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구 ‘칠성동 할매콩국수’. 여느 콩국수집과 달리 호박, 김 등이 고명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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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커버스토리 전국 콩국수 맛집 기행
여름의 더위를 식히는 음식의 대표선수는? 냉면!이라고 대답한다면 섭섭해할 음식이 있다. 콩국수다.
시원하고 쫄깃한 면발을 씹고 난 뒤 고소하고 진한 국물을 쭉 들이켜면 여름철 이만한 보양식도 없다.
대구 칠성동 할매콩국수견과류 들어간 국물 맛 일품
광주 대성콩물
달짝지근한 설탕맛 독특하네
한여름 냉면의 경쟁자는? 콩국수다. 냉면의 인기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찾는 이가 많다. 더위를 날려버리는 동시에 보양식으로도 손색이 없다. 유명세를 탄 콩국수집은 하루 1000그릇 이상 팔아치운다. 일도 아니다. esc가 <음식강산> 저자 박정배씨의 추천을 받아 전국 콩국수집 투어에 나섰다. 박씨는 전국을 돌면서 우리 음식의 소중한 맛을 여행한 이다. 콩을 삶아서 걸러 국물 내고, 소금 간을 한 뒤에 면을 담가 먹는 콩국수가 무에 그리 차이가 있겠냐 싶지만 집집마다 그 맛이 다르다.
2 전주 ‘금암소바’. 메밀면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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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예, 10번예, 2층에 같이 있으세요.” 지난 18일 오후 1시30분께, 대구시 침산동. 밀려드는 차량 행렬로 골목은 터진 순대 같다. 일부러 점심때를 지나 찾았건만 번호표의 숫자는 16이다. ‘칠성동 할매콩국수’는 유명 맛집의 전형적인 꼴을 갖추고 있었다. 문밖의 긴 줄, 가게 안에 병풍처럼 앉아 있는, 창업자로 추정되는 팔십이 넘은 할머니, 소란스러운 종업원들의 절박한 외침들, 간판에 적힌 ‘신스(SINCE) 1970’. 너무 판에 박힌 풍경에 의구심이 생긴다. 진짜 맛있는 것일까? 할머니는 그저 장삿속, ‘장식’은 아닐까? 이윽고 식탁에 등장한 콩국수. 도도한 황허 물을 퍼와 담은 것 같은 누런 콩국물에 얇고 납작한 면이 바위처럼 푹 박혀 있다. 야들야들한 호박과 김가루가 고명이다. 젓가락을 담그는 순간 후루룩,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합석한 신종호(65)씨는 3년 전부터 단골인데 한결같은 맛에 또 찾는다고 한다. 국물 맛은 고소하다는 표현이 아쉬울 정도다. 면은 소면보다는 굵고 납작하다.
콩국수의 국물은 너무 걸쭉해도, 너무 묽어도 안 된다. 콩죽이 되거나 두유가 된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콩 특유의 비린내가 나면 잘못 삶은 것이다. 면과 국물의 조화는 말할 것도 없다.
“옛날에 할 게 없으이, 뭐뭐 그랬지 뭐, 우리 엄마가 솜씨가 있어가 해가지고 잔뜩 주대요. 맛있어, 살다 보니 어려워버려, 그걸 해가지고 살아봐야겠다, 옛날에 배가 고파 나도 먹고 그냥도 주고.” 할머니의 창업 사연은 콩국수만큼 구수하다. 그는 지금도 저녁나절 콩국물 한사발 마시고 들어가 채소나 과일 몇 조각만 먹고 잔다. 새벽 5시면 나와 직접 만든다. 한사코 이름을 밝히기 싫어하는 할머니를 보고 “옛날 어른들은 이름 말하면 하늘에서 빨리 데려간다 생각하세요”라고 아들이 이유를 알려준다. 대기업을 다녔던 아들은 5년 전부터 어머니를 도와 운영한다. 마흔아홉살인 그도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1968년인가, 69년인가 연 것 같은데 그냥 70년에 했다 정했어요.” 고소한 국물의 비법은 콩도 콩이지만 각종 견과류가 들어가기 때문이란다. 아삭한 고추가 김치 대신 나온다. 고명은 아마도 담백한 건진국수가 유명한 경상북도 국수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콩은 경북 영천시의 한 상회가 수매하는 것, 면은 30년 거래한 대구의 한 국수공장의 건면을 쓴다. 국산 콩이다.
3 광주 ‘대성콩물’의 서리태가 들어간 콩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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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동에서 현재 장소로 옮기면서 “장사가 잘되기 시작”했다. 꾸준히 방송을 탄 것도 이유다. 50원이었던 콩국수는 이제 7000원이다. 종업원들의 “오(5)요, 마이너스 일(-1)이오” 하는 말이 재밌다. ‘5명 중 한명이 여자라서, 한그릇의 양은 조금 적게 해라’라는 소리다. 대구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콩국수집이다.
부산에는 ‘하가원’이 있다. 해운대구 좌동과 동래구 사직동, 두곳이다. 좌동은 2001년에 하용백씨가, 사직동은 2005년에 형님 하만호씨가 열었다. 음식에 관심이 많았던 동생 용백씨가 먼저 문을 열었다. 콩국물은 같지만 면의 색이 다르다. 좌동은 여느 콩국수집과 비슷한 흰색의 생면이고, 사직동은 찰보리·현미 등이 섞인 생면이다. 국물은 진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럽다. ‘칠성동 할매콩국수’와는 또다른 콩의 세계다. 하씨 형제와 시댁의 음식 맛을 이은 맏며느리 안행숙씨가 전국의 이름난 콩국수집을 다녀보고 개발했다. “닭 육수도 뽑아보고 계란도 풀어보고 깨나 호두도 넣어보고 별의별 실험을 다 해봤죠.” 안씨의 무용담이다.
