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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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년고생은 금 주고도 못 산다
2011년 04월 13일 16시 31분  조회:1549  추천:26  작성자: 김호웅

 

초년고생은 금 주고도 못 산다

 


                                              김 호 웅

 


   

콧물이 흘러내려 동태국도 못 먹고

 


  1970년 1월 그해 내 나이 17살이었다. 중학교에 들어와 1년도 공부하지 못하고 허울 좋은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가게 되였다. 2년 전 큰형이 대학을 졸업하고 흑룡강 북안현에 있는 군대농장으로 갔고 둘째 형은 고급중학을 채 졸업을 하지 못하고 돈화현 대산주자에 가있었으며 셋째형은 초급중학 3학년을 졸업하고 연집공사 태암촌에 가있었다.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간다는게 실은 무서운 고생을 하러 가는것임을 나는 형들의 전례를 통해 벌써 알고있었다.

  둘째형이 돈화로 갈 때 담임선생님께서 집집이 돌아다니면서 학부모들을 동원하고 위안을 했다. 그이는 우리 부모님을 앉혀놓고 돈화현 대산주자를 선경처럼 이야기했다.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대산주자 아주머니들은 아침에 일어나 남편에게 이렇게 묻는 답니다. ‘오늘 아침엔 꿩고기 먹겠수? 노루고기 먹겠수?’ 남편이 ‘거 좀 시원하게 꿩고기 국을 먹고 싶구만.’ 하면 아주머니는 일단 아궁이에 도목나무를 사려놓고 솥에 물을 씽씽 끓인 다음 문을 활짝 열어놓는 답니다. 그러면 꿩들이 훨훨 날아와 죽창(竹槍)처럼 솥에 꽂이지 뭡니까? 안성맞춤으로 끓는 물에 튀를 해서 납죽납죽 썬 무에 고추장까지 듬뿍 넣어 끓이면 시원한 꿩고기 국이 되는거지요. 간혹 ‘거 오늘은 눈이 많이 와서 아무 일도 못하겠구만. 술이나 한 잔 하게 노루고기로 회나 치지.’ 하면 아주머니는 빨래 방치를 들고 절구통 같은 엉덩이를 휘두르면서 문밖에 나갑니다. 노루가 대여섯 마리나 서서 ‘나 때려 잡수.’ 하고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아주머니는 기중 살집이 좋은 놈을 보고 ‘에끼 이놈아, 오늘 우리 영감 술안주나 되어라!’ 하고 빨래 방치로 탁! 하고 노루의 정수리를 친답니다. 거 노루고기로 만든 회, 입안에서 살살 녹는게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르지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게 다 새빨간 거짓말인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식들을 차례로 농촌에 보내고 말았다.

  하지만 북안현 군대농장에 간 큰형에게서는 보이라에 불을 때다가 물통을 엎질러 발등을 데웠다는 편지가 날아왔고 둘째형이 가있는 돈화현 대산주자라는 마을은 꿩고기, 노루고기는 고사하고 일 년 삼백육십오일 돼지고기 한 칼 먹기 어려웠다고 한다. 워낙 수질이 나쁜 동네라 곱사등이가 많고 마을사람들 모두 참나무 옹이처럼 손가락 마디가 굵고 비틀어졌다. 둘째 형도 목에 창이 생기고 손목과 무릎관절이 저려서 생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젠 넷째인 내가 농촌에 갈 차례인데 우리 어머니는 제발 셋째형네 집체호에 가라고 비난사정을 했다.

  “명년에는 다섯째도 농촌에 가야 할 터인데 너희 형제들이 산지사방에 널려있으니까 아버지가 힘들단다. 그리구 셋째가 가있는 태암촌은 집하고 거리도 가깝지 않느냐? 너희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셋째형네 집체호에 가거라.”

