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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산》문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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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필끝에 건곤세상 있나니(칼럼, 련재끝)
2019년 07월 17일 10시 06분  조회:485  추천:1  작성자: 문학닷컴

필끝에 건곤세상 있나니(련재)

김혁

 

마른 붓, 적실 먹이 없소이다

-원고료의 인상

 

대회 기간 개막식과 작가협회 장정 심의, 위원 선발 등 정례적인 일정 외에 거의 모든 시간은 분조토론으로 이어졌다. 

분조토론 기간 가장 도마에 오른 문제의 하나는 바로 작가들의 원고료 문제였다. 

원고료의 상향조절에 대해 대표들은 앙분한 모습으로 열변을 토했는데 그 와중에 절강의 모 잡지사 녀주필의 발언은 그야말로 메가톤급이였고 우리는 그만 ‘경성에 온 촌닭’ 격으로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새해부터 우리 잡지에서는 고료를 매 천자에 1,000원 표준으로 올리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강건너 꽃’과 같은 그 경상과 바닥에서 굼닐고 있는 우리들의 고료 표준을 비해보며 조선족 대표들은 그만 씁쓰름한 미소를 머금을 수 밖에 없었다. 

원고료 문제에 대한 열규(热叫)는 작금의 일이 아니다. 대표들의 열띤 토의에 귀를 기울이며 다시 한번 우리 문단에서는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원고료 문제에 대해 환기해보았다. 

 

옛적부터 청고함으로 무장한 문인들은 돈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그래서 원고료라는 말도 제 입으로 번지기 싫어 ‘그것’이라고 두리뭉실하게 불렀다. 그러다 자못 아치(雅致)한 이름인 ‘윤필(润笔)’이라 바꾸어 지칭했다. 

‘윤필’이라는 말은 맨 처음 《수서권삼십팔·정역전(隋书卷三十八·郑译传)》에서 연유되여 나왔다. 

어느 한번, 수나라의 수문 황제가 천하의 문장가 고영더러 조서를 지으라고 불러들이였다. 하지만 고영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러면서 찾아온 궁중사자에게 “소생은 필이 말랐소이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조서를 지어 먹을 살 돈냥도 안되는데 어찌 필을 적시겠나이까?” 하고 덧붙여 말했다고 한다. 그때로부터 원고료를 가리켜 필을 적신다는 뜻에서 ‘윤필’이라고 이름해 불렀다고 한다. 

남송시대의 학문을 집대성한 경전고서인 《용재수필(容斋随笔)》에서 “윤필은 진나라 때부터 있었고 당나라 때 흥성했다. 문장을 지어주면 인사를 받았다.”고 적고 있는데 원고료 제도가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찌되여 자고로부터 글 읽는 사람은 가난하기만 했다. 청고를 품덕으로 알았던 문인들은 체념하고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가난하면 정신이 맑고 뷰유하면 정신이 혼탁하다고 생각했다. 령혼에 살이 붙으면 필이 둔감해지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선비란 무릇 가난한 법이니 가난이 곁에 있음을 근심하지 말라”고 서로를 이르기도 했다.  

글쟁이들의 형편이 곤궁한 것은 어제오늘의 흥감스러운 문제가 아니였다. 

조선시대 시인들의 작품을 집대성한 《풍요속선(风谣续选)》을 보면 이런 발문으로 시작된다.  

  “아! 이 《풍요속선》에 이름이 나란히 렬거된 사람이 삼백여명이나 되고 시가 칠백여수가 되지만 불우함을 슬퍼하고 의식을 걱정하는 사람이 거의 삼분의 이가 되니 선비가 글을 잘하면 곤궁하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처지가 곤궁한 뒤라야 글을 잘하게 되는 것인가?”

비탄(悲叹)으로 가득한 이 발문에서 시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에도 문인으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돌아보면 근, 현대에 이르러서도 수두룩한 천재문인들이 가난에 숨통을 옥죄이며 살아갔고 가난을 못이겨 스러져갔다.  

가까이 전례를 봐도 지난 30년대 연변 일대에서 활동했던 프로레타리아문학의 대표인물인 최서해, 강경애도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난한 나머지 최서해는 일습을 개비하지 못하여 여름에도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다녔고 강경애는 경성을 놀래운 유명한 녀문인이라지만 내내 빠진 앞이발도 해넣지 못하고 처량한 웃음을 남겼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문학사의 한획을 그은 문호들임에도 ‘체험문학’, ‘빈궁문학(贫穷文学)’이라는 새로운 문체의 대표자로 각인되기도 한다. 

