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덕수는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담임한이래 주당위, 주정부 지도부 성원들과 같이 주로 몇가지 사업을 중점적으로 틀어쥐였다. 첫째로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는 사업을 틀어쥐였다. 둘째로 개혁개방이였다. 세번째로 경제건설이였다. 네번째로 연변의 문화 교육사업발전 사업을 틀어쥐였다.
문화에 대해 리덕수는 자기 나름 대로의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력사적 관점으로 보면 그 어떤 국가나 민족이나를 막론하고 그들의 력사가 곧 그들의 문화를 결정한다. 이른바 민족문화라면 각 민족이 력사발전과정에서 창조하고 발전시킨 본 민족의 특색을 지닌 문화를 말한다. 문화는 곧 그 민족의 정신이고 령혼이며 그 민족의 혈맥이고 그 민족의 정신적 고향이다. 보다싶이 우수한 민족문화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고 계승발전시키는 것은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놓고 말하면 지극히 중요한 사업이다. 중국조선족은 예로부터 문화를 숭상하고 예술을 사랑해왔다. 조선족문화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궁무진한 매력을 갖고 있고 나아가 인류의 문명과 진보에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아울러 혁명과 건설, 개혁개방의 각 력사 시기에 인민들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힘을 주고 인민의 위업을 구가하는 특수한 역할을 발휘하였다. 리덕수는 개혁개방은 엔진이고 경제발전은 중심이며 문화를 보호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한 민족, 한 사회의 령혼을 고수하는 작업이라고 보았다. 리덕수는 연변에서 사업하는 기간에 시종일관 문화사업에 깊은 중시를 돌리였다. 그는 크고 작은 회의에서 늘 간부와 대중들에게 문화의 전승과 발전이 없으면 경제사업도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리덕수는 연변의 사업을 주관하는 사이에 어느 문화예술단체는 마땅히 보호하고 부추겨주어야 하고 또 어느 문화예술단체는 마땅히 풀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시장화의 길을 탐색하게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로선도 그려주었다. 그 당시 연변의 많은 문예단체들의 경우 인원이 많은 대신 공연이 적어 재정보조에 의해 살아가고 있었다. 리덕수는 문예단체들이 안정을 확보하면서도 개혁을 탐색하는 방안을 밀고나갔다.
그는 문화예술분야에서 힘있게 민주를 발양하여 작가, 예술가들에게 느슨하고 자유로운 창작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여기에는 작가, 예술가들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시대적 요구에 손색이 없는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도록 고무격려해야 한다는 깊은 의미가 들어있었다. 리덕수의 이러한 사유는 문학예술계에서 진정어린 호응을 불러일으키게 되였다. 작가, 예술가들은 사상을 해방하고 과감히 혁신하였고 창작의욕이 젠에 없이 끓어올라 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전통적인 민족문화에 대해서도 각별한 중시를 돌리였다. 리덕수 자신은 조선족 전통문예작품 가운데서 두개의 작품을 제일 반기였는데 하나는 《춘향전》이고 다른 하나는 《심청전》이였다. 리덕수는 어렸을 때 이 두 작품을 읽어 보았고 젊었을 때도 또다시 한번 읽어 보았으므로 매우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족의 미덕이 모두 이 두 작품에 체현되여있다고 보았다. 연변가무단에서 《춘향전》을 무극으로 개편하게 되였는데 리덕수가 연변에 있을 때는 이 무극이 아직 최종적으로 채 완성되지 못하였다. 1990년에 리덕수는 성에 올라가 사업하면서 문화교육사업을 주관하게 되였는데 그 때 그는 연변가무단에 80만원이란 자금을 해결해주었다. 그 때의 80만원은 적지 않은 액수였다. 나중에 이 작품이 전국에서 최고의 영예인 문화상(文华奖)을 타게 되였다. 그 당시 문화부와 문화예술계에서는 이 작품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인민일보》도 관련 평론글을 발표하였다. 그 시기에 창작된 무극 <춘향전>, 가극 <아리랑>,무용서사시 <장백의 정>,연극 <털없는 개> 등 작품들은 모두 오랜 세월을 두고 감상할 수 있는 예술명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리덕수는 연변지구의 기타 민족 문화예술에 대해서도 특별히 관심하고 배려해주었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연변평극단의 생존여건은 매우 곤난하였다. 리덕수는 상황을 료해한 후 연변평극단 단장 하원매(夏元梅)를 찾았다.
“ 만약 극단이 기업과 손을 잡고 련합경영을 해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원매는 그 때 리덕수의 이 말을 듣고 경천동지라고 할 만큼 충격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문예가 무대를 만들어놓으면 경제가 나와 춤을 춘다는 말은 그 몇해 뒤에야 나온 슬로건이였다. 더구나 하원매로서는 놀랍게도 연변평극단에서 매번 새로운 종목의 리허설이거나 대형작품을 내놓게 될 때 심의해달라고 청을 들면 리덕수는 번마다 손에 잡혀있던 일들까지 다 제쳐놓고 친히 현장에 찾아왔다.
그 당시 연변가무단과 연변평극단을 합병시키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리덕수는 견결히 동의하지 않았다.
“모든 민족은 모두 자기의 문화가 있으므로 두 민족의 문화는 모두 보호받아야 하며 두 민족의 문화는 서로 추진하고 서로 배우면서 서로 거울로 삼고 다 함께 진보하고 다 함께 발전하며 다 함께 번영을 이루어야 합니다.”
문화의 보호와 발전에 대해 리덕수는 정부가 응당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므로 정부가 문화를 보호하고 발전시키고 번영시키는 면에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방에서 사업하면서 문화적 리념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였다.
리덕수는 연변에 있을 때 주동적으로 문예계의 작가, 예술가들과 친구로 사귀였다. 지휘가 박우(朴佑)도 그 속에 들어있다. 박우는 호쾌하고 시원시원하였고 그의 지휘풍격은 신 들린듯 무아경에 빠져 분방하기 그지없었다. 리덕수는 일찍 대학에서 공부할 때 박우를 알게 되였고 그가 지휘를 맡은 공연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미술계의 석희만(石熙满)도 리덕수의 친구였다. 석희만은 오른손이 없어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그린 그림은 개인적인 색채가 지극히 짙었다. 박우와 석희만은 사회주의교양운동 때 리덕수와 같은 공작조에 있었는데 그들의 우정은 줄곧 변함없이 이어졌다.
작가 리근전(李根全)은 조선족이였지만 그는 조선문으로 글을 쓰지 못하기에 그의 소설들은 모두 한어로 쓴 다음에 다시 역자를 찾아 조선문으로 번역한 것이였다. 리덕수는 그를 보고 《주덕해전》을 쓰라고 부탁하였다. 리근전은 이를 수락하였고 여러번 리덕수의 집무실에 찾아와 자기의 창작구상을 들려주었다. 나중에 리근전과 주덕해의 부인 김영순(金永顺)의 공동한 노력 끝에 드디어 이 책이 완성되였다.