  그때 우리 아버지는 연길시운수공사 8급공이라 88원 정도 월급을 받았으니 많이 받는 폭이었지만 여기저기 널려있는 자식들에게 용돈을 쪼개서 보내고 나면 그야말로 입에 풀 칠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농촌에 간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삯바느질에, 이삭주이에, 자갈치기에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나는 우리 팔남매를 키우느라 밤낮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는 어머니의 당부를 물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학급 친구들은 모두 연길현 이란공사 명랑촌에 갔지만 나는 닭 무리에 오리 끼이듯이 셋째형네 집체호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불짐을 메고 30리 길을 걸어 어슬녘에 태암 4대 집체호에 들어서니 소한추위라 개털모자에는 새하얗게 서리가 끼었지만 잔등은 물씬물씬 김이 서려 올랐다. 남성들은 모두 민공(民工)에 뽑혀 용정 쪽 공사장에 가 있었고 까투리 같은 여성들만 집체호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들은 내가 온다는 전갈을 받고 동태국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설대목이라 생산대에서 한 사람 당 명태 두 마리씩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그때 취사담당은 주련순이라는 시원하게 생긴 여성이었는데 서둘러 밥상을 차려서 내놓았다. 누님뻘 되는 여성 네댓이 부뚜막에 앉아서 마치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듯이 나를 건너다보며 귓속말로 소곤소곤했다.

  “아이구, 형보다 더 잘 생겼구나. 이목구비가 수려한 게 <춘향전>에 나오는 이도령이 따로 없구나.”

  “이 애가 김치국부터 마시는 것 보지. 동생뻘 되는 애를 두고 서방 비위를 하면 어떡허니?”

  나는 귀뿌리가 화끈 달아올랐지만 제법 점잖게 앉아 밥상을 받고 시원한 동태찌개부터 한 숟가락 떠먹었다. 맵싸한 게 별미였다.

  헌데 한겨울 30리 길을 걸어 문득 집안에 들어와 밥상을 차지하고 앉으니 얼었던 몸이 봄눈 녹듯 풀리면서 애꿎은 콧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그걸 들이키자니 망신을 할 것 같았고 “잠간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바깥에 나가 코를 풀고 다시 들어와 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꺽 먹어버려야지 하고 숟가락목이 부러지게 밥을 떠먹었더니 이젠 주체할 수 없이 콧물이 쏟아져 내렸다.

  “금방 밥을 먹고 왔더니 배가 불러서…”

  하고 나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부랴부랴 바깥으로 나왔다.

  “힝!” 하고 코를 풀고 나니 숨통이 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새뽀얀 기름이 동동 뜨는 동태찌개가 눈앞에 언뜻거렸고 다시 들어가 그놈의 동태찌개에 밥을 말아 후닥닥 먹고 싶었지만 이젠 다 행차 뒤 나팔이었다.

  사춘기 소년이라 서푼 어치도 가지 않는 체면 때문에 그 맛있는 동태찌개를 다 먹지 못한 게 지금도 한이 된다. 그리고 이런 사춘기 소년소녀들을 지식청년이라고 농촌에 쫓아 보낸 “모우”라는 어르신이 원망스럽다.

 


  구질구질 비는 오고 하도 배가 출출해서 

 


 태암촌은 연길에서 연집하를 따라 북쪽으로 20리 정도 올라가다가 남계고개를 넘거나 금성바위를 에돌아가면 나타나는 마을인데 연집하 기슭에 널어놓은 그물같은 동네다. 평봉산이 둘러앉아 새둥지처럼 포근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워낙 물이 적어 논을 풀지 못하고 밭농사만 했다. 사철 샛노란 조밥에 싯누런 된장만 먹어야 하는데 그놈의 조밥이란 재채기만 해도 숟가락에 뜬 밥이 산탄처럼 사처로 날려갔다. 농촌에 살 바에는 도목나무에 쌀밥을 먹는 동네로 가야 할 터인데 허구한 날 강마른 조밥덩이만 먹어야 하니 어머니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황차 고기 등속은 고사하고 콩기름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으니 이건 그야말로 속에 털이 날 지경이였다. 가끔 닭고기나 두부찌개에 술 한 잔 할 수 있는것은 생산대의 우차를 모는 상농꾼들이었다. 집집마다 초가을에 태암촌 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석인골에 가서 땔나무를 해놓으면 겨울에 그걸 우차에 실어왔다. 한 해 땔감을 장만하는 일이라 웬만한 집에서는 닭 한 마리 잡거나 두부를 앗아서 우차몰이들을 대접했다. 그들이 술 한 잔 대접 받고 개선장군처럼 불콰한 얼굴을 해가지고 흥얼거릴 때면 참으로 입안에 군침이 돌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늦가을이면 우리 집체호 청년들에게는 간혹 우차를 몰고 연길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황연(黃煙) 토리들을 우차에 싣고 연길 역 뒤에 있는 황연 수매소(收買所)에 바치는 일인데 그 날만은 맛있는 음식을 배가 터지게 먹을 수가 있었다. 공가의 일로 다녀오는지라 하루 수당 2원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 이상 더 쓸 경우에는 빚을 내는 격이 되여 년말에 갚아야 했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우리는 허리띠를 풀고 먹어주었다.

