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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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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욱: 주체할 수 있는 욕망(소설평)
2019년 07월 15일 11시 04분  조회:430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주체할 수 있는 욕망

조영욱

 

1. 들어가며

이 작품을 받았을 때 제목이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제목이 아니라 노래 제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반부에는 흔히 다룰 수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 읽고 나자 무언가가 암시하고 말하고저 하는 바가 있다고 느꼈다.

요즘 깨달은 도리이지만 시인은 말하고저 하는 바를 함축 혹은 비틀어서 표현하고 소설가는 사실적으로 말하고저 하는 바를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시의 정수精髓는 상징이고 소설의 정수는 리얼리티이다. 

조원의 단편소설 <좌망, 빛이 기다리는 곳으로>를 읽으면서 뒤로 가면 갈수록 시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비록 학이비재学而非才하지만 한번 다루어보려고 한다. 

 

2. 플롯의 문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플롯은 사건의 결합이라고 했다. 이 작품도 여러가지 사건들로 이루어져있다. 

구스타프 프라이타크(Gustav Freytag)의 5막극 구성법은 작품을 도입부(제시부: exposition), 상승행동(rising action), 위기(정점: climax), 하강행동(귀환: falling action), 파국(resolution)으로 나눈다. 이런 5막극의 구성을 따르는 드라마나 이야기, 연극이 많다. 이 작품도 거의 이런 구성에 잘 들어맞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도입부

이 작품의 도입부는 길다. 대개 십분의 일의 편폭으로 도입부를 구성하고 있다. 

주로 주인공 ‘나’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있다. 작품은 시작부터 현대인의 곤혹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바로 이른바 ‘월요병’이다. ‘나’는 샐러리맨은 아니지만 ‘월요병’이 있는듯하다. 

여기서 카메라가 등장한다. ‘내’ 직업은 이른바 인테리어 사업자 즉 시공기술자다. 잘 생각해보면 ‘나’는 카메라가 필요없다. 물론 인테리어에는 사진을 찍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 일반적인 인테리어사업자는 거의가 다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리용한다.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리용하지 않고 여기에 DSLR카메라가 등장하는 것은 “‘나’는 일반 인터리어사업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뒤에 나오지만 ‘내’가 쓰는 카메라는 2017년에 출시된 캐논 EOS 800D라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또한 뒤에 카메라 때문에 어떤 사건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월요병’이 있고 작업실과 거주공간이 따로 없이 하나이며 카메라와 같은 취미도 있고 또한 차에 있는 물건을 도적맞힐가봐 걱정하는 전형적인 현대인이다. 그러나 ‘내’ 이야기는 전형적이지 않고 특별하다. 

 

상승행동

내가 웅이네 집에 도착하면서 상승행동은 시작된다. 

‘나’는 ‘녀인’의 전원주택의 다락방 증축공사를 맡았다. 다락방에 있던 물건을 옮기다가 ‘나’는 우연하게 ‘녀인’의 손을 터치하게 된다. 일을 하면서 곽명은 나에게 ‘녀인’에 관한 소문을 얘기해주게 된다. 그중에 한 소문은 ‘녀인’이 ‘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를 거부하면서도 내심 무언가를 기대한다. 곽명은 ‘나’와 ‘녀인’을 위해 자리를 피해 그 집을 떠난다.

 

위기

그러다가 나는 우연하게 ‘녀인’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가 잠옷 바람의 ‘녀인’과 조우하게 되며 그의 반라상태의 신체를 보게 된다. 그러나 “녀인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하강행동

‘나’는 ‘녀인’으로부터 아들 웅이를 유치원에서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런데 웅이는 낮에 쓰레기 수거 수업을 하다가 어떤 물건을 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 물건은 ‘나’의 것과 모델이 같은 카메라다. 그 카메라를 복원해보니 한 “남자와 녀자의 무릎 아래 종아리와 발” 사진과 일분 이십삼초짜리 동영상이다. 나는 타인의 사생활 속으로 잠간 빠져들었다가 SNS에 카메라 주인을 찾는 게시글을 올린다. 

 

파국 

카메라의 주인은 ‘나’에게 “오후 세시, 좌망바다가 좌망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런데 그 카메라 주인은 바로 그 ‘녀인’이다. 이럼으로써 위기는 해소된다.

