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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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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률: 소통의 결여와 일상의 폭력(작품평)
2019년 07월 11일 14시 04분  조회:417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소통의 결여와 일상의 폭력

권혁률

 

1.

인간의 삶은 자체의 인정 여부에 관계없이 폭력과의 겨룸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대결하고 있는 그 폭력은 너무나 일상적인 현상이여서 그 괴로움을 실제로 겪고 있는 당사자조차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인간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폭력에 길들여져서 폭력을 폭력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유의 관성’에 고착되여버렸다. 문제는 이러한 일상의 폭력의 근원지가 우리와 결코 낯설지 않은 주변에 있다는 데에 있다. 좀더 끔찍하게 말하자면 가장 친근한 사람이 그러한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때로 그러한 폭력은 피해자에 대한 극진한 ‘친절과 배려’로 둔갑하기에 더 문제가 된다. 설명절 기간인 현 시점에 부모와 친지로부터의 ‘혼인’에 관한 너무 친절한 주목 때문에 젊은이들이 겪는 ‘관심’은 그러한 폭력의 생생한 현장이다. 

소통의 결여 때문에 야기된 가정 또는 가족 내 일상적인 폭력은 사회적 폭력으로 탈바꿈하고 사회적 폭력은 또 가족 내 일상적 폭력을 부르는 근원이 된다. 과거에 비일비재했던 자식의 종신대사를 부모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혼인관습은 가족 내 폭력의 하나였다. 그것은 자식을 키워낸 부모의 일종의 권력으로 간주되는 사회풍습 때문에 폭력적인 그 간섭행위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으로 둔갑하여 세세대대 이어왔었다. 부모 자식 간에 전혀 의사소통의 절차가 결여된 채 심지어 대체로 자식의 의사에 관계없거나 반대되는 방향으로 감행되였기에 그것은 분명 ‘폭력’이였다. 이러한 삶이 전근대적인 현상이였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전시대에 정치적 요소가 그러한 폭력을 부추기는 시대도 있었거니와 현재에도 전술한 현상과 같은 일상의 폭력이 여전히 우리들의 삶을 괴롭히고 있다. 그 모든 근원을 캐여본다면 당사자들 사이에 필요한 소통이 결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필요한 의사소통의 루트가 단절되였거나 아니면 이러저러한 리유 때문에 그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소통의 결여, 그에 따르는 일상의 폭력은 우리의 삶의 현장 곳곳에 산재되여있는 흔한 사회현상이다. 이에 대한 우리 문학의 반응은 어떠한 양상일가? 량영철의 소설에서 필자는 그 소중한 실마리를 찾아보았다. 작가의 삶과 맞먹는 그리 멀지 않았던 시대에 겪었던 폭력, 현시대의 중년시대에 이르러 몸소 겪거나 목격하게 되는 일상의 폭력들이 그의 작품에서 형상적으로 재연되고 있다. 우리 문학의 시대적 반응의 하나로 다루어보고저 하는 것이 이 글의 초심이다.

 

2.

량영철의 <참 고운 발>이 본고 원고청탁의 대상 텍스트이다. 이 작품 애초의 창작동기에 대한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최××이란 동창생이 있었다. 언젠가 한번 만났더니 이 녀석이 허풍을 꽝꽝 쳐대는 것이였다. 한국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하고서 가봤다고 돈이랑 펑펑 써제끼는 것이였다. 처음에 나는 정말로 믿었다. 그러다가 사실을 알고 나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녀석은 시장에서 선지를 팔고 있었던 것이다. 나한테 들키고 나서 녀석은 도살장을 구경시켜주었다. 덕분에 나는 도살장 구경을 한번 잘했다. 소들이 거꾸로 매달려 피를 뿌리면서 흐름식 생산선을 통과하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이런 것이 소설이구나 하고 언젠가는 써야지 마음 굳혔다. 물론 그 때부터 나는 선지를 먹지 않았다.(살춘각 창작후기 <일하면서 글쓰기>에서)

 

<참 고운 발>의 전반 경개는 우의 작가의 말과 별반 다름이 없다. 바뀐  것은 주인공이 남자 동창에서 녀성 동창으로 바뀐 것이고 당연한 짐작이 따르는 대화와 행위이다. 작가의 임무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보다는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시학>)에 맞추어본다면 표준 작문거리를 동원한 셈이다. 이 작품은 ‘상편’에 이어서 ‘하편’으로 나누어져있는데 얼핏 보기엔 사족 같은 처리이지만 작가의 말에 의거한다면 상당한 의도적인 작업의 결과이다.

