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아마도 연변에서는 사과배의 수확이 끝난 계절이어서 연변의 집집마다 사과배 몇 상자씩은 쌓여 있을 것이다. 어제도 집사람이 거리가 가까웠으면 사과배를 댓 상자 보냈으면 좋겠다고 메신저에서 대화를 하다가 안타까워하면서 말했다. 연변의 특산물 중에는 개고기, 곰쓸개, 인삼, 송이, 더덕, 고사리, 도라지도 있지만 아무리 손을 꼽아보아도 연변의 으뜸가는 명물은 단연코 사과배다. 개고기, 곰쓸개, 인삼, 송이, 더덕, 고사리, 도라지 같은 것은 다른 고장에도 있다. 그러나 사과배만은 연변조선족문화의 가장 큰 창조물이고 연변에서만 나는 연변의 특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변에는 1960년대 초에 나타난 유명한 사과배에 대한 노래가 있다. 그 가사는 대략 이러하다.
연분홍 진달래야 춤추어 다오. 우리 마을 과수나무 꽃피어 난다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사과배는요 소문이 높아서 손님도 많소. 아,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사과배는요 삼복철 스리 살살 녹는 꿀맛이라네.
사과배는 연변 나아가서는 중국조선족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 노래를 늘 부르군 한다. 이 강연고를 쓰다보니 문학인이 필자는 저도 모르게 내 고향인 연변의 사과배가 떠올랐습니다. 사과배는 가접과수(嫁接果樹)이다. 北朝鮮 北靑의 배나무 가지를 연변의 돌배나무에서 가접(嫁接)해서 두 나무가 결합하여 새로 나타난 과수품종이다. 園藝學에서는 北朝鮮 北靑의 배나무 가지를 접수(接穗)라고 연변의 돌배나무를 접본(接本)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접본은 당지의 뿌리까지 있는 나무를 이용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래야만 새로운 품종이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서 잘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배 품종 - 사과배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사과배는 연변의 토종인 돌배보다는 비할바 없이 크고 달며 심지어 북청의 배보다 더 크고 달뿐만 아니라 배 껍질이 두꺼워 오래 보관할 수 있다. 山東 래양의 배나 韓國의 나주배가 유명하다고는 하나 필자는 연변의 사과배 보다는 그 맛이 못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추석에 누가 나주배를 한 상자 선물로 주어 실컷 먹기는 했지만 필자는 그 나주배를 먹으면서도 늘 연변의 사과배 생각을 했고 봄철이면 마치 흰 눈이 내리기라 도 한 듯이 몇 십리 이어진 帽兒山 산자락을 덮고 있는 용정과수농장의 사과배꽃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매봉가절(每逢佳節倍思親)이라는 시구처럼 연변 나아가서는 중국에 사는 필자의 부모형제들과 200만 우리중국조선족동포들을 생각했다. 필자에게 있어서 한국이 비록 모국이기는 하지만 고향은 아닌 까닭이기도 하리라. 그럼 순서를 잠깐 바꾸어서 먼저 중국조선족부터 말하고 나중에 중국조선족과 사과배의 연관성을 말하려고 한다.
1. 中國朝鮮族의 槪念
우리들은 스스로 우리 자신을 中國朝鮮族이라고 한다. 우리 중국조선족에 대해서 말하려면 우선 '중국조선족'이란 개념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이 족칭(族 ) '중국'과 '조선족'이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이로부터 '중국조선족'은 지역성, 시간성, 정치성을 다분히 띠고 있는 족칭이다.
'중국조선족'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중국조선족은 중국에 거주하고있는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는 조선민족을 뜻한다. 중국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며 중국공민이 가지고있는 모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또한 중국조선족은 과경(跨境) 민족, 또는 이민(移民) 민족으로서 혈통과 문화전통 면에서 한반도와 같은 맥을 잇고 있으며 한반도의 민족과 동일한 민족이라는 것 역시 간과해서도 안 된다.