  이슬이 내리는 새벽에 태암촌을 떠나 아침에 금성촌이나 용연촌에 들려 닭똥과자 한 봉지씩 사서 와작와작 씹어 먹는다. 연길에 도착해서는 곧장 회족식당에 들린다. 지금의 성보호텔 자리인데 이른 아침부터 밀가루튀김(油條)에 콩물을 팔았다. 지금은 두 가락도 먹지 못하지만 그땐 한 놈이 일곱 가락, 지어는 열 가락씩 먹었다. 어느새 부처님처럼 두둑하게 솟아오른 배를 두드리면서 황연 수매소에 가서 줄을 섰다가 황연 토리들을 부려놓고 근을 달아 창고에 가려놓고 나면 뱃가죽은 다시 등에 가서 붙는다.

  늦은 점심으로 렬군속식당에 들려 류육편(溜肉片), 지삼선(地三鮮) 같은 안주를 시켜놓고 맥주 대여섯 사발을 마시고 나서 뒷골목에 가서 아무데나 실실 소변을 본다. 다시 식당에 들어와 마파람에 게 눈 감듯이 한 놈이 국수 두 사발씩 먹어버린다. 지금은 국수 오리를 가위로 잘라서 홀짝홀짝 먹는 게 법이지만 그 때는 황소가 깔을 감아먹듯이 두어 젓가락에 후루룩 후루룩 마셔버렸다. 그때 맥주 한 사발에 20전, 국수 한 사발에 38전인걸로 기억하고있다.

  다시 빈 우차를 몰고 번잡한 거리를 지나 시골길에 들어서면 아예 우차에 올라가 사지를 던지고 대자(大字)로 눕는다. 소는 영물인지라 저절로 우차를 끌고 태암촌까지 덜커덩덜커덩 찾아간다. 우차에 실려 드렁드렁 코를 골며 돌아갈 때만은 그런 상팔자가 세상에 없는것 같았다.

  그때는 터밭에서 나는 감자 한 알, 호박 하나도 장에 내다가 팔수 없었는지라 태암촌 촌민들에게는 단 돈 1원이 그리웠다. 공소사(供銷社)에 가서 소금이나 미역 따위를 사도 외상 거래요, 술 한 근 받아 와도 외상 놀음이었다. 하지만 마을의 소문난 술고래들에게는 외상으로 술을 주지 않았다. 그네들은 한해가 다 저물어도 시치미를 뚝 따고 외상 빚을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래서 신용을 잃은 마을의 술고래들은 촌 위생소에서 목정(木精)을 훔쳐다가 물에 타서 마시기도 했고 집체호 청년들의 보잘것 없는 주머니를 털어 술을 마시기도 했다.

  어느 날 비가 구질구질 오는데 김은식 대장이 슬그머니 집체호 문을 떼고 들어와 빙글빙글 웃으면서 잠깐 보자고 했다. 문밖에 나가자 김대장은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 가듯이 자기 우산 밑에 나를 잡아넣으면서

  “자 가자구! 오늘 아침 산토끼 한 마리를 잡았지. 햇감자를 넣고 푹 끓이고 풋고추에 깻잎까지 썰어 듬뿍 넣었더니 천하별미야. 헌데 술이 없거든. 공소사에 가서 술 한 병 사오면 자네도 끼워주지.”

  “이 장마철에 무슨 놈의 산토끼를 잡았다고 그래요.”

  “아따 진짜라니까. 지금 다 끓여놓고 장임송 대장도 기다리고 있어.”

