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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놈의 새끼는 조선말을 배워야지'
안병렬
“조선놈의 새끼는 조선말을 배워야지”
이 말은 저 두메산골 투박한 농부들의 아우성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말은, 백두산의 서쪽 기슭 장백조선족자치현의 소재지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이도강촌향의 여러 산촌에 흩어져 사시는 우리 동포들이 그곳에 있던 학교가 폐교되자 아이들을 가까운 한족학교로 보내어야 하는데 이들은 이를 거부하고 우리말을 가르치려고 몇 십리나 떨어진 향 소재지 조선족 소학교로 보내며 부르짖은 절규인 것이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이들 때문에 교실을 개조하여 기숙사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학교 이름도 유별나게 긴 <장백현 이도강촌 조선족 기숙제 소학교>가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를 무척 감동케 하였다. 연길에서는 조선족 학교가 버젓이 있는데도 오히려 조선족 자녀를 한족 학교로 기를 써가며 보내는 부모들이 많다고 한다. 이런 애들이 1,000명을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도강촌의 이분들은 한족학교로 가라는데도 굳이 조선민족임을 고집하며 우리말을 가르치겠다고 발버둥을 치니 그 얼마나 갸륵한 일이더냐? 생각할수록 그 부모님들이 장하고 위대하게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 먼 길을 일부러 달려 가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젠 그 학교마저 폐교가 되고 남은 조선족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한족학교로 다 가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 이곳 연변 조선족 자치주 곳곳, 아니 전 중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으로 서글픈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한 분 그 이도강촌의 산골 농부들과 같은 분들을 만나는 기쁨을 맛보았다. 돈화시에서 북쪽으로 차를 타고 약 40분 가면 흑석이라는 향이 나오는데 여기 우리 민족이 조금 살고 거기 또 우리 조선족 소학교도 있어 몇 해 전에 독서 지도하려고 가본 적이 있다. 그때 그 마을의 조선족 청년 한 분이 와서 교사들 틈에 끼어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었다. 참 기특하다고 할까? 갸륵하기도 하고 장하기도 하였다. 이번에 무슨 일로 이분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학교의 정황을 물었다. 예상대로 학교는 폐교가 되었다고 한다. 참 가슴이 아팠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을 용기도 나지 않았다. 다 한족학교로 가는 똑같은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묻지도 못하고 안타까워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분은 또 기막힌 이야기를 한?! ?.
그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다. 조선족 학교가 문을 닫자 이 마을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어떻게든 우리말을 좀 가르쳐 보려고 발버둥을 쳤다고 한다. 처음엔 시 정부에 가서 항의도 하고 사정을 하여 하루 한 시간씩이라도 우리말을 가르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한족 교장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우리말 교육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 시정부의 지시인데 왜 안 하느냐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할 수없이 이들은 유치원 또래 아이들에게라도 우리말을 가르쳐야겠다고 자기들끼리 돈을 모아 유치원 교사 자격을 가진 선생님 한 분을 모시고 조선족 유치원을 열었다고 한다. 우리끼리라도 우리말을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다행히 호응이 좋아 아이들도 제법 모였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한족학교 교장이란 사람이 술을 ! 먹고 찾아와 왜 우리 아이들을 빼앗아 가느냐고 하면서 유치원 교사를 때린 것이다. 당시 그 선생님은 임신 중이었다고 한다. 아주 엄중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아직 이 일은 법적으로 해결이 안 되고 있다고 한다. 결국 그 “우리끼리”의 꿈도 깨어지고 이젠 별 수 없이 우리 조선족 아이들도 다 한족 학교로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다 우리말을 잊어버리고 한족 아이로 자란다며 그분은 한숨을 쉬는 것이다. 말을 잃으면 민족을 잃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 나도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그분은 또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자기가 늦게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올해 여섯 살이라 유치원을 보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하여도 한족 유치원에는 보낼 수가 없어 부득이 돈화에 있는 조선족 유치원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그 먼 길을 어떻게 보내느냐고 하니 그래도 아이가 한족이 되는 것을 어찌 차마 가만 앉아서 보고만 있겠느냐고 한다. 그래도 그 어린 것이 어찌 하루에 두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는지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기가 찼다. 그러나 이분은 오히려 다른 걱정을 한다. 그래도 자기는 좀 형편이 나아 이렇게라도 보내는데 다른 집 아이 부모는 그 형편이 안 되어 자기를 부러운 낯으로 쳐다보니 미안해 죽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짓는 심정이라고 한다. 나는 그분의 그 마음 씀이 참 귀하다고 여겼다.
그래 무슨 방법이 없느냐고 하니 돈화에 아파트를 한 채 세를 맡으면 여러 아이를 모아 같이 생활을 시키며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겠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가서 밥을 해주고 잠을 자가며 돌보고 밥은 또 무엇으로 어떻게 먹이며 잔잔한 경비도 꽤 들 텐데 그걸 어떻게 다 감당할 거냐 하니 가서 돌보는 것은 엄마들이 차례로 가서 돌보고 밥해주고 양식은 각자 집에서 가져오면 되고 잔잔한 돈이야 어디에선들 들지 않겠느냐고 한다. 그러면서 다만 집 얻는 게 목돈이라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연길에서 이런 일을 해본 경험이 있는지라 돌보는 분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하였다. 그러니 정 안 되면 자기 부인이라도 가서 하면 된다고 한다. 자기 부인이 공부도 제법 하였고 또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럼 당신 부인이 할 작! 정을 하고 시작하라며 그 집세는 내가 대어주겠다고 만용을 부리었다. 난들 무슨 큰돈이 있을까마는 이분의 생각이 너무 갸륵하고 또 우리말을 가르치고자 하는 학부모님들이 너무도 귀하게 여겨져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몇 해 전 이도강촌의 이야기를 듣고 어느 한국분이 그 아이들의 기숙비를 모두 부담하겠다고 나셨던 것처럼 나 역시 이분들의 민족에 대한 그 뜨거움이 내 가슴을 울리었던 것이다. 이런 분들이 이도강촌에서만 있었던 줄로 알았다가 오늘 이곳에서 또 만나게 되니 또 나로 하여금 감동케 하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이다. 조선놈의 새끼는 조선말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참다운 조선 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여기서 끝나지를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또 다른 부인 한 분이 자기들도 같은 형편인데 좀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곳은 흑석에서도 또 한 30분을 더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액목”이란 곳인데 그곳도 다 같은 형편이라 모든 아이들이 다 한족화 된다고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나 내 무슨 능력으로 이를 다 감당하랴? 우선 이곳부터 해보고 성공하면 그때 이야기하자며 미루었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 조선 놈에게는 조선말을 가르쳐야 한다는 놀라운 진리를 스스로 터득하신 분들, 이를 위하여 발버둥을 치며 절규하는 분들, 왜 많은 민족 단체들은 이런 절규에 귀를 기우리지 않을까? 몰라서 그럴까? 이를 위하여 발버둥치시는 흑석과 액목의 조선족 여러분과 그리고 이미 절규하였던 저 이도강촌의 조선족 여러분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이 좋은 일에 나 같은 사람에게마저 동참할 기회를 주시니 감사한다.
2007.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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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을 거역할수는 없습니다 . 중국동북지구의 조선족학교가 없어지는 걸 막을순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한족학교에 다니는게 중국주류세계에 진출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또 경제적인 이익을 고려하지않고 고향에 돌아와서 생활한다는것은 불가능합니다.
지식인들의 조선족이 사라지는 현실에 대한 애탄과 비판을 존중하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문제에 접근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경제적인 기초가 없으면 모든게 환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