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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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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은실: 지하철 오감도(수필, 외2편)
2019년 07월 16일 11시 03분  조회:500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지하철 오감도

리은실

 

사시장철 끝도 없이 늘어선 지하철역의 출근족 대오는 우리 나라 수도 북경의 한폭의 풍경선이다. 손에 “유툐(油条)”, 콩물 등 아침 먹거리를 들고 선 사람들, 아직 잠이 덜 깨 연신 하품을 하고있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어디론가 향하여 가고있는 사람들이다. 

곁눈질을 할 여유가 없이 달려가고있는것이다.

 

아침 지하철은 이같이 아직 해가 뜨기전부터 한무리의 사람들을 맞으며 비로소 하루를 시작한다. 

지상에서 달리는 차들은 변수에 로출되기 쉽다. 교통체증을 만난다거나 교통사고가 일어난다거나 혹은 갑자기 다이야가 터져버린다거나 하는 등등이 모두 그 변수이다. 그러나 지하철은 매우 온건하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사람들을 정해진 곳까지 여간해서는 변수가 없이(상대적으로) 빠르게 데려다준다.

 그것이 이 도시 출근족들이 지하철을 애용하는 절대적인 리유이다. 서로에게 눈길 한번 줄 여유도 별로 없는 고단한 인생들의 집합체인 지하철안에는 그래서 별의별 사연과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이야기 하나

직장의 파견을 받고 나는 오늘부터 해정구(海淀区)에 있는 교육기지로 닷새동안 연수받으러 다녀야 한다. 어떤 리유로든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건 매우 설레고 행복한 일인줄 알았다. 지하철에 오르기전까지는…

 

습관처럼 매일 서던 위치에 가서 줄을 섰다. 멀리서 전동차가 달려오는걸 넋 놓고 바라보다 그제서야 아차- 하고 놀랐다. 오늘 가야 할 연수기지는 회사와는 정반대쪽 방향이 아닌가? 서둘러 씩씩거리며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이쪽도 줄이 길기는 마찬가지다. 예상대로 첫 차에는 탑승을 못했다. 두번째 차가 오자 이번에는 어떻게든 올라타야지 마음 먹고 령장류의 어떤 동물처럼 날렵하게 렬차안으로 몸을 던져넣고는 손잡이를 단단히 잡았다.

다음역은 “룡택(龙泽)”역. 역에 도착하자 또 한무리 사람들이 아등바등 올라탄다. 내 몸은 간신히 손잡이에 매달려 무기력하게 휘청이고있을뿐. 심장이 옥죄여드는것만 같았다. 그다음은 “서이기(西二旗)’역이다… 아, 이렇게 촘촘한 인파는 일찍 본적이 없다.

콰악 밀치며 서너명의 녀자가 뿌려져 들어왔다. 뭉클한 가슴으로 나를 압박해온 녀인은 표준적인 녀장부였다. 나보다 키가 한뼘은 더 큼직한 그녀는 내 얼굴쪽을 향해 거친 숨을 내뿜었다. 아침메뉴는 닭알과 부추로 소를 넣은 만두를 드셨는가보다!

눈을 감았다. 코를 막는게 더 시급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꽉 끼인 내가 할수 있는건 재빠르게 눈을 감는 일밖에는 없다. 그런 상황이 “상지(上地)”, “오도구(五道口)”까지 지속되였다. 회사로 가는 길은 그나마 편한것이였구나 하는 위안이 마음 한구석을 찾아들었다. 이 고행을 앞으로 나흘동안 여덟번을 오가며 해야 하다니 눈앞으로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는듯하다…

 

이야기 둘 

조금 일찍 떠나서 그런지 오늘은 어제보단 사람이 좀 적은것 같다. 그러나 웬걸, “룡택(龙泽)”역에서부터 밀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서이기(西二旗)”역에 도착해서부터는 좌석쪽으로 밀려오기 시작한다.

겨우 발을 딛고 서보니 어딘가 요상한 그림이 연출되고말았다. 좌석에 앉은 한 남자는 생각없이 다리를 벌리고있었을테고 밀리운 나는 그 다리사이에 밀려들어가게 된것이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한발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럴 틈이 없다. 괜히 이 남자에게 미안해진다.

뒤에 멘 가방때문에, 밀고닥치는 사람들때문에 몸은 자꾸 앞으로 쏠린다. 필사적으로 손잡이를 꽈악 잡았다. 이두박근 삼두박근이 놀라 뛰고 어깨에 뭉친 근육들이 쩍쩍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듯하다.

