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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
김호웅(연변대 교수)
1. 들어가는 말
최근 다문화주의(muticulturalism) 담론이 류행하면서 그것을 긍정하고 이상화하는 경향이 팽배하고 있다. 아주 바람직한 담론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류민족 또는 중심문화의 담론이며 이러한 담론에서 비주류민족 또는 주변부문화의 목소리는 외면되고 있다. 전자는 후자에 대해 시혜(施惠)의 우월감에 젖어있고 후자는 전자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동화(同化)의 비애를 맞보고있다. 말하자면 다문화주의담론에서 비주류민족의 정체성과 주변부문화의 존재가치에 대한 옹호와 존중은 망각되고있다.
한국과 중국 사이에 그 어느 쪽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떠도는 중국조선족 군체(群體), 이들이 모국의 문화와 중국의 중심문화 사이에서 겪는 이중적갈등과 그들의 민족적정체성 찾기는 다문화주의담론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라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중국 주류민족과 조선족의 갈등과 화해의 논리에 대해서만 논의해보고자 한다. 즉 조선족작가들 중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작품화해온 시인 석화와 소설가 박옥남의 작품을 중심으로 다문화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 소수자들이 어떠한 고뇌와 갈등, 어떠한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고있는가를 검토해 보고 이른바 다문화사회담론의 문제점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이민열조와 주변부 문화의 붕괴위기
석화는 최근『연변』이라는 시집을 펴냈다. 이 시집에는 “연변”이라는 이름으로 3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기본주제는 조선족공동체의 역사와 현실 및 디아스포라의 존재양상과 진로에 대한 시적 탐구이다. 석화 이전에도 이삼월(李三月, 1033~2009) 등 시인이「접목」(1993)과 같은 시를 통해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기도 했지만 “연변”이란 제목으로 조선족의 민족적정체성의 문제를 련작시의 형태로 집중적으로 다룬 시인은 석화이다. 시「연변 4―연변은 간다」에서는 석화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연변이 연길에 있다는 사람도 있고/ 구로공단이나 수원 쪽에 있다는 사람도 있다/그건 모르는 사람들 말이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연변은 원래 쪽바가지에 담겨 황소등짝에 실려 왔는데/ 문화혁명 때 주아바이랑 한번 덜컥 했다/ 후에 서시장바닥에서 달래랑 풋배추처럼 파릇파릇 다시 살아났다가/ 장춘역전 앞골목에서 무우짠지랑 같이 약간 소문났다/ 다음에는 북경이고 상해고 냉면발처럼 쫙쫙 뻗어나갔는데/ 전국적으로 대도시에 없는 곳이 없는 게 연변이었다/ 요즘은 배타고 비행기타고 한국 가서/ 식당이나 공사판에서 기별이 조금 들리지만/ 그야 소규모이고 동쪽으로 동경, 북쪽으로 하바롭쓰키/ 그리고 사이판, 샌프란시스코에 파리 런던까지/ 이 지구상 어느 구석인들 연변이 없을쏘냐/ 그런데 근래 아폴로인지 신주(神舟)인지 뜬다는 소문에/ 가짜여권이든 위장결혼이든 가릴 것 없이/ 보따리 싸 안고 떠날 준비만 단단히 하고 있으니/ 이젠 달나라나 별나라에 가서 찾을 수밖에/ 연변이 연길인지 연길이 연변인지 헷갈리지만/ 연길공항 가는 택시요금이/ 10원에서 15원으로 올랐다는 말만은 확실하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족은 19세기 중반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중국의 동북지역에 이주해 정착한 조선인의 후예들로서, 광복 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대체로 동북지역의 농촌에서 촌락을 이루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개혁, 개방 후 산업화와 도시화 물결과 시장경제의 흐름을 타고 농토를 버리고 도시에 들어와 품을 팔거나 장사를 했다. 이들의 발길은 동북삼성을 벗어나 산해관(山海關) 이남의 대도시에까지 뻗어나갔고 “88”서울올림픽 후에는 한국, 일본, 러시아까지 뻗어나갔다. 워낙 이민근성이 강한 조선족의 이주는 중국 경내 기타 민족의 추종을 불허한다. 석화의 시에서 이야기하다시피 비법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고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조선족의 이민물결, 이들로 말미암아 “지구상의 어느 구석”에도 연변사람들이 활개를 치며 걸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민열조로 말미암아 100여년간 가꾸어온 조선족마을은 텅텅 비어 있다. 이러한 실정을 조선족 산재지구(散在地區)의 현실을 소재로 가장 리얼하게, 역시 집중적으로 형상화한 작가는 박옥남이다.
박옥남의 단편「둥지」는 우리 조선족 농촌공동체의 진통과 붕괴 과정을 진실하게 묘사한 수작이다. 이 작품은 진수라는 소년의 일인칭시점과 어조에 의한 생동한 세부묘사, 속담의 적절한 사용, 아낙네들의 개성적인 대화를 통해 조선족 농촌공동체의 피폐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있다. 남편을 한국에 보낸 진수 엄마와 촌장이 바람을 피우다가 들통이 나서 온 마을이 어수선한 가운데 진수네 집이 한족 왕가에게 헐값으로 팔리고 우리민족 어린이들이 뛰놀던 벽동소학교가 한족들에게 팔려 양우리로 변한다. “학교간판이 도끼날에 두 쪽으로 쪼개져 교실 창문 위에 거꾸로 덧박혀있”는 광경은 미상불 조선족농촌공동체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둥지가 부서진다면 알인들 어찌 성햐랴! 주인공 성수는 양우리로 변한 학교를 보면서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문득 저 집에 들어올 양들이 나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있던 집도 없어졌는데 양들은 이렇게 팔자에도 없는 좋은 벽돌기와집에서 살게 생겼으니 말이다.” ― 이 얼마나 눈물겨운 아이러니와 역설인가. 이처럼 이 작품은 이민풍조에 의해 조선족공동체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현실, 다른 민족에 의해 우리의 생활공간이 잠식을 당하는 현실을 고발하면서 강한 민족적 우환의식을 보여주었다.
1. 들어가는 말
2. 이민열조와 주변부 문화의 붕괴위기
3.경계의 공간과 숙명적인 공존
4.정체성의 분열과 동화의 비애
5.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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