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찍부터 작고하신 허룡구 교수님을 기리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필력이 날로 쇠퇴해가는데 서뿔리 필을 들었다가 은사님의 고매한 형상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고 오히려 루(累)를 끼칠까봐 차일피일 미루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연변대학 설립 70주년을 맞이하면서 관련 부처에서 허룡구 교수에 대한 글 한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면서 망설여졌다. 하지만 이참에 은사님에 대한 추모글을 써내 숙원을 이뤄야겠다고 마음먹고 흔쾌히 수락하였다. 나는 로신(鲁迅)선생이 일찍 일본 류학시 은사였던 후지노(藤野) 선생을 추억하여 쓴 수필을 본받아 비록 멋진 글귀로 화려하게 쓰진 못하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박한 필치로 쓴 글 한편을 추모비로 간주하고 은사님의 령전에 올리고저 한다.
정판룡 교수님은 허룡구 교수의 인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그의 마음은 부처님처럼 한없이 어지기에 그를 법이 없어도 살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한번 결심을 내리면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고 보니 온순하면서도 고집이 있는 그런 사람인것 같다.”(정판룡,《작가일화》제168페지, 료녕민족출판사) “그러나 그는 일상생활에서 현대인답게 술집, 노래방에도 자주 드나들며 녀성들과도 사이가 가까운 그런 사람이다.” (동상서) 그리고 어느 한국 교수는 “허교수가 고문, 특히는 한시(汉诗)를 잘할뿐만 아니라 사람된 자체가 고풍스러웠다.”고 자신의 인상을 쓰고 있다. (동상서) 말하자면 은사님은 현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옛 선비의 기질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으며 또한 독선적이고 청빈한 수재가 아니라 “속세”에서 인생의 쾌락도 즐길줄 아는 분이라는 것이다.
허룡구은사님은 중국고전문학을 전공하면서도 평소에 양복차림을 즐겨하셨는데 티없이 맑은 두눈에는 학자답게 안경을 점잖게 걸고 얼굴에 언제나 인상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우리 제자들로 하여금 일구월심(日久月深) 경모의 마음을 갖게 하였다.
은사님은 1937년 7월에 길림성 영길현에서 출생하여 흑룡강성 연수현에서 살다가 상지조선족중학에서 공부하였다. 정판룡 교수도 그 학교 출신이여서 두 분은 “교우” 라고 스스럼없이 지냈다. 은사님은1960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중국고대문학 교원으로 대학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조문학부에서 장기간 당총지서기, 학부장 등 직을 력임하였던 현룡순 교수는 1994년에 출간한 《겨레의 넋을 지켜--연변대학 조문학부가 걸어온 45성상》이라는 책에서《이중으로 받은 <우수교원>의 영예》라는 글로 허룡구 교수의 업적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한문을 잘 알지못하는 조선족학생들에게 중국고전문학을 가르치기란 다른학과보다 더 힘들다. 은사님은 중국고전작품의 열독에 도움을 주려고 많은 힘을 들여 교과서에 나타나는 작품들을 거의 조선말로 번역하였다. 고전작품의 번역에서 그대로 글자풀이하여 옮겨놓은것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의 스찔과 예술적표현수법을 원 면모대로 살리기에 큰 공력을 들여 학생들의 학습흥취를 불러일으켰다. 개혁개방이후 문학애호가들은 은사님의 시적 재능과 당시(唐诗), 송사(宋词) 번역기교에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허룡구 교수의 시 재능은 현 시대 명시인들에 비견할 만하다. 연변에 이런 분이 있는줄 우리가 왜 여태 몰랐을가?”라고 하면서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은사님은 교수사업의 여가를 타서 시 창작도 하였다. 지난세기 90년대 초반에 창작된 은사님의 정론시《반도의 호소》(일명 《반도의 운명》) 는 한국 청년들에게 널리 애송되였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많은 독자들의 애대를 받았고 몇해 동안 《연변시조시사》의 초대회장을 력임하기도 하였다. 아래에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은사님이 번역한 당시 중 짧은시 몇수만 소개하고저 한다.
아침에 백제성 떠나(早发白帝城)
채운에 비낀 백제 이른아침 떠나서
강릉 천리길을 하루에 돌아오네
강기슭 원숭이는 그침없이 울어예고
가벼운 쪽배 하나 만첩청산 누볐구나.
