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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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성녀(聖女) 댓글:  조회:2087  추천:1  2013-07-14
소설이 아닙니다.무더운 여름 건승 하세요   성녀(聖女)   안병렬   “오빠요!” 그 한마디에도 벌써 나는 그녀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을 만큼 그 음성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오늘은 그 음성이 들떠 있었다. 아주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민환이 경대 국문과에 붙었어요.” 상당히 흥분하고 있었다. “그래? 반갑다.” “오빠, 고마워요.” “고맙긴, 내가 무얼 했다고.” “그래도 오빠 덕에 우선 제가 마음을 잡았고 민환이도 용기를 얻었지요.” “아니야, 그놈 정신 차린 탓이지. 그래 내가 뭐라고 하던? 민환이는 괜찮다고 하지 않던?” “오빠, 언니랑 저희 집에 오세요. 한 턱 쓸게요. 언니한텐 벌써 약속 받았어요.” “알았다.” “저녁에 김 서방 오면 민환이도 데리고 같이 나가서 근사하게 식사 헌 번 같이 해요.” “그래 그러자.” 나는 수화기를 놓으며 후유 한숨이 나왔다. 무슨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정말 긴 터널이었다. 이제 앞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나는 속으로 민환이, 민환이, 하며 부르짖었다.   나를 오빠라 부르는 그녀, 한 권사는 내 외사촌 동생이다. 외가에는 외삼촌이 6,25때 군대에 나가 돌아가시고 젊은 외숙모께서 어린 아이 삼남매와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다. 몇 대를 외동으로 겨우 이어온 집안이라 조카는 물론 4촌, 6촌도 없는 아주 고적한 집안이었다. 이렇게 외로운 집안이라 가면 아주 반가운 손님으로 대접을 받았다. 그래 나는 자주 갔다. 또 걸어서 30분이면 갈 수 있는 이웃 마을이라 나는 어려서부터 툭하면 외가엘 갔다. 가면 외할머님이야 물론이지만 외숙모님도 반겨주시었다. 그보다 어린 동생들이 아주 잘 따랐다. 제일 위 언니도 나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지만 내가 가기만 하면 모두들 졸졸 따르며 좋아하였다. 이 어릴 적의 정이 그대로 이어져 지금껏 평생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오늘 통화한 둘째인 한 권사는 나에게 다른 두 동생보다 더 진한 친밀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나와 같은 신앙을 가진 이유도 있지만 또 다르게 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녀 역시 그 언니처럼 겨우 중학교나 마치고 촌에서 지내다 시집갈 준비나 하고 말걸 내가 외숙모를 설득하여 대학에까지 보내었고 대학에서 예수를 믿었고 그 연유로 졸업하자마자 그 대학과 같은 재단의 여학교의 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 나에게는 늘 고마운 감정을 가지었는데 특히 민환이 일 이후에는 더 가까워진 것이다. 민환이 하면 자꾸 그의 근본부터 떠오른다. 하도 내 동생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그래도 그날의 기억은 마치 어제의 일처럼 또렷이 떠오른다. 이리 저리 하다 보니 거의 몇 달이나 그녀를 만나지 못하다가 그날 그녀의 청으로 그녀를 만난 것이다. 이상하게 얼굴이 많이 수척하여져 있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듯 괴로운 듯해 보이었다. 커피 잔을 든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바로 이웃하여 살기에 스스럼없이 찾아오던 그녀가 그날따라 특별히 다방에서 만나자는 게 이상하였고 더구나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비밀로 하여 달라는 게 더욱 이상하였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 너무도 긴장되어 그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였다. 오랜 침묵이 이어지다 드디어 그녀의 입이 열리었다. 착 가라앉은 차분한 음성이었다. “오빠, 나 이혼해야겠어요.” 멀리, 아득히 어디 꿈결에서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내 혼이 빠져 나갔다고 할까?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나의 멍청한 모습에 답답하였던지 다시 한 번 더 말하였다. 아까와는 달리 더 강한 톤이었다. “오빠, 나 이혼하여야겠어요.” 그제서야 나는 제 정신이 든 듯 “왜 무슨 일이 있니?” “그 사람, 사람이 아니에요.” “한 권사답지 않군. 이혼이라니.” 나는 일부러 “권사”에다 악센트를 높이며 비아냥거리는 조로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어떤 일이 있든 그녀는 절대로 이혼할 여자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기에 일부러 그런 능청을 부린 것이다. “오빠, 그게 아니에요.” 하며 그녀는 다시 더 가까이 의자를 당기었다.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덩달아 나도 긴장이 되었다. 다시 커피 한 잔을 더 시켜 마시더니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또렷이 이야기를 하였다.   한 달쯤 전이란다. 느닷없이 김 서방이 우리 어린 아이 하나 데려다 입양할까 하더란다. 그래 하도 기가차고 또 화도 나서 “날 그만큼 부려먹었으면 되었지 이제 겨우 숨 좀 돌리니 배가 아픕니까?” 하고 웃고 넘겨버렸단다. 이제 아이들이 다 자라 대학을 가게 되니 집이 헐렁하고 적적하여 그러는가 보다 하고는 곧 잊어 버렸다. 그런데 바로 어제 저녁 웬 갓난 아이 하나를 포대에 안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놀라 어인 일이냐 하니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여보, 나 실수하였어.” 하더란다.   “오빠, 아무래도 이혼해야겠지요?” 그녀는 이제 완전히 애원을 하고 있었다.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설마 그 신실한 김 서방이 그럴 리가 있을까 믿어지지를 않았다. 한 학교의 교장이요, 게다가 교회의 장로인 그가 그런 실수를 하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내가 만나보고 아는 그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아주 얌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실체를 보이며 증거를 들이대니 어쩌랴? 나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계속 울고 있었다. 아주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나는 가만 내버려 두었다. 차츰 그 김 서방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자기에게 어떤 부인인데 그런 배은망덕을 하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생각하니 동생이 참 불쌍하였다. 그녀는 그 남편과 그 아이들 삼남매를 위하여 완전히 자기 한 몸을 희생하였던 것이다. 처녀 교사인 그녀는 누가 보아도 탐을 낼 만큼 부족함이 없었다. 그 늘씬한 키에다 그 보름달같이 푸근해 보이는 얼굴, 거기에 무엇보다 그 착한 마음씨가 알려지고 게다가 주일학교 학생을 열심히 가르치니 온 교회에 칭찬이 자자하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꽤 큰 그 교회에서도 일등 신부 감으로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더러는 노골적으로 중매가 들어오기도 하였다. 그런 그녀, 그 한 선생이 어느 날 갑자기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10년이나 연상인 홀아비에게. 그 홀아비가 바로 지금의 김 서방인데 당시 그는 다섯 살 아들, 세 살 아들, 그리고 갓 낳은 딸, 이렇게 셋을 두고 아내가 갑자기 죽은 것이다. 게다가 그는 어머니도 없었다. 당장 아이를 돌 볼 그 누구도 없었다. 그야말로 앞이 캄캄하였을 것이다. 그 서른 남짓한 홀아비 꼴이 어떠하였으랴? 이때 내 동생 한 선생이 나서서 시집을 간 것이다. 교회에서는 시글벌적하였다. 고귀한 희생정신이라며 칭찬을 하는가 하면 미친년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여자들도 많았다. 대개는 눈독을 들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미리 그 두 사람이 사귀고 있었을 것이라고 숙덕거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혼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만약 그녀의 어머님이 계셨더라면 절대로 될 수 없었을 터인데 바로 그 전 해에 돌아가셨던 것이다. 물론 그 언니며 동생도 극력 말렸지만 그녀의 뜻을 꺾지는 못하였다. 화가 난 그들은 결혼 당일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하도 억울하고 안타까워서였을 것이다. 이를 아는 나는 억지로 가자고 권하지도 않았다. 나 역시 “결혼은 동정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고 타이르고 말렸지만 이미 그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내 하나 희생하면 네 생명 살리게 될 것이라며 기어이 강행하는 것이었다. “네가 꼭 살린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며 야단까지 치며 말렸지만 하는 수가 없었다. 교회에서 김 서방은 주일학교 부장이요, 학교에서는 같은 학교의 교사라 내 동생과는 잘 아는 사이이긴 하였다. 그러나 그 세 아이 가진 홀아비에게 어찌 처녀가 자진하여 시집을 갈 줄이야 상상이나 하였으랴? 그것도 혹 처녀의 가정이 구차하다면 돈을 바라서 갈 수도 있겠지마는 내 동생 한 선생은 완전히 자기 한 몸 희생하여 그 가족을 살리러 간 것이다. 그래 자기 아이는 하나도 낳지를 않고 그 아이 셋 키우느라 온 젊음을 다 희생한 것이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그때는 처녀가 결혼을 하면 으레 다니던 직장은 그만 두는 것으로 여기던 때라 내 동생 한 선생도 곧 교사를 그만 두고 가정에 틀어박혀 그 아이들 다 기른 것이다. 그리고 그 남편 출세시켜 학교에서는 교장이 되게 하고 교회에서는 장로로 떠받들림을 받게 하였다. 또 자신도 권사의 직분을 받게 되었다. 누가 보아도 그들은 모범되는 가장이요, 주부로서 모범 가정을 꾸린 것이다. 여기 이르도록 내 동생의 고생이 어떠하였으랴? 이제 겨우 숨 돌릴만한데 이 기막힌 일을 당한 것이다. 그 남편을 죽이고 싶을 것이다.   “이 일을 어떻게 하지? 이 동생에게 무어라 위로하지?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지? 그 아이를 맡아 기르라고는 차마 못하겠고 그렇다고 거절하라면 그 뒤 문제는 어떻게 전개될지? 차라리 이 동생 말처럼 이혼하면 깨끗하지 않을까? 애초부터 정상적인 가정을 꿈꾼 건 아니지 않으냐? 그 아이들 불쌍하여 한 결혼이 아니던가? 그럼 그 아이들 이제 다 자라 대학생까지 되었으니 자기의 목표는 이룬 게 아닌가? 그럼 헤어져도 되잖은가?”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그녀의 말처럼 이혼이 옳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또 새로 생긴 그 아이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김 서방은 어떻게 되는가?”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였다. 그렇게 되면 그 옛날 처음 결혼할 때와 같은 형편이 또 재현되지 않은가? 불쌍한 아이에 불쌍한 홀아비. 더구나 이번에는 그 홀아비는 한 인간으로서 완전 매장되는 게 아닌가? 하기야 자기가 뿌린 씨앗 자기가 거두라 하면 문제는 간단할 것 같으나 그럼 애초 그 가정 살리러 간 뜻이 희석되는 것 같아 아쉬웠다. “아, 이 사람 김 서방. 그렇게도 염치가 없는 사람이던가?” 나는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그저 그녀가 그 울음 멈추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마도 한 시간은 족히 지난 것 같았다. 드디어 그녀는 울음을 그치었다. 그리고 얼굴을 들었다. 나는 얼른 내 손수건을 건네었다. 그녀의 그것은 이미 흥건히 젖었던 것이다. 눈물을 닦은 그녀의 모습은 차마 보기 민망할 정도로 창백하였다. 곧 쓰러질 것 같았다. “오빠, 요즘도 미국 비자 받기 힘드나요?” “글쎄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은 왜?”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곳에 가서 살고 싶어요. 여기선 부끄러워 못 살 것 같아요.” 그녀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하긴 그녀가 영어 교사였으니 미국 가면 적응이야 좀 쉬울 것이다. 그럼 이혼을 전재하는 말이 아니더냐? “다른 방법은 없을까? 그 사람 말대로 실수라니 그 실수는 용서하고 아기는 고아원 같은 데 맡기고 ---” “저도 그이가 그렇게 처리를 하고 와서 실수하였다고 고백한다면 별 수 없이 용서하였을 거예요. 하지만 그 아이를 안고 와서 저에게 떠맡기는 그 심보는 완전히 저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닙니까? 그 무시하는 처사가 더욱 분해요. 그 동안 제가 너무 착하게 살아서 속도 없는 여자인 줄 아나 봐요.”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그 눈에 불이 이는 듯하였다. 이럴 때 흔히 치를 떤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오빠요.” 하더니 앉은 채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만 실신을 하는 것이다.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나를 제치고 마담이 달려와 냉수를 붓고 바늘로 손가락을 따고 한참을 야단법석을 한 뒤에야 겨우 깨어났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였다. “오빠,. 죄송해요.” “야야, 정신 차려라. 그러다 네가 쓰러지겠다.” “그만 그대로 쓰러져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얘.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나도 나지만 저 마담이 얼마나 놀라고 수고를 하셨는데.” “아이고 참. 너무 죄송해요.” “아주머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 같은 년도 다 사는데 왜 그러세요? 괴롭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사는 것 아닙니까? 살기가 쉬우면 오히려 많이 죽었을 겁니다. 우리 집에 오시는 손님 가운데 산에 오르는 분들이 많은데 산에 오르는 것도 그래요. 오르기 어렵기에 산을 자꾸 오르잖아요? 살기가 어려우니 억지로라도 사는 겁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억지로라도 살다보면 살아지는 거지요. 나도 두 번이나 자살을 하려다 실패하곤 이제껏 이렇게 사는 겁니다.” 어느덧 마담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하여졌다. 나는 속으로 “살기가 어려우니 산다는 그녀의 역설을 되뇌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오기가 아닐까? 오기지. 오기로나마 산다는 거지. 그래도 어쨌거나 무엇으로 살든 사는 것 자체가 귀한 것이라는 말이지. 맞아 산다는 것 자체는 귀한 것이지. 그렇게라도 살아야 한다는 거로구나. 얘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얼마만인가? 그녀가 일어섰다. “오빠, 나 가봐야겠어요. 아주머니 정말 미안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우리는 그저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냥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곧 교장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생각하여서인지 전화를 받는 그의 음성도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아주 급한 일이니 곧 만나자며 중심가의 다방을 가리켜주고는 곧 끊었다. 이 사람을 만나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을 하며 천천히 걸어가니 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하는 그의 말투는 여전하나 얼굴은 창백하였다. 그도 무슨 일인지 짐작하였으리라. 자리에 앉아서도 그는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우리는 커피 한 잔을 다 마시면서도 서로가 말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할 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걸어오면서 하던 생각의 연속이었다. 먼저 내가 입을 열었다. “한 권사를 만났네. 자네도 알다시피 그로서는 내가 어른으로서는 유일한 피붙이가 아닌가? 그러기에 우리 가깝게 지나지 않았는가? 내가 아무런 도움은 못 주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오빠로서 사랑하고 있지. 그래서 나에게 찾아온 게지. 하도 억울하고 딱하니까?” “저도 잘 알지요. 집 사람뿐 아니라 저 역시 형님을 몹시 존경하고 있지요.” 그의 음성은 가늘면서도 착 가라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하였다. 나도 더욱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내가 참 답답한 건 자네가 실수는 하였지만 그 실수를 그렇게도 수습을 못한단 말인가? 그래 갑자기 아기를 데리고 오면 누군들 어떻게 수용을 한단 말인가? 자네 어머님이라도 안 될 거야. 어찌 그리도 서툴게 하는가? 그래도 사전에 미리 좀 이해를 구하고, 아니 이해에 앞서 사죄를 하고 그리고 데리고 오든 고아원엘 보내던 의논하여 하였더라면 이리 되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내 동생도 자네의 그 소행, 곧 자기를 완전 무시하는 그 마음이 더욱 괘씸하고 억울하다며 이혼하겠다고 저렇게 야단하니 어쩌지?” “형님 낯을 못 들겠습니다. 무어라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실수는 하였으나 그 실수를 수습하려는데 일이 그만 완전 틀리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 여자가 말을 듣질 않아요. 아이를 고아원에 못 보네는 정도가 아니고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 돈을 주겠다고 하니 그도 안 된다고 하며 기어이 결혼을 하자는 겁니다. 그래 설득을 하는 중인데 바로 어제는 만나자 하여 나갔더니 글쎄 아기를 안고 와서 이야기 하다 중간에 사라진 겁니다. 그래 엉겁결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안고 갔지요.” “아니 그럼 그 여자는 어떤 여자인데 그리 고집이 센가?” “자세히는 모르나 시청교향악단에서 같이 노래하다 만났지요. 이 대학 저 대학 강사로 나가는 모양인데 돈은 군색하지 않은가 봐요. 근래에 저도 좀 안 일인데 이 사람 저 사람 잘 사귀는 것 같아요.” “그건 그렇고 그래 자네는 어쩔 셈인가?” “제가 무슨 셈이 있겠습니까? 집사람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이혼 하자면 당해야지요. 무슨 변명이 있겠어요? 형님 저는 지금 오히려 더 마음이 편합니다. 처음엔 이 사실을 아내에게 어떻게 고백할까 무척 괴로웠습니다. 또 실은 형님을 어이 대할까? 고민하였는데 이제 다 알려졌으니 오히려 홀가분하네요. 형님 저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안고 어찌 살겠습니까?” 그는 허탈해져 있었다. 기진맥진 될 대로 되라는 심정 같았다. 이혼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대로 두다간 더 큰 일이 벌어질 것도 같았다. 나는 정색을 하며 정면으로 그를 보며 준엄하게 말하였다. “이 사람, 김 교장, 아니 김 장로. 자네 왜 이리 비겁한가? 일을 수습할 생각은 없고 겨우 한다는 소리가 죽는다는 거야? 자네 한 사람 죽으면 해결이 되는가? 그렇기만 하다면 당장이라도 죽어. 그렇지만 남은 가족은 그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어떻게 살라는 거야? 그리고 교회는? 학교는? 하나님 이름에 그 더러운 욕을 돌려야만 속이 시원하겠는가? 어찌 그 따위 생각만 하는가? 이보다 더 비겁한 일이 어디 있는가?” 내 음성이 높았던지 옆 테이블의 손님마저 돌아본다. 그러나 그는 아무 반응이 없더니 한참만에야 “형님, 그럼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고개를 숙이더니 훌쩍이었다. 내려다보려니 그도 딱했다. 어쩌다 일은 저질렀고 그 일은 더욱 어렵게 꼬이고 ---생각하니 그도 불쌍하였다. 순간 나는 내가 무슨 보살이라도 된 양 동생도 불쌍하고 매부도 불쌍하고, 우스운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잠깐 이 일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하였다. 일을 풀려고 이 사람을 만났는데 오히려 날 보고 어쩔까요? 하며 저리 울기만 하니 기가 차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 헤어진다면 나는 그저 야단치러 온 사람밖에 안 되는 게 아닌가? 쓴맛을 다시며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순간 영감같이 지혜가 떠올랐다. “맞아. 그 방법을 써 보자.” 나는 김 서방에게 더욱 다가가 소곤소곤, 그러나 차근차근 최후의 비상수단을 쓰자며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내 진지한 이야기에도 그는 별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수단이란 게 너무 유치하게 여겨졌으리라. 그래도 나는 꼭 그렇게 하라고 ,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헤어져 돌아왔다.   그 뒤 며칠간 그녀에게선 소식이 없었다. 조마조마하게 기다렸으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행이라 여겨졌다. 궁금하긴 하지만 내가 먼저 전화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사흘째 되던 날이던가? 시장에서 돌아온 아내가 흥분하고 있었다. 한 권사를 만났는데 아기용 분유를 사기에 웬일이냐 하니 아이가 하나 생겼다고 하더라나. 웬 아이냐 하니 적적하여 입양을 시켰다고 하는데 뭔가 좀 이상하더라는 것이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요? 적적하면 입양을 할 수도 있지. 우리도 아이 하나 입양을 할까? 요즘 고아들 수출한다고 온 세계로부터 욕을 먹는 판인데.” “아니에요. 무언가 좀 이상해요. 그렇게 떳떳하면 왜 죄지은 표정을 지어요?” “아마 그런 큰일을 하면서 사전에 아무런 의논도 드리지 못하여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렇겠지.” “그럴까요? 그래도 어이 그리도 당황하며 난처해할까?” 아내는 혼자 중얼거리다 말끝을 흐리더니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는 저간의 일을 상상하여 보았다. 내 계책이 잘 먹혀 들어간 것이리라.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참 다행이라 여겨졌다. 바로 이튿날이었다. 그날따라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일찍 집으로 오니 그녀가 와 있었다. 그녀도 아내도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아내는 어째 오늘은 이리 일찍 오느냐며 짜증 비슷하게 말한다. 나는 웃으며 아니 내 집에도 내 마음대로 못 오느냐고 하며 앉았다. 그녀는 “오빠 없는 시간에 언니와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들켰네요.” 한다. “그래 비밀이라면 내 방에 들어가 귀 막고 있을 테니 실컨 하라구,” 하며 일어서려는데 “아닙니다. 어차피 오빠도 다 아실 일, 오히려 잘 되었네요. 실은 전에 오빠에게 말씀 드렸던 그 일 말이에요. 그 얘기 언니에게 하고 있었어요.” 한다. 나는 궁금하여 다시 앉으며 그래 어떻게 정리하였느냐?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그럼 상당 부분 재방송을 하지요. 하며 물 한 컵을 다 마시더니 차근차근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조용히 그의 입을 주시하였다. 그날 오빠를 만나고 가면서도 도무지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집으로 가는데 억지로라도 산다는 그 마담의 말이 자꾸 기억되더라는 것이다. 나도 그 말을 오래 잊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다 집에 막 들어서는데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 자기도 모르게 막 뛰어 들어가니 아기가 자꾸 울더라는 것이다, 그제야 젖병을 보니 이미 빈병, 곧 우유를 넣어 물리니 그렇게 잘 먹더라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 핏덩이를 차마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그러다 남편이 오는 소리를 듣는 순간 그만 또 마음이 강하여져 약이 오르더라는 것이다. 그래 대뜸 “나 이혼해 주세요.” 하였더니 그 남편이 왈 “당신이 원하면 내 무엇을 하지 않겠소? 원하면 그 보다 더한 것도 다 해 드리지요. 그리고 또 다른 요구는 더 없소? 이 집도 달라면 드리지요” 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꿇어 엎드려 잘못했다며 빌더라는 것이다. 그 말에, 그 태도에 그만 맥이 탁 풀리더라는 것이다. 안 된다고 해야 이야기가 되겠는데 다 된다 더 주겠다. 하고 또 자꾸 빌어대니 그만 올랐던 약이 풀려버리더라는 것이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라 마음을 독하게 다지고 그럼 여기에 그 약속 적으세요. 하며 종이를 내 밀었더니 거기에 적기를 “소인은 죄인이라 아내가 무엇이든 요구하면 그대로 다 듣겠습니다.” 라고 쓰며 싸인을 하는데 그만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듣고 있던 아내도 나도 그 장면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래도 그녀는 억지로 참고 그럼 내일 법원으로 가자고 하고 자는데 밤중에 남편 방에서 무슨 소리가 나기에 들으니 저의 죄를 저에게만 돌리시고 죄 없는 아내와 아기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며 눈물로 기도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도 못 들은 척 자고 났는데 아침에 남편이 출근은 안하고 자꾸 미적거리는데 아마 법원부터 가자는 것 같아 오히려 난감하더라는 것이다. 