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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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 물장수”― 동훈 선생
2011년 04월 21일 15시 17분  조회:2294  추천:19  작성자: 김호웅

 
“북청 물장수”― 동훈 선생

 

 김호웅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두터운 정치서적이나 철학저서에서보다 한 인간과의 만남에서 더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경우가 있다. 1990년대 초 일본에서 1년 반, 1995년대 중반 한국에서 1년 간 동훈(董勳) 선생의 슬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던가?

 

   달이 가고 해가 바뀔수록 더더욱 그리운 그 얼굴, 그 목소리! 오늘도 선생님네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아름다운 추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1. “북청 물장수”의 이야기

  

   선생을 처음 만나 뵌 것은 1989년 12월 중순, 일본 와세다대학 정문 앞에 있는 자그마한 라면집에서였다. 이른 정심 시간이라 아직 손님은 별로 없는데 안쪽에 앉아있던 50대 중반의 신사가 조용히 일어나며 반겨주었다. 중키의 다부진 체구, 이마는 약간 벗어졌는데 안경 너머로 한 쌍의 근엄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매가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판룡(鄭判龍) 교수의 사진첩에서 뵌 얼굴이었다.

 

   선생은 밥상을 사이 두고 좌정하자 우리 대학교의 박문일(朴文一), 정판룡, 주홍성(朱紅星) 등 교수들의 안부를 하나하나 자상히 물어왔다. 표준적인 서울말씨였으나 함경도 억양이 얼마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선생은 여러 해 객지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문득 지나가는 고향사람을 만난 듯한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은 1984년 8월 말 우연히 연변을 다녀간 후 우리 연변대학 중진 교수들과는 깊은 교분을 갖고 있었고 중국에 우리 민족의 대학을 꾸리고 있는 일이 너무나 대견해 젊고 유망한 학자들을 일본에 데려다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공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김군, 부모님은 다 건재하신가?”

   “예, 두 분 다 계십니다.”

   “아버님의 고향은 어디지?”


   “저희 아버지는 평남 출신이고 어머니는 함경도 출신이라고 하던데요.”

   “함경도? 난 함남 북청사람일세.”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함경남도 북청(北靑)이라면 지금은 북한의 사과 산지로 유명하지만 옛날에는 ‘북청물장수’의 고향으로 유명한 고장이 아닙니까? 옛날 북청사람들은 약수 길어 팔아서 자식들을 공부시켰다고 하던데요.”

 

   내가 한마디 알은 체를 했더니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허허, 그런 이야기를 북청내기들에게 했다가는 귓뺨을 맞는다구요. 자식만을 공부시킨다면 북청물장수가 아니지. 북청물장수 물 길어 팔아 사촌을 공부시키구 마을 젊은이들을 공부시킨다구 해야 할 것일세…”

 

   후에 선생의 주선으로 북청 출신의 사람들과 많이 사귀고 두루 책자를 보고 알게 된 일이지만 예로부터 북청땅은 교육을 숭상하고 그 자제들이 열심히 공부한 고장으로 소문이 높았다. 조선왕조시대의 유명한 재상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은 “내 만일 북청에 귀양 오지 않았던들 어찌 높은 학문과 고결한 지조를 갖춘 북청선비들과 교유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했고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선생은 가는 곳마다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오는 북청을 돌아보고 “독립된 후 우리나라를 북청과 같은 고을로 만들고싶다”고 술회한바 있다. 그래서 “교육 없이는 북청을 논하지 말라”고들 한다.

 

   북청물장수가 최초로 문헌에 기록된 것은 조선왕조 철종년대(1849-1863)이다. 당시 권세가였던 안동 김씨 김좌근(金左根, 1797-1869)의 서울 저택에 북청 출신의 김서방이 물을 길어댄 일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북청물장수들이 서울에 모여들어 본격적으로 물장수를 하기 시작한 것은 고종년대(1863-1907)부터이다. 1868년 북청군 신창 토성리 출신인 김서근(金瑞根)이라는 사람은 서울 돈화문 앞 단칸방에서 기거하면서 과거를 보려고 서울로 올라오는 고향 선비들의 시중을 들었다. 물을 길어다 밥을 짓고 빨래를 했는데 물은 주로 삼청동 공원 안에 있는 약수터 물을 길어왔다. 부지런하고 인품 좋은 북청사람 김서근은 차차 물지게와 물통을 가지고 이웃 주민들에게도 물을 길어다 주었는데 상수도가 없던 시절이라 그 소문은 이웃으로 번져가 물을 배달해달라는 집들이 불어났다. 그리하여 김서방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고향에 연락하여 친구들을 불러다 물도가(都家)를 만들었다. 이것이 북청물장수의 시작이며 수방도가(水房都家)의 원조(元祖)로 된다.

