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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맥노리
조은경
“오는 일요일에 시간 좀 내라.”
오랜만이였다. 아버지가 시간을 내라고 전화한 것이.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주동적인 부름은 늘 불길함을 몰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자 윤주는 아버지와의 소통이 조금씩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윤주가 다니는 중학교에 찾아왔던 날도, 하숙하고 있는 친척집에 먹을 것을 한아름 사가지고 불쑥 나타났던 날도. 예고 없는 아버지의 방문은 윤주에게 반가움에 이어 의아함과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아버지는 리혼과 출국을 그런 방식으로 통보했다. 윤주에게 혼자라도 괜찮니 하고 묻는 것 따위의 의논은 하지 않았다.
윤주는 갑작스러우면서도 낯설지 않은 느낌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시간이 있다고 말하기도, 없다고 말하기도 애매하여 잠간 멍하니 있었다.
“…”
“성주가 결혼한다는구나. 다같이 밥이라도 한끼 먹어야 되지 않겠니…”
처음에 시간을 내라고 했을 때의 명령조와는 달리 아버지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버지의 그런 말투는 당신의 주장이나 의견에 자신 없어하는 것처럼 들렸다.
“네 어머니가 련락했더라. 결혼식에 올 수 있겠냐고.”
성주에게서 ‘나 결혼할지도 몰라.’라는 문자는 며칠 전에 받았다. 그런데 성주도 아닌 엄마가 직접 아버지에게 련락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자식의 결혼을 부모가 아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럼에도 윤주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르는, 은근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하긴! 글루건 심에 열을 가하여 떨어졌던 물건을 도로 붙여버리는 것처럼 끊길듯 이어지는 게 부모자식의 인연 아닌가. 그리고 자식을 둔 부부는 언제든 필요에 의해 련락을 지속해야 될 의무가 있었다.
엄마는 성주가 아버지처럼 리기적이고 폭력적이며 분노에 젖어있는 사람이 될가 두렵다고 했다. 사람이 어찌 평생 그런 태도로 살아가겠냐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엄마의 인식은 완고하여 부자간의 만남이라면 치를 떨 정도였다. 그런 엄마가 성주의 결혼 소식을 전하려고 아버지에게 먼저 련락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성주가 장손이라는 게 마음에 걸려서 아버지에게 련락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성주의 결혼자금을 조금이라도 보태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올 수 있겠냐는 말은 또 뭔가. 오라면 오고 오지 말라면 안 가는 거지. 또 오지 말라고 해도 아버지인데 가고 싶으면 가는 게 아닌가. 윤주가 아는 한 아버지는 자식 일에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였다. 아버지 가슴 속의 정체 모를 울분과 분노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옅어졌고 언젠가부터 딸의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 챈 지 꽤 됐다.
윤주는 별일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저절로 눈살이 찌르려졌다. 아버지에게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래서요?”
“새아버지가 있은 지 오래 됐고 성주는 대부분 엄마가 키웠으니 나까지 결혼식에 참석하는 건 모양새가 안 좋을 것 같아서 결혼 전에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했다. 부모 된 도리는 해야지. 그 자리에 너는 있어야 되지 않겠니? 몇년 만의 가족모임인데.”
부모 된 도리는 어떤 건데요, 하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친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성주에 대해선 스쳐가는 궁금증도 내비치지 않던 아버지였다. 가끔 윤주가 일부러라도 ‘성주 한국에 왔어요.’, ‘요즘은 공단에서 일하고 있어요.’, ‘공단 그만두고 무슨 학원 다니고 있어요.’ 하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는데 윤주는 그 순간 서운함이나 미안함 같은 것이 얼핏 서렸다고 생각했다. 기죽은듯한 아버지의 모습을 인지한 윤주는 성주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말해줄 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윤주는 가족모임이라는 단어를 마치 오래 전부터 말해온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에 내는 아버지가 생경했다. 윤주네 부부와 식사하는 것조차 어색해하던 아버지가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였나 싶었다.
풍성한 료리들을 앞에 놓고 서로 눈을 맞추는 부부, 수시로 목소리를 높이는 토끼 같은 아이들, 그런 손주와 자식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어른들 등 삼세대가 함께 모인 풍경이 떠올랐다. 윤주는 왜 가족이라면 늘 오순도순 모여앉아 밥 먹는 장면부터 떠올리는지 모른다. 가족끼리의 만남이란 모름지기 그런 풍경이여야 될 것 같은 믿음이 있었다.
아버지가 말하는 가족모임에 대해서 윤주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따가운 직사광선 때문에 눈 뜨기 힘든 것처럼 현기증이 일었다.
“야야! 말을 했는데 왜 대답이 없니?”
아버지가 질책하듯 소리쳤다. 윤주는 아버지의 다그침 속에서 식사자리에 꼭 참가하여 중간다리 역할을 해달라는 간절함을 보아냈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아버지는 어지간히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정확하게 십팔년 만에 네 식구가 모이는 자리이다. 아니, 구성원이 다섯일지 여섯일지 모른다. 갈가 말가. 엄마가 자신을 통해서도 아니고 아버지에게 먼저 련락했다는 소외감 때문에 윤주는 가족모임에 갈지 말지 망설여졌다.
영원히 여덟살 꼬마여야만 할 것 같은 성주가 다른 사람과 가족을 이룬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게 했다. 윤주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련락할 수 있는 애인 같은 동생이였다. 불현듯 성주가 또다시 윤주의 손안에서 스르르 녹아버려 혼자 남을 것 같은 쓸쓸함이 갈마들었다.
“꼭 와야 된다. 전날에 내가 시간이랑 장소 문자로 보낼게. 들었니?”
언제부터 이런 열성을 보였나 싶을 정도로 아버지의 목소리는 격앙돼있었다. 윤주는 떨떠름한 채 예, 예, 하는 말만 남기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 날 지연이랑 만나기로 약속돼있었다.
아버지는 여기저기서 추천을 받아 정한 한정식집이라며 정중해보이는 게 가족모임 장소로는 정말 근사하지 않느냐고 윤주에게 자꾸 물었다. 나름 정성을 기울이고 격식을 차리기 위해 신경 썼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보였다.
윤주는 이게 뭐라고, 하는 생각에 성가셨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아버지가 누구에게든 말을 걸고 싶어도 마땅한 대상이 윤주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안스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아버지, 인상이 너무 좋으세요.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인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민아가 준비한 것은 닥스 로고가 박혀있는 와인색에 빗살무늬를 곁들인 넥타이였다.
아버지는 고맙다며 멋적게 웃었는데 윤주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표정이였다. 아버지의 웃음이 수줍고 밝아서 윤주는 그만 짜증이 났다.
저런 넥타이를 매려면 정장도 한벌 있어야 되지 않나. 민아가 처음 만나는 아버지에게 넥타이만 준비한 게 마치 엄마 탓이라도 된 양 윤주는 엄마를 흘끔 쏘아보았다. 엄마는 아직도 윤주 앞에만 서면 움츠러들곤 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데도 엄마는 매번 주눅이 든 모습으로 윤주를 불편하게 했다. 그 때마다 윤주는 원망과 련민이 뒤섞인 마음을 자제하지 못하고 기어이 화를 내고 말았다.
엄마라면 자식한테 헌신적인 삶을 살았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분명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윤주는 엄마가 자신을 먼저 배려하는 다소 리기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주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네요. 아버지도 과묵하실 것 같아요.”