팔에 힘이 풀려 약간이라도 느슨해지면 앞으로 쏠린 내 상반신에 그 남자의 머리가 포근히 안길, 정말이지 위험천만한 사태였다. 안되기는 이 남자도 마찬가지다. 다리는 왜 벌려가지고 이 “쩍벌남”의 교훈도 만만치 않을것이다. “우리”는 어쩔수없이 야릇한 포즈를 취한채 “상지”를 지나 “오도구”까지 10여분을 그런 상태로 함께  했다. 한시간 같은 10분이였다.

 

이야기 셋

오늘은 출근 체크를 하는 날이다. 가장 붐비는 시간대의 지하철을 타는 날이기도 하다. 집문을 나서면서부터 굽 높은 구두를 신은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운 좋으면 좌석 하나 얻어 걸릴지도 몰라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지하철에 올랐는데 내 꿈이 너무 야무졌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다.

매의 눈으로 쫙- 관찰을 했다. 좀 피곤한듯 하품을 하는 저 남자는 아무래도 먼곳까지 갈것 같다. 그옆에 창밖을 부산스레 내다보며 무릎우에 놓인 아이패드를 케이스에 접어 넣는 녀자가 보인다. 곧 내릴것 같다. 그앞에 가서 섰다. 그 녀자의 정수리만을 응시하며 다음역에서 내릴것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옆에서 하품하던 남자가 일어설줄이야…내 예상은 한번도 적중한적이 없다. 머피의 법칙인가?

창밖을 부산스레 내다보던 녀자는 그 다음역에서 올라오는 동료로 짐작되는 다른 녀자를 향해 손짓하더니 자기 앞으로 불렀다. 동료 녀자가 밀고 들어오고 급기야 난 설자리마저 잃었다. 심각한 판단오류이다. 줄을 잘 서야 한다는게 이런건가? 정말 담번부턴 줄을 잘 서야겠다. 매번 얻는 교훈이다.

어느 역에서 내릴지 목에 명찰 같은걸 달면 안되려나? 그럼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만 몰릴테지? 눈썰미가 없는 나 자신이나 탓할노릇이다.

 

이야기 넷

고봉기를 살짝 피했더니 지하철안이 거짓말처럼 한적하다. 앉을 좌석이야 물론 없지만 다리를 어깨너비로 충분히 벌리고 서도 방원 50센치메터안은 거칠게 없다

간만에 독서나 해볼가나?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쳐들었다. 왼쪽에 선 남자의 높은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커플싸움의 중재자인듯하다. 둘이 사는게 뭐 있냐며 사소한 일은 넘기라며 조언을 하고있다. 그 남자가 거의 전화를 끝낼무렵 오른쪽에 선 녀자의 고음이 오른쪽 귀를 때린다. 목소리가 매우 날카롭다. 전화상대는 친정엄마인듯하다. 새로 찾은 직장은 야근도 없고 상사도 좋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꼭 저렇게 높은 소리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편에서 웅글진 목소리로 전화통화를 하는 남자는 보험설계사인것 같다. 보험내용을 고객에서 설명해주고있다.

 

엿들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워낙에 목소리가 너무 컸다. 심호흡 한번 하고 책을 덮었다. 이 수준들하고는, 한 나라 국민의 목소리의 높낮이가 경제수준에 반비례한다던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이 순간만큼은 남편의 일가견이 지구는 둥글다고 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정의만큼 위대하게 느껴졌다.

진동모드로 해놓은 주머니속 휴대폰이 징~ 하고 진저리를 친다. 택배기사의 전화다. 닷새전에 보낸 택배건에 대한 문의이다.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이게 어느때냐고? 아직도 배송을 안한거냐고? 다른 택배회사 알아볼거라고 역정을 냈다.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듯이 보였던 아줌마가 졸음이 채 안 가신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내 생각보다 소리가 컸던가보다. 나는 “저기, 아주머니, 저는 소리를 지를만한 상황이였거든요.”라는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남을 비난하기에 앞서 나부터 잘해야지. 갖가지 소음들로 떠들썩한 아침 지하철안에서 깨우친 교훈이다.

 

매일 두시간 넘게 출퇴근길에서 보내야 하는 도시인의 삶은 고단하다. 그러나 지하철안에는 힘들고 지친 이야기만 있는것이 아니다. 가끔 가다 랑만도 있다. 임신때 내게 자리를 양보했던 붉은 넥타이 맨 소학생 꼬마도 있었고 무거워보이는 내 가방을 받아주었던 할머니도 계셨고 키가 작은 나에게 손잡이를 양보해주고 짐짓 모른척해주던 멋진 키다리남자도 있었다.