저명한 작곡가 정률성(郑律成)의 사적을 료해하기 위해 리덕수는 정률성에 관한 자료들을 몽땅 찾다싶이 해서 읽어보았다. 제1차 ‘정률성음악회’는 리덕수가 연변에 있을 때 치러지게 되였다. 이 음악회는 주당위 선전부장 리정문의 제의로 기획되였다. 리정문은 민족문화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지닌 열성가로서 민족문화의 전승과 발전에 모든 정력을 몰붓고 있었다. 리정문한테 이 음악회를 치르려면 돈이 얼마나 수요되느냐고 물어 40만원이 수요된다고 하자 리덕수는 그 자리에서 비준해주었다. 정률성음악회 첫공연이 막을 올릴 때 리덕수는 친히 관객석에 자리했다. 리덕수의 오른 편에는 정률성의 부인 정설송(丁雪松)이 앉고 그 곁에는 그의 딸 정소제(郑小提)가, 리덕수의 왼편에는 군부대 수장이 앉았다. 그 날은 부대 문예일군들도 대거 참가했다. <연안 송가>, <팔로군 군가>, <팔로군 행진곡> 등 작품을 연주한 다음 연길시 유치원 어린이들이 무대에 올라가 아동음성으로 정률성의 작품을 노래했다. 이 노래을 듣다가 심양군구 수장이 먼저 흐느꼈다. 그러자 정설송과 정소제도 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감화되면서 모두 다같이 울음을 터뜨리게 되였다. 이러한 정경을 보고 리덕수도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공동한 감정이 마구 한데 어우러졌기 때문이였다. 군부대 수장이 울음을 터뜨린 것도 아마 이런 감정이 내포되여 있었을 텐데 이것은 가슴속에 맺혀 있던 감정의 일종 방출이였고 가슴속에 깔려있던 울분의 로출이였다. 사람들은 모두 정률성을 한없이 그리는 감정을 품고 있었는데 만약 그런 감정이 없었다면 이런 울음판이 벌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움과 경모의 마음, 그리고 가슴 저미는 아쉬움 등 여러가지 감정이 한데 얼키고 설킨 감정이였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리덕수는 침대에 누워서도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문예의 힘이란 바로 이렇게 엄청난 것이였다.
그 때로부터 리덕수와 정소제네 두 가정은 깊은 우정을 쌓게 되였고 서로 자주 오가면서 련계를 이어왔다. 정소제는 1943년생이였다. 정률성은 조선족이고 정설송은 한족이였다. 정률성이 연안에서 창작하고 지휘한 <팔로군 행진곡> 대합창에 정설송이 감동을 받으면서 그들은 차츰 련정이 생겨 나중에 연안에서 결혼했다.
정설송은 2011년 5월에 북경에서 별세했는데 향년 93세였다. 정설송이 입원하고 있는 기간에 리덕수는 특별히 병원을 찾아 위로하였다. 정설송은 신중국의 첫번째 녀성 대사로서 선후로 네드란드와 덴마크에 가서 대사로 있었다. 1996년에 정설송은 한국국립’국악원’의 초청을 받고 한국을 방문하였고 친히 정률성의 고향인 광주도 찾아보았다.
정소제의 남편 김인섭도 조선족인데 무한군구의 중장이였고 성도군구 부사령원으로 있다가 정년퇴직하였다. 그는 연변 룡정태생이였다. 리덕수가 룡정에서 현당위 서기로 있을 때 김인섭의 형님은 룡정현공안국 국장이였고 김인섭은 야전군 모사단 사단장이였다. 중월자위반격전 때 그의 사단은 공을 크게 세워 등소평으로부터 ‘전군영웅사단’으로 명명되였다. 전투가 끝나고 철수하게 되였을 때 김인섭은 문예활동으로 부대의 사기를 고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였다. 그는 그 때 주당위 서기였던 리덕수한테 편지를 띄워 도움을 청했다. 리덕수는 곧바로 연변가무단 배우들이 전선에 가서 공연하도록 배치하였다. 가무단이 돌아온 후 김인섭은 또 리덕수한테 편지를 보내 사단본부에서 가무단을 세우려고 하는데 리덕수더러 좀 도와 달라고 청을 들었다. 그리하여 사단 문공단을 설립하는 데 연변에서 20여명 배우를 데려다게 되였다.
2010년에 할빈시에서는 정률성음악회를 치르면서 모처럼 리덕수를 초청했다. 할빈시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장인 박일(朴日)도 조선족이였다. 그는 음악회 프로그람을 미리 리덕수한테 보여주었다. 리덕수는 그 프로그람을 하나하나 훑어보고 나서 이렇게 건의했다.
“박부장동무, 동무네는 한개 종목을 더 보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말에 박일은 너무도 뜻밖이라는듯 이렇게 물었다.
“무슨 종목을 더 넣어야 할 것 같습니까?”
“정소제더러 무대에 올라가 <연안송가>를 연주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할빈시에서 가수 한분을 불러 정소제의 피아노반주에 맞춰 <연안 송가>를 부르게 하면 예상 밖의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이 때 그들의 곁에 잠자코 앉아있던 할빈군분구 정치위원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키가 훤칠한 장신의 사나이였는데 먼저 군례를 올리고 자진해 청들었다.
“이 노래는 제가 부르게 해주십시오. 작년에 연안당교에 가서 학습할 때 일부러 이 노래를 배우면서 저는 이 노래에 무척 정들게 되였습니다. 정소제와 한두번만 맞춰보면 곧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도 뜻 밖이라 박일은 기쁜 김에 그 자리에서 무릎을 탁 쳤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합시다.”
리덕수는 박일한테 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소제는 연안에서 태여났습니다. 당시 연안의 경제상황이 너무도 어려워서 정설송은 정소제를 키우기 위해 남편이 제일 아끼던 바이올린까지 팔아야 하였답니다. 정률성이 전선에서 돌아와 그 바이올린이 보이지 않자 정설송한테 물어보아서야 그 바이올린이 이미 팔렸다는 걸 알게 되였답니다. 그래서 정률성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 이 애의 이름을 소제(小提)라고 지읍시다.’소제란 이름의 유래입니다. 이번 이 음악회에서 이 일을 상기시키면 정말 기념의의가 있으리라고 보아집니다. 그러므로 정소제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사회자가 당년에 정률성이 어찌하여 딸애의 이름을 정소제라고 지었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분위기를 더 끌어올릴 수 있겠습니다.”
