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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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잡은 재상
2011년 04월 19일 10시 41분  조회:1605  추천:41  작성자: 김호웅

 
사다리 잡은 재상


김호웅

  요즘 여러 종류의 문학상 심사에도 참가하고 화려한 문학비 제막식이나 문학상 시상식에도 참가하고 있으나 마치 진수성찬을 대접받다가 가시를 삼킨 듯 찜찜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현상금을 내는 후원자는 후원자대로 입김이 세고 주최 측은 주최 측 대로 생색을 내고 지어는 큰 고기는 잡아 자기 망태기에 넣는 판이다. 결국 열심히 일한 작가, 예술인들에게는 국물도 차례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라파엘로의 일화를 떠올리면서 쓴 웃음을 짓게 된다.

    라파엘로(1483~1520)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빛낸 3대 명화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이탈리아 궁정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8세 때부터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불행하게도 어려서 부모를 잃은 후에는 큰아버지의 보호를 받으면서 비타, 페루지노에게서 그들의 감미로운 화풍을 배웠다. 특히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작품을 통해 그들의 화면구성, 명암법을 배운 동시에 동적 및 지적 요소를 섭취함으로써 완전히 낡은 화풍에서 벗어나 라파엘로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수립했다. 1508년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오 2세의 초청을 받고  7, 8년간 로마 최초의 대작인 바티칸 궁전 서명실(署名室) 장식에 참여해 천정화를 그린 후 사면의 벽에 《성테의 논의》, 《아테네 학당》, 《삼덕상(三德像)》등 대작을 그렸다. 1514년부터는 성 베드로 성당 건축주임의 중직에다가 로마시 고적 발굴 및 부흥계획을 추진하는 주임이 되어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으나 아쉽게도 37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그러나 그는 짧은 생애에도 많은 걸작을 남겼으며 큰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명민하고 온후한 성품에다가 대단한 미남이여서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고 선배의 업적을 집대성하여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적인 양식을 완성하였다.

    아마도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전 서명실의 천정화를 그릴 때의 일인 것 같다.      라파엘로가 위태롭게도 높다란 사다리에 올라 천정화(天井畫)를 그리고 있는데 율리오 2세가 국무성 원장과 함께 그 곳을 지나갔다. 국무성은 교황의 수석보좌기관으로서 교황비서국이라고도 하는데 교황청 기구가운데서 가장 상위에 위치하여 교황청 내외의 주요업무를 총괄하고 각 기구 사이의 교량 역할도 하는 부서이다. 그런즉 국무성 원장이란 오늘의 내무부장과 외무부장을 겸한 자리이다. 일국의  재상(宰相)쯤 되는 높은 벼슬이라 하겠다.

   라파엘로는 잠깐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눈인사를 할 뿐인데 교황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국무성 원장더러 사다리를 잡으라고 지시했다. 라파엘로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국무성 원장은 민망한 눈빛으로 교황을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미천한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어른더러 사다리를 잡고 있으라니요?

    이에 교황은 빙그레 웃으면서 한마디 던졌다.

   《사다리를 잡고 있으라면 잡을 것이지 왜 꾸물거리는 거요. 국무성 원장은 임자가 아니더라도 할 사람이 많지만 이 천정화는 라파엘로가 아니면 그릴 사람이 없단 말이오.》    

    국무성 원장이 울며 겨자 먹기로 라파엘로가 타고 앉은 사다리를 잡았음은 더 말할 것 없다. 누구의 명(命)이라고 감히 거역하랴. 그렇지만 상상을 해 보시라, 형벌을 받고 있는 노예처럼 일국의 재상이 사다리를 잡고 진땀을 흘리는 장면을!

   물론 국무성 원장이란 자는 그 후로부터는 감히 예술가들을 업신여기지 못하고 그들의 착실한 시중꾼으로 일했을 것이다. 아무튼 교황으로부터 고관대작에 이르기까지 예술을 숭상하고 예술가를 예우(禮遇)할 줄 알았기에 르네상스, 즉 예술의 황금기를 맞았으리라 생각해 본다.

    하지만 요즘 우리 문예를 관장하는《재상》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상, 중, 하로 나누어 본다.

    사다리는 잡고 있되 감 놓아라, 배놓아라 잔소리가 많은 것은 그래도 상에 속한다 하겠다. 책임성이 있고 천진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다리를 잡기는 고사하고 아예 라파엘로를 밀어내고 부득부득 사다리에 오르는 것은 그래도 중에 속한다 하겠다. 무얼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그 열정 또한 가상(嘉尙)하기 때문이다.

    하, 즉 꼴지는 사다리는 잡고 있되 일단 천정화가 완성되면 모두 사다리를 잡은 자기 자신의 공로로 치부하고 온갖 지면을 통해 라파엘로 이상으로 떠벌려 자랑을 한다. 그리고 제막식이나 시상식 잔치에 가보면 “라파엘로”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사다리를 잡고 있던 “재상”들이 오히려 생화묶음을 안고 즐겁게 웃고 있다. 이는 엉큼한 도둑놈의 짓거리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들이야말로 뭇새들의   예쁜 깃을 훔쳐다가 자기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선 이솝 우화의 까마귀를  연상케 한다.   

    이런 얌치없는 족속들이 판을 치는 한 우리 문예는 희망이 없다고 본다. 그리고 정직하고 재능 있는 작가, 예술인들의 슬픔과 비애는 증폭될 뿐이다. 

 

 

 

                                ― 2005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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