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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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선 기행
2011년 11월 17일 10시 50분  조회:2428  추천:0  작성자: 안병렬

  이렇게 이름을 붙이니 숭선이 어디 유명한 곳인 줄 알겠으나 실은 연변자치주 안에 있는 화룡시의 조그만 진이다. “향(鄕)”이다, “진(鎭)”이다 하는 것은 한국 농촌의 최하위 행정단위인 “면(面)”에 해당되는데 그래도 향보다는 진이 조금 더 큰 곳을 일컫는다. 그래서 어떤 진은 한국의 읍 정도에 이르는 곳도 있지만 숭선진은 말만 진일 뿐 향 정도에 미치기에도 부족한 자그마한 곳이다. 하지만 백두산 바로 밑이라 관광객도 더러 들르고 북한과의 다리가 있고 세관이 있어 전에는 제법 사람이 많이 들끓었으나 요즘엔 백두산 길이 안도로 포장이 되고 또 북한과의 교역도 신통치 않은지 사람이 영 적어졌다. 거기에다 어느 농촌이나 마찬가지로 이농현상이 두드러지니 더욱 인구가 적어졌다. 
 

  이 작은 농촌을 그래도 찾고자함은 그곳의 경관도 볼만하지만 북한의 체취를 느낄 수 있어 늘 연민의 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곳에 사는 “강집사”이란 분이 개를 길러 그 개들로 멧돼지를 잡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흥미가 동하여 얼마 전 잠깐 그 댁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 “깊은 산골짝에 외딴 집”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푹 안기어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날은 일정이 바빠 곧장 되돌아 와야만 하였다. 그래 다시 한번 더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국경절 연후에 가기로 하였다.
 

  게다가 이번엔 그곳 교회에도 볼 일이 있었다.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 전번에 우리 몇 사람이 왔을 때 교회의 기막힌 이야기를 그곳 전도사님으로부터 들었던 것이다. 교인이 줄고 줄어 끝내 문을 닫았는데 몇 달 전 자기가 불려 와서 문을 다시 열기는 하였으나 아직 어렵다는 것이다. 자기도 이미 70이 넘은 몸이라 힘도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양회에서 많이 도와준다고 고마워하였다. 양회란 중국의 독특한 기관으로 쉽게 말하면 정부와 교회의 연합모임인 것이다. 교회와 관련된 행정적인 문제는 대개 이 양회를 통하여 처리하는 것이다. 이 양회에서 이 교회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날아간 지붕도 이어주었다는 것이다. 아마 북한과 인접한 지역이라 정부에서도 신경을 쓰는가 보았다. 하긴 그럴 것 같았다. 교회의 간판을 보고 지금도 더러 그곳 사람들이 찾아온다니 정부에서도 의식을 하였으리라. 그러나 교회가 어찌 정부의 도움으로 연명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하든 이 교회 자체가 자립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교회를 살려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북한과의 지리적 여건도 있지만 그보다 이 숭선진 소재지에 그래도 교회는 하나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옛날엔 50명이 넘게 모였다니 지금도 열심히 하면 그 흩어졌던 사람도 모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강집사 같은 신실한 분도 있으니 반드시 일어서리란 믿음이 갔던 것이다. 그래 어떻게 좀 도우는 방법을 찾자고 의논을 하였는데 마침 어느 분의 주선으로 미약하나마 그 길이 조금 열리었으므로 이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엔 연변에 사는 우리 한국인 기우회(棋友會)에서 가기로 하였다. 기우회라야 이름 뿐 그저 우리 노인들 5, 6명이 모여 장기나 바둑을 두며 노는 모임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 모여 즐기고 있다. 이 모임에서 이번 국경절엔 그곳 강집사 집으로 가기로 하였다. 우리가 간다니 이곳에서 바둑학원을 하는 원장과 사범도 같이 가자고 하여 국경절 날 10월 1일 점심 먹고 바로 출발하기로 하였다. 그 전에 갔을 때 언제든 오시면 된다고 하기에 그런 줄 알고 연락을 하였더니 웬걸 바로 그 이튿날 오전에 연길에서 친척의 결혼식이 있어 자기는 연길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없어도 괜찮으니 숭선교회에 와서 자면 된다는 것이다. 이미 받아놓은 날인데다 또 강집사가 있다고 해도 어차피 이튿날은 일요일이요 또 교회에 볼 일도 있어 가야 하므로 좀 아쉽지만 그냥 가기로 하였다. 애초 10명이 가기로 되었는데 두 분이 빠져 8명이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오후 1시 정각 출발하였다.
 