박일은 너무도 고마워서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리부장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니 벌써 한시가 다되였다. 공연은 오후 2시로 예정돼있었다. 정소제와 그 정치위원은 말 그대로 두번만 련습해보고 무대에 올랐다. 예상한 대로 사회자가 무대에서 정소제를 소개하면서 “정소제”란 이름의 유래를 들려주자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였다. 이어 정소제가 무대로 오를 때 관객들의 박수소리는 거의 1분동안이나 이어졌다. 정소제의 피아노연주가 정말 훌륭한 데다 금상첨화로 군분구 정치위원마저 참 노래를 격동적으로 불렀다. 다같이 가슴이 울렁거려 그가 노래를 부를 때 관객들도 다 함께 따라 부르면서 극장의 분위기는 화끈하게 끓어올랐다. 그 날 이 종목이 그 무엇보다도 음악회를 들썽해놓았다.
정률성과 그 일가에 대한 관심 속에서 우리는 혁명선렬에 대한 리덕수의 심심한 추모의 정과 무한한 경모의 정 그리고 예술가들을 열애하는 정감을 볼 수 있다.
항일전쟁시기, 해방전쟁시기와 항미원조시기에 연변에서 입대하고 참전한 사람들이 특별히 많은 만큼 혁명렬사들도 그만큼 많았다. 저명한 시인 하경지(贺敬之)가 연변에 와서 “산마다 진달래가 꽃피고 마을마다 렬사비가 서있네”라고 쓴 시구는 연변의 력사에 대한 진실한 묘사라고 할 수 있었다. 피로 얼룩진 100여년의 풍상고초를 다 겪어내면서 혁명전쟁년대에 연변인민들은 군대에 입대하고 참전하는 것을 영광으로 간주하였고 혁명을 위해 한목숨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연변인민들이 선렬들을 경모하고 선렬들을 추모하면서 성심성의로 렬사가속들을 우대하는 것은 이미 대를 이어 전승되여 내려온 문화로 자리 잡았다. 리덕수는 연변에 있을 때에도 늘 이 력사를 이야기하였고 나중에 북경에 가서도 잊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나라를 사랑하고 자기의 민족을 사랑하며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뒤를 이어 용감하게 몸바쳐 싸운 것이 다름 아닌 하나의 연변의 문화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조선족의 첫 공산당원은 룡정현에서 태여난 한락연(韩乐然)이였다. 한락연은 중국공산당의 걸출한 정치활동가이자 중국혁명의 선구자였고 중국조선족의 혁명선구자였으며 아울러 중국조선족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걸출한 인민예술가였다. 리덕수는 정치적 측면에서 한락연의 ‘다섯가지 첫번째’를 개괄해냈다.
첫째, 한락연은 1923년에 입당한 중국조선족의 첫번째 공산당원이다. 둘째, 1925년 한락연은 동북 심양에서 첫번째 당지부를 건립하였다. 셋째, 한락연은 흑룡강 목단강에 우리 당의 동북국제련락처를 건립하였다. 넷째, 국공합작시기 한락연은 우리 당의 지하공작자로서 우리 당이 파견한 중국조선족의 첫번째 국민당 소장이였다. 나중에 국민당한테 발각되여 3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동필무 등 당의 지도자와 리제심(李济深) 등 국민당 군정요원들의 적극적인 구조에 힘 입어 마침내 구출되여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국민당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서부에 남으라고 강요했기에 란주에 남아있게 되였다. 이것은 한락연이 그 후에 창작한 작품들이 모두 청해, 신강, 서장 등 서부 소수민족지역을 반영하게 된 배경이다. 다섯째, 한락연은 중국조선족으로는 ‘공산국제’에 참가한 첫번째 국제주의전사로서 유럽 여러 나라에서 혁명전쟁에 참가하였다.
“예술적 측면에서 한락연의 사위 강기민선생이 한락연에 대해 ‘다섯가지 첫번째’를 개괄하였는데 아주 잘 도출했다고 보아집니다.” 리덕수가 가리킨 강기민선생이 개활한 ‘다섯가지 첫번째’란 이러하다. 첫째, 한락연은 중국 미술계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첫번째 조선족 혁명예술가였다. 둘째, 한락연은 중국 동북에서 첫번째로 정규적인 미술학교를 창설한 중국조선족 미술교육가이다. 셋째, 한락연은 중국조선족 속에서 첫번째로 프랑스를 류학한 저명한 화가이다. 그는 서방예술과 동방예술을 결합하여 예술작품창작에서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하였다. 넷째, 한락연은 중국조선족 속에서 신강 키질벽화를 연구한 첫번째 화가였다. 다섯째, 한락연은 중국조선족 속에서 서북인민들의 생활을 소재로 창작을 진행한 첫번째 현대예술가였다. 국외에서는 한락연을 ‘중국의 피카소’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주은래 총리께서 친히 회시를 내려 그들의 일가를 서북에서 북경으로 데려왔다. 한락연의 부인은 남방사람이였다. 신중국이 창건된 후 주은래 총리는 친히 그의 사업을 배치해주었고 등영초도 그의 생활에 깊은 관심을 돌렸다. 리덕수는 한락연을 아주 대단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면서 반드시 그의 사적을 잘 선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리덕수는 한락연이란 이 혁명력사인물에 대해 인식, 인식, 재인식 하여야 하고 연구, 연구, 재연구하여야 하며 선전, 선전, 재선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락연의 사위는 건국 후 마카오주재 중국 첫 책임자였다.
한락연의 작품들은 한락연의 부인이 집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몽땅 국가에 기부하면서 지금은 모두 중앙미술관에 수장되여 있다. 당창건 90돐을 맞이하여 중앙미술관에서는 특별히 한락연미술작품전시회를 치렀다.