 

‘내’가 속살을 보았을 때만 해도 주인공인 ‘내’가 이 분명히 남편이 있을 유부녀와 어떤 ‘위험한 불장난’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뒤에는 그렇지가 않다. 무언가가 보다 복잡한 현상이 보인다. 

 

3. 욕망의 문제

주인공 ‘나’는 분명 이 작품에서 주체다. 주체는 욕망이 있다. 또한 타자가 있다. 그 타자는 ‘녀인’이다. 

이 욕망은 ‘녀인’에게 통제당하고 있다. ‘나’는 곽명이 말해주는 것을 애써 거부한다. 곽명은 두가지 소문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하나는 ‘녀인’이 고위층 관리의 정부情妇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내’가 ‘녀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두 소문을 다 부정하고 있다. 왜냐 하면 ‘녀인’이 소문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거부 혹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녀인’에게 통제당하는 욕망도 이를 거부 혹은 외면하고 있다.

‘나’는 그 ‘녀인’과의 조우에서 무력감이 있다. 그래서 웅이를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수락하고 만 것이다. 무력감 때문에 거부하지 못했다. 거부하지 못하는 부탁은 사실 명령이다. 관음증의 경향을 보이고 있는 ‘나’는 ‘녀인’에 대한 무력감 때문에 욕망을 억압하고 있으며 억압받고 있다.  

‘나’는 이 욕망을 카메라로 전이하고 있다. ‘나’는 주어온 카메라를 정성스럽게 청소한다. 왜냐 하면 거기에는 그 ‘녀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셀로판지에 포장된 물건”의 정체에 대해서 상상을 하고 그래서 우연히 짧은 실크 잠옷 차림의 ‘녀인’과 그 속살을 보았을 때 ‘나’는 당황했고 ‘녀인’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또한 카메라를 다 청소하고 나서 안에 들어있는 동영상을 보다가 그 연장으로 마루바닥에 있는 ‘녀인’의 “빨간 발톱 우에 박혀있는 큐빅”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녀인’이 등장해 ‘머리카락’으로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여기에 웅이가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웅이는 어떤 존재일가? 단지 ‘내’ 욕망의 대상인 ‘녀인’의 아들일가? 특이한 것은 이 ‘녀인’이 전반 작품에서 ‘녀인’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웅이네’로 불려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웅이는 사실 내 사상写像이며 내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해 ‘나’의 욕망을 대리만족시켜주는 존재이기도 하면서 조력자다. 혹은 ‘나’와 웅이는 하나다. 

웅이가 주은 카메라 모델은 ‘내’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와 같다. 욕망 전이용 도구 혹은 욕망 만족 도구의 모델이 같음으로써 어떤 동질감이나 일체감을 가진다. 

작품이 시작되는 데에서 “오늘은 웅이네 전원주택”이라고 했다. 여기서 ‘웅이네’는 그 ‘녀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웅이의 집’으로 해석된다. 웅이를 아주 피붙이거나 가까운 사람처럼 호칭하고 있는 것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나’는 ‘녀인’을 탐하려는 욕망이 있지만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고 웅이는 그 욕망의 대상과 한집에 있다. 그래서 작품에도 나오지만 나는 웅이네 집 다락방에 집착한다. ‘내’가 일하는 장소는 주로 다락방이다. 또한 ‘나’는 다락방에 대해서 공간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다락방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아래층 녀인의 시간을 함께 나누어쓰는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역경易经에서는 세상만물을 음양阴阳의 법칙으로 본다. 양은 우에 있고 음은 아래에 있다. 양은 남자이고 음은 녀자이다. 다시 말하면 남자는 우에 있고 녀자는 아래에 있다. 이 세상을 구성한 인간들 모두 남자가 우에 있고 녀자가 아래에 있는 체위体味에 의해서 생산된 것이다. 집 구조 자체가 그렇게 설계돼있다. 우층 다락방에는 남자-‘내’가 있고 아래층에는 녀자-‘녀인’이 있다. 