 

하편에서의 반전을 이끌어내기 위해 상편을 설치했다. 따라서 상편은 의도적인 부분이 많다. 마지막 한줄을 위해 나는 앞에다 천마디의 헛소리를 쳤던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나 나는 나름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너무 헛소리는 아닐 것이다. (살춘각 창작후기 <일하면서 글쓰기>에서)

 

작품은 중학교 2학년 시절의 동창생 ‘계경숙’이 걸어온 전화에서 시작된다. 의외의 전화를 걸어온 열정의 소유자 계경숙은 중학교 시절 한살 아래인 ‘나’를 은근히 좋아했던 녀동창생이다. 활달한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그녀는 ‘나’에게 녀자와의 첫 스킨십을 선사했고 심지어는 숫처녀의 가슴까지 서슴지 않고 선사했던 그러한 녀동창이였다. 따라서 30여년 후의 만남이였지만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대화와 행위에서 스스럼없게 된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4차를 거친 두 사람 사이의 대화와 행위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장면은 작품의 리해에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1) “근데 너 연변말을 잘한다? 한국에 간 지 몇년 됐다 했지?” 

“20년 거의 돼. 글고 사람은 자기 고향 버전은 안 잊어먹게 돼있어. 연변에 오면 자연적으로 연변말을 하게 돼. 몇번 오지는 않았지만.” 

 

2) 경숙이가 의미심장한 얼굴을 만들어가지고 나한테 보내왔다. 

“아들이 일본에 있거든. 일본에 가게 하나 차렸는데 힘든가봐. 우리 량주 보고 들어오래. 아마도 일본에 갈 것 같아서…” 

 

3) 치마 아래로 그녀의 하얀 발이 눈에 들어왔다. 샌들을 신은 발이였다. 웬일인지 그녀는 양말도 받쳐신지 않고 있었다. 

 

우의 세 인용은 작품 중 ‘나’의 의혹이 진전되는 과정을 드러내는 부분들이다. 한국에서 20년간 살아온 사람으로서 너무 자연스러운 연변말에 대해서는 그런 대로 1)에서 보다싶이 잘 넘기고 있다. 하지만 인용 2)의 아들이 일본에 있다, 가게를 차렸다, 량주 보고 와서 도와달란다는 복잡한 사연을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의미심장’하다. 공항에서 처음 만났을 때 “채양이 너른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늘이 얼굴 전체를 다 가리고도 남음”이 있었던 그런 차림새와 어울리는 부분이다. 뭔가는 미심쩍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표정을 가리고 림기응변으로 이러저러한 사연을 꾸며내기 위한 그녀의 의도적인 표정과 차림이 아닐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한다. 3)의 경우는 지금까지의 의혹을 더한층 가중하고 있다. 이는 작가의 의도 대로 하편의 전개를 위한 복선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가정의 사연으로 일본으로 들어가기 직전 만났던 ‘계경숙’이, 4차까지 하고 다시 만나자는 인사도 없이 갈라지는 것이 상편의 마감이다. 

후편에서 ‘계경숙’은 동창모임에 온 ‘나’ 친구의 입을 통해 등장한다. 그런데 수상시장에서 선지장사를 하고 있다는 뜻밖의 소식이다. 그 소식을 친히 확인하는 ‘나’와 함께 상편에서 깔아놓은 복선도 일일이 은을 내게 된다.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첫 구애의 장본자 전학철과 부친의 직장전근으로 또 가깝게 되여 위협과 공갈의 폭력 아래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을 한 그녀, 유일한 바람으로 믿고 살던 아들은 교통사고 끝에 부모의 부담이 되지 않고저 자살로 생을 맺고 풍을 맞은 남편은 스스로 몸도 거두지 못하는 페인이 되고 만다. 불행한 혼인은 불행한 삶과 고생의 생계유지로 이어졌다. 하지만 상편에 보였던 활달한 성격의 그녀는 스스로 남편의 구완과 생계를 유지해나가고 있다. 그녀의 어려운 형편은 앞에서 인용한 세 부분의 점차 짙어가는 의혹에서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평생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를 찾아본 것은 점차 꺼져갈듯도 했던 자신의 삶의 의욕을 되살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였으리라. 하지만 리해 가능한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는 그녀로 하여금 그 누구에게도, 사랑하는 상대에게까지도 자신의 그 궁핍한 처지를 보이기 싫게 했다. 따라서 우에서 인용한 어불성설 같지만 또 재치 있는 그녀의 말에 넘어갔던 세 부분이 있었던 것도 개연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30여년  동안 잊지 못하던 첫사랑을 모처럼 찾는 재회에서 “원피스 치마자락이 나팔꽃처럼 들려있어 허벅지부터 종아리”가 다 드러나는 차림도 후편에서 그녀의 궁핍한 생활상을 예시하는 복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작품 상편의 전개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충실히 리행하고저 몇개의 복선의 장치를 운용하고 있다. 복선의 역할을 하는 디테일은 자연스럽게 인물의 대화와 행위에 용해되여있었고 하편에서 그 복선들은 각각 암시하고 있던 바의 원모습을 재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는 전반 작품의 플롯의 구성과 인물의 설정에서 의도했던 바를 충실히 리행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3. 

