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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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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우: 윤림호론: 약자에 대한 동정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평론)
2019년 07월 12일 19시 45분  조회:531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윤림호론: 약자에 대한 동정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

최병우

 

1. 서론

윤림호는 소년기에 문혁 초기 홍위병들에 의한 혼란을 경험하고 문혁중에 성장한 세대이다. 윤림호는 1954년 5월 23일 흑룡강성 동녕현 로흑산향 만보만에서 윤영호와 라경옥 부부의 7남 3녀 중 아홉째로 태여났다. 형들이 다 요절하는 통에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허약한 몸으로 태여난 윤림호는 자라면서 점차 건강해져 집안의 유일한 아들로 성장하였다. 아버지의 하방으로 쏘련과의 변경지대인 동녕현 삼자구향 포자연촌에서 소학교를 다니던 윤림호는 5학년 때 문혁이 시작되자 소학교를 자퇴하고 사회로 나온다. 윤림호의 아버지는 친일부역죄로 문혁 내내 타도대상이였고 남편 때문에 고초를 겪던 윤림호의 어머니는 1972년 사망한다. 어머니가 죽은 이듬해 둘째누이가 사는 흑룡강성 해림현 해남향 남라고촌으로 이주해 촌당지부서기였던 자형의 도움으로 벽돌공장 로동자 생활을 하며 1978년 박순녀와 결혼하여 두 딸을 얻는다.

아버지의 력사문제로 고민하던 윤림호는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저 1977년 겨울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로동과 창작을 병행하였다. 투고한 작품마다 주제가 산만하고 언어사용이 합당하지 않다는 리유로 퇴짜를 맞았는데 소학교 중퇴 학력인 윤림호로서는 리해하기 힘든 일이였다. 1979년 봄 《흑룡강신문》에 투고한 <셋째사위>가 발표된 뒤 윤림호는 남라고촌에 살면서 창작을 지속하였고 1983년 조선족작가 양성의 필요성에 따라 연변대학교에 설립한 연변대학교 문학반에 입학하여 1985년까지 수학하였다.

졸업 후 윤림호는 1987년부터 1988년 사이 《송화강》편집부에서, 1993년부터 1996년까지 《꽃동산》 소년아동 편집부에서, 1997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조문편집부에서 편집담당으로 근무한 3년 반 정도와 1996년 10월에 세계한민족문학인대회에 참가 차 한국에 갔다가 불법체류한 6개월을 제외하고는 농민작가로서 창작에 전념하였다. 그 결과 윤림호는 세권의 소설집과 두편의 장편소설 그리고 적지 않은 수의 중단편소설과 동화와 수필 등을 남기고 2003년 3월 31일 간암으로 타계하였다.

윤림호는 작품의 량이나 작가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문이 열대여섯편에 불과할 정도로 비교적 평단의 관심 밖에 놓여있었다. 본고는 그의 소설 전체를 주제적 특징에 따라 정리하고 이러한 주제가 조선족이 처한 상황의 변화와 윤림호의 개인적 삶 등과 어떤 관련을 갖는가를 밝히고저 한다. 윤림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건으로 청소년기의 삶을 규정한 문혁과 개혁개방, 인간으로서 또 작가로서의 삶에 변화를 준 연변대학 문학반 생활 그리고 조선족의 삶을 뒤흔든 중한교류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윤림호가 1985년에 《투사의 슬픔》을, 1992년에 《고요한 라고하》를 출간하고 2000년대에 들어 《조막손로친과 세다리 개》와 《승냥이가 울던 계절》 등을 상재한 것은 윤림호의 삶의 전환점과 어느 정도 일치점을 갖는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본고에서는 각 시기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주제의 경향을 정리하고 각 시기에 그러한 주제에 집중하게 된 내외적 요인을 찾아보고저 한다. 

 

2. 억압된 정치상황 속의 감추어진 영웅

윤림호는 1983년 연변대학교 문학반 신입생을 선발할 때 흑룡강성에서 추천한 3명에 속해 소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대학생이 되였다. 서른 나이의 가장인 윤림호는 인생수업이나 문학수업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과목만 열심히 수강하고 여타의 과목은 불성실하게 넘어갔다. 당시 문학반의 대부분 학생들이 이미 결혼을 하였고 등단한 사람들도 없지 않아서 공부보다는 정치토론이나 문학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윤림호는 1985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등단 이후 쓴 작품들을 모아 《투사의 슬픔》을 간행한다. 그가 대학 졸업을 맞아 첫 작품집을 기획한 것은 소학교 중퇴 학력으로 소설가가 되여 작품을 창작하고 연변대학교 문학반에서 소설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시각을 확보하고 난 뒤, 작가로서 하나의 전기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 하겠다. 《투사의 슬픔》에 수록된 작품들은 작가로서 출발점에 서서 정열적으로 창작에 림하던 시기의 문학정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지향하는 주제를 파악하는 일은 윤림호 소설의 밑바탕을 읽어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소설집 《투사의 슬픔》에 수록된 17편의 소설은 등단 후 6~7년간 발표한 작품 중에서 선정되여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인다. 윤림호가 등단한 것은 문혁 직후인 1979년으로, 사회주의 리념 강화로 국가적 혼란을 경험한 중국 사회가 새시대로 나아가려 하지만 리념을 중시하는 보수파와 실리를 중시하는 진보파의 갈등으로 일정한 방향성을 갖지 못한 시기였다. 이 시기 중국 문단은 문혁의 상처를 기록한 상흔문학과 문혁시대를 반성하는 반사문학 등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투사의 슬픔》에 실린 작품 대부분은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여 집체에서 개체로 나아가는 시기에 자신이 경험한 중국 현실을 소설화하고 있다. 특히 이들 작품은 중국현대사의 모순에 찬 시대에 주위의 비난을 감수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실천했던 인물, 즉 외곡된 현실 속에 감추어진 작은 영웅들을 기린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단편소설 <투사의 슬픔>은 위만주국 때 순사를 지낸 전력으로 정치투쟁의 대상이 되여 온갖 박해를 받다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절름발이 령감 렴창록의 숨은 과거를 제재로 한다. 위대한 항일투사 황영옥의 아들 김기욱이 교사가 되여 룡드레촌에 부임하자 친일분자로 마을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절름발이 령감이 어머니의 안부를 물어 당혹스럽게 한다. 자주 어머니의 안부를 묻던 령감은 죽음을 맞이한 순간 김기욱을 불러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긴다. 정치투쟁의 대상이였던 렴창록의 말에 모멸감을 느낀 김기욱이 어머니에게 소식을 전하자 단숨에 달려와 심심한 조의를 표해 기욱을 당혹하게 한다. 어머니의 회고에 따르면 렴창록은 지주의 아들로 위만주국 시대에 순사를 지내 해방된 중국에서 정치투쟁을 받았지만 실상 그는 아버지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순사가 되였던 인물이다. 그는 짝사랑하던 황영옥이 항일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히자 그녀의 부탁으로 항일무장단체에 일군의 동태를 전해주고 사형장에 끌려갈 때 사형집행인을 죽이고 총을 쥐여주면서 일을 수습한 후 항일무장단체에 귀순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황영옥을 추격하는 일본군을 따르다가 그녀가 쏜 총에 다리를 다쳐 순사를 그만두고 만다. 황영옥은 렴창록이 자신의 총에 맞아 죽은 줄만 알고는 그를 잊고 살았고 렴창록은 력사반혁명분자로 투쟁을 당하면서도 황영옥의 공적에 루가 될가 두려워 사실을 감추고 살았다.

