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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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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분马犇: 회성인물淮城人物 5인전(단편소설)
2019년 07월 16일 09시 17분  조회:492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회성인물淮城人物 5인전

마분

 

 

 

표구사裱画师  서씨

회성은 자고로 수많은 문인 묵객들을 배출한 고장인 만큼 표구소裱画所가 꽤 많았다. 표구 하면 흔히들 수묵화를 떠올리지만 서예작품 표구 또한 그 범주에 포함된다. 

표구소들에서는 본토 작품은 물론 타지역 작품과 여타 수선이 필요한 소장품들을 두루 취급하다 보니 표구시장은 꽤 흥성한 편이였다. 가끔 가다 후계자가 없는 고로 문을 닫게 되거나 또는 기계표구 기술을 인입하면서 대가 끊기는 가게들도 더러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남들이야 어찌하든 오로지 수공예 기술만을 고집하는 표구소들도 여럿 있었으니 회성 남문대가 동쪽 골목에 위치한 서씨네 표구소 ‘념로재念芦斋’가 그 대표적인 일례였다.

수십대째 대물려내려온 ‘념로재’는 어느 한 조상대에 이르러 어쩌다 변수민边寿民과 인연이 닿게 되였는데 그 작품들을 표구해주고 친분을 쌓으면서 상호 교감하고 가르침도 받고 한 덕에 그 조상할아버지는 표구는 물론 그림과 전각篆刻 기술 등에 두루 능한 기술자로 린근에 이름깨나 알려졌는데 지금 와서는 서씨가 그 기술들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유일한 후손인 셈이였다. 

변수민은 시와 서화에 두루 능해 정판교郑板桥, 금농金农 등과 비견되는 인물로 갈대와 기러기 그리기를 각별히 좋아해 일명 ‘변로연边芦雁’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한때 회성 천비궁天妃宫 린근 갈대밭 언덕에 기거해 살면서 위간거사苇间居士라는 호를 얻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서씨네 조상은 변수민과의 인연을 기리는 의미에서 표구소 이름을 ‘념로재’라고 지었던 것이다. 

옛말에 ‘서화작품 3할에 표구가 7할’이라고 했을 정도로 서화작품에 있어서 표구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표구는 그 절차가 아주 복잡다단하고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표구사의 종합적 자질에 대한 요구 또한 상당히 엄격한 작업이다. 서씨네 표구소에는 세가지 철칙이 있었는데 하나는 그림을 분실하지 말 것, 둘은 모조품에 손 대지 말 것, 셋은 공들인 만큼 수금하되 명인의 작품이라 해서 돈을 많이 요구하지 말라였다.

일부 그림을 잘 모르거나 또는 멋모르고 조상으로부터 진귀한 그림을 물려받은 경우라면 가장 사기당하기 쉬운 사람들이였다. 한번은 남대문 서쪽 변두리에 사는 사람이 그림 한점 들고 표구하러 찾아왔는데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고 난 서씨는 아무 내색 않고 그림 임자를 다시 한번 훑어보고 나서 가격을 말해주고 언제 쯤 찾으러 오라 하고는 손님을 보냈다.

그 그림은 사실 서위徐渭의 유작이였다. 어려서부터 사의写意화법을 제법 익혔고 특히 화초 그리기에 능한 서씨였다. 그리고 모사临摹실력도 상당해서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 진위를 구분해내기 어려웠다. 그러나 서씨는 그 그림을 앞에 두고 이왕보다 좀 오랜 시간을 두고 감상했을 뿐 감상을 마치고 나서는 례사 그림을 표구할 때처럼 차근차근 작업에 림했으며 표구를 마친 다음에는 후일 불필요한 분쟁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권축卷轴 부분에 자그마한 날인을 남겼다. 그리고 약속날자가 되여 그림 임자가 돈을 지불하고 그림을 찾아갔는데 며칠 안 지나서 그 일은 곧 표구업계의 우스개로, 멍청한 표구사의 전형사례로 ‘회자’되였다. 

표구에는 원표구原裱와 게표구揭裱가 있는데 원표구는 표구한 적 없는 그림을 처음 표구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고 게표구는 이미 표구했던 그림을 다시 표구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게표구는 아주 까다로운 작업이였던 만큼 웬만해서는 아무도 주문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반면 일부 기술이 뛰여난 악당들로 말하자면 게표구는 모조품을 얻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선지宣纸는 여러층으로 분리해낼 수 있어서 표구사가 마음만 먹으면 그림 한장을 여러층으로 분리해 여러장으로 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복제해낸 그림은 색채가 원작에 비해 연해지기 마련인데 그러면 거기에 ‘보완’작업을 한 연후에 다시 낡아보이게 하는 구제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림 한장을 감쪽같이 여러장으로 복제해서는 암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다. 

