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감님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소감님, 안녕하십니까?
조글로에 올린 “최문섭’콩나물동시비’를 말한다”는 글에 댓글을 올려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부터 드리고싶습니다.
“바른 말을 하기 힘든 세월에 강순길씨가 용감하게 자기 견해를 말하는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봅니다”라고 하셨으니까요.
보고도 못본체 무감각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소감님은
“강길선생의 비평정신을 지지하면서 즉석에 느낀 소감을 적었습니다.”
문학은 론쟁속에서 발전하는것이겠지요. 누구나 이렇게 말은 하지만 자기와 부동한 관점이 있는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조글로 작가미니홈에서 김만석의
“동시창작, ‘늙은이들은 죽어야 한다’?”는 글을 읽어보셨는지요?
최삼룡이 “2000년대중국조선족 10인동시집”출간식 및 “2000년대중국조선족동시평론모임”에 참석하여
“이번 동시집을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우리 동시단에는 이 책에 수록된 작가들 외에도 동시를 잘 쓰는 사람들이 많다. 이 작품집 작가를 선정한것은 잘못되였다. 이런 작품집이 어떻게 ‘우리네 동시’를 대표하는가?”고 질의를 제기하였답니다.
한 네티즌은 “2000년대중국조선족10인동시집”에 대해 2000년대 이전의 작품이 적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김만석자신도 “
김현순의 평론에서는 10인동시집에 수록된 10명의 동시인들의 작품을 미시적으로 분석…..모방작에 대하여 예리하게 지적”하였다고 긍정하였습니다.
이렇다고 볼 때 편집자인 김만석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재검토해보는것이 학자다운 태도이겠지요.
그런데
“대회에 참석한 교수, 학자, 그리고 나이 많은 작가들은 한결같이 이번 대회에 최삼룡이를 참석시킨것이 최대의 실패라고 말하였다.”고 했답니다.
그런 교수, 학자, 작가들이
한결같이라니? 도대체 누구누구인지 그 이름을 알고싶어지네요. 진정 이런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하는 일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거나 남이 박수를 친다고 덩달아 박수를 춰주는 로보트같은 사람일것입니다.
소감님과 제가 최문섭 동시 “콩나물”에 대해 론쟁이 붙은것처럼 ”2000년대중국조선족10인동시집”에 대한 부동한 관점은 론쟁을 걸쳐서 깨야할 문제이지 사람을 배척한다는것은 학자다운 모습이 아니지요.
안 그렇습니까?
자기가 한 일이 무조건 성과라고 인정하는것은 과학적관점이 못됩니다.
다음은 동시 “콩나물”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소감님은 저의 관점에 대해
“ 도리가 있는 말입니다. ‘콩나물‘에 대한 견해는 과학적인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예술작품은 다 생활론리에 딱 맞게 쓰는것이 아니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특히 아동문학작품은 생활론리에 맞지 않게 쓰는 명작들이 너무 많은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아동문학작품을 접할 때 그 예술적인 흐름속에서 생활론리를 잊고 작품속에 빠져버리게 되지요. 아니면 어떻게 아이들에게 상상의 나래를 달아줄수 있겠습니까. 세계를 뒤흔들고있는 하리포터는 생활론리를 아주 배척해버리고있습니다. 그러나 애들은 환호하고있습니다.
콩나물’에 대한 비평은 정확한 일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딱 그런것도 아닙니다. 콩나물을 접하면서 나는 아주 미적인 느낌을 가졌으니깐요. 콩나물을 줄을 섰다고 하는것을 비평하고있는데 줄을 섰다고 보면 안됩니까. 아이들은 워낙 줄을 딱 맞춰서기를 싫어합니다. 또 시루안을 들여다 보는 순간 콩나물을 음표로 상상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동요가 가득 차있다고 상상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강선생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수 있고 그것이 정상일수도 있습니다. 동심의 눈길로 보지 않고 정상적인 어른의 눈길, 그것도 생활론리에 맞는 눈길로 보고있기때문입니다. 예술론리=생활론리가 아닙니다.”라고 하셨지요.
동시, 동화,소설 등 문학쟝르는 모두 자기의 특점이 있습니다.
“모든 예술작품은 다 생활론리에 딱 맞게 쓰는것이 아니지 않는가 생각됩니다.”라고 한 생각은 학술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니 소감님에게 례를 들어 설명할수밖에 없군요.
하늘에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줄을 섰다고 할수 있지요. 그렇다고 누가 무리지어 날아가는 참새를 보고 줄지어 간다고 말합니까? 밭에 잡초가 무더기로 자라는것을 보고 누가 줄을 섰다고 말합니까?
생활론리란 이런 상식으로 통하는것을 말하는것입니다.