  화룡까지야 더러 다니던 길이라 별 볼 거리가 없지만 화룡을 지나서 선경대 쪽으로 접어드니 벌써 단풍이 조금씩 들어 울긋불긋 볼만한데 오른 쪽으로 꺾어 산속 지름길로 접어드니 참으로 볼만하였다. 머루, 다래 칡덩굴로 깊은 산의 정취를 더하는데 또 나무엔 다람쥐가 기어오르고 그 위로는 꿩이 날고 -------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그 울퉁불퉁 산길을 피곤한 줄 모르고 탄성을 지르며 갔다.
 

  4시가 가까워서 그 강집사 집에 도착하였다. 주인은 없지만 그래도 한번 들르자며 갔다. 바로 길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웬 일? 강집사가 있었다. 어쩐 일이냐 하니 연길 나가려다 큰 길에서 추돌사고가 나 지금 보험사에서 오기로 하였기에 기다린다는 것이다. 조그만 접촉사고요 또 자기도 상대방도 다 보험에 가입되어 있어 조금 시간이 걸릴 뿐 별 일이 없다며 웃는다. 그 도량에 속으로 감탄이 나왔다. 하기야 그만한 배짱이 있기에 여자의 몸으로 이 깊은 산골에 살면서 사냥을 하는 게 아닐까? 남편이 살았을 때 하던 일이라 그대로 할 뿐이라고는 하나 그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과연 많은 사람이 일컫듯 여장부라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우리더러 자기가 없어 죄송하긴 하나 교회에서 잘 대접할 것이니 잘 쉬시다 가시란다.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젠 겨우 10여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과연 큰 길에 나서니 차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한 대는 바로 강집사의 차라고 하였다. 두 차가 다 조금씩 망가져 있었다. 큰 길에서 바로 건너다보이는 곳이 북한이라니 처음 오시는 분들은 놀란다. 
 

  4시 반이나 되어 교회에 도착하였다. 흔히 농촌에서 보는 조그만 교회이다. 건물을 가로질러 예배실과 사택으로 쓰는 그런 구조다. 70세가 넘은 여전도사님과 몇 여집사님들이 따뜻이 맞아 주신다. 기다리고 있었다며 말대로 벌써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은 널찍한데 또 뜨끈하였다. 아주 좋았다. 준비하여간 개고기와 닭을 내어놓으려니 닭을 몇 마리 잡았으니 내어놓지 말란다. 강집사의 사정 때문에 차질이 생겨 미리 연락이 부족한 탓이었다. 연락이 되었더라면 고기는 우리가 장만하여 간다고 할 걸 약한 교회에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이미 다 지난 일. 미안하지만 얻어먹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곧 장기 바둑판을 벌이었다. 그 성질상 바둑은 조용하지만 장기는 언제나 떠들썩하였다. 나는 속으로 저 순진하신 여자분들이 교회 사택에서 이렇게 노는 우리를 어떻게 볼까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푹 터놓고 놀기 위해 왔는데 말릴 수는 없는 터, 그냥 웃으며 같이 즐기었다. 조금 지나 저녁이 차려졌다. 닭고기를 잘 삶아 맛이 있었다. 하기야 그 시간엔 무엇인들 맛이 없으랴? 저녁을 먹고 나니 잠자리를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묻는다. 저기 민박집에 방을 하나 더 잡아 두었는데 두 곳에 분산하여 주무시면 좋겠는데 어떨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방에서 모두 함께 자는 게 좋다고 하였다. 그래야 같이 놀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방도 넓어 10명 정도는 충분히 잘 수 있었다.
 