그때 마침 또 아기가 울어 젖통을 들고 먹이고 하는 사이 남편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제서야 후유 한숨이 나오는데 무슨 큰 짐을 벗은 듯 후련하더라는 것이다. 그래 그만 오늘까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젠 아기와 정이 들어 절대로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내 계략이 이렇게도 신기하게 맞아지는데 놀랐다. 이야기를 마친 그녀는 또 그 동안의 사실을 오빠에게는 이야기를 하면서 언니에게는 하지 못해 늘 죄송하였는데 그만 그날 백화점에서 만나니 너무 죄송스러워 오늘 이렇게 찾아왔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니 참 편안하여 좋다고도 하였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언니, 내가 슬게 없는 년이지요?” 하며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니야, 참으로 위대하네. 어떻게 그렇게 될까?” 아내는 그녀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착한 분이 왜 그 실수를 저질렀을까? ” 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뭔가 좀 부족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럼 앞으로 그렇게 계속 살거야? 법원에도 안 가고” “법원요? 그 종이 찢어버렸어요. 오빠, 나 강하게 살거예요. 언니, 기도해 주세요. 십자가 질 수 있게. 오빠 고마워요.” “그래? 무슨 말이지?” 그러나 그녀는 내 말에 대답도 없이 아기가 배고프다고 울 것 같다며 일어서더니 또 잘 가라는 우리 인사도 못 들은 채 종종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강하게 살 것이라는 말과 십자가란 말이 무엇인가 어렴풋이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강하게 산다는 게 그리 쉽지를 않았다. 그리고 십자가는 너무 무거웠다. 엉뚱하게도 그 강하게 살려는 그녀의 의지를 꺾는 것은 그 아이 - 민환이었다. 그놈은 아기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아파서 속을 썩이더니 조금 크면서는 또 빗나가 애를 먹이었다. 중학생 때 벌써 담배를 피우더니 고등학생 때는 이웃 여학생을 건드려 임신을 시키는 등 소란을 피우는가 하면 하루도 예사로이 보내는 날이 없었다. 그래 매일이다시피 학교에 불려가야 하였고 가서는 손이야 발이야 빌어야 하였다. 그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전화를 하거나 혹은 찾아와서 울며불며 하소연을 하였다. 나는 자주 민환이를 만났다. 상담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민환이란 연구 대상자가 있어 반가웠던 것이다. 내가 본 민환이는 그저 좀 인정에의 욕구가 강할 뿐 머리는 명석하고 상상력은 아주 풍부한 좋은 학생이었다. 지나치게 내성적인 게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 빗나갈 아이는 아니었다. 그래서 장래성이 있다고 걱정 말라며 한 권사를 달래었다. 그러면서 그놈과 자주 어울렸다. 같이 놀러도 다니고 탁구도 치고 볼링장에도 가고 영화관에도 갔다. 그럼에도 그놈은 나에게도 숱한 고통을 주기도 하였다. 내 주머니의 돈은 마치 제 돈인 양 가져가기도 하고 엉뚱한 질문으로 나를 골려주기도 하였다. 그래도 나는 그놈을 포기하지 않았다. 늘 끼고 돌며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그랬는데 그놈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또 한 1년 쯤 방황하더니 작년인가 교회 수련회에 다녀오고서는 마음을 잡아 기어이 오늘의 영광을 안은 것이다. 나는 민환이에 대한 나의 눈이 정확하였다는 자부심에 기분이 더욱 좋았다. 그리하여 저녁에 아내와 나가면서 “민환이는 내가 잘 지도하였지?” 하며 자랑을 하는데 아내는 반색을 하며 “여보 착각하지 말아요. 당신이 지도를 잘한 게 아니고 한 권사의 기도 덕분이랍니다. 한 권사가 그 아이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아세요? 새벽마다 매달리어 울었답니다. 온 교회가 다 알아요.” 하였다. 나는 머쓱하였다. 연이어 아내는 말하였다. “당신의 동생이지만 나는 한 권사는 성자라고 생각해요. 요즘에 그런 사람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모르지만 그 김 서방, 김 장로란 사람 말이요, 아주 저질 인간이에요. 그 후에도 그 아이 엄마랑 데이트 계속하다 아마 근래에 와서야 이제 끝난 모양이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게 사실이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오?” “내가 어떻게 알아요? 이야기하니 알지. 얼마나 원통하고 분하였으면 나에게 와서 몇 번이고 울며 그 간의 이야기를 하였을까요? 하도 오빠에겐 비밀로 해달라기에 내 지금껏 참느라 혼났어요.” 나는 황당하였다.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저질스러울 수가 있으랴 싶었다. 그리고 내 동생이지만 그렇게까지 참을 수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아내의 지나친 칭찬에 조금 반발이 생겼다. 이게 내 못된 버릇인 줄은 나도 안다. 그러나 고치지를 못한다. 그런 병으로 인하여 이죽거려 보았다. “성자는? 진짜 성자라면 그렇게 울고불고도 말아야지.” 하였다. 한데 아내는 걸음을 멈추더니 정색을 하며 “그러기에 성자인 거예요. 너무 너무 억울하고 분하여 울고불고 하면서도 그래도 남을 위해 끝내 참고 견디니 그래 성자인 거예요. 아니 여자이니 ‘성녀’라고 해야겠네. 진짜로 성녀예요. 아예 그런 억울하고 분한 감정마저 없다면 그건 신이지 사람이 아니지요. 사람으로서 그만큼 참으니 확실히 성녀예요, 테레사 수녀보다 더 위대한 성녀예요.” 하였다. 나는 “성녀” “성녀” 하며 성녀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는 “맞아 성녀야.” “그녀는 정말 성녀야.” 다시 읊조리었다.   2013년 5월 24일 소하룡에서
21    [시] 장백산 댓글:  조회:1616  추천:0  2013-02-20
장백산 안병렬 산이라 부른다만 어이 차마 산이런가? 루루 천년 살아오며 혼이 스민 고향이라 올라와 안기여보면 포근하던 엄마품 연변문학 2013년 제2호
20    [시] 연변의 봄 댓글:  조회:1927  추천:0  2013-02-20
연변의 봄 안병렬 연변의 봄은 진눈까비로 시작한다 내 봄도 진눈까비를 맞는다 그래도 봄은 봄이다 진눈까지 맞으면서 꽃이 핀다 내 봄에도 꽃이 핀다 연변의 봄은 무르익는다 내 봄도 진눈까비 걷히며 무르익는다 연변문학 2013년 제2호
19    숭선 기행 댓글:  조회:2424  추천:0  2011-11-17
  이렇게 이름을 붙이니 숭선이 어디 유명한 곳인 줄 알겠으나 실은 연변자치주 안에 있는 화룡시의 조그만 진이다. “향(鄕)”이다, “진(鎭)”이다 하는 것은 한국 농촌의 최하위 행정단위인 “면(面)”에 해당되는데 그래도 향보다는 진이 조금 더 큰 곳을 일컫는다. 그래서 어떤 진은 한국의 읍 정도에 이르는 곳도 있지만 숭선진은 말만 진일 뿐 향 정도에 미치기에도 부족한 자그마한 곳이다. 하지만 백두산 바로 밑이라 관광객도 더러 들르고 북한과의 다리가 있고 세관이 있어 전에는 제법 사람이 많이 들끓었으나 요즘엔 백두산 길이 안도로 포장이 되고 또 북한과의 교역도 신통치 않은지 사람이 영 적어졌다. 거기에다 어느 농촌이나 마찬가지로 이농현상이 두드러지니 더욱 인구가 적어졌다.      이 작은 농촌을 그래도 찾고자함은 그곳의 경관도 볼만하지만 북한의 체취를 느낄 수 있어 늘 연민의 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곳에 사는 “강집사”이란 분이 개를 길러 그 개들로 멧돼지를 잡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흥미가 동하여 얼마 전 잠깐 그 댁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 “깊은 산골짝에 외딴 집”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푹 안기어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날은 일정이 바빠 곧장 되돌아 와야만 하였다. 그래 다시 한번 더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국경절 연후에 가기로 하였다.     게다가 이번엔 그곳 교회에도 볼 일이 있었다.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 전번에 우리 몇 사람이 왔을 때 교회의 기막힌 이야기를 그곳 전도사님으로부터 들었던 것이다. 교인이 줄고 줄어 끝내 문을 닫았는데 몇 달 전 자기가 불려 와서 문을 다시 열기는 하였으나 아직 어렵다는 것이다. 자기도 이미 70이 넘은 몸이라 힘도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양회에서 많이 도와준다고 고마워하였다. 양회란 중국의 독특한 기관으로 쉽게 말하면 정부와 교회의 연합모임인 것이다. 교회와 관련된 행정적인 문제는 대개 이 양회를 통하여 처리하는 것이다. 이 양회에서 이 교회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날아간 지붕도 이어주었다는 것이다. 아마 북한과 인접한 지역이라 정부에서도 신경을 쓰는가 보았다. 하긴 그럴 것 같았다. 교회의 간판을 보고 지금도 더러 그곳 사람들이 찾아온다니 정부에서도 의식을 하였으리라. 그러나 교회가 어찌 정부의 도움으로 연명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하든 이 교회 자체가 자립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교회를 살려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북한과의 지리적 여건도 있지만 그보다 이 숭선진 소재지에 그래도 교회는 하나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옛날엔 50명이 넘게 모였다니 지금도 열심히 하면 그 흩어졌던 사람도 모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강집사 같은 신실한 분도 있으니 반드시 일어서리란 믿음이 갔던 것이다. 그래 어떻게 좀 도우는 방법을 찾자고 의논을 하였는데 마침 어느 분의 주선으로 미약하나마 그 길이 조금 열리었으므로 이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엔 연변에 사는 우리 한국인 기우회(棋友會)에서 가기로 하였다. 기우회라야 이름 뿐 그저 우리 노인들 5, 6명이 모여 장기나 바둑을 두며 노는 모임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 모여 즐기고 있다. 이 모임에서 이번 국경절엔 그곳 강집사 집으로 가기로 하였다. 우리가 간다니 이곳에서 바둑학원을 하는 원장과 사범도 같이 가자고 하여 국경절 날 10월 1일 점심 먹고 바로 출발하기로 하였다. 그 전에 갔을 때 언제든 오시면 된다고 하기에 그런 줄 알고 연락을 하였더니 웬걸 바로 그 이튿날 오전에 연길에서 친척의 결혼식이 있어 자기는 연길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없어도 괜찮으니 숭선교회에 와서 자면 된다는 것이다. 이미 받아놓은 날인데다 또 강집사가 있다고 해도 어차피 이튿날은 일요일이요 또 교회에 볼 일도 있어 가야 하므로 좀 아쉽지만 그냥 가기로 하였다. 애초 10명이 가기로 되었는데 두 분이 빠져 8명이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오후 1시 정각 출발하였다.     화룡까지야 더러 다니던 길이라 별 볼 거리가 없지만 화룡을 지나서 선경대 쪽으로 접어드니 벌써 단풍이 조금씩 들어 울긋불긋 볼만한데 오른 쪽으로 꺾어 산속 지름길로 접어드니 참으로 볼만하였다. 머루, 다래 칡덩굴로 깊은 산의 정취를 더하는데 또 나무엔 다람쥐가 기어오르고 그 위로는 꿩이 날고 -------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그 울퉁불퉁 산길을 피곤한 줄 모르고 탄성을 지르며 갔다.     4시가 가까워서 그 강집사 집에 도착하였다. 주인은 없지만 그래도 한번 들르자며 갔다. 바로 길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웬 일? 강집사가 있었다. 어쩐 일이냐 하니 연길 나가려다 큰 길에서 추돌사고가 나 지금 보험사에서 오기로 하였기에 기다린다는 것이다. 조그만 접촉사고요 또 자기도 상대방도 다 보험에 가입되어 있어 조금 시간이 걸릴 뿐 별 일이 없다며 웃는다. 그 도량에 속으로 감탄이 나왔다. 하기야 그만한 배짱이 있기에 여자의 몸으로 이 깊은 산골에 살면서 사냥을 하는 게 아닐까? 남편이 살았을 때 하던 일이라 그대로 할 뿐이라고는 하나 그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과연 많은 사람이 일컫듯 여장부라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우리더러 자기가 없어 죄송하긴 하나 교회에서 잘 대접할 것이니 잘 쉬시다 가시란다.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젠 겨우 10여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과연 큰 길에 나서니 차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한 대는 바로 강집사의 차라고 하였다. 두 차가 다 조금씩 망가져 있었다. 큰 길에서 바로 건너다보이는 곳이 북한이라니 처음 오시는 분들은 놀란다.      4시 반이나 되어 교회에 도착하였다. 흔히 농촌에서 보는 조그만 교회이다. 건물을 가로질러 예배실과 사택으로 쓰는 그런 구조다. 70세가 넘은 여전도사님과 몇 여집사님들이 따뜻이 맞아 주신다. 기다리고 있었다며 말대로 벌써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은 널찍한데 또 뜨끈하였다. 아주 좋았다. 준비하여간 개고기와 닭을 내어놓으려니 닭을 몇 마리 잡았으니 내어놓지 말란다. 강집사의 사정 때문에 차질이 생겨 미리 연락이 부족한 탓이었다. 연락이 되었더라면 고기는 우리가 장만하여 간다고 할 걸 약한 교회에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이미 다 지난 일. 미안하지만 얻어먹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곧 장기 바둑판을 벌이었다. 그 성질상 바둑은 조용하지만 장기는 언제나 떠들썩하였다. 나는 속으로 저 순진하신 여자분들이 교회 사택에서 이렇게 노는 우리를 어떻게 볼까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푹 터놓고 놀기 위해 왔는데 말릴 수는 없는 터, 그냥 웃으며 같이 즐기었다. 조금 지나 저녁이 차려졌다. 닭고기를 잘 삶아 맛이 있었다. 하기야 그 시간엔 무엇인들 맛이 없으랴? 저녁을 먹고 나니 잠자리를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묻는다. 저기 민박집에 방을 하나 더 잡아 두었는데 두 곳에 분산하여 주무시면 좋겠는데 어떨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방에서 모두 함께 자는 게 좋다고 하였다. 그래야 같이 놀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방도 넓어 10명 정도는 충분히 잘 수 있었다.     다시 바둑, 장기판이 벌어졌다. 한쪽에선 바둑, 한 쪽에선 장기. 방은 뜨뜻하고 이부자리는 충분하고 또 거기에다 떡이랑 간식도 많고 모든 게 잘 갖추어졌다. 여전히 떠들썩한 가운데 밤은 깊어갔다. 노는 사람은 놀고 자는 사람은 자고 ----- 즐거운 밤이었다. 이 흥겨움을 위해 온 것이다.     10시가 조금 지나서인가? 화장실을 가려고 밖으로 나왔다. 무심결에 쳐다보는 하늘엔 어찌 그리도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지. 옛날 내 아주 어렸을 때 보던 바로 그 별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건너 북한 어디에선가는 개 짖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였다. 물론 착각이긴 하지만 꼭 그럴 것 같았다. 그 안온함, 그 포근함, 그 정적, ----  바로 옛날의 그곳 고향이었다. 어디선가 마실갔던 머슴이 길가 담장에 오줌을 갈기며 서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저 건너에서 누군가 금방 놀러올 것 같기도 하였다. 사실 옛날엔 밤에 제사 지내러 강 건너 오고 가고 하였다는데 이젠 국경이라 철통같이 막아 두니 도대체 정치라는 게 인간을 구속시키는 요물이 아니던가? 북쪽을 바라보는 마음은 더없이 답답하기만 하였다.     며칠 전 강집사가 하더라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잠깐 나갔다 왔더니 웬 낯선 청년들이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기에 누구냐고 하였더니 배가 고파 부엌에 있는 밥을 맛있게 먹고 그냥 가려니 미안하여 인사나 하고 가려고 이렇게 기다린다고 하며 미안해하였다. 그러나 진짜로 미안한 건 강집사이었다. 그 밥은 개에게 주려던 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차마 못하였다. 그저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고 한다. 그 배고픔, 과연 누구의 죄이던가? 생각할수록 가슴만 답답하다. 머리를 흔들며 방으로 들어왔다.          대개들 눕고 두 분만 장기를 이젠 조용히 두고 있었다. 자는 사람을 의식해서이리라. 그 옆엔 1원짜리 지폐가 여남은 장 넘게 쌓여 있었다. 지는 사람이 내는 벌금이다. 내기를 하지 않고 그냥 두면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라 재미가 없으므로 지는 사람은 1원을 벌금으로 내기로 한 것이다. 이 1원도 몇 달이 모이니 제법 돈이 되어 지난달인가 모두 모였을 때 그 벌금 통을 비우니 74원인가 나왔다. 그 전통(?)을 이곳까지 와서도 이어가는 것이다. 웃음이 나왔다.  조금 구경하다 말고 어느 새 잠이 들었던가? 눈을 뜨니 새벽이었다. 시계를 보니 6시가 다 되었다. 부지런한 분들은 벌써 두만강에 가서 세수를 하고 왔다. 또 극진한 분들은 예배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나는 부엌에서 겨우 토끼 세수를 하고 들어왔다. 들어와서는 곧 장기를 두었다. 어제는 바둑을 두느라 장기를 한 판도 못 둔 것이다. 곧 여러 사람이 달라붙었다. 동네 장기가 되는 것이다. 두어 판 두었을까? 7시부터 예배를 드린단다. 일찍 드리고 가을걷이 하러 간단다. 이곳 대개의 농촌교회들이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장기를 거두고 모두들 예배당으로 갔다. 벌써 몇 분은 미리 가서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르고 있었다. 새벽기도회에 나가던 습관이 그대로 이어지는 듯 보였다. 나 같은 잠꾸러기에게는 참으로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꿇어앉으니 나도 모르게 자꾸 한숨이 나왔다. 이 교회의 어려운 형편이며 강 건너 북한 백성들의 사정들이 자꾸 떠올라서이다. 그런데 예배를 시작하기 전 전도사님이 날더러 설교를 하시란다. 아니 못한다고 어제 저녁에 말씀 드리지 않았느냐고 하니 도리어 어제 저녁에 하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한다. 다 같은 우리말을 사용하면서도 이렇게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되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중국 종교법이 허용하지 않은 설교를 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그대로 지켜오는 터라 어제 저녁에 부탁하는 것도 분명 못한다고 하고 정녕 내 말 듣기를 원한다면 예배 후에 이야기나 한 자리 하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들었던가? 내가 이야기하듯 설교를 하겠다고 하였단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분명히 들으시라며 “나는 법이 금하는 것은 못합니다.”고 잘라 거절하였다. 매정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말려들면 안 되겠기에 단호히 자른 것이다.     7시 정각이 되니 여집사님이 찬송을 인도하신다. 그런데 음향기계에서 나오는 찬송가의 소리가 어찌나 큰지 나에겐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그리고 거기 맞추어 부르기도 그리 쉽지를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찬송가를 30분이나 부르다 정작 7시 30분이나 되어서야 정식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참으로 눈물겨웠다. 우리 일행 외에는  할머니 세 분과 여집사 두 분, 그리고 전도사님뿐이었다. 그런데 할머니 한 분은 미국에서 전도사님께 다니러 온 분이고 또 찬송을 인도하는 여집사는 다른 교회에서 봉사하러 오신 분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순수 이곳 교인은 단 3명뿐이었다. 멀리서 오시는 할머니 두 분과 여집사 한 분뿐인 것이다. 남자는 한 분도 없었다. 물론 강집사도 빠지고 또 농번기라 못 온 교인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게 몇 명이나 되랴? 더러 약한 교회를 보기는 하였지만 이렇게 약한 교회는 처음 보는 것이다. 그러니 벌써 옛날이 되었지만 1999년인가 연변대학 조문학부에서 교수들이 봄 소풍을 이곳으로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도 그곳의 교수라 따라왔다가 여기에도 교회가 있다기에 찾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교인이 5~60명 된다고 하였다. 그렇던 교회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눈물이 나오려 하였다.     전도사님의 설교는 지루하였다. 무엇보다 어떻게나 추운지 무릎이 시리고 다리가 떨려왔다. 그래 더욱 지루하게 느껴졌다. 8시 반이 가까워서야 끝이 났다. 부리나케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추위는 나 혼자만 타는 듯 호들갑을 떠는데 다른 분들은 다 태연하였다. 나는 방에 들어와서도 구들목에 앉아 한 참을 지나서야 겨우 안정을 찾았다.     방에는 이미 밥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제의 닭으로 닭죽을 끓였다. 거기에 떡도 있어 맛있게 먹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아침을 먹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거지도 채 마치기 전에 전도사님은 날더러 이야기를 하란다. 나는 약속대로 이야기 한 자리를 하기로 하였다. 한국 6,25 사변 전후의 가난하고 암울하였던 시절, 어느 농촌 한 여인의 한 많은 삶의 이야기를 하였다. 지주에게 당한 원한이 너무도 커 아들 이름을 “복수”라고 짓고 그 한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였다. 모두들 둘러 앉아 귀기우려 들었다. 그 시절의 삶은 지금 이곳 농촌에서도 비슷하게 겪은 삶이라 호소력이 있었다. 약 30분가량 하였을까? 이야기는 끝이 났다. 많은 분들이 진지하게 반추하는 듯하였다.     이야기가 끝나니 자연 일정에 대한 말이 나왔다. 여기 더 있으면 폐만 더 끼칠 것 같고 또 강집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는 너무 시간이 많이 남았던 것이다. 그래 그만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애초 가급적 이틀을 자고 간다던 계획을 완전히 앞당긴 것이다. 우리는 감사의 인사와 약간의 사례를 드리고 그리고 교회를 돕는 정성도 함께 드리고 곧 출발하였다. 이번엔 좀 두르더라도 좋은 길로 가기로 하였다. 두만강을 끼고 남평까지 가서 선경대 쪽으로 꺾어 화룡으로 가는 길이다.     오른 편으로 강 건너 북쪽을 바라보니 예나 다름없이 산비탈에 밭을 일구어 놓고 있어 안타까웠다. 얼마나 쪼들리면 저 비탈에 저렇게 밭을 일구었을까? 비가 오지 않으면 한 톨도 수확을 못할 것이요 또 비가 조금만이라도 많이 오면 사태가 나서 밭 자체가 망가질 것이다. 생각할수록 측은하고 안타까웠다. 거기에다 “21세기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커다란 입간판은 차라리 치욕이었다. 그 인민이 굶어죽는 판에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인지 서글픔이 밀려왔다.     한참을 오다 보니 큰 도시가 내려다 보였다. 무순이었다. 거기 길가에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기에 우리는 차를 멈추고 내렸다. 동양최대의 광산이란 설명이 있었다. 강물은 잿빛이었다. 석탄 탓이리라. 그런데 이 석탄들은 다 중국으로 온단다. 40년인가 50년 중국에 팔았단다. 하기야 돈이 아쉬우면 무엇인들 팔지 않으랴만 다만 그 판돈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그런 돈을 잘 썼더라면 오늘 저렇게 백성들이 배고파 아우성을 칠까? 생각하니 참으로 원망스럽기도 하고 일변 딱하기도 하여 속이 탔다. 저 생지옥의 삶이 언제까지 이어지려나?  나는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두만강 강가에서                                    두만강은 잿빛                                  무순탄광 석탄                                  강 건너 시집보내려                                    두만강은 초상집                                  오며 가며 죽은 목숨                                  강물도 통곡하며 흐르고                                    하늘은                                  장님인가?                                  귀머거린가?                                     나마저 오늘                                   두만강 강가에서                                   이렇게 목 놓아 우는데.           정말 울고 싶었다. 북한 인민들의 그 굶주림을 생각하니 바로 눈물이 나오려 하였다. 굶주림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지난 날 실지로 굶주림을 경험하였기에 잘 안다. 그냥 배고픔은 참을 수 있다. 정말 참기 어려운 배고픔은 오늘도 배가 고픈데 내일도 또 배가 고프리라는 절망감이 덮칠 때 정말 참기 어려운 배고픔이 밀려오는 것이다. 육체적 배고픔에 정신적 서러움마저 덮치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처지에 다다르는 것이다. 지금 북한 동포들이 겪고 있는 굶주림이 바로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의 굶주림이라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다. 생각할수록 간장이 녹는 듯 아파왔다.     얼마를 내려다보며 서성이다 다시 출발하였다. 2시가 지나 용정에 닿았다. 거기서 연길로 조금 오다 왼편으로 꺾어 조양천으로 향하였다. 어제 가져갔던 고기는 드려도 먹을 사람이 없다며 사양하기에 하는 수 없이 도로 가져왔는데 이를 먹으며 더 놀다 가자는 것이다. 마침 회원 가운데 한 분의 집에 가마솥도 있고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아 그리로 향하는 것이다. 숭선에서 못다한 신명을 다시 푸려는 것이다.                                     2011년 10월 5일.    