회성에는 소장가들도 꽤 있었는데 오래된 그림들에 습기가 차거나 좀먹거나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그것도 장마철이면 더 심해지기 마련. 해서 장마철만 되면 회성에서 게표구 작업이 필요한 거의 모든 그림들이 ‘념로재’에 맡겨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렇게 한해 여름 동안 서씨 손을 거쳐야 하는 게표구 작업건만 해도 천건 남짓했지만 서씨가 실수로 그림을 훼손했다거나 모조품을 만들어 안속을 챙긴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하기에 설령 고개지顾恺之나 전자건展子虔과 같은 대가들의 유작이라 하더라도 일단 ‘념로재’에 맡겨놓았다 하면 아무 걱정 안해도 되였던 것이다. 

단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자녀들 모두 해외로 이주해간 바람에 더 이상 가업을 이어갈 후계자가 없어서 년로한 서씨 혼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였다. 

그런데 그렇게 별탈 없이 조용히 여생을 마무리하는구나 싶었는데 그것마저도 여의치 못했다. 

개혁개방 이후, 회성에도 남방에 가서 장사를 시작한 이들이 생겨나면서 이들 중 서화장사가 돈 번다는 것을 알고 모조품, 짝퉁 시장에 눈독을 들인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연 고향마을의 표구사 서씨를 떠올리게 되였고 서씨가 표구는 물론 회화 실력도 뛰여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라 불법통로로 원작을 얻어다가 서씨한테 게표구를 시켜 복제품을 만들거나 또는 명화를 모사하게 하거나 혹은 아예 명화를 날로 그려내게 했다.

그 같은 요구에 순순히 응할 서씨가 아니였지만 놈들이 자식들을 앞세워 협박하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해외에 있는 자식들이 무탈하길 바란다면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걸유.”

그렇게 서씨가 놈들의 요구 대로 위조품을 만들어주면 놈들은 그것들을 남방에 가져다 팔아넘겼는데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몇참 못 가 그 일은 들통나고 말았고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렇게 고상한 척 점잖을 빼더니 늘그막에 들어 돈에 눈이 멀었다고 서씨를 비난했다. 

그러던 얼마 후, 서씨가 크게 한번 앓더니 돌연 세상을 떴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위조그림 장사를 해먹던 일당들이 일거에 체포되면서 회성 전체가 떠들썩했다. 

사람들 모두 영문을 몰라 쉬쉬하는 중, 경찰에서 지방신문을 통해 사건 경위를 공개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서씨가 죽기 전에 공안국에 편지 한통 부쳤는데 편지에서 서씨는 전반 사건의 경과를 진술하고 나서 자기 손으로 위조한 그림들의 족자 겹층 안쪽에 “핍박에 못 이겨 그린 위조품임”이라는 글귀를 남겼다는 설명과 함께 그 몇몇 악당들의 용모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초상화까지 그려두었다는 것이였다. 

그렇게 ‘념로재’는 회성의 관광명소로, 수많은 관광객들과 회성 사람들이 오며 가며 종종 머물다 가는 유적지로 되였다. 

 

오삼전吴三钱

중국문학사에서 조설근을 빼놓을 수 없듯 오국통吴鞠通이라 하면 중의학계에서 빠뜨릴 수 없는 대표적 인물이다. 오씨가 경성 의학계에서 명망 높은 의원이라는 소문이 회성까지 전해지자 수많은 회성 사람들이 중의공부를 하는 대오에 합류했다.

그렇게 아침엔 유학경전을, 저녁엔 의학경전을 읽으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유년시절부터 의학공부를 중시하는 풍기가 형성되다 보니 회성에는 대대손손 명의가 나와 오씨의 리론과 의술을 전승하였는데 력사에서는 이들을 ‘산양의학파山阳医派’라고 부른다.

오삼전은 오국통의 후손으로 그는 평생 경성은 고사하고 회성 성문 밖 한번 나가보지 못한 채 평생을 환자들을 위해 바친 사람이였다.

진료소를 운영하려면 우선 이름이 있어야 하는데 조상들이 운영하던 ‘문심당问心堂’은 일찍 전란시기에 파괴되였던 터, 그냥 문심당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라고 권유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삼전은 완연히 거절했다. 원체 겸손한 위인이였던 터, 행여 자기 수준 미달로 선인들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라도 생길가 저어되였던 것. 해서 고민 끝에 결국 ‘양심당养心堂’이라 이름하기로 하였다. 

겨우 한글자만 바꿨다지만 그 의지는 분명해서 말하자면 최선을 다해 자신과 환자들의 마음 그리고 조상들로부터 전수받은 의술, 의덕을 잘 가꾸어가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름이였던 것이다.