  다시 바둑, 장기판이 벌어졌다. 한쪽에선 바둑, 한 쪽에선 장기. 방은 뜨뜻하고 이부자리는 충분하고 또 거기에다 떡이랑 간식도 많고 모든 게 잘 갖추어졌다. 여전히 떠들썩한 가운데 밤은 깊어갔다. 노는 사람은 놀고 자는 사람은 자고 ----- 즐거운 밤이었다. 이 흥겨움을 위해 온 것이다.
 

  10시가 조금 지나서인가? 화장실을 가려고 밖으로 나왔다. 무심결에 쳐다보는 하늘엔 어찌 그리도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지. 옛날 내 아주 어렸을 때 보던 바로 그 별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건너 북한 어디에선가는 개 짖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였다. 물론 착각이긴 하지만 꼭 그럴 것 같았다. 그 안온함, 그 포근함, 그 정적, ----  바로 옛날의 그곳 고향이었다. 어디선가 마실갔던 머슴이 길가 담장에 오줌을 갈기며 서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저 건너에서 누군가 금방 놀러올 것 같기도 하였다. 사실 옛날엔 밤에 제사 지내러 강 건너 오고 가고 하였다는데 이젠 국경이라 철통같이 막아 두니 도대체 정치라는 게 인간을 구속시키는 요물이 아니던가? 북쪽을 바라보는 마음은 더없이 답답하기만 하였다.
 

  며칠 전 강집사가 하더라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잠깐 나갔다 왔더니 웬 낯선 청년들이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기에 누구냐고 하였더니 배가 고파 부엌에 있는 밥을 맛있게 먹고 그냥 가려니 미안하여 인사나 하고 가려고 이렇게 기다린다고 하며 미안해하였다. 그러나 진짜로 미안한 건 강집사이었다. 그 밥은 개에게 주려던 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차마 못하였다. 그저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고 한다. 그 배고픔, 과연 누구의 죄이던가? 생각할수록 가슴만 답답하다. 머리를 흔들며 방으로 들어왔다.       

  대개들 눕고 두 분만 장기를 이젠 조용히 두고 있었다. 자는 사람을 의식해서이리라. 그 옆엔 1원짜리 지폐가 여남은 장 넘게 쌓여 있었다. 지는 사람이 내는 벌금이다. 내기를 하지 않고 그냥 두면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라 재미가 없으므로 지는 사람은 1원을 벌금으로 내기로 한 것이다. 이 1원도 몇 달이 모이니 제법 돈이 되어 지난달인가 모두 모였을 때 그 벌금 통을 비우니 74원인가 나왔다. 그 전통(?)을 이곳까지 와서도 이어가는 것이다. 웃음이 나왔다.  조금 구경하다 말고 어느 새 잠이 들었던가? 눈을 뜨니 새벽이었다. 시계를 보니 6시가 다 되었다. 부지런한 분들은 벌써 두만강에 가서 세수를 하고 왔다. 또 극진한 분들은 예배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나는 부엌에서 겨우 토끼 세수를 하고 들어왔다. 들어와서는 곧 장기를 두었다. 어제는 바둑을 두느라 장기를 한 판도 못 둔 것이다. 곧 여러 사람이 달라붙었다. 동네 장기가 되는 것이다. 두어 판 두었을까? 7시부터 예배를 드린단다. 일찍 드리고 가을걷이 하러 간단다. 이곳 대개의 농촌교회들이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장기를 거두고 모두들 예배당으로 갔다. 벌써 몇 분은 미리 가서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르고 있었다. 새벽기도회에 나가던 습관이 그대로 이어지는 듯 보였다. 나 같은 잠꾸러기에게는 참으로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꿇어앉으니 나도 모르게 자꾸 한숨이 나왔다. 이 교회의 어려운 형편이며 강 건너 북한 백성들의 사정들이 자꾸 떠올라서이다. 그런데 예배를 시작하기 전 전도사님이 날더러 설교를 하시란다. 아니 못한다고 어제 저녁에 말씀 드리지 않았느냐고 하니 도리어 어제 저녁에 하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한다. 다 같은 우리말을 사용하면서도 이렇게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중국 종교법이 허용하지 않은 설교를 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그대로 지켜오는 터라 어제 저녁에 부탁하는 것도 분명 못한다고 하고 정녕 내 말 듣기를 원한다면 예배 후에 이야기나 한 자리 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들었던가? 내가 이야기하듯 설교를 하겠다고 하였단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분명히 들으시라며 “나는 법이 금하는 것은 못합니다.”고 잘라 거절하였다. 매정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말려들면 안 되겠기에 단호히 자른 것이다.
 

