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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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사월초파일
2012년 06월 06일 04시 26분  조회:2656  추천:7  작성자: 강룡운
수필
 
어머니의 사월초파일
강룡운
 
  사월초파일(음력 四月初八日)은 석가모니의 탄생일, 불교의 기념일중에서 가장 큰 명절이다. 그래서 불교신자가 많은 한국에서는 이날을 “부처님 오신 날”이라 지칭하고 전국적인 공휴일로 정하기도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땐, 석가모니의 탄생일이요 “부처님 오신 날”이란건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사월초파일이 어머니가 각별히 명심하는 날이란건 알고있었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내가 서란현 막석이란 곳에서 태여나 첫돌생일을 쇠기도 전에 한번은 좀 크게 앓았다고 하는데 어머니의 속이 까맣게 타서 재가 되도록 마음고생을 많이 시켰다는것이였다.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찾아다니며 헤매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가는 숨을 겨우 몰아쉬는 나의 그 갸냘픈 모습을 눈여겨본 누군가가  이런 애는 출가한 스님더러 이름을 지어달라고 해서 새 이름을 지어주면 혹시 운명이 바뀌여질지도 모른다고 귀뜸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걸식하는 스님 한분이 동냥하려 집으로 찾아왔기에 어머니는 쌀 두바가지에 정갈한 음식을 후히 드리면서 등에 업혀 칭얼대는 나를 가리키며 이애한테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스님은 어머니의 후한 대접이 너무 고마워 차마 거절할수 없었던지 “룡 룡(龙) 구름 운(云)”, 이렇게 두 글자를 적어주고 이애가 첫돌까지만 무사히 넘기면 앞으로 장수할거라는 덕담까지  남기고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껏 줄곧 나를 따라다니는 “룡운”이란 이 두 글자가 바로 그 스님이 나에게 지어준 이름이란다.
나의 어렴풋한 기억의 쪼각들을 한데 모아보면 어머니는 불교신자, 부처님을 믿고 섬기시는분이였다. 아마 내가 일곱살때였을것이다. 그때 나는 조양천에서 어머니를 따라 한 자그마한 사찰에 갔댔었는데 거기서 황금옷을 입은듯한 멋진 불상들을 처음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머리속 한구석에 남아있다. 맨날 수수밥만 먹던 그 시절에 어머니가 갖고간 새하얀 입쌀로 밥을 지어놓고 스님과 함께 밥 한끼 먹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유난히 향긋하던 그 밥맛이 어쩐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집은 워낙 길림지구의 서란, 막석, 구전 등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살았었는데8.15광복을 맞고 길림에 나와 둘째고모네와 한데 모여서 살다가 1946년  국민당군대가 길림으로 처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큰 할아버지, 둘째 할아버지가 살고계시는 조양천으로 나오게 되였다고 한다. 그런데 길림에서 우리와 이웃하여 함께 살던 둘째고모네는 미처 자리를 뜨기도 전에 국민당의 폭격을 맞아 여섯식구중 네식구가 목숨을 잃게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 비보가 전해오자 우리 집은 련며칠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국민당이 길림을 점령하고 교하를 지나 여기 연변에까지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아 한참 민심이 불안하던 바로 그때에 어머니는  우리집 식구들의 안녕을 보우해 주십사하고 부처님께 소원을 빌기 위해 그 구차한 살림에도 어디 가서 벼를 구해다가 정성들여 절구에 빻고 또 빻아서 티끌 하나 볼수 없는  새야얀 “공양미”를 마련해 가지고 나를 데리고 사찰에 찾아가 불상앞에 향을 피워올리고 기도를 드린게 아닌가싶다.
    내가 조양천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 옛 기억을 더듬어 그 사찰이 있던 곳에 찾아가 보았지만 불상이나 스님은 다시 찾아볼수 없었다. 토지개혁이후 여러차례 정치운동을 겪으면서 항미원조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그 구리로 만든 불상들은 혹여 포탄을 만드는 군공장에 들어가 탄피로 되였을지도 모른다.