식이료법에 능한 오삼전은 어떤 한가지 식재료를 그대로 약으로 쓰거나 또는 식재료에 중약을 배합해 처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침 치료법으로 대부분 의사들이 설탕과 배를 처방하지만 오삼전의 처방은 독특했다. 말하자면 날계란 한알을 사발에 까넣고 거기에 얼음사탕을 살짝 뿌린 뒤 휘젓지 말고 그대로 솥에 넣어 응고될 때까지 쪄서 복용한다. 그렇게 두세번만 복용하면 기침은 가뭇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녀인들의 산후조리에 관해서도 그만의 처방이 있었는데 소량의 흑설탕을 탄 물에 본고장 특색음식 ‘참깨기름꽈배기’를 곁들여먹는 게 그 처방이였다. 꽈배기를 만드는 점포는 많지만 그는 하하河下 북쪽 끄트머리 가게 아니면 읍내 중심가에 위치한 진회루 1층에 있는 가게 혹은 남문부학 옆에 위치한 가게 등 세집에서 만든 꽈배기를 추천했다. 구전으로 전해진 처방이라지만 요즘도 회성에 가면 이 처방으로 산후조리를 하는 녀인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여름철이면 강물이 범람하고 읍내 곳곳에 건물이 침수되기 마련이요, 간신히 홍수를 지나보내고 나면 또 역병이 들이닥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한번은 숱한 민가들이 물에 잠긴 데다 전염병까지 번져서 동서남북 성문들 할 것 없이 매일같이 송장이 들려나가고 있었다. 그 무렵, 오씨는 마침 그 옛날 오국통이 경성에 있을 때에도 전염병이 크게 번져 경성에 있는 회안회관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냈다는 기록을 읽고 있었다.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 오삼전은 그 자리로 의약상자를 둘러메고 제자들을 이끌고 나가 서에서 남으로, 동에서 북으로 도성을 전전하며 수많은 위급환자들을 돌보느라 수일째 밤잠 한번 제대로 자보지 못했고 신발이 해지고 발이 까져 발톱 몇개가 떨어져나가기도 했다. 

부득불 오씨는 제자들에게 들려 ‘양심당’으로 돌아가게 되였고 제자들이 그를 대신해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던 하루는 제자들이 아무리 약을 쓰고 지극정성으로 돌봐도 효험을 보지 못하고 간들간들 숨만 붙어있는 환자가 있었다. 맥을 버린 환자 가족에서는 이제 후사를 치를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 환자 가족은 과거 오씨네가 신세진 적이 있는 집안으로 이는 제자들 모두 ‘양심당’에 입문할 때 스승으로부터 들어 알고 있는지라 제자들은 환자에게 태만할 수도 없었거니와 또 ‘되든 안되든 한번 시도는 해보자’는 생각으로 환자를 일단 ‘양심당’으로 모시기로 했다. 

이윽고 절룩거리며 나타난 오삼전이 극도로 지친 두눈을 간신히 비벼 뜨고 환자를 살피다가 다시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마침내 떨리는 손으로 약처방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제자가 약을 지으려고 받아보니 그것은 전钱 단위까지 소상하게 적혀있는 처방이였다. 자고로 의학계에는 역병 기간에는 어떤 사람에 한해서도 돈을 받지 않는다는 불문률이 있었다. 환자 가족들이 그 앞에 무릎 꿇고 사의를 표하자 오삼전은 사력을 다해 몸을 일으켜 그만 돌아가보라고 손짓으로 배웅하고는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안채로 들어갔다. 

사흘이 지나자 그 환자는 언제 그랬던가 싶게 말끔히 나아 밭에 나가 일할 수 있었고 고마운 마음에 오삼전의 고명한 의술을 칭송하는 내용의 편액을 만들어 들고 온 가족과 함께 ‘양심당’을 찾아왔다. 구경을 나왔던 동네사람들도 집에서 북이며 꽹과리, 새납까지 들고 나와 편액 증정식에 가세하였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양심당’은 대문이 굳게 닫혀있고 가만히 귀를 강구고 들어보니 뒤울안에서 아녀자들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에 황급히 문을 두드리니 제자 한명이 문틈으로 머리를 내민 채 좀 조용히 하라는 것이였다. 알고 보니 오삼전은 그 며칠 동안 너무 무리했던 탓에 과로로 사망했다는 것이였다. 그에 편액을 들고 온 사람들이며 이웃들 모두 엉엉 울면서 편액이라도 관과 함께 묻어달라고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 모두 오삼전의 령전을 지키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에 제자들이 편액은 받을 수 없다고 한사코 마다했고 이웃사람들한테는 그 마음 충분히 고맙지만 제발 그만 돌아들 가시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것이였다. 편액을 들고 온 사람들이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다는 눈치였고 그렇게 한창 실랑이가 벌어질 무렵 한 제자가 죽다 살아난 그 환자 귀가에 뭐라고 속삭이자 그 사내는 군말 없이 일행을 이끌고 편액을 둘러메고 돌아가는 것이였다.

일행이 집으로 돌아와 그 제자가 일러주던 대로 대문 안쪽 벽돌 한장을 들고 보니 그 밑에서 편지 한장이 나왔다. 편지에는 “지금 쯤이면 쾌차했으리라 믿네만 내게 고마워할 건 없네. 내 처방을 잘못 쓰는 바람에 약재 한가지가 3전이나 더 들어갔지 뭔가. 비록 큰 지장은 없었겠지만 처방에 차질이 생긴 건 틀림없는 일인즉 자네 병환은 내가 치료한 거라 할 수 없으니 내 심심히 사과하는 바네.”