  실은 김은식도, 장임송도 다 현임 대장은 아니었다. 30호 되나마나한 마을에 한두 해씩 돌아가면서 생산대장 노릇을 해오는지라 생산대장을 아니 지낸 장정이 없었다. 그래서 모두 장대장이 아니면 김대장, 김대장이 아니면 박대장으로 통했다.      김은식 대장은 워낙 사람이 실속이 없고 얼렁뚱땅 남의 등을 쳐 먹기를 잘하는지라 좀 믿음성이 없었지만 말수 적고 듬직한 장임송 대장까지 산토끼국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나는 한 달음에 공소사에 가서 술 두 병을 받아왔다. 장정이 셋이니 술 한 병으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것 같아서 큰맘을 먹고 술 두병을 받아왔다.

  그때 흑룡강 북안에 가있는 큰형은 월급 45원을 받았는데 달마다 산지사방에 널려있는 동생들에게 5원씩 부쳐 보냈었다. 김은식 대장은 동네 어른들의 생일날까지 꼬박꼬박 기억해주었다가 술 한 잔씩 얻어먹는 위인이라 아마도 내게 돈 봉투가 날아든걸 알고 있은 모양이었다.

  산토끼고기는 처음 먹어보는데 역시 별미였다. 고기가 졸깃졸깃 해서 육미가 있었고 푹 익은 햇감자가 더 맛있었다. 술 두 병을 다 마시고 구수한 국물에 밥까지 비벼서 배가 터지게 먹었다. 그야말로 뜻 밖에 생일을 쇤 폭이 되였다.

  헌데 이튿날 우사(牛舍)에 나갔더니 명철이 어머니가 동네 아낙들과 둘러서서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 웃다 말고 나를 뱅글뱅글 건너다보더니

  “어제 산토끼 추렴을 잘 했겠지.”

  “예, 난생 처음 산토끼 고기를 먹어보았는데 별미입디다.”

  “아니, 집체호 젊은이들도 오리발을 내밀긴가. 우리 고양이를 내놓아요. 남이 8년이나 기른 가족 같은 고양이를 잡아다 술안주를 하다니 이제 천벌을 받을 거야!”

  하고 길길이 뛰었다.

  일 년 사철 고기 한 점 먹어보지 못했던 그 시절의 농부들, 기름진 안주에 술 한 잔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남의 툇마루에 누워서 가물가물 자고있는 고양이를 잡아다 술안주를 했으랴. 고양이를 욕보이면 천벌을 받는다는 속설은 있지만, 장임송 대장은 천수를 다 누리고 몇 해 전에 천당에 갔고 김은식 대장과 나는 이 날 이때까지 천벌을 받지 않고 소처럼 든든하게 잘 지내고 있다. 백성은 밥을 하늘(民以食爲天)로 생각하는 법, 굶주린 백성이 고양이 한 마리 잡아먹었다고 하늘이 어찌 벌을 내릴 수 있으랴.     

    

   아침마다 종을 치는 대장 노릇도 해보고

 


   1972년 봄 나는 본의 아니게 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사원들이 만장일치로 선출을 했으니 오늘의 정치용어로 말하면 민선 대통령은 아니고 민선 대장(民選隊長)이 된 셈이다. 하지만 나는 이십사절기도(二十四節氣)도 모르는 놈이요, 밭갈이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풋내기 농사꾼이었다. 사원대회 때마다 신문을 읽고 모주석의 저작을 학습시킨 것밖에 없는데 어떻게 30여 호 촌민들의 생계를 맡을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신범룡 정치대장은 사원들의 간절한 요구이고 노농들이 옆에서 도와 줄터이니 한번 대담하게 해보라고 했다.