“콩나물을 ……줄을 섰다고 보면 안됩니까. 아이들은 워낙 줄을 딱 맞춰서기를 싫어합니다.” 소감님은 콩나물이 줄을 섰다고 보면 줄을 선걸로 보이는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문학이란 생활의 반영입니다.
농촌에서 벼모를 키우는데 비닐판을 씁니다. 가로세로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벼씨를 뭍습니다. 그렇게 키워낸 벼모를 보고 줄을 섰다고 한들 머리를 저을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모판에 벼씨를 뿌려서 무더기로 자라올라온 벼모를 보고 줄을 섰다고 한다면 아이들인들 믿겠습니까?
소감님이 “
아이들은 워낙 줄을 딱 맞춰서기를 싫어합니다.”라고 하셨는데 저는 소감님에게 아이들이 싫어하는것을 왜 굳이 줄을 섰다고 해야 하는지 그까닭을 반문하고싶습니다.
조글로 작가미니홈에는 김만석의 “중국조선족동시발전과정과 2000년대 우리동시”란 글이 올랐는데 최문섭의 “콩나물”에 대해
“여기서 원관념 ‘콩나물’을 보조관념 ‘음표’로 둔갑시키고 그 다음 회화적인 시루안에 빼곡한 콩나물의 정적인 형상을 ‘하얀 동요가 차고 넘친다’고 청각적인 형상으로 엉뚱한 승화를 시킨 여기에서 이 동시의 매력적 형상이 한결 돋보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문섭 “콩나물”이 저에게는 아무런 공감도 주지 못했습니다. 콩나물이 줄을 섰다거나 콩나물이 곧 동요라고 한 주장이 생활론리에 맞지 않고 합리성이 없기때문입니다.
한국 동시인 최계락의 “꽃씨”를 최문섭의 “콩나물”과 대조해서 감상해봅시다.
꽃씨속에는 /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속에는 /빠알가니 꽃도 피어있고//꽃씨속에는 /노오란 나비떼도 숨어있다//
꽃씨를 세번 반복하면서 잎을 말하고 꽃을 말하고 나비를 말했습니다. 작은 꽃씨가 흙에 묻혀 싹 트고 자라서 잎도 달리고 꽃도 피고 나비도 불러오지 않겠습니까.
이 동시는 생활론리에 맞고 합리성이 있을뿐만 아니라 작자의 착상과 생동한 예술형상창조가 저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작자는 어린이들에게 작은 꽃씨 하나의 거룩한 생명력과 영향력에 대하여 느끼도록 한것 같습니다.
노란 /음표들이/실눈을 뜨고/줄지어 서있다//
하얀 /동요가/시루안에 빼곡이/ 차고 넘친다//
최문섭의 “콩나물”은 시루안에 하얀 동요가 차고 넘친다고 했는데 그래 하얀 동요란 뭘 말하려는것입니까? 소감님은
“콩나물을 접하면서 나는 아주 미적인 느낌을 가졌으니깐요.”라고 하셨는데 우리 어린이들이 이 동시를 읽고 소감님과 같은 미적인 느낌을 느낄수 있을가요? 저는 한때 “소년아동”잡지에서 동시편집도 하고 동시집도 둬권 묶어 냈었는데 “콩나물”같은 동시는 작품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소감님, 마지막으로 작품론쟁태도에 대해 좀 더 말하겠습니다.
문학론쟁은 저도 하고있고 소감님도 지금 하고있습니다.
문학론쟁은 사실과 도리로써 우리의 인식이 진리에 접근하게 하고 앞으로의 보다 훌륭한 문학작품을 창작하기 위한것이 아니겠습니까?
최문섭의 하나의 자그마한 동시 “콩나물”은 최문섭”콩나물”동시비를 세워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 문제와 이어져있기때문에 동시 “콩나물”에 대한 평가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론쟁으로 옳은 결론이 내려져야 할것입니다.
문학론쟁은 견해의 차이이지 자존심의 대립으로 되여서는 아니됩니다.
소감님은
“바른 말을 하기 힘든 세월에 강순길씨가 용감하게 자기 견해를 말하는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봅니다.”라고 하셨지요. 거기에 저도 한마디 덧붙이고싶습니다.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자기 잘못을 서슴없이 승인할수 있다고 말입니다.
저의 참뜻을 리해하리라고 믿습니다.
이만 그치겠습니다. 건필을 빕니다.
강 길 20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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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를 묶은들 어찌겠소.
죽구나면 다 부질없는 짓인것을.
진짜로 좋은 시는 굳이 시비를 세우지 않아도
천겁만겁 사람들 가슴에 빛발치는 시비로 살아남을것이요.
시비를 세운다고 그 사람의 시가 천겁만겁 갈수있을지 걱정되오.
부질없는 걱정이겠지만...
진짜 천겁만겁 길이 남을 시를 쓰기에 열심들 하오.
비석같은건 돈만 있으면 다 세우는거 아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