아버지는 알코올만 섭취하지 않으면 이 말을 꽤 자주 듣는 편이다.
“그 놈의 술만 없었으면 네 엄마하고 잘살았을 텐데 어찌 술만 들어가면 그렇게 란폭해지는지… 네 아버지는 사는 게 뭐가 저리도 억울한지 모르겠다.”
고모할머니가 문턱을 넘어서는 아버지의 등뒤를 아리게 쳐다보다가 윤주를 향해 혀를 차던 모습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있었다.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와 이제 집에 와도 엄마와 성주가 없다고 말해줬던 그 날의 아득했던 기억과 함께.
윤주는 세살 때부터 애비 없이 자라서 그래요, 라는 말이 입안에 가득찼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를 좋아하는 건 아니였다. 그러나 윤주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이 아버지를 비난하는 주체가 되거나 그런 류의 말들에 동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가족이라고 여겼다.
“어머니, 이 나물 맛 좀 보세요. 쌉싸름한 게 자연의 맛이 느껴져요. 이 집 정말 좋은 것 같지 않아요?”
민아는 처음부터 말머리에 아버지, 어머니를 붙였다. 그 호칭이 자연스럽게 입에 붙어서 윤주는 들을 때마다 뜨악했다. 아버지는 어색함과 반가움이 뒤섞인 웃음을 희미하게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엄마는 그래, 그렇구나 하며 가볍게 맞장구를 쳤다.
윤주는 민아를 중심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인간관계란 참으로 오묘하다고 생각하면서 윤주는 맞은편에 앉은 성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성주는 민아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말없이 저가락만 들었다 놨다 했다. 자신 때문에 이 자리가 마련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대화에 낄 생각이 없어보였다.
성주는 아버지와 형식적으로 인사를 나눈 후로는 눈도 마주치는 것 같지 않았다.
윤주는 웬지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났으면 했다. 그러나 한정식은 윤주의 마음과 달리 찔끔찔끔 계속해서 나왔다. 하필이면 한정식집에 와서 제일 비싼 코스요리를 주문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언니,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요즘은 다들 그렇게 불러요.”
느닷없이 민아가 훅 치고 들어왔다. 스스럼없는 호칭에 윤주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얘 좀 봐라, 하는 뜻으로 성주를 쳐다봤다.
내내 말이 없던 성주가 윤주를 보더니 가만히 웃었다. 그 순간, 윤주는 가슴 속에 맺혔던 응어리가 갑자기 풀어진 것처럼 울컥했다.
윤주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축하에 앞서 “누나, 나는 누구랑 같이 산다는 게 싫어.” 하고 말해서 황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어린 것이 외삼촌 집에 얹혀사는 동안 하루이틀 사이에 생긴 감정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윤주는 가슴이 아팠다. 사람은 늘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는데 그 인간관계가 낯설고 기피하고 싶다는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아서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방금 전 성주의 웃음은 윤주에게 안전감과 의아함이 뒤섞인 요상한 감정이 생기게 만들었다. 윤주는 낯설고도 야릇한 느낌에 눈을 몇번 깜박이다 말했다.
“그럼요. 성주와 동갑이라고 하니 나보다 한창 어린데,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요.”
윤주는 어느새 자신을 무장하고 있던 까탈스러움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불현듯 자신의 존재로 인하여 지금 이 공간의 분위기가 좋아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해야 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결혼식은 한국에서 해요? 오월의 신부, 너무 근사한데. 민아씨네 가족은 어디서 살아요? 알다 싶이 우리 가족은…”
“누나!”
성주가 날카롭게 윤주의 말을 가로챘다.
윤주는 성주를 향해 눈을 부릅뜬 채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다시 민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버지가 좀더 당당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라도 꼭 고백하고 넘어가야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처럼 정상적인 가족은 아니예요…”
“그만해! 누나가 말을 안해도 다 알아. 가족사도 모르고 만나는 사람이 있냐?”
성주가 짜증 내며 쏘아붙였다. 순간 남편을 떠올린 윤주는 허를 찔린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찌릿했다.
남편은 오늘의 가족모임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부모님에게는 건방진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둘러댔다. 그럴 사람도 아니지만 혹여 남편이 “뭐? 그게 어떻게 가족모임이야?” 하고 묻기라도 한다면 윤주는 모멸감을 느낄 것 같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직도 할아버지의 형제 넷이 살아계시는 대가족 속에서 성장한 남편은 결혼 전에 윤주네 가족에 대해 물어보더니 “그럼 친척이 별로 없네.” 하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 책임지고 양육한 자식들은 그렇다 치고 리혼한 지 이십년이 다돼가는 옛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식사를 하는 게 가능하냐며 의아해할지도 몰랐다. 가족 모두가 성주를 특별하게 여기는 게 확실하니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또 그렇게까지 창피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윤주는 남편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싫었다. 언제 튀여나올지 모르는 윤주를 비난하는 말 속에 가족이 포함된다면 그보다 더 비참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더우기 엄마는 윤주가 결혼하기 전에 둘을 불러 밥을 사주면서 남편이 경제력도 없고 시댁에서 특별히 해주는 것도 없다며 트집을 잡아 윤주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딸에 대한 걱정인지 사위를 향한 비난인지 알 수 없었다. 윤주는 그 순간 엄마에게 결혼 소식을 전한 것을 후회했다. 이번에도 남편에게 “학위를 따긴 딸 거냐? 아이는 언제 낳아서 키울 거냐? 돈은 남자가 팍팍 벌어야 되는데!” 따위의 말로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예 빌미를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윤주는 잔잔한 호수와 같은 결혼 생활에 한가닥의 물결조차 이는 것이 싫었다.
엄마는 사위 될 사람이 술에 련련하지 않는 것이라든지 성격이 유순한 건 마음에 드는데 연구소에서 받는 그 토끼꼬리 만한 연구비로 당장 밥을 먹고 살 수는 있는 거냐며 정색했다. 윤주는 돈은 내가 벌면 되지, 누가 벌면 어때 하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의 특권을 존중해주고 싶었고 남편에게 내 편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아버지와 같은 류형의 사람인지 아닌지만 확인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는듯이 엄마는 윤주의 결혼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썩 내켜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윤주는 엄마의 미지근한 태도를 두고 직접 양육하지도 않은 자식 인생에 깊게 개입하는 것은 례의가 없거나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멋대로 믿어버렸다.
“민아는 아버지 어머니가 안 계셔. 없는 게 아니라 만나고 살지 않아. 할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착하고 똑똑해. 정도 많고.”
“엄연히 살아있는데 민아씨네 아버지 어머니가 안 계시다는 말이 왜 네 입에서 나와? 부모님 만나는 봤니? 그럼 결혼식은 어디서 하는 건데? 할머니는 어디 계셔?”
윤주는 궁금한 것 투성이라 성주의 말을 급하게 받아쳤다. 어쩐지 이 식사모임이 성주의 결혼식을 대신하는 자리일 것 같은 불길함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시누이의 존재감을 제대로 어필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급함도 일었다.
어릴 적, 외삼촌에게 반말조로 말했다고 거의 한시간 동안 혼난 기억이 있는 윤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얄미웠다. 성주의 무례함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닐 텐데 짐짓 모르쇠를 놓는 아버지가 딱해보였다.
민아는 언제 ‘아버지’, ‘어머니’를 불렀냐 싶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성주가 노기를 품은 채 윤주의 말을 잘랐다.