   수방도가는 점차 서울의 명물로 등장했고 북청물장수들은 물지게로 물을 길어 벌어들인 수입으로 자식들을 서울에 데려다 공부시켰다. 그리고 많은 북청출신의 젊은이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수방도가를 거쳐 갔다. 말하자면 지금의 아르바이트 식으로 잠시 수방도가에 행장을 풀고 물지게를 지고 학자금을 벌었던 것이니 만국충절(萬國忠節) 이준(李儁, 1859-1907)도 1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수방도가를 거쳐 갔었다.

 

   수방도가는 1920년대에 들어와서 수십 개로 불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호 연계를 맺고 서로 협동하여 체계적인 운영을 모색했다. 그 산물이 《북청청우회(北靑靑友會)》인데 이 장학회는 여러 수방도가에서 출자하는 자금을 기금으로 하여 북청군 출신 학생들에게 정기적인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활발하게 뒷바라지를 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집집마다 상수도가 들어가면서 북청물장수도 점차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 권학사상(勸學思想)에 투철한 북청인의 교육열은 식을 줄 모르고 날이 갈수록 열기를 더해 서울에만 중산고등학교, 고명상업고등학교와 같은 10여 개 소의 학교를 설립했고 수많은 인걸들을 길러냈다.

 

   이러한 북청물장수들은 시인 김동환(1901년~미상)은 그의 시「북청 물장수」(1924)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 물을 솨아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北靑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北靑 물장수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최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北靑 물장수        

                                        

   동훈 선생은 함경남도 북청 니곡면(泥谷面) 출신인데 그의 삼형제는 서울에 올라가 하숙을 잡고 공부를 하던 중 “6․25”전쟁이 터져 서울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한다. 선생은 전임 국무총리 이홍구(李洪九) 선생과 동기동창으로 195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1964년부터 1971년까지는『서울신문』, 『경향신문』의 논설위원을 거쳐 1968년부터 1974년까지 대통령비서관(政務, 司正 담당), 1975년부터 1979년까지는 통일원 차관(남북당국회담 대표) 등 정부 고위직에 있다가 1980년 남북평화통일연구소를 창립했고 1989년대 초반 전두환 군사정권이 나오자 정계에서 은퇴했는데 1985년부터는 일본 동경대학 객원연구원으로 지내면서 남북통일연구에 집념하고 있었다…

 

   그 날 정심으로는 초밥(壽司) 한 접시에 라면 한 그릇씩 올랐다. 맥주 한잔 청하지 않는다. 처음 뵈옵는 어른 앞이라 술은 주어도 사양하겠지만 빈 말이라도 “맥주 한잔 들지 않겠어?” 하고 물어주지 않는 데는 객지에 온 몸이라 얼마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2. 잊을 수 없는 가이겐(外宛)의 불고기 맛

  

   지금도 젊은이들은 일본에 가면 돈닢이 우수수 떨어지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일본인들의 천국이지 가난한 나라에서 간 유학생들에게는 결코 천국이 아니다.

 