그렇게 이들에게서 글은 리상이였지만 막상 먹고 입고 자는 것은 현실이였다. 

최서해, 강경애가 전설로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글만 쓰며 살아가기란 여전히 어렵다. 누구나 한번 쯤은 시인과 작가를 꿈꾸지만 글은 밥이 될 수 없음은 여전히 엄혹한 어제이자 현실이다.

오늘날에도 문학은 살아나가는 실용적인 방편이 돼주지 못한다. 꿈이 아무리 아름답다 손 쳐도 현실의 밥과는 달리 먹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문인들은 글로는 앞장서 달리며 세상을 향해 ‘사자후’를 내지르지만 현실에서는 생존의 대렬에서 뒤처져 그저 끼리들이 고담준론을 소곤거릴 뿐이다.  

글품을 파는 사람들 치고 누구나 한번 쯤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개탄을 뿜어봤을 것이다. 글의 갈피에도 적어봤을 것이다. 

조선족 문인들은 작가협회에 회원으로 등록된 이만 해도 전국에 600여명은 더 된다. 여기에 협회에 가입하지 않고 문필생활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아 인구비례수로 말하면 조선족 문인수는 여타 민족에 비해 월등하게 많은 편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글만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문인은 한손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도 없다. 아예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원고료 수입만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작가는 전무, 0%라는 랭혹한 수치다. 

제도적 혜택도 있고 기업가들의 간혹 되는 지원이 있다고 하나 그것은 ‘덴 손에 침 바르기’요, 추위에 들썩이는 헌옷을 림시로 꿰매기로 미봉책(弥缝策)이다. 

우리 말로 된 월간,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간행물은 수십종이 넘는다. 순 문학지만 해도 4종이나 된다. 

하지만 원고료는 일률적으로 낮다.

어섯눈 금방 뜬 신인이건 수십년 필밭에서 등허리 휜 원로건 구분 없이 낮다. 

가난한 잡지사에 가난한 작가들 뿐인 우리들의 엄연한 현실이다. 

일개 문인으로서 글은 쓰되 원고료는 받지 않아도, 적게 받아도 괜찮다고 말했던 사람도 있었다. 글에 열성을 보이는 신진들은 원고료를 별로 못 받아도 흔쾌히 작품을 기고한다. 글 쓰는 일에 마음을 앗겨, 자신의 작품을 빛 보이기 위해 보수 먼저 글을 내미는 신출내기 작가들의 심정을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붓대에 기대여 이슬만 먹고 살려는 그런 선비는 과연 몇이나 될가!

글을 쓴 대가로 원고료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것을 말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처럼 되고 있으니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원고료 문제를 의안에 올린 지 어림 30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 문인들은, 우리 문학은 절규하고 있다.  

우리 말 간행물들에서는 전대미문의 동란이 결속되고 문인들이 옥죄인 질곡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필을 달리던 1970년대 말께부터 문학원고료를 지불하기 시작했다. 당시 1,000자 당 원고료가 5원 좌우였다. 그때의 평균로임 수준 40원을 참조하면 표준이 엄청 높은 편이였다. 

필자의 경우 1985년에 발표한 처녀작 단편소설 <피그미의>이 75원의 고료를 받았다. 지금도 보풀이 일어 나달나달해진 당시의 원고지를 간직하고 있는데 자수가 1만 8,000자 가량이였다. 

당시 스팀관과 하수도 덮개를 만드는 룡정 주물공장의 용광로 앞에서 위험과 로역(劳役)을 감수하며 일했던 필자의 급여가 한달에 겨우 30원 정도였다. 그에 비하니 필대 하나로 벌어들인 원고료가 금맥이라도 만난 듯 일확천금 같은 액수였다.

그 원고료로 난생처음 양복을 맞추어 입었고 편집선생들을 근사한 식당에 청하고도 30원 가량, 내 한달 급여 만큼의 액수가 남았다. 당시 열아홉살 신출내기였던 나는 처녀작의 발표로 인한 기쁨보다는 굉장한 액수의 원고료에 당혹스러워 두 눈을 호동그랗게 치떴던 기억이 남아있다. 

