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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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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아방가르드한 시의 향연(시평)
2019년 07월 15일 09시 25분  조회:337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아방가르드한 시의 향연

미주

 

한낱 뜨내기인 나에게 시평의 기회가 찾아왔다. 심명주시인님의 시라고 한다.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다. 올해에 들어서 제목부터 통통 튀는 매력을 지닌 작가님의 수필은 여러편 읽으면서 시도 어서 보여주십사 하고 학수고대해왔다. 이하 설레이는 마음을 눅잦히고 따끈따끈한 신상 시들을 맛보면서 어줍잖은 품평을 시도해보도록 하겠다. 

<탈춤>. 춤추는 자가 우를 향해 팔을 치켜드는 찰나에 령민한 시인께서는 기회를 놓칠세라 시상이라는 셔터를 재빨리 누른듯하다. “한삼 자락 길게 뽑아 / 구름을 서리하고 / 바람 빌어 육신으로 / 혼을 떨며 다가오는”이라는 춤 속에 자연이 녹아든 명장면이 미세한 떨림을 전하면서 서서히 인화될 때 저도 모르게 감탄을 쏟게 된다. 큐레이터인 시인의 주문에 따라 한삼 자락을 주목해보도록 하자. 하늘과 맞닿은 탈을 쓴 자의 한삼 자락은 절묘하게도 구름과도 같은 흰색이다. 이 아름다운 증좌로 인해 무자舞者는 빼도 박도 못하고 구름을 서리했다는 “덤터기를 쓴”다. 

계속되는 춤구경에 혼마저 쏙 빼앗겨 한시라도 눈을 떼지 못한 채 템포가 늦은 춤사위를 쳐다보고 있느라면 육안으로는 보아낼 수 없는 것들까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 즉 물物에서 정신에 이르게 된다. “희디흰 심장에 / 푸른 한을 덧얹어”라는 묘사에서는 눈부신 흰색 주변을 감싸는 푸른빛과 흡사한 백의민족이 지닌 한의 정서를 그린다. “운우 너머 흩뿌리는 / 망각의 무리들, 홀씨의 넉두리들”. 어찌할고? 한을 죄다 털어버리고저 곱게 흩뿌리지만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다만 망각된다. 그것도 잠시, 이는 또다시 홀씨로서 생명력을 형성하게 되고 ‘새 순을 내뱉’는다. 

이윽고 춤은 끝나고 춤추던 자는 탈이 아닌 ‘얼굴을 벗는다’. 시종일관 같은 표정일 수 밖에 없는 탈이 갖는 특성상 철저한 포커페이스를 자처하며 오로지 ‘넋을 흔드’는 춤을 추는데 집중한 그에게 있어 탈은 곧 얼굴이다. ‘진짜 얼굴’보여주기(얼굴 알리기)를 포기하고 보는 이의 ‘마음에 구멍을 뚫’는 춤군인 그는 ‘광대’로 불리운다. ‘광대’는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자에 대한 단순한 호명이 아니다. 심혈을 기울여 민족의 얼을 표현해내고 예로부터 전해져내려오는 전통문화의 명맥을 이어나가는 데 대한 최고의 찬사이다. 

<담쟁이풀>. 세상에 영원이란 없는 법이다. 흔히들 ‘예쁜 꽃도 한철이다’, ‘피여보지도 못하고 진다’ 등의 표현으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아쉬운 유감들을 전한다. 이 기준에만 근거하여 같은 덩굴과인 릉소화(여름에는 꽃 피고 가을에는 열매 맺는)와 비교해볼 때, 모름지기 한철만 푸른 담쟁이의 ‘삶’은 한없이 초라해보일 수도 있다. 