“그런 거 없어, 결혼식 하고 싶지도 않고.”
엄마는 뭔가 말할듯 입을 실룩거리다 성주의 결연함에 눈을 내리깔았다.
성주는 당장 누구 하나라도 팰듯 눈에 독을 품었고 민아는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실내에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 때였다. 아버지가 딸꾹! 딸꾹! 하고 딸꾹질을 시작한 것이.
민아의 가족사가 못마땅한지 아니면 짧고 건조하게 내던지는 성주의 화법에 놀랐는지 아버지는 한번 시작한 딸꾹질을 쉽게 멈추지 못했다. 뜻하지 않은 불청객에 아버지는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는 애들 앞에서 이게 무슨 경우냐는듯 도끼눈을 떴다.
윤주는 이런 걸 예상하지도 않고 아버지에게 련락했냐는 원망을 담아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는 윤주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민아에게 반찬을 집어주는 행위에 열중했다. 그 풍경이 다정한 모녀 같아서 윤주는 민아가 성주와 결혼한다고 해도 호감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빈 속에 마신 소주가 내장을 훑고 내려가는듯한 불안감이 마음속을 후렸다.
정적을 깨뜨리는, 간간한 딸꾹질 속에서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채 먹는 데에만 몰두했다.
갑자기 성주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그런 성주의 뒤모습을 멀거니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체념과 간섭이 엇갈린듯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윤주는 그만 울고 싶었다.
한참 뒤에 들어온 성주에게서 담배냄새를 맡은 윤주는 당장 담배 한대 빌리고 싶어졌다.
아버지의 딸꾹질 소리와 그릇에 저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이따금씩 들리는 식사시간은 질식할 정도로 느리게 흘러갔다. 이러려고 모이자고 한 게 아닌데 하는 자책이 력력한 아버지의 표정을 보면서 윤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였다. 아버지에게 성주의 결혼식에 올 수 있냐고 련락했던 엄마는 정작 말을 몇마디 하지도 않았다. 양꼬치 장사를 할 땐 멋있기만 하던 엄마는 왜 자식 앞에서는 이렇게도 눈치를 보고 자기 몫의 말도 못하는가.
“언니, 우리 친하게 지내요.”
헤여지면서 민아가 윤주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애가 당돌한 거야 친화력이 좋은 거야 하는 생각도 잠시, 윤주는 민아에게서 다치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건 마치 언니에게 할 얘기가 있어요 하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 감정이 낯설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었던 묵혀두었던 서글픔이 다시금 살아났다.
윤주는 아무런 거부감도 표현하지 못한 채 민아의 휴대폰에 번호를 찍어주고 말았다.
별다를 게 없었다. 고중 동창 지연과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한두달에 한번 정도 만나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보글보글 끓는 전골에서 사이좋게 갈비를 건져먹었고 날치알에 배추김치와 김가루를 곁들인 볶음밥까지 해먹었다. 불룩한 배를 슬슬 만지며 스타벅스에서 티라미슈를 가운데에 놓고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잔을 마주쳤다. 겨우 한모금 될가 말가 하게 담겨있는 커피잔을 홀짝이는 윤주를 보더니 지연이 “독한 년”이라며 웃었다.
“그냥, 아메리카노는 좀 싱거워.”
속으로 ‘그래, 나 독한 년이다. 독하고 멋진 년이 되고 싶다.’ 이렇게 되뇌며 윤주는 지연의 표현이 바람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신을 인지할 때마다 윤주는 이건 쉬이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에 초라해졌다. 말하자면 납작 엎드린 자존감 같은 것.
이 때다 싶어 며칠 동안 입가에 맴돌았던 말을 꺼냈다.
“지연아, 왜 은화랑 려행 간 걸 비밀로 한 거야?”
머그컵을 입가로 가져가던 지연이 동작을 멈춘 채 윤주를 쳐다보았다. 윤주를 빤히 쳐다보던 지연은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그 순간 윤주는 자신이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나 내가 없는 말을 지어냈나 하는 생각에 이내 당혹감을 느꼈다.
둘이 몰래 려행 간 것은 부부동반 모임에서 은화네 부부가 소리 낮춰 이야기하는 걸 의도치 않게 엿듣고 알았다. 그 순간 윤주는 두 사람이 급격하게 가까워져서 배신감을 느낀 게 아니라 그걸 비밀이랍시고 귀속말로 하게 만든 지연이 때문에 수치심을 느꼈다. 게다가 대학을 함께 다닌 은화와는 지연이처럼 각별하게 지내는 편도 아니였다. 짐짓 못 들은 척 먹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윤주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 저가락질 하기도 힘들었다.
“윤주야, 사실 그동안 은화랑 쇼핑하고 커피 마시고 려행까지 가면서 많이 친해졌어. 널 통해서 알게 됐지만 너는 만날 먹고 사느라 바쁜 것 같아서 은화 만날 때 너에게 말을 못했지. 내 딴엔 널 배려하느라고 말을 안했는데 넌 그걸 리해 못하는 거야? 내가 일부러 너는 모르게 하자고 했어.”
지연이 윤주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쯤은 오랜 시간 이어온 우정을 통해 체득했다.
‘내가 왜 너의 그 말도 안되는 배려를 리해해야 되는데? 그게 굳이 비밀로 할 일이야? 내가 화를 내는 게 정말 뭔지 몰라서 이래?’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지연의 억울함과 원망이 섞인듯한 표정을 보는 순간 윤주는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결혼생활은 윤주에게 때로 적라라하게 까발리거나 지나치게 모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적당히 눈 감아주고 슬쩍 넘어가야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윤주는 매번 그게 어려웠다.
뻐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오랜 기간의 련애를 끝낸 것 같은 후련함이 가슴을 후볐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굳은 표정을 본 윤주는 저도 모르게 민아를 떠올렸다.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지방 쪽으로 가면 서울의 삼분의 일 만큼만 줘도 비슷한 평수의 아빠트를 살 수 있대.”
지연의 말을 듣는 순간 떠올랐던 생각이 내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지연인, 내가 자신과 같은 수준이 되는 걸 싫어하는구나. 이상한 권유와 배려로 타인을 위로하려 드는구나.’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저도 몰래 한숨이 나왔다. 윤주는 삐딱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아빠트를 마련한 지연에게 축하를 건넸고 주변에 자랑도 했다. 그러나 만날 때마다 할부금 타령을 하는 건 지겨움을 넘어 혐오감까지 들게 만들었다.
그냥 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윤주는 꼭 한마디를 던지고야 말았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누군 편하게 사니?” 사실 그건 지연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라도 하고 싶었던 말이였다.
언제부턴가 윤주는 지연과 만날 때마다 모든 비용을 자신이 지불해야 될 것 같은 부담감에 시달렸다. 금액을 떠나 그런 마음으로 지갑을 열면 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헤집고 다녔다.
“둘이 간단하게 먹는데 세트정식으로 주문할 것까진 없잖아. 단품으로 시켜도 충분할 것 같아. 내가 살게.”
음식을 주문할 때면 마치 윤주를 배려하듯 말하는 지연이 뻔뻔스러워보였다. 윤주는 자신이 밥을 사겠으니 근사한 걸로 먹자며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포기할 때가 많았다. 누가 밥값을 내든 메뉴 때문에 얼굴을 붉히는 건 무의미한 감정랑비라고 생각했다.