중국의 조선족은 역사상 朝鮮半島에서 中國으로 이민하여 들어온 민족공동체로서 150년 남짓한 세월 속에서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에 적극 참여하면서 점차 중국문화를 몸에 익히게 되고 점차 中國의 한 小數民族으로 형성되었다."
2. 中國朝鮮族의 歷史
중국조선족은 과경(跨境) 민족, 또는 이민(移民) 민족이라는 점에서는 재미동포나 재일동포와 비슷하다고는 할 수 있지만 또 많은 부동한 특점을 갖고 있다. 그 가장 뚜렷한 부동점은 중국조선족은 재미, 재일 등 다른 지역의 백의민족동포사회와는 달리 자기의 특수한 이민사, 개척사, 투쟁사를 갖고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중국조선족은 이미 다 개척해 놓은 남의 나라 땅에 들어가서 그 기존질서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면서 재미, 재일 동포들과는 달리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서 자기의 특수한 이민사, 개척사, 투쟁사를 갖고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자기 민족적인 주체성, 능동성이 在日, 在歐美 동포들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다.
첫째, 中國朝鮮族의 특수한 이민사와 개척사로부터 본 中國朝鮮族의 주체성과 능동성
중국조선족은 재미, 재일, 재독, 재유럽, 재남미 동포들처럼 다른 민족들이 이미 다 개척해 놓은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중국조선족은 마치도 영국의 청교도이민들이 미국 동부에 이민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개간했듯이 중국조선족도 중국의 동북지역에 이민하여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땅을 개간했다. 중국조선족의 이민은 開拓移民의 性向이 아주 강하다.
중국조선족 移民史에서 가장 이른 移民은 1845년으로 遡及된다. 1845년 평안북도 초산군의 80여세대의 농민들이 압록강을 넘어서 요녕성 통화, 관전의 훈강 유역에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벼농사를 지었고 그 뒤를 이어서 환인, 신민, 안동 등지에 조선농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그 뒤 1860년대에 이르러서는 함경북도의 농민들이 두만강을 넘어서 지금의 연변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중국조선족의 동북지역에로의 이민은 중국관내에서의 한족 및 기타 민족의 '촹꽌뚱(闖關東)'과 軌를 같이 하며 중국의 漢族을 비롯한 기타 민족과 함께 동북의 미개척지를 개척했으며 중국조선족은 동북 땅에 도작문화(稻作文化)라는 동북 땅에는 없었던 농경방식을 도입했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東北지방을 開拓하는 開拓民으로서 중국에 공헌이 있는 민족이며 좌향기성(坐享其成)의 다른 이민집단들과는 그 性向이 다르다.
둘째, 中國朝鮮族의 특수한 鬪爭史와 革命史로부터 본 中國朝鮮族의 주체성과 능동성
중국조선족은 중국에로 이주하기 시작해서 20세기 50년대초까지 한족등 중국의 기타 민족과 함께 한국과 중국의 반제반봉건투쟁과 항일전쟁, 해방전쟁, 조선전쟁에서 중화민족의 해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 그리고 '보가위국(保家衛國)'을 위하여 불후의 공헌을 세웠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기의 붉은색 바탕에는 우리 중국조선족의 붉은 피도 적잖게 녹아있다.
중국의 구민주의혁명시기 식견 있는 조선인들은 孫文을 따라 청왕조를 전복하는 투쟁에 헌신했고, 1920년에는 김좌진, 홍범도의 지휘하에 獨立軍은 鳳梧桐, 靑山里 전투에서 일제를 타격했고, 중국의 북벌전쟁 중에서 200여명의 조선청년들이 참가하여 공훈을 세웠고, 황포군관학교에는 제1기부터 제 7기까지 교관과 학생 중 200여명의 조선인이 있었고, 1927년 중공이 영도했던 광주, 남창 봉기 중에 조선인이 각각 200명, 150명이 참가했고, 2만리5천리 장정대오에도 양림, 무정 같은 우리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동북의 항일무장투쟁 중에서 중국조선족은 더욱 많은 피를 흘렸다.