“바람이 오면 바람 타고 / 비 쏟치면 비를 품고”. 얼핏 보면 담쟁이는 맞닥뜨린 상황들에 수긍을 하면서 무난하게 살아가는듯하다. 하지만 비바람에 담쟁이 잎 전부가 살아남은 것은 아니다. 이를 상기해본다면 비와 바람은 단순히 자연현상이 아니라 살기 위해 힘겹게 이겨내야 하는 역경이다. 힘이 들 때 바라보게 되는 하늘의 ‘별을 본따’ 곁잎이 다섯으로 갈라지는 담쟁이 잎사귀 형태는 곧 희망이다. 희망은 판도라 상자 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모래처럼 흐트러’져있다. 

희망들이 옹기종기 모여 ‘무리’가 되고 나아가 ‘숲’을 이룬다. 부지런히 담만 타는 담쟁이를 통해 시인은 “형태는 흐트러졌으나 정신은 흐트러지지 않形散神不散”은 한편의 훌륭한 수필을 읽어낸듯하다. 담쟁이가 전하는 ‘뭉클’함은 ‘혼자조차 버거운 계절’에 왜 ‘하필이면’ 시인을 찾아왔을가? “사는 자신을 알아봐주는 자를 위해 죽을 수 있士为知己者死음에 그 답이 있다. 릉소화 뿐만 아니라 담쟁이도 아는 시인은 나름 대로 치열한 삶의 가치를 보아내고 긍정해주는 혜안을 가진 자이다.

<추석달>. 이 시에 대한 전반적인 감수는 요즘 류행하는 신조어인 ‘과즙미’로 표현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는 싱그러운 매력이 터져나올듯 흘러넘침을 뜻한다. 가을을 맞아 땅 우에서 무르익은 백과를 제쳐두고 하필이면 하늘에 떠있는 둥근달에서 과즙미가 느껴지는 걸가? 이는 추석달에 대한 시인의 전반적인 낯설게 하기 시도 때문이다. 

시에서는 밤하늘에 달이 뜬 모습을 “복사꽃 하나가 떠오른다”고 했다. 일정한 주기에 따라 변하는 달의 모습은 결코 둥근 원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꽃모양이라 하다니. 복사꽃이 둥그런 모양인지 하는 의심이 싹 가시기도 전에 “시원하고 맑은 도화맛 같다”고 하는 행이 이어진다. 한입 베여물고 싶은 미각적인 충동이 저도 모르게 일게 된다. 2련에서는 쏟아내리는 달빛을 두고 “꽃가루 날린”다고 했다. 눈부신 달빛을 두고 꽃가루 흩날리는 것이라고 한데 대해 수긍을 하게 된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인의 표현에 ‘완전히 낚’여 영낙없이 달을 꽃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겹겹이 쌓인 선입견의 먼지를 탈탈 털어내고 기억의 저편에 자리하고 있는 달을 길어올려보자. 달은 원체 둥그런 것이 아니지 않는가. 옳거니, 시인이 알려준 대로 달은 복사꽃으로 피여났고 꽃가루가 내려앉아 간절한 소원에 수정을 이루게 된다면 이는 다시 탐스러운 백도로 영글어져가는 것이다. 

<봄을 추모하다>에서 시인은 봄이면 만물이 소생한다는 기본 통념을 완전히 전복시키고 죽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그리하여 흥쾌한 멜로디가 아닌 장승곡을 봄노래로 선곡했다. ‘세상에 푸른 서리를 드리’운다고 하였는데 의문이 든다. 서리가 어떻게 되여 푸른색일가? 색상으로 짐작하건대 이 ‘서리’는 봄을 맞아 돋아난 새싹들을 말한다. 1련에서 ‘오가는 길손’은 봄이 되여 나타나는 새로운 기상들이다.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지나간 겨울을 위해 준비된 제주를 건네받아 마신다. 3련에서는 ‘긴 쇠길’이 등장한다. 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쇠길은 무엇일가? 해석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듯하다. 필자는 ‘늙은 하루’가 팽개쳐지는 이 길을 기온이 상승하면서 쌓였던 눈이 녹아내리며 형성된 진탕길로 풀이하고저 한다. 시간이 흐르며 봄이 깊어지고 봄이 아닌 흔적들은 하나씩 사라져간다. 이를 두고 4련에서는 봄을 ‘총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봄이라고 하는 스나이퍼의 위세는 영원할 수 없는 것이다. 봄도 언젠가는 자신이 물러나야 함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리하여 불어오는 바람에서 설음을 느낄 수 있고 날마다 세상과의 하직을 꿈꾼다. 이 시는 그동안 봄바람에 취해 영생만을 떠올렸던 자들에게 한치를 차이둔 거리에 사死가 존재함을 일깨워주는듯하다. 궤변인지는 모르겠으나 시가 원체 난해하게 씌여져 필자의 해석이 맞을 거라는 속단을 내리기가 주저된다. 