윤주가 집이 있는 지연에게 부러움을 드러내면 “집이 있으면 뭐 해. 같이 살 남자도 없는데. 너는 그래도 남편이 있잖아.”라든가 “살아봐. 한순간 뿐이지 혼자만 왔다 갔다 하는 공간은 아무런 감흥이 없어.” 하고 말했다. 그 말은 윤주에게 묘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면서 기분이 잡치게 만들었다.
“남편이 있으면 뭐 해… 내 방도 없는데.”
그 때마다 윤주는 적의와 좌절감이 뒤섞인 감정을 짓누르며 시니컬하게 대꾸하려 노력했다.
이젠 자신의 렬등감을 드러내는 말을 들어줄 친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뜻밖에 외로움이 잔잔하게 차올랐다.
엘레베터를 타고 올라오는 사이에 아버지에게서 부재중전화가 와있었다.
윤주는 오늘 같은 날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하고 중얼거리며 커피머신에 진한 그린색상의 캡슐 하나를 집어넣었다.
윤주는 필요한 용건 외에는 아버지에게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았다. 아버지와 통화할 때마다 뭔가를 해결해야 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어서 싫었다. 무엇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아서 늘 긴장을 풀 수 없었던 아버지가 윤주 앞에서 점점 나약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증오의 대상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대놓고 허탈할 때가 많았다.
준비하지도 않았던, 가시 돋친 말이 튀여나갈 때마다 윤주는 머리 속에 리기적, 무책임, 불효 등 단어들을 라렬해보곤 했다.
“왜 전화를 안 받니?”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아버지가 또 전화를 걸어왔다. 윤주는 아버지가 꺼낼 말들을 알 것 같다는 생각에 피로감이 밀려왔다.
“낮에 봤는데 왜 또 전화까지 걸어요? 안 받으면 못 받는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면 되지 뭘 그렇게 따지고…”
아버지가 가족일로 의논할 상대가 자기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윤주는 딴청을 부렸다.
“네 생각엔 어떠니?”
“뭐가?”
“성주랑 그 아이.”
“알아서 잘살겠지, 뭘 걱정해요? 언제 그런 걱정을 하고 살았다고. 나 결혼할 땐 아무 말도 없었으면서.”
“먹고야 살겠지. 그것보다 결혼식을 안하겠다는 성주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네 엄마는 결혼식을 했으면 하던데 성주가 말을 안 듣는단다. 결혼식 비용은 나도 보태줄 수 있는데. 식을 해야 책임감도 생기고 어른도 되지.”
엄마가 아버지에게 련락한 리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엄마는 여태 지인들의 결혼식에 뿌렸거나 뿌려야 될 부조돈이 있을 것이고 한국에 와서 늦깎이 대학생이 된 아들자랑도 은근히 하고 싶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엄마는 성주를 직접 양육하지 않은 데서 오는 죄책감을 결혼식을 잘해주는 것으로 해소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돈 때문이 아니잖아요.’ 하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고루한 화제거리의 꼭지를 트는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성주는 싫은가 보지… 아니면 필요 없거나! 사실 식이 뭐 꼭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됐다! 넌 뭐가 그렇게 시들하니?”
아버지는 자신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 윤주가 못마땅한듯 벌컥 화를 내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윤주는 아버지의 소통방식은 화끈한 것 같으면서도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성주에게 따지고 싶은 말을 윤주에게 하고 있다는 느낌에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윤주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다시금 떠올리며 진한 아메리카노를 한모금 넘겼다. 아버지는 내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걸가. 다혈질적인 성격과 폭력적인 언행을 싫어하는 엄마 때문에 아버지는 리혼 후 성주를 거의 만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가끔 부모 구실을 못했다는 미안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 때마다 윤주는 ‘꼭 술이 한잔이라도 들어가야 저런 말을 하지.’ 하는 야속한 마음에 아버지의 말을 흘려들었다.
윤주는 아버지가 성주 때문에 자신에게 화를 낸다는 게 당황스러웠고 서운한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른들끼리 리혼을 결정했고 성주는 엄마와, 자신은 아버지와 살게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윤주는 그저 모든 게 싫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술만 마시면 자식들을 쥐 잡듯이 교육하는 방식으로 화풀이를 하려 들고 기물 파손에 폭력까지 행사하는 아버지는 가족 내에서도 소외의 대상이였다. 그런데 엄마가 평소에 그렇게도 의지하던 윤주를 아버지에게 맡겨버리다니. 아버지가 술에 취했거나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웃방에서 소리 죽여 우는 성주를 안고 있으면 그나마 불안감이 누그러들던 느낌이 생생했다. 윤주가 아버지와 살게 됐다는 건 이제 그런 것들을 혼자 감당해야 된다는 걸 의미했다.
이미 외삼촌 집으로 짐을 옮긴 엄마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말도 잘 듣고 성주도 잘 돌볼 테니 제발 아버지와 살지만 않게 해달라고. 엄마는 눈물 한방울 떨어뜨리지 않았고 함께 산 세월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막 학교생활을 시작한 성주만 눈치를 보며 윤주에게 자꾸 말을 걸고 싶어했다.
엄마는 “아버지는 술만 마시지 않으면 좋은 사람이니 네가 좀 참아라.”고 윤주를 달랬다. 좋은 사람인데 더이상 부부관계를 지속하지 않는 리유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윤주는 오기에서인지 복수심에서인지 그런 엄마에게 두번 다시 매달리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윤주는 친척집에 하숙했고 한주에 한번씩 집에 갔다. 그러나 부모의 리혼 후 윤주는 아버지만 있는 집에 발을 들여놓기가 싫었다. 엄마 없는 공간은 온기가 없었고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성주가 눈에 밟혀서 울컥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술을 마실가봐 가슴을 바싹 졸이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가면서부터 윤주는 더이상 아버지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윤주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었다. 홀가분함과 외로움이 뒤섞인 생활에 길들여진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인내와 포기를 필요로 했다.
“윤주야, 생각 같아선 너랑 성주 둘 다 껴안고 살고 싶었지만 사람 사는 게 어디 그렇게 쉽니? 나도 결혼한 지 얼마 안돼서 눈치가 보이고… 그럴 땐 손주들 맡아줄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린 세상 천지에 부모 형제라곤 딸랑 네 엄마랑 나 둘 뿐이잖니. 리혼한 지 얼마 안돼서 네가 엄마랑 살게 해달라며 왔다 간 날에 누나가 그렇게 매정하게 널 돌려보내놓고 정말 많이 울었다. 엄마가 그래서 너한테는 늘 꼼짝 못하는 거 알지?”
윤주가 대학에 입학하던 날, 외삼촌은 엄마가 한국에서 송금해준 돈을 전달하면서 말했다. 변명이고 자기 합리화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느 정도의 진실도 포함돼있었기에 윤주는 어색하게 입꼬리만 올렸다. 아직 자식도 없었던 외숙모가 조카 둘을 한꺼번에 품을 수 없다는 것 쯤은 윤주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리해했다. 그러나 윤주가 느꼈던 배신감과 불안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튀여나오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윤주는 진작 알았다. 오기로 버텨냈던 세월 동안 윤주 마음속의 비장이 점점 두꺼워졌음을. 막연하게 어른이 되면 엄마의 선택과 아버지의 삶을 리해할 수 있을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서른을 넘기고 결혼을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모든 것에 태연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날카롭게 튀여나오는 자기방어 때문에 포용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 때마다 윤주는 수치심과 억울함이 교차한 감정을 추스르느라 애를 썼다.