 

다람쥐 채바퀴 도는듯한 내 생활에 지하철은 멍하니 생각을 쉬울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가끔은 일과 육아에 지친 내가 독서를 할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기도 하다.

앞으로 몇십년을 더 지하철을 타야 할지는 모르겠다. 아마 지하철을 안 타도 되는 때는 내 육신이 세월의 년륜을 새기며 저 멀리 황혼의 언덕을 바라보는 시기일것이다.

단지 목적지가 같다는 리유 하나만으로 한 시공간에 던져진채 오감을 공유해야 하는 지하철안은 어쩌면 우리네 삶의 한 축소판이기도 하다.  살과 살을 비비고 체취를 공유하면 또 어떠하리… 이 거대하고도 비좁은 지구 어디인들 우리네 사는 모습이 다 그러하지 않은가.

 

 

랭면 쏘나타

 

북경으로 간 연길 랭면

사무실 동료 선생님들이 자주 찾는 랭면집이 있다고 했다. 그 랭면을 얘기할 때면 저마다 눈가가 촉촉해서는 입을 다시길래 저으기 호기심이 동했다. 랭면의 종가라 불려도 좋을만한 평양랭면, 연변랭면, 계서랭면을 제치고 그 맛이 단연 랭면중 으뜸이라고 하는 선생님도 계셔서 내 호기심에 더욱 불이 붙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무실 뒤자리 동료 선생님이 고맙게도 그 맛을 느끼게 해주시겠다며 나를 데리고 그 식당으로 갔다.

시내뻐스를 타고 흔들흔들, 북경 2환의 고풍스러운 전통적인 옛 거리를 지나, 전혀 랭면집이 있을것 같지 않은 골목에 “화천연길”이라 씌여진 록색 간판이 눈에 띄였다. 낯선 북경의 옛 주택구에서 우리 글을 보니 퍼그나 정겨웠다.

식당으로 들어가니 입이 떡 벌어진다. 빼곡이 놓여진 테이블마다에 사람들로 꽉 찼고 카운터앞에서부터 입구까지 랭면 먹으러 온 손님들이 줄 지어 서있는것이였다.

겨우 자리를 찾아 앉고 간단히 랭면 두그릇에 고향 연변의 랭면집에선 듣도보도 못한 장졸임 비슷하게 생긴 반찬을 주문했다. 음식을 시키고 식당내를 휘휘 둘러보니 그래도 조선족 음식점임을 고집하는 장치들이 곳곳에 보였다. 벽에 걸린 민속풍경화가 그랬고 한족 복무원의 몸에 입혀진 개량한복이 그랬다.

이윽고 랭면이 상에 올랐다. 아, 고향에서 먹었던 랭면도 이랬던가? 북경 왕징에 있는 평양식당의 랭면도 이랬던가? 그래도 랭면이라고 하면 사리를 곱게 틀어서 말간 육수에 댕그랗게 놓고 우에는 엷게 썬 사과나 배, 채 썬 오이, 삶은 닭알 등 고명을 보기 좋게 올려놓은 그런 모습 아니던가?

간장물 같은 거무튀튀한 육수에 면가락은 제멋대로 늘어져있고 또 일부는 그릇벽에 붙어 존재감을 뽐냈으며 투박하게 썰어놓은 사과조각도 미관에 상관없이 육수에 둥둥 떠다니고있었다. 면발은 또 왜 이렇게 굵은지, 좀 과장한다면 아기손가락 굵기만큼한 면발이 랭면임을 한껏 뽐내는듯도 했다.

한가닥 집어 입에 넣었다. 바오라기 같은 면발을 씹으니 밀가루맛이 물씬 풍겨온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육수에서는 진한 간장맛과 고추장맛이 은은히 풍겨오고 육수를 한술 떠서 마셔보니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그 육수맛 또한 텁텁하니 요상하다. 랭면도 온면도 아닌 “미면“(미지근한 면)이라 하면 어떨는지…

 

“선생님은 진심 이 랭면이 맛있습니까?”

참지 못하고 마주앉은 선생님께 물었더니 “나도 처음엔 뭐 이런 랭면이 다 있나 그랬어. 근데 먹을수록 생각나는 맛이야. 맛은 없는데 맛이 있어. 한동안 안 먹으면 그 맛이 생각나고 말이야.” 하고 아리송한 대답을 한다. 거 참, 맛이 없는데 맛있는 맛이란 도대체 어떤 맛이지…

 

너희가 랭면 맛을 알아?