   매일 학교에 나가 수업을 받고 자료를 수집, 정리해 리포트(소논문 형태의 숙제)를 작성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면 하루가 눈 깜빡할 새에 지나버리고 삭신은 물러날 것만 같다. 나와 같이 장학금을 받는 사람은 그래도 얼마간 점잔을 빼며 지낼 수가 있지만 사비유학생들은 일년 열두 달 365일 다람쥐 채 바퀴 돌리듯 뛰어다녀야 한다. 개중에는 일본에 3, 4년씩 있었다 해도 술집 출입 한번 해보지 못한 사람도 있다. 웬만한 식당에 가도 맥주 한 병에 500엔(인민폐로 35원 좌우), 불고기 1인분에 5,000엔(350원)씩 하니 중국의 한 달 월급을 팔고 팔자 좋게 술집 출입을 할 유학생이 어디 있겠는가? 친구가 좋다고 한번 모여 불고기 파티를 열어 보라. “와리깡(割勘)”― 제 각기 돈을 내여 계산을 해도 1인당 1만 엔(인민폐로 500원)씩은 내야 하니 친구 만나기도 무서운 곳이 일본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 가면 그래도 드문드문 대접은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역시 천만에 말씀이다. 나는 일본에 1년 반이나 있었지만 지도교관 오오무라 교수 댁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일본인의 집에도 초청을 받아본 적이 없다. 대학원생이요, 조교요 하는 대학가의 친구들 사이 역시 야박한 “와리깡”이니 중국에 처자를 두고 온 유학생들, 주렁주렁 금띠를 두르고 금의환향하기를 바라는 부모처자를 생각하면 슬쩍 구실을 대고 술좌석을 피하는 수밖에 없다. 참으로 부자의 나라 일본이라 하지만 술 한 잔, 기름진 요리 한 접시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바로 이렇게 궁상스럽게 지내고 있는 조선족 유학생들 앞에 귀인이 강림했으니 그분이 바로 동훈 선생이었다. 우리는 선생의 지도와 후원을 받고《재일조선족유학생친목회》를 조직했고 현지조사, 학술토론회 같은 행사를 빈번히 가졌다.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는 동경기독교회관을 견학했고 고구려 후예들이 건너와 살았다는 사이다마현(崎玉縣)의 유명한 고마진쟈(高麗神社)도 참관했으며 일본 제일의 관광명소 하꼬네(箱根), 닛꼬(日光)도 답사했다. 사꾸라 피는 4월, 단풍이 드는 11월이면 아름다운 신쥬꾸고엔(新宿御宛)의 푸른 잔디 위에 노천 파티를 벌리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파티는 요요기(代代木) 부근에 있는 가이겐(外宛)이라는 불고기집에서 많이 했다. 나는 그렇게 맛있는 불고기를 다시는 먹어볼 것 같지를 않다. 늘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지칠 대로 지치고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해  늘 속이 출출하던 우리는 열흘 굶은 호랑이처럼 기름진 불고기를 포식했다. 선생은 한 구들 되는 자식들에게 어쩌다가 좋은 음식을 얻어다가 배불리 먹이고 있는 어버이처럼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고 실없이 젊은이들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는 자꾸 술이며 안주를 새록새록 청했다. 술과 안주도 당신 자신이 직접 청하지 않고 나를 보고  “간사장 동지, 술이 좀 부족허구만. 한 잔 더 하지요. 고기도 좀 더 시키고…” 하고 화기 오른 안경을 벗으며 두 눈을 끔뻑해 보였다. 내가 친목회의 간사장 직무를 맡고 있다고 일부러 “간사장동지, 간사장동지”하고 일본식으로 개여 올리는 것이었다. 당신 자신은 친목회의 보통 회원이고 질긴 술꾼인 것처럼 말이다.

 

   선생은 낮에는 절대로 술 한 잔 하지 않았고 일본 소주보다 맥주를 더 즐기는 편이지만 일단 저녁에 우리 젊은이들을 만나 기분이 좋으면 2차, 3차로 대작을 하군 했다. 그리고 술값은 꼭 당신 자신이 내군 했다. 눈치 빠른 친구가 먼저 결산을 하면 크게 화를 냈다.

 

   “이 봐, 동경바닥의 주인은 내가 아닌가? 썩 물러서게. 자네들의 술대접은 연변에 가서 받겠어!”

 

   우리 유학생이나 방문학자들뿐만 아니었다. 학술회의나 무역상담 차로 일본에 온 중국의 조선족 학자들, 기업인들 모두가 동훈 선생의 신세를 지고있었다. 선생이야말로 우리 중국 조선족들에게는 동경의 급시우 송강(急時雨 松江)이었다.

 

   1990년 8월 제2차 오사카조선학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중국 측 대표 96명이 동경을 거쳐 귀국할 때 역시 가이겐 불고기집에서 대접을 했다. 미닫이들을 활짝 밀어놓고 두 줄로 길게 차린 불고기상이 장관을 이루었는데, 8월이라 후끈후끈한 화기가 진동하고 불고기 굽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앉은걸음으로 이리 저리 자리를 옮기면서 술잔을 권하는 선생의 모습, 이마며 콧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돋아 있었다. 참으로 보기에 민망했다. 연변사람들에게 무슨 신세를 졌기에, 중국 조선족과 무슨 인연이 있기에 이처럼 바람처럼 지나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이처럼 극진하게 대접하는 것일까?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그 무렵 우리는 조상의 나라 한국에 가 보고 싶었다. 1990년도라 그때만 해도 친척 초청이 아니고는 한국에 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도 일본에 있는 중국 조선족 학자라면 찬스를 잡을 수 있었지만 아직 학문적 깊이가 없는 우리들을 어느 대학교에서 초청해 주며 설사 초청을 해준다 해도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우리 고학생들이 무슨 자금으로 한국나들이를 한단 말인가?