엄마에 대한 애증이 반비례를 이루지 않아 괴로웠다. 미워하는 마음이 크면 그리움이라도 적었으면 좋겠지만 산다는 건 만만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두려울 때 윤주는 저도 모르게 엄마를 불렀다. 처음 남자친구와 헤여졌을 때 윤주는 엄마에게 남자친구에 대한 뒤담화를 시시콜콜 하고 싶었다. 처음 휴대폰을 갖췄을 때 엄마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걸고 싶었다. 대학입학 통지서를 받았을 때 윤주는 이제 혼자서 어디든 갈 수 있는 나이가 됐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윤주는 정작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아는 단둘이 맛있는 밥을 먹고 쇼핑도 하고 카페에서 노닥거리고 싶다고도 했다. 련인이나 친한 친구끼리 하는 짓을 하필이면 어려워해야 할 상대인, 시누이가 될지도 모르는 자신과 하고 싶다는 게 윤주는 못마땅했다. 어찌됐든 민아를 한번은 만나야 될 것 같은 책임감 때문에 약속을 잡았다.
베이지색상의 트렌치코트에 굽이 없는 옥스퍼드화를 신은 민아가 윤주를 보자 손짓하며 다가왔다. 크로스백을 벗은 민아는 손에 들었던 쇼핑봉투를 윤주에게 내밀었다. 생각보다 큰 부피에 갈마든 기대감도 잠시, 윤주는 이걸 내가 왜 받아야 되냐는 눈빛으로 민아를 쳐다보았다.
“언니. 부담 갖지 마세요. 저 좀 잘 봐달라는 뜻으로 딱 한번만 뢰물을 드리는 거예요.”
민아의 말에 윤주는 흠칫했다. 어떤 기대를 했든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고마워요. 일단은 잘 받아둘게요.”
민아가 고른 선물은 네이비색상의 가방이였다. 디자인이 심플했다. 윤주는 민아가 자신의 취향을 제대로 파악한 것 같아 흐뭇하면서도 언제 성주에게 흘렸던가 하는 알쏭함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언젠가 “너는 왜 남자들이 다 하는 그 흔한 문신 하나도 없냐.”, “누난 왜 핸드백 하나 제대로 갖추지 않냐.”고 웃으면서 서로를 ‘비난’했던 기억만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무심하다고 생각했던 녀석이 의외로 속이 깊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말 놓으셔도 돼요, 언니.”
윤주는 말을 놓아달라는 건 가까워지고 싶다는 의미이고 그건 뭔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이 생겼다. 민아가 과도한 친밀감을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됐다.
“그런데 결혼식은 어떻게 된 거예요?”
윤주는 고르곤졸라 피자 한조각을 민아에게 내밀면서 망설였던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아버지가 끝내 성주에게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또 윤주에게 물어올 것이였다.
“어머니는 결혼식을 해야 되는 게 아니냐고 하는데 성주는 그러고 싶지 않은가 봐요. 식을 한다고 잘사는 것도 아니고 식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라면서. 그리고 성주가 나이는 있지만 대학 졸업하려면 아직 삼년이나 남았잖아요.”
“부모님 세대는 결혼식도 치르지 않고 사는 걸 남사스럽게 생각하니까. 그럼 민아씨 생각은 어떤데요?”
윤주는 어느새 자신도 결혼식을 치르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민아에게 부모세대처럼 가르치려 들거나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식이 성취하기를 강요하는 사람으로 보여질가봐 창피했다.
“나는 뭐, 성주랑 생각이 같아요. 잘살고 못사는 게 결혼식과 관련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뭔데요?”
“아니예요. 어쨌든 난 성주랑 살 거고… 가족은 만드는 것보다 어떻게 유지해나가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윤주는 민아가 삼켜버린 내용이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집은 엄마가 마련해준 오피스텔이 있으니 성주만 들어오면 돼요. 전 엄마가 같은 동생도 있고 아버지가 같은 동생도 있어요. 한국에 올 때 엄마가 절 데리고 살지 못하겠다며 오피스텔을 사줬어요. 전 위챗으로 옷을 팔고 있는데 장사 잘돼요. 연길에 있을 때부터 해온 일이라 단골 고객이 많아서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어요. 이제 아이템도 더 늘여갈 예정이예요.”
민아가 미리 준비라도 한듯 자신에 대해 빠르게 설명했다.
“아…”
윤주는 의무적이면서도 사무적으로 말하는 이 아이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오늘 언니랑 저 만나는 거 성주는 몰라요. 나중엔 알게 되겠지만 미리 말을 못했어요.”
윤주는 민아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예감이 사실로 변한 것 같아 오늘의 만남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삶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강하게 밀려왔고 어서 빨리 이 자리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웬 일인지 엄마가 끝끝내 윤주에게 등을 돌렸던 그 날의 참담한 심정이 되여가면서 성주가 보고 싶었다.
식당을 나서면서 민아가 묻지도 않고 윤주의 팔짱을 꼈는데 기분이 묘했다.
둘은 올해 여름에는 린넨 재질에 심플한 디자인, 밝은 색상 계렬의 옷이 류행될 거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백화점 구석구석을 돌았다. 두시간을 내리 돌고 기진맥진했을 무렵, 민아가 카페로 윤주를 이끌었다.
윤주는 갑자기 급하게 처리해야 될 일이 생겼다고 말해버렸다. 거짓말인 줄을 민아가 눈치챘을 것이라는 짐작에 얼굴이 뜨거워났다. 그렇지만 이 쯤에서 헤여지는 게 민아나 성주, 자신에게 좋을 것 같았다.
윤주에게 다음에 또 만나요, 하고 손을 흔들 때까지도 민아는 성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윤주는 민아가 보기보다 강하고 속이 깊은 아이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성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결혼, 하고 싶은 거야? 하기 싫은 거야?
성주는 윤주만 집에 있을 때 잠간 들리겠다고 했다. 윤주는 성주가 자기 결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에 대해 누나한테라도 설명해야 된다는 의무감이 생긴 것이라 생각했다.
늘 그렇듯 성주는 말이 없었다. 술이 한잔이라도 들어가야 막혔던 말문이 트이는 걸 보면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확신이 단단해졌다. 그 때마다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안심한 적이 많았다.
술이라면 질색하는 윤주를 잘 알기에 성주는 맥주 두캔만 사들고 올라왔다.
“민아가 뭐래?”
민아의 자백이 생각보다 빠르다고 생각했다. 민아의 그런 면이 과묵한 성주와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무 것도.”
“걘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안해.”
“그럴 것 같더라.”
“누난 왜 이렇게 화가 나있는데?”
“몰라. 속에서부터 뭔가 자꾸 끓어올라.”
매사에 랭소적인 성주가 민아를 제법 잘 리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윤주는 어쩌면 민아가 자신보다 성주에 대해 더 잘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별안간 적의가 생겼다. 그제야 윤주는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감정의 실체가 질투임을 알았다. 그런데 질투의 대상이 민아인지 아니면 지연인지 확신이 들지 않아서 화가 났다.
“난 사실 누나는 결혼 같은 거 안할 줄 알았어.”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중학교 때부터 련애를 하고 다닌 걸 몰라?”
