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사의 기록과 증언, 새로운 세대의 횃불
김호웅
조선왕조 후기의 뛰어난 문장가이며 서화가였던 유한준(1732∼1811) 선생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知则为真爱,爱则为真看, 看则畜之而非徒畜也)” 라고 했다. 사서오경이나, 성경 속의 말씀과 같은 이 금언(金言)은 1990년대 중반 한국의 미학자 유홍준 선생이 그의 명작《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우리 말로 멋지게 번역,소개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다. 이는 또한 뜨거운 가족애와 민족적 사명감을 가지고 수년 간 불철주야 각고의 노력을 경주해 마침내 《원색의 기억——동북에서 살아온 조선족가족의 이야기》(이하 <원색의 기억>이라 함)라는 장편수기(长篇纪实文学)를 펴낸 계영자씨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명언이라 하겠다.
사실 나는 계영자씨와는 대학 4년 동안 같은 교실에서 공부한 동기동창이다. 계영자씨는 대학에 들어올 때 벌써 중국공산당 당원이었는데 공부도 잘 했거니와 학급의 큰언니 구실을 했고 학급간부회의나 당지부회의 때 보면 자기의 소신과 견해를 똑 부러지게 이야기했다. 특히 대학을 졸업한 후 해변도시 대련에서 눈부시게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심심찮게 보고 듣게 되었다. 1998년 대련시조선족학교에 고중부가 설립될 때 나는 하객(贺客)으로 초청을 받는 영광을 지니고 현지에 가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닷가에 있는 대련성(大连程)이라는 광장에 대련을 빛낸 천 명의 걸출한 인물들의 발자국이 대형 동판들에 찍혀 깔려있는데 그 속에 계영자씨의 발자국도 있었다. 다른 인물들의 발자국에 비해 좀 작지만 소담스러운 그 발자국, 그것은 그의 눈물겨운 분투의 역정과 출중한 업적을 그대로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후에 《추억이 깊은 곳에 파란 꽃이》라는 그의 수필집을 받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의 높푸른 이상과 격정, 인민교사의 미덕과 중학교 교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추억의 깊은 곳에 푸른 꽃이》라는 수필집에 대해서는 대련 현지의 유명한 시인 김파 선생, 연변의 저명한 평론가 김룡운과 최삼룡 선생이 상세히 소개하고 분석, 평가했다. 또 이 장편수기에 대해서도 계영자씨와 필자의 대학시절 담임선생님인 김병민 교수가 참신한 시각과 이론적 틀을 가지고 정곡을 찌르는 논평을 하였다. 자식, 안해, 어머니, 교장 등 일인다역(一人多役)의 배역을 훌륭히 연출한 계영자씨의 인간적 매력과 심령의 미, 그간의 노고와 업적을 높이 사준 최삼룡 선생의 분석과 평가에도 수긍이 간다. 또한 사회력사적비평, 다문화주의시각과 서사미학의 각도에서 《원색의 기억》이 가지는 인문학적 가치, 서사구조나 인물성격 등에 대해 간단명료하지만 깊이 있게 분석, 평가한 김병민 교수의 서문에는 더더욱 공감한다. 그러니 필자가 이 작품을 두고 다시 구구히 분석, 논의한다면 오히려 사족(蛇足)이 될 우려가 있다. 하지만 이 장편수기를 읽는 동안 너무나 큰 충격과 감동을 받은 이상 이 작품의 역사적이며 미학적인 가치에 대해서 조금은 다른 각도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민족의 뿌리와 역사는 기억과 기록으로 남는다. 그것이 왕후장상의 공훈담이든 서민백성의 이야기이든, 또 자랑스러운 역사이든 수치스러운 역사이든 이를 기억하고 이에 비추어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확실하게 실천하는 민족만이 영원히 생존할 수 있고 아름다운 미래를 창출할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말해준다면 예루살렘의 많은 유적들은 온갖 수난으로 점철된 유대민족의 슬픈 역사와 트라우마(tráumə), 즉 정신적 외상(外傷)을 기록, 증언하고 이를 넘어서 민족과 나라의 부흥과 독립, 발전과 번영을 약속해준다.