<투사의 슬픔>은 한 투사의 회고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후 지주계급과 국민당 특무 그리고 친일분자를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 과거청산은 이루었겠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희생을 당했겠는가를 묻고 있다. 아울러 렴창록과 같이 암울한 시기를 살면서 과오보다 공적이 적지 않았음에도, 박해를 당하면서도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렴창록 같은 인물이야말로 암울하고 억압적인 정치상황 아래서 진실한 삶을 산, 감추어진 영웅이라 주장한다. 이렇듯 《투사의 슬픔》에 실린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숭앙을 받을 만한 인물은 아닐지라도 억압된 시대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한 감추어진 영웅을 현양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라고하 배사공>은 19년 동안 라고하에서 배사공 일을 하며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다가 라고하다리를 건설하는 공사가 시작되자 모아두었던 돈을 희사하고 다리가 완공되기 직전에 숨을 거둔 로인의 일생을 통해 남을 위해 헌신하는 작은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지개>에서는 말광대다리 자리에 새 다리를 건설하려 애쓰던 할아버지가 문혁 중에 비판받다 죽고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 할아버지를 돕던 벙어리 삼쇠가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자 마을사람들도 참여해 다리를 완공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리익을 돌보지 않고 마을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인물이 진정한 영웅이라는 시각을 드러낸다.

또 <도라지꽃>에서는 조선전쟁 때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경계심을 풀어내고 한국군의 특무로 체포된 명림의 마음을 되돌려 정보를 얻지만 총상으로 죽은 리철주 반장이, <비뚜렁 처녀>에서는 녀성스럽지는 않지만 세쌍둥이 중 막내로 집안일을 다 하고 농사도 혼자 지어 집안의 기둥이 되는 삼숙이가, <두만령감>에서는 자기 집 머슴을 도와주다 함께 도망쳐 정치투쟁이 심하던 시기에 비판을 받았으나 남편을 위해 헌신하다 죽은 녀성이, <민들레꽃>에서는 항일운동을 하던 인물을 구하기 위해 일본인 의사를 죽였으나 놈이 지른 불에 다섯명의 환자가 죽어 해방 후 살인죄로 투쟁당한 큰아버지가, <자취>에서는 혁명영웅이라는 이름 때문에 마을 일에 앞장서다 건강이 망가진 안해를 조금이라도 쉬게 하려 애쓴 남편이 등장한다. 또 이 작품들과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중편소설 <산의 사랑>(《아리랑》 1986. 5)도 위만주국 말기부터 문혁까지의 무법적인 시대에 사령산의 나무를 지켜내려 노력하다 죽어 사령뫼에 묻힌 네 사람과 그들의 딸로 태여나 산과 나무를 돌보며 사령산을 미래의 자원으로 키우다가 실화로 발생한 산불을 진화하고 죽어 사령뫼의 다섯번째 인물이 된 산골처녀를 그리고 있다.

이들의 삶은 국가정책에 따라 모든 사람이 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 강요되는 정치상황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이 아니였지만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어 주변에서 그들을 칭송하지 않더라도 진정한 가치를 실천한 것이다. 윤림호는 이러한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듯하나 쉽지 않은 길을 간 사람들의 삶을 통해 억압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킨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감추어진 영웅임을 강조한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와 타인에 대한 사랑을 견지한 작은 영웅들에 대한 관심이 윤림호의 초기 소설이 지향한 세계였다. 몇년간의 노력을 통해 등단을 하고 늦은 나이에 가장의 책무를 버려두고 가족과 떨어져 대학생활을 하면서 윤림호는 문학에 대한 열정과 인간의 진정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창작에 림하였다. 그의 초기소설이 보여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는 삶에 대한 례찬은 그의 초기소설을 관통하는 한 주제였다. 그의 이러한 인간다움에 대한 경사는 억압된 정치상황에 따라 시대의 흐름에 부화뢰동하여 인간성을 상실한 인물을 비판하는 소설로 변형되여 나타난다.

<념원>에서 문혁 중에 극렬좌파로 나선 한길녀는 남편 문일령감이 아들 약값에 보태려 시작한 담배밭을 고발하여 갈아엎고 인삼밭을 몰래 개간하자 소자본주의의 길로 나간다고 고발하려 한다. 또다시 조리돌림당할 일이 겁나고 너무나 변한 안해가 무서워진 령감은 안해의 목을 조른 뒤 스스로 목을 매여 죽는다. 다행히 죽음을 면한 안해는 남편의 유서를 보고 각성하여 공산당적을 버리고 참회 속에 살다 사망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령감의 인삼밭에서 몇년 묵은 인삼들이 발견되자 현정부에서는 큰 관심을 보인다. 문혁기간 중 그들이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문일령감이 억압의 시기에도 묵묵히 인삼밭을 일구고 경제문제에 치중한 데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린 것이다. 이 작품은 문혁이라는 정치적 광풍 속에 변해버린 인간성을 비판하고 그 속에서도 자신의 일에 충실했던 인물을 재평가하여 개혁개방 이후의 경제 정책을 옹호하고 있다. 로동영웅, 상장 등으로 호도하여 로동력을 착취하던 문혁이라는 정치황이 만든 사회적 혼란과 그에 부화뢰동하여 인간성을 내팽개친 인간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보이는 이 작품은 《투사의 슬픔》에 실린 소설 중에서 가장 강한 비판 정신을 드러낸다.

