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탱이의 歸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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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고 시원하고 배부른, 격동기 한국 현대사의 산물 '밀면'
2013년 07월 09일 14시 20분  조회:1443  추천:0  작성자: 단비

↑ [조선닷컴]개금밀면

↑ [조선닷컴]부산밀면, 가야할매밀면

↑ [조선닷컴]개금밀면, 부산밀면

세상의 모든 음식은 그 지역 역사와 문화의 결과물이면서 사회를 반영한다. 음식을 보면 그걸 먹는 사람의 내력과 현 실태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밀면 만큼 우리 현대사를 충실히 반영한 음식도 드물다. 어쩌면 밀면은 우리 현대사 그 자체일지 모른다. 한편, 밀면은 저렴한 식재료의 안정적 공급이 가능해 수익성 높은 외식업 아이템이다. 또한 소비자 입장에서는 부담 없는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드문 외식 메뉴이자 여름철 별미이기도 하다. 냉면과 닮았지만 냉면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밀면은 어떤 음식일까?

밀면, 냉면과 같으면서도 또 다른...


밀면은 면발, 육수, 고명, 양념장(다대기)으로 구성되었다. 일반적인 국수들처럼 물과 비빔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물과 비빔 중간의 형태도 일부 있음) 면의 주재료는 밀가루다. 면은 밀가루(중력분)에 소량의 감자나 옥수수 전분을 혼합하고 소금을 넣어 반죽한다. 이 때 좀 더 쫄깃한 식감을 내기 위해 알칼리를 첨가하기도 한다. 반죽은 익반죽이나 보통 반죽을 한다. 반죽한 뒤 하루 정도 냉장고에 넣어 숙성시킨다. 숙성시킨 반죽을 생면으로 뽑아 면으로 만들어서 삶는다. 그러나 기온이 높은 여름철에는 저절로 숙성이 되는데다 성수기여서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숙성을 시키지 않는 경우도 많다.

밀면 역시 다른 면식처럼 삶은 면을 육수에 말거나 비벼먹는다. 밀면 육수는 소나 돼지 닭의 사골이나 잡뼈로 육수를 낸다. 여기에 양지나 사태, 각종 채소를 넣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업소에 따라 각종 부재료를 더 넣어 개성 있는 맛을 낸다. 특히 소화를 돕고 고기의 잡내를 제거하면서 좋은 향을 내게 하기 위해 계피나 감초, 당귀 등 한약재를 첨가한다. 여름에는 이 육수를 차갑게 냉각시키거나 살짝 얼려서 시원한 맛을 극대화 시킨다.

냉면과 달리 밀면은 물밀면에도 매운 양념장을 고명처럼 넣는다. 밀면에 넣는 양념장(다대기)은 고춧가루, 마늘, 간장, 육수, 설탕이나 물엿, 다진 파, 생강즙, 깨소금, 참기름, 겨자, 후춧가루 등을 배합하여 숙성시킨 것이다. 최근에는 냉면처럼 물밀면에 양념장을 미리 올리지 않고 따로 제공, 기호에 따라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업소도 많다.
고명으로는 삶은 달걀이나 지단, 돼지고기, 배, 볶은 오이, 무채를 쓴다. 무채는 식초, 고춧가루, 마늘, 소금, 설탕 등으로 미리 양념을 해둔다. 업소에 따라 참깨를 뿌리거나 고급스럽게 소고기 편육을 얹기도 한다.

밀면은 겨자나 식초, 절인 무채, 오이채 등을 곁들여 먹는다. 신맛과 단맛에 매운 느낌, 이렇게 세 가지 맛이 밀면의 맛이다. 겨울에 먹는 온밀면도 있지만 역시 냉면처럼 차고 시원한 맛으로 즐기는 사람이 많아 여름철 음식 이미지가 강하다. 메밀로 만드는 냉면과는 재료에서 차이가 나지만 먹는 방법이나 시기, 목적이 유사하다. 그러나 밀면은 그 뿌리가 냉면에 닿아있고, 유사점이 많아 냉면의 한 갈래로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이북식 냉면'과 '미국 밀가루', '부산 입맛'의 만남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밀면도 없었다. 한국전쟁이 나기 전 부산에도 나름의 국수와 국수 문화가 존재했다. 원래 경상도 지방에는 바지락 육수로 만든 냉면의 일종인 밀국수냉면이 있었다. 또한 부산에는 1940년대부터 쫄깃한 면발과 약간 맛이 짠 구포국수도 있었다. 건면인 구포국수는 특히 장날장꾼들이 주로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의 영향과 지리적 특성 탓에 일본의 멸치 국물과 우동도 다른 지역보다 빨리 자리 잡고 있었다.