해빛이 잘 들기 때문에 다락방은 양이기도 하다. 다락방은 누구의 공간인가? 나의 공간이기도 하면서 웅이의 공간이다. 그래서 웅이가 “다락방의 주인은 자신”이라고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나’는 동일화된 웅이를 통해서 ‘녀인’과 성행위를 하며 무의식적으로 욕망을 배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머니를 범할 수 있다는 데서 오이디푸스적이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욕보이게 했다. 이 작품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이 ‘녀인’은 고위층 관리의 정부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웅이는 이 고위층 관리의 아들이다. 나는 이 관리와 경쟁자다. 곽명의 입을 통해서 들은 소문은 두가지였다. 이 ‘녀인’이 관리의 녀자이거나 ‘나’의 녀자라는 소문이다. 소문끼리도 경쟁하고 있지만 ‘나’도 무의식중에 관리와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웅이와 일체다. 그렇다면 ‘나’는 웅이를 통해 관리와 오이디푸스적인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웅이가 주은 카메라에는 한 남성의 “무릎 아래 종아리와 발”만 등장한다. 론리적으로 분석하면 이 남성은 바로 그 관리이다. 웅이가 주어온 카메라의 사진과 동영상을 복원시켜놓고 감상하는 것은 욕망을 분출하는 행위이다. 

욕망은 결국엔 카메라로 전이되였다. 그 카메라의 주인을 찾으려고 한다. 그것보다 아마 카메라에 등장하는 남성과 녀성이 누군지 확인하고 싶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 녀성은 다름 아닌 ‘녀인’이였다. 결국 분산된 욕망들이 하나로 회귀되였다. 이로써 오이디푸스적 인간이 완성되였다. 

  

4. 욕망의 중개자의 문제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삼각형 욕망이라는 력동적인 리론을 제기했다. 대부분의 허구작품들은 자연발생적인 주체의 욕망을 대상으로 이어지는 간단한 직선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 직선 우에 주체와 대상 쪽으로 동시에 선을 긋고 있는 중개자가 있다. 이는 삼각형이다. 

이 작품에서 주체는 ‘나’이다. 대상은 ‘녀인’이다. ‘나’는 ‘녀인’에게 욕망이 있다. 일반적인 소설 같으면 ‘내’가 ‘녀인’에게로 직접 련결(직선)되면 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어떤 중개자를 통하여 련결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중개자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먼저 웅이가 중개자다. 웅이가 카메라를 주어서 ‘나’한테 줬다. 카메라에 ‘녀인’이 있으므로 여기서 대상은 ‘녀인’인 동시에 카메라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주로 웅이의 암시를 받으며 ‘녀인’에게 카메라의 진상으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다.

지라르는 이 삼각형에 대해 특이한 해석을 했다. “욕망의 삼각형은 이등변삼각형이다. 중개자가 욕망하는 주체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욕망은 점점 더 강렬해진다.” 이를 어느 학자가 풀이했다. “주체와 중개자 사이의 거리가 멀면 대상과 중개자 사이의 거리도 멀고 주체와 중개자 사이의 거리가 가까우면 대상과 중개자 사이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중개자와 주체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질 경우 대상과 중개자를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욕망도 강렬해진다.” 앞에서도 봤지만 ‘나’는 웅이와 일체다. ‘나’와 웅이가 가까워져서 구분할 수 없게 될 때 욕망이 더욱 강렬해지는 것이다.

이 중개자는 웅이 외에도 곽명과 장위이기도 하다. 특히 ‘나’는 곽명으로부터 ‘녀인’에 대한 암시를 받는다. 곽명은 ‘내’가 욕망을 실현하는 조력자다. 돈키호떼에게 충성하는 산초처럼 ‘나’와 곽명 사이에는 경쟁관계가 없다. 곽명은 ‘내’가 ‘녀인’에게 다가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나한테 ‘녀인’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며 ‘나’와 ‘녀인’을 위하여 자리를 비켜주기도 한다.

지라르는 주체와 중개자가 경쟁관계이면 이를 내면적 간접화(mediation interne)라 하고 경쟁이 없으면 이를 외면적 간접화(mediation externe)라고 했다. ‘나’는 ‘녀인’을 욕망하지만 직접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존재 즉 중개자와 경쟁을 통해서 욕망하고 있다. 오늘날 시장경제체제에서 생성된 소설은 그럴 수 밖에 없다. 특히 이 작품에서 ‘나’는 ‘녀인’과 경제적 관계로 이어졌다. 그래서 여러 중개자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웅이, 곽명, 장위, 웅이의 아버지로 추측되는 관리, 심지어 카메라도 어떻게 보면 중개자다. 

 

5. 공간의 문제

작품의 제목은 <좌망, 빛이 기다리는 곳으로>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하는 ‘바다마을 좌망’은 대체 어디인가? 