당시 젊은이들이라면 거개가 문학애호가로 자처했다. 종합지는 물론 문학지의 말미에 어김없이 등장했던 혼인구애광고에 ‘문학을 애호함’이라는 조건을 현요한 위치에 적었는데 그것은 요즘의 ‘집과 차가 있음’이라는 홍보물보다 더 강력한 유혹이였다. 따라서 문학지는 문전성시요, 잡지의 발행부수도 천정부지로 높뛰였다. 《천지》와 같은 주요 문학지는 8만부라는 전무후무의 발행 진기록까지 남겼다. 

문학에 몰부어진 광휘는 단 그때 뿐이였다. 90년대 이후, 문학과 문인들의 처지와 위상은 추락을 거듭했다. 당년에 문단의 상아탑 우에서 광택이 빤드르르했던 우리의 문필가들은 현실의 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그에 따라 우리의 원고료도 볼썽사납게도 성장판이 닫힌 주유(侏儒) 꼴이 되고 말았다.

우리 사회는 산업화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생산과 효률을 무엇보다 우에 놓고 최고의 가치로 떠받드는 시대를 향해 흘러갔다. 오로지 공명과 리욕에만 사팔뜨기가 된 근시안의 시대에, 문화도 수익산업으로 인정받아야 살아남는 시대에 문인들이 표방하는 순 문학주의는 무용한 열정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얻은 것은 높은 효률이였지만 잃은 것은 문학과 예술이였다. 

이러한 풍토에서 문인들에게 부여되는 보수는 ‘붓을 적실’ 량도 못되였다. 문학도 돈이 돼야 살아남는 시대, 문인들에게는 쥐꼬리 만한 원고료라는 것이 늘 마음에 차지 않았다.

1999년 <국가출판문자작품수당규정>에서 제정한 원작, 개편과 번역 작품의 표준은 1,000자당 원고료가 각기 30-100원, 10-50원, 20-80원이였다. 하지만 그것도 중국 문단, 내지의 문단의 표준이고 조선족 문단의 표준은 이 규정에서 가장 하위인 30원에 머물렀고 간혹 조금 웃도는 표준이였다. 그 표준을 우리는 내내 정량(定量)으로 알고 잡지사들에서는 게면쩍게 고수해왔고 작가들은 온곱게 받아들였다. 

이제는 근 20년도 되는 때에 제정한 기본 원고료 표준으로 현재의 수입수준, 소비가격지수 및 물가 상승폭도를 감안해 따져보면 이는 현실과 엄중하게 탈절되여 간극 나아가 괴리를 초래했다. 따라서 문학작품의 응분의 가치를 제대로 구현할 수 없게 되였다.

게다가 일부 잡지사들에서는 이런 낮은 표준마저 리행하지 못했거나 아예 체불까지 하는 현상도 적지 않았다. 필자의 경우 과거 받지 못한 원고료가 정작 따지고 들면 예상 외로 많다. 하지만 문학에 옹근 생을 기약한 사람으로서 큰소리로 채문하지도 못하고 그저 벙어리 랭가슴 앓듯했을 뿐, 이제는 꿩 구워먹은 소식이 되였을 뿐이다. ‘돈을 꾼 자는 기억 못하지만 꾸어준 자는 기억’하는 꼴이 된 것이다. 나처럼 이렇게 랭가슴을 앓아본 이들이 우리 문인들중에 한두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내내 정열을 삭이지 않고 비 내리지 않는 척박한 땅에 필 보습을 대고 문학이라는 사래 긴 밭을 그악스럽게 갈고 두엄 주고 씨 뿌리고 풀 잡고 하며 부지런을 떠는 우리 작가들이야말로 경의로움의 대상이 아닌가! 

작가들의 뜨거운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낮은 원고료의 ‘방자’함은 창작대오를 위축시키고 정품창작을 정체시키고 문학후비군의 단절을 초래하는 ‘도미노 효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체념에 빠진 우리 작가들은 그 진동도 괴멸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초미(焦眉)의 형국이다. 

2013년 9월 국가지적재산권국은 드디여 <문자작품사용지불수당방법>을 발포해 원고료 표준 및 판권세률을 높였다.

희보에 의하면 원작 작품의 원고료 표준은 매 1,000자 당 100-500원, 개편, 번역 작품은1,000자 당 각기 30-150원, 80-300원이였다. 