18    모아산 예찬 댓글:  조회:2488  추천:5  2011-08-30
   오늘도 모아산엘 다녀왔다.   이번 여름 거의 매일이다시피 모아산을 오른다.     매일을 올라도 싫증이 나지 않은 산이 모아산이다. 매일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어 매일 새로운 것이다. 그러기에 싫증을 낼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산이 높거나 골이 깊어서 그런 게 아니다. 높거나 깊다면 우리 같은 노인들은 오르지 못할 것이다. 정상이라야 겨우 해발  800m 내외, 거기다 산 중턱까지 버스가 오르니 아무리 노인 걸음이라도 1시간이 안 걸린다. 정상이 힘들면 산 둘레를 도는 게 좋다. 쉬엄쉬엄 쉬어가며 걸어도 두 시간이면 산 중턱 한 바퀴를 거의 돌 수 있다. 이런 여러 조건들이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다. 마치 노인을 위하여 마련하여 놓은 산인 것 같다. 더욱 친근감이 간다. 그래 매일 오르는 것이다. 오른다고 하나 정상을 오르는 게 아니고 그냥 숲길, 오솔길을 걷는 것이다. 그리고 숲에서 쉰다. 공기가 더없이 맑아 한껏 마시고 싶어서이다. 다 같은 숲이라 하여도 소나무 숲이 더 좋은 것이다. 모아산은 소나무 숲이 아주 짙다. 70세가 넘은 노인이신 소설가 류원무 선생님의 말을 들으니 자기들이 대학 다닐 때 나무를 심었다고 하였다. 그럼 벌써 50년은 넘는 것이다. 이 50년 넘은 소나무들이 빽빽하여 운치를 더할 뿐 아니라 공기를 그렇게 맑게 하여 주는 것이다. 이 모아산은 정말 연길의 보배이다. 연길은 분지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동서남북 어디를 가도 다 산이 있다. 그러나 아가자기하기가 모아산만한 산은 없다. 하긴 그래서 국가공원이라 지정을 받았으리라.     하지만 이 모아산에도 두 가지 흠이 있다. 첫째는 개울이 없는 것이다. 졸졸 흐르는 조그만 개울이라도 있으면 참 좋으련만 그게 없어 아쉬운 것이다. 그러나 대신하여 샘이 많다. 내가 아는 샘만도 일곱 개나 된다. 다 좋은 물이 나온다. 조물주는 이 산에다 개울 대신 샘을 주신 것이다. 다음의 흠은 온 산에다 여기 저기 마구 포장을 하여 놓은 것이다. 산을 찾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흙을 밟자는 것인데 아예 흙을 못 밟게 돌로 혹은 나무로 또는 시멘트로 길을 포장하여버린 것이다. 포장을 하여도 좀 좁게 하여 흙으로도 다닐 수 있도록 배려를 했으면 각자 자기 취미대로 걸을 수 있어 좋으련만 아주 널따랗게 온 길을 다 덮어 흙길을 밟을 수가 없도록 하였다. 마치 흙은 밟으면 무슨 전염병이라도 옮게 되는 듯 조심을 시키는 것 같다. 4, 5년 전인가? 처음 이를 만들 때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많았는데도 기어이 강행하여 이렇게 망쳐 놓은 것이다. 그러나 망쳤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 같은 사람의 일방적인 생각이요 이렇게 만들어 놓은 후에 유람객이 몇 배가 되도록 더 많아졌으니 역시 정부의 안목이 높고 바른 것인가? 판단이 헷갈린다.       이렇게 좋은 모아산을 나는 처음엔 너무 얕다고 깔보고 잘 오르지를 않았다. 등산대원들을 따라 더 높고 더 먼 데 있는 산을 즐겨 찾았다. 그러나 내 체력으로는 한계가 있어 남에게 짐이 되기 일쑤였다. 그래 아쉽지만 그만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꿩 대신 찾은 닭이 모아산이었다. 그러나 몇 번을 다니다 보니 그만 정이 붙었다. 또 동행자가 많이 생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등산 팀을 만들었다. 대부분 한국인이나 한 두 사람이지만 조선족도 있고 한족도 있다.     얘기가 좀 빗나간다만, 팀에서는 매 주 토요일, 일 년 열두 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을 오를 뿐만 아니라 산을 좀 깨끗하게 하자며 쓰레기를 줍는다. 이 일에는 팀 책임을 맡은 함갑주 선생이 적극적이었다. 그가 작고한 이후에는 지금의 고석문 대장이 벌써 6, 7년째 맡아 팀을 이끌어 열심히 산을 오르며 쓰레기를 줍고 있다. 연변 TV에서 몇 번인가 취재하여 방송한 일도 있었다. 그 덕분인가 산 관리하는 곳에서도 유급으로 사람을 써 쓰레기를 치우고 있다. 하여 이제 모아산은 제법 깨끗하여졌다. 그러나 아무리 줍고 치워도 시민의식이 동반하지 않고는 실효가 적다. 아직도 음식 쓰레기를 그냥 버리고 가는 사람들이 많다.     모아산은 그래도 많이 났다. 연변대 뒷산, 주덕해의 기념비가 있는 근처엘 가면 악취가 코를 찌른다. 그 어른에 대하여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토록 연변을 사랑하시다 가신 분이라 이렇게도 산을 더럽히는 연변의 무리들을 보며 얼마나 한탄하시지 않으실까? 길 건너 혁명열사 기념관 앞산도 마찬가지이다. 또 소하룡 천년송 뒤편으로 가면 역시 같은 현상이다. 천년송 유람구는 입장료를 받는데도 그 돈을 어디에 쓰는지 천년송 근처만 빠끔하게 치울 뿐 조금만 들어가면 아예 쓰레기더미이다. 이런 곳들을 더러 가서 치우기도 하지만 역부족이다. 또 보면 대학생들이 더러 와서 치우기도 하지만 그들 역시 역부족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 따위 몰염치한 짓들을 하는지 한심하기 그지없다. 사람을 고용하든 어떻게 하든 모아산 만큼이나마 깨끗하여진다면 다행이련만 언제나 그렇게 될는지 참으로 딱하다.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가자.     내가 이렇게도 좋은 모아산에 대하여 처음 들은 것은 99년 연변으로 오던 해이다. 그 해 화룡 숭선에 학부 교수회에서 놀이를 갔는데 그곳의 산 하나를 가리키며 군함산이라고 하였다. 이 산골에 웬 군함인가 의아하여 물었더니 군함같이 생겼으므로 군함산이라 한다고 하며 연길의 모아산과 같은 이치라고 하였다. 그럼 모아는 무엇이냐 하니 모자라 하였다. 그렇다면 모자산이지 왜 모아산이야 하니 중국어로 모아가 모자란다. 그런가 하였는데 나중 중국어를 조금 배우고 자세히 보니 음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이른바 얼화(兒化) 현상으로 생긴 말이었다. 그러니 이 산은 정확하게 중국어로 말하려면 “마오얼산”이어야 하고 조선어로 정확히 말하려면 “모자산”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중국말도 조선말도 아닌 중간쯤의 말 “모아산”은 어인 연고인가? 중국어로 “마오얼산(帽兒山)”이라 쓰여진 것을 그대로 조선 음으로 읽어버리니 그만 “모아산”이 돼버린 것이다. 그러니 “모아산”이란 말은 중국말도 아니고 조선말도 아니고 철저히 연변 언어인 것이다. 그래 더욱 정감이 가는 것이다.     중국도 아니고 조선도 아닌 것, 그리하여 순수 연변의 것이 돼버린 것, 그것은 “모아산” 뿐만 아니라 또 하나 “사과배”란 것이 있다. 이는 사과도 아니고 배도 아닌 것이다. 순수 연변의 과일 “사과배” 인 것이다. 연변으로 대표되는 조선족의 정체성이 바로 이 “모아산”과 “사과배” 이런 것이 아니던가? 다행히도 모아산 기슭엔 이 사과배가 몇 십리가 넘게 뻗어 있다. 이야말로 연변의 자랑이요, 상징이다. 그래 모아산을 찬양하여 보았다. 영광스럽게도 월간지에서는 지난 6월호 표지에다 이를 실어 주었다.                                 모아산 찬가                                     모아산은                                   조선족이다.                                     마오얼산도 아니고                                   모자산도 아니고                                   모아산이다.                                     멀리 백두산을 우러러                                   굽어 두만강을 그리며                                   해란강, 부르하통하                                   끌어안고 버텨앉아                                   사과배 품어 기르며                                   모아산은 모아산으로 살아간다.                                     역시                                   모아산은                                   조선족이다.                                  백두산과 두만강으로 상징되는 모국을 그리면서도 의연히 조선족으로 조선족의 상징인 사과배를 품어 기르며 버티어 살아가는 장한 우리 동포, 그게 바로 모아산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모아산을 사랑한다. 모아산 같은 우리 동포를 사랑한다. 존경한다. 모아산이여, 영원하라.           2011. 8. 20  
17    단돈 1원의 온정 댓글:  조회:2381  추천:62  2011-05-16
단돈 1원의 온정안병렬  장춘에 일이 있어 갔다. 내가 사는 연길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늘 기차를 타고 다녔는데 이젠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이용한다. 나도 편히 간다기에 버스를 타고 갔다. 흔히 5시간이면 간다던데 그건 어디까지나 자가용으로 막 달리는 경우의 이야기이고 버스는 가다가 쉬기도 하고 또 중간에서 손님을 받기도 하여 6시간은 넘게 걸리는 형편이었다.   오후 4시경 도착하니 전혀 낯선 곳이었다. 그래도 대강 기차역 근처이거니 여겼는데 영 다른 곳이었다. 어디 시장 한 복판 같았다. 택시를 잡으려니 도무지 잡히지를 않는다. 심지어는 어쩌다 빈 택시를 하나 잡아 좋다고 타려는데 행선지를 묻더니 안 된다며 가버린다. 중국에 와서 이렇게 택시 잡는데 어려움 당하기는 처음이라 당황하였다. 할 수 없이 가려던 호텔로 전화를 하여 사정을 말하니 지금 택시의 교대 시간이라 그러니 몇 번 버스를 타고 오란다. 가르쳐주는 번호의 버스를 겨우 찾아 타는데 또 방향이 틀린단다. 다시 길을 건너 한참 기다리다 그 번호의 버스를 만나 탔다. 후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또 낭패를 당할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버스비 1원이 없는 것이다. 돈이 없는 게 아니라 1원짜리 지폐도 동전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도 1원짜리는커녕 5원짜리, 10원짜리도 한 장 없고 100원짜리만 자꾸 나온다. 돈을 못 넣고 머뭇거리니 기사는 험상궂은 얼굴로 뭐라고 한다. 내가 못 알아들으니 내리라며 손짓을 한다. 암만 다급하다고 하드라도 1원 대신 100원을 넣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내릴 수도 없는 일, 마침내 나는 손님들을 향해 100원짜리 돈을 들고 흔들어 보이며 “지에게이 워 이콰이” (1원만 빌어 달라.) 서툰 중국말로 애걸을 하였다. 마침내 어떤 부인이 1원을 주신다. 얼마나 고마운지 나도 모르게 저절로 90도의 절이 나왔다. 이 1원은 정말이지 100원보다도 더 고마웠다. 누가 나에게 돈 100원을 공으로 주더라도 이 1원보다는 보다는 덜 감사하리라.      그러나 이 부인의 고마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호텔 앞이라 하여 내리니 호텔이 없는 것이다. 또 당황할 수밖에. 어리둥절하여 두리번거리는데 이 부인이 웃으며 다기오지 않는가? 처음 나는 그 돈 1원을 받으러 오는 줄 알았다. 나중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이끌어 호텔 앞까지 와서는 잘 가라며 손을 흔들고 오던 길로 되돌아 가버리는 게 아닌가? 짐작컨대 도로를 수리하는 중이라 버스가 엉뚱한 곳에 섰기에 모를 것 같으므로 안내를 하러 온 것임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나는 돈 받으러 온 줄로 착각하였으니 잠시나마 마음만이지만 큰 죄를 지은 것이다. 참으로 미안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나는 장춘에 대하여 늘 좋은 인상을 갖는다. 그리고 그 1원의 고마움과 아울러 안내까지 하여주는 그 친절을 늘 기억하며 감사한다. 그래 그 얼굴마저 자주 떠올리며 빙그레 웃는다. 그녀는 나에게 감사와 아울러 아름다운 추억거리도 만들어 주신 것이다.     다음 1원의 온정을 또 한 번 더 받았기에 여기 같이 적는다.   학부교수의 새벽 모임이 있어 집을 나섰다. 택시를 잡으려다 말고 생각이 나서 주머니를 만졌다. 돈이 없는 것이다. 바지를 갈아입느라 돈을 두고 온 것이다. 다시 집으로 가려니 이미 시간도 급하려니와 귀찮기도 하였다. 온 주머니를 다 뒤지니 8원 50전이 나왔다. 그런데 대체로 대학까지는 9원이나 10원이 나온다. 그러니까 50전 혹은 1원 50전이 부족한 것이다. 사정을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내려서 사정을 하면 새벽부터 남을 기분 나쁘게 할 것 같아 타기 전에 미리 8원 50전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래도 30대의 남자 기사는 흔쾌히 좋다며 타라고 한다. 대학 식당 앞에 차를 세우니 9원이 나왔다. 나는 미안하다며 손에 쥐었던 돈 모두, 그러니 8원 50전을 다 주었다. 그랬더니 이 기사가 재미있는 말을 한다.  갈 때는 어떻게 가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갈 때야 뭐 누구에겐들 빌리면 되는데 무슨 문제가 되랴만 그래도 나는 웃으며 돈이 없으니 걸어서 가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이 기사 진지하게 들었던지 돈 1원을 떼어 주며 버스를 타고 가란다. 나는 너무도 고마워 그 돈을 받았다. 그리고는 세세(謝謝)를 연발하였다. 그리고 정말 그 돈으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그 1원을 요긴하게 써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장춘의 그 부인과 그리고 연길의 이 기사.   나는 정말 이런 분을 만난 것을 감사한다. 그날 그 시간 그 아쉬움을 해결하여서 감사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그분들의 그 따뜻한 마음 씀이 지금까지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하므로 더욱 감사하는 것이다. 단돈 1원으로 말미암은 그 온정, 나도 이 온정을 누구에겐가 갚아야 할텐데.               2011. 3. 24.        