“화천연길”이라는 이 연변음식점은 1943년도에 북경에 섰다고 한다. 리씨 성을 가진 한 조선족 할머니가 몇몇 북경의 젊은이들과 함께 랭면을 해서 팔다가 후에 연길식당으로 이름을 고치고 경영했다고 한다. 오랜 력사를 자랑하는 북경의 연변음식점인셈이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대학입학으로, 취직으로 북경에 온 조선족 젊은이들에겐 어려우나마 고향음식을 맛볼수 있는 귀한 곳이였다고도 한다.

지금처럼 한국음식점들이 많지도 않았을 때고 주머니사정도 여의치 않았던 그들은 삼삼오오 이 가격 착한 랭면집을 찾아 랭면을 먹었을테고 그것으로 향수를 달랬을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타향의 랭면맛에 점차 길들여지다보니 그만 이 랭면을 사랑하게 되였다고 한다.

점차 조선족의 대도시 진출이 용이해지고 또 북경에도 왕징이라는 코리안타운이 형성되면서 민족음식점은 예전처럼 귀한 존재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반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나가 정통 평양랭면을, 연변랭면을 어렵지 않게 맛볼수 있게 되였다. 그러나 직장의 50대, 60대 로선배님들은 아직도 이 집 랭면맛이 최고라고 추켜세우신다.

음식은 맛만으로 먹는게 아닌가보다. 남의 주관적인 느낌을 감히 짐작해보겠다는 주제넘는 생각을 해본다면 그들에게 이 랭면은 추억이고 향수이지 않았을가? 젊은 시절에 대한 추억과 고향에 대한 향수 그 모든것이 이 랭면에 들어있지 않았을가?

북경 생활 8년차인 나는, 결핍의 시대를 겪지도 않았던 나는 아직 모르겠다. 그 맛의 소중함을…

얼마전 조선족이 꾸린 한 위챗계정에서 이 집 랭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조선족의 정통랭면도 아니면서 한족들 입맛에 맞게 변질된 랭면을 갖다가 조선족랭면이라고 하는것은 명백한 사기 행위라는 지적이였다고 한다. 

달리 생각해본다. 한 음식이 그곳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토착화되고 또 그 사람들이 사랑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되였다면 음식의 정통성 여부가 그때에도 중요한것일가?

랭면을 먹기 위해 길다랗게 줄 지어선 사람들을 보며 그런 충동이 일었다. “여러분이 지금 먹으려는 랭면은 오리지널이 아니요. 더 맛있는 우리 민족의 정통랭면을 맛보세요.” 하고 웨치고싶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이 “변질”된 랭면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맛이란 가히 주관적인것이다.

북경 생활 8년차, 내 입맛도 서서히 변하고있다. 두눈 튀여나올 정도로 얼얼하게 매운 음식을 좋아하던 내가, 뒤골이 뗑~ 해지도록 차거운 얼음물을 좋아하던 내가 더 이상 그것들을 안 찾게 되였다.

갓 북경에 왔을 때, 질질 끓는 북경의 여름을 뜨거운 차물을 불어 마시며 견디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고 4년이 지나고 어느새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기게 되였다.

시원한 맛에 마신다는 맥주를 뜨뜨미지근한것으로 마시니 처음에는 입맛이 무척 썼지만 차차 시간이 지나니 구수한 호프의 맛을 더 잘 느낄수 있어 그 맛 또한 새롭다.

10년, 20년, 앞으로 이제 내 입맛은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다. 변해간다는것이, 나를 잃어가는것 같아 저으기 서글퍼지기도 하지만 다시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작업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가슴에 맞혀오기도 한다.

그러나 간장 고추장 육수속에서도 굵은 면발을 자랑하며 랭면의 “정체성”만은 잃지 않으려 했던 이 집 랭면처럼, 북경의 전통 옛 거리에서도 우리 글 간판을 걸고 한족들 몸에 어울리지 않는 한복을 입고서라도 우리 민족 식당임을 애써 지켜보려는 이 음식점처럼 그 무엇인가는 상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변했다면, 그 변한만큼의 차이가 바로 내가 이 타향에 발 붙이고 살기 위해 애썼던 노력의 흔적들이 아닐가 하고 생각한다.