1931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14년 동안 동북 항일무장투쟁 중에서 10여만의 조선족인민들이 참전했고 수만을 헤아리는 조선족이 항일 聖戰에서 목숨을 바쳤다. 연변지역의 항일전쟁시기 조선족 열사는 3026명인데, 연변지역 항일열사의 96.8%를 차지한다. 중국조선족은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렀으며 불멸의 공헌을 세웠다.
1946년부터 1949년에 이르는 4년 해방전쟁 중에서 조선족 청년이 6만 3천명이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했다. 제 4야전군의 164사, 166사, 156사 등은 조선족을 위주로 구성되었다. 遼沈, 平津 戰役과 湘西 토비숙청, 四川해방, 海南島 해방에 모두 우리 조선족이 목숨 바쳐 싸웠다. 해방전쟁시기 연변 6개 현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입대한 조선족이 5만 2천명에 달했고 민병, 공안, 지방 무장대오 등을 합치면 모두 10만 명이 참가했다. 그래서 중국의 시인 賀敬之는 "산기슭마다 진달래가 붉게 피어 있고 마을마다 렬사비가 솟아 있네(山山金達萊, 村村烈士碑)"라고 읊었던 것이다.
중국조선족은 바로 이런 중국에 대한 공헌으로 당당하게 중화인인공화국의 공민으로 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중국조선족이 기타 해외동포와 다른 중요한 특점이며 중국의 기타 소수민족과도 다른 특점이다.
세상만사는 塞翁之馬라고 중국조선족의 이러한 적극적인 정치참여의식은 부작용도 파생시켰다. 자기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과분한 정치적극성을 발휘할 때가 있다. 특히 연변의 조선족들이 이러하다. 그래서 "중국의 혁명은 북경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연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조크가 생겨나기까지 했다.
아무튼 중국조선족은 자기의 특수한 투쟁사와 혁명사를 갖고있으며 이로하여 중국에서 살아 갈 수 있는 당당한 권리를 갖고 있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중국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일방적으로 중국으로부터 하사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싸워서 그 피의 代價로 중국으로부터 당당하게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코 鄭判龍의 말처럼 '중국에서 이 눈치 저 눈치를 살피면서 살아가야 하는 가련한 며느리 신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특히 중국공산당에 대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3. 中國朝鮮族의 특수한 아이덴티티 - 문화정체성
중국조선족의 특수한 민족정체성에 대해서 처음으로 이론적 차원에서 언급한 분은 정판룡 선생이다. 이 분은 주장을 간단하게 "조선족문화의 이중성"으로 귀납했으며 문학인답게 대가족에 시집 온 며느리 처지로 중국에서의 중국조선족의 입지를 메타포를 동원해 비유했다.
말하자면 중국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시집을 온 며느리이기에 시집에서 갖고 온 문화적인 계승성도 있고 동시에 시집에 와서 익힌 시집의 특성도 몸에 배여 있다는 것이다. 중국조선족은 우선 시집살이를 잘 하고 다음에는 친정집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 분의 주장이다. 특히 시집살이를 하면서 늘 친정 생각만 한다면 시집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따라서 왕따를 당하게 된다고 인정했던 것이다.
정판룡 선생의 '이중성론'과 '며느리론'을 계승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면서 자기의 견해를 보다 합리하게 내세운 사람은 중국조선족의 소장학자 연변대학정치학부의 김강일 교수같은 친구들이다.
김강일은 『중국조선족사회 문화우세와 발전전략』이란 책에서 중국조선족문화는 "문화의 변연성"을 갖고 있다는 관점을 내놓았다. 물론 이는 문화인류학에서 구 미의 학자들이 이미 제기한 이론이기는 하지만 김강일 씨가 이 이론을 중국조선족문화의 연구에서 활용했을 따름이다.