  아무리 대담하게 한다 한들 농사일에 숙맥을 가리지 못하는 내가 방정하게 대장노릇을 할리 만무했다. 아침에 신범룡 정치대장과 잠간 상론을 하고 나서 우물가에 서있는 비술나무 가지에 걸어놓은 종을 두드리는 게 내 업이었다. 어디서 굴러다니던 일제 포탄 깍지를 거꾸로 달아맸는데 소리는 꽤나 맑지고 좋았다. 하지만 사원들은 한식경이나 지나서야 기지개를 켜고 껄껄 트림을 하면서 가물에 콩 나듯이 나올 뿐이었다. 신범룡 정치대장과 상론한 대로 일을 포치하고 한 떼의 인마를 이끌고 기음을 매러 콩밭에 들어서면 시시껄렁한 육담만 늘어놓는 놈, “아이고 배야!” 하고 구실을 대고 꽁무니를 빼는 놈, 먹다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밤낮 먹을 소리만 하는 놈, 도무지 일축이 나지 않았다. 밤낮 벌떼처럼 쫓아다니면서 기음을 맸지만 밭마다 풀이 성해 호랑이가 새끼를 칠 지경이었다. 남의 일은 오뉴월에도 손발이 시리다고 호미 날을 땅에 깊숙이 박지 않고 슬쩍슬쩍 땅거죽만 긁었던것이다.  

  등소평의 시대를 겪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 일이지만, 자고로 농자유기전(農者有其田)이라고 농사꾼은 자기 땅을 갖는 게 소원이요, 자기 땅에서 일할 때라야 힘이 나는 법이다. 해방 후 토지개혁을 해서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준 것은 참으로 잘 한 일이나 4, 5년 만에 호조조요, 합작사요, 인민공사요 해서 땅을 집단소유, 국가소유로 만들었으니 땅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되는 농민들의 원초적인 열정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나라의 기본 제도가 잘못 된 줄은 알 리 없었다. 내 인덕과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줄 알고 그야말로 솔선수범으로 뼈가 빠지게 일했고, 그래도 안 되면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사원들을 무섭게 닦아 세우기도 했다.

  30호의 생계를 이어가자면 무슨 방책이라도 내야 했다. 마침 자형이 연길시운수공사에서 트럭 기사로 일했는데 석인골에서 채벌한 잡목(雜木)을 실어가고 있었다. 현지에서 채벌한 잡목을 5, 6 미터씩 잘라서 무지무지 쌓아두었는데 그걸 트럭에 실어 연길역 구내에 가져다 부리는 작업이다. 아마도 그 잡목은 산해관 이남 평원지대의 탄광에 실려가 침목으로 쓰이는것 같았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우리 촌민들은 내 자형을 앞세우고 술병을 들고 가서 요행 일감을 맡아오게 되였던것이다. 

  일은 보통 밤중에 하게 되었다. 10여 대의 트럭에 잡목을 실은 후 팔목만큼 실한 밧줄로 든든하게 동이고 연길 쪽으로 달려가는데 우리 일꾼들은 산더미같은 잡목우에 앉아 밧줄을 잡고 위태롭게 가야 했다. 트럭이 웅덩이를 만나 덜컹 할 때 밧줄을 놓고 있다가는 허망 길바닥에 굴러 떨어져서 어깨가 박산이 나거나 엉덩이가 부수어질수 있었다.

  두툼하게 솜옷을 입었지만 한겨울이라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막을 길이 없었다. 우리는 아예 석인 공소사에서 빈 박스 하나씩 구해가지고 그 안에 머리를 틀어박고 칼바람을 막았다. 하지만 아랫도리는 와들와들 떨리다 못해 거의 동태가 되었다. 연길역에 가서 잡목을 부리고 하남가에 자리를 잡을 전셋집을 찾아 들어가면 뜨끈한 우거지 장국에 밥 한 그릇이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언 몸을 녹이려고 술부터 찾았다. 그때 배운 술을 나는 아직도 달게 마시고있다.

  이렇게 뼈가 부수어지게 일했지만 내가 대장 노릇을 한 그 해 태암 4대는 한 공(工)에 마이너스 16전이었다. 쉽게 말하면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 일한 자가 오히려 빚을 지는 폭이 되였다. 나는 대장 공수까지 받아 4대에서 최고 공수를 기록했지만 오히려 210원을 빚지고 말았다. 그 해 말, 가슴에 붉은 꽃을 달고 군에 입대하는데 신범룡 정치대장은 촌민들을 데리고 연집향 공사마을까지 와서 돈 30원을 내 손에 쥐어주면서

  “사원대회의 토론과 합의를 거쳐 김대장이 진 빚은 생산대에서 안기로 했소. 이건 사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부조금인데 군에 가서 보태 쓰오.”