    사찰은 없어지고 스님은 어디론가 사라졌어도 해마다 사월초파일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언제나 잊을세라 명심해서 기다리는  사월초파일이 되면 어머니는 늘 미리 준비해 두었던 “공양미”를 갖고 오전엔 어디론가 가셨다가 오후가 되면 집으로 돌아오시군 하였다. 해마다 부딪치는 일이라서 나는 언젠가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어머니께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잘 되라고 여태껏 불공을 드려왔는데 지금은 찾아갈데가 없어서 그저 조용한 강변에 가서 갖고 간 쌀로 밥을 지어 놓고 기도만 드리고 온다”는것이였다.
    내가 초중 1학년때 청년단조직에 가입하여 2학년에 올라오면서부터 전교 단총지위원회 선전위원 책임을 지고있을 때였다. 한번은 우리 반 반주임이며 물리과 과임인 선생님의 입단신청을 심의하는 단총지위원회 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그때 그 선생님은 천주교를 신앙하고 성당에 다니는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고있다는 그 리유 하나만으로 그의 입단신청이 부결되는것을 목격하였다.
   나는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어머니가 사월초파일이면 어디론가  다니는게 어쩐지 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한번은 어머니께 그런게 다 미신이고  부질없는 노릇이니 이젠 그만 두시라고 말씀드린적이 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다 너희들이 잘 되라고 하는 일이다. 이건 내 마음이다. 너희들에게 해가 될게 하나도 없으니 걱정 말아.” 하시고는 당신이 운명하는 1984년까지 몇십년동안 해마다 사월초파일이 되면 한번도 어김없이 어디론가 조용히 다녀오시군 하였다.
   1954년 우리나라 제일 첫번째 헌법으로부터 종교신앙의 자유는 줄곧 기타 여러가지 자유와 함께 명문으로 헌법에 규정되여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그것은 일종 형식상, 지면상의 규정이였을뿐 종교신앙의 자유란 지극히 제한된 자유였으며 보기좋은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문화대혁명때는 극좌적인 사조가 홍수처럼 전국에 범람하여 종교신앙의 자유란 그 허울조차 깡그리 부셔버리고 모든 종교신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미증유의 비극을 초래하기도했다.
   개혁개방을 맞아 국문이 열린후 나는 여러번 한국에 다녀왔다. 한국에 갔을 때 성당에도 가보고 교회에도 가보고 신부와 목사님들의 설교도 들어보았으며 불국사나 해인사와 같은 사찰에도 가보았다.
    나는 신앙적으로 부처님이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네들 신봉자들의 주장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몇천년 세월이 흘렀어도 왜 지금까지 대부분의 인류가  아직도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매료되여있는지 알고싶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 힐튼호텔에 주숙하고있을 때 기증용으로 놓아두는 《성경》을 갖고 돌아와 읽어보기도 하였고, 충천도 서천의 한 목사님이 나에게 선물한 큰글자 《통독성경》을 갖고 돌아와 안도방직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하면서도 시간을 짜내 《자본론》을 통독하던 그런 끈질긴 의지력으로 거의 1년이란 시간을 할애하며 통독하기도 하였고, 기독교와  불교와 이스람교 등 세계 3대 종교에 관한 서적들도 더러 읽어보았다.
    이런 종교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나는 알고도 모를것 같은 그런 아리숭한것들이 너무 많아 뭘 좀 알았다고 떠들어댈건 조금도 없지만 아무튼 종교란 우선 문화라는것은 알게되였다. 인류의 력사와 문화는 종교를 떠나서는 설명할수 없거니와 리해할수도 없는것이다. 여기까지 써내려오다보니 갑자기 백암송(白岩松)이 쓴 《행복했습니까?(幸福了吗?)》라는 책에서 읽었던 일화가 머리에 떠오른다.
