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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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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진으로 보는 조남기 장군 (1) 댓글:  조회:927  추천:0  2021-06-02
중국조선어방송넷 특별기획   [2주기의 그리움] 사진으로 보는 조남기 장군 (1)   중국조선어방송넷 中国朝鲜语广播CNR     이름: 조남기 향년: 91세(1927년4월20일 - 2018년 6월17일) 민족: 조선족 약력: 우수한 중국공산당원, 충직한 공산주의전사, 무산계급혁명가, 걸출한 민족사업지도자, 중국 군부대 현대후근건설 지도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9기 전국위원회 부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전 위원,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근부 전 부장, 군사과학원 전 원장, 중국인민해방군 상장(上將).       그의 일생     1927년 4월20일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여남 1940년 겨울 부모따라 중국 길림성 영길현 차로하진 불당촌 이주 1945년 9월 길림성 민족해방동맹 가입, 차로하에서 조선족청년자위대 편성 1945년 12월 동북군정대학길림분교 입학 1946년 11월 길림성 토지개혁사업조 대원, 연변지역 토지개혁 참가 1947년 2월 중국공산당가입 1947년 봄 선후해 중공 연변지구위원회 사무원, 총무과장, 비서 1949년 7월 중공 길림성위원회 정책연구실 연구원 1950년 9월 동북군구 사령부 정보부 참모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작전참모처 참모, 첫기 항미원조 지원부대 따라 참전 1951년 6월 선후해 중국인민지원군 후근사령부 참모처 운수조 조장, 운수과 부과장, 과장 등 직무 력임 1955년 중국인민해방군 후근학원 진학, 졸업후 학교 후근학원 운송계 교원 1957년말 중국인민해방군 후근부 철군판공실 주임, 중국지원군 대표단 참가, 1958년 10월25일 마지막 지원군부대 따라 조선에서 철수 1959년부터 선후해 길림성 연변군분구 정치부 부주임, 주임, 연변군분구 부정위, 제1정위.  1967년 3월부터 1967년 9월 연변지구 군사관리위원회 부주임, 연변지구 생산지휘부 주임 1967년 9월 중순부터 1972년 3월 착오적인 비판 심사를 받고 로동개조 1972년4월 길림성 통화군분구 정위 1977년 7월 선후해 길림성군구 정치부주임, 부정위, 정위 1978년 4월 선후해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원회 제1서기, 자치주혁명위원회 주임, 자치주인대 주임 1979년 선후해 길림성 부성장, 중공 길림성위원회 부서기 겸 길림성 부성장, 중공 길림성위원회 서기 1985년 3월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근부 부부장 겸 부정위 1987년 11월 중국인민해방군 총후근부 부장 1988년 4월 선후해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1988년 9월 중국인민해방군 상장 임명 1992년 10월 중국인민해방군 군사과학원 원장 1998년 3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9기 전국위원회 부주석 선후해 중공 제12기, 제13기, 제14기 중앙위원, 제5기, 제6기, 제7기 전국인대대표, 제5기 전국인대 민족위원회 부주임 력임   [사진으로 보는 그의 일생]           조남기의 할아버지 조동식은 충청북도 청원군 지역에서 반일운동을 조직하다가 수감생활까지 했던 반일투사였고 부친 조룡구는 경서를 숙독한 지식인으로 그들의 강직한 성격은 어린 조남기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40년 조남기 일가는 조선반도를 떠나 길림성 영길현 차로하진 불당촌에 왔다. 이 사진은 조남기의 출생지 충청북도 청원군에 있는 생가이다.        