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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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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태복: 겨울 뒤에는 봄이 정말 있을가(작품평)
2019년 07월 09일 21시 18분  조회:364  추천:0  작성자: jinhua

겨울 뒤에는 봄이 정말 있을가

-소설 <겨울개구리>와의 정신분석학적 대화

리태복

 

 

1.  텍스트 속 인물들의 동면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김경화의 손을 거쳐 생성된 텍스트를 접할 때면 언제나 표제를 은유나 상징적인 맥락에서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과제에 먼저 부딪치게 된다. 한 것은 그의 소설표제들이 대개는 련상이나 상징에 의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의 표제 역시 그러하다. <겨울개구리>라는 표제에서 우선 련상되는 표상은 무엇일가? 물론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마 ‘동면’일 것이다. 그 리유는 우리가 처하고 있는 북온대의 지리적 환경에서 개구리의 겨울철 존재양상은 ‘동면’이라는 형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개구리의 동면은 주지하다 싶이 일종의 생존을 위한 방어메커니즘이다. 가을에서 봄으로 통하는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겨울이라는 단계에서 생존을 지속하기 위한 과도적 양상인 것이다. 이러한 양상의 생성에는 혹독한 추위라는 외적 환경 즉 기후변화의 법칙과 생명증후를 조절하는, 례하면 영양물질의 축적과 소모절감, 최소한도의 호흡보장 등 개구리 자체의 능동적 선택이 아우러져있다. 개구리를 하나의 주체로 상정한다면 이는 욕망을 최소한도로 응축시킨 결과이며 쾌락원칙이 억압되고 현실원칙이 작동한 결과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개구리가 인간과 같은 의식적인 존재가 아니라 본능에 의해 행동하는 존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맥락에서의 해석은 이 텍스트를 리해하는데 한층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겨울개구리>에서 작중 인물들의 ‘동면’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우선 제1주인공이며 3인칭 객관적 시점 인물인 ‘그’의 상황을 보자. ‘그’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진취적 방향이 아닌 퇴행적 방향을 선택한다. 작품에서 ‘그’는 ‘모든 것이 처음’인 경험을 하며 한국으로 떠난다.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여러 일자리들을 전전하면서 부딪쳐보지만 결과적으로 더 높은 단계로의 ‘진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돈은 계속 딸린다. 이는 ‘그’가 새로운 환경과 질서에로의 진출에서 적어도 그 때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답보양상은 어쩌면 ‘그’의 무의식으로 하여 초래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한계를 벗어난 저돌적인 실험은 원래의 자신마저 잃을 수 있다는 위험을 인지한 데서부터 생겨난 자기방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그’는 용식이가 잣 따는 일을 부탁하자 기꺼이 승낙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찾은듯 페로부터 나오는 깊은 숨을 내쉬였다. 오랜만에 쉬는 깊은 숨이였다.” 그러니까 ‘그’의 쾌락은 새로운 도전이나 변화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 과거와 현재의 자신에게 알맞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때 그의 결핍사항은 일시적이고 표면적으로 보완되고 욕망도 제한적으로 충족되는 양상을 보인다.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된 후에도 그는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보내고 자신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샘골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길을 선택한다. 양로원에 맡기고 자신은 한국으로 돌아가 한번 더 새로운 질서에로의 진입을 시도해볼 기회와 조건이 주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산을 선택하고 잣따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그’가 겉으로는 인정하기 싫지만 그의 무의식 혹은 의식의 기저에는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이나 포기가 깔려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에서 소설의 첫머리에 나오는 ‘적당한 온도의 물’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개구리는 그 ‘적당한 온도’에서 결국은 모지름을 쓰다가 죽는다. 자신도 이미 경험한 바 있는 한국이라는 ‘적당한 온도의 물’에서 ‘모지름을 쓰다’가 죽어가지 않을가 하는 두려움이 ‘그’의 의식에서 방어메커니즘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퇴행적 자기방어 행위는 언제나 따뜻한 동굴과 같이 안전함을 제공해주는 딱딱한 껍질이나 말랑말랑한 보호막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현실원칙으로서의 보호막들이 사회 도덕적 기준에서 선(善)의 범주로 분류될 때 그 전통성과 당위성은 한층 용이하게 확보된다. 환언하면 여기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리타(利他)적 리유(사실은 핑게이다)들은 정당성을 얻어 독자들과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장치로 치환된다. 양로원의 렬악한 환경, 음침한 분위기, 동생의 몰인정, ‘그’와 동생 민호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 등은 이러한 ‘핑게’를 정당화하는 소재들이고 또한 효도와 보은이라는, 수천년을 내려온 딱딱한 껍질을 가진 도덕적 허상들은 ‘동면’을 위해 준비된 ‘땅속’이요 ‘동굴’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한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도전을 시도해보았고 그곳에서 ‘민주’라는 재도전의 리유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원래의 자리로 물러서서 ‘동면’을 선택한 인물이라 하겠다.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긴 동면을 경과한 인물은 ‘그’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벌목사고로 남편을 잃고 청상이 된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과부의 인생을 살아간다. 수십년 동안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수많은 유혹이 있었을 것이고 강압도 있었을 것이지만 어머니는 ‘끝내 버텨냈다’. ‘아릿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엄마를 바라보며 숨을 죽이는’ 아들들을 지켜내며 버텨냈다. 물론 이러한 어머니를 바라보는 문학적 시선은 다양할 수 있기에 그녀가 왜 자식들을 버리고 새 출발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도 다양할 수 있다. 그녀는 두려웠을 수도 있다. 자식을 버린 나쁜 년이라는 사회적 지탄이, 어린 자식의 원망과 먼 후날 성장한 자식들의 외면이 그리고 결과를 가늠할 수 없는 새로운 선택에 수반되는 이름 모를 불안과 예견되는 고통이 두려웠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을 피해갈 수 있는 선택을, 즉 과부인생의 선택을 합리화해주는 여러가지 환경적 요소들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였을 것이다. 사회활동에서 ‘외삼촌’의 ‘아버지’ 역할의 분담, 렬녀나 자애로운 어머니 이미지에 대한 주위 여론의 찬사 등은 장기간의 ‘동면’에 대한 선택을 가능케 한 방어메커니즘 작동의 외적인 요소라 하겠다. 새로운 선택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삶의 리유들이였던 남편과의 정, 자식들에 대한 사랑 등을 모두 부정해야 하고 사회적 도덕이라는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온전한 이미지를 갈갈이 찢어버려야 하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행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역시 전통적 미덕이라는 견고하고 포근한 ‘동굴’ 속에서 기나긴 동면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2. ‘그’와 민주는 한 사람일가 두 사람일가