(朝辞白帝彩云间,千里江陵一日还,两岸猿声啼不住,轻舟已过万重山.-리백의 시)
려산폭포를 바라보고(望庐山瀑布)
향로봉에 해 비치니 자색연기 이는듯
저 멀리 뵈는 폭포수는 앞강물에 세웠는듯
삼천척을 날아 흘러떨어지는 물
하늘에서 쏟아지는 은하순가싶구나
(日照香炉生紫烟,要看瀑布挂前川。 飞流直下三千尺,疑是银河落九天。-리백의 시)
락유원에 올라(登乐游原)
저녁이라 이내 마음 달랠 길 없어
수레 몰아 고원에 올라갔도다.
석양빛 한없이 아름답건만
애석토다,황혼이 가까왔어라
(向晚意不适,驱车登古原,夕阳无限好,只是近黄昏.- 리상은의 시)
제목없이(无题)
만나기 어렵다만 리별도 어렵거늘
동풍이 잠자니 백화가 시드누나.
봄누에 죽을때면 실을 다 토한 때
초불은 몽땅타야 눈물이 마른다네
샐녁에 거울 보면 수척해진 얼굴이요
야밤에 시 읊으면 달빛조차 느낄지라.
봉래산 찾아가면 다시 올 길 막연하니
파랑새야 은근히 그대 소식 알려다오.
(相见时难别亦难,东风无力百花残。春蚕到死丝方尽,蜡炬成灰泪始干。晓镜但愁云鬓改,夜吟应觉月光寒。蓬山此去无多路,青鸟殷勤为探看。-리상은의 시)
은사님은 고대의 작가,작품을 가르치면서 늘 현대를 잊지않고 옛것을 오늘에 유익하게 리용하는데 류의하였다. 막상 이렇게 실천하려고 하니 교수내용,교수방법에서 한차례 심각한 개혁을 일으켜야했다. 은사님은 교수사업과 결합하여 교과서, 참고자료를 편찬하였고 과학연구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는바 《중국문학사》(제2책)을 편찬하였고 《중국고전문학작품선》(제2책)을 번역,편찬한 외에 많은 공저들을 남겨놓았다. 그리고《고대민가 백수》,《리자성(제2권2책)을 번역하였고《수호전》,《홍루몽》의 집체번역에도 참가하였다. 이밖에 《소식의 창작관에 대하여》,《굴원과 리소》,《농민봉기의 생동한 화폭》등3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은사님의 성망이 높아지면서 1980년대 후반에 학교의 주선으로 한국 리화녀자대학교 중문학과 객원교수로 초빙되여 대학원생들에게 고체시 률격과 중국고전문학을 강의하게 되였다.
이처럼 교수와 학술연구에서 이룬 업적으로 은사님은 수차 연변대학,자치주의 우수공산당원,연변대학과 길림성의 우수교원으로 당선되여 장려를 받았다. 그는 1988년에 전국보통대학 우수교원 및 전국우수교원이라는 이중의 영예를 한몸에 지니면서 상장,메달,상금을 수여받았다.
연변대학에서 제일 처음 연구생(대학원생) 을 양성하기 시작한 학과로는 조문학부였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판룡 교수의 공로였다. 그런데 그것은 조선언어문학학과였기에 중국문학교연실 교원들은 한동안 지도교사로 될수 없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에 비교문학 연구생을 양성하게 되면서부터 중국문학교연실 재직교원들이 지도교사를 담임하게 되였다. 하지만 학술수준이 높은 로교수들은 이미 퇴직하였기에 그런 영광을 누릴수 없었다. 1997년에 한 나젊은 학국인이 정판룡 교수의 명망을 듣고 찾아와 서산대사의 선시(禅诗)를 연구해 박사론문을 쓰겠다고 하였다. 세계문학 전공이였던 정판룡 교수는 처음에 주저하였지만 그해에 퇴직한 허룡구 교수가 당시(唐诗)에 조예가 깊으므로 지도교수로 초빙하면 될것이라고 확신하고 그 한국인을 박사생으로 받았다. 그런데 2년후에 허 교수가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급하게 세상을 뜨자 정판룡 교수는 유력한 조수를 잃고 비통한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허룡구은사님은 학생들의 사상교양사업을 중시하였으며 학생들의 사상발전과 건전한 성장에 대하여 관심하였다. 그는 늘 학생들속에 들어가 그들의 요구와 의견을 들었으며 학생들의 사상을 제때에 알아보고 실정에 맞게 사상교양을 하였다. 그리고 학생기숙사로 자주 찾아가서 학생들과 속심을 나누면서 올바른 인생관을 수립하도록 교양하였다. 학생들은 졸업한후에도 후더운 선생님을 있지못하여 그냥 서신으로 련계를 맺고 있었다.