   우리의 말 못하는 사정을 손 끔 보듯 하는 선생은 그 당시 오사카 국제해상운수주식회사 사장으로 계셨던 허영준 선생을 찾았던 모양이다. 그 때만 해도 허영준 사장은 재일동포들 중에 손꼽히는 기업인이요, 자산가였다. 그는 일본의 고베항(神戶港)과 한국의 부산항을 나드는 기선(輪船)과 화물선을 가지고 있었고 부산에 크라운호텔, 서울 강남에 리버사이드호텔을 가지고 있었다.

 

   “허사장님,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 젊은이들이 동경대학, 와세다대학과 같은 일본 명문대학에 와서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한국을 모른답니다.”

 

   “일본은 알고 자기의 모국은 모르다니요?”

   격장법(激將法)이 바로 들어맞았는지라 동훈 선생은 한 수 더 떴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학을 하는 젊은이들이 아닙니까? 무슨 돈이 있어서 한국관광을 하겠습니까? 하나같이 머리들이 총명하구 열심히 공부들을 하니까 장차 큰 재목이 될 건데… 참, 나도 옆에서 보기가 딱하군요…”

 

   “아니, 돈이 없어서 모국도 가보지 못하고 있단 말씀입니까? 그 돈은 제가 내놓을 테니 동 선생께서는 주선만 해 주십시오.”

 

   마침내 동훈 선생의 주선으로 우리 조선족 유학생 25명(그 가운데 金昌錄씨의 10살 먹은 딸과 金光林씨의 7살 먹은 아들놈도 있었다)은 고베(神戶)에서 오림피아호 기선을 타고 부산을 바라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부산의 크라운 호텔에 묵으면서 3박4일, 서울의 리버사이드호텔에 묵으면서 5박6일, 토끼장 같은 다다미방에서 살던 우리는 금시 중동 석유왕국의 왕자가 된 기분이었다. 매일 관광버스를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모국의 도시와 명승고적들을 돌아보았고 저녁이면 저마다 널찍한 호텔 방을 차지하고 오랜만에 늘어지게 발 편 잠을 잘 수가 있었다. 동훈 선생님은 허영준 사장네 팀과 함께 서울까지 날아와 우리들에게 일일이 용돈을 주었고 대통령 각하도 가끔 찾아오신다는 유명한 신라술집에서 연예인들까지 불러 풍악을 잡히며 풍성한 환영만찬을 베풀어주었다.

 

   그 때 그 감격과 감동을 어찌 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있으랴!

 


   3. “코리아인도 문화민족임을 알려 줘야지”

 


   선생은 사모님과 아들 동헌(董憲)과 함께 동경에 살고 있었고 그분의 큰따님은 미국에서, 작은따님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선생네 가족은 동경에서 아파트를 전세 맡고 살았는데 내가 일본에 있는 사이에도 신쥬꾸구(新宿區)에서 시부야구(涉谷區)로, 다시 나카노구(中野區)로 자주 이사를 했다.

 

   아직도 음으로 양으로 민족차별을 하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요사스러운 일본인 부동산 업주들은 한국인에게 좀처럼 세를 주지 않았고 세를 주었다가도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이런 저런 구실을 대고 아파트를 내게 했던 것이다. 선생네가 신쥬꾸구 쪽에서 시부야구 쪽으로 옮길 때, 우리 유학생 친구들 몇이 달려가 이사를 거들어준 적 있었다.

 

   요통(腰痛)을 심하게 앓고 있는 사모님까지 나오셔서 짐을 싸고 있었는데 우리는 운송회사 직원들을 도와 짐을 메여 나르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선생만은 부지런히 화장실에서 욕조를 닦고 있었다. 당장 내야 할 집인데 괜히 부득부득 청소할건 뭔가? 오히려 옆에서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공자님 이사에 책 보따리밖에 없다더니 무슨 책 상자가 그렇게 많았던지! 우리가 5층에서 1층까지 이삿짐을 다 메여 내렸건만 선생은 화장실을 청소하고 나서 구들에 물수건을 놓기에 여념이 없었다. 선생은 허리를 펴고 우리를 둘러보더니

   “짐을 다 내려갔으면 창문들을 닦아주게.”