조남기 아버지 조룡구(赵龙九)     조남기 어머니 박리현(朴利显)       2000년 4월,  조남기 장군 한국방문기간 조부묘지 찾아 제사를 지냄       1991년 5월 조남기 장군과 그의 형 조남홍        1994년 여름, 조남기 장군과 그의 누나 조남례        2004년 5월 조남기 장군과 그의 동생 조남정        1991년 4월 조남기 장군과 그의 동생 조남원        2000년 4월 조남기 장군과 그의 동생 조남욱              조남기 장군이 입쌀을 증정하는 장면을 옮긴 그림.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투항한후 조남기는 길림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하고 고향을 지키기 위해 조선족청년자위대를 조직. 동북민주련군이 차로하지역에 진입한후 조남기가 군중들을 발동해 25만근의 쌀을 군대에 바치면서 관병들 사이에서 “입쌀을 먹고 싶으면 조남기를 찾아라”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주보중 장군의 경호원이였던 류의권의 회고록에 조남기가 군대에 쌀을 기부하는 과정을 서술했다.       류의권 회억록의 한단락       동북민주련군 부사령원,  길림성 인민정부 주석 주보중 장군.  조남기의 혁명열정에 감동받아  동북군정대학에 추천했다.  조남기 1945년12월 입학.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의 옛터.  1946년 겨울, 룡정으로 전학.  1946년 11월 조남기는  기타 5명의 우수학원들과 함께 사전졸업 함.       군정대학 교기       2007년 7월  전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 동학들과 만난 조남기            1946년 12월 조남기는 길림성토지개혁공작조를 따라 연길현 평안구에서 토지개혁운동 진행했다. 그는 토지, 가축, 농기구로 입주하는 첫 호조팀(互助组)을 만들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로동모범 김시룡을 양성해냈다.        김시룡이 이끄는 호조팀       전국로동모범, 전국인대상무위원 김시룡  전국인대상무위원회 소조회의 참가       연길시 서광장에서 진행된 참군대회       토지개혁으로 땅을 분배받은 조선족군중들이 적극 참군            1949년7월 조남기는 중공 길림성위원회 정책연구실 연구원으로 되였다. 1950년6월, 조남기가 쓴 “생산발전과 군중생활개선, 문화수준제고를 결부시킬데 관한 연구보고”.       항미원조시기 조남기와 전우들            지원군 후근사령부 부분적 지도원과 전선에서 단체촬영. 1950년 10월 조남기 첫기 항미원조 지원부대 따라 참전. 팽덕회 원수의 조선어 통역, 후근보장 등 직무 담임.       1958년 10월  조남기(왼쪽 세번째)와 전우들은 모안영 렬사와 고별             1958년 10월 30일 전국인대와 전국정협은 중남해 회인당에서 확대 련합회의 진행해 지원군 사업보고 청취. 조남기도 이번 회의 참석       조남기에게 보낸 회의참가 통지서             1998년 6월 조남기 장군 전국정협대표단 인솔해 조선방문. 방문기간 모안영 렬사묘비 앞에서 추모행사 진행.       2000년대초기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의 일각             1966년9월 조남기(오른쪽 두번째) 연변군분구 당위원회 성원들과의 단체사진.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서기 주덕해 (앞줄 왼쪽으로 세번째).       1979년 소년배우 만난 조남기       1983년 8월,  등소평 연변시찰시 장백산 오름. 조남기 수행.            1984년5월 조남기 도문에서 조선로동당 총서기이며 국가주석인 김일성 맞이.       1982년 3월 조남기 장효초 동지를 수행해  도문 석건평 조선족 농가구 방문       조남기와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서기 주덕해       주덕해동지 명예회복(平反)대회의 주석대에 앉은  조남기       1978년 8월,  조남기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재.  연변 경제의 장원한 발전 기획.       