편지에 피가 묻어있는 것으로 보아 제자의 말 대로 그것은 오삼전이 숨을 거두기 전, 잠시 정신이 맑아진 틈에 쓴 편지였다. 

그 소문은 곧 회성 전체에 퍼져나갔고 오삼전이라는 호칭도 사실 그 때 생겨난 것이였다. 그로부터 오삼전은 회성 모든 의원들의 보기로 되였으며 회성 사람들 모두 몸이 고단하거나 병환에 시달릴 때면 자연스레 그 이름을 떠올리곤 했다. 

 

대필자 빙冯씨 

대필은 꽤 오래된 업종으로 우전국 주변에 가면 적어도 한두명, 많으면 일여덟명씩 대필자들이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있는 풍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대필은 준비물도 크게 필요 없어서 책걸상과 종이, 필기구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나마 격식을 좀 지킨다 하는 이들은 전용편지지에 붓과 먹을 마련해두지만 보통 보면 필기장 따위를 북 찢어내거나 학교, 기업 등 기관단체의 사무용지에 만년필로 쓰는 이들이 상당수다. 

편지를 대필해주는 일이 대부분이고 간혹 가다 소송장이라든가 유서, 전기, 가족사 따위를 대필해주는 경우도 있다. 편지 대필은 대개 손님이 대체적인 내용을 구술하면 그걸 받아 써주면 된다. 간혹 일자무식인 사람들이 편지를 들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손님이 편지 내용을 충분히 알아듣게끔 차분히 읽어주고 나서 답장할 내용을 구술하기를 기다려 답장을 써주면 그만이다.  

빙씨가 대필자 노릇을 시작한 게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이였으니 린근에선 아마 가장 오래된 대필자 중 한명일 것이다. 그러나 빙씨가 대필 업종을 선택한 것은 결코 공장에서 퇴직한 원인만은 아니였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라지만 빙씨는 자기 직업원칙을 엄수했다. 어떤 내용의 편지든 대필을 마감해서 봉투에 넣는 즉시로 그 내용을 일절 되새기지 않았고 대필 과정에서는 손님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극력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애썼으며 게다가 요구하는 대필 비용 또한 시종여일 변동이 없었으므로 자연 그를 찾는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

여타 대필자들보다 좀 다른 점이라면 빙씨는 대만에 부치는 편지를 대필할 때면 사전에 그 손님과 “제가 봉투 뒤면에 제 가게 로고 하나 그려넣게 해주시오.”라고 청을 넣곤 하는 것이였다. 그러면 손님들 대부분은 군말 없이 그 청을 들어주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로고 하나가 아니라 봉투 앞뒤면 가득 로고를 그려넣는다 하더라도 우편료금이 더 붙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였으니 말이다. 

빙씨의 대필소所 로고는 순무였는데 순무 아래쪽에는 ‘순무·빙’이라는 싸인이 있었다. 보다 쓰기 간편하고 식별하기 쉽게 하기 위해 빙씨는 그 로고 문양으로 된 전용도장을 새겨두었다. 

해방 전, 회성에는 남경에 가서 국민당에 입당한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장개석이 패전하여 대만으로 건너갈 무렵 수많은 회성 출신 국민당 장교들이 가족, 친지들을 데려가기 위해 고향에 다녀갔었다. 그런 연유로 회성 사람들이 써보내는 편지들 중 상당수는 대만으로 부치는 편지들이였다. 

빙씨는 아직도 여섯살 나던 그 해 가을의 정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은 국민당 장교인 외삼촌이 간만에 왔다가 안채에서 아버지랑 대작하고 있었다. 마당에서 놀던 빙씨와 그보다 네살 터울인 형이 호기심에 안채 쪽을 기웃거리는 중, 외삼촌이 손짓으로 형을 불렀고 그렇게 외삼촌한테로 쫑드르 달려가던 형과 글쎄 50년 남짓 생리별하게 될 줄이야 꿈엔들 알았으랴.

지난 세기 80~90년대, 해협 량안에는 리산가족 찾기 붐도 불고 했지만 그러나 고향의 길거리며 골목들 이름만도 벌써 수차 바뀌였으니 설령 형이 옛날 집주소로 편지를 했다 하더라도 진작에 반송되였을 것이였고 빙씨로서는 형의 주소를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형제간 모두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라면 어쩜 순무짠지 밖에 없을 것이였다. 어린 시절 집에는 순무짠지를 담그는 꽤 큰 작업장이 있었는데 골목길 저쪽 끝에 들어서면 벌써 순무짠지의 특유의 향기가 물씬 풍겨오곤 했던 것이다. 