이 장편수기는 “나의 가족”, “남편네 가족”, “나의 교육사업성장사” 등 세 개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20세기 초부터 오늘에 이기까지 장장 100년의 역사를 5대에 걸치는 3십여 명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파노라마처럼 펼쳐낸다. 그야말로 청나라 말엽 4대 가족의 흥망성쇠를 다룬 조설근의 장편거작 《홍루몽》을 연상케 하는 방대한 가족관계이다. 구술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이 기나긴 역사와 수많은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작자는 어떻게 다루었을까? 물론 이 거창한 가족사의 중심에는 계영자씨가 있고 그의 시점으로 모든 인물을 다루고 평가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친정집의 역사, 시집마을의 역사, 작자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세대의 생활사로 구성되는데 이 3부곡은 삼각형 파라미트 형 구조를 취한다. 한자로 말하면 쌓을 루자형(垒字型)구조를 이룬다.
먼저 1세와 2세들의 이야기다. 계씨, 신씨, 김씨 등 세 가족이 천신만고 끝에 중국 동북에 정착해 인척관계를 맺고 삶의 기반을 마련한다면 그중 계씨네 가족의 막내딸 계영자씨가 리씨네 가족에 시집을 감으로써 계씨네 가족과 리씨네 가족이 사돈이 된다. 여기서 리성해와 계영자 내외를 비롯한 3세와 4세, 지어는 5세들의 이야기까지 펼쳐진다. 참으로 방대한 가문이요, 복잡한 인물관계를 이루지만 루자형 서사구조를 취함으로써 그 맥락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작자는 시간변조(Anachrony)와 같은 현대소설의 서사기법을 활용해 현재의 사건이 진행되는 도중에 과거의 사건들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현재의 사건을 진행시키는 중에 뒤이어 일어나는 사건을 앞질러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결합모티프(bound motifs, 생략할 수 없는 모티프, 스토리를 다시 이야기할 때 빼버리게 되면 사건의 연결을 혼란시키는 요소들)와 자유모티프(free motifs, 생략할 수 있는 모티프, 스토리를 다시 이야기할 때 빼버려도 서사체의 일관성을 깨드리지 않는, 즉 사건들의 전체적 인과의 연대기적 과정을 혼란시키지 않는 요소들)를 자유롭게 교차시키는 현대소설의 서사기법을 자유롭게 활용함으로써 기본 이야기줄거리에 새로운 가지를 치고 복선과 조응의 미를 창출하며 주요 인물들의 성격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산재지구 조선족이민사의 예술적 화폭으로서 이 작품에 담겨진 아래와 같은 이야기들은 기존의 이민사 관련 작품, 특히 연변지역의 이민사 관련 작품에 비해볼 때 제재의 참신성과 작자의 탁월한 통찰력이 돋보인다.
하나는 동북으로 이주하게 된 원인을 다양하게 밝히고 있다. 리씨네 가족은 평안북도 태천군에 살 때부터 지체 높은 양반가문이었다. 하지만 아들놈이 동네의 아이들 싸움에서 이웃에 사는 보다 권세 있는 양반가문의 자식을 몽둥이로 때려눕힌 까닭에 그네들의 보복을 피해서 하는 수 없이 솔가도주해 압록강을 건너 동북지역으로 들어온다. 바꾸어 말하면 자연재해와 일제의 침탈로 말미암아, 또는 항일독립운동이나 교육구국을 하기 위해 정든 고국을 등지고 동북에 온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리씨네 가족처럼 특이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울며 겨자 먹기로 동북에 정착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예의와 법도를 중요시하고 위계질서가 분명한 몰락양반의 가문, 그러나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살리면서 칠전팔기 동산재기 하는 리씨가문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둘째로 “아리랑현상”에 대한 서사이다.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중국 동북지역에 이주한 우리 민족의 이주는 한 번에 이루어지고 한 곳에 정착해 둥지를 틀고 살아온 게 아니다. 이들은 “9.18사변”이나 만보산사건 때처럼 전란을 피해 여러 번 이주를 하거나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다. 특히 물이 있고 벼농사를 할 수 있는 더 좋은 고장을 찾아 떠나야 했다. 이를 사학계에서는 “아리랑대오(阿里郞队伍)” 또는 “아리랑현상”이라고 한다. 계씨네 가족도 그러했다. 평안북도 선천군에 살던 이들 가족은 먹고 살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선후로 심양, 휘남, 반석, 우란호트, 통료, 개원에 가서 살다가 다시 휘남을 거쳐 개원에 정착한다. 따라서 계씨 가족의 이민사와 정착사를 통해 동북지역의 지리와 인문 상황을 폭넓게 보여줄 수 있었다.