 

 

데지 않을만큼, 춥지 않을만큼…

 

어쩌다가 여러가지 조건들이 맞물려서 한국에서 몇달간 생활할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집이라고 터를 잡고 살아보니 전에 몇번 관광으로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젖어왔다. 말로 다 할수 없는 살가움과 무작정 내 맘을 끄는 감성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퍼그나 정답게 느끼게 해주었다.

아이를 데리고 근처 공원에라도 나가면 공원 벤치에 앉아 한담을 나누시던 아주머니들이 아이가 예쁘다고 말을 걸어주시고 간혹 과자 같은것도 건네주며 친절을 베풀었다.

인간의 탈을 쓴 몇몇 못된 놈들의 아동랍치사건으로 전체적인 사회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어 아이를 밖에 데리고 나가도 필요이상으로 경각심을 높여야 하는 북경과는 딴판이였다.

한국은 “정”의 문화라더니 아니나다를가, 그 따뜻한 “정”에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매일 근처 공원에 나간지 며칠만에 자주 마주치는 한 아주머니랑은 안부도 주고받는 사이가 되였다.

“새댁은 중국서 왔어?”

나의 어눌한 한국말 억양에서 바로 티가 났나보다.

“네. 북경서 왔어요.” 하고 곱게 대답하니 “신랑도 같이 왔어?” 하고 물으시길래 “네. 세 식구 다같이 왔어요.” 하고 대답했다.

“신랑은 어느 직장 다녀?”

한참후, 신랑 직장에 나이까지 줄줄이 고백하는 나를 발견했다.

첩보요원도 아니고 딱히 비밀에 붙일것까지야 없다지만 이런 개인사까지도 말해도 되나싶은 생각이 번쩍 들어 머쓱하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럼, 이만 가볼게요.” 하고 말하고는 어수선하게 그 자리를 떴다.

이튿날부터는 왠지 그 아주머니를 피하고싶어졌다. 콕 집어 말할수 없는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근처 정육점에서 고기를 어쩌다 한번 사게 되였는데 정육점 주인 아저씨 또한 열정적인분이셨다. 그 열성스러움에 처음 간 날 생각에도 없는 삼겹살 두근을 덜컥 사버리고말았다.

그후로 아저씨는 나만 보면 특유의 그 충청도 억양으로 “어디 가슈?” 하며 반갑게 인사를 걸어오고 가끔은 아들애에게 장난감도 쥐여주었다. 그럴 때면 나는 괜히 고기를 사지 않는것에 자책감까지 가지게 되였다. 근처에는 이틀에 한번 집으로 반찬을 배달해주는 열정적인 반찬가게 아주머니도 계셨다.

배달을 오실 때면 아들애 이름을 친절하게 불러주기도 하고 손을 꼬옥 잡아주기도 했다. 세살짜리 아들애가 크레용을 들고 마구 설치면 아이에게 흰종이를 주어 락서를 하게 하라고 조언을 주시기도 하고 아이를 따라다니며 밥을 먹이는건 옳지 못한 육아법이라고 따끔히 지적도 해주셨다. 분명 좋은 말씀들인데 어딘가 불편한 느낌은 아주머니가 다녀가신후에야 스멀스멀 찾아왔다.

그후로는 그 아주머니가 배달을 오신다 하면 괜히 긴장해졌다. 집이 어질러져있지는 않나? 아들애가 오늘은 장난을 많이 치지 말아야 할텐데 하면서 괜한 걱정까지 하게 되였다.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혹시 그분들 나름의 마케팅전략 아닐가? 고기나 반찬을 더 팔려는 그런 전략?” 하고 반문해왔다. 그분들의 따뜻한 진심에 대해선 의심하고싶지 않았다. 그분들은 진심으로 중국에서 온 이 동포 새댁에 관심을 가졌을것이고 천방지축으로 허둥대보이는 어린 새댁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하고싶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런 따뜻함에 조금씩 피로감이 느껴지는건 나도 어쩔수가 없었다.

차번호 하나 따기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운 북경에서 자가용 차가 없는 우리는 외출할 일이 있으면 등씨 성을 가진 한 기사아저씨의 택시를 자주 리용하군 하였다. 수없이 많은 차가운데서 그 기사의 택시만 4년 넘게 리용한데는 나름의 리유가 있었다. 크고작은 일에 4년 넘게 그 차를 리용했지만 등씨 성을 가진 그 아저씨는 한번도 개인사에 대해 물어본적이 없었다.

