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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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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옥: 명태(수필)
2019년 07월 11일 14시 33분  조회:391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명태

김미옥

 

나는 어려서부터 생선을 유난히 좋아한다. 찜, 졸임, 구이, 회… 조리방식에 상관 없이 지금도 밥상에 생선이 오르면 그것 만큼 기쁠 때가 없다. 혼자서 조기구이 한마리 정도는 거뜬하게 해치우며 회집에 가면 혼자서도 ‘중’짜리 모듬회를 먹어치울 정도다. 샤브샤브 먹을 때도 소고기나 양고기는 없어도 괜찮지만 새우완자나 오징어완자가 빠지면 섭섭할 정도로 나의 생선사랑은 유별나다. 고기 없이는 살아도 생선 없이는 못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아마도 나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 유일하게 입에 대지 않는 생선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명태다. 

명태, 우리 민족의 명태사랑 역시 나의 생선사랑 못지 않은 것 같다. 황태, 동태, 짝태, 생태, 북어, 코다리, 노가리 등 다양한 이름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는가. 특히 연변지역 사람들은 명태를 유난히 좋아하여 조리방식 또한 다양하다. 게다가 명태살만 발라먹는 것이 아니고 명태 뼈나 껍질을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 간식으로 먹고 명태눈알까지도 아작아작 씹어먹는 것을 보면 명태는 버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생선 중의 보배요, 음식물쓰레기 줄이기의 일등 공신이다. 

나도 어렸을 때는 명태를 아주 좋아했었다. 하지만 엄마가 방망이로 명태를 두드리는 소리가 내 숙제공부의 배경소음이 되고 푸근한 엄마냄새가 비릿한 명태냄새로 바뀌기 시작해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해빛도 들지 않는 단층집에서 엄마랑 단둘이 살았던 그 때 그 시절이 영화 속의 장면들처럼 나타난다. 

3학년으로 올라가던 그 해 여름, 간암말기 진단을 받은 지 3개월 만에 아빠는 우리 곁을 영영 떠나버렸고 아이들만 우는 줄 알았던 나는 그 때서야 어른들도 운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아까운 나이에 뭐가 그리 급해서 저 어린 걸 남겨두고…” 하며 우시던 친척 분들, 엄마는 내 곁에서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셨다. 그 뒤로 문턱이 다슬도록 찾아오던 친척들은 점점 발길이 뜸해지다가 언제부턴가 끊어져버렸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우리 집, 그 적막을 깨뜨린 것이 바로 엄마의 방망이질이다. 

나도 자식 키우는 립장이 되고 보니 서른아홉이라는 나이에 혼자 딸 뒤바라지를 해 대학에까지 보낸 엄마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변변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을 친척집에 맡겨두고 외국으로 돈벌이 나간 것도 아니고 오직 뚝심 하나로 10년을 자식 옆에서 버텨온 엄마에게 “고생 많았어, 엄마.”라고 말해드리고 싶다.

아빠가 세상뜬 후 엄마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나섰다. 봄에는 삯모하러 다녔고 가을이면 사과배 따러 다녔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한밤중에야 돌아오시던 엄마,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방 한구석에 옹송그리고 앉아서 TV를 보고 있다가 엄마가 돌아오는 기척소리만 들리면 벌떡 일어나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면 엄마는 가방 속에서 아껴두었던 새참을 꺼내 나에게 먹으라고 건네준다. 그리고는 가마목에 쪼그리고 앉아서 더운 물에 찬밥을 말아 김치를 얹어 대충 드신 다음 방 한구석에 고단히 주무셨다. 