강원도를 비롯해 기후와 경작 여건이 열악한 산간지역에서는 메밀을 심어 막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부산지역은 당시 메밀보다 고급 곡물이었던 밀을 재배했다. 밀 수확기인 여름이면 메밀막국수가 아닌, 밀막국수를 만들어먹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전쟁 이전, 부산에는 신식 건면인 구포국수, 바지락 육수로 만든 밀국수냉면, 여름에 수확한 밀로 만든 밀막국수와 일부이긴 했지만 우동 등의 면식 문화가 존재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지고 이북 피난민이 부산에 상륙했다. 피난민이 가지고 온 보따리 속에는 출신지역의 음식 문화도 들어있었다. 사람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음식 먹고 만드는 법도 들어왔던 것이다. 이때부터 부산 국수는 생소했던 이북 국수와 만나 새로운 면식 문화로 발전한다.

전 신라대 식품영양학과 김상애 교수에 따르면, 경상도 지방에서 이전부터 먹어왔던 밀국수냉면에 꿩고기 육수를 썼던 이북 냉면이 접목되었다고 한다. 원래 면을 말았던 바지락 육수에서 사골이나 기타 쇠뼈 등을 이용한 육수로 바뀌면서 밀국수냉면은 냉면에 흡수되어 밀면으로 명칭이 바뀌어 유래했다는 것이다.

변한 것은 바지락에서 사골이나 쇠뼈로 바뀐 육수뿐만이 아니었다. 면식의 근본인 면발도 바뀌었다. '원래 먹어왔던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은 피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피난민들은 고향에서 먹었던 냉면을 재현하려고 했다. 냉면집을 운영하는 피난민 출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부산에서 메밀을 구하긴 쉽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메밀을 대체할 밀가루를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1954년 제정된 미국 공법 480호에 따라 구호물자로서 밀가루가 1956년부터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자국 농산물 가격 안정과 저개발국의 환심을 사기 위한 외교 전략이었지만 배가 고팠던 사람들 입장에선 고마울 따름이었다. 특히 부산의 피난민들에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누가 언제 처음 밀면을 만들었다고 특정하기는 어렵다. 1950년대 중후반, 당시 동시다발적으로 부산지역 면식업계 전체적인 조류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호냉면>을 그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시기로 보나 지역으로 보나 업주의 출신지로 보나 <내호냉면>과 창업자 고 정한금 할머니는 밀면 생성기 1세대의 대표성을 고루 갖추었다.

1953년 피난민이 모여 살았던 부산 우암동에 함북 흥남에서 '동춘면옥'을 운영했던 정한금 할머니가 문을 열었다. '내호'는 흥남의 지명이다. 말하자면 고향의 이름을 걸고 냉면집을 연 것이다. 정 할머니는 '동춘면옥'에서 평양냉면과 함흥냉면(국수)을 모두 취급했지만 정작 주 고객인 부산 사람들은 그 맛을 낯설어했다.

1959년부터 구하기 쉬운 밀가루에 전분을 섞어 함흥식 반죽을 하자 오히려 반응이 좋았다. 함흥냉면보다 덜 질기고 적당히 쫄깃했다. 이북음식도 아니고 부산 전통음식도 아닌 밀면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밀면은 '냉면집'에서 개발해 팔던 음식에서 '밀면집'의 주 메뉴로 자리잡고 부산의 향토음식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후 부산에서 밀면은 동네와 업소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로 분화 발전했다. 1966년 개점한 <개금밀면>, 1970년대 초에 개점한 <가야밀면>이 부산밀면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밀면 마니아들 사이에 부산의 3대 밀면집을 가끔 꼽는다. 꼽는 사람 취향에 따라 달라지긴 하나 이 두 집이 포함되는 사례가 많다.

