런데, 기쁨이랄가, 여기 두만강변에 우리 선조들의 생활모습을 추상할수 있고 그 생활흔적을 느낄수 있는 오랜 세월 버텨온 우리 민족의 전통가옥이 복원되였다! 바로 도문시 월청진 백룡촌의 “백년부락”이다! 100년 전통가옥들이 들어앉은 마을을 멀리서 바라보노라면 그 들어앉은 모습이 주변의 자연과 썩 잘 어울리고 있음을 알수 있다. 왼편에는 펑퍼짐한 산줄기가 감싸고 있고 오른편에는 민족의 한이 서린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니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이다. 마을을 안으로 쑥 들어가 보면 집집의 자리와 향방이 전체 마을의 앉음새에 어긋남이 없이 한집 한집이 독립되여 작은 보금자리로 꾸며져있다. 집과 집 사이의 꼬불꼬불한 길, 울안이 들여다보일 만큼의 야트막한 토담, 함께 사용하는 드레박우물, 석마돌, 달구지, 들통나무로 된 연기굴뚝-구새통, 못하나 박지 않은 건축양식 하나하나에서 우리 조상들의 삶의 숨결을 느낄수 있다. 그뿐이랴, 집에 들어서면 까래구들, 정주간, 방, 고방, 사랑채, 미감이 가는 오지독, 지그릇…게다가 순대, 떡, 개고기, 엿 등 조선족특색음식을 맛볼수 있고 농경생활을 체험하고 민속표현까지 구경할수 있다. 고풍스러운 “백년부락”은 어쩌면 우리 민족의 력사적 생활흔적을 재생시키고 그 가치를 보유하고 지킨다는 의미가 더욱 크다고 생각된다. 민족의 이민사를 모르고 선조들의 풍속과 생활양식을 잘 모르는 우리의 후대들에게 전통건물은 단지 100년의 건축물이란 의미를 훨씬 뛰여넘지 않는가! 유구한 문화유산이란 쓰다버리는 헌신짝이 아니라 부단히 재창출되면서 그의 생명력이 어이져야 하는것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옥의 티랄까, 마을어구 돌비석에 새겨진 “백년부락”이란 글자가 필자의 가슴을 서글프게 했다. 문제는 ‘부락’이라는 말이다. 부락(部落)이라는 명칭은 일본에서 천민집단이 모여 사는 곳을 일컫는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17세기 도쿠가와 막부시대에 민중지배정책의 하나로 부락차별이 생겼다. 도쿠가와 막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농공상(士农工商)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만들었다. 이 가운데 농민은 무사 다음 가는 신분으로 정해놓았지만, 실제로는 가장 낮은 신분 취급을 받고있었다. 그러한 농민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해 도쿠가와 막부는 농민보다 더 낮은 천민층 부락민을 만든것이다. 일제통치기에 일본은 우리의 모든 마을 이름 뒤에 '부락'이라는 말을 붙여 부르게 했던 것이다. 우리민족을 천민시하려는 의도가 배여있었던것이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약 300만명의 부락 출신자들이 결혼, 취직 등에서 차별을 받고있다고 한다. 필자가 한국에 5년간 있으면서 많은 시골 마을을 돌아다녔지만 ‘부락’이라고 부르는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혹시나 조선에 있을가 싶어 조선의 이름있는 어학자한테도 문의하니 조선에서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에는 여러가지 이름이 쓰인다. 촌락, 촌, 동, 마을 등으로 불리는 마을 이름 중 역시 '마을'이 제일 정감어린 명칭이다. 정겨움과 따스함이 느껴지는 ‘마을’이라 부르자. 그리고 ‘부락’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것이 좋은것 같다. 살아있는 민속마을 “백년부락”을 찾는 관광객들 가운데서 필자와 같은 생각을 가지는 분들이 많을까봐 저으기 걱정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다. 연변일보
2    부르하통하 장벽 댓글:  조회:1942  추천:1  2013-06-26