얼마 뒤 엄마는 시장에서 건어물장사를 하시는 아주머니를 알게 되여 집에서 명태를 가공하는 일을 하게 되였고 학교가 끝나서 집에 오면 항상 엄마가 반겨주었다. 내가 숙제공부를 할 때면 엄마는 항상 말없이 옆에서 명태를 가공하고 있었다. 겨우내 찬바람 속에서 단단하게 말라붙은 명태를 방망이로 꽝꽝 내리치고는 뾰족한 칼끝으로 배에서 꼬리부분까지 단번에 쭉 찢은 다음 뼈를 훑어내고 반듯하게 펴지라고 엉뎅이 밑에 깔고 앉는다. 그리고 나서 어느 정도 펴진 명태를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올리고는 그 우에 나무판자를 펴고 무거운 바위돌로 다시 한번 짓눌러놓아야 이튿날이면 납작하게 펴진 명태를 얻을 수 있다. 품이 많이 가는 일이지만 명태 한마리당 가공비가 3전 밖에 안되는지라 엄마는 하루종일 손에서 명태를 놓지 않으셨고 오줌 누러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실 때면 “에구구 허리야…” 하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밤 늦게까지 공부하다가 잘 준비를 하면 그 때서야 엄마는 손에서 명태를 놓군 했는데 옷소매와 바지가랭이에는 항상 명태뼈가 달라붙어있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하는 일이 재미있어보였다. 그래서 나도 해보겠다고 나섰더니 엄마가 넌 아직 어려서 안된다고 했으나 내가 자꾸만 졸라대자 내 성화에 못이겨 그럼 한번 해보라고 허락했다. 내 팔목보다도 두배나 굵은 수제방망이, 명태가공을 위해 엄마가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다. 그것으로 명태를 내리치는 게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였다. 몇번 안하고 나는 제풀에 지쳐 주저앉았고 이번에는 명태를 칼로 찢는 일을 해보겠다고 자진해나섰다. 예리한 칼끝으로 단번에 꼬리까지 쭉 내리찢는 것이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칼로 뼈를 훑어낼 때 요령이 부족하면 살까지 떨어져나갔다. 돈 한푼 버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제야 깨달았고 그 때부터 방학이 되면 엄마 옆에서 일을 도와드렸다.       

“엄마는 배운 게 없어서 이런 일을 하니까 넌 이담에 꼭 책상머리에 앉아서 일해라. ” 

엄마는 늘 습관처럼 나에게 말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엄마의 몸에는 명태비린내가 진하게 배였고 두손에는 굳은살이 늘어갔다.  

“이 정도 고생이면 한국에 나가서 돈 벌어도 힘든 걸 못 느끼겠는데 차라리 한국에나 가서 돈 벌지.” 

명태 한마리에 가공비 3전씩 받으며 밤낮없이 일하는 엄마가 리해 안된다는듯 이웃 아줌마들이 엄마에게 권유했다. 

“쟤를 공부 다 시키면 그 때 갈려구요.”

엄마는 정말로 내가 고중을 졸업할 때까지 말없이 명태가공일을 하면서 내 곁을 지켜주었고 내가 대학에 들어가자 집을 팔아버리고 돈 벌러 한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우리는 몇년간 얼굴을 못 보고 있다가 다시 한집에서 살게 된 것은 엄마가 외할머니가 되면서부터다. 

엄마는 매일마다 출근하는 나를 현관문앞까지 흐뭇한 얼굴로 바래준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일하는 내가 부럽고 자랑스러운듯.

얼마 전 엄마랑 고향을 다녀왔다. 십여년 만에 돌아간 연길은 몰라보게 변해있었고 난 자신이 마치 낯선 도시에 온 관광객 같았다. 서시장 뒤골목을 걷고 있으니 떡, 젓갈, 고추장, 김치… 등 여러가지 음식을 파는 조선족아줌마들과 오랜만에 들어보는 익숙한 연변말투에 친근감이 느껴졌다. 대롱대롱 매달린 명태, 납작하게 펴진 명태, 빨갛게 양념한 명태, 각종 명태들도 눈에 안겨왔다. 그 옛날의 우리 엄마처럼 어느 누군가도 지금 쯤 공부하는 딸 옆에서 명태를 가공하고 있겠지? 자식 위해 흘린 눈물과 땀방울이 스며들어 우리 민족이 각별히 즐겨먹는 명태의 짭짤한 맛이 더해진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출처:<장백산>2018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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