김문학 씨는 중국조선족문화, 특히 연변조선족문화를 '박쥐형문화'라고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나 자기를 '무국적세계인'이라고 뻥튀기를 한 것도 다 구미의 문화인류학에서의 '다이애스포라' 거나 '경계인(境界人)' 개념에서 힌트를 받고 떠벌린 것이다.
본인도 중국조선족문화가 "文化의 邊緣性"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
첫째, 변연문화란 부동한 문화의 변두리에서 일정한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문화계통은 세계 각지에 산재해있으며 자기로서의 특수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세계 각지에 산재해있는 유태인 공동체, 유럽의 스위스의 독일인공동체, 캐나다의 퀘벡의 프랑스후예에는 이런 문화계통이 존재한다. 변연문화구역은 자기의 특수한 문화적인 특질을 갖고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문화구역은 두 개 이상의 문화계통과의 쌍개방(雙開放) 性格에 있다.
둘째, 변연문화계통은 그 특수한 다중문화구조(多重文化構造)로 인해 새로운 문화 요소를 창출할 수 있기에 단일문화구조(單一文化構造)를 가진 문화계통에서는 갖출 수 없는 기능을 갖고 있다. 시스템론의 시각에서 보면 변연문화란 새로운 문화계통을 의미하며 그것은 일반적인 문화계통보다 더 강한 문화기능을 나타낼 수 있다.
셋째, 변연문화의 성격은 인류 문화발전의 필연적인 추세이다. 미래의 세계는 문화계통간의 부단한 교류로 인해 복합적인 성격을 보다 강하게 나타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느 문화계통이든지 모두 자기가 교유했던 전통적인 문화만을 고수할 수 없을 것이며 복합적인 문화계통으로 새로운 문화기능을 창출해야만 발전에 필수적인 문화적인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그 어떤 변연문화계통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그 존재의 합리성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문화란 부단히 변해 가는 생활환경에 대한 인간들의 필연적인 반응이고 적응방식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생활리듬의 가속화로 더욱 그러할 것 이다.
변연문화의 함의에는 두 개 이상의 문화권을 연결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문화계통이 내포하고 있다. 즉 그것들은 두 개 혹은 두 개 이상의 문화계통이 서로 맞닿은, 문화의 중심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서 형성될 수도 있고 문화의 중심지역에서도 형성될 수도 있으며 또 두 개 혹은 두 개 이상의 문화계통들간의 상호 문화교류과정에서 형성될 수도 있다. 예컨대 중국조선족사회는 전자에 속한다면 미국의 한인사회는 문화의 중심지역에 형성된 변연문화계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민족공동체는 모두 두 개 이상 문화계통간의 교차형태를 이루고있기에 그것들은 모두 변연문화의 특징을 갖고 있다.
변연문화계통의 가장 돌출한 문화적인 특징은 그것이 갖고있는 강력한 文化轉換機能에 있다. 우리는 오늘의 시대를 정보화시대, 지식산업시대라고 한다. 오늘날의 새로운 시대에 있어서 변연문화는 세계의 각종 문화를 轉換하여 傳達하는 정보망의 망점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이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영역의 발전에 주는 영향은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한 변연문화계통으로서의 중국조선족이라는 문화공동체는 한 세기 반 남짓한 동안에 자기의 민족문화전통을 굳건히 지킴과 동시에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점차 형성되었다. 이 둘 중에서 그 어느 한 쪽을 홀시해도 중국조선족문화는 변연문화계통으로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중국조선족이 현지사회인 중국의 문화만을 수요하면서 자기의 문화전통을 포기했다면 13억 중국인 중의 하나로 되어 자기의 개성을 상실하게 되었을 것이고, 만일 자기의 민족문화의 전통만 고수하면서 중국문화에 대한 수용을 포기했다면 중국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중국조선족은 총체적으로 보아서볼 때,중국성구를 동원해 표현한다면 "각답량지선(脚踏兩只船)", 즉 중국과 한반도라는 이 "두 文化의 배"에 발을 붙이고 지금까지 살아온 셈이다. 이 점을 두고 정판룡은 중국조선족문화를 '이중성'을 갖고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중성, 복합성은 다 같은 뜻이다. 이 말은 지금도 옳은 말씀이다.