언제부터 흘렀을가? 또 얼마나 흘렀을가? 또 얼마나 흘러야 할가? 연길시민들의 젖줄이나 진배없는 부르하통하는 도시시민들의 삶의 애환을 넉넉히 안아주면서 유장하게 흘러간다. 자치주 수부도시 연길에서 나름의 운치를 돋구는것은 아마도 부르하통하일것이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부르하통하 량안에는 버드나무와 풀섶이 무성했다. 강변에는 자갈이 있고 모래밭이 있었으며 록음방초속에 파묻힌 아름다운 청년호가 자리잡고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강변을 따라 하루가 다르게 고층 아빠트와 빌딩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강변에는 강변도로가 생겼고 오락시설이 들어선 둔치가 생겨났으며 고층 아빠트와 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났다. 강변에는 어느새 "아빠트언제"가 세워졌고 그것은 거대한 "장벽"처럼 도시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고말았다. 수초와 나무뿌리 가득하고 낚시군들이 오구작작 모여들던 아름답던 청년호는 드넓은 광장으로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모든것이 제법 깨끗하게 변해보인다. 프랑스 빠리의 세느강 량안은 엄격한 고도제한으로 5층 이상 건물을 짓는것이 불가능하며 재건축도 엄격히 제한되고있다고 한다. 런던은 도시의 고풍스러운 격조를 유지하고 오래된 건물을 아끼는 점에서 단연 앞서있는 도시이다. 지금 런던시민들이 "런던을 상징하는 현대건축물 1위"로 꼽고있는 템즈강 강변 거킨빌딩도 2004년 건립 당시에는 오이를 반쯤 잘라 세운것 같은 기괴한 모양으로 템스강에 그늘을 드리운다고 격렬한 론난을 자아냈다. 이 하나의 건축물을 통과하는데 5년이란 여론수렴의 시간을 거쳤다고 한다. 경제개발과 산업화의 세찬 파도에 서울의 한강변도 무조건 높이, 많이 짓는바람에 "서울의 장벽"이 생겼다고 한다. 무분별한 개발은 한강을 따라 끝없는 콩크리트장벽을 이루었고 한강은 콩크리트숲에 가리워버렸고 재빛으로 죽어가는듯 보였다. 한강의 조망권이 형편없게 되여버리자 서울시는 한강의 조망권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건축물과 경관을 해치는 건물들은 무너뜨렸고 다시는 높은 건축물을 한강변에 짓지 못하도록 엄격히 제한하였다고 한다. 싱가포르, 뉴욕, 리우데자네이루, 시드니 등 해외의 유명도시는 바다와 강에 어울리는 다양한 건축물로 높고 낮은 조형미를 이루어 아름다운 도시를 이루고있다. 그들은 개발에서 오는 눈앞의 리익보다는 도시미관을 해치는 무분별한 건축을 엄격히 제한하여 백년대계를 바라보는 도시개발을 하고있는것이다. 어떤 특정한 사람(부자, 개발상, 권력층)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도시에 살고있는 모든 시민을 위한 지혜로운 정책을 펴고있는것이다. 도시를 가로지나는 강은 그 도시 전체 시민의 강이다. 강변을 어떻게 조성하느냐에 따라 도시주민들 삶의 질이 정신적, 경제적으로 달라진다. 부르하통하 량안의 건축물들을 한번 살펴보라. 대부분 호텔이나 빌딩들이며 연길시에서 아빠트가격이 제일 높은 건축물들이 자리를 잡고있다. 어디 그뿐인가. 각종 카페와 술집, 다방이 뒤질세라 들어선다. 연길이라는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나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수 있는 오페라극장이나 미술관, 영화관 같은것은 거의 찾아볼수 없다. 미관은커녕 강의 조망권과 경관을 해치는 흉물스런 건축물도 더러 있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망가뜨리고 주변의 경관을 해치는 건축물은 지금이라도 당장 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생명의 강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것이다. 콩크리트 "아빠트제방"에 부딪쳐 부르하통하는 멍들어가고있다.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콩크리트장벽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히 고려해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강은 어제도 흘렀고 오늘도 흐르고 래일도 흐를것이다. 무분별하게 개발할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강변을 만들어 미래 세대에게 물려줘야 하는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 아니겠는가! 연변일보 26일자