  하고 허허 웃는데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서러움이 북받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 순진한 백성들을, 이 정직한 민초들을 배불리 먹이고 등 따뜻하게 입히지 못한 게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세월이 하 수상해 꾀를 부리고 능청을 떨지만 마음바탕은 더없이 순박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닌가!       

          

   민병련장의 신세는 언제 갚아야 하나

 


   태암촌에서의 3년 생활, 한 어르신의 이야기를 마저 하지 않고는 이 글을 끝맺을수 없다.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름은 윤두천, 그때 태암대대 민병련장을 맡아했었다. 윤두천 민병련장이 아니었더라면 셋째형과 나는 군에 갈 수 없었을 것이고 우리 형제에게는 오늘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 시절 농촌의 탈출구는 추천을 받고 공농병학원으로 대학에 가는 길과 군에 가는 길밖에 없었다. 가끔 도시의 로동자로 추천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전반 나라경제가 파탄의 변두리를 헤매고 있을 때라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

  태암촌에는 상해에서 온 지식청년들도 수십 명 있었는데 맘씨 고운 촌민들과 촌간부들은 그들만을 추려서 공농병학원으로 대학에 보냈다. 그래서 우리 본토박이 지식청년으로 놓고 말하면 농촌을 벗어나 출세하는 길은 군에 가는 길밖에 없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차례지는 법, 1971년 연변군분구에서 특수병종(特特兵種)을 모집하게 되였다. 특수병종이라 해야 축구, 농구, 배구 같은 운동을 잘 하는 청년들을 물색해 뽑아 가는데 그중에 번역인재도 포함되여 있었다. 셋째형은 워낙 총기가 좋고 부지런해서 소학교, 중학교를 모두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농촌에 간 후에도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으며 독학을 해서 태암촌의 박사로 불렸다. 촌민들의 편지를 대필해주는 일은 더 말할 나위 없고 태암촌에서 한어로 써야 하는 보고문이나 공문은 거의 도맡아 했다. 셋째형 앞에서는 상해에서 온 청년들도 무색해졌다. 번역인재를 물색한다니 윤두천 민병련장은 덮어놓고 셋째형을 추천했다.

  그 무렵 진보도반격전이 일어나면서 중소 관계가 긴장했고 급작스럽게 특수병종을 뽑았으므로 셋째형은 하루아침에 누운 소 타기로 군에 들어갈수 있었다.

  세째형은 연길무장부에서 군복을 타가지고 집에 와서 바꾸어 입고 갔는데 부모님과 형제들이 배웅을 하고 돌아와 본즉 구들에 개미 같은 벌레가 종횡무진으로 기여다니고 있었다.

  “오동지섣달에 이게 웬 개미냐?”

  하고 어머니가 한 놈 잡아보니 그건 개미가 아니라 보리알만한 이였다. 구들이 따뜻하니까 셋째형이 벗어놓은 옷이며 내복이며 팬티에서 이들이 얼씨구 좋다 하고 벌벌 기어 나왔던것이다.

  우리 형제들이 바삐 빗자루를 들고 이를 쓸어 모으는데 어머니는 셋째형의 옷을 그러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공사장에서 목욕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밤이나 낮이나 단벌옷을 입고 일하고 뒹굴었으니 어찌 이가 득실거리지 않으랴. 어쨌거나 나는 형이 두고 간 옷이며 신발을 물려받을수 있어 군에 가기까지는 여벌이 생겨서 좋았다.  

  각설하고 1972년 말 내가 군에 들어갈 때는 사정이 달랐다. 2년 남짓이 농촌에 있었으니 군에 갈 자격은 되였지만 아버지의 역사문제가 가슴에 걸렸다. 황차 특수병종이 아니라 보통병종(普通兵種)이라 심사는 늦장을 부리며 까다로운 절차를 다 받았다. “유일성분론”이 살판을 칠 때라 뭐니뭐니해도 출신성분이 좋아야 했고 사돈의 팔촌까지 청백해야 하였다.