우리 조문학부 77학번(77级)은 “문화대혁명”이 종식되고 대학입시를 회복한후 제1기생으로 입학한 대학생들로 구성되였다. 처음엔 김해룡 교수가 담임(담임교수)으로 있다가 나중엔 허룡구 교수가 담임을 맡았다. 52명 학생들은 나이 차이가 많고 출신성분도 다양하며, 언어, 문학 재능도 남달리 뛰여나 저마다 개성도 강하였다. 이런 반급의 담임을 맡는다는것은 영광이기도 하지만 무척 힘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은사님은 조금도 난색을 보이지 않고 학생들과 형제처럼 어울려 지내면서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우리 반급에서 막내 중의 한 사람인 황동일은 다른 학과에서 우리 반급으로 전학하여 왔다. 처음엔 언어문학 기초지식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은사님은 친조카처럼 이끌어주었고 황동일의 부모와 시시로 련계를 가지면서 학습에서 부닥친 애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주셨다. 그런 노력이 알찬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황동일의 학습성적은 날로 향상되였고 졸업시 북경의 중앙 번역국에 취직하게 되였다. 렴광호는 화룡 숭선 출신으로서 가정 경제상황이 여의치 않았지만 큰 포부를 품고 우리 반급에서 첫사람으로 연구생과정에 도전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무난히 획득하였다. 그 과정에서 은사님은 여러모로 고무격려를 해주었고 박사학위 수여식에도 참석하여 마치 친동생이 학위를 획득한것처럼 기뻐하면서 따뜻이 축하해 주셨다.
졸업한후에 우리 동창생들은 은사님의 로고를 잊지못해 동창회를 자주 가지면서 은사님과 함께 옛정을 나누고 회포를 풀었다. 은사님께서는 만사를 제쳐놓고 동창모임이 있을때마다 어김없이 참석해 주셨다. 1990년대 초반에 나는 방문학자 신분으로 출국했다가 2년후 귀국하였다. 그리고 80평방메터 정도 되는 아파트를 마련하면서 10여년 동안 네댓번 이사하던 쪽방살이신세를 면하였다. 나는 그 기쁨을 동창들과 함께 나누고저 조촐하게나마 집들이를 하였다. 그때 은사님께서도 참석하셔서 동창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었다. 그날 찍은 사진들을 다시 보노라면 신사복을 입고 모임에 참석한 은사님께서는 학창시절에 우리를 따뜻이 이끌어 주시던 옛 모습이 여전하였고 자애로운 웃음을 띤 얼굴에는 마냥 청춘의 기백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러던 은사님이 몇해후에 갑자기 타계하시자 우리 동창생들은 청천벽력처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몇해 후에 있은 동창회 때 동북삼성과 북경에서 모여온 전체 동창생들은 은사님의 명복을 빌면서 머리를 깊이 숙이고 조용히 묵도를 드렸다. 그리고 글쓰기 재능이 있는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다양한 형식으로 추모글을 써서 은사님을 기리고 있다. 우리 반급 동창생 리성권은 연변인민출판사 사장으로 수년간 열심히 일하다가 정년퇴직하였는데 수필 《저세상에 부쳐보내는 편지》에서 은사님을 추모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4년전에 이 제자란 놈이 죄송스럽게도 4분동안이나마 면저 저승길을 답사하여 일대 소동을 일으킨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어떡하다보니(황공하옵게도) 소문이 퍼질대로 퍼져 련일 병원이 시끄러워질 정도로 사람들이 밀려들었습니다. 하지만45일째 되는날까지도 당신은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솔직한 심정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당신이 제일 기다려졌습니다. 그만큼 당신에게(당신한데만) 하고싶은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제일 두려운것이 당신을 뵈올 일이였습니다. 퇴원을 한지 3일째 되는 날(그날은 국경절),당신은 아무런 기별도 없이 문득 저의 집에 들어서시였습니다. 들어서시기 바쁘게 저를 붙들고 이윽토록 저의 눈을 살펴보시는것이였습니다. …
“…죽지는 않겠구나. 못난 녀석 같으니라구!”