1    [수필] 고향의 고개길 댓글:  조회:1687  추천:3  2012-10-06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 60주년 기념응모 1등상   고향의 고개길 장수철   고개고개 고개길 학교 가는 길 공부하고 휘호호 휘파람 불며 붉은 댕기 팔라라 오빠 오는 길   꼬불꼬불 꼬불길 밭에 가는 길 일 다하고 딸라랑 황소를 몰고 엄마아빠 웃으며 돌아오는 길   그랬다. 영철이도 룡남이도 불렀고 순이도 옥이도 불렀다. 진붉은 진달꽃들이 바람에 한들거리고 하품을 하는 소가 끄는 수레가 덜컹덜컹 지나가기도 하고, 못난 돌멩이가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울퉁불퉁한 작은 고개길이였다. 또한 해맑은 아이들이 재잘재잘 신나게 달려가고, 흰옷 즐겨입는 할머니 어머니들이 장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넘나들던 그런 고개길이었다. 아직까지도 까치산기슭에 창문아래는 잉크색재물칠을, 우는 하얀 회칠을 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은 길고 외진 마을의 서쪽에 난, 소수레가 무난하게 다닐수 있었던 고향의 그 고개길을 잊은 친구는 없을것이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바깥세상과 통하는 나트막한 고개, 그 고개를 넘나들면서 우리는 짜개바지를 벗었고 소녀애들은 고무신을 벗었으며 어김없이 찾아오는 인생의 사춘기를 맞이하였다. 고개 너머 저쪽엔 무엇이 있을가? 흐릿한 날 고개너머에서 들려오는 개산툰으로 달려가는 기차의 기적소리는 우리 시골애들에게 신비와 경이를 자아내게 하였으며 우리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만들었다. (기차는 정말 길가?, 기차는 정말 빠를가?) 고개너머 저쪽에는 필경 가난한 우리 마을보다 행복한 락원의 세계가 있을것 같았다. 고개길 옆에서 하품을 하며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보다 칙칙폭폭 기적소리 내며 달리는 기차가 시골애들에게는 더더욱 좋았다. “사람은 벌로 가야 해! 벌로!” 항상 흰 옷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흰 베적삼을 입고  대통을 물고 다니는 마을의 좌상어른이신 영남이 할아버지는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할아버지가 태여난 집에서 내 아버지가 태여났고 그 집에서 내가 태여났지만 마을 누구의 부모들도 자기 자식만큼은 저 고개를 너머 고향을 떠났으면 했다. 새순이 돋고 제비가 돌아오던 어느해 마을에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철호형님과 말이 있던 마을에서 제일 예쁘게 생긴 쌍가매누나가 도시로, 그것도 지팽이 짚고 다니는 소아마비한테 시집가게 되였다. 얼근하게 취한 철호형님을 보고 쌍가매엄마가 큰소리를 쳤다. “가난뱅이한테 내 딸을 주라구? 꿈도 꾸지 말어!” 드디여 쌍가매는 해방패차에 앉아 고개를 넘어 도시로 시집가게 되였다. 어떤 마을로인들은 혀를 찼다. “쌍가매는 해방패차를 타고 도시로 시집가게 되였으니 오죽 좋으랴!” 그후 마을의 누나들이 하나 둘 고개를 넘어 벌방으로 도시로 시집을 떠났다. 하지만 다른 고장에서 우리 마을로 시집오는 처녀들은 거의 없었다. 가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비가 오면 질퍽하게 젖어 진흙탕이 되고마는 그 고개길이 못견디게 싫어졌다. 소학교를 막 졸업할 무렵 한패의 도시청년들이 한적한 시골로 찾아왔다. 집체호 형님 누나들은 자전거도 마음대로 타고 다닐수 없다며 흙먼지가 포실포실 일어나는 마을의 구불구불한 고개길에 대해 여간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게다가 집체호 한 형님이 공사에 회의를 갔다가 저녁 늦게 고개길을 넘어오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였다. 또 어느날에는 집체호 영숙이 누나가 도시의 집에 갔다오다가 고개길에서 풀을 밟아 넘어지는 등, 사람들이 고개길때문에 불편을 겪는 일이 잦아졌다. 마을사람들도 “돌멩이 뿐인 길”이라는둥, “없애버리고 다시 만들어야겠다”는등 고개길에 짜증을 내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나.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마을의 돌격대청년들이 삽과 괭이를 들고고개길 여기저기를 파헤치고 량옆의 나무들을 잘라내더니 넓고 반듯하고 아주 큰 길로 만들었다. 고개길은 이제 더 이상 작고 못생긴 예전의 고개길이 아니였다. 