리덕수는 한락연의 고향인 연변 룡정에서 열린 한락연연구포럼에서 연설을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 연설이 조선족 대중들한테 깊은 영향을 주게 되였다. 연변의 많은 젊은이들이 중국혁명력사에 이처럼 걸출한 조선족 혁명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그럴 법도 하였다. 리덕수는 그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늘 한락연의 가속들과 함께 이 뜻깊은 기념활동에 참가하게 된 것을 더없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활동은 기실 잊혀져가거나 사라져가고있는 력사와 문화를 다그쳐 되살리고 혁명전통을 전승하고 민족문화를 높이 추켜들고저 하는 움직임입니다. 한락연은 우리 중국조선족의 걸출한 혁명가이고 정치가이며 동시에 걸출한 예술가, 미술교육가이고 사회활동가였습니다. 그러므로 룡정시에 한락연기념관과 한락연공원을 세우는 것은 자못 큰 의의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과거를 망각하는 것은 곧 배신을 의미합니다!’우리가 력사를 망각하게 되면 그것은 곧 력사에 대한 배신이며 자기의 문화를 망각하는 것은 자기의 령혼을 버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적잖은 사람들, 특히는 젊은이들이 한락연을 잘 모르고 있는데 이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한창 다그치고 있는 이 응급구조사업은 매우 중요합니다. 룡정시는 한락연의 고향이자 그가 태여난 고장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룡정은 중국조선족문화, 중국조선족교육의 요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룡정은 우리 중국조선족력사의 축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일찍 우리 중국조선족이 중국혁명을 위해 아주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수많은 혁명렬사들이 희생돠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룡정의 혁명력사는 영광으로 가득차있습니다. 룡정에서 성장한 혁명간부, 혁명지식인과 혁명예술가들이 매우 많습니다. 룡정시에서 한락연을 기념하는 활동들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응당 해야 할 일이며 매우 적시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한락연이란 혁명렬사에 대해 보다 충실하고 보다 전면적이며 보다 깊이 있게 평가해주어야 합니다.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한락연처럼 특수하게 싸워온 혁명선렬들의 공적을 제대로 잘 조명하여야 하겠습니다. 저는 한락연렬사연구회를 설립하는 것을 찬성합니다. 연구회를 설립할 때 지도간부와 연변대학의 전문가와 학자들을 망라한 명인들을 고문으로 모셨으면 하고 건의하고 싶습니다. 또 북경에 가서 오랜 동지들을 찾아서 정황을 료해할 것을 건의합니다. 이를테면 염명복(闫明复)은 중국공산당의 정보 전문가였던 염보항(阎宝航)의 아들입니다. 염보항과 한락연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는데 이들 두 사람은 기실 모두 우리 당의 지하정보 일군이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한락연의 사적을 발굴할 때 이다지도 힘들다고 탄식하겠습니까? 당연히 그의 사업성격의 맥락에서 짚어볼 수 있습니다. 저는 한락연의 사위인 강기민대사의 관점에 동감입니다. 한락연은 정치면에서나 예술면에서 시종일관 개척적으로 일해왔습니다. 심양에서 동북의 첫 미술전문학교 창설 등을 례로 들 수 있습니다. 현재 한락연공원 1기 공사가 이미 마무리되였는데 이것은 룡정을 민족문화성으로 건설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 기초우에서 한락연기념관을 세우고 한락연공원 2기공사까지 마무리하게 되면 더욱 기대에 가까워지리라 추정됩니다. 저는 할빈시당위 서기를 보고 ‘당신네는 정률성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되여 정률성기념관을 세우게 되였습니까?’하고 물은 적 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할빈이 문화대성인 만큼 응당 도시의 품위를 높여야 하지 않겠습니까?’할빈시당위 서기의 이 견해는 정중하고 명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이제라도 정률성기념관을 참관하고 그들의 경험을 배워와야 하겠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이야기인데 저는 예전에 정률성에 대한 선전은 세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즉 영화 한부를 촬영하고 책 한권을 출판하고 기념관 하나를 세워야 한다는 겁니다. 영화는 이미 촬영되였고 책은 한창 집필중에 있습니다. 예상외로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할빈에서 앗아갔습니다. 그럼 한락연도 이렇게 세가지 공정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는 차원 높은 한락연전기를 출판하고 영화 한부를 촬영하고 또 다른 하나는 기념관을 세우는 것인데 동무들이 이미 실행하였습니다. 한락연공원을 세우는 것을 저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룡정시에서 생각하고 이미 건설했으므로 이젠 세개 공정이 아닌 네가지 공정으로 목표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오늘 주당위 상무위원도 이 자리에 와 계시는데 저는 주당위와 주정부에서 이 일을 중시할 것을 건의하면서 이 활동은 룡정시의 행위만이 아닌 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리덕수의 이 연설은 생동하고도 감동적이였으며 혁명선렬들을 심심히 추모하고 혁명력사를 더없이 존중하며 혁명력사의 픙부한 내함에 대해 남다른 리해를 갖고 있는 리덕수의 내심세계를 진솔하게 표달한 것이였다. 이처럼 리덕수는 선렬문화, 민족문화, 혁명력사문화에 무한한 감정을 쏟아왔다. 나중에 리덕수는 북경에서 기업가의 자금을 협찬받아 한락연동상을 정교하게 제작하여 지금 한락연의 고향인 룡정시 한락연공원에 세우게 되였다.
리덕수는 연변에 있는 동안 기회만 있으면 중국혁명력사, 혁명선렬들의 영웅사적, 조선족의 우수한 민족전통과 민족문화, 중국조선족의 력사특점, 현실특점과 민족정신을 이야기하였는데 그 목적은 사람들한테 민족적 자호감을 부여하고 민족의 자존자강정신을 수립시켜주려는 데 있었다. 리덕수는 특히 간부와 대중들에게 연변의 력명력사와 유구한 전통을 가진 연변의 민족단결력사를 즐겨 이야기해주었다.
연변 지구의 학교들에서 어느 언어문자로 교학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리덕수는 조선어와 한어 이 두가지 언어문자를 사용해야 한다고 명확히 지적하였다. 이 면에서 리덕수는 진정하게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적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연변의 중소학교들에서는 수업을 할 때 줄곧 리덕수가 연변에서 사업할 때처럼 두가지 언어, 두가지 문자, 즉 조선어, 조선문과 한어, 한문을 사용하고 있다. 리덕수는 조선족 지도간부들한테 모처럼 강조한 바 있다.