당신은 안도의 숨을 내쉬시면서 저의 어깨를 툭툭 쳤습니다. 그때 저는 그야말로 송구스럽고 죄스러운 나머지 몸둘바를 모를 지경이였습니다…
당신은 바로 이런분이였습니다.
각별히 뜨겁거나 다사스럽고 로골적인 그런것이 아닌 언제나 따뜻하고 은근한것이였습니다.” (《해빙기 행운아들》제110페지, 연변인민출판사)
이 글에 흘러넘치는 사제간의 돈독한 정은 우리반급 동창생들 모두가 마음속 깊이 절절히 느끼고 있는 진실한 정감이다.
학창시절에 우리가 본 은사님의 가정형편은 그닥 좋지 않은것 같았다. 사모님이 무직업인 관계로 60원밖에 안되는 은사님의 박봉으로 조손 삼대 다섯식구가 20평방메터 되나마나한 작은 단층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 보면 정주방과 부엌이 하나로 련결되였고 안방은 미닫이로 나뉘어졌다. 북쪽 벽에는 “오시이레”라고 불리는 작은 일본식 벽장이 달려있었다. 그 시절 모든 교수들이 그러했듯이 대학교엔 교수 연구실이 없어 자택 안방을 침실 겸 서재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은사님이 사용하는 책상이 엄청 큰것이였다. 나는 여태 우리대학 교수들이 자택에서 그토록 큰 책상을 사용하는것을 보지 못하였다. 다른 가구는 사지 못해도 책상 하나만은 서적과 자료를 가득 펼쳐놓고 글 쓰는데 편리하도록 큰 마음을 먹고 산 것이리라. 우리가 보기에는 가족관계가 대체로 평화롭고 큰 말썽이 없는것 같았다. 은사님은 인자한 할머니의 성격을 닮은것 같았다. 해방전 할머니의 여러 가족분들은 독립운동에 기여한 분들이라고 하는데 그 시절엔 누구 하나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못했고 남들처럼 우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엔 정부로부터 유공자로 인정받고 응당 받아야할 대접을 받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동북해방전쟁시기에 10대 소년이였던 은사님은 당시 혁명적 분위기에 감화되고 농회조직의 영향을 받은것 같았다. 조문학부에서 오락판이 벌어지면 은사님은 어김없이 토지개혁시기에 동북 조선족마을 농회조직에서 쏘련 홍군한테서 배우고 즐기던 로씨야 민간무용을 신명나게 추셨다. 조문학부 교수님들이 너나없이 합창으로 즐겨 부르는 쏘련 노래의 강렬한 률동에 맞추어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추었다가 용수철처럼 훌쩍 뛰쳐일어나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춤을 추는가 하면 때로는 한 손으로 땅을 짚고 몸을 경사로 낮추면서 360도로 빙빙도는 춤동작은 그야말로 전업 무용수 못지않았다. 그러면 옆에서 노래하며 박수를 치던 교수님들이 일제히 큰소리로 웨치며 환호하기도 한다. 게다가 림휘 교수가 한수 더 떠서 멋진 스타일로 로어를 몇마디 하면 리해산 교수가 통역을 서는데 원래 의미를 떠나서 오락판 상황에 맞춰 재치있게 우스개말을 엮어대는 바람에 모두들 박장대소를 하면서 즐거워 하였다. 연변대학에서 이토록 즐겁게 오락판을 펼치는 학과는 우리 조문학부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락관적인 집단 분위기가 있었기에 당시 경제 형편이 어려웠지만 은사님의 얼굴 표정에선 그늘을 전혀 찾아볼수 없었다.