때는 다들 생활이 궁핍하던 때였으므로 순무짠지는 거의 모든 가정의 주메뉴였고 좀 어렵긴 했지만 락관적인 회성 사람들은 좀더 ‘정제된’ 순무짠지를 만들기 위해 여러 모로 많은 시도를 해봤다. 그리고 순무짠지를 담그는 간수老卤를 무슨 대물림보물인 양 고이 남겨두었다가는 대대로 내려오며 항아리에 저장해두었고 그렇게 해묵은 간수로 순무짠지 담그는 일은 이곳 민속풍경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그 시절 간수순무짠지는 단조로운 밥상에 이채를 더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곤궁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역할도 했다. 그런 고로 생활형편이 넉넉해진 요즘에도 간수순무짠지는 여전히 밥상에 없어서는 안될 회성 사람들의 추억거리로 남아있으며 차츰 다른 지역들에 알려지면서 명품짠지로 거듭나게 되였다. 해서 회성에는 “순무는 반찬이 아니라 길 떠나는 이들의 필수품이다.”라는 속설도 있다. 회성 전통극 <보항조补缸调>에서는 순무짠지를 보다 직설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하북에서 소문난 순무짠지 향기에 녕호宁沪 상인들 벌떼처럼 모여들고 트럭 가득 박아싣고 부두까지 가서는 선박 가득 싣고 가네. 멀리는 남경, 상해, 양주며 진강镇江까지 실어간다오. 하북에 가면 사람마다 짠지전문가요, 집집마다 짠지항아리 즐비하다오.”

이 <보항조>에 나오는 하북은 하하河下 고진 북쪽에 위치한 하북촌을 이르는 말이요, 빙씨가 바로 이 마을 출신이고 어린 시절 끼니마다 순무짠지에 밥을 먹었던 그들 세대였다. 

그렇게 10여년 동안 대필해준 편지가 수백통에 달했고 어느 겨울날 량씨가 대만에 있는 친척이 부쳐왔다며 편지 한통 들고 왔다. 빙씨가 편지를 읽어주려고 봉투를 뜯어보니 량씨 앞으로 보낸 편지 말고 선지에 붓글씨로 정히 쓴 편지 한장이 더 들어있었는데 내용인즉 이러했다.

근년 들어 몇몇 회성 출신 친구들이 종종 한자리에 모이곤 하는데 고향의 순무짠지 얘기가 좌중의 화제가 되곤 한다는 것, 그러다 한번은 량형梁兄이 고향에서 부쳐온 편지 한통 꺼내더니 봉투 뒤면에 찍혀있는 순무 모양의 로고를 보여주면서 하는 얘기가 회성에 있는 여느 대필소 로고인 것 같은데 대만으로 부쳐오는 편지들 모두 그 대필소에서 대필해주는 모양인지 편지마다 봉투 뒤면에 순무 문양 밑에 ‘순무·빙’이라는 싸인이 박혀있는 로고가 찍혀있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그 대필소 주인이 행여 내 동생이 아닐가 하는 요행심리에 오늘 량형의 편지와 동봉하오니 답장만 고대한다는 내용이였다. 

편지를 읽는 내내 빙씨의 량볼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궁여지책으로 고안해낸 그 막연한 방법으로 정말 형을 찾게 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여 우선 량씨를 위해 답장을 써준 뒤 그 자리에서 단숨에 10여장 되는 답장을 형한테 써보냈다. 그로부터 형제간은 빈번하게 편지를 주고받게 되였고 90년대 말에는 형이 고향을 탐방하여 수일간 머무르면서 50년 만에 형제간의 해후상봉이 이루어졌다. 빙씨가 고향 특색료리들로 푸짐한 상에 마지막으로 간수순무짠지를 올리자 형이 배낭에서 아직 개봉하지 않은 자그마한 단지를 꺼내 올려놓는 것이였다. 그것은 과거 외삼촌을 따라 떠나던 날, 어머니가 보따리 속에 넣어둔 순무짠지였던 것이다.

그렇게 형제간이 마주앉아 순무짠지를 씹으면서 옛추억을 곱씹고 있노라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싸한 향기가 피여오르며 눈물이 앞을 가렸다. 

 

당唐목수

“남자는 관음보살, 녀자는 부처님”이라는 말은 몸에 지니는 패물을 두고 하는 말이요, 그 패물은 대체로 금이나 은, 옥돌, 수정 등속으로 된 것은 많아도 나무로 된 패물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소이는 언제 봐도 항상 마작쪽 만한 크기의 그 나무목걸이를 목에 걸고 다녔다. 

그것은 얼핏 보면 그저 민숭민숭한 나무쪽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정교하고 예쁜 도안이 눈길을 사로잡는 목걸이였다. 그 자그마한 나무쪽에 지금 막 피여나고 있는 것 같은 정교하고 섬세한 국화꽃 세송이나 새겨져있었던 것이다. 그 목국木鞠의 래력을 알아내기 위해 사람들은 소이가 어린 시절에는 사탕공세를, 나중에는 술공세를 들이대며 무진 애를 썼지만 소이는 단 한번도 그 비밀을 발설한 적이 없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목국은 소이 할아버지의 작품임에는 틀림없다는 점이였다. 회성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들어봤음직한 노래가락이 있다. 

“최고의 목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회성에서 제일 바삐 보내는 이를 찾으시오. 부리부리 두눈에 우뚝한 코, 말수는 적고 성은 당씨라오.” 