“조선족들은 본 민족의 언어문자를 잘 계승하고 잘 배우고 잘 사용해야 할뿐만 아니라 한어와 한문도 잘 배워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후대들은 본 민족의 언어문자를 잘 배우는 동시에 반드시 한어와 한문도 능란하게 배워야 합니다. 이래야만 아이들의 앞날은 더욱 활짝 트일 수 있으며 사회라는 이 큰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습니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이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자기 민족문화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지니고 태여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응당 부동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발전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중국이란 이런 대환경 속에서 살아가려면 조선족은 마땅히 두가지 언어, 두가지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두가지 문화가 서로 어울리는 환경에서 성장하고 진보해나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실사구시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리덕수가 북경에 가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담임한 이후에 내려보낸 문건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강조한 것은 소수민족지역에서는 반드시 두가지 언어문자를 다같이 배우고 다같이 틀어쥐어야 한다는 것이였는데 이것은 리덕수가 연변에서 사업하는 기간에 쌓은 경험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리덕수가 연변의 사업을 주관하고 있을 때 그는 문화 교육사업뿐만 아니라 연변의 체육사업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였다. 리덕수는 체육운동을 보급하고 인민들의 체질을 증강시키는 것을 주당위의 중요한 사업으로 간주하면서 꾸준히 밀고나갔다. 연변의 대중체육운동은 매우 두터운 토대를 갖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이전의 연변축구팀은 이미 전국에서 명성을 떨치였다. 그 때의 연변축구팀은 연변팀이면서도 또한 길림성팀이였다. 1965년에 연변팀은 전국 갑급팀경기에서 우승을 하여 연변 나아가 중국 전역을 들썽해놓았다. 수천수만 대중들이 길거리에 떨쳐나와 환호성을 울리고 노래하고 춤 추면서 승리를 경축하였는데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대성황을 이루게 되였다. 리덕수가 연변의 사업을 주관하게 된 후 주체육운동위원회 책임자한테 이렇게 말했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고 혼란한 국면도 바로잡아놓았으니 이제는 연변의 축구도 원래의 모습을 다시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연변팀은 전국에서 우승을 했던 팀이므로 갑급팀에 들어간 다음에는 꼭 관리를 잘 해야 하겠습니다. 연변에는 두개 팀, 세개 팀이 있어야 하고 청소년팀도 있어야 하는데 앞으로는 녀자축구팀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동무들이 무슨 애로사항을 반영하면 주에서는 적극 동무들을 지지해줄 것입니다.”
리덕수 자신도 뽈차기를 무척 좋아했다. 현당위 서기로 있을 때 현에서 운동대회를 하게 되면 그는 축구장에 들어가 전반전 혹은 후반전을 뛰기도 하였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를 담임하고 있을 때 한번은 주체육위원회 주임과 부주임이 허둥지둥 리덕수를 찾아왔다.
“리서기, 확실한 소식에 의하면 래일 아침 성체육위원회 주임이 연변축구팀을 취소한다는 결정을 선포하러 내려온다고 합니다. 연변축구팀을 꾸리지 않고 그 자금으로 다른 작은 체육종목을 밀어준다면서요? 성정부 상무회의의 토론결정이라고 합니다. 리서기, 우리 연변에 축구팀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리덕수는 한동안 뭔가를 생각하다가 그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래일 아침 동무들이 역에 나가 영접해서 먼저 성체육위원회 주임을 직접 저의 집무실로 데리고 오십시오. 제가 집무실에서 그를 기다리겠으니 우리가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난 다음 그더러 그 결정을 선포하라고 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그 이튿날 주체육위원회 일군들은 성체육위원회 주임을 마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 주당위 리덕수 서기가 지금 집무실에서 주임동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말을 듣고 성체육위원회 주임은 이렇게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리서기는 저의 오랜 상급이므로 제가 먼저 찾아뵈야 하겠습니다.”
리덕수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리덕수는 성체육위원회 주임과 악수를 나누면서 롱담 같으면서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지금 성체육위원회 주임이니 좀 외람된 이야기이지만 한가지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어느 종목이 스포츠 가운데서 으뜸가는 왕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좀 말씀해 보십시오.”
성체육위원회 주임은 사람좋게 허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야 물론 축구가 아니겠습니까.”
이 대답을 듣고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찌 축구팀을 취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성, 특히 연변에서 축구는 더 키워야지 취소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연변에서 축구는 인민의 투지를 고무하고 안정단결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연변에서 축구는 곧 정치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성체육위원회 주임은 리덕수가 이처럼 축구에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였는지 잠간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뒤를 남겼다.
“만약 리서기께서 굳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먼저 성에 전화를 걸어 태도를 보여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럼 지금 곧바로 성에 전화를 걸겠습니다!”
리덕수는 성에서 체육운동사업을 분관하고 있는 지도자한테 전화를 걸어 연변의 실제정황을 회보하였다. 리덕수의 회보를 다 듣고난 성의 그 지도자는 신중한 립장을 보여주었다.
“그럼 체육위원회 주임더러 잠시 그 결정을 선포하지 말고 먼저 장춘으로 돌아오라고 하십시오.”
성체육위원회 주임은 장춘으로 돌아가서 곧바로 리덕수한테 원 결정을 취소하였다고 전화로 알려왔다..
그 이튿날 리덕수는 황재림 주장한테 전화를 걸어 이 일의 전후과정을 설명하였다.
“래일 우리 함께 연변축구팀에 가서 그들을 좀 위로해 주기로 합시다.”
“그런데 주장어른이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리덕수의 롱에 황재림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연하지요. 좋기는 우리가 문진섭을 찾아서 그도 돈을 좀 갖고 가라고 말해줍시다.”
그 당시 문짐섭은 연길시 시장이였다. 리덕수가 문진섭한테 전화를 하니 그도 대찬성이였다. 이튿날 리덕수는 황재림, 문진섭과 함께 연변축구팀을 찾아갔다. 황재림과 문진섭은 모두 돈을 갖고 갔다. 물론 리덕수가 축구팀한테 들고 간 건 ‘정신적 식량’이였다.
“연변에는 ‘세떨기 꽃송이’가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이 ‘세떨기 꽃송이’는 어느 셋을 가르키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는 교육의 꽃----연변대학이고 다른 하나는 문예의 꽃----연변가무단이며 또 다른 하나는 체육의 꽃,바로 동무들 연변축구팀입니다.”
리덕수는 말을 이었다.
“우리 연변의 특수한 문화토양에서 자라난 이 ‘세떨기 꽃송이’는 연변의 문화를 대표하고 연변의 우수한 문화전통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 날 축구팀 대원들은 리덕수, 황재림과 문진섭 세분 지도자들한테 그들 이름을 싸인한 축구공을 두개씩 선물하였다. 그런데 왜 공을 두개씩이나 선물하였는가? 그것은 공 하나에 그들의 이름을 다 써 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나중에 리덕수는 북경으로 전근할 때에도 이 축구공 두개만은 잊지 않고 갖고 갔다.
언젠가 리덕수는 문화와 문화사업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 지도자가 문화에 대한 료해가 없고 문화를 잘 모른다면 그를 전면적이고도 성숙된 지도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과거에 우리는 이 방면에 미흡한 점이 더러 있었는데 실제 사업에서 유익한 계시를 받게 되였습니다. 첫째, 민족문화사업의 특수성, 장기성과 군중성을 보다 충분히 인식하게 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56개 민족이 있는데 그 어느 민족의 문화를 막론하고 모두 그들 자신만의 특수성, 특수한 문화연혁과 광범위한 군중적 토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화의 특수성을 볼 때 자연환경의 특수성, 인문환경의 특수성과 사회환경의 특수성을 념두에 두어야 합니다. 둘째, 한 민족을 료해하려면 반드시 그 민족의 문화를 료해해야 하고 한 민족을 존중하려면 그 민족의 민족문화를 존중해야 하며 한 민족이 발전하려면 반드시 그 민족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번영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리덕수가 연변에 있을 때 한번은 중앙서기처 서기 등력군이 연변에 와서 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연변에 머무는 기간 등력군이 리덕수와 가장 많이 담론한 것이 바로 문화와 민족문화였다. 그 후에 국무원 부총리이며 중앙통전부 부장 겸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였던 양정인(杨静仁)도 연변에 와서 휴가를 보내면서 리덕수와 가장 많이 담론한 것도 역시 문화와 민족문화였다. 등력군은 리론연구가였다. 그는 리덕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렇게 물었다.