얼마후 마을에는 현성에서 오는 뻐스가 다니기 시작하였다. 호도거리를 시작하자 부지런한 철호네가 맨먼저 흑백텔레비죤을 사가지고 그 고개길을 넘어왔다. 얼마후에는 영호형님이 가슴에 꽃을 달고 그 고개길을 넘어서 참군했다. 뭐니뭐니해도 고개 넘어 들려온 대학입학시험소식이 제일 반가운 소식이였다. 드디어 마을에도 대학생이 나타났다. 승호형님이 시골에서 첫 대학생이 되여 그 고개길을 넘어 대도시의 대학으로 날아갔다. 시골 부모들은 그들이 못배운 한을 자식들에게 풀어보려고 허리끈을 졸라매며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소를 키워서 팔고 힘든 담배농사와 고추농사 그리고 산나물을 뜯어다 팔아서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마을에는 현성중점고중에 입학하는 애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대학생들도 다른 동네들보다 많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대학생이 많이 나오자 고개 넘어 다른 마을에서 우리 마을로 이사를 오는 집들도 많아졌다. 우리는 저 고개를 넘어 도시로 가려는 꿈의 깃을 펼치려고 죽기내기로 공부하였다. 도시로 가면 뭔가 있을터이다. 이곳보다는 더 좋은 무언가가 있을것이다라는 기대감에 부풀기까지 한 꿈. 그렇게 꿈꾸던 나는 끝끝내 고향의 고개길을 넘어 현성중점고중에 입학했다. 기숙사생활을 하던 나는 달말이면 쌀과 김치, 고추장을 가지러 꼭꼭 고향으로 오는데 어머니는 몇시간전부터 고개마루에 서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신다. 시골애들이 도시에 가서 고중, 대학을 다니면서 공부할 때 우리의 부모들은 자식들의 앞날의 위해 그 얼마나 어려운 고개를 수없이 넘어야만 했는가. 언제부터인가 마을에는 한국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은 너도나도 경쟁이라도 한듯 땅을 팽개치고 돈 벌러 고개길을 넘어 출국하였다… 또 돈을 벌어서 고향에 돌아왔다가는 다 도시로 뿔뿔이 나갔다. 사람들이 도시로 외국으로 떠나자 이젠 마을에는 사람들이 손을 셀 정도였다. 그때쯤 그 고개길도 콩크리트길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라에서 초가집을 개조하고 마을마다 콩크리트길을 닦았던것이다. 소달구지가 다니던 흙먼지 뽀얀 고개길이 넓은 아스팔트길로 변했다. 안타까운것은 다니는 사람이 더 많아진것이 아니라 더 적어졌고 더우기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혹간 안쪽에서 나와 림시로 밭을 도맡은 왕씨가 기세사납게 뜨락또르를 몰고 그 고개길을 퉁퉁 달리고있었다. 해마다 봄이면 굽이굽이 고향의 고개길옆에는 예나 지금이나 진달래가 붉게 피여나지만 마을을 떠난 사람들은 다시 올줄을 모른다. 고향에서 살던 이들은 다시 이 고개를 넘어 돌아올 날을 꿈꾸며 어디로 떠난것일가? 다시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우리들이 살아온 구구절절한 애환이 스며있는 고향의 고개길을 추억하는이도 분명 있을터인데… 어릴적 짙기만 했던 푸른 산과 끝간데 없이 높기만 했던 하늘과 향기로운 바람을 함께 향유했던 순수했던 시절을 보냈던 친구들은 아직도 나처럼 정다움과 따뜻함이 녹아있는 그 고개길을 잊지는 않았을것이다. 더우기 도시락 숟가락이 탕탕 구르는줄도 모르고 숨가삐 달리던 고향의 그 고개길을.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 돌아오면 자가용차를 몰고 부모님의 산소가 있는 고향으로 찾아간다. 나는 버릇처럼 고개마루에서 차를 세우고 쉼을 한다. 청운의 꿈을 심어준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고향의 고개길, 그 고개마루에 서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눈가에 이슬이, 입가엔 옅은 미소가 그리고 가슴엔 아린 그리움이 밀려온다. 유년의 기억 저편에서 어머님이 손짓하는 아련한 그리움이 말이다. 마치도 학교에서 하학하고 돌아올 때 고향마을의 굴뚝에서 피여오르는 밥짓는 하얀 연기를 보았을 때의 그 아련함처럼 말이다. 이 그리운 향수를 지금 나의 고향에서 살고있는 왕씨는 영원히 체험하지 못할것이다… 그것은 우리들만의 고향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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