한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두 혼란과 곤혹을 겪고 있던 ‘그’는 민주라는 ‘손도 조그맣고 발도 조그맣고 목소리도 작은’ ‘조그만 녀자’를 만나자 바로 마음의 설렘을 느낀다. 소설의 내용 대로라면 엄밀하게 말하면 이는 사랑이라 할 수 없다. 두 인물은 만남 그 이전에 경력의 교집합이 전혀 없고 또한 이성 욕망에 대한 사전 서술도 없기에 사랑을 배태시킬 환경적 여건이 마련되여있지 않다. 때문에 두 인물의 상호간의 신속한 흡인과 인지는 오히려 동일시에 의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한층 적절하고 합리적이라 하겠다. 인간은 스스로를 온전한 이미지로 인지하기가 쉽지 않다. 유아가 파편적으로 자신을 인지하듯이. 그리고 유아는 거울을 통해서 처음 온전한 자신의 이미지를 인지하게 된다. 아, 내가 원래 저런 모습이였구나 하고. 하루하루를 일과 잠으로 채우고 번 돈을 중국으로 보내는 것만을 위해 살아오던 ‘그’는 자신의 모습을, 정신과 육체가 어울린 자신의 형상을 돌아볼 겨를도 인지할 리성도 미처 갖추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를 보는 순간 ‘그’는, 그의 유아단계의 의식은 아! 저게 바로 나의 현재의 모습이다! 고 놀랍게 인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동일시는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민주도 주저없이 ‘그’에게 다가선다. ‘그’는 위태한 ‘동면’의 과정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유리잔 대하듯 조심스러웠고’, ‘녀자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바라보며 그는 난데없는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위태함과 통증을 사실 ‘그’는 자기 스스로에게서 느끼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정확할 것이다. 다만 무의식의 작동이기에 그 자신의 의식이 이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동일시는 대상과의 분리를 거부하고 소유의 욕망을 유발하게 된다. 마치 유아가 엄마와의 동일시 때문에 엄마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과 같이. 하여 ‘녀자와 그 사이에 둘만의 비밀을 만들고 싶은 욕망이 그의 몸을 달구’게 된다. 그리고 ‘그’와 민주 사이의 상호 동일시는 서로의 경력과 현황의 확인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의 차원으로 그 외연이 확대된다. 맏이로서 어머니의 로후와 동생의 공부 뒤바라지를 위해 현재의 고생과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그’, ‘삶의 무게’, ‘맏이라는 이름의 무게, 아버지가 부재한다는 현실의 무게,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무게’가 바로 이러한 선택과 삶의 리유로 내세워지는 ‘그’다. 그리고 막내지만 철이 들면서부터 늙어버린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민주, 어머니를 양로원에 맡겨둔 죄책감과 결혼을 하는 남자친구와 헤여지게 된 원인 제공의 짐을 ‘가냘픈 어깨’로 떠메고 있는 민주가 ‘그’와 함께 있다. 때문에 ‘그는 자신과 녀자 사이에 어떤 통로 같은 게 생겨나는 느낌을 받았다. 이때까지 작품 속 두 인물은 사실 동일한 의미를 가진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운명 같은 것이여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시점까지.