노래가락에서 말하는 당목수가 바로 소이의 할아버지였고 대부분 사람들이 그 실명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소이가 목에 걸고 다니는 그 목걸이가 다름 아닌 당목수의 작품이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당목수에 관한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 또한 노래가락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익히 들어 아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당목수는 나무의 크기와 재질, 량에 따라 그에 상응한 물건을 만들곤 했는데 도면도 필요 없이 목재를 눈대중으로 보기만 하고는 바로 작업을 시작하곤 했다. 

필통이며 책꽂이, 접이의자, 책걸상, 옷궤, 침대 등 못 만드는 게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엔 나무집도 지었다고 한다. 고용주가 정해놓은 부지와 그 요구조건에 따라 즉석에서 면적을 추산하여 목재를 사오게 하는데 집이 준공된 다음에 보면 널판자 하나 보태지도 남아돌지도 않았다고 한다. 간혹 남아도는 나무토막이나 자투리가 있더라도 그것들을 활용하여 부삽이나 바가지, 국자 등을 만들었고 톱밥들도 모조리 담아두었다가 땔감으로 쓰게 하였다는 것이다.

‘추산’능력이 뛰여난 외 조각기술 또한 신기에 가까웠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통나무로 룡머리를 조각한다거나 그 입속에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구슬을 조각해넣는다던가 또는 통나무로 여러 고리들이 맞물려있는 형태의 나무목걸이를 만든다던가 하는 건 말할 나위도 없었고 뭐니 뭐니 해도 당목수는 미세조각에 가장 능했는데 호박씨 크기의 나무쪼각으로 주산을 만들면 그 주산알들은 깨알보다 작아도 어느 하나 들놀지 않는 게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주산’에서 만족할 수 없었던 모양, 한번은 이웃사람 두명이 찾아와서 한 사람은 열쇠를 내놓으며 나무열쇠를 ‘복제’해달라 청들었고 다른 사람은 이쑤시개를 내놓으며 거기에 풍경화를 그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 모두 뒤가 부옇게 돌아가야 했고 다시는 당목수를 괴롭힐 엄두를 못 냈다고 한다. 한편 당목수는 그 나무열쇠와 이쑤기개를 자그마한 함에 간직해둔 채 그것을 “기예를 갈고 닦는 데 게을리하지 말자”는 지침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때 회성 사람들이 누군가의 뛰여난 기예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였고 아울러 망신을 자초하는 이들을 조롱하는 사례가 되기도 했다.

목수라면 의례 연필이나 먹으로 나무에 표기를 해놓고 그 선을 따라 나무를 켜고 자르기 마련인데 당목수는 종래로 귀등에 연필을 꽂거나 먹선 긋는 공구를 갖고 다니는 법이 없었다. 당목수한테는 두눈이 곧 공구였고 그렇게 눈대중으로 켜놓은 목재는 종래로 비뚤거나 모자라거나 넘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자조차도 쓰는 일이 거의 없이 엄지와 식지, 중지를 리용하여 뼘으로 재면 그만이였다. 그러다 간혹 고용주가 재촉하기라도 하면 뼘으로 재지 않고서도 종래로 어떤 차질이 생기는 일이 없었다. 

소이가 걸고 다니는 그 목국에 대한 사람들의 억측은 끊일 줄 몰랐고 당목수가 죽은 뒤로는 궁금해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그러던 하루는 금탕사우나에서 소이가 옷궤에 넣어둔 목걸이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나 깨나 항상 목에 걸고 다니다가 목욕할 때만 벗어놓곤 하는 목걸이였다. 금탕사우나는 꽤 오래된 사우나로 과거 당목수도 종종 즐겨 찾던 곳이였고 사우나를 수차 개조하는 과정에서 나무로 된 물건들 중 어느 하나 당목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게 없을 정도였다. 

설마 새로 온 웨이터의 소행인가? 소이가 후끈 달아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무렵, 마침 새로 온 웨이터가 달려오더니 이실직고했다.

“손님, 저들이 제가 그 목국을 가져오지 않으면 오늘 당금 쫓겨날 거라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갖다 주었습니다. 전에 다른 웨이터들한테도 시켰지만 그 사람들 모두 응하지 않아서, 그래서 금방 와서 멋모르는 저를 시켰던 것 같습니다.”

“그래, 또 뭐라고 하던가?”

“저보고 목걸이는 그냥 잠시 보관해드리는 것이니 걱정 마시라고, 이제 그 목걸이의 래력을 소상히 말해주면 그대로 돌려드릴 것이라고 그렇게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가서 래일 아침 다들 사우나 문앞에 모이라고 전하게.”

소이가 그렇게 쉽게 나오리라고는 그 사람들 역시 예상 밖이였다. 

이튿날 아침, 사우나 문앞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의뭉스런 얼굴들이였다.

이윽고 소이는 사람들을 이끌고 곧추 교외 쪽으로 걸어갔다. 가는 내내 말 한마디 없었고 그에 사람들은 한층 불안한 표정이였고 개중에는 여차 하면 중도에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는 이들도 있었다. 

