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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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와 문학의 인연
2005년 11월 22일 00시 00분  조회:4600  추천:51  작성자: 김관웅
한 시인이나 작가와 문학사이에 맺어지는 인연은 각양각색이다.

첫째는 타고난 문학천부로 하여 맺어지는 인연이라고 할수 있다.
고려시대의 대 시인 리규보가 일곱살때 《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고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네》라는 시를 지었다고 하니 분명 문학천부를 타고난것이고 로씨야의 뿌쉬낀은 아홉살때 극본을 만들어 연출까지 담당했다고 하니 역시 문학천부를 타고난것이다.

1958년, 나는 연길시신흥소학교에 입학하여 6년동안의 학업을 마치고 1964년 연길시3중에 입학하여 바야흐로 3학년에 올라가려고 하던 1966년 6월에 문자 그대로 《력사상에서 전례를 찾아 볼수 없는 문화대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책가방을 내동댕이치고 소위 《혁명반란》의 탁류속에 뛰여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10년동란이 아니였더라면 나는 자연과학이나 공업기술 분야에 몸을 담고있었을 확률이 아주 높았을것이다. 그것은 소학, 중학 시절에 나는 생물이나 산수, 수학, 물리에는 취미가 있었고 성적도 괜찮았지만 어문에는 별로 취미가 없어 장차 문학가로 되여보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어른이 되면 다윈처럼 세계일주를 하면서 온갖 괴이한 짐승들을 다 구경할수 있는 동물학자가 아니면 우리 집 식구들이 살고있는 단층짜리 흙집을 고층건물로 바꾸어 놓을수 있는 건축기사로 되려는 꿈을 갖고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동란의 시절에는 백일장이요, 글짓기대회요 하는 이벤
트는 소리도 들어보지 못한 판국이라 나는 나한테 문학천부가 숨어있는지 없는지를 테스트해볼 단 한번의 기회도 갖지 못했었다.

둘째는 부모의 연줄로 맺어지는 인연이다.
중국 삼국시대의 유명한 시인들인 조식(曺植)이나 조비(曺丕)는 탁월한 시재를 가진 조조(曺操)의 아들이고, 유명한 애정소설 《춘희(椿姬)》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뒤마는 《몽테크리스토백작》, 《삼총사》 같은 대작을 내놓은 뒤마의 아들이여서 문학사가들은 이 두 동명의 작가를 구분하기 위해 아들은 작은 뒤마, 아버지는 큰 뒤마라고 부른다. 근적근묵(近赤近墨)이라고 묵향(墨香)이 풍기는 문인가정에서 태여나서 자란 사람들이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되는것은 자연스러운 소치가 아니겠는가.

나에게는 이런 행운이 차례지지 않았다. 나는 1951년 7월 20일 연길시의 한 평범한 로동자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부친은 학교문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모친은 집이 가난하여 소학교 5학년밖에 다니지 못한 분들이다. 나의 부모님들은 문학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분들이였으니 나와 문학의 인연은 부모로 하여 맺어질리가 없었다. 물론 어린시절에 평양에서 미국 개신교의 영향권에 있었던 기독교 교회에 다닌 경력이 있는 아버지로부터 《성경》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하든가 콜롬브스의 신대륙발견이라든가 아브라함 링컨의 성장담같은것을 얻어듣기도 했지만 이런것을 문학과의 인연이라 하기에는 어쩐지 억지감이 난다.

셋째는 형제자매의 연줄로 맺어지는 인연이다.
중국 명나라시기의 중요한 문학류파인 공안파(公安派)는 맞형 원종도(袁宗道, 1560-1600),둘째 원굉도(袁宏道, 1568-1610), 셋째 원중도(袁中道, 1570-1623)가 주축으로 되였는데 두 동생보다 열살 더 먹은 맞형 원종도의 문학적영향이 지대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그리고 조선의 허균네 형제자매들이나 독일의 그림형제나 영국의 브론데자매나 모두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우리 집의 맏이인 봉웅형은 어려서부터 문학을 사랑했고 1961년에는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했다. 비록 나는 문학에는 뜻을 두지 않았지만 맏형이 사오거나 빌려온 책을 통해서《안데르센동화》, 《고요한 돈강》, 《고리오 령감》, 《바이론시선집》, 리기영의 《고향》, 《수호전》 같은 책들을 도깨비 기와장 번지듯이 두루 읽어본 경력은 있었고, 맞형과 친구들의 한담설화속에서 귀동냥으로나마 세계명작가나 세계명작의 이름들을 대충 얻어 듣기는 했다. 이것을 나와 문학의 인연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너무나도 어설픈 인연이 아닐수 없다.