그러나 서로가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참조물로서 혹은 메커니즘으로서 서로를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사라지고부터 이러한 성격의 중첩은 균렬을 가져온다. 어머니의 뇌경색과 반신불수로 ‘그’는 한층 큰 부담을 짊어지게 되였고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는 퇴행적 ‘동면’에 들어가게 된다. 이에 반해 민주는 어머니의 죽음과 형제들과의 사실상의 절교로 그녀를 억압하고 압박하던 많은 요소들이 사라진다. 즉 ‘동면’을 할 정당성과 합리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의 분리는 두 인물의 리별로 현실화된다. 서로 기댈 당위성이 사라진 것이다. 혹시 일부 독자들이 민주가 왜 샘골에 남아 ‘그’와 함께 생활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과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괜찮은 답일듯 싶다.

 

3. 겨울의 뒤에는 정말 봄이 있을가

겨울개구리는 동면을 끝내면 다시 세상으로 나와 산란도 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 텍스트 속 인물들의 ‘동면’의 끝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가? 정말 따뜻한 봄이 기다리고 있을가?  

이미 ‘동면’이 끝난 인물, 결과가 알려진 인물은 두 사람이 있다. ‘그’의 어머니와 동생 민호이다. 우선 어머니, 그녀에게 따뜻한 봄날은 결국 차례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은혜를 기억하며 효도를 다하는 살가운 아들들도 없고 무릎에 앉아 재롱을 부리는 귀여운 손자손녀도 없다. 남은 것이란 작은아들의 ‘배신’, 큰아들의 무덤덤함, 아무 색채도 없는 허름한 산속의 방 그리고 그 자신의 ‘아무 것도 담겨져있지 않’는 ‘텅 빈 눈’이 있을 뿐이다. 그녀는 ‘동면’을 시작하면서 환상하고 희망한 것들을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쾌락욕망을 억압하며 참아온 ‘동면’의 과정에서 소유하고 있던 것들마저도 모두 상실하여 거의 절대적 결핍상태에 놓이게 된다. 긴 ‘동면’에서 깨여나보니 봄은 없고 한층 혹독한 겨울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였다.