외유내강의 성격소유자인 은사님은 평소엔 인자한 분이지만 학교 운동회에서는 사기를 북돋우는 “맹장”이였고 축구시합이 있으면 늘 앞장서 참여하였다. 특히 유표한 것은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큰소리로 웨치면서 여기저기로 뛰여다니는 모습이다. 비록 주력 선수는 아니지만 그 정신에 감동돼 모두들 사기를 북돋우어 경기에 림하군 하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연변팀은 중국 갑A 축구경기장에서 일대 돌풍을 일구면서 연변인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있었다. 홈장인 연길체육장은 언제나 관람석이 초만원을 이루어 표를 사지못해 입장 못한 열성팬들은 경기장 밖 산언덕의 높은 나무에 바라올라가 관람하기도 하였는데 CCTV 체육채널 생방송에서 방송되여 전국 축구팬들의 시선을 한껏 모았고 몇십년 지난 지금도 화제로 되고 있다. 그 시절 역시 열성팬이였던 은사님께서는 매번 경기를 빼놓지 않고 관람하고는 연변 스포츠신문에 경기관람 소감을 글로 발표하군하셨다. 그중 제일 유명한 글은 바로 “축구와 손자병법”이라는 장편 평론문이다. 중국고전문학의 전공자이신 은사님은 손자병법에 대해서도 전문가였다. 때문에 이 글은 아주 큰 인기를 얻어 은사님은 또 한번 명성을 날리였다.
나는 1990년대 초반에 작은 2층 주택(小二楼)에 이사하여 은사님과 한동네에서 살게 되였다. 그러자 은사님 부부는 일이 있으면 나를 불렀다. 자녀들이 급한 병으로 앓으면 내가 업고 택시를 불러 병원에 갔는데 사모님은 몇번이고 급하면 먼저 나를 부를 생각부터 하게된다고 되뇌이군하였다. 그 무렵 학부장 강은국 교수도 한 동네에서 살았는데 허교수네 집에 급한 일이 생기면 먼저 나를 불러 함께 가보군 하였다. 나는 이를 부담이 아니라 은사에게 보답하는 일로 간주하고 달갑게 받아들였다. 은사님은 한국 리화녀자대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후 우리집 앞에 신축한 아파트 4층에 이사하였다. 그후부터는 예전보다 다소 유족한 생활을 영위하였고 즐길 일이 있으면 술상을 마련하고 여러 교수들을 청하군 하였는데 지척에 집을 둔 나도 늘 함께 참여하였다.
은사님은 학교서나 가정에서나 후대를 가르치는 방법이 특이하였다. 한번은 나를 불러 두툼한 원고를 내놓으면서 한족 작가가 쓴 무협소설 원고인데 나더러 읽어본후 심사평을 쓰라는것이였다. 내가 다소 난색을 짓자 “괜찮아, 한번 해봐. 수영을 배우려면 물속에 들어가야 해.”라고 하면서 밀어부치시는것이였다. 거절할수 없어서 잘 쓰지 못하면 은사님께서 수정할거라고 생각하고 나는 며칠동안 원고를 열심히 읽고 나름대로 심사평을 써서 은사님께 교부하였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그 과정이 바로 자신의 힘으로 소설평론 훈련을 해본 좋은 경험이 되였다고 생각한다. 실로 은사님께서는 “물고기 한마리를 주기보다는 고기 잡는법을 가르쳐라(授人以鱼不如授之以渔《淮南子.说林训》) 고 한 고전 명언의 가르침을 이 제자에게 실천하신 것 같았다.
은사님은 자녀들에게도 주입식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다. 한번은 외지에 출장 갔다가 나어린 아들 정무에게 선물을 사왔는데 바로 은빛을 번쩍번쩍 내뿜는 무술용 장검이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은사님은 자식들이 학문지식에만 매달리지 말고 이름자에 어울리는 식씩한 무사의 재능과 기품도 갖출것을 바란것 같았다. 그런 아들이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사회에 진출한후 열심히 분투하여 지금은 남방에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얼마전 연변에 출장왔다가 조문학부를 찾은 은사님의 아들 정무가 재직 교원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던 중 조문학부에 “탁사모(탁구를 사랑하는 모임)”가 있다는 말을 듣고 5천원을 활동경비로 내놓았다. 허교수의 사위 또한 장인어른의 학문정신을 이어받아 번역가 꿈을 키우고 있는데, 조선문으로 된 김해룡 교수의 문학저서를 중문으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전문성을 띤 저서여서 그 번역이 어려운 작업이지만 훌륭히 완수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광음이 류수와 같아 은사이신 허룡구 교수님이 타계하신지도 어언 2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갔다. 하지만 늘 얼굴에 웃음을 띠우시고 우리를 대하던 인자하신 은사님은 언제나 우리곁에 계시는것만 같다.
은사님이시여, 우리 제자들은 한결같이 두손 모아 은사님의 명복을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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