“몰라… 후훗! 그냥, 누나가 결혼하는 건 날 배신하는 거라고 생각했지. 우리 사이엔 어렸을 때부터 그런 무언의 약속 같은 게 있어왔다고 생각했나 봐.”
“어쩜! 너 혼자만?”
“집이라는 게 나는 너무 지겨워. 누나는 하숙하고 자취하고 기숙사에 살고 그렇게 혼자 살았지만 난 고중 가기 전까지 9년이나 삼촌 집에서 학교 다녔잖아. 그것도 고중에 입학해서는 같은 도시에서 뭔 자취냐며 펄쩍 뛰는 것도 내가 바락바락 우겨서 겨우 독립했다. 아마 삼촌은 내가 없으면 돈줄이 끊길가 두려웠을 거야.”
“알지. 삼촌이 보기엔 멀쩡해도 끈기가 없잖아, 눈치도 무디고!”
“말끝마다 자기 집처럼 편하게 있으라고 했지만 삼촌과 숙모가 싸우면 나 때문인 것 같고. 사촌동생이 밖에 나가서 다쳐도 나 때문인 것 같고. 삼촌이 자꾸 직장을 그만두는 것도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난 집에 들어가는 게 싫었어.”
“우린 집이 없었지…”
“응. 지금은 엄마도 아버지도 한국에는 자기 집이 없지만 연길엔 다 있잖아. 우리가 언제 돌아가도 눈치 안 보고 먹고 잘 수 있는 집. 그런데 그 집이 다 비여있어. 집이 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냐. 그 집에서 살 사람도 없는데. 그런데 말이야, 엄마나 아버지는 왜 늘 집이 없이 사는지 모르겠어. 집이 없는 곳에서만 사는지 모르겠어.”
“… 있어도 문제고 없어도 문제야.”
“엄마가 날 맡기고 미안해서 삼촌네 생활비까지 다 보내주는 건 알았어. 그런데 집안엔 늘 랭랭한 기운이 돌아서 늦게까지 돌아다니다 들어갈 때가 많았지. 어릴 때 그렇게 방황하며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난 지금 쯤 대학 나와서 다른 삶을 살고 있을가?”
윤주는 말없이 성주를 향해 맥주캔을 내밀었다.
“엄마는 날 키운다는 명분일 뿐 삼촌 집에 던져놓고 돈만 보냈어. 난 차라리 먼 친척집에서 하숙하는 누나가 부러웠다? 혼자라면 오히려 자률성이 강한 아이로 성장했을지도 모르잖아?”
윤주는 혼자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기나 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혼자라는 단어가 가지는 결의 다양함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성주가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을 형성하는 것 따위의 문제로 민아와 의견충돌이 생겼다면 어떻게 조언해줘야 될가. ‘가족은 말이야, 싸우다가도 마주보며 웃고 반목과 화해를 거듭하는 구성원이야. 게다가 특별한 의식 같은 게 없어도 화해가 가능해.’ 어른스럽게 그럴듯한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윤주는 도리질했다.
윤주 역시 가족끼리의 반목과 화해라는 의미를 잘 몰랐다. 남편은 윤주의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립장이였기에 결혼한 지 2년이 넘도록 그렇다 할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주는 남편의 눈에 씌운 콩깍지가 언제 벗겨질지 자신 없었다. 사실은 아직까지 자기 주장을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아서 사소한 문제라도 수면 우로 떠오르지 않았는지 모른다.
성주를 볼 때마다 ‘이 아이에게 혈육이라는 명분으로 관심과 책임을 강요하지 말아야지. 나 때문에 상처받는 일은 없게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긴장을 풀지 않았다.
성주가 그다지 밝은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윤주는 단 한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지금 기분이 어떠한지? 괜찮은지?
윤주 역시 이런 질문에 답해본 적이 없었다.
“민아는 착하고 영악한 애야. 어디 내놔도 똑 부러지게 살 걸?”
윤주는 그런 민아랑 가족이 되는 게 왜 두려운지 묻고 싶었다. 민아에 대해 왜 그렇게 모순적으로 평가하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만날 때까지 왜 가만히 있었는데?”
“엄마랑 민아가 주도적으로 결정한 거야. 그래서 그 날 결혼식 같은 건 안한다고 못을 박았잖아.”
“그 때서야?”
그런 변명 따윈 집어치우라고 욕을 하고 싶었다. 네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했으면 여기까지 올 일이 없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그냥 다 귀찮아.”
귀찮다는 말이 지금 성주의 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말일지도 몰랐다. 윤주에게는 그 단어가 두렵다는 의미로 들렸다.
“그럼 뭐 어때서. 살다가 헤여지면 그만이지. 다들 그렇게 살잖아? 아버지도 엄마도, 민아네 부모도, 심지어 삼촌네도 결국은 리혼했잖아.”
“미쳤어? 그런 마음을 품고 어떻게 형이랑 살아?”
성주가 눈을 흘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뭐가 두렵다는 건지 목적어를 밝히지 않았지만 성주가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람을 가볍게 여기라는 게 아니라 네가 선택한 연缘에 확신과 책임을 가지라는 거지…”
“작년 여름인가. 민아 할머니의 일년 기일이 지난 지 얼마 안돼서, 어느 날은 나에게 임신했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묻더라. 그 날 저녁 누나에게 먼저 말할가 엄마한테 말할가, 온밤을 뜬눈으로 새면서 어떻게 해결해야 되나 고민했어.”
“그런 고민은 아버지랑 공유해야 되는데.”
“글쎄… 2주 정도 지나서 우연하게 민아가 친구들이랑 술 마시는 걸 목격했지. 그 순간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윤주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황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주를 옭아매고 싶었던 걸가. 그런데 그 대상이 성주가 아닌 다른 남자라도 가능하지 않았을가 하는 추측에 윤주는 조금 아연해졌다. 여태 민아에게 가졌던 믿음이 날아가버리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민아는 거짓말이 발각된 줄도 모르고 계속 나에게 아이를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거야.”
“거짓말? 그래서?”
“헤여지자고 하고는 잠적해버렸지, 물개처럼.”
“비겁하다. 그런데 우리 남매는 의외의 지점에서 공집합이 생기는 것 같다. 난처하면 화제를 돌려버린다든가 말없이 등을 돌려버린다든가.”
“응. 그냥 민아가 자꾸 따지고 밀어붙이는 게 싫어서 그랬는데 말하고 나서는 나도 깜짝 놀랐다? 누나도 극단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경향이 있잖아. 언젠가 분명 누나가 잘못했는데도 매형에게 적반하장 격으로 선수를 치는 걸 보고 이게 누나가 사는 방식이구나, 우리 누나는 어이없게 버텨왔구나, 하고 생각했지.”
“알면서도 그래. 상처 받을 바엔 차라리 먼저 관계를 끊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버리고 버림받고. 그 다음엔?”
“몰라. 엄마나 아버지는 뭐 자식이 둘이나 있으면서 그 다음을 생각하고 리혼했대?”
“형이 가끔 나 밥 사주는 거 얘기하는지 모르겠네? 형은 부모님도 사이가 좋고 성격이 모나지도 않고 그래서 여태 누나랑 문제없이 사는지 모르겠어. 누나가 자신을 누르고 살 위인은 못 되잖아? 나는 가족이 뭔지도 모르겠고 가족을 만들 자신도 없어. 그냥 살 공간이 있으면 집이야? 사람 같은 사람이 살아야 집이고 가족이지. 살면서 엄마와 애틋했던 적은 없지만 아버지랑 헤여진 건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정말 많아.”