<감나무>. 심명주작가의 작품에 감나무가 등장하는 것은 로신문학원에서의 연수생활을 쓴 수필 <대나무와 함께 한 백이십일>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인 것 같다. 수필 속 “감이 익기 시작하여서부터 완숙되여 절로 떨어질 때까지, 그리고 끝까지 높이 매달려 까치밥으로 남던 마지막 한알의 감이 바람과 해빛에 쪼그라들어 기어이 푸석하게 변해서는 자연으로 돌아가던 순간까지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는 작가의 고백이 인상적이였다. 수필 속 그 감나무를 시에서 또 만나게 된다. 시적화자는 정원에 있는 한그루의 나무와 인연을 맺는다. 돈독한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 열매가 남을 때까지 기나긴 시간 동안 찾아주고 바라보는 등의 로고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말할 수 없는 나무의 침묵 속에서 시적화자는 세심한 관찰을 통해 나무의 가을에 감들이 가득 달리는 꿈 및 노란 리별의 꿈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아마 감은 / 떫은 침묵 같은 등껍질을 벗어 / 나를 만나 / 속살을 흐트리려 했을 것이다”면서 시는 끝난다. 감이 자의에 의해 외피를 벗고 자신을 드러내보일 것이라는 추측은 무한한 신뢰관계가 형성되였음을 자부하는 것이다. 시에서는 감나무와 인연 맺기를 보여주는 것을 통해 옳바른 교우자세를 제시하고저 했다. 

<파장>. 데면데면한 필자는 1련에 등장하는 ‘공원다리 연집강’, ‘장터’만을 포착하고는 좌표를 수상시장으로 잡고 달리려다 말고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 아래동네에서 비인간 군상들이 모여 이렇게 재밌는 시장놀이를 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무려 ‘몇십년’이나 되는 나름의 력사가 있다. 상상만으로라도 쌩할 바람이 손님이라고 하니 호객행위하기 참 힘들겠다. 그럼에도 벌레들의 기척마저 느끼기 힘든 새벽 3시라는 이른 시간부터 등허리를 주무르면서가 아니라 등허리들이 오히려 세상을 주물러가며 ‘각종 내음이 섞여’ 시장에 들고 갈(?) ‘겉절이’는 만들어진다. “물소리들 / 풀소리들 / 살아나는 소리들”로 북적이는 자연의 아침시장이 개장한다. “칵테일파티 효과”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자연의 일거수일투족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인지라 귀를 귀울여 “시장 아래 시장”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시인은 이 장터의 매력을 때가 되며는 “해가 나오고 / 다른 세상소리 피기 시작하면” ‘겸손하게’ 물러날 줄 아는 데서 찾는다. 공생관계에 있어 굳이 ‘본의’는 아니겠지만 기본적으로 지켜진 에티켓으로 인해 ‘또 누구의 시작’이 잉태될 수 있다. 결속의 의미로서 파장이 새로운 시작에 파장을 미치게 됨을 떠올려볼 때 끝남에 대한 아쉬움 또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씀바귀>는 사부곡이다. 아버지가 그리워난 것은 “나물에 밥을 말다 말고”이다. 촉물생정触物生情이라고 했다. 나물 때문에 아버지 생각이 나는 것으로 류추하건대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네 자식을 먹이려고 나물을 자주 캤었다. 그리하여 시적화자는 돌아가서 계시지 않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며 ‘잠간 나물이라도 캐시러 하늘 나가셨나’는 생각을 한다. 1련에서는 ‘아버지는 밥상’이라고 했다. ‘밥상’을 아버지의 형체라고 생각하여 그 우에 ‘수저 한쌍’, ‘밥 한알’과 함께 절절한 ‘그리움 한톨’까지 얹어놓는다. 아버지 생각에 울컥한 날이 있다면 ‘아버지를 먹는 날’도 있다. 우선 공포감을 조성하는 이 식인의식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형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륜리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내 아들을 눈에 비벼 밥에 말아’ 아버지를 먹게 된다. 눈에 비벼도 아프지 않은 내 자식인 ‘아들’은 할아버지인 나의 아버지를 닮은 것으로 사료된다.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떠올리며 밥을 먹었다. 이로써 ‘아버지 먹기’는 가능하다. 화자는 먹기 방식을 벗어나 아버지와의 만남을 꾀하고저 한다. 그것은 ‘내’가 ‘바람 속에 서성이는 한잎의 씀바귀’가 되는 것이다. 나물이 되여 아버지한테 캐여지고 싶다. 아버지는 밥상이니 나물인 ‘나’는 아버지 우에 차려진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전반 시의 곳곳에 리해에 어려움을 주는 난해한 표현들을 배치하여 곱씹어읽기를 유도한다. ‘나’의 영원한 식구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리해하겠으나 ‘내’가 수많은 나물을 제쳐두고 굳이 씀바귀이고 싶은 리유는 끝끝내 찾지 못했다. 시인만 알고 있는 사연이 있는 걸가? 그 궁금증은 쉬이 해소되지 않는다.