  7시 정각이 되니 여집사님이 찬송을 인도하신다. 그런데 음향기계에서 나오는 찬송가의 소리가 어찌나 큰지 나에겐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그리고 거기 맞추어 부르기도 그리 쉽지를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찬송가를 30분이나 부르다 정작 7시 30분이나 되어서야 정식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참으로 눈물겨웠다. 우리 일행 외에는  할머니 세 분과 여집사 두 분, 그리고 전도사님뿐이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은 미국에서 전도사님께 다니러 온 분이고 또 찬송을 인도하는 여집사는 다른 교회에서 봉사하러 오신 분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순수 이곳 교인은 단 3명뿐이었다. 멀리서 오시는 할머니 두 분과 여집사 한 분뿐인 것이다. 남자는 한 분도 없었다. 물론 강집사도 빠지고 또 농번기라 못 온 교인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게 몇 명이나 되랴? 더러 약한 교회를 보기는 하였지만 이렇게 약한 교회는 처음 보는 것이다. 그러니 벌써 옛날이 되었지만 1999년인가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교수들이 봄 소풍을 이곳으로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도 그곳의 교수라 따라왔다가 여기에도 교회가 있다기에 찾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교인이 5~60명 된다고 하였다. 그렇던 교회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눈물이 나오려 하였다.
 

  전도사님의 설교는 지루하였다. 무엇보다 어떻게나 추운지 무릎이 시리고 다리가 떨려왔다. 그래 더욱 지루하게 느껴졌다. 8시 반이 가까워서야 끝이 났다. 부리나케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추위는 나 혼자만 타는 듯 호들갑을 떠는데 다른 분들은 다 태연하였다. 나는 방에 들어와서도 구들목에 앉아 한 참을 지나서야 겨우 안정을 찾았다.
 

  방에는 이미 밥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제의 닭으로 닭죽을 끓였다. 거기에 떡도 있어 맛있게 먹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아침을 먹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거지도 채 마치기 전에 전도사님은 날더러 이야기를 하란다. 나는 약속대로 이야기 한 자리를 하기로 하였다. 한국 6,25 사변 전후의 가난하고 암울하였던 시절, 어느 농촌 한 여인의 한 많은 삶의 이야기를 하였다. 지주에게 당한 원한이 너무도 커 아들 이름을 “복수”라고 짓고 그 한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였다. 모두들 둘러 앉아 귀기우려 들었다. 그 시절의 삶은 지금 이곳 농촌에서도 비슷하게 겪은 삶이라 호소력이 있었다. 약 30분가량 하였을까? 이야기는 끝이 났다. 많은 분들이 진지하게 반추하는 듯하였다.
 

  이야기가 끝나니 자연 일정에 대한 말이 나왔다. 여기 더 있으면 폐만 더 끼칠 것 같고 또 강집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는 너무 시간이 많이 남았던 것이다. 그래 그만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애초 가급적 이틀을 자고 간다던 계획을 완전히 앞당긴 것이다. 우리는 감사의 인사와 약간의 사례를 드리고 그리고 교회를 돕는 정성도 함께 드리고 곧 출발하였다. 이번엔 좀 두르더라도 좋은 길로 가기로 하였다. 두만강을 끼고 남평까지 가서 선경대 쪽으로 꺾어 화룡으로 가는 길이다.
 

  오른 편으로 강 건너 북쪽을 바라보니 예나 다름없이 산비탈에 밭을 일구어 놓고 있어 안타까웠다. 얼마나 쪼들리면 저 비탈에 저렇게 밭을 일구었을까? 비가 오지 않으면 한 톨도 수확을 못할 것이요 또 비가 조금만이라도 많이 오면 사태가 나서 밭 자체가 망가질 것이다. 생각할수록 측은하고 안타까웠다. 거기에다 “21세기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커다란 입간판은 차라리 치욕이었다. 그 인민이 굶어죽는 판에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인지 서글픔이 밀려왔다.
 