이상하게 윤주는 피붙이로부터 리해받는 느낌이 들어 목이 메여왔다. 위축되고 억울한 마음을 종종 공격적으로 표현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성주야, 결혼 같은 거 안해도 되고 민아랑 그냥 살아도 되고 헤여져도 돼. 누구한테든 미안할 거 하나도 없어. 엄마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건지 모르겠다.”
성주가 맥주캔을 거꾸로 들고 탈탈 털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린 게 무슨! 그냥 자기만 생각하면서 사는 거지. 그걸 알면 이 따위로 살겠니?”
윤주는 성주의 머리를 쥐여박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둘은 환풍기를 켜고 나란히 담배를 태웠다.
성주가 스무살 되던 해의 어느 날, 윤주는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와 던진 한마디 때문에 한동안 충격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누나. 나 유부남이 됐다.”
윤주는 아이가 생겼을가, 크게 꼬투리를 잡혔나, 녀자가 집착이 심한 건가 온갖 상상을 다하며 안절부절했다. 윤주는 스무살의 유부남에 대해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녀자 친구네 집에서 부동산을 분양받기 위해 부부관계를 증명하는 호적이 필요한데 자기가 남편으로 이름을 올려주는 대신 사례금을 받았다고 했다. 물론 나중에 녀자 친구 집에서 호적을 깨끗하게 처리해주기로 약속했고.
“누나, 신기하게도 아무런 변화가 없어. 결혼 같은 거 누구랑 해도 상관이 없나 봐.”
윤주는 그 때 느꼈던 놀라움과 씁쓸함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호적은 깨끗해지겠지만 이토록 자신의 인생에 무책임한 아이라니.
“돈은 어디다 썼는데? 엄마가 돈 넉넉하게 주잖아?”
“돈이야 늘 모자라지. 술 먹고 나이트 가고 련애도 하고… 벌써 다 없어졌어.”
몇만원 되는 돈을 그리 허망하게 써버렸다는 게 한심하고 그렇게라도 자신을 함부로 굴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주가 가여웠다.
윤주는 그 때 처음으로 담배를 입에 대봤다.
아버지는, 이제야 술과 담을 쌓은 아버지는 자식들이 이렇게 시시하게 살고 있는 걸 알기나 할가.
윤주는 저도 몰래 맥주캔을 옥여쥐였다. 모든 문제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기라도 한듯이 손마디에 힘을 실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됐으면서도 윤주는 그 감정의 끈을 쉽게 놓지 못했다.
원래는 두달 전부터 지연이랑 오기로 약속되여있던 경주행이였다. 무료로 문화탐방을 시켜준다는 공지를 보고 지연에게 련락했고 지연이도 그 즈음엔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윤주는 최근 지연이 은화와 가까워진 걸 알게 된 후부터는 지연과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윤주는 집안 행사가 있어서 못 갈 것 같다고 했고 지연이도 공교롭게 그 즈음에 스케줄이 생겼다고 했다.
윤주의 제안에 민아는 문화탐방인데 언니랑 1박2일로 붙어다니는데 왜 안 가겠냐며 반색을 했다.
민아와 함께 뻐스에 오를 때 윤주는 맨 뒤자리에 앉은 낯익은 얼굴들을 보았다. 윤주는 지연과 은화가 모자를 눌러쓴 자신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도무지 가라앉혀지지 않는 분노에 가슴이 콩콩 뛰였고 숨 쉬기도 가빴다.
담당자에게 원래 함께 신청한 친구 대신 다른 사람과 동행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잠간 침묵이 흘렀던 리유를 알 것 같았다. 윤주는 나중에 따로 탐방을 가느니 ‘무료’와 ‘단체’라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액의 비용을 치르고 한둘이 총총거리며 다니기보단 여럿이 복작거리면서 어울리는 게 더 효률적이지 않을가 싶었다.
윤주의 신경은 온통 뒤자리에 쏠려있었다. 들떠서 이것저것 묻는 민아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연아, 나 문화탐방 가는 뻐스 안이야.
윤주는 이따가 뻐스에서 내려서 어색하게 마주치기보다는 미리 동행을 알리는 게 나을 것 같아 문자를 보냈다.
“윤주야!”
지연과 은화가 손나팔을 한 채 동시에 윤주를 불렀다. 고개를 돌린 윤주는 그들을 향해 손짓하며 엷게 웃었다.
민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윤주에게 아는 사람이 더 있었냐고 물었다. 하필이면 출발시간에 맞춰 도착한 것이 짜증 났다. 윤주는 민아만 아니라면 당장 길가에 차를 세워 내리고 싶었다.
중간에 들린 휴계소에서 윤주는 지연과 은화와 태연하게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새침한 표정을 짓는다거나 뾰족하게 말한다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았다. 모든 게 예전과 똑같다는 걸 드러내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건 윤주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자연스럽게 둘씩 짝을 지어 다녔고 윤주는 언뜻언뜻 지연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다. 그만한 대가는 당연히 치러야 되는 게 아니냐는듯 윤주는 일부러 지연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언니, 난 대학을 나오지 않아서 문화유적 같은 거 잘 몰라요.” 하며 어딜 가나 슬쩍 눈길만 주던 민아는 뜻밖에도 종소리에 관심을 드러냈다.
“언니, 종소리 한번 들어봐요. 그런데 왜 이렇게 울컥하지?”
경주박물관에서 민아는 신종의 디지털 종소리에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종소리가 울리고 나서도 오래동안 그 여운이 가셔지지 않는 게 마치 할머니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다고 했다. 민아는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 좀 쉬여가자는 시늉을 하며 윤주를 끌어당겼다.
“맥노리현상 때문에 이런 소리가 난대요. 원래부터 이런 소리를 내는 게 아닌데도. 딱 요 정도로만… 부딪쳐 살면서 이런 소리를 오래도록 맑게 내면 얼마나 좋겠어요, 언니.”
민아는 휴대폰으로 성덕대왕 신종에 대해 검색하다 말고 갑자기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 맞는 장사잖소…” 하고 중얼거렸다. 윤주는 웬 애늙은이 같은 노래냐는 생각에 피씩 웃었다.
“우리 할머니도 이렇게 맑고 여운이 가시지 않는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가요. 노래를 좋아했는데. 할머니는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라는 가사가 나오는 한국노래를 자주 들었어요. 예전에 어느 드라마에서 김혜자 배우가 혼자 들었다는 노래. 난 드라마를 보지 못했지만 할머니가 하도 흥얼거리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부를 줄 알게 됐어요. 날 두고 그렇게 급하게 갈 필요까진 없었는데. 쓸데없이 난 좋아하지도 않는 민들레를 꼭 아침시장에 가서 사야 된다고 새벽같이 나서더니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어요.”
“할머니의 보살핌이 딱 거기까지였던가 보네. 자책하는 순간 너는 잉여인간이 될지도 몰라. 삶의 마디마다 구구절절 후회가 갈마들고 결국은 거기에 빠져서 헤여나오지 못하게 되겠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며칠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고 텅 빈 집에서 나 혼자 자고 깨고 자고 깨고… 엄마는 내 기분이나 절망 따위엔 관심도 없이 빨리 한국으로 나오라는 말만 반복하고 아버지는 혹여 내가 재혼한 가정에 들어붙기라도 하면 어쩔가 걱정하는 눈치였어요. 아마도 부모 잃은 슬픔보다 갑자기 책임져야 할지도 모를 자식이 더 부담스러웠겠죠? 어떻게든 살아야 되니까. 성인이 된 내가 살 집이 없는 것도 아닌데 다 자기 생을 살 뿐인데 꼭 누가 누굴 책임져야 되는 것처럼 끔찍해하는 게 싫어요. 그냥 부딪치면서 맑게 빛나게 살면 되는 건데 그게 이렇게 어려워요.”