  그런데 평양 출신인 우리 아버지는 18살 젊은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중국 봉천(지금의 심양)에 들어와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무진 고생을 했는데, 자동차 운전기술을 배우기 위해 얼마간 위만주국 자동차부대에 들어가 있은 적 있었다. 그런데 해방 후 이게 큰 문젯거리로 되었다. 아버지는 해방되자마자 자초지종을 조직에 교대했고 일반역사문제로 락착이 되였지만 여러 가지로 괴로움을 당했고 우리 자식들도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에 들기도 어려웠다. 

  나는 입오신청서(入伍申請書)를 받아놓고 아버지의 역사문제를 적을가 말가 반나절이나 망설였다. 일단 적어놓기만 하면 군에 갈 수 없을것은 불 보듯 뻔했다. 셋째형이 탈 없이 군에 들어간걸 보면 아무래도 윤두천 민병련장을 찾아가면 뾰족한 수가 생길것 같았다.

  이튿날 새벽에 나는 마을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윤두천 민병련장네 댁을 찾았다. 찾아온 사연을 말씀드리고 속이 한줌만 해서 하회를 기다린즉 윤두천 민병련장은 굵직하게 담배를 말아 입에 물고 나서 득 성냥가치를 그어 불을 붙이더니

  “군에 가는 게 어디 부귀영화를 누리려 가는거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에 가는거지. 말하자면 젊은 피를 뿌리려 가는건데 괜히 묵어 빠진 부모님 일까지 쓸건 뭐요? 잘 왔소. 어서 아침이나 먹기우.”

  하고 껄껄 웃었다. 내가 마지못해 밥상에 앉은즉 윤두천 민병련장은 서둘러 안해더러 계란을 지지게 하고 바깥에 나가더니 움에 들어가 김이 문문 서리는 김치를 꺼내왔다. 그때 윤두천 민병련장의 두 아들애는 밥상에 매달려 “삼촌, 삼촌” 하고 재롱을 부렸는데 그야말로 툭 털면 먼지밖에 없었던 나는 단 돈 1원 쥐어주지 못했다.

  군에서 돌아온 후 태암촌에 인사 차 찾아갔지만 윤두천 민병련장은 보이지 않았다. 연집공사에 가서 삼림관리소를 맡아본다고 누군가 알려주었다. 아무 때든지 만나면 큰절을 올리고 잘 대접을 해야지 하고 나는 별렀다. 그 후 태암촌 사람들은 이런저런 일로 자주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윤두천 민병련장은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튼 윤두천 민병련장의 깊은 궁량과 용단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두 형제는 초년에 된서리를 맞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이 지면으로나마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언간 3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태암촌의 종소리는 오늘도 내 귓전에 뎅겅뎅겅 들리는것 같고 이미 작고하신 장임송 대장, 술고래 김은식 대장, 그리고 우리 형제의 오늘이 있게 한 윤두천 민병련장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집체호의 큰형들인 원수, 철산 형과 친구 동화와도 오래 동안 만나보지 못했다. 동태국을 끓여주었던 주련순 누님도 보고 싶다. 우리 모두 허황한 시대를 얼마나 용케 헤쳐 나왔는가.

  잘은 모르겠지만, “모우”라는 어르신은 자기의 정치적 적수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수천수만 젊은 세대들의 끓는 피와 열정을 빌어 10년 동안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을 강행했고 그 목적을 달성하자 그야말로 토사구팽 격으로 홍위병들에게 “지식청년”이라는 듣기 좋은 이름을 주고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해 그들을 농촌에 보냈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10년 “문화대혁명”으로 황폐화된 국민경제의 붕괴, 이로 말미암은 수천수만 무직자들의 원성을 갈앉히기 위해 그들을 농촌으로 보냈다고 할 수 있겠다.

  “모우”라는 어르신의 잘못으로 수천수만의 젊은이들, 특히 나와 같이 뼈도 굳지 않은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농촌에서 갖은 고생을 겪었지만, 초년고생은 금 주고도 못 산다고 그것은 분명 우리 인생의 귀중한 경험이 되었고 자본이 되었다. 그 삼간초옥에서 가졌던 아름다운 꿈과 그 험난했던 시절에 키운 쇠쪽같은 의지가 있었기에 우리 모두의 오늘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나 인생은 순풍에 돛단 격이 될수 없는 법, 오직 험난한 파도를 헤가르고 나가야만 행복의 피안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20일, 연변대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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