   하고 걸상을 내주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장 낼 집인데 청소를 해선 뭘 합니까?”

   선생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선생은 물수건으로 문고리들을 샅샅이 훔쳐내고 있을 뿐인데 사모님이 곱게 눈을 흘기며 끌끌 혀를 찼다.

   “저 양반은 이사할 때마다 저런 답니다. 새로 드는 집주인에게 코리아인들도 문화민족임을 알려 줘야 한다고 말예요. 열 번 지당한 말씀이지만 고양이 손이라도 빌어야 할 땐데 번마다 참 코 막고 답답하지요.”

   그제야 우리는 얼마간 깨도가 되어 선생을 거들어 일손을 놀렸다.

   이젠 집안 어디를 보나 신접살림처럼 알른알른 윤기가 돌았다. 나는 분명 내일 찾아들 주인의 휘둥그런 눈동자를 보는 것만 같았다.

 

   참으로 우리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세계의 어디에 가서 살던지 밝고 깨끗한 모습을 보일 때, 자기의 인격과 품위를 지킬 때 세계인들도 우리를 다른 눈길로 볼 것이 아닌가?

 

   이뿐만이 아니었다. 선생은 사사건건, 구석구석에서 우리 촌뜨기 유학생들에게 귀감을 보여주었다. 우리와의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긴 일 없었고 약속 장소에는 단 1분도 지체하지 않고 와 계셨다. 그렇게 술을 즐기는 분이지만 낮에는 단 한 모금도 술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남색 정복에 반듯하게 넥타이를 매고 다니시는 신사 풍의 깔끔한 모습, 그분의 단정하고 빠른 걸음은 우리 젊은이들도 무색케 했다.

 

   “옛날 개념으로는 부자들 모두가 뚱뚱보로 되어 있지만 현대 부자들은 모두 날씬한 편이거든. 여기 일본의 마쯔시다나 쏘니의 회장도 그렇구 한국의 정주영, 김우중 회장도 그렇단 말이야. 그러니 호웅씨도 부자로 되려거든 체중부터 줄여야 하겠어.”

 

   선생은 체중이 90키로로 육박하는 나를 두고 가끔 농을 걸기도 했다.

 


   4. 넉넉한 유머와 백성의 통일논리

 


   동훈 선생과 앉으면 언제나 우리 젊은이들 쪽에서 찧고 까불면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만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지 절대로 당신 자신의 인생경력이나 인생철학을 도도하게 펴내지 않는다. 혹시 좌중에 젊은이들을 상대로 고담준론을 펴내는 어르신네가 있으면 슬쩍 우스운 이야기를 꺼내 화제를 돌리군 했다.
 

   하지만 선생은 박문일, 정판룡 등 선생들과 함께 앉은자리에서는 가끔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거나 진한 육담마저 꺼내군 했다. 그런 자리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바나나」, 「저희야 동그라미가 있어야지요」와 같은 이야기는 영영 잊혀질 것 같지 않다. 실례지만 이 자리에서 하나만 옮겨보고자 한다.

 


   ― 대한민국 어느 기업의 회장 어른께서 양쪽에 쭉 중진들을 앉히고 중요한 회의를 하는 판인데, 비서란 놈이 살그머니 다가와 귀에 대고 한마디 여쭈지 않겠습니까?

   “그분께서 오셨는데요!”

   비서가 말하는 “그분”이란 물론 회장 어른이 비밀리에 좋아하는 젊은 여자지요.

   “왜 또 왔지?”

   회장 어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데 비서란 놈이 슬쩍 원탁 밑에 오른 손을 넣더니 먼저 장지(長指)와 식지(食指)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이것 아니면…”

   하고 다시 장지를 식지와 중지 사이에 삐죽이 넣고 주먹을 불끈 쥐더니

   “이것 아니겠습니까?”

   하고 소곤거렸습니다.

   장지와 식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는 건 돈을 의미하고 장지를 식지와 중지 사이에

삐죽이 넣어 보이는 건 섹스를 의미함을 회장 어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회의 중이지 않는가? 임자가 알아서 잘 모시도록 하게!”