“그래서 다들 피하고 도망가고 떠나고 그러나 봐. 그렇게 하면 지금과는 다른 생이 펼쳐지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 때문에.”
윤주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민아에게 말을 놓은 자신을 발견했다.
“성주를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동갑이라고 해서 동창인 줄 알았는데?”
윤주는 우리 남매는 사실 서로의 인간관계에 대해 터치하며 왈가왈부하는 편이 아니라는 변명은 하지 않았다. 친남매인데 생각보다 살갑지 않네요 따위 의도가 불분명한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뭐 틀린 말도 아니죠. 제가 할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한동안 애를 좀 먹였어요. 비행소녀라 고중 때 친구랑 도둑담배 피다 걸린 적이 있어요. 수업시간에 따로 벌을 서는데 다른 반 남자애들이 대여섯 잡혀왔어요. 다들 뭔 녀자들까지 잡혀왔지 하는 눈길로 훔쳐보는데 성주는 감시하던 선생님이 자리만 뜨면 휘파람을 불며 “담배 피다 걸렸는데 뭘.” 하며 옆의 남학생이랑 속닥거렸어요. 설마 하며 우리를 쳐다보는 남자애들의 시선이 너무 싫어 나중에는 망신을 주고 싶은 마음에 작정하고 쫓아다녔죠.”
“나쁜 놈이네! 그런 애랑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이를테면! 동질감 같은 것?”
“흠…”
성주는 삼촌 집에서 나와 살면서 모든 것에 시큰둥해있었다. 거칠고 반항적이고 예리해서 윤주조차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다. 성주는 “누난 뭐 말썽 없이 컸어?”, “그렇게 참견을 안해도 잘하고 있다고!”, “누구 좋으라고 착하게 살아?”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바쁘게 이런 대답들로 윤주의 입을 막아버렸다.
“모르죠? 성주 자퇴하겠다는 걸 설득해서 이번 학기에는 휴학했어요.”
민아가 윤주를 쳐다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휴학했다는 말을 웃으면서 하는 게 괘씸했다.
“무슨 소리야? 잘 다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고졸이라 걱정하던 차에 외국에서라도 대학 들어갔다고 모두들 얼마나 좋아했는데…”
“이 나이에 졸업하면 몇살이냐고. 자기 길이 아닌 것 같다고 입에 달고 사는걸요. 질풍노도의 시기가 왔나 봐요. 그런데 그런 불안, 좋다고 생각해요. 그 끝에는 잔잔함이 있으니까.”
“나한테는 아무 말도 없더니. 길이 어디 따로 있다고! 자신한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사는 거지.”
윤주는 가족의 기대에 부응해야 된다는 말을 자신한테 최선을 다해 살아야 된다는 것으로 둔갑시켜 말하는 스스로에 놀랐다.
“뭔가에 몰입하고 뭔가를 책임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민아는 웃음기를 살짝 띠운 채 담담하게 말했다.
어디선가 불협화음의 소리가 퍼져왔지만 윤주는 잠자코 들었다.
“언니가 좋아요. 예뻐서라고 하면 립서비스라고 할 거죠? 새침해서 피 한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을 땐 안아주고 싶고 부드러워서 모든 걸 나눠줄 것 같을 땐 한없이 기대고 싶고. 할머니랑 오래 살면서 저도 모르게 익숙해진 것들이 있나 봐요.”
민아가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 같아 얼굴이 뜨거워났다.
“에이. 칭찬이야 욕이야? 무슨 그런 낯 간지러운 말을 해?”
윤주는 쑥스러운듯 민아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나중에 손톱 네일을 예쁘게 해주는 것으로 고마움을 갚겠다고 했다.
옆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디지털 종소리에 귀 기울이는 민아를 보는 윤주의 마음속에는 종소리의 여운 만큼이나 안도감이 퍼져왔다.
갑자기 눈을 뜬 민아가 윤주를 향해 한마디 던졌다.
“저기 언니 친구들, 언니를 좋아해요. 그게 느껴져요, 저는.”
민아의 말에 윤주는 가만히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미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때리는 어느 오후, 윤주는 인견이불을 뒤집어쓴 채 텔레비죤 채널을 돌리다가 노릇노릇 구워진 막창을 보여주는 데에서 멈췄다.
같이 먹으러 갔었는데 하고 중얼거리다가 지연이 궁금해졌다.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지연인 사람을 좋아하니까.
문화탐방을 다녀온 뒤로 지연이를 만나지 않았다. 지연이 먼저 련락 못할 것을 알면서도 윤주는 부러 모질게 후덥지근한 한여름을 보냈다. 윤주는 지연에게 웃으면서 말을 건네려면 자기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턴넬을 통과해야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턴넬 속 어둠을 떨쳐내지 않고서는 어떤 말도 자연스럽게 토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 날 이후, 무가내한 표정을 짓던 지연이 가끔 마음에 걸렸지만 애써 다른 것에 몰두했다. 그렇다고 지연을 련락처에서 삭제하거나 위챗에서 차단하는 따위의 짓은 생각지도 않았다. 지연이와 함께 지낸 시간들이 있었고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아도 생겨나는 믿음이 있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가라앉는 무언가가 있어서 예전과 달라진 감정으로 서로를 마주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남편에게 몰래 가졌던 가족모임에 대해 설명하느라 부모님이 사위에 대해 전혀 불경스럽다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고 변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런 자의적인 결정은 리혼 사유가 될 수도 있다고 조곤조곤 말하는 남편을 보면서 윤주는 결혼한 이래 처음으로 긴장했다.
정말 아무런 의식도 치르지 않은 성주의 결혼을 두고 집요하게 트집 잡는 아버지를 향해 크게 화를 냈다. 이번에는 아버지도 제법 오래동안 윤주에게 전화 한통 하지 않았다. 윤주 탓이 아닌데도 아버지는 자꾸만 윤주에게 서운함을 내비쳤다.
매일 네일샵을 열심히 운영했고 짬짬이 선배가 론문 집필에 필요하다며 부탁한 자료들을 수집하는 데에 열중했다.
일부러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서도 일상은 소란스럽게 굴러갔다.
민아가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를 안고 윤주 앞에 나타났다. 같이 살기로 마음먹었던 차에 윤주한테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강아지를 좋아하던 지연이 생각났다.
“거의 죽어가는 강아지를 안고 택시에 앉았는데 자기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흐르는 거야. 조금만 더 버텨줘,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만 더… 하고. 강아지를 길에서 죽게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 몇년 동안 나를 지켜준 강아지가 제대로 죽지 못하면 더 이상 살아갈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 지연이 위로가 될 거라며 분양받으라고 그렇게 권고해도 윤주는 매번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윤주는 강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털이 날리는 게 짜증 났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강아지의 눈길도 싫었다. 심지어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타인의 취향에 대해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싫다고 말하는 것과 진짜로 싫어하는 게 다른 것처럼.
오늘은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걸고 싶은 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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