넷째는 주변환경이라는 연줄로 맺어지는 인연이다.
이딸리아의 피렌체는 현재 인구가 약 40만명밖에 안되는 소도시이니 지금으로부터 6,7백년 전의 문예부흥시기에는 아마도 몇만명의 인구밖에 안되는 작은 동네였을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탄환지지(彈丸之地)에서 단떼를 필두로 하여 페드라르카, 보카치오, 다 빈치, 미켈란젤로같은 전반 구라파의 문예부흥운동을 주도한 세계적인 문학예술의 거인들이 쭉 이어지면서 나타났다는것은 주변환경의 영향이 문학예술인재들의 성장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우리 연길시를 언감생심 피렌체에 비길수 없지만 내가 태여나서 자란 연길시 중앙가(후에는 광명가라고 고쳤음) 9거는 그 원인을 알수는 없지만 50년대로부터 70년대까지는 연변 문학예술계의 중진들이 운집한 특수한 동네였다. 말하자면 내가 유년, 소년, 청년시절을 살아온 동네는 명실공히 《별들의 동네》였다. 연변시단의 원로들인 리욱선생과 채택룡선생을 필두로 하여 시인 김철, 임효원, 리행복선생 그리고 민간문학가 정길운, 연변가무단 단장 김태휘씨 등 중국조선족문단의 거두들이 오래동안 우리 집과 이웃으로 몇십년을 한 동네에서 살아왔다. 이밖에도 김창걸, 현남극 같은 문학교수들이나 한수동, 김길련선생과 같은 문학편집이나 기자들도 우리 집과 거의 한동네 속하는 가까운 곳에 살고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한동네 이웃집 아저씨들처럼 시인이나 작가로 되여보겠다는 야망을 품어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조석으로 만날수 있는 이런 동네 아저씨들이 지은 노래를 부르고 옛말책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친근감을 느꼈던것만은 분명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일상적인 삶이나 인격 그리고 그 잘잘못까지 빤히 들여 다 보면서 살다보니 내 눈에는 문학인들의 세계가 별로 신비해보이지 않았다. 별난 사람들이 아니야, 이런 배짱마저도 은연중에 생겨났던것이다. 더우기 반우파투쟁으로부터 시작하여 문화혁명에 이르면서 우리 동네의 문학인들이 갖가지 원인으로 하나하나 타도대상이 되여 가는것을 보고는 문학이란 이 직업이 아주 위험한것으로 인식되기도 했으니 여전히 문학을 일생의 직업으로 선택해보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주변환경은 은연중에 나와 문학사이에 인연이 맺어지게 한것만은 분명하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작가론적연구 또는 작가에 대한
전기(傳記)적연구를 어려서부터 직관을 통해 할수 있게 되였다고도 할수 있다.

다섯째는 자신이 종사하게 된 직업의 연줄로 하여 맺어지는 인연이다.
영국의 디켄즈나 미국의 마크 투웬이나 헤밍웨이는 기자로 뛰다가 점차 문학에 입문하여 대성하게 되였고 우리 주변에도 많은 분들이 언론이나 편집, 교원같은 직업에 종사하다가 문학에 입문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나와 문학의 인연도 직업의 연줄로 하여 맺어진것이지 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것은 아니다. 1973년, 군대에서 말이나 노새들을 먹이고 부리는 마부로 허드레일을 하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연변군분구에서 꾸리고있는 《동북민병》 잡지사로 전근하게 되였다. 명색이 잡지사였지 온통 번역만 하는 업무였고 저절로 기사 한편 쓸수 없게 되여있는 순 번역잡지였다.

나는 이 잡지사에서 약 3년동안 번역과 편집업무를 배우면서 이른바 언론계에 몸을 담게 되였으나 문학과 참말로 인연을 맺기에는 역시 10만 8천리나 거리가 있었다. 1976년, 근대에서 제대하여 연변사전편찬판공실(현재 연변언어연구소의 전신임)에 배치 받아 일하게 되였으나 초중 2학년의 학력밖에 없는 나에게 있어서 사전편찬과 언어연구는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게다가 매일마다 카드에 낱말의 주석이나 적어넣는 서캐를 캐는 따분한 일이 내 적성에도 맞지 않지도 않았다.

이러구러 10년 동란이 끝나고 새 시기를 맞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였다. 하지만 초중2학년의 학력이 고작인 나에게 있어서 리공과를 선택한다는것은 무리였다. 그리하여 문과에 선택할수밖에 없었다. 즉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이였다.