그러나 《투사의 슬픔》에 실린 소설들은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보다는 렬악한 현실상황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움을 견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는바, 그 대표적인 례가 <개를 잡은 사람>이다. 이 작품은 개혁개방으로 경제정책이 책임제로 전환된 후, 알뜰한 집안 살림으로 부자가 되지만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못 받는 조령감과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일을 도와 마을 인심을 얻어 좌상으로 숭앙받는 오로인과의 비교를 통하여 상부상조하는 공동체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몇년래 정책이 좋아지여 우리에겐 살길이 열리였네. 그러나 빨리 부유해지고 늦게 부유해지는 자가 있지만 빨리 부유해졌다구 사람들을 떠나선 안되네. (《투사의 슬픔》, 46쪽)

 

개혁개방으로 경제적인 부가 축적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면서 빈부의 차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인 부지런함으로 다른 사람보다 부유해진 조령감은 자신의 부가 노력의 결과라는 생각에 마을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살다가 따돌림을 받는다. 오로인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억울해하는 오랜 벗 조령감에게 공동체의식을 가질 것을 부탁한다.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자유로와진 시대에도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자세와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충고이다. 이는 정치적 억압이 사라지고 경제적 자유가 주어진 시기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 윤림호의 대답일 것이다.

 

3. 시대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

문혁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본격화하면서 중국사회는 점차 경쟁이 치렬해지고 빈부의 차가 생겨나기 시작하여 돈에 대한 열망이 폭발한다. 개혁개방은 개인적인 부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였고 소수의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여 개혁개방의 혜택을 누리게 되자 가난하나마 공동의 가치를 지향하던 마을이 와해되여 타락한 방법으로라도 부를 획득하기 위하여 혈안이 된다. 특히 조선족사회에서는 서울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으로 대한민국의 존재를 알게 되고 가족방문의 형태로 한국에 가서 큰돈을 벌어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돈을 벌기 위해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출국을 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일들이 빈발한다.

윤림호는 《투사의 슬픔》을 출간하고 남라고촌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창작을 하는 생활을 이어간다. 정치적 억압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작은 영웅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윤림호는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를 바라보면서 개혁개방이 갖는 의의보다는 그에 부응하여 폭발하는 인간의 욕망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윤림호는 7년 동안 발표한 소설 중에서 단편소설 13편과 중편소설 2편을 선별하여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 직전에 《고요한 라고하》를 출간한다.

이 작품집에 실린 작품에서 우선 눈에 뜨이는 주제는 사랑인바 그 례로 로년의 사랑을 담고 있는 <할미꽃>을 들 수 있다. 할머니가 산속 움막의 륙손이로인과 정분이 나서 돼지풀을 뜯으러 다니는 것을 안 아들 내외가 소문이 두려워 산에 가지 못하게 돼지를 팔고 남은 것은 도축한다. 륙손이로인을 만나지 못하게 된 할머니는 시름시름 앓고 로인이 찾아와 아들 내외에게 산속에 데려가 병을 고치겠다고 하나 거절당한다. 결국 할머니는 병으로 죽고 륙손이로인은 라고하에 투신자살한다. 삶의 끝자락에 선 로인들이라도 사랑을 느낄 수 있지만 자식들은 주변의 소문이 두려워 그것을 막는 것이 보통이다. 윤림호는 이러한 일반적인 행태에 대해 로년의 진실한 사랑이 그들에게 하나의 권리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누가 소문이라는 굴레로 로년의 사랑을 막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주변의 소수자, 약자들의 사랑에 대한 윤림호의 관심은 여러 작품에서 반복된다. 옆집 홀아비에 대한 관심을 주변과 시어머니의 눈 때문에 포기한 미망인 미금이가 리혼녀인 친구 미자가 홀아비와 결혼하자 미쳐가는 과부의 욕망을 그린 <락엽>, 쌍둥이 아들을 가진 남선생과 사랑하여 자식을 얻는 추녀 녀선생의 사랑을 그린 <산촌의 단풍>, 남성스러운 외모와 성격으로 산속에서 양봉을 하며 홀로 지내던 손이랑이라는 처녀와 약재밭을 관리하러 온 정호와의 사랑과 리별을 그린 <뻐꾹새>, 아버지의 력사로 살길이 없어 방목장 한족 장서방에게 팔려간 천치 빵떡이가 보여주는 남편과 동생에 대한 사랑을 그린 <천치 빵떡이> 등의 작품이 그 례이다. 약자의 사랑,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이성에 대한 욕망을 비난하기보다 그것을 리해하고 이성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그들의 권리이며 그들도 인간임을 강조한 이들 작품은 윤림호의 인간관을 잘 보여준다.

《고요한 라고하》에는 개혁개방과 한국과의 교류에 따라 일확천금하려는 욕망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다수 등장한다. <고향에 온 손님>에는 가공공장 민창호와 양돈호 우대일 그리고 양계호 오봉식 등 선향촌에서 개체로 공장과 농장을 하려는 세 동서가 등장한다. 이들은 선향촌 출신으로 해외에서 부호가 된 우락부로인이 고향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행정단위 사람들을 따돌리고 로인을 마을로 모셔 극진히 대접한다. 그러나 많은 음식을 준비하여 아부하는 민창호, 안해 묘란의 애교로 환심을 사는 오봉식, 동성동본임을 내세워 접근하는 우대일 등이 각자의 욕심 때문에 갈등하지만 로인이 갑자기 죽어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된다. 개혁개방 이후 화교들이 고향에 투자를 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풍자한 이 작품은 돈을 벌려는 욕심에 들끓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의 말미에 우락부로인의 아들이 장례를 치르고 나서 세 동서에게 하는 마지막 말에 작품의 주제가 요약되여있다.

 

나는 부친이 오시기 전후의 일들을 다 료해하였습니다. 동포로서의 나의 이번 체득은 아주 깊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규납(귀납, 필자)한다면 합심이 투자보다 낫다는 그거지요. (《고요한 라고하》, 32쪽)

 

외국에서 들어오는 투자금을 잡기 위해 경쟁하기보다 합심하라는 이 말은 개혁개방으로 외국자본이 투자되고 화교들이 고향에 투자하는 상황에 대처할 방안을 소설적으로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투자를 기대하고 각자도생하기보다는 합심하는 것이 낫다는 지적은 개혁개방 직후 집체에서 개체로 나아가는 시기에 중국의 농촌사회가 겪은 현실과 새로운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잘 보여준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편지>에서도 그려진다. 항미원조전쟁에서 포로가 되였던 과거 때문에 정치투쟁의 대상이 된 피덕구는 리혼을 당하고 자식과도 계선을 나눈 채 어렵게 살아간다. 그런데 한국에서 전사한 줄 알았던 전우 정회찬의 편지가 오자 왕래도 없이 지내던 두 아들은 갑자기 효도를 하고 새 남편이 감옥에 간 전부인도 찾아온다. 정치투쟁의 대상이 되여 힘든 아버지와 계선을 나누고 왕래를 단절했던 아들들이 한국에서 편지가 오자 돈을 벌 기회가 왔다는 욕심에 아버지를 서로 모시겠다고 싸우는 모습은 개혁개방과 한국과의 교류 이후 돈에 대한 욕망만 가득한 현실을 희화한 것이라 하겠다.