앞에서 본고는 <참 고운 발>의 외적 형태 면에서의 작가가 의도했던 바를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가를 편의에 따라 살펴보았다. 이를 차치하고 작가가 자신의 창작에서 ‘소통의 결여에 따른 일상의 폭력’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은 본고가 살펴본 작가 또는 작품의 내적 특징이다. 

<참 고운 발>의 경우 의사소통의 결여로 인한 폭력은 주인공에 그치지 않는다. ‘계경숙’은 ‘나’보다 한살 이상이였기에 사랑하는 ‘나’에게 직접 사랑을 고백하는 데에 일정한 어려움을 겪는다. 먼 고모벌이 되는 녀자애와 친구이고 한살 이상인 그녀를 ‘나’도 서먹서먹하게 대하기는 피차일반이였다. ‘소통의 결여’의 첫쌍이였다. 다음은 ‘계경숙’의 혼인에 관한 ‘소통의 결여’이다. 련애편지를 보낸 상대를 ‘공포의 대상’으로까지 느끼고 있는 그녀가 결국 그 ‘공포의 대상’과 결혼하게 된 것은 부친의 직장 전근으로 ‘공포의 대상’의 무차별적인 위협과 공갈에 시달린 결과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두 당사자 부친의 직장 전근이란 출세의 표현이였다. 여기에 두 당사자 사이의 ‘소통의 불가’도 문제였지만 그녀는 부모와도 ‘소통의 결여’ 상태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작가의 상상력을 좀더 풍부화해본다면 부모의 립장에서는 같은 동네에서 출세하여 타향으로 이주한 량가가 사돈으로 승격하는 것을 제격일 것으로 생각했을 법도 하다. 환언한다면 그녀의 부모 역시 ‘소통의 결여’ 뿐만 아니라 그 ‘소통 불가’의 결혼을 추진한 ‘폭력’의 장본인이였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모의 립장과 체면을 전제로 한 자식‘사랑’, 그 ‘아름다운 명분’이 그녀를 궁극적으로 ‘폭력’의 세계로 전락시킨 것이다. “거의 강제로 이뤄진 결혼이 행복하면 얼마나 행복할가” 라는 작가의 판단이 이를 뒤받침한다. 결국 ‘계경숙’과 ‘나’의 ‘소통의 결여’로 진정한 사랑을 토대로 한 결혼은 무산되고 그녀와 부모와의 ‘소통의 결여’는 결국 그녀를 전혀 ‘소통’이 불가한 ‘폭력’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이러한 것이 사랑과 혼인의 령역 그리고 가족 내 ‘소통의 결여’ 때문에 야기된 ‘폭력’이였다고 한다면 작품의 내부에는 또 하나의 ‘소통의 결여’를 은연중 포함하고 있다. 바로 ‘계경숙’, ‘나’의 동창, 사회적 관계 속의 ‘소통의 결여’이다. 그녀는 그 어려운 삶의 여건에서도 ‘나’의 작품을 거의 다 읽을 정도이다. 심지어 ‘나’를 만나려는 강렬한 충동으로 결국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고운 발’을 보이는 씨나리오를 출연하기에까지 이른다. 그러한 그녀는 30여년 동안 “자기를 아는 사람은 누구도 만나기 싫었다”고 말한다. 이는 ‘나’와 ‘계경숙’만의 만남에 이의를 품은 동창생의 말에서 증명된다. 그렇다면 도무지 한 시내 안에 다섯명 밖에 되지 않는 동창생들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심층 원인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욕이 흘러넘치는 이 시대, 물질적 리익의 획득 여부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세상을 그녀는 이미 간파했던 것이다. 누구든지 막론하고 물질적 소득과 재부의 다소에 따라 친소亲疏가 확정되는 시대에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사회진출은 동창생을 망라한 사회의 한담거리로, 웃음거리로 전락되여 새로운 ‘폭력’의 짓이김을 당하리라는 점을 그녀는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묵묵히 결혼에 이은 가족, 사회의 ‘폭력’을 감내하면서 스스로 강인하게 자신의 불행을 극복하고저 혼신을 바치고 있었다. 그녀에게 유일한 정신적 버팀대가 있었다면 ‘나’의 작품이였을 것이다. 이것이 <참 고운 발>의 전경前景과 배경背景이 이루고 있는 전경全景이다.