셋째, 이들이 살았던 다민족 내지 다문화적인 생존공간이다. 연변의 경우는 주로 조선인 농민들끼리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면 요녕성이나 길림성 북부, 내몽골지역의 경우는 한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과 잡거하는 거주형태가 주종을 이루었다. 다민족, 다문화적인 거주형태는 여러 민족 간의 언어와 풍속의 차이, 갈등과 반목, 소통과 융합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인 이주민들의 민족적 정체성의 갈등과 고뇌는 더욱 극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여러 민족의 잡거형태는 조선인 이주자들에게는 단일문화형태의 배타성과 폐쇄성을 반성, 극복하는 계기로 되였고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다른 민족들과의 다원공존, 다원공생의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계기로 되였다.
이 장편수기는 상술한 사회문화배경을 폭넓게 제시하면서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조선인 이주민들이 원색적인 삶과 다양한 인물성격을 부각하고 있다. 서사작품의 가치는 이야기성에 의해 좌우지된다고 할 때 이 작품의 적재적소에 나오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은 읽을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하지만 수기나 평전의 경우 진실성은 작품의 성패와 직결된다. 전기적비평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프랑스 비평가이며 전기작가(传记作家)인 상트 뵈브(1804-1869)는 “나에게 좌우명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 그리고 오로지 진실’이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진실을 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주(传主)의 구술이나 자전(自傳)의 경우에는 알게 모르게 자신을 부풀린 부분이 있기에 마련이다. 또한 작자가 전주나 주요 인물들과 인척관계가 있을 경우에는 그 공(功)과 과(过)를 객관적으로 다루기 어렵다. 저도 모르게 공적은 부풀리고 허물은 감추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는 객관적인 태도와 냉철한 비판정신이 요청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역사와 현실에 대해 책임지는 “오로지 진실”의 원칙을 가지고 계씨와 리씨 양가의 역사와 가풍; 양가의 조부모와 부모, 고모와 이모, 그리고 형제자매를 비롯한 모든 친인척들에 대해 그 원색적인 모습, 말하자면 이들 가문의 빛과 그늘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드러냈고 객관적으로 묘사했다.
친정마을의 경우를 보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벼농사를 하는 친정아버지, 그러나 그는 부모님에게는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아랫사람들의 의견은 덮어놓고 묵살하는 전통적인 효자요, 아버지상이다. 그리고 13살에 시집을 가서 팔남매를 낳았고 이들을 키우기 위해 그야말로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뛰어다닌 어머니, 하지만 시어머니 앞에서는 부르튼 소리 한 마디 못하고 꼬박꼬박 월급봉투를 바치는 어머니의 모습 역시 너무나 진실한 구시대 며느리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시집마을의 경우, 가문이 대소사를 쥐고 흔드는 지고무상의 어른인 할머니의 모습, 죽어지내는 아버지와 며느리의 모습도 잘 그렸거니와 할아버지와 어린 장손이 따로 밥상을 받고 나머지 식구들은 저만치 비켜 앉아 궁색하게 밥을 먹는 장면도 잘 그렸다. 특히 봉건시대의 유습과 권위, 가족관계와 가풍이 그대로 남아 있는 광명뜨락(光明大院)은 그야말로 《홍루몽》의 가부(贾府)를 연상시킨다. 그 외에도 친정집의 여러 삼춘과 삼촌댁, 오빠와 언니들; 시집마을의 고모나 고모부, 그리고 시누이들의 형상도 너무나 생동하게 그렸다 하겠다. 특히 남존여비의 고루한 유습과 다른 민족과의 통혼에 대한 반대에 부딪쳐 실의와 절망을 하던 나머지 죽을 고비를 겪는 작자의 큰 언니, 잘 살아보겠다고 한국에 가서 고된 일을 하다가 오진을 받고 이상한 주사를 맞고 까닭 없이 죽은 작자의 시동생 리성림, 아내를 한국에 보내고 쓸쓸하게 지내다가 술에 취한 나머지 벽과 침상 사이의 틈새에 끼워 숨진 작자의 시동생 리성광, 그야말로 코리안 드림의 여파에 찢어지고 부수어진 그들 가족의 커다란 아픔이요, 우리 조선족사회의 어두운 단면(断面)이 아닌가 생각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이 작품의 중심에는 작자의 자아형상이 서 있고 그의 예리한 시선과 시각이 전편을 관통하고 있다. 