자신의 행동은 반성도 않고 돈만을 따라 달려드는 인간의 모습을 비판한 작품으로 백만호 부자와 불로담이라는 오지에 살고 있는 구구할미와의 관계를 그린 <불로담에 깃든 이야기>가 있다. 백만호의 아버지는 항일유격대의 자식인 자신을 불로담에 데려다 길러준 구구할미의 남편이 친일문제로 투쟁당했을 때 외면하고는, 자신이 정치적 리유로 타도되자 아들을 불로담에 보낸다. 백만호는 구구할미가 데려다 키운 깜장네를 겁탈하고 부부로 인정받았지만 아버지가 명예 회복이 되자 도시로 도망쳐 련락을 끊어버린다. 그러나 사업을 벌였다 망한 백만호는 큰돈을 벌었다는 구구할미를 찾아 불로담에 가서 대형 식당의 경리가 된 깜장네와 자신의 딸 산매를 만난다. 질병을 고쳐준다는 불로담이라는 신성 공간에서 백만호 부자의 모든 잘못이 용서되여 설화 같은 분위기를 보이는 이 작품은 자신에게 리익이 된다면 두번씩이나 배신하고 도망쳐 련락을 끊었던 곳까지 찾아가는 인간의 얄팍한 욕심을 보여준 점이 문제적이다.

이들 작품과는 달리 중편소설 <기념비에 깃든 일사>에서는 렬사비에 적혀있던 사람이 퇴역장군이 되여 고향을 찾자 그의 위엄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장군의 젊은 시절 안해인 곱추할미와 서로 사랑하던 청춘남녀가 자살하게 하고 장군이 낚시할 장소를 만들다가 들판이 물에 잠기게 되자 장군의 손녀가 장군을 설득해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를 통해 귀향한 퇴역장군이 마을에 베풀 작은 리익을 기대해 일을 벌이는 소인배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이 작품은 개혁개방에 따른 돈에 대한 열망의 폭발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작은 리익 때문에 마을 사람들을 압박하고 퇴역장군의 눈에 들기 위해 온갖 불합리를 저지르는 인간을 풍자한다는 점에서는 우의 몇 작품과 동궤를 이룬다.

《고요한 라고하》에 실린 작품들은 남녀 사이의 진정한 사랑의 의미, 개혁개방 이후 돈에 대한 열망으로 변화한 인심 등을 소설화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와는 달리 라고하 배사공을 하며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널 때 헤여진 누이와 미국, 카나다, 일본, 한국으로 흩어진 자식들을 기다리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로인을 그린 <모래성>과 조선전쟁 때 만주로 이주해 라고하 배사공을 하며 평생 고향을 그리면서 산 부친이 한국에 두고 온 안해의 련락으로 고향방문 팀에 합류하나 출발 직전에 지병인 심장병이 발작해 사망하는 내용을 담은 <아리랑 고개> 등은 조선족의 리산과 이주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들은 만주로 이주하여 평생 떠나온 고향을 그리며 산 조선족들의 삶을 제재로 선택한 점에서 이주문학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작품들에서는 리산의 경험을 가진 조선족 1세대들과 만주에서 태여나 자란 2세대들의 고향의식이 같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라고하! 아버지께서 뿌리내린 곳, 어머니께서 묻힌 곳, 내가 나서 자란 고향, 여기에도 우리 선조들의 슬기와 자랑과 피어린 투쟁사가 찬란하게 새겨져있는 것이다. (《라고하 배사공》, 97쪽)

 

<아리랑 고개>에서 고향 방문을 하지 못하고 사망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그가 만주에서 새로 결혼하여 얻은 딸은 아버지가 평생을 잊지 못한 고향이 한국이듯이 자신의 고향은 바로 이곳 만주땅이라 생각한다. 조선족의 후예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땅이 선조들이 과경민족으로서 피어린 투쟁을 통해 힘들게 뿌리내린 이방이지만 자신들에게는 고향일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이는 한국과의 만남으로 조선족들이 경험한 정체성에 관해 윤림호의 견해를 드러낸 것으로 중한수교 이후 한국체류를 통해 조선족들이 경험한 이중정체성을 선취한 것이라 하겠다.

윤림호는 대학을 졸업하고 1987년부터 1년 정도 할빈에 소재한 《송화강》잡지에서 편집으로 일한 이외에는 남라고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창작에 힘을 기울였다. 이 시기 대학생활에서 작가로서의 능력과 자존감을 확인한 윤림호는 개혁개방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조선족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작가로서 왕성한 창작열을 가지고 개혁개방으로 급변하는 중국사회와 조선족이 경험하는 정체성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개혁개방으로 나타난 금전만능주의와 인간의 도리를 잊어버리는 세태를 비판하는 작품과 자신들이 터 잡은 이 땅이 부모들의 피땀으로 일군 진정한 고향임을 보여주는 작품을 다수 발표하는바 이는 작가로서 현실을 바라보는 치렬한 의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로담에 깃든 이야기>에서와 같이 설화적 세계에 대한 탐닉을 보이거나 <기념비에 깃든 일사>에서 보이는 주제의 분산은 작가로서의 긴장이 약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4. 환상을 통한 야생과 인간의 대비

윤림호는 1990년대 중반에 《꽃동산》잡지사와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근무하던 3년 반 정도를 목단강에서 살았고 6개월 남짓 한국에서 불법체류하는 등 4년 정도 도시 생활을 하였는데 이는 남라고촌에서 생활하던 그에게 있어 커다란 변화였다. 이 시기 10여년 동안 윤림호는 그로서는 번잡하게 살면서도 소설집 《조막손로친과 세다리 개》와 장편소설 《승냥이가 울던 계절》을 상재하고 장편소설 《명암의 세계》(《연변문학》 2000.1~2000.10)를 련재하였으며 <생활의 교실>(《천지》1998.6)을 비롯한 중편소설 10여편과 30여편의 단편소설 그리고 10여편의 동화와 적지 않은 수필과 수기 등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발표된 윤림호의 작품은 한국체험의 등장 여부에 따라 크게 두 경향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조막손로친과 세다리 개》에 수록된 9편의 소설 중에서 한국체험이 등장하는 작품은 한국에 가서 큰돈을 벌어오는 일을 소재로 사용하는 <숙명론>과 <조막손로친과 세다리 개> 뿐이고 나머지 일곱 작품과 장편소설 《승냥이가 울던 계절》에는 한국체험이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 장편소설 《명암의 세계》는 작가 자신의 한국체험을 바탕으로 창작되였다. 《고요한 라고하》를 상재한 직후 중한수교가 이루어지고 조선족들의 한국행이 본격화되여 조선족사회의 이슈가 되였고 작가 자신이 한국에서 불법체류를 한 바 있음에도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에 한국행 열풍이나 한국체험 등이 등장되지 않은 것은 매우 특이하다.