거의 대부분 시간을 들여 수학을 복습했지만 수학에서 단 5점을 맞은 까닭에 겨우겨우 연변대학 한어학과에 입학한 때가 바로 1978년 9월경이였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나는 문학을 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고 눈먼 망아지 워낭소리 따라가듯이 학교에서 배정한 과목에 따라 말없이 수강만 했을따름이였다.

나와 문학의 인연은 그야말로 우연하게 맺어졌다. 1978년에 함께 연변대학에 입학하여 조문학부에서 공부하게 된 동생 호웅이가 문선습작과목의 숙제로 바친것이 바로 《산속에 핀 진달래》라는 단편소설이였다. 호웅이는 나에게 비하면 문학천부가 있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글재주가 나보다 월등하다는 점은 나 자신만 아니라 우리 문단의 제씨들도 공인하는 바이다. 그러나 내가 동생 호웅이에 비해 더 갖춘 무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남다른 승벽심이라고 할수 있다.

동생이 쓰는 소설을 내라고 못 쓰겠는가, 이런 승벽심의 소산이 바로 나의 처녀작 《청명날》이다. 비록 모방기와 어색함이 데룽데룽 달린 치졸한 작품이였지만 호웅이의 《산속에 핀 진달래》와 두달 사이두고 《연변문학》에 실렸을뿐만아니라 또 호웅이와 함께 문화대혁명이후 처음으로 되는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였다. 그때 40원 미만의 죄꼬리만한 월급으로 살던 우리들에게 있어서 300원이라는 상금은 당시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천문학적 수자나 다름없는것이였다. 미상불 돈도 벌고 이름도 날리고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명리쌍수(命利雙收)가 아닐수 없었다. 아무튼 나와 호웅이는 첫포를 쏘자마자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하게 되였다.

문학상(文學償)의 기능을 나는 나의 절실한 체험으로부터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만일 호웅이가 그런 숙제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처녀작이 생겨날수 없었을것이고 또 그 처녀작이 없었더라면 첫번째의 문학상수상이 있을수 없을것이고 또 그 수상으로 인한 거대한 고무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문학에 자신심을 갖지 못했을것이며 문학에 길에 들어서지 않았을수도 있었을것이다.

자신을 리기영같은 거물에게 견주는것은 좀 외람되기는 하지만 리기영은 《오빠의 비밀편지가》가 1922년에 공모에서 수상하지 못했더라면 자기는 아마도 문학을 포기하고 다른 직에 종사했을수도 있었을것이라고 술회한적이 있다. 나의 경우도 리기영선생과 대단히 흡사하다. 만일 1979년의 그 문학상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도 문학이 아닌 다른 직업을 선택했을수도 있었을것이다.

이를 계기로 하여 나는 본격적인 소설창작에 들어 섰으며 학부생 4년동안에 《소설가의 안해》라는 소설집을 묶어 낼수 있었다. 학부생 생활을 마치면서 나는 문학을 나의 일생의 직업으로 선택하였고 문학석사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나는 내친 김에 박사과정까지 마치였고 문학준비과정에 옹근 10년의 시간을 들였다.

중국에는 《낫을 가는 일은 나무를 하는 품을 잡아먹지 않는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10년 공부를 마치니 나는 이미 사십이 넘었다.
그리하여 나는 소설창작은 거의 포기하게 되였고 문학평론과 시간이 적게 드는 수필창작에 손을 대게 되였다. 대학강단에 선 교수라는 이 직업은 우리 평단과 소설이나 수필창작에 깊숙하게 개입할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중국조선족문학에 대한 비평이나 수필창작을 나의 하나의 부업으로밖에 대할수 없게 되였다.

지난 세기 90년대 이후 나는 나름대로 부지런히 글농사를 지어 왔다. 우선 마누라의 바가지와 잔소리를 말리려고 문학번역(사실은 돈벌이임)도 적잖케 했다. 이럴 경우에는 3, 4류의 저질적인 무협소설도 돈만 준다면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역자의 이름을 밝히는것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쪽제비도 낯짝이 있다지 않는가. 그러나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은 똑똑히 차리랬다고 돈벌이하는 재미에 빠졌다가도 용하게도 본업에 되돌아오군 했다.

내가 주요한 시간과 정력을 몰부어 하고있는 본업은 물론 순수문학에 관계되는 글농사이다. 《큰 포전》의 글농사는 두말할것 없이 본과, 석사. 박사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양문학사,서양모더니즘문학사, 한국고대소설사, 동서문론비교, 중조고대문학비교연구, 비교문학리론, 조선력사와 문화 같은 문학연구관계의 교과서나 론저나 론문의 집필이다. 10년 남짓한 동안에 10여권의 교과서나 학술저서들을 냈고 80여편의 학술론문들을 발표하고 국가급과학연구항목도 3개나 완성하여 7,8년 사이에 강사로부터 박사생도사로까지 되였다.