   회장 어른이 난색을 하면서 비서를 물리치고 다시 회의를 주최했습니다…

   이튿날 아침이었습니다. 문서를 들고 들어오는 비서를 보고 문득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나는지라 회장 어른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아, 어제 그분은 잘 모셨는가?”

    그러자 비서란 놈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또다시 오른 손 장지와 식지로 동그라미를 지어 보이면서

    “저희야 동그라미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이것으로 잘 모셨지요!”

   하고 시뻘건 장지를 식지와 중지 사이에 삐죽이 넣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쯤하면 좌중은 그만 포복절도하게 된다. 말뚝이가 양반을 야유하고 골려주는 『봉산탈춤』의 현대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선생을 모신 자리는 늘 즐겁고 배울 것이 많다.

   이러한 선생의 따뜻한 인간애와 뛰어난 유머 감각은 그의 칼럼에서도 유감 없이 드러난다.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30대 초반에 『서울신문』과 『경향신문』의 논설위원으로 맹활약을 했던 선생, 최근에도『동아일보』,『문화일보』에 칼럼들을 실어 세계정세의 추이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현 당국의 통일정책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진단하고 있다. 마침 여기에 필자가 눈에 띄는 대로 스크랩해 두었던 선생의 칼럼 몇 편이 있다.「統一논의-‘政治打算’해선 안 된다」(88.7.1) 「北京 東京 平壤서 본 서울」(97.12.15), 「개혁의 2가지 필요조건」(98.2.4), 「통일정책 大道로 가라」(98.2.13), 「이산가족문제 접근법」(1998.38), 「남북대화 大局的으로」(98.4.10), 「‘소떼 訪北’ 남북해빙 계기로」(98.6.15),「北韓 상공에서의 묵상」(98.12.29), 「욕심보다 ‘차가운 머리로’」(00.6.19) 등 9편이다. 선생께서 지금까지 제출했고 발표했던 수많은 보고, 칼럼, 논설을 놓고 보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 에 지나지 않지만 이 9편의 칼럼을 통해서도 선생님의 사상과 철학을 얼마간 엿볼 수 있다. 

 

   첫째, 선생 역시 1천만 이산가족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통일철학은 철두철미 순박한 백성의 소원과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선생은 1947년 봄, 병석에 계시는 어머님과 어린 동생들을 두고 북청을 떠났는데 그 동안 아버님은 옥살이와 강제노역, 끝내는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고 누이동생 경희와는 생리별이 되고 말았다. 하기에 선생은 말한다- “50년 세월을 하루같이 헤어진 혈육의 정을 못 잊은 채 끝내는 북녘을 향해 머리라도 돌려서 숨 거두게 해달라는 실향민들의 애통된 호곡에 이제 정말 귀를 기울여 한다. 한을 안은 채 한줌의 잿가루가 된 어버이 유해를 휴전선 북녘에 날려 보내며 흐느끼는 비운의 겨레를 외면하면서 거기에 무슨 민족이요, 통일이요를 외쳐대겠다는 건가.”

 

   선생은 이산가족의 아픔은 도외시하고 제 잇속만을 채우려는 당국자들을 비판한다. “쌀을 주면 군인이 먹으면서 남침할 기운을 차릴 것이기 때문에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통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도 한다. 독일통일이 어쩌고 하면서. 요는 북한동포와 함께 살게 되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 비유하자면 옹졸한 졸부 집안에서 노부모도 귀찮고, 남루한 친척 왕래도 싫고 남남으로 살아야 내 돈이 축나지 않는다는 요지다. 결코 축복받지 못할 것이다. 순박한 백성들 사이의 흐뭇한 겨레사랑, 그리고 역사 감정을 함께 이어가는 것이 통일의 원점이 아닐까.”       