<조막손로친과 세다리 개>는 한국에서 큰돈을 벌어와 삶은 풍요해졌지만 인정을 상실한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하고 홀과부가 된 회령댁은 어미 잃은 한족아이를 양아들로 키우며 살림이 어려워 버려진 오두막에 살다가 다리가 셋 밖에 없는 강아지를 데려다 키운다.

 

그 때 보니 뒤다리 하나가 이런 병신이더군. 낳자 그런 병신이였던가봐. 주인집에서 싫다고 내다버린 게 분명했네. 그래서 난 불쌍히 여겨 감자씨광주리에 넣어 머리에 이고 왔네. 집에 들어서자 우리 영욱이가 보더니 내다버리라고 하더군. 내가 숨 가진 걸 그러면 못쓴다고 나무람하자 영욱인 개도 크면 사람처럼 은혜를 알 줄 아는가고 날 비난하더군. 나 그거야 키워봐야 안다고  대답했네. 내가 평생에 음덕 두가지를 쌓았다면 하나는 영욱이를 키운 거구 하나는 놔두면 죽었을 이 세다리 개를 가져다 키운 거라네. (《조막손로친과 세다리 개》, 183쪽)

 

양아들 영욱이 한족으로 족적을 바꾸기 위해 오두막으로 찾아온 자리에서 며느리에게 세다리 개를 키우게 된 경과를 말하는 인용부분에서 작품의 주제가 직접 로출된다. 자식을 키우고 싶었던 회령댁은 한족아기 영욱을 얻어다 조막손까지 되여가면서 정성을 다해 키웠다. 하지만 헤여진 지 50년 만에 남동생에게서 련락이 오자 영욱은 돈을 벌 기회라며 조선족으로 족적을 바꾸어 한국에 다녀와 새 집을 짓고 한족녀자와 결혼하지만 로친을 모시지 않는다. 그러다 사기를 당하고 리혼해야 할 상황에 다시 만난 생부의 재산을 탐내여 한족으로 족적을 바꾸겠다고 한다. 조막손로친이 영욱의 처신에 마음을 비우고 집을 나서는 순간 낡은 오두막이 무너지고 로친이 죽자 그녀의 무덤은 세다리 개만 지키고 있다.

이 작품은 데려다 키운 양아들과 얻어다 키운 세다리 개를 대비하여 개보다 못한 인간을 비판하는데 한국방문이 소재로 선택되였다. 이 작품에서는 조선족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한국행이 혈육상봉 욕망과 큰돈을 벌기 위한 기회가 교차하는 일 정도로 처리되여 큰돈을 번 뒤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잃어버리는 세태를 비판하기 소재로 사용된다. <숙명론>에서도 억척스러운 로동으로 집안의 기둥으로 살아온 염씨는 아들 내외가 한국에서 큰돈을 벌어와서 새집으로 이사한 후부터 집안에서 존재감이 사라져 강아지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다고 느끼자 강아지를 밟아버린다. 이 작품에서도 돈 때문에 인간의 도리를 내팽개치는 조선족사회를 비판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 한국행이 소재로 사용될 뿐이다.

이들 작품과는 달리 <승냥이골의 마지막 종족>은 인간과 승냥이의 싸움을 통해 승냥이의 야생성과 종족간의 사랑을 보여준다. 산지기 령감이 백승냥이에게 죽은 뒤, ‘나’는 새끼 세마리를 승냥이에게 잃고 한마리(가미)만 키우는 황구와 산막에서 지낸다. 백승냥이를 사살하고 한마리 남은 백승냥이의 새끼(야미)를 산막에 데려와 황구의 젖을 먹여 키우자 야생성이 남아있는 야미는 가미를 죽이고 산막을 떠나 가끔 집 앞에 먹이를 물어다 놓는다. 쏘련과의 전쟁 준비로 승냥이골의 개를 박멸할 때 황구도 살해되고 승냥이 소탕 작전에 야미를 쫓아 굴까지 추적해보니 하반신을 못 쓰는 황구와 새끼 두마리가 살고 있어서 그 곳을 가려두고 돌아왔다가 후에 가보니 야미와 황구 가족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 작품은 백승냥이와 그 새끼 야미를 통해 승냥이의 지혜와 잔인성을 그리면서도 어미의 원쑤를 갚기 위해 가미를 죽이고 젖을 먹여 키워준 은혜를 갚으려 황구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고 또 황구의 목숨을 구해주는 야미에게서 인간 못지 않은 사랑을 보여준다. 이것은 야생성이란 날것 그대로의 삶이며 개체보존과 종족보존 본능만이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본능만이 부딪치는 세계가 아니라 본능 속에 보존된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륜리보다 더 진실한 것일 수 있다는 윤림호의 생명관을 반영한다. 그러나 짐승의 삶을 통해 인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보여주려 한 이 작품은 설화적 분위기와 환상의 람용 등으로 사건의 전개에서 개연성이 부족해졌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조막손로친과 세다리 개》에 수록된 작품 중 앞의 세 작품을 제외한 작품들은 환상과 비현실적인 전개로 구성이나 주제 상에서 긴장감을 상실하고 있다. <귀신포>는 신혼려행길에 산 속에 숨어사는 고모를 만나러 가다 길을 잃어 들어가면 죽는다는 귀신포에서 정신을 잃었다가 고모네 집에서 깨여나는 환상적인 상황과 비현실적 사건 전개를 보여준다. 또 <청춘의 태공나라>는 산속  기상관측소에서 기사로 일하며 과학환상소설을 쓰는 인물이 엉터리 과학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외계인을 통해 영원한 청춘을 준다고 녀성을 속이고 지방정부로부터 사업제안을 받는 등 현실성 없는 사건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진다. 또 의부증 안해 때문에 교사에서 해직되여 술집을 운영하는 남자와 시누이 자리의 모함으로 교사직을 그만두고 술집에 취직한 녀자가 사랑을 일구는 <남장마을의 별곡>과 같은 학교 민영교원인 친구의 녀동생이 사라져 ㅎ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가 경험한 암흑세계의 이야기를 담은 <교정에서 먼 곳>은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듯하나 중편소설 정도의 분량에 너무 많은 음모와 우발적 사건들을 라렬해 작품의 주제가 분산되고 작품의 전개가 비현실적이라는 한계를 보인다.