  한참을 오다 보니 큰 도시가 내려다 보였다. 무순이었다. 거기 길가에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기에 우리는 차를 멈추고 내렸다. 동양최대의 광산이란 설명이 있었다. 강물은 잿빛이었다. 석탄 탓이리라. 그런데 이 석탄들은 다 중국으로 온단다. 40년인가 50년 중국에 팔았단다. 하기야 돈이 아쉬우면 무엇인들 팔지 않으랴만 다만 그 판돈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그런 돈을 잘 썼더라면 오늘 저렇게 백성들이 배고파 아우성을 칠까? 생각하니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하고 일변 딱하기도 하여 속이 탔다. 저 생지옥의 삶이 언제까지 이어지려나?  나는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두만강 강가에서

 

                                 두만강은 잿빛

                                 무순탄광 석탄

                                 강 건너 시집보내려

 

                                 두만강은 초상집

                                 오며 가며 죽은 목숨

                                 강물도 통곡하며 흐르고

 

                                 하늘은

                                 장님인가?

                                 귀머거린가?

 

                                  나마저 오늘

                                  두만강 강가에서

                                  이렇게 목 놓아 우는데.      

 

  정말 울고 싶었다. 북한 인민들의 그 굶주림을 생각하니 바로 눈물이 나오려 하였다. 굶주림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지난 날 실지로 굶주림을 경험하였기에 잘 안다. 그냥 배고픔은 참을 수 있다. 정말 참기 어려운 배고픔은 오늘도 배가 고픈데 내일도 또 배가 고프리라는 절망감이 덮칠 때 정말 참기 어려운 배고픔이 밀려오는 것이다. 육체적 배고픔에 정신적 서러움마저 덮치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처지에 다다르는 것이다. 지금 북한 동포들이 겪고 있는 굶주림이 바로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의 굶주림이라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다. 생각할수록 간장이 녹는 듯 아파왔다.
 

  얼마를 내려다보며 서성이다 다시 출발하였다. 2시가 지나 용정에 닿았다. 거기서 연길로 조금 오다 왼편으로 꺾어 조양천으로 향하였다. 어제 가져갔던 고기는 드려도 먹을 사람이 없다며 사양하기에 하는 수 없이 도로 가져왔는데 이를 먹으며 더 놀다 가자는 것이다. 마침 회원 가운데 한 분의 집에 가마솥도 있고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아 그리로 향하는 것이다. 숭선에서 못다한 신명을 다시 푸려는 것이다.

                                  
 2011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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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4 ]

4   작성자 : 조금만
날자:2011-11-18 08:49:33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화룡 태생인데 지금은 중국 남방의 모 도시에서 교직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30여년 화룡에서 살며 숭선을 여러번 드나들었어도 안병렬 선생님과 같은 감수를 느끼진 못했네요. 글을 읽으니 저의 가슴 깊은 곳에도 선생님께서 느끼셨던 것들이 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향의 정취를 맞보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3   작성자 : 로웅선
날자:2011-11-17 23:21:58
무산에 가능하게 철광도 있을것입니다
지금 여기 변방 지대 두만강변에서는 외지 료녕에서 와 옛날의 깡재기에서 철분을 뽑아내고 있는데요 전번까지 계속 저도 11월 초하순에 여려번 나가 구경 했댔는데요 들을라니 국가 리용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2   작성자 : 鄭仁甲
날자:2011-11-17 11:52:33
본 문의 시 앞 단락의 첫 줄에 '무순'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아마 북한의 '무산'일 것입니다. 무산 제철소에서 나오는 폐수 때문에 그곳부터 두만강이 잿물로 변했거던요. '무순'은 심양에서 동쪽으로 50킬로 덜어진 곳에 있습니다. 아마 숭선에서 1,000킬로쯤 떨어져 있을 것입니다. 1975년 저가 남평 옆의 길지에서 숭선까지 걸어서 갔다온 적이 있습니다.
1   작성자 : 고성리
날자:2011-11-17 11:46:25
무산이고 철광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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