    세계가 알아주는 우리 나라 대석학 계선림(季羡林)선생이 해방군 301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중앙의 주요령도자 한분이 문병을 갔다고 한다. 두분은 많은 얘기를 나누다가 인간의 령적인 문제를 담론하게 되였는데 령도자분께서 계선림선생에게 “주의(主义)와 종교 이 두가지중에서 어느것이 인간들속에서 먼저 사라질거라고 보십니까?”라고 물으셨다고 한다. 그러자 계선림선생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아무때든 인간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지 않는한 아무래도 주의가 종교보다 하루라도 더 먼저 사라질겁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우리가 보건대 종교가 아무리 허황한것이라 할지라도 그 허황한 종교가 오히려 맑스주의와 같은 여러가지 정치적이데올로기보다도 오히려 더  장수할거라는 얘기다. 이것을 좀 더 실감나게 바꾸어 말하면, 례를 들어 인류 력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책  두 권을 놓고 비유해서 말한다면, 칼 맑스의《자본론》 신봉자들보다 《성경》을 읽는 예수님의 신자가 이 지구상에서 얼마간이라도 더 오래동안 생존할지  모른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마냥 죽음의 공포속에서 떨고있는 심약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인간은 예로부터 자신의 힘으로 이겨낼수 없거나 자신의 지혜로는 도저히 해결할수 없는 난제에 부딪치면 왕왕 그 어떤 초자연적인 힘, 초자연적인 존재에 기대여, 이를테면 부처님이나 하느님에게 기대여 죽음의 공포에서 해탈해보려고 시도하였던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산생되고 지금껏 존재하고 또 앞으로도 장구한 세월 계속 존재할수 있는 여러가지 원인중의 하나일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령적인 신앙문제는 결코 그 어떤 강압적인 수단으로 해결될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맑스주의정당은 종교신앙의 자유를 주장한다. 즉 종교를 신앙할수 있는 자유와 종교를 신앙하지 않을수 있는 이 두가지 자유를 동시에 주장하는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종교를 마치 홍수나 맹수처럼 너무 무서워했는지도 모른다. 맑스주의가 진리라면 종교를 무서워할 아무런 리유도 없지 않은가? 유물론이 유심론을 겁나한다면 그것을 어찌 진리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부모가 종교를 신앙한다는 그 리유 하나만으로 그 부모의 자식이 공산당을 따라 청년단에 가입하겠다는 그런 진보적인 소망마저 묵살해버릴수 있다면 그게 어디 진정한 신앙의 자유란 말인가?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이러한 사례는 결코 개별적인 사례가 아니였을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두말할것 없이 광범위한 보편성을 띠고있었을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엄청 어마어마한 일들도 무지무지 많았을것이다. 돌이켜보면 유치하기 그지없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던 일들을 생각하면 평생을 동서방문화연구,  특히는 종교연구에 온갖 정력을 몰부었던 계선림선생님의 그 의미심장한 말씀에 다소 리해가 간다. 어머니도 역시 죽음에 대한 공포로 말미암아 부처님을 믿게 되였을것이다. 어머니로 말하면 한살도 되기전에 병에 시달려 경각을 다투는 어린 자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온 가정 식구들이 국민당의 폭격에 목숨을 잃게 되는 그런 참극을 모면하기 위해, 일곱이나 낳았어도 셋밖에 남지않은 자식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부처님을 모신 사찰을 찾아다니시였고 사찰마저 사라진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강가에 가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렸을것이다.
나는 나에게 이름을 지어준 그 스님의 덕담때문에 첫돌이란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인생칠십고래희”의 고개를 넘어 지금껏 살고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께서 그토록 경건한 마음으로 드팀없이 불공을 드린 그 부처님 덕분에 여러번 위험천만했던 인생의 험난한 고비들을 하나하나 용케도 뛰여 넘어왔다고 믿지 않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다. 지성이 지극하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했다. 나는 신앙적으로는 부처님이나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하늘도 감동시킬수 있고 돌에도 꽃을 피울수 있는 어머니의 그 지극한 정성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어머니의 그 다함없는 사랑, 그 지극한 정성이 있음으로 하여 첫돌후에는 그나마 큰 탈없이  무난히 자랄수 있었고, 어머니의 그 다함없는 사랑, 그 지극한 정성이 있음으로 하여 그처럼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대학공부까지 다 할수 있었고, 어머니의 그 다함없는 사랑, 그 지극한 정성이 있음으로 하여 문화대혁명때 “반혁명”의 루명을 쓰고 로동개조를 하면서 허리를 다쳐 거의 불구자신세가 되였던 내가 북경에 가서 수술에 성공하여 마침내 기적적으로 다시 건강을 되찾을수 있었다고 믿는다.
  믿음이 곧 신앙이다! 이것이 나의 신앙이다!
 
(2011년 12월 10일 연길에서)
 
[2012《장백산》3 (5-6월호) 158-164페지/ 2013년03호<민족문학>77-81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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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성자 : 연변일보기자
날자:2012-06-06 09:14:56
강사장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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