‘그’의 동생 민호도 단계적 과정이 완성된 인물이다. 민호는 ‘담배도 안 피고 술도 안 먹고 대학 다니는 동안 바보라는 소리, 별종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련애도 안하고. 죽어라 공부만 한’ 인물이다. 학비를 제공해주는 형님에게 보은을 맹세하고 자신을 학대 수준으로 억압하며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민호는 드디여 새로운 질서에의 편입에 성공한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불안한 상태임을 텍스트는 알려주고 있다. 그는 현실원칙에 따른 성공을 위하여 자신의 무의식을 지속적으로 억누르고 배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한 상태는 그의 의식에 투사된 하나의 환영일 수도 있기에 어떤 예상치 못한 계기를 맞으면 삽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 그 자신도 이를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층 무자비하게 과거와 선을 긋고 자학적인 울분을 토로하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결과만 본다면 민호에게는 봄이 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존재양상은 위태로운 상태의 지속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으며 욕망의 응축과 억압으로 이루어져있기에 봄이라고는 하지만 진정한 기쁨과 쾌락이 결여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품고 있는 칼’이 언제든 남을 찌를 수도 있고 자신도 찌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막 ‘동면’을 끝낸 민주에게는 봄이 찾아올가? 소설에서 민주는 ‘그’와의 데이트 중 영화보기를 제안했고‘지루하고 재미없어’하는 ‘그’와는 달리 영화에 몰입한다. 어쩌면 이 대목이 독자들에게 중요한 단서와 징후를 제공해주는 부분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영화는 ‘잣따기’와 대립되는 문명을 상징하는 기호이며 현실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세상의 표상이다. 이 장면에서 그들의 선택은 이미 결정이 되였는지도 모른다. 민주는 세상을 하직한 어머니의 시체에 눈길도 주지 않을 만큼 과거와의 결렬에 단호하다. 장례식을 끝으로 언니 등 혈육으로 이어진 과거와의 끈들을 확실하게 정리하였다면(긴긴 잠을 매개체로) 그녀가 샘골을 찾아온 것은 마지막으로 남은 남녀 사이의 정을 끊기 위해서일 것이다. 민주는 ‘끝내 고개를 돌리고’ ‘그’의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나 민주의 이러한 결연한 선택이 그녀에게 봄날을 가져다주리라고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그녀가 편입하려는 질서, 그러니까 텍스트의 표현 대로라면 ‘남에게 서빙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서빙을 시키는’ 그러한 질서에 편입하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록록치 않고 그녀의 력량이 그 견고한 질서를 뚫기에는 너무나도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혹독한 시련과 겨울을 또 겪더라도 그녀가 다시 ‘동면’의 상태로 회귀할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텍스트에 실린 그녀의 의지가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물론 ‘그’의 ‘동면’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텍스트 속에 명시된 ‘동면’의 리유 대로라면 어머니가 돌아가면 새로운 선택이 가능해질듯이 보인다. “그래,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겨울이 지나면 꽃이 피고 따스한 바람이 불고 새들이 노래하는 봄이 올 것 아닌가.” 하고 텍스트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지만 독자들이 그대로 믿기에는 여건들이 너무나 빈약하다. ‘그’에게 차례질 봄날의 의미를 민주와의 재회나 결합이라고 상정한다면(다른 욕망은 텍스트에서 읽어낼 수 없다) 그것은 ‘그’에게는 지난한 목표이다. 그 전제가 바로 민주가 욕망하는 질서에 편입되여 성공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총체적으로 살펴본다면 ‘동면’ 후 ‘그’가 맞이하게 될 미래는 한층 험난한 도전이 아니면 더욱 소극적인 퇴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봄날은 아직 텍스트의 주인공에게는 너무나 아스라하니 먼곳에 있는듯하다. 이 점에서 독자나 평자는 지은이가 텍스트의 마무리에 펼쳐놓은 근거 없는 환영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랑만적 환상의 유혹을 뿌리칠 수만 있다면. 

출처:<장백산>2018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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