몇참 안 가서 교외에 이르렀고 중학교 문앞에서 걸음을 멈춘 소이가 학교 이름이 새겨진 편액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자, 이게 바로 ‘목걸이’의 래력입니다.”

그에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며 웅성거렸다.

그러자 소이가 사람 몇을 시켜서 그 편액을 약간 들어내여 뒤면과 벽 사이에 틈이 생기게 하고 다시 몇사람보고 그 뒤면에 새겨진 조화雕花를 확인하라 하고는 말했다. 

“평생 동안 목수 노릇을 하신 저희 할아버지는 만년에 계획경제시대를 맞이했고 아시다 싶이 때는 목재가 귀한 시기라 회성 교외의 일부 농민들은 관널을 도적질해서 목재가 필요한 이들에게 팔아넘기곤 했지요.”

“관널은 알짜 좋은 목재만 쓴다는 것을 잘 아는 그들이였고 그 목적은 물론 관널이였습니다. 물론 내친 김에 삽으로 항아리를 깨고 금품 따위가 있으면 훔쳐가는 이들도 간혹 있었지만 말입니다.”

“이 교외 중학교의 목수일은 저희 할아버지가 사람들을 이끌고 진행한 공사입니다. 그런데 개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학교에서 할아버지보고 학교 이름이 새겨진 편액을 만들 것을 주문했고 구매 담당자는 어쩔 수 없이 관 도적들 손에서 목재를 사와야 했습니다. 녹나무로 된 이 편액에는 섬세한 조화까지 새겨져있습니다. 그리고 찬찬히 보면 조화 중앙부분에 당승중이라고 저희 증조부 이름이 새겨져있습니다. 당시 그걸 본 할아버지는 말 그대로 칼로 가슴을 저미는 것 같았지만 사람들의 기대 어린 눈길 속에서 차마 물러설 수도,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소이가 축축해진 눈가를 손등으로 찍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몰래 그 관널 귀퉁이 부분을 살짝 잘라내여 손에 꼭 쥔 채 일을 계속했고 꽃 문양과 이름자를 지우지 않고 그 뒤면에 학교 이름을 새겨넣었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조상 무덤이 털리면 절대 소문 내지 말라’는 설이 있는데 할아버지는 저한테 이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 것과 이 ‘목걸이’를 자손 대대로 전해갈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 날 집에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낮에 잘라낸 나무쪼각에 국화꽃 세송이를 새겨넣은 뒤 제 목에 걸어주고 얘기 몇마디 하시다가 그렇게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비로소 사람들은 그 ‘목걸이’를 소이한테 돌려주었고 무척 미안한지 저마다 고개를 떨군 채 “미안하오, 미안하네.”라고 나직이 속삭였다. 

 

견삼공犬三爷

견삼공 하면 딱 들어도 별명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별명이 불려진 지는 어언 30년도 더되였다.

그 별명을 붙여준 것은 동네 꼬마들이였고 처음에는 개삼공이라 부르던 것을 후일 어른들이 좀 완곡하게 견삼공이라 고쳐부르게 된 것이다. 

견삼공이 있는 곳엔 언제나 개가 따라다녔고 견삼공은 개가 무슨 지팡이라도 되는 양 개가 없이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처럼 하루종일 개들과 붙어다니곤 했다. 그 종류로는 늙은 개에서부터 강아지에 이르기까지, 암컷과 수컷, 토종과 서양종 그리고 종일 짖어대는 놈에서 종일 가다 몇번 짖지 않는 놈에 이르기까지, 비대한 놈에서부터 비루먹은 놈에 이르기까지 정말 없는 것 말곤 다 있었다. 

견삼공의 일과 또한 모두 개들과 련관된 것들이여서 언제 어디에서 보나 이놈에게 먹거리를 주고 있지 않으면 저놈 등을 긁어주고 있었고 이놈을 데리고 산책하지 않으면 저놈을 끼고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견삼공이 수양한 유기견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 그 먹이에 들어가는 돈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견삼공은 회성 읍내에서 가장 큰 식당 청소부로 취직을 했고 월급은 한푼도 필요 없으니 자기와 개들의 하루 세끼만 보장해달라고 자기가 한두끼 쯤 거르는 건 괜찮지만 개들은 절대 굶겨서는 안된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다행히도 식당에서 매일 버려지는 고기, 뼈다구 등속은 그 개들의 먹거리로 충분했고 이제 몇마리 더 추가하더라도 별문제 없을 것 같았다. 

한편 그런 견삼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의문으로 가득했고 30년 전, 견삼공이 무슨 일로 갑자기 개한테 홀딱 반하게 되였는지 무척 궁금해했다. 30년 전의 견삼공은 집에서 개 한마리 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골목에서 이웃집 개와 마주쳐도 종래로 눈길 한번 주는 일이 없는 위인이였던 것이다. 