“에헤야, 원고료가 세배, 네배 껑충 뛰여올랐네.”라며 문단은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 희열은 또다시 남의 몫, ‘강건너 꽃’이였다. 기타 소수민족들 신강, 서장, 내몽골, 청해 등 지역의 원고료는 130-300원으로 새로운 표준에 보조를 맞추었다. 하지만 왜서인지 우리 조선족 문단만은 잠잠했다. 그냥 18년 전의 원고료 표준이 시행되였다. 도저히 생활의 방편으로 못되는 ‘조족지혈(鸟足之血)’ 즉 ‘새발의 피’ 같은 얄팍한 원고료를 우리 작가들은 무가내로 그를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잡지사가 좋은 원고를 기고한 작가에게 높은 원고료를 주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지극히 당연한 이 일이 오래동안 외면되고 정례화처럼 받아들여진 현실이 참담했다. 

따라서 존립하고 있는 문학지 모두가 원고료 발부에 대해 오래동안 고심해왔다. 우리 말 기본 원고료 지불 표준을 장기간 매우 낮게 책정한 탓으로 잡지사들도 난감함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열성을 다하는 작가들에게는 내내 미안쩍은 마음들이다. 작품을 게재해준 것만 해도 시혜를 베푼 것으로 착각하고 목에 힘을 주는 잡지사나 편집자들이 요즘 들어 찾아볼 수 없게 되였다. 주눅이 들어 조심스럽게 작가들에게 원고 청탁하는 그들의 심경은 착잡할 것이고 로고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조선족 작가들의 최악의 원고료 문제는 인민대표대회, 정협회의에도 상정되였던 현안이였다. 우리의 작가들은 수차 정협회의에 <길림성>을 내놓았고 “정부에서 시대발전에 따른 원고료 표준을 제정해 소수민족 문학 발전을 추진하기를 바란다”는 제안을 수차 간했다.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의 지론에 따르면 《연변문학》, 《도라지》, 《장백산》 등 대표적인 주류 문학지가 일년에 지불하는 원고료가 모두 합쳐 20만 좌우라고 한다. 거기에 《송화강》, 《연변일보》 ‘해란강’문학부간을 비롯하여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료녕신문》 문예부간들의 원고료를 모두 합쳐도 30만원에 못미치는 액수이다. 

“요즘 개인집들에서 갖출 수 있는 자가용 한대 값 정도인데 한두 사람도 아니고 전반 문단을 아우른다고 할 때 이만한 액수조차 해결할 방법이 없냐”고 최국철 주석은 안타까움과 개탄을 내비쳤다. 

순 문학의 성질로 볼 때 무작정 시장경제에 투신해서 그 사명을 완수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우리의 지도간부들이 소외된 문인들의 신음에 귀 기울이고 조선족 언어문자 신문, 출판, 방송에 중시를 돌려 ‘문학의 배고픔’을 덜어줘야 한다. 문인들의 사기진작과 창작의욕을 고취시키는 기본적인 원고료 문제부터 해결하여 우리의 문인들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문학의 꽃을 더 화려하게 오래도록 피울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 더 많은 이들의 관심과 성원과 배려가 있기를 오늘도 주문해본다. 

 

반가웁게도 작가대표대회가 끝난 지 두달도 못되여 랑보(朗报)가 들려왔다. 

60년 경륜을 자랑하는 우리 말 문학지 《연변문학》이 참으로 오랜만에 원고료를 상향조절한 것이다. 새로 출두한 연변작가협회 지도부가 더 직접적으로 문인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지원제도를 만들고저 고심을 거듭하고 파워 있게 진척한 기꺼운 결과이다. 

새해 첫기 톱자리에 소설과 칼럼을 발표했던 필자는 행운스럽게도 수십년 동안의 불문률을 깬 문단희사의 첫 수혜자로 되였다. 평소보다 3배나 더 높은 원고료를 받아드니 첫 원고료를 받아들고 가슴 높뛰던 문학도 시절 때처럼 문학의 의미와 작가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새로웁게 가져보았다. 

비록 원고료가 조금 인상은 되였지만 아직 한곳의 문학지 뿐이고 중국 문단이나 타민족 문단에 비하면 우리의 원고료는 아직도 턱없이 적은 액수이다. 그 인상은 미흡하지만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한 긍정적인 발상이요 바람직한 과정이라고 문단은 일단 갈채를 보내고 있다. 