맛의 고향, 전라도로 넘어가면 콩국수가 다르다. 소금만으로 간을 하는 경상도와 달리 전라도는 여기에 설탕도 들어간다. 이 연유에는 지역민들의 어린 시절 추억이 서려 있다. 여름철이면 맹물에 달짝지근한 설탕을 타 먹었다. 가난한 이들은 설탕 대신 사카린을 탔다. 달콤해야 맛난 것이었다.
4 ‘대성콩물’ 본점. 오후 4시께인데도 손님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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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 등장한 콩국수, 색이 사뭇 다르다. 맛깔스러운 노란색이 아니라 검은빛이 돈다. 검은색은 식감을 해친다. 서양요리에 먹물파스타가 있긴 하지만, 이름난 셰프들은 검은색으로 자신의 요리를 뽐내지 않는다. 별 기대 없이 국물을 혀에 옮긴다. 닿는 순간 잇몸이 환호성을 지르고 미뢰(맛세포)가 호기심에 일어선다. 낮은 기대 때문인지 반전의 파고가 높다. 그리 묽지도 않지만 다른 지역의 콩국수처럼 걸쭉하지도 않다. “어린 갓난이가 먹어도 괜찮아야재.” 주인 고영희씨 생각이다. 검은색은 백태 3분의 2와 3분의 1 정도 들어가는 서리태 때문이다. 서리태는 검정콩 중에서 서리가 온 후에 수확하는 콩이다. 일반 콩보다 몇 배 비싸다. 면은 탱탱하다. 부산식 밀면에 메밀가루가 조금 들어간 면이라고 한다. 창업자 전광웅(72)씨의 아들 전재벌(42)씨가 말했다. “2년 전부터 서리태를 넣기 시작했어요. 요새는 건강이 트렌드잖아요.” 그는 이름 때문에 고생깨나 했다. “‘재벌’(財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안 좋아 개명할 생각도 했어요.” 대학 때 에피소드는 웃음을 자아낸다.
“옛날 커피숍은 안에서 전화로 사람 찾죠. ‘○○씨 계세요’ 하고. 한번은 ‘손님 중에 주전자씨 계세요?’ 하는 거예요. 다음에 걸려온 전화가 저를 찾는데, ‘재벌 계세요?’ 하니 웃음바다가 됐어요.”
방송국 엔지니어였던 그는 7년 전부터 “부모님이 평생 하신 거 이어야겠다”는 생각에 돕다가 올해 4월 계림동을 떠나 일곡지구에 2호점을 열었다. 계림동 본점은 초라하다고 말할 정도로 허름하지만 정겨운 풍경은 최고다. 오고 가는 이들이 다 “형님, 형수님”이다.
대성콩물을 처음 열 당시만 해도 광주에는 콩국수집이 없었다. 제과제빵 기술자였던 전광웅씨와 아내 고영희(68)씨는 당시 대중음식점 허가를 받으러 갔다가 담당 공무원에게서 “콩국수가 뭐다요”라는 소리를 들었다. 연탄불에 면 삶던 그 시절, 60원에 하루 30~50그릇 팔리던 게 1975년부터 150~200그릇씩 팔렸다. “택시 기사분들 덕에 돈 벌었지.” 고씨의 말이다. 기사들 사이에서 “맛 좋고 싼 집”으로 소문났다. 택시 손님도 데리고 왔다. “날씨가 더우면 하루 500~600그릇, 흐린 날은 100그릇 나가요.” 날씨의 영향이 크다. 본점은 1년 중 4월26일부터 10월 초까지만 연다.
‘살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산다’는 말까지 있는 전북 전주에는 넉넉한 콩가루, 큼지막한 얼음까지 떠 있는 ‘진미집’이 유명하다. 관광객이 몰리는 탓에 지역민들은 ‘금암소바’를 더 찾는다. 전주 콩국수의 특징은 면이 일본식 메밀국수에 들어가는 메밀면이다. 이 두 집도 메밀면을 쓴다. 메밀국수집을 겸한 곳이 많아서다. 20여년 전 문 연 금암소바. 주인 황옥주(67)씨가 “설탕 빼드려요?”라고 묻는다. 이왕이면 그 지역 맛 그대로를 느껴보는 게 좋다. 달달한 콩국물 위에는 콩가루가 유쾌한 건달처럼 흐느적거린다.
남도 끝자락 전남 목포시에는 ‘유달콩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39년째 영업을 하고 있는 조성철(65)씨는 콩국수 한그릇에 80원으로 시작했다. 현재 상호만 같은 ‘유달콩물’이 목포에 네댓곳 있다. 충청도권에서는 대전시의 ‘대성콩국수’가 명성이 높다.
서울이라고 이름난 콩국수집이 없는 게 아니다. 서울 중구 서소문동, ‘진주회관’의 주인 조걸(67)씨는 1962년 90원에 콩국수를 팔았다. “옆에 ‘강서면옥’이 있었는데 잘되는 거예요. 이북 사람들이 많이 왔죠. 이남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게 뭔가 생각하다가 콩국수를 하게 됐어요.” 당시 강서면옥의 냉면은 80원이었다. 조씨는 하루 3000그릇 이상 판 적도 있다. 면에 콩가루가 섞이는 게 독특한 점이다.
최근에는 벽에 걸린 역대 서울시장의 인사말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진주회관의 무궁한 번영을 바랍니다’, 오세훈 전 시장은 ‘진주회관의 콩국수는 정말 명품입니다’, 현재 박원순 시장은 ‘진주회관 더불어 행복한 세상’이라고 적은 글귀가 붙어 있다. 누리꾼들은 시장들의 성향이 글에도 나타난다고 화제로 삼았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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