연유야 어찌 됐든 누구나 다 아는 견삼공의 외모특징, 그것은 사실 애초 견삼공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중요한 근거이기도 했다. 견삼공은 오른쪽 눈이 왼쪽 눈보다 컸고 동공이 작고 흰자위가 큰 오른쪽 눈은 언제 봐도 정기 없고 멀건 빛을 띠였으며 눈을 깜빡일 때도 아주 어색해보였는데 사실 그 눈은 개눈이였다. 그런데 견삼공이 개눈을 이식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누군가 빈말로라도 견삼공이 수양한 개들의 안부를 물으면 견삼공은 그 사람과 더없이 친근하게 굴었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간혹 장난꾸러기 꼬마들이 견삼공이 안채에 들어간 틈을 타서 담장에 기여올라 개들한테 돌총질하곤 했는데 돌 맞은 개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면 견삼공은 득달같이 튕겨나와 비자루를 휘두르며 꼬마들을 뒤쫓았고 꼬마들은 그게 재미있다고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뿔뿔이 달아나곤 했다. 

외인은 그렇다 치고라도 그 아들과 손자마저 개들을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견삼공이 거의 모든 정력을 개들한테만 기울이고 가족들한테 소원하는 탓이였다.

그 아들 역시 아버지가 개들한테 그토록 끔찍하게 구는 리유를 모르긴 매한가지, 외인들보다 좀더 아는 게 있다면 30년 전 아버지가 개눈을 이식해 넣게 된 경위를 알고 있을 뿐이였다. 30년 전의 어느 날 아침, 견삼공이 트럭을 몰고 이웃 현으로 화학비료 실으러 가는 길이였다. 도로에는 온통 자갈이 널려있었는데 아마 린근 공사장으로 자갈을 나르던 트럭이 지나가면서 흘려놓은 모양이였다. 그런 울퉁불퉁한 도로를 덜렁거리며 운전해가느라 심성이 불편해진 견삼공은 누구라 없이 투덜거리며 운전하던 중, 갑자기 자갈 하나가 눈앞으로 튕겨오는 바람에 엉겁결에 두눈을 꼭 감으면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였고 아들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들은 아침에 아버지가 급히 나가면서 공장 소개신을 두고 간 것을 발견하고 급히 아버지를 뒤쫓다가 그런 사고현장을 목격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렇게 공장에서 화학비료를 사라고 준 돈은 비료는 고사하고 전부 병원비용으로 밀어넣게 되였다. 그런데 그보다 황당한 것은 오른쪽 눈알이 자갈에 맞아 터진 것이였다. 그것도 어처구니 없게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랬다거나 인위적인 사고가 아닌, 견삼공이 몰고 가던 차 바퀴에 깔려서 튕겨오른 자갈이 오른쪽 차창을 뜷고 들어와 눈알에 박힌 것으로 교통사고사상 류례를 찾아볼 수 없는 참으로 황당무계한 사고였던 것이다. 

일부에서는 개눈알을 이식하고 나면 자연스레 개습성을 갖게 되고 지어 안목까지도 개를 닮아가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견삼공이 갑자기 개들과 친밀해진 게 아닐가 하고 억측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가만 생각하면 그 말은 어불성설이였다. 왜냐면 때는 의료조건이나 사람들의 수입상황 등이 제한된 시절에 눈알을 다쳐서 개눈알을 이식해 넣는 사례가 회성에만도 여럿 있었으며 다만 사후에 견삼공처럼 개를 극진히 대하는 사례가 없었을 뿐이였다. 

그러구러 수년이 지나고 견삼공이 중병으로 몸져눕게 되였는데 다들 이제 설을 넘기기는 글렀다고 맥 놓고 있는 중이였다. 한편 견삼공은 병상에 누워서도 자기 몸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듯 오직 개들 걱정 뿐이였다. 그러던 하루는 다들 잠든 야심한 시각에 아들과 손자를 조용히 불러놓고 이야기 하나 들려주면서 어떻게든 개들을 잘 돌봐야 한다고, 그리고 남의 집 개한테라도 절대 못되게 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사실 견삼공은 어린 시절 툭하면 고무새총으로 동네집 개눈을 쏴 멀게 하는 악당이였는데 그로 인해 한동안은 동네 개들 전부가 애꾸눈이 된 때도 있었다. 그러나 동네사람들은 아무도 그 원인을 알아채지 못했고 나중에는 약속이나 한듯 아무도 더 이상 개를 기르려 하지 않았다. 개를 기르기에 적절치 않은, 뭔가 사특한 기운이 도는 동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견삼공은 자기가 눈먼 돌에 맞아 눈이 먼 것을 꼭 인과응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죄는 지은 데로 간다는 생각이 두고두고 마음속 응어리로 맺혀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난 아들과 손자는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시름 놓으라고 견삼공을 안심시켰고 그제야 견삼공은 비로소 안온한 미소를 머금은 채 숨을 거두었다. 아들과 손자는 슬픈 눈길로 망자의 얼굴을 이윽토록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눈만 감겨져있고 커다랗게 뜬 채로 있는 다른 한쪽 개눈은 아직도 마당에 있는 개들 걱정으로 감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김견 옮김)
 

출처:<장백산>2018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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