‘소통의 결여’로 인한 인간세상의 ‘폭력’은 작가의 다른 한 작품 <킬리만자로의 달>에서도 일별된다. 안해를 잃은 부친과 자식 사이, ‘소통의 결여’를 자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사이, 종종 ‘폭력’적인 결론으로 대화의 매듭을 짓는다. 그 뿐이 아니다. 부친은 안해를 잃은 후에 세번의 결혼 같지 않은 짝짓기에 실패하는 바 정이 결여된 동거상태를 이어가던 중 마지막 로친에게서 호된 ‘폭력’을 당하고 만다. 자식 ‘나’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누라가 외국에 있는 상황, ‘수지’와 ‘경이’와의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가지만 진정 애인도 친구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역시 ‘소통’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작품의 결말에 마누라에게 전화를 걸어 “너 나를 사랑하기나 한 거니?”라고 묻는 ‘나’의 이 한마디로 독자들은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주인공의 일생에서 ‘소통’의 의미, 아니 모든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 ‘소통’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과연 원활한 ‘소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가?

 

4.

30대의 젊은 시절 문단에 일찍 활약상을 보였던 작가 량영철은 이제 다시 재기의 기세를 보이고 있는듯하다. 얼마 동안 ‘살춘각’에서 ‘돼지’같이 살았다는 작가의 말에는 어느 정도의 회한, 안타까움, 무가내 등 정서가 착잡하게 엉켜져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이야기만 꾸미는 일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모든 식자층이 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사실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삶에 대한 남다른 애착, 사랑, 고민, 사색이 필요하다. 아니 심지어는 삶에 대한 반발, 혐오의 정서까지 동반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겪지 않고 어찌 문학을 한다고 할 수 있으랴. “긴긴 밤을 통곡으로 지새워 못 본 자는 인생을 담론하기에 력부족이라未曾长夜痛哭者,不足以语人生”는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명언과 련관시켜보아야 할 경지이다. 

단 두 작품에 한정하여 량영철을 론하는 본고는 작가와의 ‘소통’이 결여된 채로 진행되였다. <참 고운 발>은 작가의 창작의도에 맞춘다면 성공작이 될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애증이 분명했던 자기가 사랑하는 동생 벌의 남자애에게 선뜻 숫처녀의 가슴까지 허락할 정도의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인 녀주인공, 30여년 후에 모처럼 만든 재회의 기회에도 아무런 꺼리낌없이 육담을 나눈다. 심지어 당시에 사랑했던 ‘나’의 페니스가 대담거리가 될 정도로 스스럼없다. 일관된 성격이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전에는 단호하게 브레이크를 걸던 그녀였다. 그런데 최후 자신의 삶의 진상을 ‘나’의 앞에 드러냈을 때 반신불수의 남편이였지만 그 ‘형형’한 눈빛 아래 ‘나’와 질펀한 정사情事를 펼친다. 이는 반평생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의 근원인 남편에 련대한 복수라고 해야 할가? 본고는 이에 대한 속단速断은 삼가키로 한다. 살춘각杀春阁의 살춘각, 작가 량영철과의 ‘소통’이 없는 판단은 아무래도 오단误断의 위험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와의 ‘소통’이 기대되는 부분으로서 후날을 기약하기로 한다. 


출처:<장백산>2018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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