지금은 부산에 수많은 밀면집이 다양하게 분포했다. 그중 연제구 연산9동의 <언제나 밀면>은 3500원에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밀면 맛을 선보인다. 작고 깔끔한 점포에 수수한 차림새의 부부가 손님을 맞이한다. 서민 음식인 밀면의 이미지와 가격과 맛이 똑떨어지는 몇 안 되는 밀면집이다.

서울에서도 뿌리 내린 밀면 전문점
서울 석촌동 <부산밀면>



밀면은 보통 식당의 사이드메뉴나 고깃집의 후식으로 구성된다. 부산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밀면 만을 파는 밀면 전문점을 운영한다는 것은 모험에 가깝다. 밀면에 대한 인지도가 낮을 뿐 아니라 면식을 한 끼 식사로 흔쾌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 식습관 때문이다.

서울에서는 드물게 2011년 4월, 부산 출신 박성륜 씨가 석촌동에 <부산밀면>을 열었다. 올해로 개점 3년차에 접어들었다. 부산과는 외식소비 환경이 전혀 다른 점을 인식하고 개점 전에 충분히 밀면의 맛과 조리법을 연구했다.

면발은 계절에 따라 밀가루와 전분의 비율을 유연성 있게 조절한다. 육수는 돼지 사골을 우려낸 국물에 각종 한약재를 넣어 만들었다. 면을 씹을 때 풍기는 당귀 향이 청량한 느낌을 내준다. 비빔 밀면은 매콤한 맛이 일품이다. 매운 비빔장에 겨자와 함께 비벼 먹으면 얼얼할 정도로 맵다.

매출 목표를 높게 잡지 않았지만 개점 첫날 14그릇밖에 못 팔 정도로 성적이 부진했다. 밀면은 계절을 많이 타 겨울철에 손님이 없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차츰 단골이 늘어 매출은 꾸준한 편이다. 찾아오는 고객은 부산 출신과 일반 고객의 비율이 5:5 정도.

이 집은 부산의 현지 밀면 맛을 대체로 충실히 구현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밀면에 대한 고객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모든 고객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어 박씨는 현재의 밀면 맛과 콘셉트를 계속 유지할 생각이다. 가격도 6000원이어서 업소나 고객이나 서로 큰 불만이 없다. 개점 이후 가격 그대로다. 이 집은 제대로 만들면 부산 이외 지역에서도 밀면이 틈새시장 아이템으로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고깃집 후식 메뉴로 인기 높은 밀면


밀면은 냉면의 일종이어서 면발이 담백하고 국물이 시원하고 개운하다. 따라서 고기를 먹은 뒤 입가심용 음식으로는 최적의 메뉴다. 메밀에 비해 주재료인 밀가루 가격이 낮고 고깃집에서 나오는 자투리 고기나 뼈로 육수를 낼 수도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깃집 후식 메뉴로 주목받는다.

서울 강남의 어느 중대형 등심 전문점에서는 후식 메뉴(4000원)로 밀면을 설정했다. 직접 뽑아낸 면발에 다섯 가지 한약재와 돼지고기로 뽑은 육수를 부어 만들었다. 편육과 삶은 달걀에 지단과 오이채 다진 양념 등 제법 고명도 푸짐하다.

고객으로부터 어설픈 고깃집 냉면보다 한결 맛이 시원하고 깔끔하다는 평을 듣는다. 요즘같은 여름철에는 살얼음을 살짝 띄워 시원한 맛을 더욱 강조했다. 어느덧 이 집 밀면은 고기 메뉴 못지않은 인기와 유명세를 얻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아예 간판에까지 밀면을 크게 표기, 업소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다.