결혼식 날 새하얀 너울을 쓰고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있지만 큰상에 오른 음식 수를 헤아려 보는 계영자씨, 음식과 과일 등속이 서른여섯 가지라는 것까지 헤아리는 그 눈매도 매섭지만 신랑감과 처음 만나는 순간 그의 키가 1미터 72센티라는 것까지 한 눈에 알아본다. 작자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관찰력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천부적인 관찰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가족과 일가친척에 대한 계영자씨의 남다른 사랑이다. 이 세상에 시집마을 일가친척의 내력이나 가족성원들 매 개인의 성격이나 아픔까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며느리가 몇이나 될까? 계영자씨의 가족애는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 그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과 학부모들에게까지 확산된다. 이 작품의 제3부는 자신의 교사생활을 다루고 있지만 전면에 나오는 것은 인민교사의 투철한 사명감을 안고 성심성의로 일하는 교사들과 천진무구한 아이들, 장난꾸러기 또는 상처를 입은 문제아들이다. 교장인 계영자씨의 모습은 다만 사려 깊은 그의 눈빛과 조용한 목소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어린 학생 역시 완정한 인격체라고 생각한다. 애들도 인간적인 존엄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은 반드시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하기에 섣부른 훈계나 무자비한 체벌(体罚) 대신에 쉬운 비유를 통한 대화와 소통, 도덕적인 감화에 초점을 둔다. 구소련의 교육가 마카렌코를 비롯한 저명한 교육자들의 저서를 폭넓게 읽은 계영자 교장은 아무리 이름난 문제아라 해도 그의 마음속에는 악마와 천사가 공존하고 있다고 본다. 그 악마를 쫓아내고 천사를 살려내면 새로운 인간으로 재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부분에 나오는 하나의 이야기만 보기로 하자. 다른 학생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는 중학생을 교육하는 장면이다.
“정치교육처의 리종윤 주임과 담임선생님이 나를 찾아와 새로운 정황을 회보했다. 그래서 나는 리종윤 주임과 함께 그 학생을 찾았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언제나 나를 보면 “안녕하세요?” 하고 깊숙이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하던 학생이었다. 그 날도 그 애는 깍듯이 인사를 했는데 별로 긴장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 애가 꼭 물건을 훔쳤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미리 교육은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정면적인 교육을 하기로 했다. ‘우리 몸이 더러워졌다고 하자꾸나. 온 몸에 덕지덕지 때가 끼었다면 어떠한 느낌이 들까?’ 하고 내가 넌지시 묻자 ‘몸이 가렵고 근질근질하겠지요.’ 하고 그 애가 대답했다. 나는 한 술 더 떠서 ‘몸이 가렵고 근질근질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하고 물었더니 그 애는 ‘목욕을 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한다. 나는 ‘맞았어, 옳게 대답했어. 몸이 더러워지면 목욕을 해야 해. 그건 정확한 선택이야’ 하고 그 애의 대답을 긍정하고 나서 또 물었다. ‘목욕을 하고 나면 기분이 어떠할까?’, ‘기분이 상쾌하고 홀가분해지겠지요’, ‘잘못을 저질렀다면 기분이 어떨까?’ 하고 내가 슬쩍 말머리를 돌리자 그 애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연히 마음이 편치 않지요 뭐’, ‘몸에 진득진득 때가 낀다면 근질거려서 죽을 맛이겠지. 이 때 목욕만 하면 상쾌한 기분이 들거든. 같은 도리야. 잘못을 저지르면 마음이 편치 않고 괜히 심리적인 부담을 갖게 되는 거야. 솔직하게 잘못을 승인한다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수 있어. 무거운 심리부담을 내려놓는다면 얼마나 마음이 상쾌하겠어. 너도 목욕하지 앉을래?’ 그 애는 마침내 입귀를 실룩거리더니 ‘저도 목욕하고 싶어요’ 하고 말하했다. 내가 한 마디 더 뚱겨주었다. ‘난 네가 성실한 학생이라고 믿어. 성실한 학생은 무엇보다 먼저 잘못을 승인해야 하고 온 몸을 가볍게 가질 줄 알아야 해. 이렇게 할 수 있겠니?’,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좋았어, 그렇다면 너는 언제부터 남의 물건에 손을 댔지?’”