문화적인 성격으로 보면 중국조선족문화의 기반은 母國文化인 韓半島文化의 要素로서 그것이 민속, 생활방식, 사고방식, 언어 등 면에서 아직도 강하게 나타나므로 중국조선족문화의 主體는 여전히 韓半島文化 要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조선족의 문화는 총체적으로 볼 때 韓半島에서 갖고 온 모체문화의 접본에 중국문화라는 접목을 가접시켜 새롭게 생겨난 문화라고할 수 있다.
연변의 사과배는 이런 의미에서 중국조선족이라는 이 변연문화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변의 사과배는 북조선 북청에서 가져온 잡목에다 연변의 돌배라는 접본(接本)에 가접시켜서 만든 새로운 배품종이다. 연변의 명물 사과배와 유사한 것이 우리 중국조선족문화이다.
본인은 대학학부생시절에 연변대학의 한어학부를 '사과배계'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것은 한어전업은 조선족대학생이라는 이 접본에 중국언어문학 이라는 이 접목을 가접(嫁接)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었다.
일언이폐지하면 중국조선족의 복합문화도 원문화의 기본적인 성격을 보전한 기초 우에서 중국문화를 수용하였다. 이 점이 중국조선족 문화의 주체성 확보에 더 없이 중요하다.이러한 주체성이 확보되면 일정한 기한과 조건하에서도 동화란 결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조선족사회와 같은 변연문화계통은 문화자체의 주체성만 확보하게 된다면 그것은 모체문화보다도 더 많은 기능을 가지게 된다. 즉 원 문화계통속에는 없는 언어중개와 문화중개의 작용이 있음은 물론이고 두 개 문화 계통을 연결하는 문화전환계통까지 생겨나게 된다. 특히 변연문화구역은 지리적으로 두 개 이상의 문화권을 연결하는 위치에 처해 있으므로 정치, 경제, 문화 등 각분야에서 교류의 중요한 매개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며 그의 문화전환기능으로 빠른 시일 내에 보다 효과적으로 두 개 부동한 문화계통의 연계를 강화할 수 있다. 하기에 이러한 변연문화는 일반적인 문화계통에서는 구비할 수 없는 정치 경제, 문화, 적인 중요한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지금 연변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족사회는 조선의 페쇄성으로 말미암아 반폐쇄상태에 처해 있기에 자신이 갖고있는 변연문화구역의 특수한 기능을 완전히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그의 부분적인 기능은 한국과 중국간의 교류에서 많이 나타나나고 있는데, 지정학적인 원인으로 하여 아직도 제한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만일 조선이 개방한다거나 한반도가 통일되면 중국조선족 사회가 지니고있는 변연문화구역의 특징이 충분히 나타날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그의 戰略적인 위치도 급격이 부상될 것이다.
4. 변연문화체계로서의 중국조선족의 진로에 대한 생각
변연문화체계로서의 중국조선족문화는 많은 자신의 長點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의 많은 短點도 갖고 있다. 양쪽에 문화에 발을 붙이고있기에 늘 자신의 문화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되며 방황을 하게 된다. 즉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문화는 도대체 어떤 문화여야 하는가? 어느 쪽 문화에 기울어져야 하는가? 이리하여 중국조선족문화의 이런 변연성은 아주 많은 가변성을 갖고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왕좌왕한다.