   둘째, 선생은 통일문제를 백성의 논리로 접근하고 있는 것만큼 “통일정책은 민족의 역사에서 큰 발전을 향한 웅대한 과제이므로 그 기조로부터 표현문구에 이르기까지 후대의 기록에 부끄러움이 없을 만큼 격조 높은 것”이어야 하며 “그 동안 쌓인 갖가지 당착 모순 불합리를 청산 정리하고 이치에 맞고 원칙에 충실함으로써 통일정책은 당당하고 대도(大道)로 가야할 것”이니 “남북관계에서 대결과 승패의 관념은 극복되어야 하고 ‘너’와 ‘나’가 ‘우리’로 되게 하는 데는 정직과 성실이 근본이 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생은 “오늘날 대명천지에 잔꾀나 속임수에 넘어갈 사람도 없고 공작이나 술수에 의해 나라가 통일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무슨 기발한 계략을 내놓는 경쟁이 된다든지 나라 안팎의 하찮은 관중석을 의식해서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행사나 연출 같은 발상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남북 사이의 접촉, 통일 논의에는 결코 ‘단독’도 ‘밀실’도 없다. 가상(假想)이지만, 남과 북이 마주하는 곳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자리 하나가 마련돼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역사의 눈’이 임하는 자리다. ‘역사의 눈’은 실로 냉철 엄격하며 후대 역사에 진실을 전하고 시비를 분별해 줄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눈’은 민족사적 정통성 위에서의 민족 발전과 민주주의의 상궤(常軌)를 일탈하지 못하도록 예의 주시할 것이다.”

    셋째 선생은 통일정책은 북과의 상관관계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국내 정책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차 통일된 나라에서 이룩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사회상을 미리 우리 주변에서부터 구현시켜 나가는 다양한 노력이 바로 통일정책”이며 “청결한 정부, 질서 있는 공평한 사회를 이뤄 바람직한 통일의 모태를 만드는 개혁이 바로 중요한 통일정책”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훈 선생님은 특히 개혁이 번번이 실패하는 원인을 꼬집고 나서 “개혁의 2가지 필요조건”을 말한다. 첫째는 개혁의 추진주체부터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법이라는 반성기능이 정상 작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필요조건을 논하면서 선생은 다음과 같이 형상적으로 비유하고 있다.

   “개혁은 개혁을 이끌 사람들이 ‘규격(規格)’에 맞아야 할 것이다. 수없이 반복된 지난날 개혁시도마다 좌절된 경우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알 수 있듯이,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규격에 맞을 때에만 국민은 한편이 돼주고 그래서 성취도 남겼다. 그 규격이란 어떤 것일까. 간단명료하다. 개혁을 들고 나왔으면 개혁의 전 과정에서 자신에게 엄격함으로써 흠 잡힐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감히 남(국민)에게 도덕률 준수까지 당당히 강청할 수 있자면 그들 자신이 행적과 도덕성에서 양심(良心)으로부터의 합격판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만일에 규격의 잣대가 헷갈리면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세상에 알려진 사기 변절 방탕에다가 이혼경력도 있는 사람이 어느 날 말끔히 단장하고 주례석에 서서, 인간이란 정직해야 하고 지조도 있어야 하며 조강지처와는 백년해로 운운하면서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는 손님들은 실소(失笑)할까, 존경할까.”

   한마디로 동서고금을 주름잡는 해박한 지식, 역사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는 긴  안목, 종횡무진의 비유와 풍부한 유머, 그래서 우리는 선생의 칼럼을 좋아한다. 바꾸어 말하면 선생을 통해 우리는 열 대학 교수들에게서 배운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배웠다.

   

   5. “연변대학교를 잘 가꾸어야 조선족사회가 살아납니다.”

 


   일본에서 어느덧 1년 반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었다. 선생은 신쥬꾸에 있는 스미도모(住友) 빌딩 55층에 있는 대동문(大同門) 한식관에서 우리 부부를 위해 환송 파티를 차렸다. 그 때 일본에 있던 큰따님과 아드님은 물론이요, 사모님까지 불편한 몸에 쌍엽장을 짚고 나와 주셨다. 초밥에 불고기,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안주들을 많이 청해놓고 양껏 술잔을 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때 남긴 사진은 지금도 나의 가장 귀중한 기념물로 남아있지만 그 날 연변의 한 젊은 학도에게 남긴 한마디 말은 지금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연변의 명동학교가 유명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안수길(安壽吉) 선생의 소설에도 배경으로 나오지만 김약연(金躍淵) 선생과 같은 반일투사가 교편을 잡았구 윤동주, 송몽규 같은 민족시인들도 많이 배출했다구 하더군… 일본에 왔기에 하는 말이지만 일본에도 유명한 학교가 있었어요. 저 야마구치(山口)현에 가면 쇼오카손쥬쿠(松下村塾)라는 유명한 사숙이 있어요. 명치유신을 주도하고 일본의 근대화를 선도해나간 유명한 인물들, 말하자면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이도 히로부미(伊藤博文),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요시다 도시마로(吉田稔磨), 마에바라 이츠세이(前原一誠), 시나가와야 지로(品川彌二郞)와 같은 거물들을 길러냈단 말일세. 자그마한 시골 사숙에서 명치정부의 중신(重臣)들을 거의 전부 키워냈다는 말이 되겠지.