그 중학생이 마침내 남의 물건을 훔친 사실들을 이실직고하고 나쁜 버릇을 고치고 좋은 학생으로 되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훌륭한 교사들이 교편을 잡고 이런 성자와 같은 교장이 학교를 관리하는 이상 이 학교가 학부모들의 신뢰와 성원을 받지 못할 리 없겠다. 학부모들은 교사의 얼굴을 보고 자식을 학교에 보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경우를 두고 옛사람들도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이름난 산이요,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있으면 신령한 못이다(山不在高, 有仙则名。水不在深,有龙則灵)” 라고 노래했으리라.
계씨와 리씨 두 가문의 1세로부터 5세에 이르는 여러 가족성원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작자가 시종일관 관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부조(父祖)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 세대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3세와 4세, 5세에 속하는 인물들을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때 자연스럽게 주어진다.
하나는 대련을 비롯한 중국 현지에 남아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고 그들과 선의적인 경쟁을 해서 우수한 민족으로, 존경받는 민족으로 거듭나는 경우다. 리성해씨가 그러하고 작자를 비롯한 대련조선족학교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그러하다. 계영자씨의 부군 리성해씨,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 하는 수재다. 그는 대련수산학원을 졸업하고 대련시수산국에서 열심히 일해 “수산국의 컴퓨터 머리”로 불린다. 특히 그의 듬직한 성품과 일거수일투족은 양반가문 장손의 이름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는 일가친척의 장례는 물론이요, 동료나 친구들의 가문에서 장례를 치를 때마다 선참으로 달려가 시신을 감장하고 마른일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닌다.
특히 계영자씨를 비롯한 대련조선족학교 교사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연해도시 대련에 둥지를 틀고 열심히 일해 40여 명 소학생 밖에 없던 학교에 유치원을 앉히고 초중부에 이어 고중부를 설립하며 명문중학교로 부상시킨다. 두세 번씩 이사를 하면서도 군소리 하나 없이 철철 땀을 흘리며 일하는 교사들, 당과 정부의 지원을 유치하고자 수십 번씩 정부의 관련 인사를 찾아가고 간곡히 호소하는 교사와 직공들,앞 다투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지원하는 조선족 지명인사들과 학부모들, 이들은 중국을 삶의 유일한 터전으로 생각하고 교육을 통해 훌륭한 국민으로 거듭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이다. 리애순, 신옥근, 신참생, 리철을 비롯한 3, 4, 5세들은 한국과 일본으로 진출한다. 리애순은 여자는 조신하는 게 좋고 집안에서 밖으로 내돌리지 않는다는 양반가문의 계율과 단속에서 벗어나 열심히 공부해 요녕대학 일본어학과를 졸업했고 결혼한 후에도 남편을 두고 일본에 나가 공부한다. 그는 마침내 석사,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일본에 정착하며 뛰어난 경영인으로 활약한다. 심옥근은 어떠한가? 그는 총명하고 예쁘게 생긴 아가씨다. 그는 개원과 철령에서 공부했고 1995년 일본기업들이 중국에 대거 진출하는 기미를 알아채고 일본어를 전공하기로 작심했다. 마침내 요녕대학 일본어학과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에 가서 알바를 하면서 대학을 수소문하던 중 교토대학 문학과에 입학한다. 수사(修士)과정을 마친 심옥근은 박사과정에 입학하나 이를 접어두고 교토의 어느 한 다국적기업에 취직해 대외판매를 책임진다. 그녀는 결혼한 후 중국에 돌아오나 일이 여의치 앉자 다시 일본에 가서 원래 일하던 회사에 쉽게 취직한다. 그의 책임감과 능력은 회사 측의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현재 그는 귀여운 아이까지 낳고 일본에 보금자리를 틀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기에 신옥근은 자기의 정체성을 두고 고민하던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소설 <대지의 아들>을 읽고 나서야 그 답안을 찾았다. 중국에 남은 일본의 고아가 중국의 양아버지 손에서 자랐고 또 중국의 여성과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 일본에 있는 친아버지가 그를 보고 일본으로 돌아오라고 하지만 그는 ‘나는 대지의 아들이니 중국에 남기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이 고아도 고민과 갈등이 많았을 것이다. 내 몸에는 분명 일본인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나는 중국에서 자랐고 중국에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나는 누구일까? 과연 나는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가? 하고 말이다. 