16    끈질긴 배달민족의 얼 (안병렬) 댓글:  조회:3063  추천:51  2010-10-25
끈질기게 이어져 오는 배달민족의 얼   안병렬   몽골에서의 일이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나는 중국에 거류증이 있어 입국비자를 받을 필요가 없지만 같이 간 구 선생은 그냥 여행비자로 중국에 오셨기에 또다시 중국 입국비자를 받아야 한다. 그래 중국대사관을 찾아갔다. 죽 길게 줄을 지어 문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키가 훌쩍 크고 안경을 낀,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몽골여자 같은 분이 왔다. 몽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그 몸 어디선가 품위가 돋보이는 인상이었다. 고상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우리 뒤에 줄을 서더니 구 선생더러 몇 시냐고 정확한 한국말로, 그것도 서울의 세련된 말로 묻는다. 구 선생과 내가 하는 말을 듣고 한국인임을 안 모양이었다. 구 선생이 9시 조금 넘었다고 대답한다. 한국인인가 여겨 더 이상 괘념하지 않았다. 관광 온 한국인이 더러 있기에 그렇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이 분이 거기 보초를 선 군인에게 몽고어로 무엇을 묻는다. 그러니 그 군인이 벽에 붙은 안내를 가리키며 뭐라고 대답한다. 아마 왜 아직 문을 열지 않느냐고 묻고 여기 9시 30분에 연다고 쓰여 있지 않느냐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이 분은 몽고 사람으로 한국말을 배운 모양이라고 생각하였다. 몽골에서도 한국어를 배운 사람들을 간혹 만난 경험이 있기에 그런가 보다 하였다. 그런데 이 분, 이번엔 서양인들이 웃고 떠드는 틈에서 웃으며 뭐라고 한다. 그럼 이분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가? 의문과 함께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 직접 물었다.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인데 그렇게 여러 나라 말을 구사하느냐고 하였다.   그랬더니 웃으며 자기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헷갈린다는 것이다. 자기는 나기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나고 자라기는 몽골에서 자라고 결혼은 영국 사람하고 하였고 지금 살기는 워싱턴이라고 하면서 몽골에 국적이 있으나 미국에 또 시민권이 있어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자기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 몽골 국민은 중국에 비자 없이 가는데 자기의 경우 몽골 국적자로 인정을 받아 비자 없이 갈 수 있을지 아니면 미국 시민으로 인정을 받아 입국 비자를 받아야 하는지 그걸 물으러 왔다는 것이다. 그 문제는 조금 있다 들어가 물어보면 될 것이므로 나는 우선 궁금한 것을 물어 보았다.   몽골에서 자라고 미국에서 살므로 몽골말과 영어를 잘하는 것은 이해가 되나 한국어는 어떻게 그리 잘하느냐고 하였다. 이 말에 이분은 긴 설명을 하였다. 이 설명이 나를 감동케 하였다. 한국어는 나면서부터 배웠다는 것이다. 그래 한국어가 자기에게는 가장 모어라는 것이다. 하도 놀라 어쩐 일이냐 하니 자기 외할머니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이다. 원래 외할머니는 그 부모를 따라 한국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와서 살다 스타린 시대에 강제 이주를 당하여 우즈베키스탄으로 갔는데 그때 어린 소녀였던 외할머니가 따라가 살다 거기서 우즈베키스탄 사람과 결혼하여 자기 어머니를 낳았으므로 어머니는 자연스레 한국어를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는 그곳에 온 몽골 사람과 결혼하여 자기를 낳았는데 자기는 어릴 때부터 자기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하는 한국어를 배웠다는 것이다. 그러다 나중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의 고향 몽골에 와서 학교를 다녔으므로 몽골어를 배웠고 그러다 커서는 이곳에 온 영국 청년과 만나 결혼하고 미국에 가서 살다보니 영어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남편이 서울에 파견 와서 살게 되어 서강대학교 어학당에 다니면서 한국어를 더 철저히 공부하였다고 하였다. 이번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돌아가는 길에 중국에 잠깐 들르려고 이곳 대사관에 왔다고 하였다. 이제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몽골에 올 일이 없어졌다며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긴 사연을 듣고 나니 가슴이 뭉클하였다. 외할머니에서 어머니, 그리고 이 딸에게 이어지는 그 연면하고도 끈질긴 한국어의 계주(繼走). 일찍이 어느 분이 여자가 민족을 지킨다며 유태인을 예로 들더니 정말 그 말이 실감나는 것이다. 그 분의 말에 의하면 어머니가 유태인이면 그 자녀는 꼭 유태인이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버지가 유태인이라도 자녀가 다 유태인이 되는 건 아니란다. 이렇게 여자에서 여자로 이어져 가는 민족의 얼. 이분의 가정도 그렇게 유태인처럼 배달민족의 얼을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 한 줄기 배달민족의 가냘픈 피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나는 비록 물어보지는 못하였어도 이분이 또 자기 자녀에게도 한국어를 가르쳤으리라고 상상하여 보았다. 자기가 한국에 살면서 한국어를 더 깊이 공부하였다니 그때 자녀에게도 가르쳤으리라 짐작되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끈질기게 이어져 오는 할머니에서 어머니, 그리고 이 딸, 어머니의 민족, 배달민족에 대한 동경, 향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요즘 많은 한국인들이 외국에 가서 산다. 그러나 한국어를 지키어 자녀에게 가르치는 부모가 얼마나 되던가? 오히려 영어만 잘하면 된다고 영어만 가르치는 부모가 훨씬 더 많지 않던가? 그리하여 끝내 그 아이들로 하여금 국적 미상의 국제 미아로 만들어 결국 그 자녀들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던가? 이 반민족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부모들은 대개가 다 상당한 지식인들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가장 무식한 짓이다. 그 자녀를 출세는 시킬지 몰라도 정서적으로 고향을 잃은 미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어리석은 부모들은 이분의 이야기를 한번 진지하게 경청하여 주시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어머니에서 어머니로 이어지는 그 가냘픈 핏줄기의 계주를 한번 상상하여 보시길 바란다. 그러나 그 가냘픈 피도 민족을 지키지만 그보다 거기 깃들인 얼이 민족을 지킨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외국, 특히 서양권에 사시는 당신들은 그 튼튼한 피에 무슨 얼을 심고 있는가? 잘 음미하시며 부디 이분을 생각하여 보시기 거듭 바란다.    10. 8. 7. 
15    경주를 다녀보며 (안병렬) 댓글:  조회:2464  추천:54  2010-06-14
경주를 다녀보며 안병렬 경주는 내 고향이다. 나는 경주에서 나고 자랐다. 나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 위 할아버지께서도 경주에서 나시고 자라시고 사시다 경주에서 돌아가시고 경주에 묻히셨다. 나 또한 경주에서 나서 자라고 비록 지금은 타향, 아니 타국에까지 흘러 들어와 살지만 언젠가 경주로 돌아가 묻힐 것이다. 그러므로 경주는 나에게 영원한 고향인 것이다. 외국에서 손님이 오셔서 그를 안내하여 안동에 가서 하루 묵고 오늘은 경주엘 갔다. 모처럼 들르는 고향이다. 먼저 불국사엘 갔다. 아련히 지난 날이 그리워졌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가 처음 불국사에 갔던 기억이 나는 것이다. 오늘은 이렇게 차로 금방 가지만 그때는 경주에서 기차를 타고 동방역을 지나 불국사역에 내려 약 30분을 걸어서 불국사에 닿았다. 선생님을 따라 줄을 지어 재잘거리며 갔던 것이다. 그러나 절 앞에 이르러서는 옷들을 바로 하고 조용히 하였다. 특별히 선생님이 시키신 것도 아닌데 그 분위기가 그렇게 엄숙하게 만든 것이다. 옛날엔 그 밑으로 물이 흘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청운교 백운교를 지나 사찰 경내로 들어가 다보탑과 석가탑을 보았다. 다보탑은 참 아름다운데 석가탑은 왜 이리도 재미없는가 여기던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 탑에 얼킨 아사달과 아사녀의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을 글썽이던 기억도 떠올랐다. 석굴암에 올라갔다. 그 옛날엔 쉬어 쉬면서 올랐는데 오늘은 차로 금방 올랐다. 그러나 석굴암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옛날엔 앞에 아무 것도 가리운 게 없어 석굴 안으로 바로 들어가 부처님 뒷 모습도 보았는데 지금은 앞 모습만 보게 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동 서 쪽으로 건물이 들어서서 아늑하던 풍경이 번잡스러워진 듯하여 안타까웠다. 석굴 자체를 유리로 막은 건 석불 보호 차원에서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옆 건물은 좀 떨어져 지었으면 좋았으련만 왜 그렇게 바짝 다가가 지었는지 답답하였다. 내려오면서 안압지를 들르려다 시간이 촉박하여 그냥 지나치기로 하였다. 그런데 또 하나 안압지에의 추억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이던가? 어느 봄날이었다. 세 쩨 시간인가 네 쩨 시간 수업을 마쳤는데 누군가 안압지에 처녀가 투신자살을 했는데 보러 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비밀로 하여야 하기에 쉬쉬하며 몇 몇 친구들에게만 알리었다. 우리는 네 쩨 시간을 마치자마자 뛰쳐나와 안압지로 달려갔다. 내가 다닌 경주 중고등학교는 안압지에서 직경으로 500메타가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그때 나는 그런 친구들 틈에 끼일 인물이 못되었는데 어떻게 끼었는지 같이 갔다. 가니 막 시체를 건진 뒤였다. 처녀라고 하여 갔는데 50대의 여자였다. 그 옆에서 땅을 치며 우는 여인이 처녀였다. 그 처녀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였다. 그래 그만 그곳엔 들어가 보기를 그만 두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하나 안압지에의 추억 5,16 군사혁명을 일으키고 박정희 육군 소장이 정권을 잡은 뒤 경주엘 왔는데 그때 안압지를 들렀다. 나는 많은 사람들 틈새에서 뚫고 나와 바로 곁에서 그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군복을 입고 말채찍을 든 그의 모습이 참 냉혹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어떻게 저리도 용감하게 대중들 사이에 섞이어 있는지 그 대담함에 놀랐던 것이다. 안압지를 곁으로 지나서는 바로 박물관으로 갔다. 먼저 구내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고 전시실로 갔다. 하도 여러 개라 대충 보는 수밖에 없었다. 옛날 시내 중심에 목조건물로 지어진 박물관이 참 아담하고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건물도 반월성 기슭 유서 깊은 곳에 한옥처럼 지붕을 만들어 외관상 좋긴 하나 들어가면 온통 돌과 시멘트로만 입혀져 딱딱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다음 곧장 대릉원으로 갔다. 이곳을 찾는 많은 분들은 다 천마총에 매료된다. 그래 이곳도 대릉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천마총이라면 다들 안다. 그래 이곳에선 천마총이 단연 인기이다. 우리도 천마총을 한참이나 구경하였다. 이곳은 정말 나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바로 이 대릉원 안에 우리 집이 있었던 것이다. 원래 우리 집은 경주 시내 중심에서 북으로 40리 떨어진 호명이란 곳이었으나 해방이 되자 아버님이 밤마다 찾아드는 빨치산도 무섭고 또 우리 형제 공부 잘 시킨다고 경주로 이사를 하신 것이다. 그래 촌의 집과 논을 팔아 덩그런 기와집을 사서 이사를 하였는데 바로 지금의 이 대릉원 안이었던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으니 1946년인가 지금으로부터 60년도 지난 세월이다. 그러나 아직 내 눈에는 그 집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다. 위치는 지금의 대릉원의 북서쪽 끝이고 집 오른 편에 좁은 골목길 건너 봉황대가 하나 있었고 집 앞으로 한 집 건너 봉황대인지 얕으막한 산이 하나 있으며 산 위에는 소나무 두어 그루가 있었다. 그런데 집 오른 쪽의 봉황대가 지금의 천마총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동쪽으로 두 세집 건너서 몇 메터 가면 어불랑 봉황대 -혹은 어불랑 능이라고도 불렀는데 우리는 여기 올라가 미끌어져 내려오는 놀이를 즐겼다.-가 있었다. 집은 기와 담장으로 둘려져 있고 집안 서쪽에 우물이 있으며 동쪽에는 변소가 있고 앞 마당 가에는 감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대릉원을 처음 만들었을 때 그 감나무가 그대로 있어 참 반갑더니 나중 가니 그만 없어지고 지금은 그 위치도 어딘지 아리숭하여졌다. 집은 4간으로 방 두 개 대청 하나 부엌 하나였다. 또 집 앞 툇마루 앞에는 길고 큰 돌들로 축담을 이루었는데 나중 알았지만 그 돌들은 다 옛날 사찰이나 왕궁의 주춧돌들이었던 것이다. 집은 상당히 넓어 동쪽으로 채전을 일구고도 앞마당이 제법 되었다. 이 집에서 2년인가 3년 사는 동안 나는 서쪽에 난 골목길로 황남국민학교를 다녔다. 이 집에 정이 들어 이 집을 팔 때 무척 섭섭하였던 기억이 난다. 대릉원을 나와서는 바로 앞의 첨성대로 갔다. 첨성대 또한 나에게는 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다. 어릴 때 그곳에 가서 논 기억이 많은 것이다. 더러 친구들은 그 돌을 딛고 올라가기도 하였는데 겁이 많은 나는 쳐다보기만 할 뿐 오르고자 도전하지는 못하였다. 이 첨성대를 보면 또 하나 잊혀지지 않은 일이 있다. 6,25사변 때다. 그 해 9월 5일이라 기억하는데 기어이 경주 시내도 피란을 가게 되었다. 정부에서 철수하라고 한 것이다. 보퉁이들을 이고 지고 혹은 소에 싣고 남쪽을 향하여 무작정 피란을 가는데 가는 길에 첨성대를 지나가게 되었다. 저 첨성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비감이 들었다. 그래 물끄러미 보는데 옆으로 중학교의 지리 선생님이 지나가고 계셨다. 나는 인사를 하고 “선생님, 저 첨성대는 어떻게 되지요?” 하고 여쭈었다. 그런데 이 선생님, 그렇게 기운이 팔팔하시던 이 선생님 왈 “이놈아, 지금 그걸 물을 때냐?” 하시며 지나가시는 것이다. 그때의 그 허망하고 아득하고 답답하고 처량한 느낌, 그때 그 느낌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것이다. 그래 나는 지금 첨성대를 바라보며 내 조국이 이대로 이 첨성대를 지켰음에 감사를 하며 자긍심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첨성대를 잘 보존하려고 국도까지 바꾼 그 누구의 배려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첨성대를 보고는 시내로 들어와 황남빵을 사려고 찾아갔다. 황남빵은 또 나하고 인연이 깊은 것인다. 원래 황남빵은 지금의 대릉원 동쪽 큰 길 가에 있었다. 그러니 우리집에서 아주 가까웠다. 조그만 가게에 아저씨가 한 분 빵을 만들어 쟁반에 담아가지고는 밖에다 견본으로 내어 놓고 안에서 파는데 어찌나 비싼지 좀체 사먹기가 힘들었다. 늘 지나가며 침만 흘렸다. 그러다가도 용돈을 모아 모아 한 번씩 사먹는데 그렇게 맛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 뒤에도 언제나 그 맛을 잊지 못하여 경주에 들를 때면 꼭 그 빵을 조금 사갔던 것이다. 지금은 그 빵이 유명하여져 전국적으로 분점이 있긴 하나 그래도 바로 그 집에서 직접 바로 사는 게 좋은 것 같아 찾아가 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도 그 빵을 사러 갔는데 웬걸 사람들이 10여명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아닌가? 그만 포기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가 보아야 할 곳이 많으나 이제 시간이 없어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경주의 관광을 마치는 수밖에 없었다. 죽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의 유적이며 태종무열왕릉, 김유신장군의 묘, 그리고 박혁거세의 왕릉, 분황사에 또 남산의 이곳 저곳 등 아직 얼마나 갈 곳이 많은가? 그러나 그보다 나는 내가 가고픈 곳도 많았다. 옛날의 추억이 서린 곳이 그리운 것이다. 조금의 시간만 더 허락된다면 6,25동란 기간 학교는 미군에게 징발당하고 학생들은 갈 곳이 없어 계림 숲에서도 돌을 깔고 앉아 수업하고 저 서악서원에 가서도 공부하고 계림 앞의 향교에 가서도 하였는데 그런 곳도 다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또 남산 동 쪽 기슭 지금 화랑원이 있는 그 계곡의 옥류암에도 가 보고 싶었다. 그 계곡을 보고픈 사연이 있는 것이다. 동란 때 우리집 옆 방에 세 들었던 처녀가 있었는데 이북에서 1,4후퇴 때 국군을 따라 왔다고 하였다. 얼굴은 못난 편이나 마음씨가 참 고왔다. 나를 무척 귀여워 하였다. 나는 누나, 누나 하며 잘 따랐다. 이 처녀가 심심하여 자주 옥류암 쪽으로 놀러 가더니 어느 날 그만 오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 사랑하던 애인은 일선으로 간 뒤 소식은 없고 먹고 살 길은 막막하여 신세타령이 심하였는데 저녁 늦게까지 오지 않으니 나는 크게 걱정이 되었다. 언젠가 함께 놀러가서는 이런 곳에 묻혔으면 좋겠다는 말도 하던 터이라 옥류암 근처 어딘가에서 자살을 하였을 거라는 생각이 되어 온 밤 그 산을 헤매며 찾다 12시 통행금지 시간이 넘어 조심 조심 들어오니 그녀는 오히려 재미있다며 방글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어찌 그리 얄밉던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데 그 골짜기는 그대로 있는지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없는 걸 어쩌랴? 소님도 명년에 꼭 다시 더 와서 보겠단다. 안동도 더 보아야 하고 경주는 더욱 더 보아야 하겠단다. 그렇다. 인생이란 당장 한 시간 앞의 일도 기약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늘 이렇게 내일을 기약하는 설레임에 즐거움을 느끼는 게 아니던가? 나 또한 70살도 한참 넘은 고령이건만 내일에 기대를 걸며 오늘을 접어두는 것이다. 그게 또한 사람 사는 맛이리라. 2010. 1. 20. 주:요즘엔 게을러져서 글도 쓰지 않고 지났습니다.그러다 오늘 우연히 지난 글들을 점검하다 이 글을 드리고 싶어졌습니다.내 고향 경주를 알리고 싶어요. 자랑하고 싶어서요.행여 보시고 경주에 가고픈 분 계시면 제가 안내를 약속하겠습니다. 