1960년대에 일었던 조선바람에 우리 중국동포들은 근 10만 이상이나 조선으로 도망쳤다.작년 년말에 발생했던 한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우리동포들의 국적포기운동은 모국문화에로의 일변도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조선족민족교육 취소론자들은 중국문화에로의 일변도의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그래서 몇 년전 김문학씨가 연변조선족들을 "바람에 불리는 갈대"라고 공격한 것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우리는 적어도 중국은 우리의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의 유일한 삶의 터전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점은 한반도가 통일되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중국에 사는 이상 완전히 자기의 민족문화를 포기하여야 하는가? 역시 아니다.
우리는 가급적이면 우리 민족문화를 견지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중국문화를 수용하여 계속 변연문화지역을 지켜야 하고 우리의 변연문화의 속성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삶에도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조선족사회는 한반도의 원문화와 중국문화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특수한 변연문화구역이고 한반도와 중국을 이어주는 문화전환계통이므로 한반도의 중국진출이나 중국에서의 한반도진출에도 다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나 중국에서도 다 중국 조선족사회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아무 쪽으로 보나 유리하다.
우리가 이러한 입지를 계속 갖추려고 한다면 반드시 자기의 뿌리를 잘 살려야 한다. 즉 자기의 민족문화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 마치도 연변의 사과배가 연변의 돌배나무를 그 母本으로 하였듯이 우리 중국조선족문화도 자기문화의 뿌리인 민족문화를 굳건히 지켜야 할 것이다.
연변은 사과배의 원산지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연길현 로투구의 한 조선족농민이 조선 함경남도 북청에서 배나무가지를 가져다가 당지의 野山에서 자라는 야생 돌배나무 세 그루에 접목을 했더니 그 해 겨울을 나니 한 그루가 죽고 두 그루가 살았다. 이 두 그루의 연변 사과배나무의 원조(遠祖)는 아직도 로투구에 있다. 이 두 그루의 배나무가지를 접목한 돌배나무가 연변 사과배나무의 단초를 열어놓았다고 한다.
접목법에서는 북청에서 가져온 배나무가지는 접수(接穗)라고 하고 로투구의 야생 돌배나무는 접본(接本)이라고 한다. 접목하는 구체적 방법은 나무의 종류에 따라서 좀씩 다르기는 하나 대부분 접본을 땅에서부터 조금 웃부분을 잘라내 버리고 그 끝을 세로 짜개고 목질부와 껍질 사이에 접수(接穗)를 꽂아 잘 밀착하도록 헝겊으로 꼭 잡아매고 흙을 발라두기도 한다.
사과배만이 아니라 다른 품종의 과일나무도 접목의 리치는 마찬가지이다. 세계 제일의 품질을 자랑하는 한국 사과인 후지도 그 뿌리는 야생종인 매조의 일종이라고 한다. 매조의 열매는 크기가 도토리보다도 보잘 것없는 나무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각국에서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였던 미국의 원예학자들이 접목을 통해 만들어 낸 피스(Peace)라는 유명한 장미꽃은 그 예술적인 색깔과 모양으로 세계 사람들을 감탄시켰다.1946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후 열렸던 제1차 유엔총회에 모인 각국 대표들은 모두 이 피스--평화라는 장미꽃을 가슴에 꽂았다고 한다. 이 피스의 접본은 찔레꽃나무뿌리였다.
연변의 사과배거나 한국의 후지 사과거나 미국의 피스 장미거나 간에 그 생명의 바탕이 되는 뿌리인 접본은 예외 없이 야생종이여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계시를 준다.
그것은 나무의 생명의 바탕은 례외 없이 그 나무의 뿌리인 까닭이다. 한 식물의 종(種)이 아무리 인간에 의해 변이를 많이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 원형은 자연상태의 야생으로부터 진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생물공학의 세기라고도 한다. 그래서 남들보다 앞서 생각하고 있는 구미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세계 각지에 널려 있는 야생 식물들을 수집하고 보존하기 위한 전쟁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재부임을 보아냈기 때문이다.