“민족개념 가운데서 동무가 보건대 가장 주요한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저에겐 아직은 좀 미숙한 한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저는 대학을 다닐 때 쓰딸린의 민족리론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만 실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문화의 심리적 요소라는 것을 더듬어내게 되였습니다.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의 정신적 령혼은 그 민족의 문화적 심리에 슴배여있습니다. 만약 이런 특수한 문화적 심리가 없다면 그들을 하나의 민족이라고 지칭할 수 없을 것입니다.”
리덕수는 조선족, 만족, 회족의 일부 사례들을 들어가면서 자신의 론점을 천명하였다.
등력군은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동무가 한 말에 상당한 일리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계속 그냥 연구해보아야 할 과제입니다. 중국의 민족개념을 좀더 완벽화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리덕수는 양정인과 민족문화를 담론할 때도 자기의 리해를 피력하였는데 양정인은 그의 관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리덕수가 연변의 문화건설을 지극히 중요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였다.
손동식의 회고이다. 그가 연변대학 교장을 담임하고 있는 기간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중국조선족과학기술사업자협회’라는 협회가 있었다. 중국조선족 과학기술사업자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전국성적인 협회로서 1급 민간학술단체였다. 원래 관계부문에서는 이런 협회를 비준해주지 않았는데 리덕수가 전국과학기술협회 지도자들의 협조를 얻어 이뤄내게 되였다. 중국조선족축구협회가 설립될 때도 리덕수가 그 당시 국가체육위원회 주임 원위민(袁伟民)을 찾아가 동의를 얻어왔다. 이 두개 협회가 설립된 후 예상 밖으로 사회적, 긍정적 영향이 발생하게 되여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부터 리덕수를 고마워하게 되였다. 응당 지방의 경제건설을 위해 있는 힘껏 봉사해야 한다는 리덕수의 제의를 받아들인 데서 중국조선족과학기술사업자협회는 지방에서 큰 환영과 지지를 받게 되였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문화를 틀어쥐는 것은 곧 령혼을 틀어쥐는 것이였고 문화를 틀어쥐는 것은 곧 발전을 틀어쥐는 것이였으며 문화를 틀어쥐는 것은 곧 미래를 틀어쥐는 것이였고 문화를 틀어쥐는 것은 곧 민생을 틀어쥐는 것이였으며 문화를 틀어쥐는 것은 곧 안정을 틀어쥐는 것이였습니다. 문화사업을 틀어쥐려면 장원한 안목이 필수적입니다. 지금은 상하를 막론하고 모두 민생을 틀어쥐고 있는데 민생이란 하나는 물질적 측면, 다른 하나는 정신문화적 측면의 내용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물질적 생활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정신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이 각별히 강렬해지게 됩니다.”
리덕수의 재임기간에 연변의 문화사업은 줄곧 매우 두드러진 위치에 놓여졌다. 《길림신문》과 《중국조선족소년보》도 모두 그의 관심과 중시하에 ‘문화대혁명’ 이후인 그 시기에 창간되였다.
끈끈한 모교의 정
교육에 대한 리덕수의 관심과 중시는 모교인 연변대학에 대한 감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현임 연변대학 교장 김웅(金雄)은 이렇게 회고했다.
“덕수 부장의 재임시절에는 저는 아직 학생이였습니다. 덕수 부장이 정년퇴직한 후 오히려 접촉이 잦아 거의 해마다 두세번씩은 만나뵙게 되였습니다. 덕수 부장의 모교에 대한 정감은 저한테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저희들은 늘 한 교우는 곧 그 대학의 명함장이라고도 말합니다. 2013년 상반년에 연변대학 북경교우회는 특별히 ‘북경교우의 날’ 모임을 가지게 되였는데 저는 북경에 가서 이 활동을 조직하게 되였습니다. 덕수 부장도 친히 참석하셨습니다. 교우의 날 행사 때 모교에 대한 덕수 부장의 사랑은 그의 언행에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저희 연변대학은 인재양성, 과학연구, 시회봉사, 문화의 전승과 혁신이라는 이 네가지 사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덕수 부장은 모교의 인재양성사업을 몹시 관심하시며 여러번 재임중인 학교 지도자들한테 신신당부해왔습니다. ‘연변대학은 조선족 간부를 양성해야 하는 이 사명을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계주봉이 그 누구의 손에 전해지든 이 사명만은 기어코 떠메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과학연구라는 이 과제를 둘러싸고 덕수 부장은 저희들한테 많은 새로운 사유구도와 아이디어를 제시하였습니다. 연변의 실제에 결부하여 장백산과 두만강을 둘러싸고 과학연구를 하라고 덕수 부장이 건의했다싶이 김병민(金炳珉)교장 때부터 연변대학은 ’다원공존, 변연각성’을 테마로 하는 두만강포럼과 장백산포럼을 창립하게 되였는데 이것은 연변대학이 창출한 학술브랜드로 되여 국내외에 영향을 미치게 되였습니다. 2016년까지 두만강포럼은 이미 10년간 거행되였는데 우리의 전반 연구령역은 꾸준히 확대되고 있으며 참가인원의 차원과 수준도 부단히 향상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장백산포럼만 보더라도 20,30명에 달하는 원사들이 연변대학에 모여와 자유롭게 당대과학기술을 담론할 수 있는 자리를 가지였습니다. 연변대학은 이 플랫폼을 통해 곧 원사사업소를 건립하게 되는데 의학을 전공하는 원사 두분이 연변대학에 와서 사업을 벌리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덕수 부장이 저희들한테 제시한 새로운 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교에 대한 리덕수의 감정을 언급할 때 전임 연변대학 교장 김병민은 감회가 남달랐다. 리덕수가 여러번 김병민 교장의 앞에서 자신은 연변대학의 영원한 교우일 뿐더러 연변대학의 영원한 학생이라고 자세를 낮추었다고 감회 깊게 회고하였다.
