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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웅
남영도씨의 원래 이름은 남복실, 복실福实이라는 귀염성 있는 이름을 왜 영도璎桃로 고쳤는지 알 길이 없다. 평소에 복실씨라고 불렀으니 그냥 원래 이름을 부르기로 하자.
아무리 인용부호를 쳤지만 이모 벌, 적어도 큰언니 벌 되는 이를 두고 ‘가슴’이 큰 녀인이라고 대문짝 같은 문자로 잡지에 내다니,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가만히 생각하면 그야말로 절묘한 은유다. ‘가슴이 큰 녀인’, 이 이상 더 적절한 은유가 어디 있을가? 나는 복실씨보다는 10여살 더 많지만 대학시절에는 겨우 2년 선배였을 뿐이다. 학창시절에는 잘 몰랐지만 열심히 광고회사를 경영하면서 장학사업을 하고 있는 복실씨의 부군 리춘일씨와는 역시 허물없는 선후배 사이다. 더더구나 복실씨의 대학동창들인 정일남, 우상렬 박사와는 평생 같은 학과에서 일하고 있는 만큼 복실씨의 인간성과 재능, 그들 부부의 러브스토리까지 조금은 알고 있다.
주책머리 없이 좀더 늘어놓다가는 재수없이 ‘미투’에 걸릴 우려가 있으니 복실씨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입을 다물자. 아무튼 그 나무에 그 열매요, 그 사람에 그 글이라 하지 않았는가. 이젠 복실씨의 3편의 수필만을 보기로 하자.
<치타치타>는 한국 TV에 나오는 <치타송> 치타댄스에서 힌트를 받고 팔순이 넘는 시어머니와 지천명의 나이를 넘은 며느리와의 이야기, 말하자면 작가 자신과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서사수필이다.
하지만 나이가 원쑤다. 겉보기에는 밝고 명랑해보이지만 팔순을 넘기면서 어머니의 동작이 예전보다 느려지고 청력도 떨어지고 감각도 무뎌가고 있다. 집안에 치매환자가 있으면 가족들이 더 힘들어진다는 말에 복실씨는 더럭 겁이 나기도 한다. 어머니가 이런저런 실수를 할 때마다 복실씨는 잔소리를 한다. 제주도에 갔을 때는 어머니가 손가방을 숙소에 둔 채 공항까지 와버려서 숙소로 되돌아가서 찾아온 적도 있다. 그러니 저도 모르게 치매를 들먹이며 어머니를 단속하게 된다고 했다.
여기서 나의 반성은 비로소 시작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게 되면 모든 것을 리해하고 깨닫게 된다. 복실씨는 비로소 세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압록강을 건너온 꼬마가 팔순고개를 넘기까지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어머니, “설명절이 오는 건 좋지만 나이 먹는 건 싫구나!” 하고 솔직히 털어놓는 어머니, 건강검진을 받고 “100살까지 문제 없겠수다!” 라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다시 싱글벙글 웃는 ‘미소할머니’가 되는 어머니를 충분히 리해하게 된다.
<마음의 금선을 튕기며>라는 제목은 위만주국 시기 연변 등지에서 활동한 소설가 현경준의 소설 <마음의 금선>을 련상케 한다. 현경준의 소설 <마음의 금선>은 아편중독자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여 명우와 규선이라는 조선인 청년의 재생을 그린 작품이다. 그렇다면 복실씨의 수필 <마음의 금선을 튕기며>는 현대인 또는 중산층의 취미생활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주지하다 싶이 개혁개방 40년, 우리 나라 중산층의 수는 대폭 늘어났고 낚시 등산, 음악, 미술, 독서, 려행 등 취미생활을 중요시하는 게 하나의 풍조로 되였다. 북경, 상해와 같은 대도시 시민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작가의 경우도 오십 평생을 살도록 악기라고는 하나도 다룰 줄 아는 게 없어서 늘 가슴 한켠에 서운함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만난 가야금이 그 자리를 채워주었다. 하지만 따분하고 지루한 련습, 식지에 물집이 생기고 피가 나지만 반창고를 붙일 수도 없는 노릇, 꼬박 2시간씩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니 다리가 저려서 물러날 것만 같다. 젊은 사람들은 척척 진도를 나가는데 복실씨의 손가락은 굵은 탓인지 아니면 감각이 둔한 탓인지 잘 튕겨지지 않고 그냥 제자리걸음이다. 그래서 창피스럽게 ‘나머지공부’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고의 나날을 거쳐 하나의 진리를 터득한다. 말하자면 멀리서 볼 때는 화려하고 멋있는 것들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실은 고된 련습과 노력의 결과물임을 깨닫게 된다. 어디 이 뿐인가. “전에는 현란한 손놀림과 우아한 선률로 나를 사로잡았다면 이제는 들뜨지 아니하고 차분하게 끈기 있게 다가갈 때 더 깊은 매력을 뿜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기에 작가는 “그저 물 흐르듯이 순리에 따라 살면서 가야금을 배우며 터득한 리치를 내 소소한 일상에 적용하여 누군가의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지음이 되고 지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가야금을 배우는 과정은 자기의 마음을 갈고 닦는 과정, 인격적 수련의 과정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수필적 언어는 대체로 고유어에 바탕을 둔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여야 한다. <독서와 려행이라는 듀엣>이라고 제목을 달았는데 물론 듀엣(duet)은 영어로서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성부로 노래하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생소한 영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면 공연히 작가의 음악적인 소양과 지식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을 뿐 일반 독자들에게는 너무 당황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리고 “세월 앞에 고개 수그리고 유자孺子의 소가 되여”라든지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현란한 손놀림과 우아한 선률”이라든지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노라 씩씩하게 말할 수 있다”와 같은 표현은 중국의 로신, 한국의 김춘수나 천상병의 시구를 려과없이 인용해서 오히려 이상한 느낌을 준다. 상호 텍스트성을 주창한 이들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만 남의 명언을 가져오더라도 그 출처를 밝히거나 아이러니나 역설, 패러디를 통해 변형시키고 자기화해야 한다.
하지만 맹자가 인의례지신仁义礼智信에서 의로움을 군자의 최고의 덕목으로 보았듯이 중산층의 조건과 덕목에서도 공분公愤에 의연히 참여해야 함을 필수불가결의 덕목으로 인정하는 만큼 수필의 제재령역을 좀더 확장하고 사회비판성을 지닌 작품들도 더러 쓰기를 바란다. 어머님과의 이야기는 많은 수필에 나오지만 북경의 멋쟁이 기업인 리춘일씨의 모습은 항상 베일에 가려져있기 때문이다. 이게 나 혼자의 궁금증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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