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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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사] 현룡순 선생을 추모하여 (김영수)
2011년 02월 13일 08시 21분  조회:1642  추천:28  작성자: 김호웅
 [추  도  사]

 저명한 교육자이며 작가인 현룡순 선생을 추모하여


                               김영수(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학원 원장)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연변대학교의 훌륭한 중층간부이며 교수이며 우리 연변문단의 다재다능했던 원로작가였던 현룡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선생은 만년에 폐암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2009년 3월 21일 16시 30분, 82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영영 떠났습니다. 선생의 서거는 우리 연변대학교와 연변문단의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생은 1927년 10월 5일 길림성 훈춘현 순의촌 남진영툰의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936년부터 1941년까지 훈춘현 순의촌 남신소학교를 다녔고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연길현 조양천 농업학교를 다녔습니다. 1945년부터 1949년 사이에는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인민해방군에 참군하여 제3차 국내혁명전쟁의 포화 속을 누비면서 용감히 싸우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1947년 6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선생은 1951년 연변대학교 조문학부에 입학하여 1953년 졸업하였습니다. 선생은 대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1987년 정년을 하기까지 장장 34년간 열과 성을 다해 연변대학교에서 일했는데, 선후로 수리학부 비서, 당지부 부서기, 어문학부 당총지 부서기, 조문학부 주임 등 직을 맡았습니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연변대학교 인사처에서 과장, 부처장으로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1972년 8월 선생은 어문학부 당총지서기로 일했는데 “문화대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홍위병”들에게 첫 패로 끌려나와 투쟁을 맞고 오래동안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자 선생은 다시 교편을 잡고 1979년부터 1984년까지《문학개론》,《맑스레닌주의문학리론선독》등 학과목을 맡아 강의하면서《문예의 전형을 론함》, 《형상을 론함》, 《단편소설의 인물형상》, 《전형화를 론함》, 《김창걸의 단편소설을 론함》등 우수한 론문과  문학평론 및 《조선족사화(朝鮮族史話)》수십 편을 발표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연변대학교에서 처음 조문으로 편찬한《문학개론》의 제3, 4, 5장의 집필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 선생은 또 중국의 고전명작《홍루몽》제16회부터 20회까지, 제61회부터 80회까지 무려 46만자에 달하는 번역임무를 완수하였고 무려 52만자에 달하는《수호전》의 번역, 수정임무도 훌륭히 완성하였습니다. 선생은 1983년 부교수로 승진하였고 1987년 8월 정년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학자의 인생에는 정년이 없는 법입니다. 선생은 정년을 한 후《소설창작론》, 소설집《우물집》등 여러 편의 저서를 출판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장장 42만자에 달하는《연변대학교 조문학부 사――겨레의 넋을 지켜》는 선생의 역작이요, 우리 조문학부의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작입니다. 이 조문학부사는 초창기, 성장기, 발전시기, 동란시기, 새시기 등 5개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사(史)적인 맥락에 대표적인 동문(同門)들의 재미있는 인물 전기나 에피소드를 재치있게 엮는 방법으로 조문학부 50년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귀중한 문헌적 가치, 구순한 이야기와 유려한 문체로 하여 조문학부 후학들과 학생들의 필독서로 영원히 읽혀질 것입니다.

 현룡순 선생, 오늘 우리는 선생의 유상을 우러르며 한 아름다운 교육자의 고매한 넋을 되새겨봅니다. 선생은 오척단신(五尺短身)으로 체구는 작았지만 흉금은 바다처럼 넓었습니다. 사업을 위해서는 그 어떤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들과도 따뜻하게 손을 잡고 일할줄 알았고, 말수가 적고 말씀은 어눌한 편이였지만 연변대학교를 대표하는 문장가였습니다. 선생은 큰 벼슬은 살지 않았지만 그 어느 부서에서든지 겸허한 자세로 군말 없이 인민의 충복으로 성심성의로 일했습니다. 또한 선생은 언제 어디서나 학자의 신조를 지키면서 열심히 학문을 연찬했기에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연변대학교의 유능한 행정가요, 저명한 교수로 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선생은 연변대학교를 불같이 사랑했고 연변대학교 조문학부를 위해 모든 정열과 재능을 다 바쳤습니다. 우리는 이 시각에도 허름한 자전거를 타고 덜커덩거리면서 동료, 제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조사를 하고 면담을 하고 불철주야 붓을 달리던 선생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이제 선생은 갔으나 선생이 남긴 고매한 인격과 빛나는 업적은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될 것이며 우리 조문학부 내지 조선한국학학원 발전의 귀중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선생이 가꾸어놓은 터전에서 선생의 뜻을 받들고 조문학부 내지 조선한국학학원을 명실공이 국가중점학과로 만들기 위해, 우리민족의 말과 글을 비롯한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반석 우에 놓기 위해 대를 이어 노력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현룡순 선생의 유가족에게 깊은 조의(弔意)를 표하면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현룡순 선생,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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