1999년, 연변대학 설립 50돐에 즈음하여 가졌던 간소하면서도 열렬한 개교기념행사는 생동하고 다채로운 프로그람으로 하여 교우들과 사회상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당시 교장이였던 손동식(孙东植)은 개교기념일을 계기로 일부 자금을 기부받아 학교의 로후한 과학연구설비와 교수설비들을 갱신하고 일부 선진적인 과학연구설비와 교수설비들을 구입할 구상을 세워두고 있었다. 개교기념일 전에 손동식은 개교기념행사에 참석해달라고 청하려고 북경에 가서 리덕수를 찾았다. 모교에 대한 리덕수의 혈육과도 같은 감정과 매번 새로 임직하는 학교 지도자들에 대한 존중은 손동식과 리덕수의 관계를 서로 존중하면서도 매우 친절한 진정어린 동지관계로 승화시켰다. 손동식은 성근하게 리덕수한테 청들었다.
“리부장동지, 제가 이번에는 그 무슨 요구가 있어서보다는 그저 리부장께서 꼭 개교기념행사에 참석해 달라고 청하러 온 것입니다. 리부장이 돌아와 개교기념행사에 참석해주는 것은 모교에 대한 최대의 배려이자 지지로 될 것입니다.”
리덕수는 시원스레 이렇게 말했다.
“물론 가야지요. 모교의 개교기념일인 만큼 저는 꼭 참가하겠습니다!”
개교기념행사 기간에 리덕수는 모교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수업시설과 과학연구시설을 갱신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묵묵히 있다가 북경에 돌아가서는 전력을 다해 모교를 위해 상당한 액수의 자금을 조달하여 모교에서 과학연구시설을 개선할 수 있도록 밀어주었다.
박문일 로교장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리덕수가 왕청에서 현위 부서기로 있을 때 연변대학에서는 왕청현 중평공사에 연변대학 분교를 꾸리게 되였습니다. 이 분교의 책임자는 박규찬(朴奎灿) 로교장이였습니다. 분교를 꾸리는 과정에 리덕수는 적극적으로 도와나서서 토지사용 등 여러 면으로 모교에 편의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그외에도 리덕수는 모처럼 중평공사당위에 부탁하여 그들더러 있는 힘껏 연변대학 분교의 운영에 필요한 조건을 마련해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박문일 로교장은 또 연변사회과학연구기지를 건설하던 일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이전에 연변에서는 선후로 몇개 연구회를 설립하였는데 조선어문연구회와 연변력사연구회도 그 속에 들어있었다. 나중에 이 두 연구회는 연변력사어문연구소로 합병되여 연변대학에 이름을 걸어놓게 되였다. 그 당시 소장은 조룡호였고 박문일은 부소장이였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사회 각계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과학연구기구의 설치에 대해 매우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연변에 사회과학연구기구를 설립해야 한다는 희망사항도 그 속에 들어있었다. 아예 연변에 사회과학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구체적으로 제기되였다. 전국적으로 놓고 보면 성급에는 사회과학원이 있었지만 지구급에는 아직 그 선례가 없었다. 리덕수는 연변에 사회과학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관점을 긍정해주면서 즉각 준비사업에 착수하라는 의견까지 제시하였다. 리덕수는 연변대학의 안웅섭(安雄燮)을 주에 전근시켜 연변사회과학원 설립에 관한 준비사업을 구체적으로 책임지게 하자고 제의했다. 긴박하고도 치밀한 기획과 준비를 거쳐 1985년 7월에 연변사회과학원이 정식으로 고고성을 울리게 되였다. 전국에서 첫번째로 나온 지구급 사회과학원이였다.
연변대학의 발전로정을 이야기하면서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학기술대학을 세우려고 기획하고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이였다. 그 때 연변에서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세우려고 한 것은 한편으로는 기타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학생들로 하여금 현대과학기술을 학습하고 장악하게 하자는 것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대학에서 주로는 외국 국적 교원들의 수업을 받아들이자는 취지에서였다. 이렇게 아이들에게 영어를 잘 배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어 그들이 졸업하게 될 때면 조선어, 한어, 영어 등 세가지 언어문자를 능숙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하여 연변의 개혁개방과 경제건설에 시급히 수요되는 인재들을 육성하려는 것이였다. 그런데 학교를 막상 세워놓고 보니 국가교육위원회에서는 오래동안 비준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 대학은 연변과 길림성에서만 인정하는 ‘지방대학’과도 같은 그런 신세가 되였다. 리덕수는 성에 올라가 교육을 주관하다가 나중에는 또 북경으로 전근하게 되였다. 성에서 리덕수의 사업을 인계받은 부성장은 장악기(张岳琦)였다. 리덕수는 장악기한테 사업을 인계할 때 특별히 연변에서 과학기술대학을 건립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지지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는 외국 국적 교원들이 주축을 이루기에 모두 영어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학을 지금 전 동북지역에서 퍼그나 선호하고 있는데 동북의 많은 입시생들은 모두 이 대학에 입학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수업의 질을 각별히 중요시하므로 이 학교 졸업생이라 하면 미처 졸업하기도 전에 벌써 많은 기업들이 찾아와서 당겨가고 있습니다. 연변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면 이런 인재들이 수요됩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적어도 중, 조, 영 이 세가지 언어문자를 능숙히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대학에 관한 모든 일들이 잘 성사될 수 있도록 부탁하는 바입니다.”
장악기는 이렇게 말했다.
“시름 놓으십시오. 저는 있는 힘을 다해 기어코 이 일을 성사시키겠습니다.”
리덕수는 특별히 연변대학에서 은퇴한 전임 연변대학당위 서기 신현무를 과학기술대학당위 서기로 배치하자고 건의했다. 신현무는 리덕수의 스승이였다. 리덕수가 연변대학에서 공부할 때 박문일은 정치학부 주임이였고 신현무는 정치학부 부주임이였다. 리덕수는 신현무한테 이렇게 말했다.
“신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학생이므로 하고 싶은 말은 다 있는 그대로 선생님께 말씀드립니다. 선생님께 과학기술대학당위 서기를 맡기면서 딱 한가지 간곡한 부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학교가 정치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책임져달라는 그것입니다. 그저 이 점만 제대로 잘 파악해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입니다.”
신현무는 자기의 제자한테 정중하게 자신의 태도를 표명하였다.
“덕수동무, 걱정하지 마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소.”
연변과학기술대학이 정식으로 비준을 받게 된 것은 리덕수가 북경으로 전근되여간 그 이후의 일이였다. 길림성 부성장 장악기가 북경에 가서 국가교육위원회를 찾아 연변과학기술대학 비준건을 상담하게 되였다. 그는 워낙 중공중앙 판공청 부주임이였다. 현임 중앙통전부 부부장 리덕수와 함께 둘이 교육위원회를 찾아가니 교육위원회에서도 신중하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교육위원회에서는 1992년에 드디어 이 대학을 정식으로 비준하였다.