북경에서 택시를 타보면 우리끼리 하는 얘기를 듣고 기사님들이 곧잘 하는 질문이 있다. “당신들은 어디에서 왔냐?” 하는것이다. 방언도 아닌것 같고 그렇다고 외국사람도 아닌것 같은데 당신들이 하는 말을 자기는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다고 하면서 호기심에 물어올 때가 많다. 조선족이라고 하면 일부 기사들은 알은체를 해오며 “쓰쌘주마?(是鲜族吗?)”라고 하신다. 그냥 무시해버리면 좋으련만 또 틀린걸 보면 지적해줘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에 “선족”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반드시 “조선족”이라 불러야 한다며 꼬치꼬치 지적을 해주고나면 급피곤이 몰려오군 하였다.

그런 번거로움을 여러번 겪다보니 그런 질문따위를 일체 하지 않는 등씨 성을 가진 그 기사아저씨를 유난히 선호하게 되였다. 오래동안 자주 만나다보면 가끔은 옛다, 기분이다 하고 에누리를 해줄법도 한데 등아저씨는 언제나 칼 같았다. 거스름돈 받기가 번거로와 더 드려도 엄격하게 계산해서 돌려주었고 가끔은 좀 깎으려고 해도 언제나 그렇듯이 단호했다.

그 기사아저씨의 신상정보에 대해서는 아는것이 전무했지만(등씨 성을 가졌다는것만 알뿐) 우리는 누구보다 그 아저씨를 신뢰하고있었다.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차거운 등아저씨를…

새삼 한국의 “정”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서로 돕고 상부상조하는 삶속에서 형성된 “정”문화, 그것은 이 힘든 세상을 헤쳐가는데 빛이고 소금이였을것이다. 서로를 걱정해주고 다독여주는 따뜻함. 그런데 나는 왜 그 따뜻함에 데기라도 한듯 몸을 움츠리는것일가?

어린 시절 내가 살던 향진의 작은 마을은 그 시절 다들 그랬듯이 따뜻하고 화기로왔다. 이웃들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함께 나누었고 걱정이 있어도 함께 나눴다. 비 오는 날, 엄마가 만든 오그랑죽을 들고 뒤집 해화언니네 집에 가져가다 엎어져 온몸이 죽범벅이 된채 울음보를 터뜨리던 내 모습도 기억에 선하다.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해 울면서 집에서 뛰쳐나온 새댁을 자기 집에 숨겨주고 그 남편을 찾아가서 화통하게 욕사발을 안겨주던 옆집 아주머니도 계셨다. 그 새댁이 이튿날 바로 남편곁으로 달려가서 그 아주머니를 머쓱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멀리 왕청 춘화라는 곳에서 시집 와서 친정 식구도 하나 없는 타향에서 새댁이 혹시나 서러워하지나 않을가싶어서 아주머니가 나선것이였다…

 요즘 같았으면 주책이라고 손가락질 받고도 남을 일이다.

간섭은 어쩌면 관심의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에는 누구도 그것을 간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고 모든게 조화로왔던것 같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저마다 칸을 치고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놓고 빗장을 닫고 산다. 관심은 자칫하면 간섭으로, 부담으로 여겨지기가 일쑤이다.

이웃간에 따뜻한 떡그릇 오가던 그 옛날의 추억은 추억일뿐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간주되는 현대사회에 불쑥불쑥 예고없이 떡을 들고 이웃집 문을 노크하고 찾아가는것도 어쩌면 비현실적인 일이기때문이다. 서글픈 일이다.

유리벽을 친 각자의 방에서 우리는 먼발치서 서로를 바라보며 외롭지 않으려고, 고립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있는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 외로운 현대인을 구원할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가? 역시나 서로에 대한 따뜻한 관심만이 그 해답이 아닐가? 그렇다면 그 따뜻함의 적정 온도는 몇도쯤 될가? 50도? 60도? 따뜻함을 유지할수 있는 적당한 거리는 얼마나 될가? 데이지 않을만큼, 춥지 않을만큼의 적당한 온도와 거리는 도대체 어느만큼일가?  

어쭙잖게 이 외로운 현대인들을 구원하고싶은 돈끼호떼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서로의 온기를 따뜻하게 나누기에 가장 적당한 랭정과 열정사이의 그 어느 지점을 찾아 돈끼호떼의 마음으로 갑옷 입고 투구 쓰고 나서볼가싶다. 나랑 동행할 사람 게 누구 없소?  나지막이 지기들을 입속으로 불러본다.

출처:<장백산>2017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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