장편소설 《승냥이가 울던 계절》은 문혁과 중쏘국경분쟁으로 긴박한 국경마을의 현실, 인간의 욕망이 드러나는 계급갈등, 인간과 승냥이 무리의 갈등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 등 네가지 제재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건이 전개된다. 전쟁에 대비하여 방공호를 만들고 전투훈련도 하는 마을 사람들의 고통과 계급획분으로 투쟁당한 사람들의 억울함 그리고 마을의 작은 권력을 개인적 리익을 위해 휘두르는 인간들의 욕망과 렬사집안의 명예를 위해 인간성을 억압하는 비정상적 행태 등 다양한 사건이 전임 민병련장 조명섭을 둘러싼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작품 전반부에 전개되는 한 마을에 압축된 모순과 갈등이 맺히고 풀어지는 모습은 작품의 긴박감을 형성한다.

그러나 작품 중반에서 <기념비에 깃든 일사>의 제재인 렬사비에 적힌 전쟁영웅이 고향을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렬사비를 관리하던 로파의 자살, 전쟁위기 속에 련애나 하는 일은 총살감이라는 영웅의 한마디에 자살해버린 련인, 영웅의 낚시를 위해 마련한 보 때문에 농지가 물이 차는 사건 등 작품 전체와 동떨어진 사건들이 라렬되면서 작품의 전개가 혼란스러워진다. 특히 <승냥이골의 마지막 종족>의 내용이 변형된 사냥개 랑구 가족과 백승냥이 종족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서사 중 하나로 자리잡고부터는 소설의 방향이 더욱 흔들린다. 랑구의 영특함과 용감함 그리고 승냥이 가족의 잔인함과 생명력이 대비되여 전경으로 등장하면서 도입부분에서 보여준 문혁과 중소분쟁시기의 계급갈등과 전쟁위기 등 중국현대사의 한 시기에 변방 마을에 살던 조선족들이 겪은 고난과 극복이라는 주제가 후경으로 물러선 것이다. 그 결과 동물들의 야생성에 관한 환상적 서사가 렬사의 아들 조명섭과 지주분자의 딸 렴윤자가 명섭 모친과 명섭을 짝사랑하는 오봉숙 등 주변사람들의 방해와 비난을 극복하고 우여곡절 끝에 산지기막에서 단둘이 결혼하는 사랑 서사와 혼합되면서 소설적 리얼리티를 상실하게 된다.

《고요한 라고하》를 상재하고 《승냥이가 울던 계절》을 출간하기까지 10년은 개혁개방의 성과가 드러나고 중한수교로 한국 방문이 자유로워져 조선족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맞이한 시기였다. 한국에서 부를 획득한 조선족들이 자녀교육의 기회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도시로 이동하여 농촌의 조선족공동체가 와해되였고 한국에서 류입되는 자본의 증가로 조선족사회는 돈이 지배하는 타락한 사회로 급변하는 등의 문제를 로정하였다. 나아가 한국과의 교류과정에서 이중정체성을 경험하고 한국인과의 접촉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기도 하였다.

윤림호 소설에는 조선족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서사가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등단 초기부터 개혁개방으로 가난하나마 서로 돕던 공동체사회가 와해되는 현실에 비판적 시각을 보였다. 그의 공동체지향 의식은 중한수교 이후에도 유지되여 그의 작품은 시대의 급변에도 변하지 않는 인간다움을 강조하고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도리를 망각하는 인간과 은혜를 갚는 짐승을 대비하여 인심의 변화를 비판한다. 이처럼 윤림호가 공동체적 가치관이 유지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은 개혁개방과 중한수교 이후의 사회변화를 바라보는 나름의 현실인식 방법으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현실인식은 윤림호가 조선족집거지인 연변을 벗어난 산재지구에서 생활하여 조선족 공동체가 더욱 빨리 와해되는 현실을 목도한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금전중심으로 변화하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 현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현실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소설적 해결방안을 모색하기보다 야생성과 대비하거나 환상의 세계로 나아가 소설적 긴장감을 상실한 것은 윤림호의 작가적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작가 윤림호가 시대의 변화를 옳바로 인식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여 그 소설적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가능하게 한다.

 

5. 한국체험의 소설화, 그 한계와 의의

윤림호의 소설에 조선족들의 한국행과 관련한 소재가 사용된 것은 《고요한 라고하》를 상재한 시기부터이다. 그러나 이후 출간된 두 소설집에 실린 24편의 작품 중에서 한국방문이 소재로 사용된 것은 전 안해의 련락으로 가족방문의 기회를 잡으나 출국 전 사망하는 <아리랑 고개>, 죽은 줄 알았던 전우의 편지에 자식들이 흥분하나 본인은 발광하는 <편지>, 어머니 덕에 한국에 가서 큰돈을 벌어와서는 인간의 도리를 잃어버리는 <숙명론>과 <조막손로친과 세다리 개> 등 네편 뿐이며 한국방문 이후 발표한 중편소설 <생활의 교실>에서도 안해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로씨야로, 한국으로 돌아다녔다는 내용이 간단히 서술될 뿐이다.

한국방문을 마치고 3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후 윤림호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울산의 현대콘테이너 공장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제재로 하여 한국사회에서 불법체류하는 조선족들의 삶을 다룬 《명암의 세계》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A시에 있는 태성산업이라는 하청 콘테이너공장을 공간적 배경으로 로동쟁의로 몸살을 앓는 한국사회, 한국인들로부터 차별과 멸시를 당하는 조선족의 고통, 렬악한 환경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조선족의 삶 등 세가지의 내용을 기둥으로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사건들을 다룬다.

중국에서 체육교사를 하다 한국에 입국해 불법체류하면서 콘테이너 생산회사 로동자로 일하는 충호라는 인물을 초점화자로 하는 이 작품에는 외환위기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직전 한국사회에 만연했던 로동쟁의가 배경으로 깔려있다. 로동자들은 로동조합의 소식지를 돌리고 벽보를 붙이고 쟁의를 벌이고 사장과 간부들은 조회시간마다 경제현황과 회사의 사정을 알리고 애사심을 강조하고 로동자들을 회유하기도 한다. 특히 조선족로동자들에게는 불법체류중이므로 로동쟁의에 참가하면 강제출국된다고 겁을 주기도 한다. 조선족로동자들은 이런 현실을 혼란스럽다고 느끼고 또 이에 대해 한국인 로동자들이 바로 이런 것이 자유이고 정의라고 하는 말에 당황하기도 한다.

