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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자랑, 잊지 못할 영상
― 연변대학교를 찾으신 한창우 회장님의 모습에 부쳐
두만강을 사이 두고 중국 ․ 조선 ․ 러시아가 서로 바라보는 동북아의 황금삼각주,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 연길시 서쪽에 있는 와룡산(臥龍山) 언덕에 연변대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일찍 연변대학교를 찾은 한국의 저명한 풍수지리전문가인 육관도사 손석우옹은 와룡산언덕을 바라보더니 앞으로 “불이 솟을 곳”이라고 했다. 불이란 민족교육의 불씨를 뜻하는 것이겠으니 이 와룡산언덕에서 우리민족 교육의 불씨가 일어나 황황 불길처럼 타오르리라 예견한 것이다.
와룡산 명당자리에 앉은 346헥타르의 연변대학교 캠퍼스, 1949년 4월 개교된 연변대학교는 올해까지 도합 7만 5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들은 연변을 비롯한 중국 경내 여러 지역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고 지역발전과 국가발전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말하자면 연변대학교가 있었기에 200만 조선족형제들은 이민사 150여 년을 기록하는 이 시점에서도 자기의 말과 글을 잃지 않고 민족적 자부심이 드높은 공동체로 존속,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연변대학교는 유대인의 오늘을 있게 한 야브네학교에 다름이 아니다.
현재 연변대학교는 19개 학원(단과대학)에 68개 학부를 개설하고 있고 2, 500명의 교직원에 2만 2천 여 명의 학생들을 가지고 있다. 연변대학교는 1996년 중국 “211공정” 중점건설대학으로 선정되고 2001년 국가교육부에 의해 서부개발 중점건설대학으로 선정되었으며 2005년 또다시 국가교육부에 의해 길림성정부와 국가교육부에서 공동으로 건설하는 중점대학으로 선정되었다. 연변대학교는 1996년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 연변사범학원, 연변예술학원, 연변과학기술학원 등 주변의 단과대학들을 통합했고 현재 와룡산기슭에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통합캠퍼스 조성공사를 벌리고 있다.
바로 연변대학교 2만 여명 사생이 일심동체가 되어 제2창업의 설계도를 그릴 때인 2006년 9월의 어느 날, 연변대학교 예당(禮堂)은 2천여 명의 대학생들과 교수들로 입추(立錐)의 여지도 없는데, 휘넓은 단상에는 훤칠한 체구에 반듯하게 정장을 한 70대의 노인이 강연을 하고 있었다. 꿋꿋한 자세, 조용하나 열띤 어조,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편력과 경영철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청중석에서는 무시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올랐다. 노익장(老益壯)의 정열을 유감없이 과시하는 연사(演士), 이 어른이 바로 우리민족의 자랑, 세계적인 거상(巨商)인 한창우 회장이다.
1945년 10월,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어머님이 챙겨주는 쌀 두되와 영어사전 하나만을 들고 홀로 일본행 배를 탔다. 60년이 지난 2006년 현재, 그는 불굴의 의지와 창의적인 발상으로 매출 20조 원을 눈앞에 둔 210개의 기업을 거느린 세계적인 거상으로 성장했다. 마침내 모국 한반도 영토 밖에서 가장 큰 경영성과를 창조한 한인 출신 기업인이 되었다.
60년 세월, 얼마나 혹독한 가난과 차별 속에서 지냈던가? 그는 고학으로 일본 명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경제학부를 나왔지만, 재일한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취직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매형에게서 부도 직전의 자그마한 파친코점을 물려받았다. 그는 남다른 서비스와 고객 중심의 마인드로 좋은 평판을 얻기 시작하면서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았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볼링사업에 뛰어들어 1972년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의 볼링장을 시즈오카(靜岡)에 오픈했다. 그러나 볼링 붐은 금세 식었고, 남은 것은 60억 엔의 막대한 빚더미뿐이었다. 죽음까지 생각했던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부도를 내지 않고 이 극한적인 상황을 이겨냈다. 뿐만 아니라 마루한(丸漢)을 창립하여 2005년 업계 최초로 1조 엔 매출을 달성했다.