 

   아무렴, 왕후장상에는 씨가 따로 없는 법이지. 우리말로 하면 개천에서 용 나고 말이야. 아무튼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간 친구들이 연변대학을 잘 꾸려주게. 연변대학교를 잘 가꾸어야 조선족사회가 살아납니다. 헌데 요즘 나를 바라고 일본에 오는 중국의 젊은이들이 뼈가 없단 말이야. 여기 3류, 4류 대학에 와서 뭘 하나. 동대(東大), 와세다(早稻田) 같은 명문대학이 아니면 안 돼요. 그런 명문대학에서도 일본인들을 젖히고 수석(首席)을 차지해야지…”

 

   그 날 밤 동훈 선생은 사모님과 자제분들을 먼저 보내고 우리 부부를 데리고 동경의 밤거리를 거닐다가 자그마한 닌교(人形)들을 벽장에 총총 앉혀놓은 토속음식점에 들어가 또 술상을 마주 하고 앉았다. 선생은 우리 내외에게 정교한 손목시계 하나씩 선물하고 봉투 하나를 건네준다.
 

   “일제 텔레비전이 좋다고들 하니까 이 돈으로 부모님께 텔레비전 한 대 사다가 선물하게.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선물이 없어야 안 되지.”

 

   얼마나 마셨을까? 점점 말씀이 적어지고 술잔만 내는 선생, 이 새파란 젊은이와의 작별을 그토록 아쉬워하던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마지막 작별은 아카사카(赤坂) 역에서였다.
 

   “잘 다녀가. 그리구 일본땅에 늙은 형 하나 있다고 생각해 주게. 바쁘더라도 일년에 한 번씩 연하장이야 주겠지 허허…”


   선생은 물기 어린 두 눈을 슴벅거리면서 돌아섰고 나는 승객들 속으로 사라지는 선생의 뒷모습을 보노라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10여 년 전 선생께서 북청물장수의 사랑으로 키워준 가난한 유학생들이 자랑스럽게 일본 명문대학의 박사학위들을 따냈다. 김희덕(金熙德)씨와 김광림씨는 동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상철(李相철)씨는 죠지대학(上智大學)에서, 한족인 노학해(魯學海)씨는 쯔꾸바대학(築波大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동훈 선생님께서 길러준 20여명의 장학생들 중 그 대부분이 귀국해 연변대학의 중견 교수로, 지도일군으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사범학원 원장으로 있는 이학박사 최성일(崔成日)씨, 외사처 처장으로 있는 황건씨, 일본어학과 학과장으로 있는 권우(權宇)씨, 도서관 관장으로 있는 한철(韓哲)씨, 그 외에도 조문학부의 김병활, 체육학부의 김영웅 제씨들도 중견교수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참으로 선생께서 심고 가꾼 자그마한 솔씨들이 낙락장송으로 자라난 것이다.

 

   선생은 연변대학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인재들을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연변대학의 기초건설에도 많은 기여를 하셨다. 1980년대 중반 선생께서는 대우그룹의 협찬을 유치해 한화로 3,000만원에 달하는 한국의 최신 학술도서 1,500권을 기증했다. 지금 전국 1,000여 개 소 대학교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연변대학교 정문도 한화로 2억 원 이상의 자금이 들었는데 역시 선생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마운 동훈 선생, 지금은 동경의 어느 거리를 거닐고 계실까, 아니면 서울의 대우빌딩에 있는 남북평화통일연구소에서 논문을 집필하고 계실까? 대한민국 통일고문회의 고문, 동아일보사 21세기평화재단 이사, 명지대학교 교수(겸), 사단법인 평화포럼 이사, 남북평화통일연구소 소장 등 중책을 맡고 일하는 선생은 1989년이래 남과 북의 교류를 위해 10여 차 북한을 방문했는데 지금도 노익장의 정열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혼신의 정열을 쏟아 붓고 있다. 

 

   연하장 한 장 띄우면서 선생의 건강과 가족의 평안을 두 손 모아 빌 뿐이다.

 

       ― 1998년 12월 20일 초고, 2004년 12월 20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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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한라산
날자:2013-01-17 19:09:15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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