이밖에도 나는 부업으로 하는 《뜨락농사》도 열심히 지었다. 그것은 바로 중국조선족 문학예술에 관한 평론이나 수필창작이다. 연변대학에서는 이런 글들을 《잡글》로 쳐서 과학연구성과로 쳐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7, 8년 동안에 이런 잡글들을 100여편이나 발표했다.

중국에 《한 마음으로 두가지 일을 할수 없다(一心不可二用)》는 말이 있듯이, 마음을 여러 곳에 쓰다 보니 나의 문학은 점점 사불상(四不像)이 되여 간다.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도 자격미달이요, 문학교육자로서도 자격미달이요, 문학창작가로서도 자격미달이요,문학평론가로서도 자격미달이요, 문학번역가로서도 자격미달이다. 그래서 나는 문학의 전문가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문학의 잡가(雜家)와는 점점 거리가 가까워진다.

나는 문학을 한답시고 20여년간 분주히 돌아쳤으나 오늘날까지 여전히 문학의 모든 분야에서 아마추어―비전문가이다.
그래서 적지않은 문단의 선배나 친구나 동료들이 《좀 <바람>을 작작 피우고 학문에만 전념하라》, 《먹을 황금처럼 아끼라(惜墨如金)》라는 권고하군 한다. 비록 이런 충언들이 고맙기는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그냥 《바람기를 잠 재우지 않을것이고》 앞으로도 계속《잡글》들을 줄기차게 써나갈것이다.

솔직하 고백하면 대학교에서 과학연구성과로 쳐주는 이른바 《론문》이나 《론저》들의 집필보다는 중국조선족 문학이나 예술에 관련되는 평론, 수필, 칼럼, 기행 같은 이른바 《잡글》을 쓰는데 더 애정이가는것을 나로서는 어쩌는수가 없으니 말이다.그것은 위기상황에 처해 있는 우리 중국조선족에게 있어서 이런 잡글들에 의해 영위되고있는 현실문학은 너무나도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있기때문이다.

위기상황에 처해있는 우리 중국조선족문화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유태인들을 머리속에 떠올리군한다.인류 력사상에서 유태인만큼 지혜롭고 끈질긴 문화의 힘을 가진 민족은 없다. 2천년간 나라 없이 도처에 흩어져서 온갖 박해를 받아왔음에도 민족의 정체성은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다. 죽일수록 살아나고 흩어질수록 단합되여 마침내는 다시 나라를 일으켜 세워 주변의 수억의 아랍인들과 맞서서 반세기 이상 싸우고 2천만밖에 안되는 소수 민족이면서 노벨상 전체의 3분의 1이나 차지한 창의력을 발휘하는 민족이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가?

그 힘은 바로 강인한 종교와 교육에서 나왔지만 어디까지 유태문화와 민족응집력의 핵은 종교이다. 종교는 유태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주요한 문화의 그릇이다. 우리 중국조선족의 문화는 비종교적 문화이다. 때문에 우리의 중국조선족의 문화의 가장 주요한 그릇은 교육과 문학예술같은 세속적인것이다.

문화기능주의의 견지에서 볼 때 중국조선족문화가 앞으로 도 건재하려고 한다면 교육이나 문학예술 같은것들이 마땅히 유태인문화에서의 종교 같은 구실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조선족의 크고 작은 교육, 문화기관이나 단체들이나 잡지사같은것은 유태교의 사원 같은 존재이고 우리의 교원들이나 문학예술인들은 랍비같은 구실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의 교육이나 문학예술은 유태인들의 문화계통에서의 종교같은 기능을 대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이런 주장을 두고 많은 분들은 문학예술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건다고 코웃음을 칠수도 있겠지만 나는 분명히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의 교육이나 문학예술이 우리 민족문화를 보전하고 지키는 기능을 잃는 날이면 우리중국조선족문화가 일조에 봄눈마냥 녹아버릴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나는 오래전부터 민족적사실주의문학을 고창해왔다.

한마디로 나의 문학관은 대단히 공리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이다.

나와 문학사이의 인연은 나의 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이어질것이다. 불교의 삼세륜회설이 참말이고 래세가 참말로 있다면 나는 죽어 래세에 가서라도 문학을 일생의 직업으로 선택할것이다.누가 뭐라고 하던 우리 말과 우리 글로 내가 좋아하는 《잡글》들을 계속 쓰면서 중국땅에서 우리 민족과 함께 영생을 누리고싶다.

2003년 3월 6일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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