14    돈의 수치와 가치 (안병렬) 댓글:  조회:2306  추천:66  2010-03-13
돈의 수치와 가치안병렬해마다 한 번씩 한국으로 나갈 때면 언제나 그 옛날 내가 섬기던 교회를 찾는다. 내 태어난 곳에서 10리도 못되는 곳에 있다. 나는 이 교회에서 서리집사로 3년, 그리고 장로로 19년을 섬겼다. 내 인생 황금기의 정열을 거의 다 바친 곳이니 어찌 잊혀질 수 있으랴? 그래서 나는 내가 죽어서도 이 교회가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내 묘지를 잡아놓았다. 이렇게 이 교회를 사랑하기에 교인들도 나를 잊지 못한다. 아니 그들이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도 사랑하는 것이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여 주시는가?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나를 장로로 불러주신다. 어디에 가서 무엇이 되었든 우리에게는 영원히 우리의 장로라는 것이다. 아, 얼마나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칭호던가? 그러기에 나도 이렇게 불리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러니 내가 매년 귀국할 때마다 한 번씩 꼭 찾고 교회 또한 한 번씩 꼭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때마다 고향에 온 푸근함을 맛본다, 오래 오래 붇들고 얘기하고 놀고 싶다. 올해도 그랬다. 그 가운데서도 더욱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할머니 권사님들의 인정이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 그들은 나를 얼싸 안는다. 개중엔 나보다 연장자도 많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나와 거의 비슷한 연배임에도 허물없이 나를 안으며 반긴다. 그만큼 서로 사이에 거리가 없으니 서로가 반가운 것이다. 그 따스함은 나를 거의 울게 만든다.   그리고 더욱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그 얼싸 안는 와중에 서로가 손을 잡고 악수를 하다 보면 손바닥에 무언가 만져지는 것이 있는데 손을 펴보면 만원짜리 돈이 꼬깃 꼬깃 접혀져 있는 것이다. 무심결에 주머니에 넣었다가 집에 와 펼쳐 보면 대개 한 두 장인데 어떤 때는 세 장인 경우도 있다. 그 돈을 펴보며 나는 운다. 그 마음 쓰심에 내 가슴이 찡해 오는 것이다. 어디 넉넉한 분들인가? 대개 고달프게 사시는 분들이다. 내외분만 오두커니 사시거나 혼자 사시는 분, 또는 아들 며느리에 얹혀 사시는 분들이라 자기 돈이 있을 리 없다. 그런 분들이 나를 생각하고 한 두 푼 모았다가 주시는 것이다. 내 아무리 목석같이 굳은 인간이라 한들 이 돈을 받으며 울지 않으랴? 울면서 한 분, 한 분 얼굴을 떠올리며 축복을 한다. 부디 노년에 건강히 사시다 가시라고, 그리고 아들 딸 손자 손녀, 온 가족이 다 믿음 가운데 잘 되시라고.    그런데 올해는 더욱 감격스러운 일을 당하였다.   90이 되신 노 권사님을 찾아 뵈온 것이다. 옛날 바로 이웃하여 살면서 정이 두터웠던 사이라 해마다 찾아 뵈옵곤 하였는데 요 1, 2년은 그만 뵈옵지를 않았다. 찾아 뵈오면 꼭 돈을 주시기에 부담스러워 일부러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섭섭해 하시랴 싶어 올해는 틈을 내어 찾아뵈었다. 전에는 따님 댁에 계셨는데 지금은 맏아드님 댁에 계셨다. 맏아드님 내외분도 이미 환갑인데 그 어머님을 참으로 잘 모시고 계셨다. 진정으로 효도를 다하기에 많은 분들의 칭송을 받는다고 하였다. 기동을 못하시므로 대소변도 받아 내는지라 남들 같으면 벌써 양로원 같은 곳으로 보냈을 터인데 즐거이 집에서 극진히 모신다는 것이다. 참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그 장로님 내외분이 존경스러웠다. 또 내 자신의 불효를 깨닫고 부끄러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가서 뵈오니 의외로 정신만은 초롱초롱하셨다. 진정으로 반가워 하시는 모습이 예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지금도 날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기도하신다는 말씀엔 가슴이 찡해졌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폐를 끼칠까봐 일어서는데 며느님이 억지로 붙든다. 차라도 한 잔 하시란다. 차를 드는 사이 봉투를 가져온다. 어쩔 수 없이 받아왔다.   집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하면서 받은 봉투를 아내에게 주었다. 돈 9.000원이 들어 있다고 하였다. 그 9,000원이란 돈이 다른 사람의 몇 만원 몇 십만원보다 더 많은 돈이라며 봉투를 다시 받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9,000원이 아니라 10만원이었다. 아내가 5만원짜리를 5,000원짜리로, 그리고 만원짜리는 천원짜리로 착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장 만원짜리가 봉투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돈을 들고 나는 또 한 번 울며 눈물을 흘렸다.  이 돈이 어떤 돈이냐? 이 돈을 모으려 기동도 못하시는 늙으신 할머니가 얼마나 애썼으랴? 한 푼 두 푼 아들 손자, 손녀들이 와서 드리는 돈을 꽁꽁 묶어 놓으셨다가 나에게 주시는 게 아니던가?   내 어이 이 “정성과 눈물의 돈”을 그냥 쓰랴? 아무래도 내가 그저 쓰기에는 너무 죄송할 것 같았다. 내가 쓴다면, 그 돈은 몇 백만원 가운데 아주 미미한, 그냥 10만원의 효과밖에 못 내기 때문에 별 의의가 없을 것 같았다. 다 같은 10만원의 돈이지만 이 10만원은 그냥 10만원이 아니기에 그 액수보다도 그 할머니가 쏟은 정성, 그리고 내가 흘린 그 눈물이 제 값을 내는 데 쓰이어야만 할 것 같았다. 이 인간 사회의 경제구조가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십억을 가진 부자의 10만원이나 전 재산이 10만원뿐인 할머니와 같은 분들의 10만원이나 그 돈이 쓰일 때는 똑 같은 효과를 가진다는 게 참 억울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어쩌랴? 냉혹한 이 사회에서는 같은 걸. 내 혼자 발버둥 치며 “그렇지 않소.” 할지라도 될 리가 없으니 어쩌랴? 그래도 나는 그냥 10만원으로 쓰기에는 너무 죄송하였다.   나는 그 돈을 조금이라도 제 값을 받을 수 있는 곳에 써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한참을 고민하다 연변에서 이곳에 와 공부하는 대학생에게 주기로 하였다. 그에게 이 10만원은 몇 100만원 가운데 10만원이 아니라 아마 몇 10만원 가운데 10만원이 될 것이므로 그 정성과 그 눈물의 값을 조금은 제대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의 예금 통장에 입금시켜 주었다. 아마 그는 통장을 보고 놀랐으리라. 그리고 고마워 하리라. 그러나 사실 그 고마움은 내가 받아야 할 것은 아니나 굳이 변명하기도 번거로워 그만 두었다. 그보다는 그 고마움을 내가 가로채고 싶은 못된 욕심도 조금은 작용하였으리라. 그럼에도 나는 조금 무거운 짐을 벗은 듯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돈의 수치와 가치를 한 번 더 생각하여 보았다. 수치로는 다 같은 10만원이지만 가치로는 엄청나서 몇 100만원, 몇 1,000만원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므로 그 학생은 그 돈으로 그 가치를 상당히 발휘하리라 믿었다. 또 그렇게 되도록 빌었다. 그리고는 그 할머니 권사님께 감사함을 전하는 편지를 보내었다.   그러고 나니 손에 쥐어주신 이 돈은 어디다 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그 학생에게 이 돈마저 부칠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으나 이미 보내었는데 새삼스러이 또 몇 만원을 보내기도 우스웠다. 그러자 작년에는 그 돈으로 작은 가방을 하나 산 기억이 났다. 그래 올해도 늘 지니며 볼 무엇을 사기로 하였다. 그러자 만년필이 생각났다. 나는 볼펜을 잘 쓰지 않는다. 습관이겠지만 미끄러워 손에 힘이 가지 않으므로 글씨가 잘 쓰여지지 않은 감을 갖는 것이다. 마침 쓰던 만년필이 낡아 새로 사야 할 형편이었다. 교보문고 문방구에 가서 하나를 골랐다. 값이 받은 돈과 비슷하였다. 이 경우 안성맞춤이라 하던가? 매우 기뻤다. “앞으로 그 따뜻한 정을 생각하며 이 만년필로 따뜻한 글도 써야지.” 마음먹으니 흐뭇하였다.  정말 돈을 수치가 아니라 가치로 썼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지금 이 시간도 그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그 권사님들을 떠올리고 감사함을 느낀다. 부디 부디 건강하시라고 빈다. 2010. 3. 9중국 연길에서
13    [추모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애도하며 댓글:  조회:2693  추천:79  2009-08-24
      김대중 전 대통령을 애도하며                안병렬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             파란만장 그 일생도     죽음에 다다르고            식지 않는 그 집념도          마감할 날 오는구나.                                                마지막                                               화해와 용서                                                아름답게 가시네.                                                09. 8. 23. 3  
12    나의 수준 댓글:  조회:2222  추천:67  2009-07-12
이 글은 쓰지 말아야 할 글이다.왜냐하면 나의 치부를 너무 적나라하게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을 써야 한다.  써서 공개하여 나란 위인이 얼마나 덜되먹은 인간인지 남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래야만 혹시라도 나를 과대로 포장하여 보시는 분들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놈입니다. 나의 수준은 이 정도입니다.” 하고 나의 실상을 바로 알려야 나에게 사기를 당하는 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이다.   시골에서 기업을 하시는 분이 잔치를 한다고 우리 부부를 초청을 하면서 차를 보내겠다고 하였다. 고맙다고 하면서 한 분 더 갈 수 있느냐 하니 네 분까지는 된다고 하였다. 나는 이곳에 계시는 선배님 한 분을 모시고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그분에게 연락을 드리고 같이 놀러가자고 하였다. 그분도 고맙다며 같이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전날부터 허리가 아파 운신이 어려웠다. 1년에 한 번 씩 주기적으로 오는 병이다. 이럴 경우 침을 맞으며 혹은 안마를 받으며 며칠을 푹 쉬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처럼의 잔치에 어찌 외면할 수가 있으랴? 더구나 나는 외람되게도 그곳의 고문이라는 직함까지도 받아놓고 있는 터이라 안 갈 수가 없었다. 또 다른 분 한분도 초청해 놓은 상태인데 내 어찌 안 갈 수 있으랴? 억지로 일어나 아내와 함께 약속 시간에 약속 장소로 갔다. 선배님도 오셨다. 현지 분 세 분도 그리로 간다며 오셨다. 그러나 차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 차인가 저 차인가 하며 물어 보았다. 아니었다. 짜증이 났다. 30분이나 가까이 지나서야 차가 왔다. 7인용 승합차였다. 낯선 여자 한 분이 안내를 하였다. 나는 선배님을 앞자리에 모셨다. 현지 분 세 분은 뒷자리로 갔다. 나와 아내는 중간 자리에 앉았다. 이러니 안내원이 앉을 자리가 없어졌다.   그런데 이 안내하는 분이 아내더러 뒷자리로 가라는 것이다. 아내는 오래 전부터 만성적으로 허리가 아픈지라 뒷자리로는 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또 낯선 남자들 사이에 끼이기도 싫었을 것이다. 게다가 뒷자리는 본래 세 사람의 좌석인데 네 사람이 앉기는 몹시 비좁은 것이다. 그렇게 네 사람이 비좁게 타고는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가기는 힘 드는 것이다. 게다가 가는 길은 요즘 확장하느라 마구 파 헤쳐 놓아 차가 많이 비틀 거린다. 또 비포장 길도 있어 덜커덩거리면 허리에 무리가 올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허리가 아파 뒤에 앉기는 곤란하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이 안내하는 분이 이번에는 나에게 기어이 뒷자리로 가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그리로 가면 되지 않느냐?” 하니 자기는 가다가 내려 돈도 주어야 할 일이 있어 여기 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당돌하였다. 이미 이렇게 대접하며 나서는데야 더 이상 다투어 무엇하랴? “그렇습니까?” 하며 내리었다. 아내도 따라 내리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계시던 선배님도 내리셨다.   나는 화가 몹시 났다. 세상에 이렇게 사람을 대접하는 법이 있느냐 싶었다. 이 당돌한 여자도 그렇지만 초청하는 분에 대하여 더 섭섭하였다. 안내하는 분에게 뭐라고 하였기에 이렇게 마구잡이로 대하느냐 싶었다. 나의 수준이 이 정도로 대접 받는 수준인가 하니 서글펐다. 내가 뭐 대단한 인물이야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 대접은 받아야 하지 않느냐 싶은 것이다. 이 나이에 이 젊은 여자에게 이 무슨 꼴이냐 싶었다. 이왕 초청을 하다면 그래도 최소한의 예우는 있어야 그게 바른 초청이 아닌가 생각 되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더 났다. 씩씩 거리며 걸어오는데 그 고집스럽던 여자가 당황을 하였는지 쫓아오며 잡는다. 자기가 잘못했다며 이렇게 가시면 자기가 사장님께 뭐가 되느냐는 것이다. 낯이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이 더 괘씸하였다. 자기 낯을 제대로 바로 세우려면 우리를 바로 모셔야 하지 않느냐 생각되었던 것이다. 자기는 편한 자리에 편안이 앉으며 손님은 가기 싫은 자리에 앉히어서 학대하면서도 자기 낯을 세우려 든다니 어이가 없어 보였다. 손님은 푸대접으로 모시면서도 낯은 세우려 든다니 염치도 너무 없어 보이는 수작이었다. 대하기도 싫었다. 손을 뿌리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와버렸다. 조금 뒤 전화가 왔다. 잘못했다며 다시 가잔다. 나는 아직 화가 그대로 남아 이런 대접이 어디 있느냐고 야단을 치며 끊었다.   선배님도 오히려 잘 되었다며 의사를 불러다 침을 놓아 주셨다. 죄송하였다. 공연히 가자고 하여 오시게 하고는 가지도 못하고 또 추태마저 보이었으니 정말 이런 대접이 어디 있던가? 진정으로 죄송하다고 사과를 드렸다. 그러나 선배님은 아니라고 그런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고 초청하는 분을 나무라기만 하신다. 그럴수록 더 죄송하건만 말만 그저 죄송하다고 할 뿐이었다. 이런 저런 감정으로 마음이 영 편찮았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차차 제 정신이 돌아왔다. 아침의 그 치기(稚氣)가 부끄러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도대체 나의 처신이 잘못 되었던 것이다. 그 안내자의 조그만 실수를 핑계로 큰 일을 그르친 것이다. 그 잔치는 1년에 한 번 있는 귀한 잔치라 어떤 일이 있어도 가서 축하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별 것 아닌 일로 화를 내어 어린 여자를 난처하게 만들고 나아가 초청자까지도 무안하게 만 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잔치에 못 간 것이다. 하기야 뭐 내가 못간다 하여 그 잔치에 무슨 차질이 있거나 또 내가 간다고 하여 그 잔치가 더 빛나거나 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해야 할 도리는 해야 하는데 그걸 놓친 것이다.   자리 때문에 화가 났다면 그럼 그 차 말고 다른 차라도 타고 가야 하지 않았더냐? 왜 그 생각은 못 하였던지 참으로 답답하였다. 애초 허리로 인하여 가기 싫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 얼씨구나 좋다 하고 가지 않았던 게 아니더냐? 내가 비록 이성으로 지각하지는 않았지만 내 무의식에서는 그렇게 작용하였기에 다른 차로 간다고는 상상도 못한 게 아니던가?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상대의 조그만 실수를 빌미로 보다 근본적인 일마저 부정하였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더냐? 그야말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 삼간 태워버리는 격이었던 것이다. 또 초청하는 분도 그냥 모시고 오라고 시켰으면 되었지 뭐 앞자리 뒷자리까지 따져가며 모시고 오라고 할 것까지야 있었으랴? 초청하는 분에게 섭섭하다는 생각은 나의 교만이 아니냐? 생각할수록 자신에게 부끄러웠다. 또 원망한 상대에 대하여 미안하였다.   진정 내 수준이 이 정도인가?   정말 내가 이렇게도 좁쌀 같은 자잘한 인간이던가?   왜 좀 더 대범하게 처신하지 못하였던가?  “그래요?” 하며 뒷 자리로 가서 좀 견디었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게 아니더냐? 그 사이 허리가 아픈들 뭐 그리 대단하였으랴? 어쩌면 끼이게 앉았더라면 덜 아팠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프더라도 좀 참으면 될 일을 이렇게 여러 사람을 난처하게 하다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이더냐? 생각하니 스스로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내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후회하는 말을 하였다. 정말 내 수준이 이 정도인지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번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경멸스러웠다.   나는 당장 초청하신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못 가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드리려 하였다. 그러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오후 내내 되지 않고 이튿날도 되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그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우선 못가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려는데 그분이 먼저 사과를 한다. 더 죄송하였다. 나는 진정으로 정중하게 사과를 하려는데 통화가 잘 되질 않았다. 잘 들리지도 않고 잡음도 많았던 것이다.   이다음 조용한 기회에 다시 사과를 드리리라. 잔치에 못 가서 죄송하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을 원망하여 미안하다고. 또 그 여자에게도 사과를 하리라. 공연히 화내어 미안하다고. 그리고 모두에게 내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질 않아 부끄럽다고 고백하리라.                                                                        自嘲                                                                  고희를 넘겼어도                                                                소가지는 그대로라.                                                                   어린 여자 데리고선                                                                 자리나 다툼하고                                                                   이래도                                                                 군자연하는                                                                스스로가 가련타.                                                                                                                               09. 7. 4.
