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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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는 죽일 수는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
2021년 09월 26일 09시 47분  조회:784  추천:0  작성자: 김호웅

김학철 탄신 100주년에 즈음하여-

김학철이라 하면 두 장면이 먼저 눈앞에 떠오른다. 하나는 1975년 그가 공판(公判)을 받던 장면이요, 다른 하나는 1980년 그가 무죄판결을 받던 장면이다.

1966년 김학철은 최고지도자의 개인숭배와 지식인에 대한 탄압을 비판한 정치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한 까닭에 "문혁"시기의 공안당국에 의해 철창에 갇혔고 마침내 7년 4개월만에 공판을 받게 되었다.

1975년 4월 3일, 연길시 로동자문화궁전에는 1천 3백여명의 인파가, 그야말로 립추(立錐)의 여지도 없이 꽉 들어찼는데 김학철은 두 무지막지한 경관에 의해 단상에 끌려 올라왔다. 외다리에 엽장을 짚고 서있는 김학철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경관들은 그의 뒤통수를 치며 내리눌렀다. 김학철은 뒤통수를 내리치면 다시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날은 자아변호도 용허되지 않았다. 김학철이 자신의 무죄를 두고 항변하자 경관들은 부랴부랴 걸레를 뜯어다가 그의 입에 아갈잡이를 했다. 김학철은 아예 엽장을 내던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삽시에 단상은 아수라장이 되고 공판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군자는 죽어도 관(冠)을 벗지 않는다고 김학철은 일거수일투족을 다 의식적으로 했던것이다.

1980년 김학철은 24년이라는 비극적인 생활을 마치고 무죄판결을 받게 되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감지덕지해서 눈물을 흘릴 일이지만 김학철은 달랐다. 공판을 받을때처럼 무죄판결 공포대회에 1천 3백명의 시민이 참가하지 않으면 불참이라고 선언했다. 12월 15일, 무죄판결 공포대회는 당교(當校) 회의실에서 열렸는데 다른 당사자들은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이제라도 살려주어 고맙습니다, 하고 "만세! 만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김학철은 다음과 같이 소감발표를 했다.

'나는 북간도땅에 이렇게 긴 땅굴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사람잡이를 업으로 삼는 인간백정들의 말로(末路)'에 쾌재를 부른다. 하지만 지난날 함께 싸웠던 친구들을 볼수 없어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서 광신(狂信)과 맹동(盲動)으로 소란스러웠던 "문혁"의 시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초연히 회장을 떠나버렸다.
이처럼 김학철은 신념과 의지의 사나이다. 그는 비정한 권력에 아부하고 굴종할줄 몰랐다. 그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통해 여러 번이나 "죽일수는 있으되 욕보일수는 없다(士可殺不可辱)"는 선비의 덕목과 위용을 생생하게 보여준 혁명투사요, 참다운 문학자였다.

젊은 시절, 그는 망국노가 된 마당에 일신의 영달과 부귀만을 위해 공부만 할수는 없었다. 그는 분연히 고국을 떠나 상해로 갔고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태항산에서 일제와 싸우다가 한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는 일본군에 잡혀 나카사키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지만 비굴하게 전향서(轉向書를) 쓰고 치료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총상을 입은 다리는 썩어서 잘라낼수밖에 없었다. 그 다리는 지금도 감옥담장 옆에 묻혀있을 것이다.

새파란 나이에 한 다리를 잃었으니 무엇을 할것인가? 집안의 기둥같은 오빠가 한 다리를 잃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살겠소? 하고 누이동생 성자가 눈물로 얼룩진 편지를 보내오자 김학철은 다리 한짝쯤 없어도 별문제다, 인간은 결코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야, 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는 총대를 붓대로 바꾸어들고 문학창작에 매진한다. 어디 그뿐인가? 광복 후에도 아시아의 독재자들과 차례로 맞서 싸우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쪽으로 밀려갈 때 혼자서 해 솟을 동쪽으로 달려갔다.

65세에 복권이 되고 85세에 운명하기까지 김학철문학이라는 탑을 쌓아올리고 삶에 련련하지 않고 20여 일 곡기(穀氣)를 끊은 끝에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정한 권력에는 물론이요, 인간의 생리적인 한계와 죽음의 공포마저도 이겨낸 이 시대의 강자요, 철인(鐵人)다.