조남기의 결책으로 확건된 연변연초공장       연변연초공장시찰중인 조남기       조남기의 결책으로 건설된 연변방직공장       1978년 가을,  연변방직공장을 시찰하고 있는 조남기       조남기의 결책으로 건설된  연변맥주공장 및 빙천맥주       1980년 11월 량강발전소 부지 고찰중인 조남기       1980년 조남기가 돈화시 추리구촌에서 조사연구       1979년 4월 농민과학자를 방문한 조남기       1981년봄 왕청현 배초구진 시찰중인 조남기       1980년 11월  안도현 내두산촌을 찾아 시찰하고 있는 조남기.  도급경영문제와 관련해 촌민들과 토론하고 있는 장면.       1981년 9월 안도현 유수향 명신촌에서  농민생활상황을 시찰하고 있는 장면       1981년 조남기 안도현 내두산 발전소 시찰 장면       1982년 9월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주년 경축대회에서  그네 경기 우승 선수에게 메달 발급 장면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주년 경축대회에서  씨름 경기 우승 선수에게 메달 발급       씨름 경기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황소를 주고 있다.       1982년 9월3일  연변자치주 창립 30주년 경축대회에서  발언하는 조남기       연변자치주 창립 30주년 경축대회에서  표창기 전하는 장면        1982년9월 연변박물관의 준공식 참가한 조남기            조남기의 주최하에 중공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는 6.1 국제아동절을 “연변 전민의 명절”로 지정하고 어린이들을 위해 이날 하루를 공휴일로 정했다. 이로해 어린이의 성장에 대한 전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진은 1980년 6월1일 소선대원이 조남기에게 붉은 넥타이를 매주는 장면이다.        1981년 6월1일  아동절 “연변 전민의 명절” 경축대회에서       1982년9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주년 경축대회 현장       1996년 7월 왕청현 왕청촌 방문       1994년 여름 오도저수지 시찰       1994년8월 연길연초공장 시찰       2004년 6월 오동제약회사 시찰       1997년 왕청현맥주공장 시찰       2000년8월  연변 시찰시 연변인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다.     监制:金光永 审稿:赵香兰 编辑:金成龙、金政翼 编发:崔月丹 중국조선어방송넷
3    장군의 민족정신 (채영춘) 댓글:  조회:376  추천:0  2021-06-02
장군의 민족정신   채영춘   조선족의 장군별이 졌다. 별이 지고 나서야 그 빈자리가 얼마나 엄청난 것임을 통감하게 된다.   당중앙이 조남기 장군의 서거를 두고 표출한 정중하고 높은 례우는 조선족 장군에 대한 당과 국가의 두터운 신임을 단적으로 보여주어 더더구나 장군에 대한 숙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장군생애에 내린 당중앙의 빛나는 평가에서 필자의 눈을 끈 문구는 ‘걸출한 민족사업 지도자’였다. 아마도 필자의 머리속에 가장 뚜렷하게 각인됐던 장군의 이미지 때문이 아니였을가?   ‘걸출한 민족사업 지도자’ 평가를 안받침한 장군의 사상적 근간은 투철하고 확실한 민족관으로 정립된다고 생각한다.   자기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민족을 사랑할 수 없으며 민족의 리더로 된다는 것은 더구나 불가능하다는 게 고금중외의 정설이다. 장군생전에 가깝게 지냈던 여러 민족 지도자들이 장군에 대한 한결같은 평가가 “민족에 대한 깊은 감정, 민족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다.   장군의 민족감정, 민족사랑이 협애한 민족주의와 엄연히 담을 쌓고 있다는 점을 5년간 장군의 비서로 임직해온 전임 연변 주정협 황삭 주석이 반증한 말로 대신한다 ㅡ   “조선족 지도자로서 그이는 자기 민족의 발전을 지극히 관심하여왔습니다. 늘 자기 민족 간부와 군중의 소원과 애로사항을 있는 그대로 상부에 보고하여 해결을 보군 하였지요. 그이는 늘 이런 말씀을 하군 했답니다. ‘연변은 중국조선족이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는 고장이기에 조선족의 제반 사업을 중시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 점에 대해 한족동지들은 납득해야 합니다. 