11    형님을 보내고 댓글:  조회:2534  추천:48  2009-06-23
           어버이 계시올 땐 가깝게 보이다가          어버이 가신 후론 우러러 보이더니          이제는 뵈올 수 없어 이 가슴이 녹는다.          한 가지에 나왔어도 한 집에 살았어도          가는 날은 다르고 가는 곳도 모르고          눈물도 메말랐는가 허허로이 보냈다.                     가난에 쫓기우며  분노에 치를 떨며          설움을 삼키시며 운명이라 체념하며          그리도 서글픈 인생 어찌 차마 가셨소?          꺾으면 꺾이어도 굽히지는 못하고          죽이면 죽더라도 굴복은 못하더니          죽음엔 어이 그리도 순진하게 따랐소?          평안히 가옵소서 맘 놓고 가옵소서          아들 딸 오남매에 손자 손녀 십여 명에          이생에 못다 이룬 한 저들이사 이루리.          고온 님 가신지가 두 달이 되건마는          아직도 고향집에 그대로 계시온데          어쩌다 정다운 음성 들을 길이 없는가?          아득한 고향산천 형님 계셔 미덥더니          이제는 누굴 믿고 집안일 맡기려나?          갈수록 그리운 마음 밀물처럼 스민다.          이렇게 가실 줄 일찍이 알았더면          이곳에 모시고서 여행이나 같이 할 걸          이 동생 따가운 마음 형님이야 알겠소?                    총각 때 잃은 사랑 평생을 앓으시고          그 아픔이 안타까워 저도 따라 아프더니          그 인연 깨트린 동생 사죄하며 웁니다.                   살아 생전 다정히 마주앉지 못하다가          보내고 후회하며 눈물 뿌려 아파하니          이리도 어리석은 줄 나도 정말 몰랐네.                   09. 4. 12.              형님을 보내고                                ---- 정녕 그 삶은 운명이던가? ---   형님 가신 지가 오늘로써 꼭 두 달이 된다.   연세 80에 가셨으니 천수를 누리신 샘이요 게다가 집에서, 그리고 병원에서 합하여 두어 달 오가며 치료 받으시다 와석종신 하시고 슬하의 자손들 다 제대로 자란지라 크게 안타까워 할 이유도 없다. 말하자면 호상이다. 그래 그러려니 하고 덤덤히 보내어 드렸다. 또한 6.25때 학도병으로 참전하신 용사라 나라에서 호국원에 모셔주시니 더욱 영광스럽게 여기고 보내어 드렸다. 게다가 교회장으로 모시니 그 절차가 종래 집안에서 하던 의식보다 한결 간편하고 가벼웠다. 도 교인들이 진심으로 도와주니 고마웠다. 원래 형님은 한때 교회를 잘 다니셔서 어느 해는 집사의 직분까지도 받으셨는데 그 후 무슨 일로 안 다니시더니 이번에 병상에 누워서는 다시 하나님을 찾으신 것이다. 이에는 교회 목사님의 꾸준한 심방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생각하고 감사한다. 이렇게 형님은 모든 걸 다 잘 마감하고 가셨고 또 우리는 보내 드렸다.   그런데 그렇게 “가시나 보다.” 하고 덤덤히 잘 보내어 드렸는데 이제금 새삼스러이 그립고 아쉬움에 이 가슴이 이리도 아파 옴은 어쩐 일인지 나도 모르겠다. 정녕 가시는 당일엔 담담하였는데도 요즘에 와서 왜 이리도 쓰리고 아파오고 그리워 몸부림을 치게 되는지 나도 모르겠다. 며칠 전에는 혼자 사무실에서 밤늦도록 울기도 하였고 오늘은 또 망연히 그리며 한숨을 쉬고 있다.   정말 정말 보고 싶다.   한번 만이라도 더 “형님” 하고 부르고 싶다.   그러나 계시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깝다. 가슴이 저린다.   어줍지 못한 내 글이지만 책이 나오면 가장 먼저 밤을 새워가며 읽으시던 형님, 그 형님이 안 계시니 누구 참으로 반기며 아끼며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이 있을까? 참으로 아쉽다. 참으로 원통하다. 보고파 보고파 몸부림이라도 치고 싶다.     조용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지난 늦가을 11월 말쯤이던가? 형님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하니 간암말기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전화를 이곳 중국 연변에서 조카들로부터 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크게 놀라워하지를 않았다. “올 것이 오는구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왜냐하면 지난 추석에 고향에 다녀온 막내로부터 “큰 아버님의 건강이 크게 좋지 않더라는 얘기를 들은 터요 또 우리 아버님 어머님이 다 간으로 말망마아 돌아가셨기에 우리도 언젠가 간으로 죽지 않을까 하는 믿음(?) 같은 게 있었던 까닭에서다, 또 지난 겨울 뵈었을 때 ”이제 내가 빚을 다 갚았다.“는 말씀이 이상하게 마음에 끼이던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빚이란 질 수도 있고 갚을 수도 있는 건데 또 형님이 지신 그 빚이란 게 살림이 쪼들려 진 빚이 아니요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무리하게 산 논 때문에 진 빚이라 크게 걱정할 성질의 것도 아닌데 그걸 그렇게 중요하게, 진지하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얘기하시는 게 나로서는 좀 심각하게 들렸던 것이다. 이게 무슨 불길한 조짐 같은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평소 워낙 건강하시던 분이라 그 날이 그렇게 빨리 올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서둘러 귀국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 급한 것 같지는 않으니 천천히 오시라는 형수의 말을 듣고는 조금 안심하며 제발 겨울 방학 때까지만 계셔 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방학에 가서 뵈오니 많이 수척하시기는 하여도 아직 가실 날은 멀었다고 판단되어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참 요사스러운 게 사람의 마음이라 막상 그렇게 생각보다 오래 투병하고 계시니 또 전혀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왕 회춘은 못하시는데 가실 바엔 그만 이 방학 동안에 가시면 아내와 내가 갔다 왔다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 편하겠다.“는 아주 약은, 그러나 아주 불충한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형님은 아직도 방학 중인 2월 12일 따뜻한 날씨에 가셨다. 이 비보를 그날 서울 여행 중에 들었다. 순간 ”그래 그만 가셨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보다  ”때 잘 맞추어 가셨구나.“ 하는 감사의 마음이 든 것이다. 형님이 돌아가셨는데 감사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갔다 왔다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돌아보아 생각하여도 참으로 못된, 부끄러운 생각이지만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 못된 동생은 그래 덤덤히 그렇게 형님을 보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달이 거의 지난 요즘에 들어서 새삼스레 이리도 그립고 보고 싶음은 또 어인 일인지 정말 내 마음 나도 모를 일이다. 평생을 서럽게 살아온 형님의 그 아픔이 되살아나서인가? 혹은 형님을 잘 모시지 못한 죄책감이 떠오른 탓인가?     생각하면 정말 형님은 서러운 삶을 사셨다.   태어나 어린 시절은 행복했었다. 천석군 부자의 작은 집 장남으로 또한 천석에 가까운 부자집 무남독녀의 아들로 태어나 친가와 외가, 두 집안에서 갖은 사랑을 다 받으며 자랐다.  일제시대에 초등학교를 마치고 해방과 더불어 중학교엘 갔다. 당시 중학교에 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동네에서도 두어 사람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대구로 유학을 갔다. 대구공업중학교로 간 것이다. 당시 경주에서 대구로 유학 간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요즘 미국 유학에 버금갈 만큼의 용기와 또 투자가 필요하였다. 또 당시 대구공업중학교는 신생 대한민국의 공학도가 선망하던 학교였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전두환 전 대통령도 거기 다녔다. 동기동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학교 5학년 때 터진 6,25는 형님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트렸다. 그 해 여름, 정확히 8월 15일, 형님은 학도병으로 입대하신 것이다. 세상 일이란 그리고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묘하여서 그 해 여름 그 전쟁이 터지자 일선으로 바로 달려가 적과 맞닥뜨려 싸운 형님은 그 전쟁으로 인생을 완전히 망치었고 사태를 관망하다 천천히 후방의 육군사관학교로 간 전두환씨는 그 전쟁으로 말미암아 일국의 대통령까지 된 것이다.   형님은 그 전선을 따라 원산에까지 진격하였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 시 부상을 당하셨다. 다리에 따발총을 맞은 것이다. 부산 육군병원에 입원하신 형님은 인생의 전환을 계획하였다. 이왕 군대에서 썩어야 할 몸이라면 장교라도 되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교가 되고자 육군사관학교나 아니면 간부후보생 학교에라도 가려고 지망하였던 것이다. 큰 결단이었다. 당시 형님의 학벌로서는 충분히 갈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발이 평족이라 조금 걸리긴 하였으나 돈 몇 푼 쓰면 될 일이었다. 그래 아버님과 상의하였더니 뜻밖에도 아버님은 완강히 반대하셨다. 2, 3개월 길어야 2년으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가 되어 일선으로 가는데 소대장은 최전방에서 총알받이가 되어 죽다는 것이다. 그러면 졸병으로 가도 죽기는 마찬가지라며 형님이 우기어도 아버님은 듣지 않으시고 그만큼 싸웠으면 되었지 다시 또 일선에, 그 죽음의 자리로는 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어이 형님을 후방으로 빼돌리셨다. 후방도 최후방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헌병으로 보낸 것이다. 그 바람에 농촌에 마지막 남았던 논 밭 몇 마지기도 끝내 다 날아가고 말았다. 본래 이재(理財)에 어두우셨던 아버님은 그 전에 이미 많은 재산을 날리셨는데 - 이를 남들은 다 주색잡기에 썼다고 험담한다. - 그래도 아직 그렇게 다 날리시지는 않았는데 형님 살리느라 마지막의 논이며 밭들도 다 날리셨던 것이다. 그때 나도 이미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조금은 기억하지만 당시 우리 집에는 어중이 떠중이 군인 장교들과 그 졸개들이 많이 들락거렸다. 다들 형님을 후방으로 빼돌려주겠다고 덤빈 브로커들이었다. 아버님은 그들을 칙사 대접하며 아들 후방으로 보내달라고 매어달린 것이다. 그까짓 농촌의 논 밭 몇 마지기쯤이야 금방이었다. 다 지난 일이지만 만약에 그때 형님 뜻대로 장교가 되었더라면 형님의 인생은 반드시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아버님 말씀처럼 총알받이로 전사하였던지 아니면 군대에서 상당히 고위관이 되어 휴전 후 군인 세상에서 제법 괜찮았을 것이다. 어쨌든 인생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또 그랬더라면 우선 그 가난의 고통도 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형님의 말씀처럼 다 운명이었던가? 후방으로 빠져 목숨은 건졌지만 가난에서 오는 많은 어려움이 형님의 앞길, 또  우리의 앞길에 놓였던 것이다. 집안의 가난도 모른 채 형님은 후방에서 잘 지내다 휴전을 맞고 얼마 지나 제대를 하여 나오셨다. 그러나 혹독한 시련이 형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앞서 또 하나 형님의 운명이 바꾸일 사건이 군대 시절에 있었다.   형님의 첫사랑 이야기이다. 이는 전적으로 형님 개인의 로맨스지만 이 로맨스는 형님의 일생에 엄청난 파도를 일으켰고 그 파도는 거의 이 동생으로 말미암아 벌어졌기에 이를 밝히는 것이다.   제대하기 1년쯤 전이던가? 형님은 경기도 안성에서 헌병으로 복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날더러 놀러오라고 하여 한번 가본 적이 있다. 그때 형님은 그곳의 처녀와 사귀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휴전 후라 느슨한 때이고 또 계급도 어느 정도 높아져 외출도 자유로웠던지 거의 그 집에 가서 죽치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그 후에 안 일이지만 형님께서는 나에게 그 처녀를 보이고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잘 말씀 드리라고 나를 초청하였던 모양인데 나는 너무도 뜻밖의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처음 처녀를 보니 덕이 있게 보이는 탐스런 얼굴이고 고등학교까지 나와서는 처녀의 몸으로 미장원을 차려 꾸려가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미용사가 상당한 직업이었다. 그러나 일은 이상하게 번져나갔다. 이게 형님의 말씀대로 운명이란 건지 모르지만 참 묘하게도 뒤틀려 나간 것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 처녀 집에 가서 하룬가 이틀을 지내다 그만 병이 났었다. 부득이 일 주일을 넘게 그 집에 있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그만 못 볼 것을 보고 만 것이다. 그 집에는 처녀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이 하나, 이렇게 셋이 사는데 처녀와  남동생의 성이 다른 것이다. 알고 보니 어머니가 일찍 남편을 여의고 이 처녀를 데리고 개가를 한 것이었다. 요즘에야 자연스럽게 흔히 있는 일인데 당시 어린 나로서는 영 언짢았던 것이다. 이런 개가 자체를 아주 불결한 일로 알았던 것이다. 우리 집안에서는 물론 외가 집안에서도 이런 일은 결코 없었던 것이다. 일찍 홀로 되셔도 다 수절하며 사는 게 도리인 줄로만 안 것이다. 또 그렇게 사시는 분들이 내 주위에는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형님이 이런 불결한 집의 처녀에게 장가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귀가하자마자 이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 드리며 빨리 끊도록 해야 한다고 고자질을 한 것이다. 나는 정말 형님과 우리 집의 순결을 위해 한 짓이었다. 그래 부모님들은 부랴부랴 며느리감을 고르고 날짜를 잡아 결혼을 시키려 하셨다. 자칫 그 처녀와의 사이에 아이라도 생기면 더 큰 일이라 여기신 모양이었다. 그러나 형님은 결혼 날짜에 오시지를 않았다. 집에서는 물론 신부 집에서 더 야단이 났다. 나중에는 신부를 그대로 시집으로 보내겠다고 일방통보까지 하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형님은 그 첫 사랑을 접고 부모님께 순종하여 억지로 결혼을 하셨다. 부모님은 한 시름을 놓으셨다. 그리고 그 어린 날의 불장난이야 곧 꺼지리라 여겼다. 그러나 형님 가슴의 그 불은 영 꺼지지를 않았다. 형수님이 형님께 그렇게 순종하고 잘하시는데도 안 되는 것이다. 아마 이성으로는 감당을 못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형님은 평생을 그 첫사랑을 못 잊고 그 상처를 안고 사시었다. 그래서 한 잔 자시면 :내 일생은 병렬이가 망쳤다.“고 하시고 또 말짱한 정신에서는 운명이라고 자위를 하셨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말 죄송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나의 경솔을 뉘우치곤 하였다. 하지만 어쩌랴? 다 지나간 일, 정말 운명인 걸.   이 첫사랑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제대를 하신 형님의 앞길에는 너무도 엄청난 고난이 놓여 있었다. 집에 와보니 우선 먹을 게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하였거니와 아버님이 가산을 다 탕진하신 것이다. 고향이라 하지만 벼 한 포기 꽂을 땅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혼을 한 몸이요 또 부모가 계신 데다가 어린 동생 하나도 그때는 있었다. 또 머지않아 당신의 아들도 태어났다. 이 대가족을 먹여 살릴 막중한 책임이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이 큰 책임에 동정의 손길은 거의 없었다. 큰집 작은 집은 그런대로 잘 사셨지만 아버님이 허랑방탕하여 가산을 날렸다고 믿으시는 그들로서는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 설사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그 가난에 그 가족을 어이 다 감당하랴? 결국 형님은 가난에서 오는 고통을 혼자서 짊어지고 고생하셨다. 그러나 그 고통보다 그 수모를 견디기가 더 어려웠으리라.                    .   그럼에도 형님은 참으로 강인하셨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 굶주림 가운데서도 당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패를 그대로 묵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민주당에 입당을 하셨다. 해공 신익희 선생이 살아 계실 때의 일이다. 그 어른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 하셨다. 그러나 그 어른이 어이없게 유세차 호남으로 가시다 돌아가시고서도 끝내 그 야당 생활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한때는 경찰 경위로 특채하여 주겠다는 유혹도 물리치고 당신의 신념에 사셨다. 그 당시 그 신념을 지킨다는 일은 오늘날엔 상상을 초월하는 핍박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형님은 그 가난과 그 핍박을 견디며 정의에 사셨다.   그러다 세상이 바뀌는 4,19   형님도 때를 만나셨다. 그 혈기로 면장에 출마하셨다. 새로운 세상이니 나를 알아주리라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매정하였다. 다들 혈연을 따라 가는 표였다. 그 고배는 자신을 참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누구를 위해 야당하며 싸웠던고 하는 회의가 들었으리라. 한 동안 낙담하다 제 정신 차리고서 이젠 먹고 살 길을 찾아야겠다고 나섰다. 비록 선거에는 실패하였어도 그래도 민주당의 세상이라 이곳 저곳 부탁할 곳은 있었다. 일이 잘 되어 경주 시청에 공무원으로 취직이 되었다. 곧 출근을 하려고 하는 찰나 5,16이 터졌다. 만사휴이. 이게 정말 운명인가? 다시 농촌에서 지개를 져야만 하였다. 아마 형님의 일생에서 가장 참담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전에도 물론 더 가난하였으나 그래도 그때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자기 긍정이 있었는데 이제 완전히 모든 게 포기된 상태였던 것이다. 오로지 부모 모시고 처자식 먹여 살리는 일에만 매달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가난에도 가장 무서운 가난은 희망이 보이지 않은 가난인데 그때 형님은 그런 가난을 짊어지신 것이다. 게다가 지난 날 야당을 했다는 사실은 전과자의 이력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러다 조금 숨통이 트이는 일이 있었다. 새마을 사업이 벌어진 것이다. 형님은 이 일에 전력투구하셨다. 마을의 이장이란 직책을 맡아 이 사업에 전력을 바친 것이다. 상당한 성과와 인정을 받아 얼마 후 생긴 단위 농협에 참사라는 귀한 자리를 맡게 되었다. 형님은 또 이 일에 당신의 정력을 다 쏟으셨다. 처음에는 겨우 차비나 받던 데서 차차 봉급도 꽤 받게 되고 자리도 튼튼하여졌다. 좀 안정된 생활도 하게 되었다. 그래도 과거 민주당의 열성분자라는 딱지는 좀체 떨어지지를 않았다. 하지만 성실함으로 이를 극복하여 나갔다.   그러나 얄궂은 운명은 또 형님을 가만두지 않았다. 전두환의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뒤였다. 형님은 그날도 출근을 하여 사무를 보려는데 돋보기안경이 없었다. 평소엔 끼지 않다가 책을 읽거나 사무를 볼 때는 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안경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를 않은 것이다. 할 수 없이 새로 사려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주머니에 그 돈이 없었다. 지갑을 또 집에 두고 온 것이다. 할 수 없이 사무를 보는 아가씨에게 3만원을 꾸어 돋보기를 샀다. 그리고 그날은 그만 그 돈을 갚는 걸 잊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게 운명인가? 그 이튿날 아침, 새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가 민심을 일신한다는 명분으로 보낸 암행 감사반이 그 조합을 덮친 것이다. 열 곳이 넘는 그 많은 조합 가운데 유독 그 조합에 왜 왔는지 확실히는 모르나 평소 야당 기질을 가진 형님을 못 마땅해 여긴 그 누구의 사주로 온 것이라 여겨진다. 형님은 누구일 거라는 말씀도 하셨으나 여기서 그 말은 삼간다. 그런데 그들이 와서 아무리 찾아도 결점이나 하자가 안 보였는데 그만 현금 3만원이 착오가 생긴 것이다. 왜 이러냐는 질문에 이 순진한 아가씨는 곧이곧대로 참사가 빌려갔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결국 3만원의 공금유용. 요즘 돈으로 아무리 비싸게 계산하여도 6, 7만원이 될까 말까 하는 적은 액수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꼬투리를 잠아 사람 하나를 잘라버리는 실적을 올려야 하는 그들로서는 이를 한 건 하였다고 보고하고 상부에서는 그대로 접수하여 퇴직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 일은 형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쫓겨난 것도 억울하지만 그 불명예가 너무도 가슴 아팠던 것이다. 내막을 모르는 남들은 무슨 큰 범죄라도 저지른 줄 알기에 사람 만나기가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위로하는 말도 오히려 부담으로 느껴진 것이다. 사람 대하기가 싫어진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정신적 큰 질환을 앓게 되어 일 년 넘게 고생하셨다. 그때 정말 나도 괴로웠다. 이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방법도 없고 능력도 없었다.  다만 당시 대학에 다니던 조카를 위해 등록금 몇 번을 주었을 뿐이었다. 참으로 나도 괴로웠다. “저 형님을 어떻게 할 거냐?” 하는 아픔이었다. 그 억울한 형님을 위하여 변명을 할 길도 없고 참으로 난감하였다. 하도 답답하여 전두환 대통령에게 각하 - 당시는 대통령을 그렇게 불렀다.- 의 동기동창인데 그 덕을 보지는 보지 못할망정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해서야 되겠느냐며 긴 호소문도 보내었지만 회답은 없었다.   그러나 형님은 끝내 일어나셨다. 다행히 정부에서도 몇 년 뒤에는 당시의 억울함을 인정하고 퇴직금에다 약간의 보상도 해주고 명예도 회복시켜 주었다. 그래 형님도 이젠 다시 씩씩한 농민으로 그리고 인자한 노인으로 되돌아가 열심히 농사를 지으시고 자녀를 기르셨다. 그리고 문중 일에도 관계하시고 열심히 사셨다. 또 슬하의 아이들도 다 제대로 독립하여 잘 살았다. 다만 맏이가 공무원으로 있다가 교통사고로 물러난 이외에는 큰 일이 없어 그냥 그대로 살아 가셨다. 열심히 사신 덕분에 아이들 하나 하나에 단 얼마만이라도 논도 나누어 주게 되셨다. 그러느라 평생을 짊어지셨던 그 지긋지긋한 빚도 다 갚았다. 말하자면 나름대로 마감을 잘 하시고 가신 것이다. 심지어는 당신의 병원 치료비도 그리고 그 후의 장례비마저도 다 감당할 만큼의 여유를 두고 가셨다. 기르시던 소를 처분하여 이 경비를 다 충당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형님은 일생을 잘 마감하시고 가셨음에도 이 동생이 오늘 이렇게 가슴 아픔은 단순히 혈연 때문인가? 아니면 앞에서 말한 그 첫사랑의 인연을 깨트린 죄책감 때문인가? 아니면 그 한 많은 운명 때문인가? 아니면 그 운명이란 엄청난 위력 앞에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깨달아서인가? 하여튼 사무치도록 그립고 아쉽다. 그리고 그 운명이 너무도 서럽고 얄밉다.    후기   이 그립고 아쉬움 가운데 나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몸을 움찔 떤다. 이다음 내가 죽은 뒤에는 누가 나를 지금의 나처럼 이렇게 가슴 아파하고 그립고 아쉬워 할 사람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단 형제뿐이어서 가슴 아프게 울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조차 그저 그렇게 가셨구나 할 뿐 뭐 그리 아프고 슬프고 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다만 나로 말미암은 연금이 좀 아쉬워 아깝다는 생각은 들 것이다. 그뿐일 것이다. 덕이 없이 산 탓이리라. 참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제 어쩌리? 지는 노을이나마 좀 아름답게 가꾸어 보아야지.                                                         09. 4. 20. 완
10    저도 울었습니다 댓글:  조회:2544  추천:58  2009-06-19
  이번 주에는 남의 글 한 편을 보내고자 합니다.   제가 읽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춘원 이광수의 <나의 고백> 이란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나는 어떤 날 편지 한 장을 받았다。그것은 철자법도 바로 못 쓴 아라사말 편지인데、우리 동포의 아내가 되어 남매를 두고 과부가 된 러시아 부인의 편지였다。그의 주소는 치따에서도 수천리 떨어진 똠스크였었다고 기억한다。참으로 눈물 나는 것이었다。내 기억을 더듬어서 그 사연의 요령은 이러하였다。  「……내 남편은 대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그는 치따에는 대한 나라의 국민회가 있고 거기는 대한 사람 지도자가 있다고 늘 말하였습니다。그리고 이 아이들이 자라거든 치따에 보내어서 대한 말을 배우고 대한 글을 배워서 대한 나라를 사랑하는 대한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그런데 그는 갑자기 죽었습니다。나는 남편의 뜻대로 이 아이들을 대한 사람을 만들어야 하겠는데 가난한 과부라 그러할 힘이 없습니다。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곧 회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오라고 부르신다면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노자를 만들어 가지고 아이들을 데리고 곧 치따로 가겠습니다。나도 대한 사람의 아내가 되었으니 치따에서 대한을 위한 일을 시키시면 무엇이나 하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나는 울었다。그 과부의 정상과 정성도 가긍하거니와、만리 이역에서 외국 여자와 결혼하여 가지고 살면서 그 사이에 난 자녀를 대한인을 만들겠다고 애쓰던 가난하고 무식한 한 동포의 심정이 가여웠다。나는 손에 돈만 있으면 곧 그리로 뛰어 가서 그 세 모녀를 데려오고 싶었으나 내 주머니에는 담배 값도 없는 형편이었다.“ 정든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가난에 쫓기어 멀리 러시아에까지 가서 살던 어는 무식한 한 분의, 그 순박하면서도 거룩한 조국애에 저도 울었습니다. 그 “대한” 이라는 나라, 자기 백성들 먹여 살리지도 못하고 시베리아까지 내몰아 보내는 그 나라가 무엇이 그리도 중하고 무슨 미련이 그리 많아서 자기 아들딸에게 기어이 대한 말을 가르치고 대한 글을 가르치라고 유언을 하며 죽어갔는지? 그 순박한 조국애에 저는 저를 돌아보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또 러시아 여인으로서 대한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이 여인의 그 남편을 따르고자 하는 그 마음에 저는 울었습니다. 죽은 남편의 뜻을 이으려고 하는 그 갸륵한 마음에 저는 정말 옷깃을 여미며 울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그리고 열녀다운 모습이 아닙니까?   도대체 “대한”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왜 그토록 대한 말을 가르치고 대한 글을 가르쳐야 합니까?   오늘날 많은 분들은 내 자녀를 영어를 잘하는 국제인으로 기르고자 합니다. 한국어보다 영어를 더 잘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국제인이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영어를 모어로 잘 한다면 국제인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한의 혼은 빠집니다. 말에는 혼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대한의 혼이 빠진 국제인, 그러나 그는 결국 국제 미아가 될 뿐입니다. 진정한 국제인이란 내 혼을 가지고서야 가능한 것입니다. 내 정체성의 튼튼한 터전 위에서라야 “국제”라는 빌딩이 지어집니다. 그렇다면 유창하게 영어 잘하는 국제인보다 무식하지만 내 혼을 가진 대한인이 더 귀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이분을 거룩한 혼의 소유자라 부르며 존경합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을 갖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 합니다. 그래 울었습니다.   우리는 다시한번 이런 무식한 분들의 절규에 귀를 기우려야 하리라 믿습니다. 언제나 민족이나 국가는 이런 민초들이 지켜왔습니다. 멀리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말할 것도 없이 가까이는 한말의 의병들, 그리고 6,25 동란에도 다 민초들이 지켰습니다. 죽으면서도 대한의 얼을 심고자 하는 이 민초의 피눈물의 덕택으로 오늘의 민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혼을 가진 분이 정말 그립습니다.      09. 6. 18.