<해가 온다>. ‘커피를 마실가 자살을 할가’는 고민을 하는 시적화자에게 “그것도 고민이라고 해, 당연히…” 하고 면박을 주려다가 멈칫하게 된다.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은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을 ‘블랙 알맹이’, ‘떠있는 빛’, ‘검은 공기’, ‘옛 마을 입구 솟대’ 등의 차이를 그는 굳이 가늠해보았다고 한다. 동원된 시적 이미지로부터 보아낼 수 있듯이 그의 기분은 너무 다크하다. “액즙을 추출한 뒤 혈관으로 추방시키”는 것은 커피머신으로 커피를 내리는 것을 련상시키지만 그 결과물은 커피가 아니라 이름하여 ‘쓴맛과 체온과 비릿함들의 반란’이다. 그렇다면 시적화자는 왜 기분이 울적할가? ‘큰 해가 머리 우로 쏟아진다’고 했지만 해는 결코 원인 제공자가 아닌듯하다. 기분이 울적하다 보니 해가 내 머리 우에 드리우는 것 또한 싫은 것이다. 시는 난해함을 꾀하며 다음과 같은 리치를 전하고저 한다. 모든 일이 인과관계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기분에 충실하는 것은 진실된 자아를 만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해를 굳이 의식하지 말라. 때가 되면 스스로 지고 뜬다.

유난히 더웠던 올해의 여름도 이제는 막바지에 들어섰고 슬슬 가을이 다가옴을 기대해볼 법도 하다. 심명주시인님의 8편의 시작품은 이러한 타이밍에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여름 내내 머리에 이고 있었던 뜨거웠던 해에 대한 짜증 나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잠시나마 땀을 들일 수 있던 식물들로부터 전해지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주는 시원한 기억도 있다. 이 또한 다 지나갈 것이라는 리치를 전하면서 가을의 표상들을 슬그머니 내놓는다. 시인님의 기발한 센스가 넘치는 8편의 시에 ‘좋아요’를 꾹꾹 눌러주고 싶다. 그리고 이들 중 몇편의 시에는 커다란 물음표 이모티콘도 잊지 않고 남겨야 될 것 같다. 

출처:<장백산>2018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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