중국사회에 로동운동이라는 개념이 부재했던 1990년대 중반에 한국에 입국한 조선족들로서는 임금을 받고 로동을 하면서 회사를 상대로 시위하고 파업하는 일을 리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초점화자인 충호가 로동쟁의에 대하여 어떠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관찰자적 자리에 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불법체류 기간중에 3개월 정도 울산의 현대콘테이너에서 근무한 것이 한국에서의 로동체험의 거의 전부인 윤림호가 그 시기 한국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던 로동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였을 것이다. 더우기 《명암의 세계》에서와 같이 대기업의 하청업체인 태성산업 같은 업체가 원청업체와 로동자 사이에서 겪는 복잡한 상황은 한국사회에 대한 리해가 부족한 작가로서는 관찰자적 서술 이외의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명암의 세계》에서는 한국사회의 거시적 문제보다 작가 자신이 직접 경험한 직장의 한국인 간부와 로동자, 집주인, 가게 주인 등 주변적 인물들이 주로 다루어진다. 직장에서 관리직 간부들은 로동자들을 무시하며 거친 언사를 사용한다. 특히 불법체류자 신분인 조선족들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녀성로동자들을 성적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태성산업의 간부 류총무가 조선족 녀성 홍현실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것이 그 좋은 례이다. 또 술집주인은 갖은 애교로 조선족들의 임금을 노리고 려관이나 술집 종업원들은 외로운 조선족 남성에게 성을 팔아 돈을 챙기고 식당주인은 충호의 전우 청삼이의 한의학 지식을 리용하여 불법 시술로 큰돈을 벌려 하고 세집주인은 세 들어 사는 조선족 녀성에게 눈독을 들이고 한국인 로동자들은 허풍이 센 청삼에게서 술과 안주를 얻어먹으며 의리를 부르짖다가 막상 청삼이가 위급한 상황이 되자 등을 돌린다. 이렇듯 이 작품에 등장하는 한국인들은 조선족들의 돈을 갈취하거나 성적 욕망을 채우는 인물로 그려져있다. 이러한 인물설정은 한국이 경제적 번영으로 가난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륜리나 가치를 상실하였다는 비판을 위한 소설적 장치로 리해된다.

충호와 한조의 조원으로 일하면서 조선족이라고 업신여기고 괴롭히던 한씨는 충호와 주먹다짐을 하고는 절친한 관계로 발전하여 조선족의 처지를 리해하는 인물이 된다. 또 세집 주인의 딸 정임순은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조선족들을 도와주기에 힘써 기독교 협회의 이웃 돕기 활동의 도움을 받아 홍현실의 병을 고쳐주고 중국으로 귀국하도록 조치해주기도 한다. 이 두 인물은 조선족을 멸시하던 인물이 개심하는 경우와 원래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조선족을 포용하는 인물이라는 성격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이들 만큼이라도 조선족의 처지를 리해하고 공존하려는 인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듯 《명암의 세계》는 조선족을 괴롭히는 인물과 사랑을 베푸는 인물이 공존하고 경제적으로 번영했지만 륜리적으로는 타락한 사회 즉 명과 암이 함께 하는 한국사회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한국사회의 명과 암보다 더욱 중요한 제재는 한국에서 불법체류하고 있는 조선족들의 삶이다. 이 작품에서 한국에 입국한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견디기 어려운 아픔을 겪고 그것을 피해 출국하여 쓰디쓴 삶을 살고 있다. 충호는 첫사랑 전순미가 한국남자와 결혼해 출국하자 마음 없는 결혼을 했다가 모순투성이인 혼인생활을 청산하고 출국하였고 청삼은 첫사랑을 현간부 아들에게 뺏기고 결혼 당일 술김에 신랑의 천치 녀동생을 겁탈했다가 그녀와 강제결혼하고 큰돈을 벌어온다는 핑게로 출국하였다. 또 충호와 결혼을 약속했던 전순미는 돈을 탐낸 아버지의 강요로 한국남자와 결혼해 출국하였고 조홍자는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강제로 결혼한 현 간부 아들이 도박을 일삼고 폭력을 휘두르자 자식을 친정에 맡기고 출국하였으며 할빈민족문화관 가무단원이였던 홍현실은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중국이 지겨워서 공연 차 한국에 왔다가 불법체류를 하였다.

이들은 돈 때문에 사랑이 파괴되자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또 자신을 이렇게 만든 돈을 벌어 꿈을 이루겠다는 심경으로 큰 빚을 져가며 한국행을 감행하였다. 이 작품의 인물들이 한국을 중국에서 겪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회피할, 또 꿈을 이룰 만한 돈을 벌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은 조선족들의 내면적 진실의 한 부분을 보여준다. 한국에 입국한 조선족들은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아니 그보다 먼저 한국행을 위해 진 막대한 빚을 탕감하기 위해서 죽기살기로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에 와서 차별과 멸시 속에 힘든 로동을 하여도 생각했던 것처럼 돈이 모이지는 않는다.

 

달세 10만원의 방값을 같이 지내는 현실이와 5만원씩 반분해 주인집에 내고 전기세, 물세, 위생비, 전화비 등 잡비용을 청리당하고 나면 매달 집에 40만원씩 송금하는 것도 아름찬 부담이 되여졌다. (중략)

휴무일까지 련속 작전해야 60만원이면 기록이였고 그것으로 잡세를 물고 회사의 식비를 떼고 집에 부치고 생활을 조직해야 했다. 한마디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강을 건너는 쥐무리처럼 일단 놓기만 하면 안되게 늘쌍 빠듯빠듯한 상태였다. (《명암의 세계》, 《연변문학》 2000.3, 105쪽)

 

조홍자의 생각으로 서술된 이 부분은 한국에서 로동자로 열심히 일하고 출퇴근 이외에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 두지 않아도 생각처럼 돈이 모이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 자식을 앞세워 돈을 강요하고 그 돈을 술과 노름으로 탕진하는 남편을 둔 조홍자나 가족의 생활비와 꾼 돈을 갚아야 하는 대부분의 조선족들의 미래는 암담할 뿐이다. 또 착실하기 그지없는 칠수처럼 몇년 동안 저금통장을 만들지 못해 임금을 류총무에게 맡겨두었다가 돈을 다 날릴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이처럼 돈은 모이지 않고 중국의 빚이 늘어가기만 하게 되면 청삼이처럼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술과 녀자에 탐닉해 돈을 탕진하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중국에서의 삶이 어려웠듯이 한국에서의 삶 역시 불안정하다. 《명암의 세계》에서 이러한 상황을 설정한 것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와도 그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작가의 현실인식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다.