그 후에도 마루한은 업계에서 혁명이라 불리는 거대한 변혁을 시도했다. 그것은 고객에게 진심어린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서비스혁명”과 업계에 팽배한 불투명경영을 불식(拂拭)하는 “클린혁명”이었으며 또 최고의 인재를 육성해내는 “인재개발혁명”이었다. 매출 2조 엔을 넘어선 마루한은 이미 거둔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적인 수준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목표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미래를 꿰뚫는 혜안, 백절불굴의 헝그리 정신과 도전 정신, 자신에게는 인색할 정도로 검소하지만 꼭 필요한 일에는 넉넉하고 후한 인심을 베풀고 있는 한창우 회장, 그는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고 돈을 쓰는 것은 예술”이라고 하면서 널리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억 엔의 성금을 한국에 보냈고 1990년에는 3억 엔의 사재를 털어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을 설립했으며 1993년에는 재일한국상공회의소 제5대 회장에 선임되어 6년간 회장 직을 맡으면서 해마다 1억 엔 이상을 동포사회를 위해 썼다. 1993년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를 창설한 후 지금까지 회장 직을 맡고 다국적 민족자본을 결집하기 위해 힘차게 뛰고 있다.
외롭고 험난한 싸움에서 한창우 회장을 지탱해주고 키워준 철학과 실천은 2000명 연변대학교 사생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특히 글로벌시대를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도전과 개척의 뉴프런티어 정신”을 심어주었다.
그날 한창우 회장의 강연을 들은 연변대학교 과학기술학원 경영정보학과 06년급 박혜홍 학생은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소감을 말한다.
“한창우 회장님의 특강제목은 ‘나의 경영철학’이었습니다. 처음에 현수막에 실린 글발을 보고 중학교 때 정치과 수업시간에 진절머리가 났던 기억이 나서 덜컥 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두 시간을 견뎌낼 것인가? 그러나 정작 특강을 듣고 보니 저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회장님께서는 경영학 관련 문제들을 틀에 박힌 개념과 논리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많은 생동한 실례, 특히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 재미있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한창우 회장님은 ‘좌절과 위기는 실패의 시작이 아니라 성공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은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짜증을 내고 남을 원망하고 실의에 빠지곤 합니다. 저도 성적이 좋지 못할 때나, 자기 맘대로 되지 않을 때는 고민에 빠지고 맥없이 주저앉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쉽게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앞에 놓인 곤란은 한창우 회장님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변대학교 대외언어학과 06년급 남향림 학생은 다음과 같이 소감을 말한다.
“한창우 회장님의 길은 결코 순풍에 돛 단 격이 아니었습니다. 거듭되는 실패로 하여 상상하기 어려운 좌절과 실의를 경험하기도 하였지만, ‘위기는 재생의 찬스로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칠전팔기(七顚八起), 다시 세상에 도전을 하곤 하였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노력, 신용, 봉사’를 사훈으로 삼았습니다. 일본이라는 남의 땅에서 민족적 차별을 극복하고 존경을 받자면 일본인들이 8시간 일할 때 18시간 일해 반드시 경제적으로 성공해야 하며, 일본인들보다 더 높은 지적 수준과 교양을 갖추고 그들보다 20배 이상 신용을 지켜야 하며, 거주국의 지역발전과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 조선족 형제들도 중국사회에서 존경을 받자면 한창욱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노력, 신용, 봉사의 정신으로 열심히 살아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한창우 회장은 강연을 마치고 연변대학교 캠퍼스를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그는 당신의 고향 경상남도 삼천포에도 와룡산이 있다고 하면서 마치 제2의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 든다고 했다. 특히 대학가나 연길거리에 반듯하게 걸린 우리 문자로 된 간판들과 여기저기서 다정하게 주고받는 우리말을 듣고 더욱 즐거워했다.
박창우 회장은 그 이듬해에도 연변대학교를 찾아주고 수천 명 신입생들에게 좋은 강연을 해주심으로써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연변대학교 김병민 총장을 일본에 초청해 주시고 연변대학교의 미래상을 두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학교경영의 어려운 문제들을 일일이 묻고 나서 2억 원의 거금을 보내주었다.
올해 가을이면 새로 일떠선 통합캠퍼스에서 연변대학교는 개교 6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이 아름다운 축제에 다시 한 번 한창우 회장을 모실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가 두 번 연변대학교를 찾았을 때 남긴 귀중한 사진들을 편성해 이 영상자료를 만들었다. 애젊은 학생들과 소탈하게 대화를 나누는 한창우 회장, 연변대학교 경영진과 술잔 나누며 담소하는 한창우 회장, 연길 한식점의 한복 입은 접대부들과도 허물없이 포즈를 취하는 한창우 회장, 이 영상자료를 통해 우리 연변대학교 사생들은 한창우 회장의 사랑과 배려를 영원히 기릴 것이며 후세 교양의 산 자료로 삼을 것이다. 한창우 회장, 그는 글로벌시대 오로지 자신의 피타는 노력과 신용, 그리고 헌신적인 봉사로 민족적 차별과 기시를 극복하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우리 민족 경인인의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다.
이 기회를 빌어 한창우 회장의 건승과 마루한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마루한과 연변대학교의 형제적 우의가 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2009년 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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