하지만 연변은 여러 민족이 공생하는 지역이고 한족 또한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도 고루 돌봐야 합니다.’”   투철하고 확실한 민족관을 지녔기에 장군이 조선족의 발전과 관련되는 모든 일에서의 관심과 배려는 정당하였으며 내린 결책은 설득력이 있었고 한족을 비롯한 기타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연변일보》는 조선문판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리유에 대해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ㅡ 한족간부와 한족군중들은 그래도 《연변일보》한문판 말고도 한문으로 된 여러가지 신문간행물을 볼 수 있지만 조선족은 《연변일보》조선문판이 그들의 유일한 신문이기 때문이다. 조선문판을 위주로 한다는 것은 민족구역자치를 실시하는 연변에서 응당 자치민족의 문자로 된 신문을 앞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며 문화대혁명시기와 그 후의 상당한 시기에 조선문판이 한문판의 번역판으로 된 상황을 개변시키자는 것이다.   장군의 《연변일보》조선문판 위주설은 또 인원편제와 운영자금 면에서 우선 조선문판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전제하에 조한문을 고루 돌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민족자치를 실시하는 연변에서 조선족의 발전을 우선시하면서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을 고루 돌본다는 장군의 일관된 ‘조선족 우선’ 당위성과 그 맥락을 함께 하고있다.   오늘날 조선족이 교육, 문화, 라지오TV, 신문출판 등 민족문화 많은 분야에서 국가로부터 받고 있는 우대정책 대부분이 장군의 민족사랑으로 이뤄낸 것이다.   오래동안 장군과 좋은 뉴대관계를 맺고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북경의 한 조선족 유명 학자의 말이다 ㅡ   “소수민족 출신으로서 높은 직위에 올라온 후에는 자기 민족과 접촉하면 불리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데 조남기 부주석은 그런 개념이 전혀 없는 분이셨다.”   사실 그랬다. 공직에 계실 때나 퇴임하신 후에도 수도나 지방이나 고향마을 조선족들의 그 어떤 주문도  무릇 조선족 발전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내색도 내지 않으며 발벗고 나선 장군이셨다. 투철하고 확실한 민족관을 지닌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였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계산된 꼼수에 전전긍긍하면서 자기 민족의 리익과 발전에 별다른 관심이 없고 자기 민족 문화와 관련된 여건은 수수방관하며 선대들이 구축한 민족문화에 팔짱끼고 강건너 불보듯 하는 일부 조선족간부들의 행태를 우리는 가끔 봐왔다. 남의 눈치보기에 여념이 없으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민족발전에 등을 돌린 개별적인 간부의 행실도 좌시해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장군의 민족관에 비춰볼 때 너무나 거리가 멀다. 따져보면 이 같은 행태는 자기 민족에 대한 불충이면서 동시에 당의 민족정책에 대한 불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족에 대한 장군의 깊은 감정과 따뜻한 사랑에는 조선족의 빛나는 혁명투쟁력사에 대한 자부감, 조선족의 혁명유산을 대대손손 전승해야 한다는 절절함이 스며있다.   장군은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렬사비’ 인문경지를 조선족 로세대들이 목숨으로 바꿔온 홍색유전인자로, 중국조선족의 영원한 대물림 긍정적 에너지로 마음에 담고 있으면서 그것을 미디어 영상물로 재연시키려는 확고한 의지를 세우고 계셨다.   1946년부터 1948년 3년간 연변에서 해방군에 참군한 인수는 5만 1000여명, 그 중 조선족이 85%를 차지하며 전쟁터에서 희생된 연변의 혁명렬사는 3000여명으로 조선족이 90% 이상을 차지한다. 3년 해방전쟁은 중국조선족이 중국인민의 해방위업을 위해 지불한 희생이 가장 많고 지불한 대가가 가장 큰 시기로 되고 있다. 