생물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듯이 문화의 줄기나 잎보다도 뿌리가 중요하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한 민족이나 나라의 문화에서의 핵심이요, 뿌리는 물질문화가 아닌 정신문화이다. 물질의 풍요로움만 따르다가는 자칫하다가는 문화의 뿌리를 잃고 말수도 있다.
그러면 한 민족의 정신문화의 핵과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관념문화에 있고 그 관념문화를 담고 나르는 문자부호와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같은데 있다.
민족이나 나라가 아닌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첨단과학의 권위자라고 해도, 또 아무리 대단한 작가나 예술가라도 그가 영원한 인간이 되려면 그 정신의 접본은 제 민족의 정신문화와 그 역사에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재작년 『중국조선족문학작품정수』(한문판) 발행식에서 한 연변조선족 자치주 부주장 왕효동 씨의 연설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그가 연설 중에서 끌어낸 에피소드는 바로 이점을 증명하는 생동한 사례였다. 그 에피소드의 요(要)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참패를 당해 만신창이 되여 수많는 일본인들이 락망하고 우왕좌왕하고있을 때 한 일본의 철학가가 일본이 재기하려면 스모, 바둑, 가부끼를 잘 보존하고 지켜나가야 한다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이 삼자는 일본의 국수(國粹)요, 정신문화 상징이다.말하자면 일본문화의 뿌리인 셈이다. 이상에서 든 접목의 리치대로라면 접본인 셈이다. 이 접본을 잃지 말아야만 외래의 그 어떤 문화도 자국의 문화에 접목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 리치이다. 우리 중국조선족문화도 접본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 중국조선족문화의 접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말과 글 , 그리고 우리의 말과 글을 그릇으로 삼아 담아내는 우리의 문학과 예술 같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연길시 하룡촌에 가면 마을 동쪽의 펑퍼짐한 언덕에 세 그루의 아름드리 큰 소나무가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다. 사람들은 그 우람한 나무의 줄기와 가지만 바라보고 모두 감탄한다.그러나 그 나무가 왜 그처럼 거목으로 자랐는지 그 까닭을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 나무가 수백년에 걸쳐서 그처럼 크게 자란 것은, 보이지 않는 그 나무의 뿌리가 땅속에서 그처럼 나무를 키워온 까닭이다.
어떤 나무를 막론하고 그 나무의 크기는 결국 땅속에 뻗어 있는 그 나무의 뿌리에 정비례하는 것이다. 또 나무가 말라 죽고있는 까닭은 그 나무의 뿌리가 땅속에서 말라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공동체로서의 민족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민족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자기 문화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마치도 나무에 뿌리가 있고 강에는 근원이 있는 것처럼 현실적으로 생기발랄하고 무성하게 자라나는 민족은 그 문화의 뿌리가 왕성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며 현실적으로 쇠락해 가는 민족은 그 문화의 뿌리가 말라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조선족이 자기의 선명한 개성을 지니고 중국의 56개 민족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민족문화의 뿌리가 깊고 튼튼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작은 민족이 큰 민족에게 동화되어야 하는 시기거나 세계가 하나의 민족으로 되여야 하는 대동세계가 아니라 민족문화가 개화 발전해야 하는 시기이다. 즉 세계 각 민족 문화의 다원공존의 시기이다. 하기에 중국조선족은 앞으로도 자기의 땅속 깊이 내린 민족문화의 뿌리를 통해 부단히 자양분을 섭취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본인은 「한치 보기들의 난동」, 「네가 연변을 떠나지 않는 이유」등에서 밝힌바 있다.물론 우리는 소수민족이니 우리의 이런 생각을 중국 주체 민족이 존중해주는가 안 주는가 하는 것 역시 우리 중국조선족이 자신의 변연문화의 특성을 살려나갈 수 있는가 없는가하는 아주 중요한 변수로 작용함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우리의 의도에 의해 전이되는 일이 아니니 오늘은 약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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