충호는 불안정한 한국생활 중에 한국인 한씨와 주먹다짐을 벌인 일로 한국인의 차별을 견디며 살아가는 조선족들에게 주목을 받는다. 뛰여난 무술 실력과 타인의 어려움을 돌보는 그의 모습은 조선족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공장 측에서도 이전과는 다르게 취급해준다. 또 이 일로 조신한 처신으로 태성산업 남자들의 표적이 되던 조홍자도 충호에게 관심을 보이고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첫사랑 전순미가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궁금해하던 충호는 한씨의 부탁으로 폭력배 하나를 때려눕히고 형사들을 피해 도주하다가 피신해 들어간 집에서 지체 부자유에 성적 능력도 없는 의처증 환자와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전순미를 만난다. 그녀의 절망 끝을 보아버린 충호는 그녀와 영원히 헤여지자 결심했지만 전순미의 아버지가 사고로 죽은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다시 만나고 우여곡절 끝에 충호의 남성다움에 매료되였던 조홍자의 도움으로 전순미와 함께 중국으로 돌아간다.

충호는 한국에서 수많은 일을 경험하고 자신을 A시로 부른 전우 청삼을 잃고 남편에게서 도망치기로 한 전순미가 남편에게 남겠다고 하고, 함께 중국으로 가기로 한 조홍자도 동행을 포기하자 홀로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조홍자의 설득으로 함께 귀국하려 공항으로 달려온 전순미를 만나 비행기에 오르고, 리륙하는 순간 무엇을 위하여 한국에 와서 이런 생활을 했는가 하는 상념에 잠긴다.

중국민항 려객기는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해탈의 몸부림인듯 몸체를 세차게 떨고 있었다.

충호의 머리속에는 출국나들이붐으로 하여 황페해져가는 동네의 정경이 떠올랐다. 땅을 버리고 삶의 터전을 버리고 사랑을 버리고… 사실 조선족들의 비극은 한국땅에서가 아니라 두고 온 땅에서 더 크다는 것을 충호는 깨달았다. 무엇 때문인가? 누구 탓인가? (《명암의 세계》, 《연변문학》 2001.10, 118~119쪽.)

 

충호는 한국에서의 체험을 통하여 조선족들의 한국행 열풍의 비극은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한국땅에서보다 남겨진 사람들과 황페화된 고향에서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자각에 이른다. 이는 한국과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불법체류를 하며 돈벌이에 나서 차별과 멸시를 견디며 살았다는 비극적인 사실보다 한국행 열풍으로 파괴되는 조선족 공동체의 와해가 더 심각한 문제라 인식한 것이다. 한국에 가서 돈을 벌고 또 그 돈으로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면서 선조들이 낯선 땅에 이주해와서 피땀으로 일구어 만들어놓은 고향, 조선족 공동체 속에서 인정 가득하고 인간다움을 유지하면서 살았던 고향이 페허로 변하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는 것이 윤림호가 《명암의 세계》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인 것이다.

윤림호가 보여준 인간다움과 공동체적 삶에 대한 지향은 중한교류 이후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겪은 차별과 멸시라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이중정체성과 국민정체성과 같은 관념을 문제 삼은 기존의 작가들과는 다른 현실인식이다. 더우기 조선족이 경험하는 한국에서의 인간적 모멸보다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선족 사회의 황페화가 더 문제라는 지적은, 허련순이 <바람꽃>에서 보여준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들이 국민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였다는 인식의 차원이 아니라 조상들이 가꾸어왔고 조선족의 미풍이 이어져 인정이 존재하고 화목하게 살아가던 고향의 회복이라는 현실 차원의 꿈을 보여준다. 이렇듯 윤림호가 《명암의 세계》에서 선조들이 일구고 그들이 삶을 영위해온 고향이 황페해지는 현실을 아쉬워하며 그 회복을 기대한 것은 그가 과거를 지향하는 보수적 현실인식을 견지했음을 알게 해준다.

 

6. 결론

본고는 윤림호의 소설을 창작시기 별로 작품의 주제와 경향을 정리하고 각 시기에 그러한 주제에 집중하고 일정한 경향성을 띠게 된 내외적 요인을 검토하여 윤림호 소설의 전체적 모습을 해명하고저 하였다. 이를 위하여 윤림호 소설을 작품집 발간을 기준으로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고 시기 별로 장을 나누어 작품의 특성을 살피고 작가 자신의 한국 체험을 제재로 한 《명암의 세계》는 별도의 장에서 한국행 열풍에 대한 윤림호의 현실인식을 검토하였다.

《투사의 슬픔》에 수록된 작품은 암울한 시대 상황에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킨 감추어진 영웅을 선양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더라도 공동체 의식을 잃지 말고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고요한 라고하》에 실린 작품은 로인과 약자들의 사랑에 따뜻한 시선을 보이고 돈의 노예가 되여 인간의 도리를 잃어가는 인간을 비판하고 조상들이 뿌리내린 이 땅이 자신들에게는 고향이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조막손로친과 세다리 개》에 수록된 작품과 《승냥이가 울던 계절》은 큰돈을 벌고는 인간의 도리를 잃는 인간을 비판하고 동물들의 야생성을 례찬하고 있으나 환상에 치중해 비현실적인 전개를 보여 소설적 긴장감을 상실한 작품이 많다. 《명암의 세계》에서는 한국 체험을 바탕으로 로동쟁의로 혼돈스러운 한국사회와 그 속에서 차별을 견디며 묵묵히 일해 꿈을 이루려 애쓰는 조선족을 통해 조선족들에게 한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윤림호의 거의 모든 소설은 급변하는 현실에도 인간관계가 살아있던 공동체를 지향하고, 개혁개방과 중한수교 등으로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면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버리는 세태를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의 교류로 조선족의 뿌리인 한국과 가까워지고 한국을 통해 부를 획득하였지만 한국과의 접촉과정에서 그들이 나서 자란 중국 땅이 진정한 고향이라는 의식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윤림호는 반우파투쟁기에서 문혁을 거치는 정치적 억압과 개혁개방과 중한수교로 상징되는 경제적 자유를 맞이한 중국 현대사의 흐름 속에 시대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공동체적 가치와 고향의 회복을 지향하는 점에서 작가적 일관성을 보인다.

윤림호 소설의 주제적 일관성은 문혁 이후 급변하는 조선족의 현실을 옳바로 형상화하고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가치관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또 〈조막손로친과 세다리 개〉 이후에 급격히 환상과 야생성에 매달림으로써 리얼리티를 상실하고 한 작품에서 필요 이상의 사건을 라렬함으로써 주제의 분산이 심해진다. 이는 조선족의 삶이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고향이 황페해지는 상황에서 이를 소설화할 새로운 주제나 제재를 마련하지 못해 창작의 동력을 잃은 결과로 보인다. 윤림호가 이러한 한계에 부딪치게 된 것은 그가 시종 견지한 보수적 현실인식으로 인해 급변하는 시대에 대응하여 조선족이 나아갈 길에 대한 소설적 대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출처:<장백산>2018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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