9    狂人들의 대화 (안병렬) 댓글:  조회:2570  추천:137  2008-05-06
狂人들의 대화 안병렬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어머니는 한국 가고 아버지는 바람나고 스무 살 고 간나이 남방 가고 ...내 안 미친다면 거짓부리재? 울 아부지 한국 가고울 엄마도 바람났다. 날더러 남방 간다. 너 욕했지? 네겐 부드러운 무드가 없어. 자가용 까만 승용차도 없어. 그런데도 내 남방 가지 않으면 열녀라 할거야? 도리어 바보라 하지. 그래 간다만 나도 미쳐. 너 때문에 너보다 더 미친단 말야. 너도 미친다고? 맞아.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도 너도 우리 다 미쳤구나. 미쳤어. 정말 미쳤어. 어? 우리가 왜 미치지? 누가 우릴 미치게 하지?                                                                                시작 노트    육체적인 배고픔에 못지않게 정신적인 배고픔이 있습니다. 곧 사랑에의 굶주림입니다. 지금 중국의 많은 조선족 어린이들이 이 사랑의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대부분 다 한국으로 혹은 남방으로 돈 벌러 가고 없어 사랑에 굶주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조선족 어린이들은 90% 이상이 결손 가정에서 자랍니다. 어느 학급의 경우 50명 학생 가운데 아버지 어머니 다 같이 사는 가정이 두 학생밖에 없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다 사랑에 굶주리고 있습니다. 어릴 적에는 밥을 잘 먹어 신체적으로도 건강하게 자라야 하고 또한 온전한 사랑을 받아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게 자라야 합니다. 그럼에도 지금 중국의 조선족 어린이들은 사랑에 굶주려 지나다 보니 사춘기에 다다르면 많은 청소년들이 빗나갑니다. 비록 빗! 나가지 않고 잘 자랐다 하더라도 많은 아픔을 견디고 자란지라 성격이 비뚤어진 경우가 또한 많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족이 많이 모여 사는 이곳 연변에는 사랑에 굶주린 청소년들의 울부짖음이 늘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 시 또한 그 울부짖음 가운데 하나를 제 나름으로 들어본 것에 불과합니다. 파괴된 가정에서 고민하던 청년에게 사랑하던 처녀마저 남방으로 간다는 말이 들리니 미칠 지경이 됩니다. 그러나 처녀 역시 아버지 어머니의 갈등으로 깨어진 가정에서 남방으로 가지 않고 배길 자신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곳에선 돈을 못 법니다. 남방엔 돈이 흔하다고 합니다. 조선족 처녀들에겐 돈 벌 기회가 아주 많다고 합니다. 그래 갑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가는 그 마음은 청년보다 더 아프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을 들은 청년은 현명한지라 자기들의 그 아픔의 원인을 찾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가? 누가 이렇게 만드는가? 그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참 똑똑한 청년이지요. 이런 청년들이 더러 있습니다. 원인을 찾으면 치료하는 방법도 차차 알겠지요.   그러나 많은 경우 이 청년과는 달리 그만 자포자기하고 술에 빠져 세상의 시궁창 길로 갑니다. 혹은 자학에 인생을 망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불쌍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섬기러 왔다는 우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요?     참으로 막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팔짱만 끼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 저는 제 나름으로 하나의 길을 찾아 딴에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바로 독서운동입니다. 사랑에 굶주리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저들의 정서를 조금이나마 순화시켜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몇 분과 함께 연변조선문독서사를 열어 도서관 구실과 독서학교 구실을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일선학교에 직접 책을 싣고 가서 읽히고 다시 가서 바꾸어 읽히는, 일종의 이동도서관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독서사는 벌써 9년이나 되고 또 현지의 대표가 열성적으로 잘하시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나 이동도서관은 연륜도 짧아 아직 걸음마 단계입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일선학교에서 독서의 중요성을 잘 ? 霽0?있어 협조가 적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랑에 굶주리는 아이들이 얼마나 심한 아픔을 갖고 살아가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 아픔으로 하여 인생 자체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그저 공부만 열심히 시키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서 같은 것은 일종의 사치품(?) 쯤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 딱한 사정을 보노라면 정말이지 저도 미칠 것만 같습니다. 08. 4. 10.
8    '조선놈의 새끼는 조선말을 배워야지' 댓글:  조회:3428  추천:134  2007-05-31
'조선놈의 새끼는 조선말을 배워야지'안병렬  “조선놈의 새끼는 조선말을 배워야지”   이 말은 저 두메산골 투박한 농부들의 아우성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말은, 백두산의 서쪽 기슭 장백조선족자치현의 소재지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이도강촌향의 여러 산촌에 흩어져 사시는 우리 동포들이 그곳에 있던 학교가 폐교되자 아이들을 가까운 한족학교로 보내어야 하는데 이들은 이를 거부하고 우리말을 가르치려고 몇 십리나 떨어진 향 소재지 조선족 소학교로 보내며 부르짖은 절규인 것이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이들 때문에 교실을 개조하여 기숙사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학교 이름도 유별나게 긴 <장백현 이도강촌 조선족 기숙제 소학교>가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를 무척 감동케 하였다. 연길에서는 조선족 학교가 버젓이 있는데도 오히려 조선족 자녀를 한족 학교로 기를 써가며 보내는 부모들이 많다고 한다. 이런 애들이 1,000명을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도강촌의 이분들은 한족학교로 가라는데도 굳이 조선민족임을 고집하며 우리말을 가르치겠다고 발버둥을 치니 그 얼마나 갸륵한 일이더냐? 생각할수록 그 부모님들이 장하고 위대하게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 먼 길을 일부러 달려 가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젠 그 학교마저 폐교가 되고 남은 조선족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한족학교로 다 가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 이곳 연변 조선족 자치주 곳곳, 아니 전 중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으로 서글픈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한 분 그 이도강촌의 산골 농부들과 같은 분들을 만나는 기쁨을 맛보았다. 돈화시에서 북쪽으로 차를 타고 약 40분 가면 흑석이라는 향이 나오는데 여기 우리 민족이 조금 살고 거기 또 우리 조선족 소학교도 있어 몇 해 전에 독서 지도하려고 가본 적이 있다. 그때 그 마을의 조선족 청년 한 분이 와서 교사들 틈에 끼어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었다. 참 기특하다고 할까? 갸륵하기도 하고 장하기도 하였다. 이번에 무슨 일로 이분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학교의 정황을 물었다. 예상대로 학교는 폐교가 되었다고 한다. 참 가슴이 아팠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을 용기도 나지 않았다. 다 한족학교로 가는 똑같은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묻지도 못하고 안타까워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분은 또 기막힌 이야기를 한?! ?.      그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다. 조선족 학교가 문을 닫자 이 마을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어떻게든 우리말을 좀 가르쳐 보려고 발버둥을 쳤다고 한다. 처음엔 시 정부에 가서 항의도 하고 사정을 하여 하루 한 시간씩이라도 우리말을 가르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와 보니 한족 교장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우리말 교육을 해주지 않는 것이다. 시정부의 지시인데 왜 안 하느냐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할 수없이 이들은 유치원 또래 아이들에게라도 우리말을 가르쳐야겠다고 자기들끼리 돈을 모아 유치원 교사 자격을 가진 선생님 한 분을 모시고 조선족 유치원을 열었다고 한다. 우리끼리라도 우리말을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다행히 호응이 좋아 아이들도 제법 모였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한족학교 교장이란 사람이 술을 ! 먹고 찾아와 왜 우리 아이들을 빼앗아 가느냐고 하면서 유치원 교사를 때린 것이다. 당시 그 선생님은 임신 중이었다고 한다. 아주 엄중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아직 이 일은 법적으로 해결이 안 되고 있다고 한다. 결국 그 “우리끼리”의 꿈도 깨어지고 이젠 별 수 없이 우리 조선족 아이들도 다 한족 학교로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다 우리말을 잊어버리고 한족 아이로 자란다며 그분은 한숨을 쉬는 것이다. 말을 잃으면 민족을 잃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 나도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그분은 또 놀라운 이야기를 하였다. 자기가 늦게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올해 여섯 살이라 유치원을 보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하여도 한족 유치원에는 보낼 수가 없어 부득이 돈화에 있는 조선족 유치원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그 먼 길을 어떻게 보내느냐고 하니 그래도 아이가 한족이 되는 것을 어찌 차마 가만 앉아서 보고만 있겠느냐고 한다. 그래도 그 어린 것이 어찌 하루에 두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는지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기가 찼다. 그러나 이분은 오히려 다른 걱정을 한다. 그래도 자기는 좀 형편이 나아 이렇게라도 보내는데 다른 집 아이 부모는 그 형편이 안 되어 자기를 부러운 낯으로 쳐다보니 미안해 죽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짓는 심정이라고 한다. 나는 그분의 그 마음 씀이 참 귀하다고 여겼다.   그래 무슨 방법이 없느냐고 하니 돈화에 아파트를 한 채 세를 맡으면 여러 아이를 모아 같이 생활을 시키며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겠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가서 밥을 해주고 잠을 자가며 돌보고 밥은 또 무엇으로 어떻게 먹이며 잔잔한 경비도 꽤 들 텐데 그걸 어떻게 다 감당할 거냐 하니 가서 돌보는 것은 엄마들이 차례로 가서 돌보고 밥해주고 양식은 각자 집에서 가져오면 되고 잔잔한 돈이야 어디에선들 들지 않겠느냐고 한다. 그러면서 다만 집 얻는 게 목돈이라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연길에서 이런 일을 해본 경험이 있는지라 돌보는 분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하였다. 그러니 정 안 되면 자기 부인이라도 가서 하면 된다고 한다. 자기 부인이 공부도 제법 하였고 또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럼 당신 부인이 할 작! 정을 하고 시작하라며 그 집세는 내가 대어주겠다고 만용을 부리었다. 난들 무슨 큰돈이 있을까마는 이분의 생각이 너무 갸륵하고 또 우리말을 가르치고자 하는 학부모님들이 너무도 귀하게 여겨져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몇 해 전 이도강촌의 이야기를 듣고 어느 한국분이 그 아이들의 기숙비를 모두 부담하겠다고 나셨던 것처럼 나 역시 이분들의 민족에 대한 그 뜨거움이 내 가슴을 울리었던 것이다. 이런 분들이 이도강촌에서만 있었던 줄로 알았다가 오늘 이곳에서 또 만나게 되니 또 나로 하여금 감동케 하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이다. 조선놈의 새끼는 조선말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참다운 조선 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여기서 끝나지를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또 다른 부인 한 분이 자기들도 같은 형편인데 좀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곳은 흑석에서도 또 한 30분을 더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액목”이란 곳인데 그곳도 다 같은 형편이라 모든 아이들이 다 한족화 된다고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나 내 무슨 능력으로 이를 다 감당하랴? 우선 이곳부터 해보고 성공하면 그때 이야기하자며 미루었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 조선 놈에게는 조선말을 가르쳐야 한다는 놀라운 진리를 스스로 터득하신 분들, 이를 위하여 발버둥을 치며 절규하는 분들, 왜 많은 민족 단체들은 이런 절규에 귀를 기우리지 않을까? 몰라서 그럴까? 이를 위하여 발버둥치시는 흑석과 액목의 조선족 여러분과 그리고 이미 절규하였던 저 이도강촌의 조선족 여러분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이 좋은 일에 나 같은 사람에게마저 동참할 기회를 주시니 감사한다.                                                                 2007. 3, 19.    
7    넉넉한 마음 댓글:  조회:2874  추천:102  2006-05-10
넉넉한 마음안병렬 마음이 울적하여 훌쩍 집을 나섰다. 두레마을에 가기로 하였다. 원래 “두레마을”이란 한국의 남양주에 있는 농촌 공동체마을에서 출발하였다. 농촌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두레”의 정신을 이어받아 함께더불어 잘 살아가자고 시작한 것이다. 이 운동이 지금 온 세계로 퍼져 있다. 연변의 두레마을은 연길시의 의란진에 있다. 한국의 두레 본부에서 두레의 정신으로 직접 간여하여 꾸리고 있다. 조용한데다 숙박시설이 잘 되어 있고 또 경영하는 분들이 친절하여 더러 가서 쉬곤 하였었다. 전에는 차편이 잘 없어 일부러 택시를 전세 내어 가야만 하였으나 이제는 하루 한 번이지만 가는 버스가 생겨 아주 편리하게 되었다. 버스는 오후 2시 10분에 있었다. 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버스를 탔다. 큰 버스인데 승객은 20명 안팎이라 널찍하여 좋았다. 두 자리를 겹쳐 차지하고 편안히 앉았다. 마침 그날은 크게 떠드는 분도, 담배 피우는 분도 없어 아주 좋았다. 몸도 마음도 좀 피곤한데다 날씨마저 무더워 나는 오르자마자 곧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를 지났던가? 버스가 어떤 주유소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며 그대로 잤다. 한참 만에 눈을 뜬 나는 깜작 놀라고 말았다. 차 안에 운전사도 안내양도 손님도 아무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차는 앞도 옆도 꽉 막힌 감옥 같은 곳에 멎어 있는 것이다. 놀라서 일어나 차문을 열고 나가려니 문마저 닫혀 있었다. 갑자기 어딘가에 갇혀진 것 같은 감이 들면서 두려움마저 들었다. “開門” “開門” 문을 열어달라고 외치었다. 안내양 - 실은 40이 넘은 부인이었다. - 이 달려와 문을 열어주며 웃었다. 그 웃음이 나를 무척이나 안? ?쳔갼駭? 왜 이렇게 있느냐 하니 차를 잠깐 좀 고친단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주유소가 아니라 정비 공장이었으며 차가 멈춘 곳은 바로 차바퀴 밑으로 들어가 수리하도록 장치된 곳이었다. 그러므로 앞과 옆이 꽉 막힌 공간이었던 것이다. 밖에 나와 보니 차 부속품 같은 것을 갖다 놓고 한창 수리하고 있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놀라서 야단친 자신이 좀 쑥스러웠다. 그래 열적게 웃으며 곧 수리되느냐고 하니 “馬上好了” (곧 된다) 한다.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수리하는 걸 구경하며 기다리는데 아무래도 곧 될 것 같지를 않았다. 그래 큰 맘 먹고 바쁠 것 없으니 좀 느긋이 기다리자 하였다. 그래 아무리 늦어보아야 한 시간이 더 걸리랴 하며 공장 사무실에 들어가 앉았다. 쇼파에 앉아 다시 잠을 청하였다. 그러나 한번 깨어난 잠이 다시 오지를 않았다. 실컷 쉬었다 생각하고 시계를 보니 벌써 3시 반이나 되었다. 수리를 시작한지 한 시간이 넘어 가고 있었다. 이제는 어지간히 되었겠지 하며 나와 보니 아직 그러고 있었다. 아직 멀었느냐고 하니 역시 “馬上好了”(곧 된다)이다. 기가 찼다. 곧 된다는 것이 한 시간이나 지났음에도 아직 그 대중인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더 이상 따지다가는 한국사람 성급하다는 욕 밖에 더 들으랴? 말없이 공장 밖 큰길가로 나왔다. 행여나 가는 차편이나 만날까 해서였다. 그런데 거기 승객들이 다 모여 앉아 놀고 있었다. 아무도 나처럼 초조해 하는 빛이 없었다. 모두들 태평이었다. 나 역시 하나도 바쁠 것이 없는 터이라 죽치고 앉았다. 그들과 같이 오는 차 가는 차를 구경하며 한가로이 지났다. 그러기를 약 30분쯤 하였을까 이제는 다 되었겠지 하며 일어섰다. 그러나 아직도 그 모양으로 그 부속품에 기름을 바르고 닦고 있었다. 속으로 기가 찼지만 이젠 물어보지도 못하였다. 속으로 짜증만 내었다. 다시 길가로 나왔다. 행여나 같이 갈 사람이 있으면 택시를 전세 내어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초조해하는 사람이 없어 입도 못 떼었다. 어떻게 이렇게 태평할 수가 있을까? 대개 농촌 분들이라 집에 가면 일들도 많을 터인데 더구나 부인들은 저녁밥도 지어야 할 텐데 아무도 초조해 하지를 않는 것이다. 초조해 하는 사람은 다만 나 한 사람, 가장 한가한 나뿐인 것이다. 언제 수리가 다 되느냐고 묻는 사람도 나 한 사람뿐이요 수리하는 걸 구경하는 사람도 나 한 사람뿐이었다. 어찌 사람들이 저리도 느긋할 수가 있을까? 아니 그것은 다만 느긋한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넉넉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리도 초조해 하는가? 나는 사실 아무런 일이 없었다. 다만 늦으면 저녁밥이 좀 걱정이나 그것도 내 가는 걸 알므로 두레마을 가족들이 다 챙기어 놓을 것이다. 그래 정말 나야말로 태평할 수가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럼에도 실상은 가장 초조해 하며 가서 묻고 야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를 뒤돌아보며 몹시도 부끄러워하는 한 편 저들의 그 넉넉한 마음을 몹시도 부러워하였다. 이윽고 차는 수리가 되었다. 馬上好了(곧 된다) 하던 것이 두 시간이 넘게 걸리었다. 모두들 차를 탔다. 부룽 부룽, 차는 출발을 하였다. 그런데 공장 문 앞에서 차가 다시 서더니 운전수는 다시 내린다. 나는 또 무슨 고장인가 아니면 수리가 잘 못되었는가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운전수는 그저 웃으며 휴대전화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조금도 바빠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마 5분은 걸리는 것 같은 긴 통화인데도 손님 누구도 애타하지를 않는다. 그저 웃으며 전화하는 그를 덤덤히 보고만 있다. 참 넉넉한 마음들이라 여겨졌다. 이 장면을 잠깐 한국으로 옮겨 상상하여 보았다. 손님을 어떻게 취급하느냐고 아우성치는 그 살벌한 모습이 보여 눈앞이 아찔하였다. 누가 보는 듯 부끄러워 내 얼굴이 뜨거웠다. 얼마 후 운전수는 환한 얼굴로 차에 올랐다. 차는 수리한 탓인가? 엔진 소리도 맑아 경쾌하게 달리었다.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잠깐 눈을 뜨는데 차는 두레 마을 들어가는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착각인가 하여 자세히 보았다. 그러나 확실하였다. 차는 벌써 두레마을 안내판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당황하여 묻는 나에게 여기 손님 가운데 한 분이 새로 생긴 유원지에 가는데 크게 멀지 않으므로 거기까지 모셔다 드린다는 것이다. 참 할말이 없었다. 두 시간도 넘게 늦었음에도 오히려 부족하여 이렇게 한가하게 다른 나들이를 한다는 말인가? 기가 찼다. 그럼에도 아무도 불평을 않는데 외국인인 나 혼자 야단할 수가 없었다. 그저 참았다. 그러면서도 참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짜증이 났다. 운전수도 너무 하고 승객도 너무 심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nb! sp; 그런 승객이니 운전수도 그렇게 하리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참으로 느긋하고 넉넉한 마음들이라, 나는 그저 놀랄 뿐이요 부러울 뿐이었다. 얼마를 가다 차는 멈추어 승객 둘을 내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저 집이라고 운전수가 손짓하고 두 손님은 고맙다고 인사를 한참이나 한다. 그리고는 다시 차를 돌리었다. 그 사이 승객 모두는 그 낯선 손님이 집을 잘 찾았다고 기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참으로 착한 민족, 이들에게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기다리는 그 넉넉한 마음과 더불어 남에게 집을 찾아 주고 기뻐하는 이 따뜻한 마음씨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아. 나는 왜 이리도 마음이 좁은가? 기다릴 줄도 모르고 남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옹졸한 인간인가? 정말 저 마음, 저 자세를 배워야겠다.