이 불멸의 조선족력사는 줄곧 장군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1993년, 장군은 연변TV방송국 관계자를 만난 자리에서 력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조선족이 해방전쟁에서 보여준 비장한 혁명영웅들의 형상을 영상화할 데 대해 지시하면서 저세상으로 간 해방전쟁시기 조선족 혁명렬사와 렬사가족, 해방전쟁에 참가한 모든 로병들 그리고 연변 여러 민족들에게 값진 ‘선물’을 드리자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면서 몸소 영상물의 기획과 설계에 구체적인 지도를 주고 자금마련에도 나섰다. 12집 련속 드라마 《초연 속의 수리개》는 이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   그 당시 TV방송국 책임자로 있던 필자에게 있어서 이 드라마의 기획, 설계, 촬영, 제작 전반 과정은 장군의 우리 민족 혁명투쟁력사에 대한 진지한 감정, 희생된 선렬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지척에서 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조선족에 대한 장군의 깊은 감정과 따뜻한 사랑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였다. 제작이 완료된 후 미숙한 드라마 견본을 자세히 봐주시고 그처럼 기뻐하시며 구체적인 수정의견을 제시해주시던 장군의 23년 전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장군은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하지만 조선족 불세출 장군이 생애 전반에서 보여준 민족에 대한 깊은 감정과 따뜻한 사랑은 불멸의 정신금자탑으로 되여 우리의 민족관을 쉼없이 정화시켜주리라 믿는다. 장군의 민족정신 영원하리라! 연변일보   채영춘 전 연변주당위선전부 부부장
2    리덕수: 조남기정신 우리가 적극 계승 발양해야… 댓글:  조회:443  추천:0  2021-06-02
리덕수: 조남기정신 우리가 적극 계승 발양해야…   전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리덕수동지가 회고하는 조남기동지   6월25일 오후, 조남기동지의 추도회가 끝난후 본사기자는 조남기동지의 생전에 그분과 사업상은 물론 생활상에서도 다년간 매우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계셨던 전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며 중앙통전부 부부장이였던 리덕수동지를 취재했다.   조남기동지의 추도회에 대해 리덕수주임은 중앙에서 매우 중시했는바 추도회가 성대하고 차원이 높았으며 범위가 넓었다고 강조했다. 이번 추도회에는 습근평, 리극강 등 현임 최고지도일군들은 물론 강택민, 호금도 등 전임 지도일군들까지 직접 추도회에 참가하거나 혹은 가타 방식으로 애도를 표시했으며 당정군 각계 대표들은 물론 흑룡강성, 료녕성, 길림성, 및 연변의 조선족대표, 그리고 연변대학의 대표들까지 참가했다.   리덕수주임은 중앙에서 조남기동지의 서거에 매우 큰 중시를 돌리였으며 추도회가 매우 엄숙하면서도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평가했다.   조남기동지에 대한 평가는 신화사, 중앙텔레비죤방송국 등 국가급 매체의 보도들에서도 보여주다싶이 평가가 매우 높았을뿐만아니라 전면적이고 무게가 있었다고 리덕수주임은 말했다. 조남기동지는 우수한 중국공산당원일뿐만아니라 우수한 민족사업자, 우수한 군대의 지도일군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조남기동지는 확실히 당과 국가, 민족, 인민군중들을 위해 매우 많은 일을 하였으며 또 걸출한 기여를 하였다.   리덕수주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알건데 조남기동지는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한 우리 나라 로일대들가운데서 얼마 남지 않은 제일 마지막 로일대 동지일것이다. 조남기동지의 일생은 초심을 잊지 않고 분투한 일생이라고 말할수 있으며 당과 국가, 인민군중 그리고 민족에 대한 기여의 일생, 영광스러운 일생이라고 말할수 있다.     