경기도 수원의 <화성갈비> 역시 고기를 먹고 나면 입가심용으로 밀면을 제공한다. 이 집은 서비스용 냉면을 조금씩 제공했는데 돈을 받고 파는 식사용 냉면과의 차별화를 생각해서 밀가루 면(밀면)을 개발했다고 한다. 면은 밀가루에 고구마전분 10% 비율로 섞어 반죽했다. 면이 익는 시간도 짧고 면발의 식감도 좋다는 평을 듣는다. 서비스용 밀면의 양이 부족하거나 조금 더 먹고 싶으면 아예 작은 양(3000원)을 주문해 먹을 수도 있다. 고기와는 별도로 식사용 단품 메뉴(6000원)로도 마련했다.

부산시청, 밀면 등 향토음식 육성 꾸준히 지원


밀면의 고향은 부산이다. 부산광역시는 1999년부터 부산향토음식점 지정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이 제도는 동래파전, 돼지국밥 등 13가지 부산 향토음식을 취급하는 업소를 대상으로 부산향토음식점으로 지정, 부산의 관광명소로 육성하고 관광객 유치에 기여하고자 마련했다. 바로 13가지 부산 향토음식에 밀면도 들어있다.

부산향토음식점 선정기준은 향토성, 대표성, 역사성, 위생수준 등 네 가지. 2013년 7월 현재 부산진구의 <춘하추동>과 연제구의 <가야할매밀면> 두 곳이 부산광역시 공식 밀면 지정 업소다. 부산향토음식점으로 지정되면 여러 가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다. 우선 향토음식점이라는 표지판을 제작하여 부착해준다. 부산시 차원에서 부산의 대표 음식점으로 홍보물이나 각종 인터넷 등에 홍보할 수 있으며, 한국관광공사나 여행사 등에 추천하여 이용권장을 유도한다. 또한 시설개선자금 융자를 타 업소보다 우선 지원받을 수 있고, 옥내외 외국어 가격표나 위생향상용품 등을 지원받을 수 있다.

부산시에서도 밀면 육성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인다. 부산시청 위생정책팀의 조상용 씨에 따르면 밀면을 비롯한 향토음식 지정점에 대한 보다 실질적인 지원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한다.

"업소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여 실질적 지원이 될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업소에서는 물품 지원보다 대개 홍보 지원을 원하지요. 그래서 저희도 아파트 홍보지 등 주민 노출빈도가 높은 매체를 선별해서 업소에 대한 홍보 지원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비하면 밀면에 대한 인지도가 무척 높아진 것 같습니다."

개선여지 있지만 향후 면식 주류로 등극할 잠재력 보유


북한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졌다는 진주냉면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는 냉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진주냉면이 평양냉면보다 존재감이 훨씬 미약하다. 이것은 메뉴 자체가 대중화, 일반화, 업소화하기에 한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진주냉면은 평양냉면보다 식재료가 다양하고 고급스러우며 구하기 어렵다. 조리 과정도 복잡하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결과물인 냉면 자체도 고급스러워져 일반인이 접근하기엔 부담스럽다. 이쯤 되면 가정에서 손님 접대용으로는 좋을지 모르나 식당에서 파는 음식으로는 실격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밀면의 미래가 보인다. 밀면은 평양냉면처럼 육수나 고명을 미리 만들어둔다. 여기에 더해 평양냉면보다 더 저렴한 밀가루가 주재료다. 신속하게 조리가 가능하고 고객이 싸게 먹을 수 있는 조건을 밀면은 완벽하게 갖췄다. 이것이 앞으로 면식의 대세를 이룰 지로 모를 밀면의 폭발적 잠재력이다.

그러나 밀면이 아직 부산 이외의 지역에서 맥을 못 추는 것이 현실이다. 저렴한 가격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격이 낮은 음식이라는 이미지도 겸한다. 너무 맵고 짠 맛이 강해 타 지역 사람 입맛에는 다소 맞지 않을 수 있다. 또 평양냉면 육수처럼 깊은 맛이 부족하고 대체로 단조로운 맛이다. 밀면의 이런 측면들은 밀면 대중화와 저변확대를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기고= 글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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