마침내 나도 일본이냐, 중국이냐 하는 문제를 넘어서기로 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온 이 땅이요, 나는 ‘대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작자는 상술한 두 가지 삶의 형태에 대해 어느 한 쪽을 긍정하고 다른 한쪽을 매도(罵倒)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인물의 운명선과 전반 이야기를 통해 작자의 폭넓은 흉금, 새로운 사고와 견해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작자는 우리 조선족은 이제는 발길이 닿는 대로 떠도는 나그네도 아니며 바람 따라 떠도는 부평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중국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투철한 국민의식을 가지고 모범적인 중국국민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면서 돈에 눈이 어두워 덮어놓고 농토와 삶의 기반을 버리고 한국으로, 외국으로 나가는 행태에 대해 일침을 놓는다. 하지만 세계화의 바람과 탈지역화의 물결은 피해갈 수 없는 법이니 우리의 자식들이 중국 여러 지역 내지 다른 나라로 뻗어나가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라고 본다. 새로운 세대들이 우리의 뿌리와 역사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더욱 열심히 살며 중국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나간다면 우리조선족의 문화영토는 오히려 더욱 넓어진다고 확신한다. 바로 여기에 작자의 남다른 혜안과 비전이 있다. 사실 이 작품은 벌써 천애지각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혈육의 정으로, 개척과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철통같이 뭉친 새로운 가족형태를 선보이고 있다. 하기에 이들 가족은 “문화대혁명” 때 억울하게 투쟁을 맞고 조리돌림을 당하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온 가족이 떨쳐나섰던 것처럼 서로의 행보와 운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일만 생기면 사면팔방에서 달려오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 조선족의 피눈물 나는 이민사와 자랑스러운 투쟁사를 다룬 책자들이 적잖게 나왔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를 비롯해 김학철의 《최후의 분대장》, 정판룡의 《고향 떠나 50년》, 김병민의 《와룡산일지》등을 대표적인 작품으로 곱을 수 있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구술, 회고, 취재, 기록을 통해 서로 독립되는 단편적인 작품으로 조선족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집대성한 사화(史話)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최후의 분대장》은 조선의용군의 항일투쟁사와 한평생 비정한 정치권력에 저항한 조선족의 대표적인 지성의 일대기를 다룬 자서전이요, 《고향 떠나 50년》은 뛰어난 총명과 지혜를 가진 한 조선족청년의 끈질긴 분투와 자랑스러운 성공의 역사를 기록한 자서전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와룡산일지》는 연변대학의 창립, 성장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자랑스러운 족적을 남긴 훌륭한 교육자들의 일대기와 업적을 하나하나 돋을새김으로 기록한 “연변대학의 사기열전(史記列傳)”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계영자씨의 《원색의 기억》은 아마도 산재지역 조선족의 역사와 현실을 가족사의 형태로 폭넓게 다룬 최초의 장편수기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자라나는 세대의 진로를 밝혀주는 하나의 횃불이라 하겠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의 변조, 결합모티프와 자유모티프 등 다양한 서사기법을 동원해 거대서사와 미시서사를 결합시킨 방대하면서도 조리정연한 서사구조와 풍부한 이야기성, ‘오로지 진실’의 원칙에 입각해 산재지역 조선족사회의 다양한 인물성격과 인물군상을 창조한 점을 높이 사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조선족의 역사와 진로, 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모색, 우리 민족의 이산(离散)과 분포 형태의 변화, 문화신분의 재구성 등 초미의 관심사에 대해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점 역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제 한문으로 된 이 작품을 수정, 보완해 아름다운 우리 조선어로 번역, 출판해야 할 과제가 남았다. 이 작품의 “부록”들을 본문에 넣어도 무방하다고 보며, 소설적 기법을 차용해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3부의 경우 여러 소제목들에서 다룬 내용이 서로 편폭나 분량이 균일하지 않아 들쭉날쭉한 감을 주기에 일부 소제목들의 내용을 하나로 아우르기 바란다.
이로써 아름다운 연해도시 대련에 큰 족적을 남기고 우리민족 정신사의 큰 탑을 쌓아올린 우리 동창 계영자씨에게 경의와 축하를 드린다.
- 2018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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