조남기장군 추도식장에서 가족을 위로하는 전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리덕수 주임   조남기동지와의 사업관계에 대해 언급할 때 리덕수주임은 평소 그분과 접촉이 비교적 많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1임 서기는 주덕해이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의 제2임 서기는 조남기동지였다. 나는 조남기동지의 뒤를 이어받은 제3임서기라고 말할수있다. 조남기동지와의 이러한 사업관계들로 하여 우리는 평소에 접촉이 비교적 많았다. 사업상에서는 물론, 생활상에서도 접촉이 많았는데 연변에 있을때는 물론, 길림성과 중앙에 온 후에도 우리는 접촉이 비교적 많았다. 조남기동지와 접촉하면서 나는 그분한테서 매우 많은 것들을 배웠다. 조남기동지는 나에 대해 매우 관심하였는데 그동안 돌려준 관심과 사랑에 감격되며 그분이 나에 대한 이러한 관심들을 영원히 잊을수 없다.   리덕수주임은 조남기동지와 가까이 접촉하면서 느껴왔던 조남기동지의 지도일군으로서 갖추신 몇가지 특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조남기동지는 머리를 잘 쓰셨는데 문제를 해결하는데 수준이 매우 높았으며 문제들을 잘 해결하셨다. 또한 사업가운데서 관찰능력이 뛰여나셨는데 문제를 제때에 발견하고 적시적으로 해결하시였다. 조남기동지는 형세를 제때에 따를줄 알았으며 시대와 호흡을 같이 하면서 대담히 돌파하고 창신할줄 아는 새로운 사유를 지닌 지도일군이였다. 조남기동지는 민족문제에 대해서도 연구가 깊었다. 민족에 대한 감정이 깊었으며 민족을 열애하고 민족문제 처리를 잘하셨을뿐만아니라 민족사업을 잘하신 매우 훌륭한 지도간부였다.   리덕수주임은 조남기동지가 평소 친구들을 널리 사귀고 깊이 사귄 특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남기동지는 벗들을 광범하게 사귀였을뿐만아니라 친분이 깊게 사귈줄 알았다. 때문에 조남기동지는 사업가운데서 단결과 조화에 능한 지도일군으로 될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건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재부는 금전이거나 권력이 아니라고 본다. 돈이 많다고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니며 높은 직위에 있다고 해서 가장 대단한 것이 아니다. 가장 큰 재부는 바로 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벗들이 있는가 하는것이다. 벗이 많을수록 그만큼 행복하고 성공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리덕수주임은 마지막으로 조남기동지의 상술한 사상경지와 우수한 품덕들을 적극 계승하고 발양하여 향후 우리들의 각항 사업들을 잘 펼쳐 나갔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리덕수주임은 조남기정신은 우리들의 제반사업, 즉 당과 국가, 사회와 인민을 위한 크고 가치있는 일들에 영향줄수도 있지만 작게는 우리들의 인생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잘 영위해나가는가 하는데도 분명히 좋은 계시와 도움이 될것이라고 말했다.     길림신문 북경특파 취재팀 안상근 김성걸 기자     길림신문 북경특파 취재팀 안상근 김성걸 기자  
1    赵南起将军,无限怀念您!(崔龙浩) 댓글:  조회:523  추천:0  2021-06-02
赵南起将军,无限怀念您!    崔龙浩         一颗灿烂、耀眼的星星陨落了,痛哉,哀哉!       赵南起将军,您原任全国政协副主席,是我们国家的领导人之一;您曾任中央军委委员、总后部长,是我军现代后勤建设的领导者;是我国杰出的民族工作领导人。您的一生充满传奇,建树光辉业绩,在漫长革命生涯中,为中华民族散射、耗尽了光和热,如今乘鹤西去,给我们留下了无尽的思念!        我是一个平凡的人,却有幸与您相识、交往30多年,长期受到到您的亲切关怀和教诲。此情此景已镌刻在我脑海里,永志不忘。       1982年4月我做为主要翻译随邓小平、胡耀邦访朝归来,局领导便告知由于我的“民族属性”,不便继续在中联部工作。我突然遭到一记闷棍,心情很迷茫。恰在这时闻得您出差来京,由中央党校崔龙水教授引荐,我到宾馆进行第一次拜访。您时任中央委员、中共吉林省委书记。对我而言,重要的您是朝鲜族的领袖人物,可以向您倾诉遭受的冤屈!初次见面,您平易近人,如同慈祥的兄长,和蔼可亲,善气迎人。您认真倾听我的诉说,明确指出这是违背民族平等政策的,不应如此对待少数民族的外事干部,但现在还不能改变这些社会偏见,还不如面对现实相应改变人生方向。你有能力,建议去国家民委工作,在那里发展进步可能更快些。