차거움을 밀어내는 훈풍과 더불어 우리의 작가, 편집들이 고개를 쳐든 원고료와 함께 더 높은 곳을 지향해야 함이 제기되고 있다. 

작가대표대회 기간 어느 한 대표가 원고료를 두고 한 생동한 지론을 인용해본다.

“원고료 인상은 중국 축구와 마찬가집니다. 높은 보수로 주가가 높은 선수를 들여왔다면 단기간 슛하는 수자는 늘 테지요. 하지만 장원한 관점에서 보면 이는 중국 축구의 발전에 그닥 큰 작용을 놀 수는 없을 겁니다. 현저한 본질의 제고를 가져오기 어려워요. 문제는 전반 팀의 기술의 높이와 더불어 축구시장 기제의 원숙함과 수준 높은 팬들의 부응이 따라가야 하니깐요.”

원고료의 인상이 문학의 생존현황을 당장에 개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우리의 작가들이 더욱더 필을 진중하게 들고 우리의 문학지들이 정품으로 꾸며져야 날로 높아가는 독자들의 맛망울과 시장의 수요에 부응할 수 있고 잡지가 생존할 수 있으며 작가들의 높은 원고료 또한 장기적인 보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대표대회 기간 예언을 보였듯이 올 들어 중국 문단에서는 기본 원고료 표준이 또 한번 큰 폭으로 껑충 상향될 전망이다. 중국의 주요 매체들이 <고료가>라는 표제로 사설을 발표, 이 한 변화에 긍정을 표했다. 

원고료를 올리는 것은 이미 문단의 대세로 대두하였다. 아무리 시장경제가 선점하고 있는 현실이라 해도 문학에 대한 요구와 소비는 계속될 것이다. 때문에 원고료의 인상은 문인들을 위무해주고 격려해주는 ‘청심환’이며 문화에 대한 존중의 후례厚礼가 아닐 수 없다. 

분조토론이 끝난 후의 오찬시간, 호텔 식탁에서 강소의 작가 소동과 마주쳤다. 지난 1997년 석가장에서 열린 전국청년작가창작회의에서 유일 조선족 대표로 참가한 나와 소동은 회의 기간 내내 이웃좌석이였다. 

장예모의 영화 《붉은 등롱 높이 걸렸네》의 원작 소설 작가로 널리 알려진 소동은 나보다 두살 손우였지만 막언, 여화, 필비우와 더불어 전국에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었다. 그때 소동이 원고료 문제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들은 적 있다. 당시 소동은 《신 란세가인》이라는 텔레비죤드라마의 씨나리오를 역시 문명이 하늘로 치솟아있던 왕삭과 함께 기획, 창작한다고 했다. 그때 소동이 원고료를 한회 당 30만원씩 받는다고 곁에서 소곤거렸다. 그 후 《신 란세가인》은 전국의 여러 텔레비죤 채널에서 방영되며 브라운관을 달구었다. 향항의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드라마는 저그만치 33부의 장편드라마였다. 그러면 그 원고비는? 나는 그만 아득함에 부지중 짧은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그런 문인, 그런 풍토가 부러웠다. 

20년 전의 치기로 얼룩졌던 생각이 오늘날 문단 정상의 자리에 오른 소동을 다시 만나는 순간 또 한번 떠올라 나는 감회의 미소로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조선족 문단도 지금 ‘가장 낮은 원고료’라는 불명예와 불문률의 봉인을 뜯어젖혔고 작가들은 의욕을 보이며 소명에 답하는 마음으로 ‘소매를 걷고’ 있다. 

바야흐로 높은 원고료를 지급하는 문학지가 더 많이 생겨나 문인들의 자긍심과 용기를 심어주었으면 한다. 앞으로는 원고료 지급 경쟁이 일었으면 하는 욕심 아닌 바람을 가져본다. 이제 원고료를 주며말며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주느냐에 따라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마른 붓을 적시고 얼마나 당찬 작품을 내놓느냐로 경쟁의 구도와 내용이 바뀔 터이니 말이다.

이런 ‘우후개화(雨后开花)’의 날이 우리 문단에 하루빨리 정착되기를 기대해본다. 

(련재끝)

출처:<장백산>2017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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