2012년에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는 개교 기념 20주년 행사에 리덕수를 초청했다. 리덕수는 감개에 젖어 이렇게 말했다.
“준확하게 말한다면 연변과학기술대학이 설립된 것은 벌써 28주년이 되였습니다. 1984년에 학교가 설립되여서부터 1992년에 이르러 국가의 정식 비준을 받기까지 이 8년은 가장 힘겨운 나날이였습니다. 이 8년간 겪은 각종 어려움과 애로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한마디로 다 말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만약 개교 후의 20년은 온당하면서도 쾌속적으로 발전한 20년이였다면 그 이전의 8년은 힘겹게 창업을 시작하여 그 후 20년의 발전을 위해 조건을 마련하고 토대를 닦아 놓은 8년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대학에 오늘이 있기까지는 정말 시련이 많았습니다!”
그 때 리덕수가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세우려고 강력히 주장한 데는 자기 나름 대로의 안목이 있었다. 연변의 문화교육을 한 차원 끌어 올리려는 것이였는데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세운 것은 그의 이러한 구상을 실현하는 하나의 포석이였다. 당년에 외국적 교장 김진경은 연변에 와서 그 땅뙈기를 선정하고 륙속 외국으로부터 자금과 인재를 도입하여 전국 대학교들중에서 외국인 교직원이 가장 많은 학교를 육성해냈다. 1996년 10월에 연변대학에 병합되면서 연변대학의 한개 독립적인 학원으로 되기까지 이 과정에 리덕수는 줄곧 관심을 돌리고 다함없는 지지를 보내주었다. 연변과학기술대학의 졸업생들은 이미 전국 각지에 분포되여있으며 국외에도 나가 손을 펴고 있다.
몇년 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담임하고 있는 리덕수한테 호남성 장가계시 시 당위서기와 시장이 찾아왔다.
“리주임동지, 지금 저희들은 한가지 애로사항에 부딪쳤습니다. 저희들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장가계로 많이 끌어오려고 하드웨어건설은 근사하게 해놓았는데 언어가 걸림돌이 되였습니다. 리주임께서 저희들한테 방도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한가지 방법을 알려 드리지오. 연변대학에 찾아가서 계약을 체결하십시오. 그러면 해마다 나오는 졸업생 가운데서 일부를 동무들한테 배치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연변대학 졸업생들은 적어도 한어, 조선어, 일어 혹은 영어 등 세가지 언어문자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찾아가 보면 감이 잡힐 겁니다.”
그들 두 사람은 그길로 곧추 연길행 비행기에 올라 연변대학과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해에 곧바로 30여명 졸업생을 데려가게 되였다. 나중에 그들은 리덕수더러 장가계에 한번 다녀가라고 여러번 초청하였다. 그 후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는 소수민족지구의 서부대개발 정책혜택향수문제를 연구하게 되였는데 마침 리덕수는 조사차 장가계를 찾게 되였다. 장가계시 당위서기와 시장은 원래 성에서 소집하는 회의에 참가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리덕수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청가를 맡고 장가계에 남아서 리덕수를 기다렸다. 리덕수를 보자마자 그들은 첫마디부터 이런 말을 하였다.
“리주임은 정말 저희들의 골치거리를 풀어주었습니다. 장가계에서 관광업에 종사하는 골간력량중 연변대학 졸업생이 적지 않습니다.”
연변의 조선족을 말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히 명성이 널리 알린 중국조선족 가무를 떠올리게 된다. 조선족 예술가를 양성하는 요람은 연변예술학교였다. 연변예술학교는 전국 민족예술분야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었다. 아쉽게도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를 담임하게 되였을 때 연변예술학교는 중등전문학교였다. 리덕수는 연변예술학교를 대학으로 만들기로 작심하고 단번에 목표를 이뤄내기 힘들면 한걸음 물러서서 단과전문대학을 만들어서라도 중등전문학교를 단과전문대학으로 승격시켜야 보다 높은 차원의 예술인재를 배양할 수 있었다. 리덕수는 직접 국가교육위원회 주임 리철영(李铁映)한테 보고를 올려보냈다. 리철영은 그 보고를 읽어보고 주관 지도자한테 회시를 하였지만 시종 답복을 받지 못했다. 그 당시 전국의 거시적 환경은 대학교를 대폭적으로 압축하고 합병하는 분위기였다. 연변예술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키겠다는 것은 이 흐름과는 역행이라 볼 수도 있었다. 리덕수는 친히 북경에 가서 직접 리철영을 찾아 그한테 이 일을 회보했다. 리철영은 리덕수의 회보를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덕수동무! 저는 동무의 의견을 찬동합니다. 다만 교육위원회에서는 하동창 주임이 이 일을 구체적으로 관리하고 있으므로 그 분을 찾아가 이야기해보십시오.”
하동창(何东昌)은 교육부장이면서 국가교육위원회 상무부주임이였고 중앙위원이였다. 한번은 중앙에서 회의를 할 때 리덕수는 하동창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하부장동지, 저는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 리덕수입니다. 저는 당위서기 겸 주장을 담임하였을 때 한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연변예술학교를 대학으로 만들거나 혹은 대학서렬에 편입시키는 것이였습니다. 저는 오라지 않아 곧 연변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저의 이 소망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하주임 생각엔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하동창은 이렇게 직언했다.
“이 일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일이 참 어려울 것 같습니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하부장동지, 하부장께서는 저희들 연변에 한번 가셔서 연변의 소수민족교육과 변강의 교육정황을 고찰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동창은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꼭 한번 연변에 가보겠노라고 대답했다. 리덕수는 신임 성당위 서기 하죽강(何竹康)한테 이 정황을 회보했다. 하죽강은 회보를 다 듣고 나서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제 우리 소조토론이 끝나면 동무도 나와 함께 한번 하부장을 찾아가봅시다.”
리덕수와 하죽강은 함께 하동창을 찾아갔다. 하동창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의 원칙은 이미 결정되였으므로 비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길림성예술학원은 대학이므로 당신들이 길림성예술학원 연변분원이라고 고치면 저희들은 대학서렬이라고 주석을 달아 밝혀줄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연변예술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키는 일은 마침내 비준되였다. 연변이란 이 자그마한 자치주에 이미 대학이 여러개나 있었는데 거기에 또 예술학원을 설립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이럴듯 적극적이면서도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에 연변의 대학교육은 신속하게 발전하여 연변의 대학과 전문대학은 4개로부터 6개로 발전하게 되였다.
1996년에 국가교육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원래의 연변대학,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 연변사범전문학교,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 등 5개 종합대학과 전문대학을 새로운 연변대학으로 합병하게 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는 중외 합작으로 꾸려진 연변과학기술대학까지 연변대학에 병합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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