소설에서 공간 혹은 배경은 앞으로 발생할 일을 암시하거나 분위기 조성용이라고 여러 문학리론가들은 말한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도입부에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는데 좌망과 여러 도시에 있는 “내가 손을 댄 건물”을 보니 존재감을 느낀다고 했다. 어떤 존재론적인 사고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를 도입부에 위치함으로써 정서적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뒤이어 ‘바다마을 좌망’에 대한 묘사가 있다. 이 마을은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휘여진 해안을 따라서 주택들이 산비탈에 제멋대로 앉아있”다. 모여있어서 둥그런 모양이 아니라 해안을 따라서 형성된 마을이기 때문에 기형적이다. 첫 시작에 나는 샐러리맨에 가까운 평범한 생활을 하는 청년, 그래서 ‘월요병’이 있는 청년이지만 이 이야기는 뒤에 가서는 결코 ‘나’처럼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로신의 소설에는 S성S城이 등장한다. 이 S성은 로신의 고향 소흥绍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좌망은 현실에서 어디인가? “시내에서 동쪽으로 40키로메터 떨어진” 바다가 마을이라고 했으니 중국의 청도와 같은 어느 해안도시인가? 아니면 한국 동해안의 어느 해안마을인가? 모티브는 현실에서 가져왔겠지만 중국이나 한국이나 어디에도 좌망이라는 마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좌망은 분명 허구적인 장소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무진은 현실의 공간 서울과 대립되는 허구의 공간이다. 무진은 분명 주인공이 머무를 수 있는 도시지만 허구다. 주인공은 거기서 불륜도 저지르는 몽환적인 행위를 한다. 욕망을 실현하는, 현실(서울)에서는 불가능한 행위를 하는 공간이다. 

이 작품에서의 좌망도 그러한 곳으로 보인다. ‘나’의 “작업실이자 거주공간인 집”은 현실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웅이네와 나는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다고는 했지만 ‘나’의 집이 더 이상 현실적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하다. 물론 이 작품에서는 <무진기행>에서처럼 두 대립되는 공간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좌망에 치중점을 두었다. 좌망은 ‘내’가 욕망을 하는 공간이다.

마지막에 ‘나’는 카메라 주인 ‘녀인’과 좌망 바다가 좌망커피숍에서 만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녀인’은 나에게 그에 관한 소문을 믿느냐고 질문하면서 “편견과 맞서는 데는 오만 뿐만이 아니겠지요? 단순하게, 아주 단순하게 타인의 시선에서 멀어져서 나를 잊으면서 살 수 없을가요?”라면서 중얼거린다. ‘시내에서 동쪽으로 40키로메터 떨어진’ 마을에 사는 리유를 설명하는듯하다. 소문은 전부 다 사실이 아니며 자신은 빛, 그러니까 보다 편안하게 살 수 있기 위해 이 공간에 와있다는 말인 것 같다.

이를 ‘나’는 좌망坐忘하고 있을 따름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진리는 저쪽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앉아서 욕망의 대상을 보고만 있는 것일가?

‘녀인’은 존 밴빌의 《바다》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메모지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바다》는 안해를 잃은 주인공이 예전의 로맨스로 려행을 떠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카메라 속의 남자는 진정으로 전남편이였던 것일가? 이 전남편은 그 “탐오혐의로 조사받고 있는 고위층 관리”였을가? 그래서 메모에 “그는 / 철창 밖, 그 어두운 방에서 숨을 고른다”고 했던 것일가? 그가 ‘철창 밖’에 있다면 ‘녀인’은 철창 안에 있다는 얘기가 된다. 어떤 도착증 증세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바다’를 ‘어두운 방’이라고도 한 것이다.

 

6. 나가며 

이 작품은 결국 따지고 보면 산업화와 시장경제가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의 현실사회에서 일상생활을 연명해나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평범해보이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누구나 다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에로틱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이 욕망은 전자기기들에 로출이 되여 간접화되고 있다. 이러한 욕망들은 평범한 욕망이란 없다. 다 특별하고 싶다. 전자기기를 통한 욕망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러한 욕망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결코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허무감을 느끼게 되며 실존의 문제에 대해 사고하게 된다. 이러한 느낌과 생각이 문학으로 승화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좀더 깊게 들어가고 심각하게 다루었더라면 어땠을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출처:<장백산>2018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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