6    안병렬 프로필 댓글:  조회:3199  추천:127  2006-05-10
안병렬(安秉烈)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 1937년 경주에서 태어나 고려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국립안동대학교에서 교수로 학장으로 재직 중 1999년 연변에 갔다가 좋아서 한국으로 돌아가 곧 사직하고 다시 연변으로 가서 살고 있다. 현재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며 독서운동과 강연,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이메일: anbyung1234@hanmail.net
5    《조선족위기설》단상 댓글:  조회:2954  추천:107  2006-05-10
《조선족위기설》단상안병렬요즘 많은 사람들이 조선족위기설을 거론한다.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집단거주지(집거지구)가 무너져 민족고유의 전통이 허물어지므로 민족의 위기가 도래했다는것이다. 가임녀성(可妊女性)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다 낳는대도 하나씩밖에 낳지 않으므로 인구가 줄어들수밖에 없는것이다. 그리고 개방화된 사회의 농촌에서는 여러가지로 뒤떨어질수밖에 없으므로 도시로 나가지 않을수 없는탓도 있다. 그 결과 인구는 격감되고 집거지구는 무너져 민족의 위기가 도래한다고 아우성이다.그런데 정녕 더 큰 위기는 따로 있다. 즉 조선족가운데서도 지식인들의 민족의식약화내지 부재가 더 큰 위기인것 같다. 이 문제는 조선족지식인들이 자기 민족인 조선족을 지키겠다는 확고한 의지만 있으면 극복할수 있다.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수자는 물론 집단적으로 거주하며 민족고유의 전통을 가꾸어가는 생활방식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중심에 《나는 조선족이다. 조선족으로 살겠다》는 자기 총체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나머지는 모두다 헤깨비다.중국의 만족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만족의 경우 민족의식이 약하여 말을 잃고 전통도 잃고 마침내 만족까지도 잃어가고있기때문이다.지금 연길시내에서만 조선족이면서 한족소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1600여명이라고 한다. 9개나 있는 조선족소학교는 정원을 못채워 야단인데 비해 한족소학교는 만원이데도 자꾸 조선족아이들이 전학오겠다고 하여 골머리를 앓는다. 자녀를 한족소학교로 보내는 조선족은 그래도 경제적여유가 다소 있고 힘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왜 한족학교로 보내는가 어릴 때부터 한어를 잘 배워야 한다는 생각대문이다. 자기들이 한어를 잘못해서 받은 불리익을 자식에게만은 물려주지 않겠다는것이다. 누가 이 부모의 한맺힌 마음을 그르다 하겠는가?그렇지만 문제는 심각하게 이어진다. 소학교 6년을 한족학교에 다니면 그들의 모어는 한어가 된다. 그리고 조선어는 거의 잊거나 서투르게 된다. 한어가 모어가 되면 자연스레 한족화한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는 까닭이다.이는 지금 미국이나 카나다, 오스트랄리아 등 국가에서 사는 조선인 2~3세들을 보면 잘 알수 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미국인들이 보기에는 겉은 노랗고 속은 하얀 이른바《바나나족》이라는 그들이 잘살고있는가? 그들의 정신적불행을 남들은 모른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한족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들은 세계 어디에 가 살아도 자기들은 한인(漢人)소학교가 멀어 기숙을 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소학교로 보낸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말을 지킨다. 민족을 지키는것이다.조선족도 마찬가지다. 수자만이 민족을 지켜주는것이 아니다.《나는 조선족이다. 그러니 조선족으로 살겠다. 내 자식도 조선족으로 키우겠다》는 총체성이 조선족을 지켜줄것이다. 이런 정신이 약하기때문에 《조선족위기설》이 떠도는것이다. 이런 위식이 없는 조선족은 아무리 많아도 민족에게 공헌하지 못하는 정체불명의 민족적이마(迷兒)일뿐이다.몇해전 참 가슴뿌듯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시골조선족소학교가 학생이 적어 문을 닫게 되여 아이들을 모두 한족소학교로 보내야 했다.몇몇 학부모는 이를 거절하고 기숙을 시켜가면서까지 몇십리나 떨어진 향소재지 조선족소학교에 자식들을 보낸것이다. 이런 민초들이 있는한 조선족은 계속 살아있을것이다.그렇다고 꼭 민초들만이 민족을 지키는것이 아니다.진짜 지식인들이 있으므로 더 튼튼히 지켜지는것이다. 탐탁치 않은 조건하에서도 꾸준히 민족작품을 창작하는 예술가를 보라. 민족을 지키려 얼마나 몸부림치며 창작을 하는가.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추며, 민족을 지키고 민족혼을 깨우치고있다. 그 삶이 경제적으로는 어려울수가 있다. 그럼에도 의연하게 조선족을 고집하며 지키고있다. 그들이 창작한 예술품을 한번 조용히 보라. 어지 투철한 민족혼이 없이 그런 민족적인 작품이 나올수 있겠는가. 혼이 없이는 혼이 깃든 작품을 창작하지 못하는것이다.인구가 줄어듬도, 집거구가 무너짐도 다 위기이다. 그러나 더 큰 위기는 우의 민초들과 같은분들, 특히 민족의식이 투철한 지식인들이 자꾸 적어진다는 사실이다.
4    조선족을 아십니까? 댓글:  조회:3994  추천:100  2006-05-10
조선족을 아십니까? 안병렬 서울서 부산으로 가는 새마을호 기차간입니다. 더없이 조용한 차안에서 손님들은 창 밖의 한여름 풍경을 감상하거나 신문이나 책을 보거나 혹은 지그시 눈을 감고 낮잠을 즐기거나 하고 있습니다. 참 조용합니다. 기침 소리 하나 말소리 하나 들리지도 않습니다. 혹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남에게 들릴세라 아주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합니다. 참으로 평화롭고 느긋한 모습입니다. 정말 쾌적한 분위기의 차안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배나 되는 비싼 요금을 내고도 이 차를 타는가 봅니다. 거기에다 시간도 한 시간 이상 단축되므로 돈 좀 있는 분들은 즐겨 이 차를 타는가 보지요. 그런데 이 차가 천안을 겨우 벗어났을까 할 때쯤부터 갑자기 차안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다섯 살 여섯 살쯤 되었을까 여겨지는 두 사내녀석들이 마구 차안을 돌아다니며 야단을 치고 분탕질을 하는 것입니다. 손님들은 모두 못마땅해합니다. 얼굴을 찌프립니다. 그러다 혹 조용히 하라고 말리어도 이놈들은 듣지를 않습니다. 떠들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마구잡이로 돌아다닙니다. 마침내 어떤 여자 손님이 “이 아이 누구 아이예요? 좀 조용히 시켜요.”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저쪽 한 구석에 앉아 정신없이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30대 중반의 젊은 사나이가 일어나더니 아이를 불러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옆에다 앉히고는 나가지 말라고 주의를 줍니다. 아이들은 제 아버지 옆에서 얌전히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또 이 사나이는 정신없이 창 밖을 내어다 보고 아이들은 또 몰래 아버지 옆을 빠져 나와 그전처럼 또 마구잡이로 분탕질을 치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승객이 다 화가 난 듯한 모습입니다. 모두 못마땅하여 짜증스러워합니다. 마침내 어느 부인이 아이의 아버지를 보고 야단을 칩니다. “여보, 젊은 양반, 좀 체면이 있어야 하지 않소? 이게 뭐요? 이 아이들 때문에 책을 볼 수 있소? 낮잠을 좀 잘 수 있소? 여기가 당신 집 안방은 아니잖소?” 이 말에 그 사나이는 얼굴이 벌겋게 되어 일어나더니 승객을 향하여 큰절을 하며 “손님 여러분, 대단히 죄송합니다. 실은 이놈들 어미가 어제 제 아버지 생신이라고 부산으로 내려가서 오늘 새벽 부두에 생선회거리 사러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지금 급히 가는 길이라 정신이 없습니다. 양해하여 주십시오.” 라고 정중히 인사를 하고 아이들을 옆에다 앉히었습니다. 이 사나이의 말을 들은 승객들은 모두 숙연하여졌습니다. 아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침묵이 흘렀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는 하염없이 창 밖을 내어다보고 있고 아이들은 또 몰래 아버지의 품을 떠나 또 뛰어다니며 분탕질을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도 그 아이를 귀찮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아무도 그 아버지 되는 사나이를 향해 불평을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과자를 주기도 합니다. 또 어떤 아주머니는 아예 아이를 안고 재우기도 합니다. 모든 승객이 다 그 아이들을 귀엽게 보는 눈치입니다. 왜 이렇게 변하였습니까? 조금 전까지도 그렇게 귀찮던 아이가 이제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되었습니까? 그 아이들의 행동이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장난을 치고 귀찮게 굽니다. 그럼 무슨 환경이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대로 그 차요 그 환경입니다. 바뀐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승객들은 180도로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을까요? 간단합니다. 아이들에 대하여 바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 아이가 얼마나 불쌍한 아이인가 바로 알고 나니까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찮던 아이가 도리어 귀여워진 것입니다. 알아야 합니다. 상대를 바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이곳의 우리 동포들에 대해서도 바로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얼마나 이해하시고 계십니까? 저는 며칠 전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조선족 청년이 “우리는 계모 밑에서 삽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말을 듣는 저는 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실로 그러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느낀다면 그것은 적어도 그 사람에게만은 사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계모 밑에서 산다.” 이 얼마나 비참한 표현입니까? 불행한 자기 인식입니까? 이게 이 한 분만의 인식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많은 분들이 이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럼 이 불행한 조선족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며 우리와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들은 옛날 이들의 모국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백성들이요 또 지금도 버림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조선조 말이나 구 대한제국의 말에, 혹은 일제시대에 가난에 쫓기어 들어와 지금껏 살고 있거나 살고 있는 분들의 후예입니다. 이들은 이곳에 온 후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며 사셨는지 여러분 상상이 안 될 것입니다. 1937년에 이곳으로 왔다는 어느 할머니는 저에게 손을 내어 보이며 자기는 환갑이 될 때까지 손톱을 깎아본 기억이 없다고 합디다. 처음 오신 분들은 청나라 즉 만주족이나 한족으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약과였습니다. 곧 이어 들어온 일본사람들은 참으로 못된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경신년 대참변”이란 걸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1921년 이들은 우리의 독립군들을 토벌하러 와서는 우리의 양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였습니다. 그때 맞아죽은 우리 동포가 얼마며 불탄 교회가 얼마며 학교가 얼마인지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어떤 마을은 온 마을이 다 잿더미가 된 마을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의 모교인 명동학교도 그리고 독립군을 가장 많이 배출한 창동학교도 다 이때 불타버렸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지나다 해방을 맞았습니다. 세계2차대전에 패망한 일본 사람들이 쫓겨 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소련군이 왔습니다. 이들의 만행도 심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는 국민당 군과 공산당 간의 내전이 또 치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곧 중국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것입니다. 조금 안정을 찾는 듯하였으나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이른바 抗美援朝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많은 지원군이 나갔습니다.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금 연변지방에 “골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열사비”란 말이 있는데 그 열사의 95%가 다 조선족입니다. 그 후에도 “반우파 투쟁”이다, “문화대혁명”이다 하는 엄청난 회오리를 맞았습니다. 이때는 민족이 다 부인되었다고 합니다. 종교도 다 부정되고 심지어는 족보마저 다 불태워야만 하였습니다. 모든 윤리가 짓밟히고 모든 가치관이 전도되는 기간이었습니다. 집단 농장을 아무리 가꾸어도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으며 저녁마다 모택동 어록을 외우고 학습을 하여도 머리에는 무엇 남은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이런 어려움을 견디다 모택동이 죽고 등소평이 정권을 잡아 개혁개방정책을 씀으로 이제는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평성대를 구가할 이 시기에 한국의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잘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도 나도 다 돈벌러 한국으로 나갑니다. 이제 온 민족이 다 한국병, 곧 돈 병에 걸리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결코 고맙지만은 않았습니다. 한국은 오히려 이들을 꺼리었습니다. 그들의 모국인 한국은 OECD 선진국에까지 진입하였다고 하나 이들 쫓기어 와서 가난하게 사는 동포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혜택도 주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주지 않았습니다. 찾을 생각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오는 것도 막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지난날 가난에 쫓기어 외국으로 나간 동포들이 이들만은 아닙니다. 일본으로도 가고 미국으로도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지금 마음대로 그들의 모국을 찾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국은 그들을 환영하고 심지어는 국적도 주겠다고 합니다. 이중 국적을 가져도 좋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중국이나 구 소련에 있는 동포들은 못 들어오게 합니다. 이에는 갖가지 정치적인 사정이 있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얼키고 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복잡한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당장 중국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자국민인 조선족의 대한민국 국적회복을 반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정부에서는 “우리가 해드리고 싶어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변명을 합니다. “결코 정부가 야박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사정도 하는가 봅디다. 그러면 이분들은 “그럼 정부가 반대하지 않은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호스탄 동포는 왜 못 들어오게 하느냐?” 하면서 뭐라고 말하든 그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고 항변을 합니다. 사실 이들의 처지에서 보면 부자 나라 동포는 오라고 환영하고 우리는 가난하다고 못 들어오게 한다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다 같은 해외 동포인데 우리에게만 이렇게 야박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이 다 옳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어떻게 되었든 이들이 이렇게 억울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렇게 이들은 버림받은 동포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자의식이 이들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이 비극을 스스로 확인하며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행합니까? 얼마나 불쌍합니까?여러 가지 원인으로 하여 어떤 측면으로 볼때 현재의 조선족은 원대한 민족적인 희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민족적인 비전이 없어요. 그냥 그냥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 한 몸이나 잘 살아보겠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사람이 큰 비전을 잃으면 사소한 일에 얽매이게 되고 사소한 일에 얽매이면 결국 사소한 인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지금 이곳 동포들의 심리상태를 살펴보세요. 자기 한 몸 위한 돈벌이에만 급급하고 있습니다. 어디 큰 비전 있는 사업이 벌어집디까? 너도 나도 모두 돈에만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들에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올바른 자아정립을 하도록 지도하여야 합니다. 이들은 비록 조선민족이지만 엄연한 중국 국민입니다. 이들은 유능한 중국 국민으로 자라 이들의 조국인 중국에 기여하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한국 국적 운운하며 퇴영적인 사고에 젖어 해매는 동포들의 참상이 참으로 딱합니다. 참으로 이들을 사랑한다면 이들이 이들의 자리, 즉 중국 국민으로 당당히 서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동포로서의 동질성 회복은 좋으나 그게 국적문제로까지 이어지게 유도한다면 이는 우리 동포 사회를 멍들게 하는 가장 큰 독소가 됩니다. 그러다가는 결국 조국이 없는 고아가 됩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들은 이를 모르고 조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스스로 고아가 되고 영원한 이방인이 되고 있습니다. 고아와 이방인, 참으로 불쌍하지 않습니까? 이모든 문제들은 올바른 자기 인생관을 가지는 데에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만 너무 어렵지요. 이렇게 이분들이 참으로 불행한 분들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밖에도 조선족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야 할 사실들이 참으로 많으나 이만큼 하고 다음 문제로 이러한 이곳 분들을 우리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간단히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이는 간단합니다. 이분들을 생각하는 올바른 시각을 가지면 됩니다. 그러면 앞의 그 새마을호 열차의 승객들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분들을 잘 알지 못하여 오히려 귀찮아하고 업신여기며 돈 몇 푼 던지고서 대접받기를 원하고 섬기려 하지 않고 부리려 하다가 자꾸 마찰을 일으킵니다. 먼저 이분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져 보세요. 이분들이 지난 세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왔는지 한번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져 보세요. 광복전 만주족과 한족으로부터의 괄시와 일본 사람으로부터의 학대, 그리고 가난으로 인한 서러움을 얼마나 받으며 안고 살아왔는지 또 지금도 얼마나 많이 지니며 살고 있는지 한번 곰곰이 살펴보세요. 그러면 이들을 알게 됩니다. 알면 이해하게 됩니다. 이해하면 정이 갑니다. 정이 가면 마음을 얻습니다. 그래야 이곳 분들에게 모국의 정도 느끼게 할 것이요 우리 한 핏줄의 사랑도 알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라고 이런 일 하라고 우리를 이곳에 보내었다고 한번 마음을 넓혀 봅시다. 그리고 이분들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 하나를 바꾸셔야 합니다. 무엇인고 하니 이분들을 같은 민족으로 사랑은 하되 같은 국민으로는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국은 대한민국이요 이분들의 조국은 중국입니다. 이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바로 직시하여야 합니다. 한때 이분들에게 한국 국적을 주어야 한다는 운동이 한국에서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아무리 국적을 준다고 하여도 이분들이 다 가서 살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국적을 얻으려는 이유는 돈은 한국에서 벌고 살기는 중국에서 살자는 얄팍한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국적을 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영원히 한국에서 살라면 다 포기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한국에서 남들이 다 싫어하는 3D업종에 종사하며 그 밑바닥 인생을 자취하겠습니까? 그저 국적 얻어 부담 없이 돈벌어서 나중에는 중국에 와서 살자는 마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생각이 올바른 생각이 아니지요? 그러다 이다음 거꾸로 중국의 경제가 앞서고 한국이 가난하여진다면 이들은 또 다시 중국 국적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렇게 이분들은 아직도 자기 정체성을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바로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어차피 이분들은 다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곳에서 마음을 다잡고 살도록 도와주는 일이 가장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분들더러 한국과 중국이 축구 시합을 하거든 진정으로 중국을 응원하여야 한다고 강조를 합니다. 그래야 이들이 이곳에서 주인으로 삽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꾸 한국으로 기웃거리면 결국 한국인도 중국인도 못되고 불행한 미아가 됩니다. 그러면 중국에서도 누가 진정으로 돌보려 하겠습니까? 과거 이곳 우리 민족은 일제와의 전쟁에서나 공산당 정권 수립 시 국민당과의 싸움에서나 그리고 조선 전쟁에서나 다 혁혁한 공을 세웠고 또 그 우수한 두뇌와 놀라운 교육열로 인하여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자주 한국 바람으로 인하여 좀 이상한 눈초리를 받습니다. 어느 나라가 외국에 가서 이 나라 국민이 되겠다고 아우성치는 국민을 곱게 보겠습니까? 결국 마음만 들뜨게 만들어 자기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처량한 신세가 됩니다. 진정 이분들을 사랑하신다면 이분들이 이곳에서 중국 국민으로 그리고 조선민족으로 떳떳이 살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3    아름다운 품앗이 댓글:  조회:3245  추천:144  2006-05-10
아름다운 품앗이 안병렬 몇 년 전, 교하의 조선족 실험소학교에 강의를 하러 간 일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4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를 다니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학교 교장님의 간곡한 부탁이 있어 갔던 것이다. 첫 날 갔을 때의 일이다. 강의를 마치니 교장이 저녁을 먹으러 가잔다. 가난한 소학교에 폐가 될까 저어하여 어디 가까운 데서 간단히 하자고 하니 오늘은 시 정부의 간부들이 교하 시내 최고급의 호텔에서 특별히 한 턱 내기로 되었으니 걱정 말고 가자며 소매를 끈다. 나는 속으로 이 소학교의 교장이 참 영향력이 있고 발이 넓은 분이어서 시 간부까지 움직이는 모양이라고 감탄을 하며 따라갔다. 그런데 식사 중에 무언가가 이상하였다. 시 간부란 분들 셋이 왔는데 모두 한족이었다. 그리고 이분들과 교장 사이에 그렇게 친밀해 보이지를 않고 그저 겨우 안면이나 있는 정도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분들이 왜 나를 대접하는 것일까?” 하기는 소학교에 오신 손님은 곧 자기 시에 오신 손님이니 자기들의 손님이라 여기고 대접할 수도 있으나 아무래도 그것은 너무 비약적인 생각일 것 같았다. 그래 하도 궁금하여 좀 결례일 것 같으나 무릅쓰고 교장에게 물었다. “이분들이 왜 나를 대접하지요?” “글쎄요. 한국의 교수가 오신다는 이야기가 맞느냐 하기에 그렇다고 하니 저녁을 사겠다고 꼭 모시고 오라고 하여 모시고 왔을 뿐입니다. 아마 무슨 이야기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 “무슨 이야기”는 좀체 나오지를 않았다. 성급한 나는 참지 못하고 서툰 한어로 왜 나를 대접하느냐고 바로 묻고 말았다. 그런데 그 대답이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닌 스 한구어런”(당신은 한국 사람이요) 하는 것이었다. 이 무슨 말인가? 한국인이라고 왜 시 정부 간부들이 이토록 성대히 대접한단 말이냐? 그래 다시 그 연유를 자세히 물었다. 그랬더니 자기들이 작년 한국에 나갔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한국인들로부터 풍성하고도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대접에 대한 답례를 해야 하는데 그분들은 만날 수가 없으니 대신에 오늘 당신에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눈물이 나오려 하였다. “아, 착한 사람들이여, 오늘 이 삭막한 세상에 이렇게도 아름다운 마음들이 있던가?” 나는 그분들의 손을 잡고 울음을 참으며 겨우 고맙다고만 연거푸 말할 뿐 달리 내 마음을 나타낼 수도 없었다. 이날의 이 감격으로 하여 그 후 그 먼 길을 매주 한번씩이나 다니면서도 나는 괴로움을 몰랐다. 나는 지금도 그 일을 기억하며 감격을 한다. 그리고 외국의 낯선 나를 이토록 따뜻이 대접하여주던 그 한족 분들과 또 이분들을 이렇게 하도록 미리 대접하여준 준 그 한국 분들에게도 감사를 한다. 그러면서 나도 이 다음 그 누구 한국분이 이곳에 와서 나 때문에 따뜻한 대접을 받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내가 이곳에서 미리 품을 팔아 놓으면 나도 받을 것이요 설령 내가 못 받더라도 이 다음 누군가가 반드시 받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품앗이에 나도 미력(微力)이나마 동참을 한다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더냐? 이 아름다운 품앗이를 나에게 가르쳐준 그 한국 분들과 교하시의 간부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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