第一次聆听您的谈话,那样的入理、中肯、透心,使我清新起来。您的导向,使我改变了工作轨迹。我采纳了您的建议,调入国家民委从事民族理论政策研究,开始了新的出发。       1989年秋,我奉国家民委党组委派,去开发地处西单商业闹市区寸金之地,此处开发价值极高。我引进延边一企业合作经营韩餐一条街,利用银行贷款,创办“民族大世界”市场。初具规模后,诚恳邀请您前来视察、指导。您利用星期天,携夫人来了,这真是莫大的支持。您听取我的相关介绍和规划,轻松自在、随意察看,边看边议,即席发表指导性意见。您认为这是块风水宝地,“民族大世界”会给民委赚大钱的。您嘱我好好经营,有所作为,并表示支持。此后民族大世界建成了,我却被调离了。此地后来按的您的预测发展,“民族大世界”果然赚足了很多钱,但也不幸,这里也养肥了大贪官。       2000年以后,我在中国西部发展促进会任法人代表、秘书长,主持日常工作。该会由退休书记、部长领导,网络一批部级干部,以民间社团身份,配合政府促进西部开发。我们创办《西部发展论坛》,几乎每年举办一次,为西部开发建言献策。您时任全国政协副主席,热情支持我们的论坛,有一次还莅临指导。我听说您亲自主持调研防止荒漠化课题,向中央提出重要报告。中央非常认可并采纳您的建议,大幅提高了治理经费 ,从此我国防止荒漠化事业进入了新的阶段。中国沙化、荒漠化基本都在西部,我会领导非常重视生态环境建设。我促进会与内蒙自治区合作,在呼和浩特召开论坛,我邀请您再次莅临支持指导。当时您有要事不能亲临,特拿出您的调研报告作为论坛的论文。在会上印发了,这是一篇政策性的论文,广受与会者的欢迎、重视,它对开好这次论坛具有指导意义。       李红光烈士是毛主席亲自点名的东北抗日三大英雄之一,他最早在磐石创建抗日游击队,开展武装斗争,是杨靖宇将军的生死之交。为纪念、继承、发扬他的革命精神,把磐石朝中更名为“红光中学”,拟在操场上塑李红光像,希望德高望重的中央领导题词。为此,该校校长来京要我帮助,磐石是我的家乡,朝中是我的母校,义不容辞。我认为彭真委员长德高望重,解放战争时担任过中央东北局书记,对朝鲜族很了解,请他题写合适。此事我先报告民委领导,按程序上报的同时,到总后向您提交致彭老的请示报告,恳请您支持并促成。我知道您非常重视教育,尤其是民族教育。您认为磐石朝中采取实际步骤,继承革命传统,弘扬英雄精神,高举爱国主义旗子,应予鼓励、支持。此后不久,我接到了彭老苍劲有力的两幅题词。母校于1988年9月举行简朴典礼,正式挂出彭老题写的“红光中学”校牌,题写“民族英雄李红光将军”的塑像揭幕,令母校焕然一新。由于有了您的亲切关心和鼎力支持,红光中学才成为定点的革命传统教育基地。        2012年喜迎您80华诞,我们组织小范围的家庭式祝寿聚会,洋溢着融融情谊。酒过几巡,空军原副司令员李永泰将军祝酒,他动情地说,当时空军的基础设施欠账很多,问题不少,赵部长对此特别关心,经过视察研讨,制定改革方案,积极实施,终于改变面貌,焕然一新。据说您任总后部长期间,勇于改革,敢于担当,领导、推进我军的现代后勤建设,我们得知都肃然起敬。崔雄济(崔健之父)和我情同手足,共同深受您的厚爱。我们非常珍视这份真挚情谊,由衷地祝您健康长寿,像不老松长青。用茅台酒祝贺时,您老人家说我不会喝酒,享受不到其中的乐趣,可惜呀,然后拍拍我背,举杯一饮而尽。一举一动暖人心,关爱之情溢于言表。       2000年4月,时任全国政协副主席的您率政协代表团访问韩国,这本是正常的友好访问,却因您的韩国血统而引起韩国朝野的轰动,韩国政府以最高礼遇接待,您的家乡百姓则倾城出动迎接在中国功成名遂的家乡赤字。据说,卢武铉总统会见您时提到“双重国籍"问题,可能是不了解朝鲜族群体形成的历史,及中国的相关政策。您从历史和现实的结合上,介绍了中国朝鲜族的形成历史,特别强调:一、新中国成立时进行土地改革,只有中国公民才能分得土地。留在中国的朝鲜人群体,绝大多数是农民,他们入籍才有土地;二、朝鲜族重视教育,只有成为中国公民才能获得政府支持,获得教育经费;三、朝鲜族对中国革命的贡献很大,已有几万村级以上干部在各级政府、团体工作。他的权威性的阐述,使卢总统了解了真相,认识到提出“双重国籍”不合适。从此违背中国政策的、损害朝鲜族中国公民地位的“双重国籍”论,在韩国消声匿迹,韩国媒体也不再进行炒作了。这是您发挥的无可替代的独特作用。您是促进中华民族大团结的、捍卫朝鲜族权益的杰出代表。如今您弃我们而去,有谁能代替您的特殊作用呢?失落感油然而生。       您胸怀坦荡,磊落光明,克己奉公。您对社会、军内的贪腐行为深恶痛绝,自己则守身如玉、廉洁奉公。对我个人而言,您是我的良师益友,是导师也是挚友。在那么多的接触、交往中,只有您的单方付出,而无我的相应回报。我从没想过给您什么回报,也没送过什么礼物或纪念品。“君子之交淡如水”。您是我们永远的楷模,您的崇高精神、豁达品格、高尚情操,是我们的精神财富,将永远激励我们向前。       安息吧,将军!无限怀念您!                                    2018-06-23      崔龙浩,1939年生,男,朝鲜族,党员,曾先后在中央联络部、国家民委、中国西部发展促进会工作,司局级干部,已退休。手机:139 0107 1350    위챗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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