김학철은 권세에 아부굴종하고 권력의 앞잡이로 무고한 사람을 물어뜯은 "설치류(齧齒類)"들, 명철보신하고 시세에 편승하는 "숙주나물"들, 더욱이 자신의 과오와 허물을 감추고 오리발을 내미는 "카멜레온"들, 벼슬에 미친 "벼슬중독자들"을 눈이 찢어지게 미워했다. 아니, 절대 용서를 하지 않았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것에 도전하라." 적잖은 사람들은 이를 김학철의 유일한 유언으로 알고있지만 기실 유언이 또 하나 따로 있다. 김학철은 세상을 떠나면서 12명의 후배작가들을 불렀다. 유언 한장을 남기고 아드님더러 타이핑을 해서 출력한 후 하나하나 사인을 했다. 그 유언인즉 이러하다―

내가 여태껏 지켜본 바에 의하면 김, 임, 장 아무개는 자신을 뉘우칠줄 모르는 전대미문의 악인이고 박 아무개는 세상에 드문 어진 사람이다, 이를 세상에 알리고 가노라, 대개 이런 뜻이다.

이 세 "악인"이란 유다처럼 김학철을 팔아먹었지만 단 한번도 찾아와 반성하지 않은 배신자요, 악한들이다. 김학철은 평생 로신을 좋아했는데 그 역시 물에 빠진 개는 호되게 때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있었다.

요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유태계 작가이자 화학자 프리모 레비의 증언문학 "이것이 인간인가"(1947)를 보았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벌어진 잔악한 행위와 비굴한 행위를 두고 "인간이 이처럼 잔혹할수 있는가? 또 인간이 이처럼 비굴할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다. 김학철 역시 인간의 잔혹함과 권력의 비정함을 질타함과 동시에 권력에 비굴하게 빌붙어 동지를 팔아먹고 일신의 부귀와 영화를 꾀한 자들을 가차없이 비판했다. 이들은 때가 되면 비정한 권력의 온상(溫床)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 원광대학의 김재용박사는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에 김학철과 김사량 두분의 항일문학비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다. 소쩍새 우는 호가장의 모텔에서 나는 김재용박사를 보고 왜 한국과 중국 사이를 넘나들면서, 호가장이라는 이 오지까지 찾아와서 김학철항일문학비를 세우고자 애를 쓰는가 하고 물었더니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학철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서울 파고다공원 길 건너에 있는 자그마한 2층 모텔에서였어요. 좁은 목조계단으로 삐걱삐걱 올라가면 2층에 5, 6평 되나마나한 방이 있는데 선생님은 아드님과 함께 거처하고 계셨습니다. 그 날 선생님 부자간을 모시고 육개장 한 그릇씩 나누어 먹는데 제가 '선생님은 어떻게 이 험악한 세상을 헤쳐나올수 있었구 이처럼 큰 인간승리의 탑을 세울 수 있었습니까? 선생님의 신조(信條)는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선생님은 싱그레 미소를 짓더니 '사의 신(神)은 우리 인간들이 풀수 있는 숙제만 주는거야. 우리 인간이 풀수 없는 역사의 숙제란 없어. 다만 사람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싸우느냐 마느냐의 차역이가 있을 따름이야."

김재용 박사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확 뜨거워지더라고 했다. 그때부터 김재용 선생은 김학철 선생을 무조건 숭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김재용 박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있다.

우리 모두 역사를 관장(管掌)하는 신(神)이 있다고 생각하고 약하고 어질고 성실한 자들의 편에 서서 비정과 불의에 목숨을 걸고 도전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이 약하고 겁이 많다. 제 일신의 영달 때문이 아니더라도 일가족 생계 때문에, 자식의 진로 때문에 상하좌우 눈치만 본다. 밤중에 술판에서는 비분강개한 선비가 되지만 날이 새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다시 산토끼처럼 조심스러운 소시민이 되고만다. 이 눈치 저 눈치만 보다가 몸을 사리는 여우같은 인간이 되고만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김학철이 필요하고 그의 의로움과 의젓함과 세상을 꿰뚫어보는 그의 추상같은 눈매가 필요한 것이다.
 

2016년 5월 29일

동북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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